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밭에 물 주는 어린이

 


  치마 예쁘게 입고 뒷밭으로 와서 물을 준다. 우리 아이처럼 고운 옷을 스스로 갖춰 입은 다음 밭뙈기에 나오는 넋이 있을까. 아무렴 있으리라. 손바닥만큼 작은 뒷밭이지만, 아이한테는 좋은 보금자리로 스며들 수 있기를 빈다. (4345.5.3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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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밭에 떨어진 감꽃

 


  뒷밭에서 한창 물을 주다가, 고랑에 떨어진 감꽃을 본다. 뒷밭 옆 풀밭 사이에 떨어진 감꽃도 본다. 꽤 높은 감나무를 올려다본다. 감꽃이 어느 만큼 있는가 살핀다. 좀 나즈막한 가지에는 감꽃이 얼마 안 보인다. 퍽 높다 싶은 가지에 감꽃이 이럭저럭 맺혔다. 사다리를 대고 올라가야 올가을에 감을 따겠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우리 집 뒤꼍 감나무는 풀밭 한복판에 있기에 꽃망울 톡톡 떨굴 때에도 이렇게 풀숲에 떨어져 풀숲으로 스며드는구나 싶다. 우리 식구들 인천에 살던 무렵, 조그마한 흙틈에 심어 수십 해를 자란 감나무들은 감꽃을 떨굴 때에 으레 시멘트 바닥이나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뜨려야 했다. 시골에서 떨어지는 감꽃은 흙땅에 닿기 앞서 포근한 풀잎에 내려앉는다. 풀잎 사이에서 쉬다가 봄비를 맞으면 천천히 흙땅으로 내려와 가만히 흙 품에 안기다가는, 시나브로 새 흙으로 거듭나겠지. (4345.5.3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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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을 주는 마음

 


  아버지가 뒷밭에 물을 주러 가는 줄 첫째 아이가 금세 알아챈다. 따로 아이를 부르지 않아도, 아이 스스로 조용조용 따라온다. 큰 스텐통에 물을 받아 작은 바가지에 물을 담아 감자줄기나 토마토줄기 밑둥에 대고 천천히 물을 붓는다. 첫째 아이는 큰 스텐통에 담긴 조그마한 물바가지를 들고 조그마한 손으로 조금씩 조금씩 물을 붓는다.


  아이를 불러 함께 물을 줄 때에도 즐겁다고 느끼지만, 아이를 따로 부르지 않을 때에 아이가 스스로 따라와서 물을 줄 때에도 즐겁다고 느낀다. 이제 나는 조용히 물을 떠서 조용히 물을 들고 조용히 뒷밭으로 간다. 한창 물을 주면서 언제쯤 아이가 뒷밭으로 따라올까 하고 가늠한다. (4345.5.3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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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두번째 사진책 - 프레임 구성의 달인 되기
곽윤섭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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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재주 바라는 사진이란
 [찾아 읽는 사진책 102] 곽윤섭, 《나의 두 번째 사진책》(한겨레출판,2007)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아름답게 일구는 삶을 즐겁게 사진으로 담을 때에 활짝 웃습니다. 나는 다른 어느 대목도 더 살피지 않습니다. 내가 사진으로 담고 싶은 모습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인가를 살피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름답게 일구는 삶’인가를 살피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름답게 일구는 삶을 즐겁게 바라보며 한마음이 되느’냐를 살펴요. 그래서, 곽윤섭 님이 빚은 《나의 두 번째 사진책》(한겨레출판,2007)을 읽으면서, “사진을 찍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지금 무엇을 찍으려고 하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 보는 것이다(22쪽).”라 나온 대목에 밑줄을 긋습니다. 사진기를 든 내가 바로 이 자리에서 무엇을 찍으려 하는가만큼 내가 생각하거나 마음을 기울일 대목은 더 없어요.


