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과 도 - 울자, 때로는 너와 우리를 위해
윤미화 지음 / 북노마드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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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느낌글(서평)'은 나중에 따로 쓸 생각이지만, 이에 앞서, 내 책을 다룬 꼭지에서 잘못 적은 대목이 너무 많기 때문에 이렇게 붙인다. 부디 잘못 적은 곳은 낱낱이 바로잡아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바로잡은 결과를 '실물'로 나한테 보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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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란여우(윤미화) 님, 《독과 도》를 읽다가
 ― 《사진책과 함께 살기》 잘못 다룬 곳 짚기

 


  2012년 6월 15일에 나온 《독과 도》(북노마드)를 읽다가, 내가 쓴 책 가운데 하나인 《사진책과 함께 살기》를 다룬 대목을 자꾸 잘못 말하기 때문에, 몇 가지 바로잡고자 이 글을 쓴다. 벌써 종이에 찍혀 나온 《독과 도》이기 때문에, 나로서는 달리 어찌할 길이 없으니, 이렇게 ‘바로잡기’를 한다.


 01. 책이름 잘못 적음
  알라딘서재에서 ‘된장’이라는 이름을 쓰는 내(최종규)가 지난 2010년에 내놓은 책 가운데 하나는 《사진책과 함께 살기》이다. 그런데, 파란여우(윤미화) 님이 쓴 《독과 도》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진 책과 함께 살기”로 적는다. 왜 띄어쓰기를 바꾸는가? 게다가 ‘사진집’은 붙여서 적으면서 ‘사진 책’은 띄어서 써야 할 까닭이 있을까? 내가 인천에서 2007년부터 꾸리다가 2011년에 전남 고흥으로 옮긴 서재도서관은 “사진책 도서관 함께살기”이다. 내 서재도서관 이름을 밝힐 때에도 ‘사진 책’을 띄어야 할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사진책과 함께 살기》 머리말을 살피면, 머리말 끝자락에 ‘사진책’이라는 낱말을 일부러 쓰려고 한 까닭을 밝혔다. 한국 사진문화를 한 걸음 나아가게 하고 싶기 때문에 ‘사진책·사진밭·사진말·사진읽기·사진찍기·사진마을’ 같은 새 낱말을 나 스스로 지어서 썼다. 이와 같은 대목을 처음부터 옳게 살피지 않는다면, 《사진책과 함께 살기》에 담은 줄거리와 고갱이는 어떻게 돌아볼 수 있을까.


 02. 사진책 비평 갈래
  파란여우 님은 234쪽에서 “‘사진 책 서평집’이라는 장르는 물론 없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있다. 없을 까닭이 없으며, 없어야 할 까닭도 없다. 이 갈래로 나온 책이 한국에는 몇 가지 없고, 도서관 분류법에 제대로 나누어지지 않았대서 이 갈래가 없다 할 수 있을까. ‘사진책 서평’이란 곧 ‘사진읽기’를 뜻하고, ‘사진비평’이다. 사진책을 말하는 책이 바로 사진비평인데, 이러한 갈래가 없다는 말은 할 수 없다.


 03. 헌책방에서 건진 사진 책 위주로 썼다 (234쪽)
  《사진책과 함께 살기》는 모두 1·2·3부로 나눈다. 이 가운데 3부는 ‘새책방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사진책만 다룬다. 1부는 도서관에서 찾아볼 만한(그러나 아직 한국 도서관에서는 알뜰히 못 갖추는) 사진책을 다룬다. 2부는 사진책을 널리 장만할 수 있는 좋은 헌책방을 소개하면서, 이 헌책방에서 장만한 사진책을 다룬다. “헌책방에서 건진 사진 책 위주”란 무엇일까? 더욱이, “헌책방에서 건진”이라는 말마디는, 이렇게 ‘건지기’까지 품을 많이 팔아야 하거나 다른 책들은 썩다리라는 뜻을 풍긴다. 나는 헌책방을 다닐 때에 “책을 건진” 적이 없다. 《독과 도》라는 책을 쓴 분이 내 책을 제대로 읽었다면 이를 모르지 않으리라. 나는 언제나 “책을 살” 뿐이다. 살림을 장만하듯 “책을 장만한”다.


