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익숙하게 쓰는 영어
[말사랑·글꽃·삶빛 12] ‘깔개’와 ‘방석’과 ‘쿠션’

 


  이제 초등학교 아이들은 아주 스스럼없이 영어를 학교에서나 학원에서나 배울 뿐 아니라, 집에서도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으로 배웁니다.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들기 앞서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서도 영어를 배웁니다. 아이들은 한글 그림책과 나란히 영어 그림책을 읽기도 하지만, 한글 그림책에 앞서 영어 그림책을 읽기도 합니다.


  한글은 으레 쓰고 한국말은 누구나 하니까 아이들한테 따로 안 가르쳐도 될 만하다고 여기지 않나 싶도록, 한국 어른들은 한국 아이들한테 한글과 한국말을 옳고 바르며 예쁘고 상냥하며 즐겁고 슬기롭게 가르치는 일을 안 합니다. 그렇지만, 제대로 안 가르치면 제대로 배우지 못해요. 찬찬히 물려주지 않으면 찬찬히 물려받지 못해요. 사랑을 담아 알려주지 않으면 한국말을 사랑스레 쓰는 길을 깨닫지 못해요.


  시골집에서 살아가는 우리 집 아이는 날마다 바깥에서 뛰노느라 살결이 차츰 까맣게 탑니다. 그러니까, 우리 집 아이 살결은 햇볕에 ‘그을려’요. 햇볕에 타는 일은 ‘그을다-그을리다’요, 불에 태우는 일은 ‘그슬다-그슬리다’입니다. 우리 집 아이 말고, 이웃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놀러오는 아이들이라든지 면내나 읍내에서 마주하는 아이들을 만날 때면 문득문득 느끼는데, 이 아이들 가운데 한국말을 옳고 바르게 쓰는 아이는 매우 드뭅니다. 이를테면, ‘그을다’와 ‘그슬다’를 알맞게 가릴 줄 아는 아이가 없어요. 더 나아가, 이 낱말을 아예 모르기조차 합니다. 더 살피면, 아이들이 ‘그을다’과 ‘그슬다’를 모르기 앞서, 어른들부터 이 낱말을 모릅니다.


  어젯밤부터 빗방울이 듣습니다. “빗방울이 듣는다”고 적었는데, ‘비오다’를 일컬어 “빗방울이 듣는다”고도 합니다. 비가 올 때에 비를 안 맞으려고 처마 밑으로 몸을 옮기는 일을 일컬어 “비를 긋는다”고 합니다. ‘처마’는 집을 덮은 지붕이 도리 밖으로 나온 자리를 일컫습니다. ‘도리’는 서까래를 받치려고 기둥을 가로지르는 나무를 일컫습니다. ‘서까래’는 지붕을 얹기 앞서 도리 위에 죽 이어 까는 나무를 일컬어요. 그런데, 이런저런 ‘집’을 이루는 나무를 가리키는 낱말을 오늘날 어른들은 얼마나 잘 알거나 살필까요. 집짓는 일을 하는 어른이 아니라면 이런 낱말은 아예 모르쇠로 살아가지 않나 싶은데요.


  곧, 어른도 모르고 아이도 모르는 한국말입니다. 비오는 날, 우산을 ‘펼치’고 ‘접는’다고도 하지만, 우산을 ‘켜’고 ‘끈’다고도 해요. 빗줄기 굵기가 어떠한가에 따라, 안개비·는개·이슬비·가랑비로 나눕니다. 이 같은 굵기는 빗줄기를 눈으로 살피고 빗방울을 몸으로 맞으며 스스로 느껴야 깨닫습니다. 머리로는 알 수 없고, 지식으로는 가르지 못해요. 빗방울이 몇 밀리미터라야 는개이고 이슬비이고 나누지 않아요. 빗물이 어느 만큼 옷을 적셔야 안개비이고 는개이고 가르지 않아요. 이리하여, 오늘날 어른이든 아이이든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 같은 옛말을 쓰는 일이 몹시 드뭅니다. 비오는 날 빗줄기를 살피며 가랑비인가 실비인가 이슬비인가 살피지 않거든요. 더구나, 도시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은 이슬을 볼 일이 더 드물다 보니, 이슬비를 깨닫기 힘들고, 이슬비를 깨닫지 못하니, 보슬비는 또 어떤 비인가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더 들여다본다면, 아이들에 앞서 어른들부터 보슬비를 말하지 않아요. 바람 없는 날 가늘게 조용히 내리는 보슬비를 텔레비전에서 날씨를 알려주는 분들이 말하는 일 또한 없어요.