  “중요한 것은 배경을 보는 눈이 있어야 더 좋은 사진을 위해 기다릴 줄 알게 된다는 것이다(34쪽).” 같은 대목에도 밑줄을 긋습니다. 그렇지만, 그닥 내키지 않습니다. ‘뒤를 볼’ 수 있대서 ‘앞도 잘 보지’는 않거든요. 나는 ‘더 잘 찍을 사진을 바라며 기다리기’를 하지도 않아요. 기다리는 사진이 아니라, 그때그때 즐겁게 찍는 사진일 뿐이에요. 어떤 ‘그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사진이 아니라, ‘스스로 누리는 좋은 삶을 좋아하는 사진으로 담을’ 뿐이에요.


  그래서 “나는 실수하거나 실패한 사진은 결과물로 내놓지 않기 때문에 내 사진을 보는 사람들은 나의 실패를 모른다(41쪽).” 같은 대목을 읽다가 고개를 갸웃갸웃거리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곽윤섭 님 사진에서 ‘실패하거나 잘못한 대목’을 못 알아챌까요? 빈틈이 없거나 초점이 잘 맞거나 틀이 새롭다 하더라도 ‘즐겁게 읽을 사진이 되지’는 않아요. 곽윤섭 님으로서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실패한 사진이 아니라’고 여기더라도, 이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들로서는 ‘가슴이 뭉클’하지 않을 수 있으니, 이때에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곽윤섭 님만 모르는 ‘아쉽거나 아픈 대목’이라 할 만하지 않을까요.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생각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한테는 사진을 찍는 기계가 무엇이냐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1회용 사진기라도 좋고, 1000만 원짜리 사진기라도 좋습니다. “사진의 내용 그 자체가 중요할 뿐, 어떤 명칭으로 사진의 종류를 규정하진 못한다(89쪽).”는 대목처럼, 스스로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찍은 사진이면 좋습니다. 다큐사진이라서 더 좋거나 패션사진이라서 더 예쁘지 않아요. 스스로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담을 때에 나한테 좋고 나한테 예쁜 사진이 돼요. 곧,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 이름난 출사지를 찾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201쪽).”라 말할 만합니다. 스스로 좋아할 만한 사진을 찍자면, 스스로 좋아할 만한 곳에서 일하고 놀고 어울리고 살아가면 돼요.


  그나저나, 즐겁게 읽고 싶은 사진책이기에 즐겁게 장만해서 읽으려 하지만, 《나의 두 번째 사진책》을 읽으면서 자꾸자꾸 고개를 갸우뚱갸우뚱 하고 맙니다. 사진찍기는 손재주 놀이가 아니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진찍기는 삶찍기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찍는 나는 ‘더 그럴듯해 보이는 그림’이 아닌 ‘내가 좋아할 뿐 아니라 사랑하는 삶’을 찍는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하지만, 모든 사진가들은 본능적으로 전에 못 보던 것을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새로움을 찾는 것은 사진가의 의무다. 그러기 위해선 좋은 사진책을 많이 접하고 뉴스사진도 찾아보면서 사진 보는 눈을 녹슬지 않게 해야 한다. 새로워야 살아남는 뉴스사진에는 신선한 시각이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196쪽).” 같은 대목이 못마땅합니다. 다른 사진쟁이는 어떻게 살아가는지 모르지만, 사진을 찍는 사람이 왜 “본능적으로 전에 못 보던 것을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예전에 본 모습을 찾으면 안 되나요? 늘 바라보는 모습을 늘 찍으면 안 되나요? 사진은 왜 ‘새 모습 찍기’가 되어야 할까요? 더구나, ‘좋은 사진책’을 많이 읽는대서 ‘새 모습을 보는 눈을 기른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게다가, 신문이나 잡지 ‘뉴스사진’을 읽으며 ‘새 눈길’을 느낄 수 있다고 느끼기 힘들어요. 신문이나 잡지에 싣는 뉴스사진은 ‘새 눈길’이라기보다 ‘신문이나 잡지를 사서 읽을 사람들 눈을 확 사로잡으려 하는 사진’이라 할 만하니까요.