 04. 글쓴이의 주관적 견해가 많은 (234쪽)
  모든 글은 스스로 쓰니까 모든 글은 ‘주관’이다. 《독과 도》는 주관인가 객관인가? 《독과 도》를 쓴 사람 눈길로는 ‘주관’이라 하더라도, 이 주관이란 무엇인가. 게다가, 서평이든 비평이든 모든 ‘평가’란 주관이 내리는 평가이지, 객관이 내리는 평가일 수 없다. 스스로 읽은 다음 느낌을 말하는 일이 평가요, 서평이나 비평이 된다.


 05. 사진의 속내를 통해 (235쪽)
  내가 쓴 글이라면서 따온 대목인데, 나는 이 책 《사진책과 함께 살기》에서 ‘토씨 -의’하고 ‘통(通)해’라는 말투를 어느 한 곳에서도 안 썼다. 그런데 갑작스레 이런 말투를 ‘내가 쓴 말투’인 듯 따온글로 적어 놓았다. 몇 쪽에 이런 말투가 나오는지 밝혀 주기를 바란다(교정지에서 바로잡았으나 출판사에서 나한테 말하지 않고 이런 말투로 책을 냈으면, 내 책 또한 새로 고쳐야 하니까). 글쓴이 말투가 아닌 글을 마치 따온글이라면서 함부로 적는 일은 올바르지 않다.


 06. 상업광고에서 나타나는 감각적인 스타일은 애초 관심이 없는 듯 보인다
  사진은 여러 갈래이고, 사진책도 여러 갈래이다. 상업사진과 상업사진책을 《사진책과 함께 살기》에서 안 다루었대서 내가 이러한 갈래에 아예 눈길을 안 둔다는 투로 말하는 일은 얼마나 올바른 서평이나 비평이 될까. 내 알라딘서재(blog.aladin.co.kr/hbooks)에서 사진책 비평 게시판에 올린 글을 읽으면 알 테지만, 나는 ‘사진으로 이루어진 책’이나 ‘사진을 말하는 책’을 모두 다룬다. 다만, 이 《사진책과 함께 살기》에서는 상업사진이나 상업사진책은 굳이 안 다루어도 된다고 여겼고, 출판사에서도 이렇게 하자 해서 이와 같이 나왔을 뿐이다. 책 하나만 서평으로 다룬다 하더라도, 어느 책 하나를 쓴 사람이 펼치는 ‘글누리(작품세계)’를 찬찬히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07. 인천 배다리 골목길에 살면서
  사람은 ‘골목길’에서 살 수 없다. 내가 쓴 다른 책 《골목꽃,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에서도 여러 차례 밝히지만, 사람은 ‘골목동네’에 산다. ‘길’은 오가는 자리이다. 그리고, 나는 ‘배다리 골목동네’에만 살지 않았다. 내가 산 곳은 ‘인천 골목동네’이고, 배다리 헌책방거리 한쪽에 ‘사진책 도서관 함께살기’를 세 해 반 열다가 시골로 삶터를 옮겼다.


 08. 사진 책 도서관 (235쪽)
  앞서 내 책 이름에서도 말했지만, 내 책이름도 이름이고, 내 도서관 이름도 이름이다. 이름을 옳게 읽지 못하고 옳게 말하지 못하는 일이란 더없이 슬프다. 내 도서관은 ‘사진책 도서관’이다.


 09. 최종규는 골목을 수집하는 사람이다 (236쪽)
  비평이나 감상은 자유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비평과 감상을 들을 사람’ 눈높이에서도 한 번쯤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나는 인천에서 나고 자란 이야기를 내 보금자리에서 사진으로 찍었을 뿐, 나는 어떠한 모습도 그림도 ‘수집’한 적이 없다.