  조용히 여름비를 느끼며 만화책 한 권 읽습니다. 일본사람 콘노 키타 님이 지은 만화책 《다음 이야기는 내일 또》(대원씨아이,2012) 셋째 권입니다. 아이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대목이 보이는데, ‘방석’과 ‘쿠션’과 ‘마루’와 ‘리빙룸’이라는 낱말이 나옵니다.


.. “앗, 방석에 고양이 털이. 다른 걸 가져올 테니까 기다리렴.” “방석?” “여기 있어. 앉으렴. 자!” “아, 쿠션 말이군요!” “마리아네 집에는 ‘마루’가 없어?” “응.” “그럼 어디서 가족들이랑 TV를 보거나 얘길 하는데?” “어머, 그거야, 당연히 리빙룸이지.” ..


  어느 아이는 ‘깔개’를 ‘방석(方席)’이라 말합니다. 어느 아이는 방석이라는 낱말을 알아듣지 못하다가는 ‘쿠션(cushion)’이라 외칩니다. 이러다가 ‘마루’라는 낱말이 나오는데, 늘 마루에서 지내는 아이는 아주 마땅히 ‘마루’라 말하지만, 다른 아이는 이 또한 못 알아듣다가는 ‘리빙룸(living room)’이라 외쳐요.


  즐겁게 읽던 만화책을 한동안 덮고 생각합니다. 재미 삼아 나온 이야기라 여길 수 있고, 일본에서도 이처럼 영어에 길들거나 젖어든 채 살아가는 아이들이 많다는 우스개로 여길 수 있습니다. 일본도 한국도 온통 영어 물결에 휩쓸리는 나라인 만큼, 스스로 제 말을 잃거나 잊으며 넋과 얼이 뒤죽박죽이 되는 모습이라 여길 수 있겠지요.


  가만히 보면, 예부터 이 나라 살림집에는 ‘마루’가 있고 ‘부엌’이 있었으나, 어느새 ‘거실(居室)’과 ‘주방(廚房)’이라는 한자말이 또아리를 틀었어요. 한자말이 또아리를 튼 자리는 시나브로 ‘리빙룸’이라든지 ‘키친(kitchen)’ 같은 영어한테 새롭게 자리를 내주고 밀려나요. 이동안 한국말은 어디에서도 깃들지 못해요. ‘마루’나 ‘부엌’뿐 아니라 ‘책상’과 ‘걸상’이라는 낱말이 밀려납니다. ‘아침밥’과 ‘낮밥’과 ‘저녁밥’이라는 낱말은 ‘조찬(朝餐)’과 ‘오찬(午餐)’과 ‘만찬(晩餐)’이라는 한자말에 밀리더니, 요즈음에는 ‘브런치(brunch)’와 ‘디너(dinner)’라는 영어가 새삼스레 스며듭니다.


  그렇다고 요즈막 아이들더러 영어를 쓰지 말라느니, 애먼 한자말을 지식자랑 삼아 쓰는 일은 나쁘다느니 하고 나무랄 수 없습니다. 쓸 만한 영어라면 쓸 노릇이고, 알맞게 쓰는 한자말은 알맞다 할 만합니다. 다만, 스스로 어느 자리에 어떤 낱말을 쓸 때에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빛나는가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아무 영어나 한자말을 함부로 쓸 때에는 반갑지 않습니다. 어느 자리에 어떤 낱말을 써야 좋은가를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삶도 넋도 말도 흐물흐물 시들어요.