  “새로워야 살아남는”다는 뉴스사진이라 한다면, 이 같은 사진을 읽는 사진쟁이는 ‘살아남으려는 사진’을 읽을 뿐, ‘사랑하려는 사진’을 읽지 못합니다.

 

 

 

 

 


  나는 사랑하려는 사진을 읽고 싶습니다. 나는 사랑하려고 사진을 찍고, 사랑하려고 사진을 나누며, 사랑하려는 삶이 좋아 사진을 찍어요.


  곽윤섭 님은 《나의 첫 번째 사진책》에 이어 《나의 두 번째 사진책》을 내놓습니다만, 사진책이란 무엇일까요. 사진 찍는 솜씨나 손놀림을 밝히는 줄거리를 담으면 사진책이 될까요.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넋으로 사진을 찍으니까, 어느 책은 사진솜씨나 사진재주를 말할 수 있겠지요. 사진강의를 하면서 사진기를 잘 다루도록 이끌는지 모르지요.


  그러나, 곽윤섭 님은 사진강의를 하거나 사진책을 내면서 ‘이론을 내세우지 않겠다’는 뜻을 밝힙니다.


  다시금 생각합니다. 사진이론이란 무엇일까요. “빗자루가 조금이라도 보였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러나 이대로도 충분히 좋은 사진이다(123쪽).” 하는 말마디 또한 사진이론 아닐까요. 사람들 스스로 좋아할 만한 사진을 찾도록 돕는 말마디가 아니라, 기계를 잘 다루면서 ‘잘 찍은’을 말하려 하지 않았을까요?


  “초점이 맞지 않은 사진은 아무리 좋은 내용을 담았다 해도 먼저 제외시킨다. 의도적으로 초점이 맞지 않게 찍었다면 별개의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무조건 초점은 맞아야 한다(42쪽).” 같은 대목에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야 맙니다. 이 말마디는 곽윤섭 님 스스로 밝힌 “사진의 내용 그 자체가 중요할 뿐, 어떤 명칭으로 사진의 종류를 규정하진 못한다.” 같은 대목하고 아주 어긋납니다. 사진으로 담는 이야기가 대수롭다면, 초점이 맞거나 맞지 않거나 대수롭지 않습니다. 사진으로 담는 이야기를 먼저 살펴야지, 초점이 맞느냐 맞지 않느냐를 살필 수 없어요.

 

 

 

 


  삶을 사랑하며 사진을 찍을 때에는, 2012년 5월 31일 낮 12시 12분에 내 사랑스러운 아이들 담는 사진은 바로 이때에 꼭 한 번입니다. 6월 1일에도 7월 1일에도 다시 찍지 못합니다. 그러나, 상업사진을 찍는다면, 모델더러 ‘내가 마음속으로 그린 모습’을 보여주도록 수없이 바랄 수 있고, 끝없이 다시 찍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상업사진은 ‘사람들한테서 어떤 느낌을 끌어내도록 만드는 사진’이기 때문에, ‘따로 모델을 써서 그림을 만들어야’ 하거든요.


  곽윤섭 님은 어떤 넋으로 사진강의를 열고 사진책을 내는가 궁금합니다. ‘상업 사진작가’를 키우는 사진찍기를 하지는 않겠지요. 상업사진을 하자는 강의를 열지는 않았겠지요. 사람들 스스로 사진을 좋아하는 삶을 누리도록 이끌 테지요. 이른바 ‘생활사진가’를 북돋우는 사진강의를 마련해서 사진책까지 내는 곽윤섭 님이에요. 그러면, 곽윤섭 님은 “오른쪽에 앉아 있는 사람의 위치가 못내 아쉽다. 그늘과 겹치는 바람에 존재의 이유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조금 안쪽에 있었다면 밝은 바깥쪽을 배경으로 눈에 잘 들어왔을 것이다(24쪽).” 같은 말은 안 해야 옳으리라 느껴요. 이 사진을 찍은 분한테 ‘이 사진 찍으며 어떤 느낌이었나요?’ 하고 물어야 알맞으리라 느껴요. ‘이 사진 찍으며 마음이 흐뭇했나요?’ 하고 물어야지 싶어요. 아니, 이렇게 묻기 앞서, 곽윤섭 님 사진강의를 듣는 분이 찍은 사진을 바라볼 때에 ‘아, 이 사진을 찍은 이분은 어떤 마음이었구나.’ 하고 느끼면서 이 대목을 찬찬히 짚고 이야기밭을 꾸려야지 싶어요.