 10. 《사진책과 함께 살기》에서 다룬 이야기는 대개 ‘잊혀 가는 것들’이거나 ‘이미 잊은 것들’이다. 그래서 책은 굴피집 사진과 지금은 원로가 된 복서들로부터 시작한다 (237쪽)
  거듭 말하지만, 비평이나 감상은 자유다. 그러나 ‘잘못 읽기’는 자유가 아니다. 내 책 《사진책과 함께 살기》는 잊혀진 이야기를 한 가지도 다루지 않는다. 내 책 《사진책과 함께 살기》는 오직 ‘사진’을 다룬다. 오직 ‘사진’을 다루기 때문에, 사진책과 사진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매우 대단한 《굴피집》이 첫머리에 들어갔고, ‘일본 사진문화’를 돌아보면서 ‘한국 사진문화’를 견주는 첫 책으로 ‘일본 사진쟁이가 찍은 한국 권투선수 이야기’ 사진책 이야기 또한 첫머리에 들어갈 만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제대로 읽어야지, 잘못 읽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굴피집》은, 내가 《사진책과 함께 살기》에서 다룬 37권 사진책 가운데 첫째 꼭지였으나, 《Korean Boxer》는 여섯째 꼭지이다. 여섯째 꼭지로 다룬 글은 맨 처음에 나오는 글이 아닌데, 왜 파란여우 님이 이렇게 글을 썼는지 아리송하다.


 11. 1967년에 나온 주한미군 기념사진 책 《더이상 우리를 슬프게 하지 말라》에는 주한미군 범죄 행위가 붙어 있다고 한다 (237쪽)
  주한미군 기념사진책 이름은 《7th BN(HAWK) 2nd ARTY》이다. 왜 엉뚱한 이름을 붙였을까? 《7th BN(HAWK) 2nd ARTY》라는 사진책을 이야기하다가, 끝자락에 오연호라는 기자가 쓴 《더이상 우리를 슬프게 하지 말라》라는 책 이야기를 살짝 곁들였다. 두 가지 책을 헷갈려서 섞으면 안 된다. 이 대목 또한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마치 내가 엉뚱한 글을 쓴 사람처럼 되고 만다.


 12. 최종규는 헌책방 순례자다. 지금은 사라진 책이거나 품절된 책을 다루는 그는 이미 헌책방을 주제로 한 책을 펴냈다 (237쪽)
  나는 ‘헌책방 순례자’가 아니다. 나는 새책방도 가고 헌책방도 간다. 나는 “책방에 책을 사러 가는 사람”이다. 헌책방에 순례하러 다니지 않는다. 더구나, 나는 “내가 읽을 책을 사는” 사람이지, 사라지거나 없어진 책을 다루지 않는다.


 13. 《우리말과 헌책방》
  내 책 가운데 하나 이름을 또 잘못 적었다. 내가 한동안 내던 1인잡지 이름은 《우리 말과 헌책방》이다. 나는 ‘우리 말’처럼 띄어서 적는다. 왜냐하면, ‘우리 글’, ‘우리 옷’, ‘우리 문화’, ‘우리 강’, ‘우리 겨레’처럼 띄어서 적는 말법이 올바르기 때문이다.


 14. 《사진책과 함께 살기》에서 언급한 대부분 사진 책이 헌책방에서 찾은 책이다 (237쪽)
  앞에서 이 말이 잘못이라고 밝혔으니 덧붙이지는 않는다. 왜 이런 터무니없는 말을 《독과 도》라는 책에서 자꾸 이야기하는지 궁금하다.


 15. 비키니를 입은 여자들까지 (237쪽)
 일본 ‘아이돌 화보집’ 《I♥U》를 말하는 듯한데, 이 사진책은 ‘실제 중학생’을 ‘아이돌 그라비아 사진책’으로 만드는 일본 사진문화를 돌아보면서, 한국에서 상업사진을 하는 이들이 사진책을 빚으려고 얼마나 애쓰거나 어떠한 눈길로 사진책을 빚는가 하는 이야기를 할 때에 다루었다. ‘비키니를 입은 여자들’이라니, 참 듣기에 남우세스럽다.


 16. 최종규가 최민식의 《HUMAN》을 두고 쓴 글이다 (239쪽)
  그러나, 이 따온글은 최민식 님이 손수 쓴 글이지, 최종규가 쓴 글이 아니다. 최종규가 쓴 글인지 최민식이 쓴 글인지 헷갈릴 만큼 책을 제대로 안 읽었는가.


