뒷꿈치 책읽기

 


  키가 아직 작은 첫째 아이는 작은 걸상 받치고 올라선다. 처음에는 작은 걸상 하나만 받치더니, 이제 작은 걸상 둘을 알맞게 세워 받치고 올라선다. 꽤 높은 자리에 놓은 것을 제 마음대로 집어서 갖고 논다. 아이 손 안 닿는 데에 올려놓는다 했더니, 아이는 높은 데로 손을 뻗는 길을 스스로 찾는다. 높은 데 두건 낮은 데 두건 언제나 마찬가지가 되는구나. 네 몸도 네 마음도 네 생각도 차근차근 아끼고 사랑해 주렴. 씩씩하고 즐겁게 하루하루 누리면서 잘 자라려무나. (4345.5.28.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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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놓치다 애지시선 6
손세실리아 지음 / 애지 / 201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이 샘솟는 자리
[시를 노래하는 시 17] 손세실리아, 《기차를 놓치다》

 


- 책이름 : 기차를 놓치다
- 글 : 손세실리아
- 펴낸곳 : 애지 (2006.2.13.)
- 책값 : 8000원

 


  도시에 공부방이 있어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는 쉼터 구실을 합니다. 도시 공부방은 곧잘 동네 아주머니나 할머니한테 한글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시골 군청이나 면사무소에서는 마을 어르신들을 가르치는 배움마당을 열기도 합니다. 올해에는 고흥군에 두루 ‘유기농 농사짓기’를 퍼뜨린다며, 광주에 있는 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하는 분이 ‘유기농 농사짓기 강의’를 하러 오기도 합니다.


  도시에서 살던 지난날을 돌이키고, 시골에서 사는 오늘날을 헤아립니다. 지난날 도시에서 동네 아줌마나 할머니한테서 무언가를 배우는 자리를 누군가 연 적 있었나 궁금합니다. 공부방이나 경로당은 있다지만, 문화회관이나 복지화관은 있다지만, 늘 ‘자격증·졸업장 많이 거머쥔’ 이들이 찾아와서 ‘자격증·졸업장 하나 없는’ 이들한테 지식과 정보를 한 가득 들려줄 뿐 아닌가 싶습니다. 시골에서도 마을 어르신한테 자꾸 무언가를 알려주거나 가르치겠다 할 뿐입니다.


.. 시인을 꿈꾸는 이여 / 그대가 방금 내게 들려준 말이 시다 / 한 줄의 첨삭도 필요 없는 온전한 시다 / 외지에 나가 칼질로 먹고 사는 장손을 위해 / 자갈밭 일구고 평생 물질하셨을 / 칠순 노모의 휘어진 허리가 시다 / 주방에 그릇그릇 담긴 어머니의 몸이 바로 시다 / 그것을 받아 적지 못하면 허당이다 / 시는 그대 안에 이미 와 있느니 / 밖에는 없느니 ..  (밥상에 올려진 시)


  나는 전남 고흥 시골마을 보금자리를 얻어 살고부터 ‘고흥과 얽힌 책’을 틈틈이 장만해서 읽습니다. 1980년대에 나온 관광책도 장만하고, 1970년대에 나온 교과서 보조교재도 장만합니다. 《한국의 발견, 전라남도 편》도 장만합니다. 이런 책도 읽고 저런 책도 살핍니다. 여러 갈래 온갖 책을 훑다가 문득 느낍니다. 고흥군청에서 내놓는 책이든, 고흥 바깥에서 펴내는 책이든, 어떠한 책이라 하더라도 고흥을 바라볼 때에는 ‘관광하러 드나들 만한’ 곳이 되느냐 하는 눈길입니다. ‘돈을 잘 버는’ 곳인가 아닌가를 따집니다.


  통계자료가 있는지 모릅니다만, 우리 식구 깃든 시골마을 할머니와 할아버지 ‘학력’이 어떠할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마을 할머니는 국민학교라도 다녀 보셨을까요. 마을 할아버지는 국민학교 다음으로 중학교를 다닐 수 있었을까요.