 

 

 

 


  《나의 두 번째 사진책》을 읽으며 슬픈 마음을 지우지 못합니다. 곽윤섭 님은 자꾸자꾸 ‘사진이론 내세우기’로 치우치기 때문입니다. “인물의 위치는 아주 좋다. 표정도 좋아서 재미있는 사진이 되었다. 그러나 왼쪽의 선이 깔끔하지 못하여 전체 완성도를 높이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17쪽).”라든지 “누군가 좋다고 했던 사진은 잘 기억하고 있으므로 다시 찍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거듭되면 자신만의 세계에 갇힐 확률이 높다. 나쁜 사진은 안 찍고 좋은(혹은 남들이 좋다고 하는) 사진만 찍으므로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6쪽).” 같은 말마디는 너무 부질없습니다. 사진을 찍으면서 왜 ‘전체 완성도’를 살펴야 할까요. ‘전체 완성도’란 무엇일까요. 또 ‘나쁜 사진’이나 ‘좋은 사진’은 무엇인가요.


  이리 살피고 저리 돌아봅니다. 사진역사는 덧없습니다. 사진문화는 뜻없습니다. 사진예술은 값없습니다. 사진은 사진이지, 역사도 문화도 예술도 아닙니다. 사진은 그예 사진이면서 삶입니다. 삶은 삶이기에, 삶을 누리면서 사진 하나 나란히 곁에 두고 즐깁니다. 사진은 사진인 까닭에 사진을 사진으로 바라보면서 내 삶을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삶이 고스란히 사진입니다. 살아가는 꿈이 하나하나 사진입니다.


  손재주 바라는 사진이란 손재주일 뿐, 사진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못합니다. 사진은 사진이기에 손재주라고 가리킬 수 없습니다. 《나의 두 번째 사진책》에서 말하는 사진이란, 어느 모로 보더라도 ‘사진’이라고 못 느끼겠습니다. 이 사진책에 나오는 사진은 온통 ‘손재주’로구나 싶습니다. 곽윤섭 님은 사진강좌를 열며 사진을 이야기한다고 밝히지만, 슬프게도 사람들한테 ‘사진사랑’이 아닌 ‘사진이론’에 빠지도록 내몰고, ‘사진삶’이 아닌 ‘사진재주’로 흐르도록 이끄는구나 싶어요.


  들에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면 좋겠어요. 서울을 벗어나 시골 어디로든 찾아가, 자동차 불빛도 아파트 불빛도 없는 무논 앞에서 개구리 노랫소리 흐드러지게 들으면 좋겠어요. 삶을 먼저 생각하면 좋겠어요. 사랑을 먼저 느끼면 좋겠어요. 셔터값이나 조리개값이 부질없듯, 사진장비 값이나 사진경력은 부질없어요. 사진구도나 사진소재가 부질없듯, 사진이론이나 사진강의는 모두 부질없어요. 뜻있는 삶을 느낄 때에 뜻있는 사진을 이루어요. 멋있는 삶을 누릴 때에 멋있는 사진을 누려요. 해맑게 빛나는 웃음으로 하루하루 가꿀 때에, 해맑게 빛나는 손짓으로 한 장 두 장 사진을 빚어요. (4345.5.31.나무.ㅎㄲㅅㄱ)