 17. 케빈 카터 사진 이야기 (240∼241쪽)
  케빈 카터 님이 찍은 사진은 그이가 찍은 수많은 사진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 사진과 얽힌 이야기를 더 꼼꼼히 더 널리 더 찬찬히 헤아린 다음 고쳐쓰기를 바란다. 파란여우 님은 케빈 카터 님이 ‘어린 소녀’를 도와주지 않았다고 적는데, 케빈 카터 님은 ‘사진을 찍는 사람’이지 ‘자원봉사자’가 아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곳에는 도움을 받아야 할 아이가 한둘이 아니라 수백 수천인데, 어느 한 아이만 도와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케빈 카터 님은 ‘사진을 찍으며 그곳 아이들을 돕는 사람’이다. 케빈 카터 님이 찍은 사진을 보는 사람들이 가슴속으로 따스한 사랑을 불러일으키면서, 그곳 아이들을 돕도록 이끄는 사람이다. 그 아이를 비롯해 다른 아이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돕는다’면 훨씬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을 테지만, 이런 ‘가설’은 함부로 들추지 않기를 빈다. ‘외신 전속 사진가’이든 ‘프리랜서 사진가’이든, 저마다 계약한 회사에 보내줄 사진을 찍는 사람이기에, 부자도 아니고 시간도 넉넉하지 않다. 사진가한테 왜 자원봉사자 노릇을 바라는가. 그곳에 있는 다른 자원봉사자가 이 아이를 알아보지 못한 일을 탓해야 하지 않는가. 아이를 돕지 않고 사진만 찍었다고 손가락질할 수 없다. 아이를 도울 어버이와 자원봉사자가 어디에 있는지를 따져야 한다. 곧, 케빈 카터 님 사진을 파란여우 님이 이야기하면서 “사진 찍기에 앞서 사진 읽기가 안되는 현실을 개칸하는 최종규는 사진 학교의 꼬장꼬장한 훈장님 같다(241쪽)” 같은 대목은 하나도 올바르지 않다. 최종규는 케빈 카터 님 사진과 삶을 파란여우 님이 《독과 도》에서 적은 대로 바라보지 않는다. 최종규가 마치 이렇게 ‘훈계하는 훈장님’이라도 되는 듯 끼워넣는 일은 바람직하지도 옳지도 알맞지도 않다. 나는 케빈 카터 님 사진을 ‘파란여우 님 말처럼 비판’하지 않는다.


 18. 최종규의 책에선 회화적 이미지를 찾기는 어렵다. 요컨대 《사진책과 함께 살기》는 사진 생태학적 해석에 가까운 평론을 펼친다 (242쪽)
  모든 사진은 ‘회화’를 보여준다. 모든 사진은 ‘이미지’이다. 어떤 사진을 들여다보든 ‘회화 이미지’를 찾기 마련이다. 이러한 회화 이미지는 사람마다 달리 느낀다. 그래서 나는 《사진책과 함께 살기》에서는 ‘주관 감상’을 따로 적지 않았다. 파란여우 님은 《사진책과 함께 살기》가 ‘주관 해석’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이 책에서 ‘어떤 사진 어떤 책 어떤 작품’을 놓고도 ‘주관 해석이나 감상’을 달지 않았다. 부디, 내 책을 제대로 읽고서 제대로 이야기해 주기를 바란다. ‘주관 해석이나 감상’은 사진을 보는 사람들 몫이기에, 굳이 어떤 비평가나 평론가가 애써 안 밝혀도 된다. 시를 읽는 사람이 시를 느끼지, 평론가가 시를 느끼는가. 아니, 평론가가 느낀 시를 독자가 똑같이 느껴야 하는가. 평론가는 다른 대목을 말하는 사람이다. 시를 평론하든 사진을 평론하든 똑같다. 파란여우 님은 사진책을 평론하는 일을 너무 모르는구나 싶다. 더군다나, 《사진책과 함께 살기》에서 다룬 여러 사진책 가운데 《Photograms of the year 1929》라는 사진책을 다룬 꼭지는 안 읽으신 듯하다. 다른 사진책에서도 어엿하고 번듯하게 숱한 ‘회화 이미지’를 느낄 수 있는데, 파란여우 님 스스로 못 느끼거나 안 느끼면서, 이처럼 말하는 일이야말로 ‘주관 해석과 감상’이라고 느낀다. 그나저나, ‘사진 생태학적 해석’이란 무엇인지 궁금하다.