  으레 ‘의사소통’을 하려고 말을 주고받는다 하는데, ‘의사소통(意思疏通)’이란 무엇인지부터 옳게 살펴야지 싶습니다. 이 한자말 의사소통은 “생각이나 뜻이 서로 제대로 흐르는 일”을 가리킵니다. 흔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어.” 하고들 얘기합니다만, 참말 ‘알’기에 이렇게 얘기하는지는 아리송해요. 넘겨짚는다거나 어떤 지식이나 정보를 얻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뜻으로 ‘의사소통’을 들지 않느냐 싶어요. 곧, 사람과 사람이 참답게 의사소통을 하는 일이란 ‘생각을 제대로 밝혀 주고받는 일’이요, 생각을 제대로 밝혀 주고받자면, 나 스스로 읊는 내 말이 내 모든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생각이 담기도록 슬기롭게 가다듬어야 알맞습니다. 사이좋게 놀던 동무하고 헤어지는 자리에서 어떤 인사말로 내 좋은 느낌을 나누어야 기쁠까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랜 벗한테 띄우는 글월에 어떤 말마디로 내 삶과 넋과 말을 담아야 사랑스러울까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살결이 그을리도록 노는 아이를 바라보다가 “너는 ‘깜순이’로구나.” 하고 말합니다. 이윽고 ‘까미’, ‘까망이’, ‘깜씨’, ‘까망둥이’ 같은 이름을 하나하나 떠올립니다. 말괄량이처럼 노는 아이라 한다면 ‘말괄까미’라 이름을 붙여도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똑같은 것을 바라보면서, 누군가는 방석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깔개라 말하며 누군가는 쿠션이라 말합니다. 그렇다면 세 사람이 바라보는 이 똑같은 것은 무엇일까요. 세 사람이 바라보는 이 똑같은 것을 영어나 프랑스말이나 중국말로 옮긴다 할 때에는 어떻게 적바림할 수 있을까요. 아이들이 여느 자리에서 영어를 익숙하게 쓰는 까닭은, 어른들부터 여느 자리에 영어를 익숙하게 쓰기 때문인데, 어른들은 무엇을 생각하거나 바라며 여느 자리에 영어를 익숙하게 쓰나요. (4345.6.8.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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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8 14: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놀 2012-06-08 15:17   좋아요 0 | URL
저는 늘 괜찮아요.
저는 저 스스로 제 삶과 마음을 제 깜냥껏 사랑으로 다스리거든요.

부디 스스로 가장 좋은 사랑으로 돌보실 수 있기를 빌어요.
서재를 떠나고 안 떠나고는 하나도 대수롭지 않아요.

방명록에 글을 남기기도 했는데,
앞으로는 부디
'무익한 논쟁'이 아닌
'즐거울 글'을 기쁘게 쓰시면 좋겠어요.

사람들은 '익명'이라는 이름으로 언제나 '무익한 말놀이에 말다툼'만
벌여 버릇하거든요.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스스로 얼마나 바보짓 말다툼을 하는가
깨닫지 못해요.
 
밤섬이 있어요 마루벌의 좋은 그림책 30
이명희 글, 김명길 그림 / 마루벌 / 2002년 2월
평점 :
절판


 


 숲이 있는 곳에 마을이 있어요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71] 김명길·이명희, 《밤섬이 있어요》(마루벌,2002)

 


  보름만에 읍내에 한번 마실을 다녀왔구나 싶습니다. 시골집에 천천히 뿌리를 내리면서 읍내로 나들이를 할 일조차 차츰 줄어듭니다. 딱히 읍내에 간다 한들 돌아다니며 볼거리가 없기도 하지만, 쉴 곳 또한 없습니다. 시골 읍내이든 도시 시내이든 마음을 따사로이 건사하며 무엇을 바라볼 만한지 잘 모르겠어요.


  가만히 보면, 도시에서는 공원을 애써 짓습니다. 놀이공원도 짓지만, 놀이기구나 여러 시설이 없이 흙땅에 풀과 나무가 자라도록 하고 걸상을 놓는 숲공원도 짓습니다. 왜냐하면, 제아무리 문명과 문화와 물질이 가득하다 하더라도, 사람을 사람이 되도록 이끄는 기운은 ‘목숨’이거든요. 사람이 먹는 밥은 모두 목숨이에요. 목숨 아닌 영양성분을 먹지 않아요. 화학조합으로 빚은 가공식품이 배를 채워 준다지만, 바로 이 가공식품이 우리 몸을 아프게 하는 병을 불러요. 배는 채우되 목숨이 목숨답도록 이끌지 못해요.