  시골마을 할머니 할아버지는 당신 딸아들을 대학교까지 보낼 뿐 아니라 대학원도 보냅니다.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란 딸아들은 도시에서 일자리를 얻어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등허리 구부정하게 일하지 않습니다. 도시로 떠나 살아가는 딸아들은 돈을 쏠쏠히 벌고 커다란 자가용을 굴립니다.


.. 어미가 앞장 서 갈퀴발로 터놓은 물의 길을 여남은 마리의 새끼들이 올망졸망 뒤쫓고 있습니다. 떼로 몰려다니며 수선스러워 보이지만 묵언정진 중인 수련 꽃잎에 생채기내는 일 없고 빽빽한 수풀 마구잡이로 헤집고 다니는 듯 보이지만 물풀의 줄기 한 가닥 다치는 법 없이 말짱한 것이 하늘에 길을 트고 국경을 넘나드는 철새들의 비행과 별반 다를 바 없었는데요 ..  (물오리 一家)


  시골마을 어르신들이 처음부터 풀약과 비료를 쓰며 흙을 일구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마흔 해나 쉰 해 앞서도 풀약과 비료를 써서 논밭을 일구었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예순 해나 일흔 해 앞서, 마을 어르신들이 당신 어버이한테서 흙일을 물려받을 무렵에도 당신 어버이는 풀약과 비료로 푸성귀와 곡식을 거두라 가르쳤을까 궁금합니다.


  할머니들은 호미질을 빼어나게 잘 합니다. 할아버지들은 낫질을 훌륭하게 잘 합니다. 할머니들은 풀을 잘 압니다. 할아버지들은 흙을 잘 압니다. 할머니들은 물을 잘 압니다. 할아버지들은 하늘을 잘 압니다.


  시골 할머니한테서 호미질을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도시사람은 없습니다. 시골 할아버지한테서 낫질을 배우겠다며 문화강의를 여는 지식인이나 관청 공무원은 없습니다.


  밭이랑을 만들거나 논둑을 다지는 솜씨를 배우러 시골로 찾아오려 하는 도시 젊은내기는 얼마나 될까요. 들풀을 익히거나 멧나물을 배우러 시골로 드나들려 하는 도시 지식인이나 학자는 얼마나 되려나요.


.. 이름 석 자는커녕 / 전화 다이얼도 돌릴 줄 모르는 어머니를 / 세상은 까막눈이라 한다 ..  (까막눈)


  모든 강의는 지식 강의에서 그칩니다. 모든 학교는 정보를 새로 만들어 쌓는 데에서 끝납니다. 사람들은 자꾸자꾸 자격증을 새로 만듭니다. 사람들은 나날이 졸업장을 더 따집니다.


  볍씨 한 알을 어떻게 갈무리해서 봄날 못자리에 심어 싹을 틔우는가를 모르더라도 밥을 맛나게 먹을 수 있습니다. 볏포기가 얼마나 푸르게 빛나며 개구리와 뱀과 새와 거미 들을 품에 안기에 단단하고 알찬 열매가 맺는가를 모르더라도 쌀을 얼마든지 장만할 수 있습니다.


  나라에서는 쌀농사 짓지 말라고 ‘직불제’라는 제도를 마련합니다. 나라에서는 쌀이야 이웃나라에서 사다 먹으면 된다며 ‘자유무역협정’이라는 제도를 맺습니다. 그런데, 쌀농사 짓지 말라면서, 쌀은 더 안 지어도 된다면서, 이 나라 정부는 갯벌을 메워 논을 만드는 일을 자꾸 벌입니다. 논을 만들어도 농사짓지 말고 묵히라는 정책을 세우면서, 정작 갯벌을 메워 논밭으로 바꾸겠다 외칩니다.