 19. 우리나라 독자로부터 인기를 얻었던 에두아르 부바 사진 책 《뒷모습》도 벗은 사진을 표지로 삼았다 (244쪽)
  틀린 말이다. 프랑스에서 나온 이 사진책은 ‘발레하는 소녀’ 뒷모습이 표지로 들어간다(이 얘기는 내 알라딘서재에도 사진을 올리면서 밝힌 적 있다). 한국판을 펴낸 출판사에서 ‘한국 (남자) 독자 눈길을 사로잡아 책을 많이 팔려는 생각’으로 표지 사진을 바꾸었을 뿐이다.


 20. 결국 최종규가 말하는 사진의 정수란, 삶에서 그대로 보여주는 날것이자 삶에 대한 한없는 애정이다. 최종규는 이럴 때 ‘사진을 즐길 수 있다’고 말한다 (246쪽)
  파란여우 님 ‘주관 해석과 감상’을 존중하고 싶다. 《독과 도》라는 책은 틀림없이 파란여우 님 ‘주관 해석과 감상’으로 이루어진 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말하는 ‘아름다운 사진’이란 “삶에서 그대로 보여주는 날것”이 아니다. “삶에 대한 한없는 애정”도 아니다. 또한, 이럴 때 “사진을 즐길 수 있”지도 않다. 나는 어느 사진책을 비평하거나 다루더라도 언제나 이야기하는데, ‘스스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만큼 사진을 찍는다’고 밝힌다. 다큐사진이든 상업사진이든 언제나 이와 같다. 사진기를 손에 쥔 이가 모델을 얼마나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마음결에 따라 사진이 달라진다. ‘사진 의뢰한 회사’에서 이래저래 조건을 붙인다 하더라도,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 매무새와 삶이 어떠한가에 따라 사진이 달라지지, 기계질에서 사진이 달라지는 일은 없다. 모델은 마네킹이 아닌 사람이니까. 사람 아닌 마네킹을 찍어도 똑같다. 애써 사람인 사진가가 사진을 찍어야 할 까닭이 없다면, ‘사진 의뢰하는 회사’는 왜 비싼값을 치르면서 여러 이름나거나 훌륭한 사진가를 찾아다니면서 사진을 맡기겠는가. 사진을 어느 사진가한테 맡기지 말고, 자동사진기로 찍어도 될 노릇 아닌가. 회사마다 스스로 사진을 찍으면 될 노릇 아닌가. 나는 ‘날것 사진’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날것을 찍으면 그냥 날것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스스로 즐기고 싶은 사진을 찍고 싶으면, 삶을 즐기고 사랑을 즐기면 된다. 스스로 좋아하고 싶은 사진을 찍고 싶으면, 삶을 좋아하고 사랑을 좋아하면 된다. 이런 이야기와 ‘날것’ 얘기는 한참 동떨어진다.


 21. 끝으로 덧붙이면, 《독과 도》 3부 〈사람을 찍는다는 것은 사랑을 찍는 것〉이라는 자리는 거의 다 내 책 《사진책과 함께 살기》를 놓고 쓴 글인데, 책 뒷날개에 붙은 “파란 여우가 탐닉한 책”에는 수전 손택 책이 실렸다. 꽤나 뜬금없구나 싶었으나, 내 책을 내 책 그대로 즐기지 못했구나 하고 느끼고 보니, 이렇게 뒷날개에 딴 사람 책을 적은 일이 외려 참 고맙구나 싶다.

 

..