  이제 어떤 가공식품이라 하더라도 ‘천연 재료’를 쓴다느니 ‘친환경 식품’이라느니 하는 이름표를 붙이려고 해요. 그런데, 참말 천연이거나 친환경이라 한다면 이런 이름이 붙을 까닭이 없어요. 들이나 밭이나 멧자락에서 풀을 뜯을 때에 ‘천연’이라거나 ‘친환경’이라 하지 않아요. 그냥 풀이에요.


  오랜만에 읍내마실을 하면서 꼭 한 가지 눈여겨봅니다. 읍내 살림집이나 가게 처마에는 제비집이 얼마나 있을까 하고 살펴봅니다. 읍내에도 마을처럼 제비가 제법 날아다닙니다. 다만, 읍내는 마을처럼 수많은 제비가 무리지어 춤추지는 않아요. 드문드문 맵시있게 날갯짓을 할 뿐이에요.


.. 옛날에는 (서울) 밤섬에 사람들이 살았어요.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긴 모래밭도 있었어요. 모래밭 주위로는 버드나무 숲이 펼쳐져 있었고요. 강물은 깨끗해서 바닥이 훤히 다 들여다보였대요. 밤섬 사람들은 한강물을 떠서 밥도 짓고 마시기도 했어요 ..  (5쪽)

 

 


  먼저 군내버스 내리는 버스역 어귀에 있는 제비집을 올려다봅니다. 다른 어느 제비집보다 새끼를 일찍 까고 새끼들도 일찍 크는 듯한 버스역 어귀 제비집이었는데, 어느새 둥지가 텅 빕니다. 새끼들이 벌써 날갯짓을 익혀 모두 둥지를 떠났나?


  읍내에 문닫은 어린이옷 가게 해가림천 안쪽에 있는 제비집을 올려다봅니다. 가게는 문닫았으나 제비집은 그대로입니다. 가게를 닫으며 해가림천도 없애지 않을까 싶더니 그대로 두어, 제비집은 다치지 않습니다. 어미 제비가 둥지 가까이에서 새끼 제비를 말없이 지켜보는 모습을 한참 올려다봅니다.


  번듯하다 싶은 새 간판이 있는 가게에는 제비집이 깃들지 못합니다. 조금 묵은 살림집이면서 처마를 길게 빼거나 안쪽으로 파고들어 둥지를 숨길 만하다 싶은 데에 군데군데 제비집이 있습니다.


  여러 곳에서 제비집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깁니다. 나는 아이와 함께 길을 걸으며 제비집을 살펴본다지만, 시골 읍내 사람들 가운데 제비집을 구경하는 분은 얼마나 되려나. 이 시골 읍내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들 가운데 몇몇이나 제비 날갯짓을 눈여겨보려나. 아이들도 어른들도 온통 손전화만 들여다본다든지 앞만 본다든지, 문방구에서 값싼 과자를 사먹으며 수다를 떨기만 할 뿐 아닌가 싶습니다.


.. 1968년 2월 어느 날 밤섬은 사라졌어요. 사람들이 밤섬을 폭파시키고 여의도로 흙을 다 퍼 갔어요. 그 흙으로 여의도에 둑을 쌓고 땅을 다져 아파트를 지은 거래요 ..  (6쪽)

 

 


  군내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마을 어르신들은 한창 봄일로 바쁩니다. 논에서며 밭에서며 이른새벽부터 저녁까지 해를 등에 지고 일을 합니다. 챙 넓은 모자에 천을 길고 넓게 드리우며 긴소매에 긴바지를 입으셔도 당신들 얼굴이며 손발이며 몸뚱이는 새까맣습니다. 흙을 만지는 사람은 살결이 흙빛입니다.


  우리 집 아이는 아버지를 닮아 살결이 잘 안 탑니다. 그래도 바깥에서 늘 뛰놀며 지내니 차츰 까만 빛으로 익습니다. 깜순이나 깜디나 깜씨라 하기는 멋쩍지만, 읍내나 면내에서 마주하는 다른 시골 아이하고 나란히 서고 보면, 우리 집 아이가 제법 까망둥이 같다고 느낍니다. 싱그럽고 씩씩하게 잘 자라는구나 싶어 반가우며 고맙고 사랑스럽습니다.