 


― 나의 두 번째 사진책 (곽윤섭 글·엮음,한겨레출판 펴냄,2007.3.15./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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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마, 꽃들아 - 최병관 선생님이 들려주는 DMZ 이야기
최병관 글.사진 / 보림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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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무장지대에서 꽃을 바라본다
어린이가 읽는 사진책 14 : 최병관, 《울지 마, 꽃들아》(보림,2009)

 


  봄이 한창 해맑은 오월에, 전라남도 고흥에서 햇마늘이 나왔습니다. 마을 어르신들은 바지런히 마늘을 캐고 엮어 실어 나릅니다. 마을에는 온통 할머니와 할아버지뿐이라, 늙은 어르신끼리 서로 품앗이를 하거나 혼자 밭뙈기에 주저앉아서 천천히 캐고 천천히 엮습니다. 경운기나 짐차에 실을 때에도 당신들 몸에 맞추어 천천히 싣습니다.


  샛장수가 시골마을로 찾아와 마늘을 사들이지 않습니다. 농협 일꾼이 시골마을을 돌며 마늘을 사들이지 않습니다. 샛장수이든 농협 일꾼이든 늘 ‘늙은 흙일꾼’이 ‘모든 일을 빠짐없이 끝마치고 갖다 주기’까지 해야, 가지고 온 마늘을 살피며 등급을 매깁니다.


  샛장수와 농협 일꾼은 가만히 앉아서 ‘흙일꾼이 흙에서 거두는 곡식이나 열매를 내다 팔아 얻는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입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도시에 있는 일터에서 돈을 벌어 곡식이나 열매를 사다 먹습니다. 이웃집 마늘밭 일을 조금 거들며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시골 어르신들이 도시 젊은이들한테 곧바로 마늘을 내다 팔 수 있으면 샛장수나 농협 일꾼한테보다 값을 제대로 받을 수 있겠지요. 도시 젊은이들이 시골 어르신들한테서 곧바로 마늘을 장만할 수 있으면 가게나 마트에서 장만할 때보다 한결 싸게 장만할 수 있겠지요.


  마늘은 꽃을 피우지 못하고 뽑힙니다. 마늘이 마늘꽃을 피우면 마늘은 아마 ‘상품’으로 값어치가 없으리라 봅니다. 양파도 파도 이와 매한가지예요. 양파는 양파꽃을 피우고 파는 파꽃을 피우지만, 내다 파는 상품이 되자면, 마늘도 양파도 파도 꽃을 피울 수 없습니다. 배추도 무도 당근도 온통 꽃을 피울 수 없어요.

 

 


  450일 동안 비무장지대를 세 차례 가로질렀다고 하는 최병관 님이 찍은 사진을 어린이 눈높이에 맞추어 엮은 사진책 《울지 마, 꽃들아》(보림,2009)를 읽습니다. 남녘에서든 북녘에서든 비무장지대라 하는 무쇠가시울타리는 ‘아픈’ 전쟁, ‘슬픈’ 전쟁, ‘괴로운’ 전쟁, ‘나쁜’ 전쟁을 잘 보여줍니다. 서로를 사랑하지 않고 서로한테 총부리를 들이대며 언제 무슨 일이 터지면 곧바로 총알이며 미사일이며 폭탄이며 들이부으려고 하는 ‘비무장 아닌 비무장’지대 무쇠가시울타리는 바보스럽고 어리석은 어른들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남녘과 북녘은 서로 ‘비무장지대’라는 이름으로 군인이나 무기를 안 두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렇지만, 바로 이 ‘비무장지대’에는 남녘이든 북녘이든 온갖 무기를 갖춘 군인이 잔뜩 있습니다. 인구통계로 잡히지 않을 뿐이나, 남녘도 북녘도 수십만에 이르는 젊은 사내가 군인옷을 입고 총을 든 채 서로를 잡아먹으려고 노려봅니다.