 

http://blog.aladin.co.kr/hbooks/5700614

(에두아르 부바 사진책 <뒷모습>이 어떠한 책인가 하는 느낌글을 새로 썼다. 이 글을 함께 읽는다면, 파란여우 님이 내 '사진책'을 이야기하며 든 다른 책들 이야기란 너무 안 어울릴 수밖에 없다고 느끼실 수 있을까... 파란여우 님 또한 <뒷모습>이라는 사진책이 어떤 사진책인지 옳고 바르게 헤아리시기를 바란다. 한국 번역판 <뒷모습>은 표지부터 원본 프랑스책과 달리 잘못 나온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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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쁜 손

 


  뒤꼍에 묵히는 땅 가운데 두 평 즈음 쓰레기를 캐고 돌을 고른 자리는 갖가지 풀이 신나게 자랐다. 한동안 손을 못 대고 지내다가 어제 비로소 아픈 몸을 이끌고 풀을 뽑고 잔돌을 촘촘히 고른다. 작은 고랑을 짓고 손가락 구멍을 낸다. 첫째 아이 손바닥에 씨앗을 톡톡 올린다. 마무리 씨앗심기는 아이 몫. 씨앗을 올린 한손과 씨앗을 집는 다른 한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이는 예쁜 일을 예쁜 손으로 해낸다. 땅을 일구기까지 어버이가 품을 퍽 많이 들여야 하나, 바로 이렇게 씨앗을 심는 손을 바라볼 수 있다는 보람이 있으니 즐겁다. 아이 손바닥을 거쳐 좋은 기운이 땅으로 스며들었으리라 믿는다. (4345.6.24.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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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 (딸기)

 


문을 닫은 지
열 몇 해
작은 시골
작은 초등학교

 

우람하게 자란
나무 밑
너른 그늘
새빨간 구슬송이

 

작은 손길에
톡 떨어지며
온 하늘 목숨
따숩게 스며든다.

 


4345.5.2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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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자놀이 책읽기

 


  해가 움직이는 결에 따라 그림자가 생긴다. 그림자는 널찍하게 생기기도 하고, 좁다랗게 생기기도 한다. 아이가 들어가 몸을 쏙 숨길 만하게 생기기도 한다. 아이 키보다 훨씬 높으나 어른 키로는 이럭저럭 알맞춤한 빨랫줄에 드리우는 갓난쟁이 기저귀는 조금 큰 아이한테는 그림자놀이를 즐기기에 좋은 놀이터를 마련해 준다.


  그림자놀이는 놀이책에 실리지 않는다. 그림자놀이를 놀이로 여길 어른은 아마 없으리라. 그러나, 그림자를 바라보는 아이들은 으레 제 그림자를 따라다니고, 다른 그림자를 콩콩 밟으면서 논다. 말없는 벗이요, 언제나 같은 빛깔로 기다려 주고, 모습을 달리하는 예쁜 동무이다. 날마다 보아도 새삼스럽고, 언제 보아도 다른 빛깔과 모습과 무늬와 결로 찾아드는 좋은 손님이다. (4345.6.23.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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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네버랜드 과학 그림책 9
히라야마 가즈코 글 그림, 기타무라 시로 감수, 이선아 옮김 / 시공주니어 / 2003년 6월
평점 :
절판



 맛있는 민들레 먹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77]] 히라야마 가즈코, 《민들레》(시공주니어,2003)

 


  민들레는 한국에서도 자라고 일본과 중국에서도 자랍니다. 한국땅에서 자라는 오래된 민들레 말고 ‘서양민들레’라 일컫는 민들레도 있으니, 미국이나 유럽이나 인도나 브라질이나 필리핀처럼, 한국에서 퍽 멀다 싶은 나라에서도 민들레는 씩씩하게 뿌리를 내리며 자라기도 할까 궁금합니다.


  한국에서는 퍽 먼 옛날부터 민들레를 나물로 먹었습니다. 일본과 중국에서는 어떠했을까요. 한국에서도 함께 자라는 서양민들레는 서양에서 나물로 삼은 풀 가운데 하나였을까요, 아니면 그냥 여느 들풀이었을까요.


.. 민들레를 본 적이 있나요? 어디서 보았나요? ..  (2∼3쪽)

 


  한국땅 옛사람은 민들레뿐 아니라 온갖 풀을 나물로 삼아 먹었습니다. 날로 먹고 무쳐서 먹으며 끓여서 먹습니다. 말려서 먹고 삭혀서 먹으며 달여서 먹어요. 오늘날은 풀물을 짜는 기계가 있는데, 옛날에는 절구로 빻거나 멧돌로 갈면서 풀물을 얻었을까 궁금합니다. 아니면 풀죽만 끓여서 먹었을까 궁금해요.