  곰곰이 따지면, 논밭으로 바꾸려 메우는 갯벌은 아니로구나 싶습니다. 처음에 내세우기로는 논밭으로 삼겠다는 허울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아파트나 공장을 지으려고 갯벌을 메웁니다. 조개도 낙지도 굴도 김도 몽땅 이웃나라에서 사다 먹으면 되니까, 조기도 게도 갈치도 오징어도 모조리 이웃나라에서 사다 먹으면 그만이니까, 갯벌을 없애고 바다를 더럽힙니다. 깨끗한 바닷가마다 발전소를 지어 바닷물을 망가뜨립니다. 깨끗한 바닷마을마다 공장을 세워 흙과 물을 더럽힙니다.


.. 미장갑차 무쇠바퀴에 뭉개져 / 네가 떠난 오욕의 이 영토에도 / 어김없이 첫눈은 내리고 / 철없는 소름은 / 베옷 밑에서 자꾸만 키가 자란다 … 이승에서 너 하나 지키지 못하고도 / 살아 밥을 먹고 말을 섞는 / 부끄러운 날이 살같이 지난다 // 잘 가거라 아가, 내 새끼야 ..  (베옷을 입다)


  대학교에서는 새끼꼬기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대학교에 ‘농업과학’을 가르치는 학과는 있다지만, 정작 똥오줌으로 거름을 내고 쓰레기를 안 빚는 오랜 흙일을 가르치는 학과는 없습니다. 볏짚으로 새끼를 꼴 뿐 아니라, 짚신을 삼거나 바구니 엮는 솜씨를 가르치는 교수는 없어요. ‘식품영양’을 가르치는 학과는 있다지만, 들풀이나 멧풀을 하나하나 캐거나 따거나 뜯거나 꺾어서 몸을 살찌우는 삶을 가르치는 학과는 없습니다. 메주를 쑤거나 두부를 빚거나 마늘을 말리거나 감알을 깎는 솜씨를 가르치는 교수는 없어요.


  그물을 꿰거나 베틀을 밟을 줄 아는 교수는 있을까요. 뽕잎을 따거나 뜨개질을 할 줄 아는 교수는 얼마나 될까요. 손으로 빨래하거나 아이를 사랑으로 돌보는 교수는 얼마나 될까요.


  생각해 보면, 새끼꼬기를 대학교에서 가르친다면, 시골마을 어르신들이 굳이 당신 딸아들을 대학교에 보내지 않습니다. 짚신삼기를 가르치며 대학 교수가 된다면, 시골마을 어르신들이 애써 당신 딸아들을 대학 교수가 되도록 뒷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학교에서 새끼꼬기를 가르치거나 배우지 않으니, 자유무역협정을 맺는 일이 벌어집니다. 초·중·고등학교 교사와 아이들이 들판과 멧자락에서 나물을 캐지 않으니, 온 나라 냇가에 시멘트를 발라 망가뜨리는 짓을 수십 조를 들여 저지릅니다.


  삶을 배우지 않기에 삶을 사랑하지 못해요. 삶을 가르치지 못하니 삶을 아끼지 않아요. 삶을 물려받지 않으니 삶을 좋아하지 못해요. 삶을 이야기하지 못하니 삶을 나누지 않아요.


.. 수렁 같은 허방에 큰절 올린다 / 떼 한 포기 옮겨 심는 마음으로 / 진혼시를 쓴다 ..  (고봉산 뼈무덤)


  시골을 떠난 아이들은 왜 자가용을 몰고 명절날 이녁 어버이를 찾아 뵐까요. 명절날 갖가지 선물보따리 들고 시골마을 찾아 돌아왔다가 금세 도시로 떠나는 일이란 무엇일까요. 시골마을 어버이한테는 무엇이 선물이 될 만한가요. 시골로 찾아와 도시로 돌아가는 아이들마다 자가용 짐칸에 바리바리 싣는 꾸러미는 무엇일까요.