  여느 사람들은 비무장지대가 어떠한 곳인지 잘 모릅니다. 최병관 님은 자그마치 450일씩이나 비무장지대 안팎을 넘나들며 한겨레 아픈 생채기를 들여다보았다고 하나, 이렇게 기나긴 나날 촘촘히 넘나든다 하더라도 볼 수 없으며 담을 수 없는데다가 보여줄 수 없는 모습이 매우 많아요. 이를테면, 남녘이든 북녘이든 비무장지대에 어떠한 무기를 얼마나 갖추어 서로를 노리는가 하는 대목을 사진으로 찍지 못합니다. 글로 쓰지 못합니다. 이야기로 풀어내지 못합니다.

 


  그래도, 이 나라 아이들은 이 사진책 《울지 마, 꽃들아》를 넘기면서 전쟁보다 평화를 생각할 만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앞으로 사랑하고 가꾸며 지킬 만한 평화란 무엇인가 하고 돌아볼 만합니다.


  구태여 ‘비무장지대에 가득한 전쟁무기’를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지요. 굳이 ‘비무장지대 지뢰밭에서 지뢰를 밟고 다리가 잘린 사람들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지요. 지뢰를 밟고 다리가 잘린 노루를 찾아내어 사진을 찍어 보여주어야 하지는 않아요. 군인들이 내다 버리는 짬밥을 주워먹는 독수리를 사진으로 찍어 보여줄 까닭은 없어요.


  전쟁이란 무엇일까요. 전쟁이 일어나면 누가 죽을까요. 전쟁은 왜 일으킬까요. 왜 서로 무기를 내려놓지 않을까요. 왜 서로서로 치고박으면서 ‘사랑스러운 목숨’이 꽃피우지 못한 채 죽도록 내몰까요. 전쟁을 북돋우거나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전쟁에서 이긴다 하는 일이란 무엇이고, 전쟁에서 진다 할 때에는 어떻게 될까요. 삶이란 무엇이고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남북녘 수십만 젊은이는 왜 비무장지대에서 한창 푸른 삶을 군화발과 총칼로 지새워야 할까요.

 


  최병관 님 사진책 《울지 마, 꽃들아》는 무쇠가시울타리 밑에서도 곱게 꽃을 피우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들꽃이나 멧꽃은 무쇠가시울타리가 있든 지뢰가 있든 불발탄이 있든 무명용사 무덤이 있든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어디에나 뿌리를 내리고 어디에나 꽃씨를 퍼뜨립니다. 어디에서나 줄기를 올리고 어디에서나 열매를 맺어요.


  사람 손길이 안 닿는 데에서 숲은 조용히 살아납니다. 사람 발길이 안 닿는 곳에서 숲은 천천히 살아납니다. 사진책 《울지 마, 꽃들아》를 넘기면, 겹겹이 이어지는 높다란 멧줄기가 아름답다 싶은 사진이 가득합니다. 눈이 소복히 내려앉은 숲이고, 꽃과 풀이 흐드러진 숲이에요. 참말 이곳에서는 ‘꽃들이 울며 지새우지’는 않으리라 느껴요. 누군가 운다면, 아마 남녘땅 앳된 스무 살 군인이 울겠지요. 누군가 운다면, 아마 북녘땅 늙수그레한 마흔 살 쉰 살 군인이 울 테지요. 남녘 정부나 정치꾼은 ‘북으로 보낸 쌀’을 북녘 주민 아닌 북녘 군인이 먹는다며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런데, 북녘에서도 남녘에서도 ‘군대로 끌려가서 군인이 된 사람’이란 여느 사람, 곧 ‘주민’이에요. 지난날 남녘에서는 집에서 굶지 않으려고 하사관(직업군인)으로 들어간 사람이 꽤 많았어요. 오늘날 북녘에서는 집에서 굶지 않으려고 직업군인이 되려는 사람이 꽤 많으리라 느껴요. 군인이 되어 배를 곪지 않을 수 있다면, 또 직업군인으로서 달삯을 이럭저럭 받아 이녁 어버이나 살붙이한테 보낼 수 있다면, 북녘에서는 너나없이 젊고 푸른 넋들이 군인이 되려고 하리라 느껴요.