  내 옆지기 어릴 적 사진을 보면 내 옆지기도 이럭저럭 깜순이라 할 만했다고 느낍니다. 모르는 노릇인데, 나 또한 어릴 적에는 살결이 퍽 하얗기는 했더라도 이냥저냥 깜돌이로 지냈으리라 생각합니다. 나는 살결이 까맣게 타기보다는 벌겋게 달아오르다가 껍질이 벗겨지곤 했지만.


.. 밤섬은 불빛 때문에 밤에도 깜깜하지 않아요 ..  (16쪽)

 


  이명희 님 글과 김명길 님 그림으로 이루어진 그림책 《밤섬이 있어요》(마루벌,2002)를 읽습니다. 오늘날 서울 밤섬은 예전처럼 사람이 살아가는 밤섬은 아니요, 사람이 살아갈 수 없기도 할 텐데, 밤섬에 사람이 살아가던 지난날이든 밤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오늘날이든, 밤섬에는 사람뿐 아니라 새와 풀과 나무와 벌레와 물고기가 함께 어울려 지냈습니다. 서로서로 어울려 지낼 때에 비로소 사람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다 함께 보금자리를 꾸리던 때에 사람들은 냇물을 마음껏 마시며 즐겁게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집 처마에 둥지를 튼 제비들을 날마다 바라봅니다. 어미 제비는 바지런히 새끼 제비를 보살핍니다. 나와 옆지기는 어버이로서 두 아이를 돌봅니다. 제비들이 살아가는 집에 사람이 살고, 사람이 살아가는 집에 제비들이 삽니다.


  마을은 들판과 멧자락으로 둘러싸입니다. 마을과 마을 사이에는 냇물이 흐르고 못물이 있습니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조금 넓은 길이 있지만, 마을과 마을 사이를 이루는 멧등성이는 고이 이어집니다.


  숲이 있는 곳에 마을이 있습니다. 마을이 있는 곳에 숲이 있습니다. 숲이 있는 곳에서 사람과 뭇목숨이 살아갑니다. 사람과 뭇목숨이 살아가는 터전은 숲 품에 포근히 안깁니다.


.. 마침내 장마가 끝났어요. 오랜만에 해가 났어요. 빗소리와 물소리로 시끄럽던 한강이 조용해졌어요. 강물도 느려졌어요. 그 위로 밤섬이 조금씩 얼굴을 내밀고 있어요. 홍수에 떠내려 온 쓰레기가 밤섬에 산을 이루었어요 ..  (25쪽)

 

 


 

  이제 서울사람이든 도시사람이든 웬만한 시골사람이든 냇물이나 우물물을 마시지 않습니다. 거의 다 수도물을 마십니다. 수도물이 몸에 좋은 물이 아닌 줄 알면서 그냥 수도물을 마십니다. 수도물을 마실 수 없다고 느끼는 이들은 시골 땅밑을 깊게 파헤치며 뽑아올린 샘물을 돈을 치러 사다 마십니다. 아마 시골 샘물을 마시는 도시사람이 대단히 많지 싶은데, 도시사람은 시골 샘물을 퍽 값싸게 사다 마시면서 참 헤프게 버립니다. 물병도 쉽게 버리고, 물도 쉽게 흘려 버립니다. 수도물 또한 함부로 쓰고 지나치게 많이 씁니다.


  그런데, 다른 무엇보다 한국사람 스스로 돌아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합니다. 제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서울 같은 큰도시에서 떵떵거리는 일자리 얻어 살아간다 하더라도, 수도물을 마시지 않아요. 가게에서 과자와 음료수와 빵과 고기만 사다 먹지 않아요. 외려, 도시사람일수록 더 ‘시골 물과 바람과 밥’을 찾습니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더더욱 ‘시골 물과 바람과 밥’을 챙깁니다. 정작 삶터는 아스팔트 깐 찻길 드넓은 시멘트집이지만. 막상 시멘트와 아스팔트 울타리를 벗어던지고 흙과 풀과 나무를 껴안으려고는 하지 않지만.


  그림책 《밤섬이 있어요》처럼, 도시사람은 ‘도시 아파트’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도시 지하철’이나 ‘도시 아스팔트’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그리지 않아요. 요사이는 ‘생활동화’라는 이름을 붙여 이런 그림책이 더러 나오기도 하는데, 왜 도시 어른들은 도시 아이들한테 자꾸자꾸 ‘자연 이야기 그림책’을 그려서 보여주려고 할까요. 서울 한복판에서도 왜 시멘트집과 아스팔트길 아닌 밤섬 이야기를 그려서 들려주려고 하나요.