  시골마을 어르신들은 도시로 떠난 아이들을 ‘밥을 먹여’ 살립니다. 도시로 떠난 아이들은 시골마을 어버이한테 ‘돈푼’ 쥐여 준다지만, 시골마을 어르신은 ‘돈푼’으로 맛나다는 먹을거리를 사다 먹지 않습니다. 늘 스스로 흙을 일구어 맛난 먹을거리를 얻습니다. 흙에서 얻은 돌과 나무와 짚으로 집을 손질하거나 고칩니다. 이제는 가게에서 옷을 사다 입는다지만, 옷가지 또한 모두 흙에서 얻었고, 흙으로 돌려보냈어요. 환경운동이니 재활용이니 하고 떠들 까닭이 없는 시골마을이에요. 생태이니 생명이니 하고 외칠 까닭이 없는 시골살이예요.


  스웨덴이나 덴마크나 네덜란드까지 찾아가서 ‘미래 대안’을 배울 수 있겠지요. 그러나, 바로 우리 어버이들 나고 자란 가까운 시골에서 ‘오늘 삶’을 사랑하며 껴안을 수 있어요. 쿠바나 핀란드나 캐나다에서 ‘유기농이나 친환경’을 배울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바로 우리 어버이들 나고 자란 가까운 시골에서 ‘푸른 삶’을 아끼며 어깨동무할 수 있어요.


  사랑이 삶이에요. 삶은 푸르게 빛나요. 꿈이 삶이에요. 삶은 맑게 빛나요.


.. 내 안의 오래된 상처도 / 푸르고 곱게 부식되어 / 다음 생엔 부디 / 이마 말간 꽃으로 환생하기를 / 삼가 합장 또 합장하며 ..  (저문 산에 꽃등 하나 내걸다)


  손세실리아 님 시집 《기차를 놓치다》(애지,2006)를 읽습니다. 기차를 놓쳤어요. 그래요. 기차를 놓쳤으니 기다려야겠네요. 또는, 걸어가야겠네요. 또는, 길을 떠나지 않고 내 작은 마을에서 작고 조용히 살아야겠네요.


  나는 늘 기차를 놓칩니다. 나는 늘 기차를 놓치고 내 작은 마을에 우두커니 섭니다.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인가 생각합니다. 누구와 사랑하는 사람인가 돌아봅니다.


  나는 늘 기차를 먼저 보냅니다. 나는 늘 기차를 먼저 보내고 천천히 걷습니다. 어디로 가고 싶은 사람인가 헤아립니다. 누구랑 어디로 나들이를 다닐 때에 즐거운 나날일까 곱씹습니다.


  싯말은 바로 내 가슴에서 샘솟습니다. 싯말은 곧 내 삶말입니다. 싱그러이 사랑하는 내 가슴이라면 싱그러이 사랑하는 싯말이 새롭게 태어납니다. 곱게 사랑하는 내 삶이라면 곱게 사랑하는 싯말로 내 살붙이와 이웃과 동무를 따숩게 어깨동무합니다.


  손세실리아 님은 사랑을 기다리며 삶을 한 올 두 올 엮으며 싯말 한 송이 자그맣게 피웁니다. (4345.5.28.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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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찍기
― 버스 뒷거울 사진찍기

 


  아이들과 읍내마실을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길입니다. 옆지기와 아이 하나씩 안고 헐레벌떡 오릅니다. 두 시간에 한 대 지나가는 버스를 겨우 잡아탑니다. 마침 자리가 둘 비어, 두 사람은 자리 하나씩 아이를 안고 앉습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무릎에 앉은 아이를 토닥이는데, 고단한 아이는 어느새 새근새근 잠듭니다. 흔들리는 버스에서 깨지 않도록 가슴을 새삼 토닥토닥 하며 건너편 두 사람을 바라봅니다.


  한참 달리던 버스에서 문득 운전사 뒷거울을 봅니다. 운전사가 버스 안쪽을 살피는 뒷거울에 두 사람 모습이 비칩니다. 어, 건너편에 앉은 우리 식구가 보이네. 내 무릎 아이가 깨지 않게끔 살살 사진기를 쥡니다. 목걸이처럼 목에 건 사진기를 슬그머니 한손으로 쥡니다. 왼손은 아이 머리를 받칩니다. 오른손으로 덜덜 떨며 사진기 단추를 누릅니다.