  그나저나, 남녘도 북녘도 전쟁무기를 만들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굶지 않습니다. 남녘도 북녘도 전쟁무기를 만들지 않으면, 초·중·고등학교뿐 아니라 대학교도 따로 배움삯을 들이지 않아도 될 뿐 아니라, 입시지옥은 사라지고 끔찍한 경쟁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남녘도 북녘도 전쟁무기를 만들지 않으면, 끝없이 경제개발에 목을 매달지 않아도 돼요. 서로서로 전쟁무기를 만들지 않으면, 남녘에서는 4대강사업이든 무슨무슨 토목사업이든 벌일 까닭이 없습니다. 전쟁무기를 자꾸 만들 뿐 아니라, 한결같이 건사하려 하니까 곳곳에 새롭게 군부대를 만들려 해요. 전쟁무기를 자꾸 만들기 때문에 전기가 모자라 발전소를 또 짓고 새로 지어요.

 

 


  참말 사람들이 웁니다. 꽃은, 풀은, 나무는, 새는, 노루는, 기러기는, 냇물은, 하늘은, 구름은, 무지개는, 빗방울은 울지 않습니다. 참으로 사람들이 웁니다. 남녘땅 사람들이 울고 북녘땅 사람들이 웁니다.


  전쟁은 북녘사람이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전쟁통에 사람을 죽인 짓은 북녘사람도 남녘사람도 똑같이 저질렀습니다. 전쟁은 ‘북녘’이 아니라 ‘정치꾼’이 일으켰고, 정치꾼 뒤에서 입김을 불어넣는 또다른 ‘검은 돈꾼’이 일으킵니다. 지구별에 평화 아닌 전쟁이 자꾸 터지는 까닭은, 사랑 어린 삶보다 돈을 홀로 거머쥐려는 ‘검은 돈꾼’이 있기 때문이에요.


  최병관 님이 아이들한테 보여주려고 엮은 사진책 《울지 마, 꽃들아》는 그지없이 예쁩니다. 군인들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 사진은 그지없이 예쁩니다. 군인들 모습이 나타나는 사진은 참 밉상스럽습니다. 편지 한 장 손에 쥐고 잠든 앳된 군인 모습 또한 그리 사랑스럽지 않습니다. 슬픈 얼굴입니다. 총칼을 들고 누군가를 적으로 삼아 ‘널 죽이겠어!’ 하는 생각에 길들어야 한다면 너무 슬퍼요.

 

 


  그렇지만, 꽃은 무쇠가시울타리도 총칼도 아랑곳하지 않아요. 그저 피어요. 그저 고운 내음 퍼뜨려요. 그저 고운 잎사귀 선보여요. 그저 알찬 열매 베풀어요.


  꽃들은 기다립니다. 꽃들은 쉰 해가 되든 백 해가 되든 기다립니다. 꽃들은 꽃들을 꾸밈없이 바라보며 사랑할 사람들을 기다립니다. 꽃들은 울지 않습니다. 꽃들은 빙그레 웃으면서 기다립니다. 꽃들은 사람들 누구나 어여쁜 꽃웃음을 지으면서 아리땁게 꽃사랑을 나눌 날을 기다립니다. 이 땅 아이들이 비무장지대 지뢰밭 아닌 너른 숲 고운 꽃밭과 풀밭을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땅 아이들이 전쟁놀이나 총놀이나 칼놀이가 아니라 텃밭을 돌보고 흙땅에서 맨발로 뒹굴며 신나게 어깨동무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4345.5.31.나무.ㅎㄲㅅㄱ)

 


― 울지 마, 꽃들아 (최병관 글·사진,보림 펴냄,2009.5.1./12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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