  자연이 있어야 한다면 자연을 사랑하며 살아가면 됩니다. 자연을 생각해야 한다면 자연 품에 안겨 살아가면 됩니다. 자연은 지식이 아닙니다. 1968년 2월까지 밤섬에 살았다는 사람들은 역사책 이야기가 아닙니다. 삶이요 목숨이며 사랑입니다. 1960∼70년대에 새마을운동을 내걸며 온 나라 들판을 들쑤신 정치권력은 여의도에 공항을 닦으며 밤섬을 없앴고, 공항 언저리에 아파트를 지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서울 둘레 논밭을 밀고 멧자락을 깎아 도시를 더욱 크게 키웠으며, 도시와 도시를 잇는다며 이 나라 시골자락을 온통 까뒤집습니다. 도시사람 먹을 가공식품을 만들고, 도시사람 타고다닐 자동차를 만들며, 도시사람 쓸 전기를 만드느라, 시골 논밭과 냇물과 멧자락을 모두 밀어내며 공장을 짓고 고속도로를 내며 발전소를 세웁니다.


  서울에는 밤섬이 있습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밤섬이 있습니다. 한국에는 시골이 있습니다. 사람이 살 수 없게 자꾸 망가뜨리는 시골이 있습니다. (4345.6.8.쇠.ㅎㄲㅅㄱ)

 


― 밤섬이 있어요 (김명길 그림,이명희 글,마루벌 펴냄,2002.2.14./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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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사진 찍는데

척척 기어와

책을 밟고 지나가려는

둘째 아이......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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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비 바라보기 1

 


  빨래를 널다가 제비집을 바라본다. 어미 제비가 날아들어 새끼 제비한테 먹이를 주는구나 싶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는데, 어, 이번에는 먹이를 주지 않는다. 꽁지를 뒤로 하며 둥지 밖으로 궁디를 내민 새끼 제비 똥구멍을 부리로 콕콕 찍더니 똥을 잡아당겨 뽑는다. 고양이나 개는 어린 고양이나 어린 개 똥구멍을 핥으며 똥을 누도록 돕는데, 어미 새는 새끼 새가 똥을 잘 눌 수 있도록 잡아당겨 주기도 하는구나. 아직 날갯짓을 못 하고, 조그마한 둥지에 여럿이 옹크려 지내기만 하니까, 아기들 똥누기를 이처럼 거들어야 하는구나. 곰곰이 생각하면, 사람도 어버이가 아기들 똥오줌 누기를 옆에서 거들고, 하나하나 치운다. 아기가 스스로 서며 똥오줌을 가리기 앞서 어버이가 아기들 똥오줌을 신나게 치운다. 똥오줌 잘 누라고 배를 쓰다듬기도 한다. (4345.6.8.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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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사랑을
들려주고 싶어,

 

꿈을
노래하고 싶어,

 

이야기꽃
피우고 싶어,

 

삶을 어여삐
빛내면서
넋을 고요히
어깨동무하는,

 

내 작은 글
편지.

 


4345.5.13.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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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디 책읽기

 


  해거름에 뒷밭에 물을 주다가 뽕나무에서 까만 오디가 떨어진 모습을 본다. 바람이 그닥 안 불었는데 오디가 떨어지네 하고 생각하며 한 알 두 알 줍는다. 뽕나무 가지가 퍽 높아 사다리를 타고 올라야 오디를 따겠거니 싶더니, 이렇게 한 알 두 알 바닥에 떨어지기도 한다고 문득 깨닫는다. 안 떨어지고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달린 오디가 훨씬 많겠지. 날이 밝으면 오디를 더 줍고, 사다리를 챙겨서 신나게 오디를 따자고 생각한다. 들딸이랑 멧딸을 배부르도록 따먹으니, 이제 오디철이 되는구나 싶다. 식구들 모두 오디를 맛나게 먹으니 좋다. 말랑말랑한 오디는 흙과 햇살과 바람과 비가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면서 나무 한 그루를 살찌운 푸른 맛이다. (4345.6.8.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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