  퍽 어렵습니다. 운전사 뒷거울로 보이는 두 식구 모습이 어여쁘다 싶을 때에는 버스가 덜덜 떨려 사진기 단추를 누르기 힘들고, 누군가 내리는 사람 있어 버스가 멎을 때에는 두 식구 바깥을 내다 보며 고개가 저쪽으로 갑니다.


  몇 차례 흔들리거나 심심하다 싶은 사진을 찍고서 한 장쯤 얻습니다. 나는 이 한 장 얻으면서 좋습니다. 사진으로 드러나는 두 식구 모습이 그렇게까지 ‘대단히 돋보이’지 않으나 좋습니다. 우리들이 마실을 다니던 발자국 하나를 사진으로 곱게 갈무리할 수 있으니 좋습니다.


  자가용 없는 우리 살림이기에 늘 버스나 기차를 탑니다. 늘 버스나 기차를 타니, 네 식구는 언제나 서로 바라보고 서로 얘기합니다. 나는 자가용 손잡이를 붙잡을 일 없으니 으레 사진기 단추를 누를 수 있습니다.


  꼭 사진을 찍을 마음으로 자가용을 안 몰지는 않습니다만, 내가 자가용을 모는 어버이로 살아간다면, 사랑스러운 우리 살붙이들 고운 삶 한 자락 사진으로 담아내지 못하며 지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사진을 못 찍는 만큼 몸은 한결 느긋하게 더 멀리 나다니겠지요. 그저, 사진을 못 찍는다뿐 아이들 옷가지와 기저귀에 가방 묵직하게 땀흘리며 나들이할 일이 없겠지요.


  나는 자가용을 몰지 않기 때문에 아이 하나를 품에 안으며 사진기는 목에 걸 수 있습니다. 나는 자가용을 몰지 않는 만큼 짐 가득 실은 가방을 멘 채 땀 뻘뻘 흘리지만, 우리 아이들은 신나게 땅을 박차며 뛰놀고, 이렇게 뛰노는 모습을 언제라도 기쁘게 사진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우리 살붙이 삶자락을 사진책으로 묶어도 참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따로 사진책을 묶지 않더라도 언제나 새롭게 바라보며 사진을 찍을 수 있으니 즐겁다고 생각합니다. 무언가 적바림(기록)하는 사진은 아닙니다. 노상 서로 마주볼 수 있는 사진입니다. 조잘조잘 떠들듯 찰칵찰칵 찍습니다. 도란도란 어우러지듯 슬쩍슬쩍 찍습니다. (4345.5.28.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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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백 살 느티나무

 


  팔백 살하고 마흔 살을 더 먹었으리라 보이는 읍내 느티나무 앞에 선다. 느티나무 그늘은 아주 넓다. 백 사람쯤 자리 깔고 앉아도 모두 그늘을 넉넉히 즐길 만하다. 가지는 높고 나뭇잎은 우거진다. 줄기는 매우 두껍고 딱딱해 누군가 망치를 들어 못을 박으려 하면 못이 휘어지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손에 망치나 못을 들지 않고서, 그예 맨바닥 맨손인 채, 가만히 팔을 벌려 굵직한 나무줄기를 껴안으며 귀를 대면, 팔백 살하고 마흔 살을 더 먹었으리라 보이는 느티나무 콩닥콩닥 뛰는 숨소리를 들을 수 있다.


  다섯 살 아이가 느티나무를 타고 오른다. 두 살 아이가 느티나무 앞에서 흙을 쓰다듬으며 논다. 느티나무는 수많은 아이들을 보며 살았고, 앞으로도 수많은 아이들이 이 곁을 스치고 지나갈 테지. 느티나무는 사람들이 짓다가 허무는 온갖 집과 다리와 학교를 바라볼 테고, 느티나무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피비린내 싸움과 다툼을 고스란히 지켜볼 테지.


  누군가 느티나무 가지를 자르겠지. 누군가 느티나무 잎사귀를 따겠지. 누군가 느티나무를 사랑하겠지. 누군가 느티나무 곁에서 흙을 일구며 날마다 흐뭇하게 웃는 나날 누리겠지. (4345.5.28.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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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설’과 ‘말하기’와 ‘떠벌리기’
[말사랑·글꽃·삶빛 10] 내 말은 내 사랑이다

 


  생각을 가만히 기울이면서 말할 때에 내 말투는 씩씩하게 섭니다. 마음을 따스히 쓰면서 말할 때에 내 말마디는 어여삐 빛납니다. 사랑을 알뜰히 들이면서 말할 때에 내 말결은 보드라이 샘솟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가장 좋아하는 말을 합니다. 따로 ‘표준말’을 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가장 사랑하는 글을 씁니다. 따로 ‘맞춤법’에 걸맞게 글을 쓰지 않습니다. 내 생각을 씩씩하게 다스릴 말을 합니다. 내 마음을 따스하게 북돋울 글을 씁니다. 내 사랑을 보드라이 보듬을 이야기를 나눕니다.


  흔히들 ‘바른 말 고운 말’을 이야기합니다. 말을 바르게 써야 한다 말하고, 글은 곱게 써야 한다 얘기합니다. 나는 이 같은 목소리가 틀리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바른 말 고운 말’은 가없이 마땅하다고 느낍니다. 다만, 어떤 바른 말이고, 어떻게 고운 말인가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국립국어원에서 들려주는 표준말이 바른 말이라 할 만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말글학자가 얘기하는 맞춤법이 고운 말이라 할 만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바르다’와 ‘곱다’를 밝히자면 무엇보다 바른 삶과 고운 삶을 밝혀야지 싶어요. 바른 넋과 고운 넋을 나란히 밝혀야지 싶어요. 바른 꿈과 고운 사랑을 함께 밝혀야지 싶어요.


  사람들한테 어떤 ‘말 지식’을 얘기한대서 바르게 쓸 말이 서지는 않는다고 느낍니다. 사람들한테 어떤 ‘말 정보’를 알려준대서 곱게 쓸 말이 퍼지지는 않는다고 느낍니다.


  삶을 바르게 볼 줄 모르면서 말을 바르게 볼 수 있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착한 일을 즐기지 못하거나 고운 나날 누리지 못하면서 말만 곱게 꾸밀 수 있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말’이란, 내 삶을 드러내는 얼굴이라고 느낍니다. ‘글’이란, 내 사랑을 적바림하는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사람들 스스로 어디에서 어떤 삶을 누리는가를 톺아볼 수 있어야 사람들 스스로 어디에서 어떤 말을 익히며 나누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 스스로 어떤 일을 어떤 넋으로 하는가를 깨달을 수 있어야 사람들 스스로 사랑어린 말과 믿음직한 글로 생각을 드러냅니다.


  일본사람 우오즈미 나오코 님이 쓴 청소년책 《원예반 소년들》(양철북,2012)을 읽다가 39쪽에서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하는 대목과 “어쨌거나 발설만 하지 않으면 된다 이거지?” 하는 대목을 봅니다. 44쪽에서는 “나가서 떠벌리지 않을까요?” 하는 대목을 봅니다. 세 가지 글월을 나란히 놓고 생각에 잠깁니다. 읽던 책은 내려놓고 한동안 생각에 빠집니다. 내가 열대여섯 살 푸름이였을 적, 나는 어떤 낱말과 말투로 내 넋을 가누었을까 하고 돌이킵니다. 내 열대여섯 살에는 누구한테서 듣거나 배운 말마디로 내 넋을 드러냈을까 하고 돌아봅니다. 내 열대여섯 살 말밭은 어떤 낱말로 이루어졌던가 하고 되돌아봅니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늘 주고받는 말마디가 내 말마디가 되었을까요. 동무들하고 주고받는 말마디가 내 말마디가 되었을까요. 교과서에 적힌 글줄과 교사들이 읊는 말소리가 내 말마디로 녹아들었을까요. 나는 어떤 말을 어떤 넋으로 어떤 사랑을 담아 나누던 푸름이였을까요.


  한자말 ‘발설(發說)’은 “입 밖으로 말을 냄”을 뜻한다 합니다. 나는 푸름이였을 적 이 한자말을 알았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발설’뿐 아니라 ‘입 밖에 내다’라든지 ‘벙긋하다’ 같은 말도 알았다고 느낍니다. 열대여섯 살 무렵, 나와 동무들이 주고받던 말마디를 하나씩 되새기며 적어 봅니다. 첫째, “너, 말하지 마.” 둘째, “너, 입도 벙긋하지 마.” 셋째, “너, 입 다물어.” 넷째, “너, 조용히 해.” 다섯째, “너, 일러바치지 마.” 여섯째, “너, 호박씨 까지 마.” 일곱째, “너, 주둥이 함부로 놀리지 마.”


  이밖에, 이무렵 나와 동무들이 알던 말로 ‘고자질(告者-)’이 있고, ‘발설(發說)’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말은 어른들이 으레 쓰기에 우리들도 더러 썼지, 우리 스스로 먼저 쓰지 않았습니다. 동무들이나 아이들끼리는 언제나 “너, 선생님한테 일렀지?”처럼 말했습니다. 이무렵 ‘말하다’와 ‘이르다’가 서로 어떻게 같거나 다른가를 알지 못했지만, 두 가지 말을 골고루 썼어요. ‘호박씨 까기’는 좀 다른 자리에 쓴다고 하지만, 내 어릴 적 동무들은 몰래 읊는 말도 호박씨를 깐다고 함께 얘기했어요. 뒤에서 주절거리는 말도 ‘호박씨 깐다’고 했어요. “너 어디서 호박씨 까고 다니냐?”처럼.


  더 뒤돌아보면, 이무렵 어른들은 우리한테 ‘이르다’가 어떤 뜻이거나 쓰임이거나 느낌인지 이야기해 주지 않았습니다. 초·중·고등학교를 거치는 열두 해 동안, 어느 국어 교사도 이 대목을 짚지 못했습니다.


  고등학생 때에는 때때로 ‘언쟁(言爭)’이나 ‘논쟁(論爭)’ 같은 말을 듣거나 썼습니다. 그런데, 이런 낱말을 쓰면서 어딘가 꺼림칙했어요. 나는 열 살에 천자문을 떼며 한자를 조금 익혔는데, 어른들이 쓰는 ‘언쟁’이나 ‘논쟁’이란, 말뜻을 풀면 한국말로 ‘말다툼’이나 ‘말싸움’이에요. 어느 자리에서는 ‘다툼’이라기보다 ‘나눔’이었어요. 서로 말을 나누는 자리인데, 언제나 버릇처럼 ‘논쟁’이라 하더군요. 삶 매무새 그대로 ‘말나눔’이나 ‘이야기나눔’ 같은 낱말을 즐겁게 빚을 만하지만, 어른들은 이렇게 새말을 빚어 즐겁게 쓰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어요.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합니다. 한국사람이니까요. 일본사람은 일본말을 합니다. 일본사람이니까요. 중국사람은 중국말을 할 테지요. 중국사람이니까요. 그러면, 한국사람이 주고받는 한국말은 어떤 한국말일까요. 한국사람이 쓰는 한국말은 한국말답다 할 만할까요.


  한자말 ‘발설’은 한국사람이 쓸 만한 한국말로 여겨도 될까요. 이 낱말을 ‘한국말사전’에 싣거나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싣거나 청소년책에 넣어도 괜찮을까요.


  어른 나이로 살아가는 이 나라 사람들은 푸름이 나이로 살아가는 이 나라 사람들 앞에서 어떤 말을 쓰는가요. 어떤 마음으로 어떤 말을 쓰나요. 어떤 사랑으로 어떤 글을 짓나요. (4345.5.28.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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