  그런데 한국땅 곳곳이 도시로 바뀌고, 도시는 더 큰 도시가 되며, 시골 읍내 또한 차츰 도시로 바뀝니다. 도시가 늘고, 도시 학교가 늘며, 도시사람이 느는 동안, 민들레를 나물 아닌 꽃으로 여겨 버릇합니다. 요즈음 아이들 가운데 민들레를 바라보며 ‘맛있겠다’ 하고 생각할 아이는 몇이나 있을까요. 요즈음 어른들 가운데 민들레를 바라보며 ‘맛있겠네’ 하고 생각하며 곧장 캐거나 잘라서 챙길 어른은 얼마나 있을까요.


.. 날씨가 따뜻해지면, 민들레는 새잎을 틔우며 일어나요 ..  (7쪽)

 

 


  어디에서나 흔하게 자라는 민들레입니다. 뿌리가 쉬 뽑히지 않을 뿐 아니라, 뿌리가 잘려도 다시 새 뿌리를 내리고 새 줄기를 올리는 민들레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즐겨먹는 상추처럼, 뜯어도 뜯어도 다시 돋습니다. 캐고 캐도 다시 자랍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자라고 다시 자라요. 한 마디로, 언제나 들판에 차려진 좋은 먹을거리로 삼을 만합니다. 언제라도 들판으로 나들이하며 바구니를 채울 좋은 먹을거리가 될 만합니다.


  그런데, 민들레만 이처럼 씩씩하게 다시 돋지 않아요. 수많은 풀들이 씩씩하게 다시 돋아요. 나무도 이와 같습니다. 커다란 줄기가 잘리더라도 새싹이 돋고 새 줄기가 납니다. 커다란 가지가 잘린다 하더라도 새싹이 새삼스레 돋고 새 가지가 차츰 뻗어요.


  풀은 늘 자랍니다. 나무는 늘 자랍니다. 사람도 늘 자랍니다. 아이도 어른도 늘 자랍니다. 몸이 자라고 마음이 자랍니다. 사람 몸뚱이는 어느 만큼 늙으면 흙으로 돌아가는데, 몸뚱이는 흙으로 돌아가더라도 넋은 고이 이어집니다. 풀과 나무도 이와 같겠지요. 열매를 남기고 씨앗을 맺으면서 옛 몸뚱이인 잎사귀와 줄기는 흙으로 돌려보낸 다음, 이듬해 다시 따사로운 봄이 찾아들면 새 몸뚱이인 잎사귀와 줄기가 돋으면서 새 꽃이 피어요.


.. 잎이 뜯기거나 짓밟혀도 뿌리는 살아 있어요. 자꾸자꾸 새로운 잎을 만들어 내지요. 뿌리를 잘라 땅에 심으면 머지않아 잎이 돋아 한 포기 민들레로 자라난답니다 ..  (11쪽)

 

 


  맛있는 민들레를 먹습니다. 맛있는 민들레는 내 몸에서 좋은 기운으로 숨쉽니다. 민들레는 내가 되고, 나는 민들레가 됩니다. 민들레는 내 몸에 섞이고, 내 몸은 민들레와 하나가 됩니다. 내가 먹는 밥이 내 몸을 이루며, 내가 먹는 밥으로 얻은 기운으로 내 넋을 살찌웁니다. 곧, 민들레 풀줄기와 풀잎과 꽃봉오리는 내 고운 넋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나는 민들레를 먹으며 곱게 숨쉬고, 나는 민들레를 바라보며 내 목숨을 이어 주어 고맙다고 인사합니다.


  가지도 냉이도 오이도 고맙습니다. 감자도 고구마도 쌀도 보리도 고맙습니다. 옥수수도 무화과도 감도 딸기도 고맙습니다. 모두 고맙게 스며듭니다. 모두 고맙게 빛납니다. 지구별은 푸른 빛깔 뽐내는 풀들이 어깨동무하면서 환합니다. 들판도 환하고, 들판에 보금자리를 마련하며 마을을 이루는 사람들도 환합니다. 햇빛이 환하고 꽃빛이 환하며 사람들 눈빛이 환합니다.


  저마다 좋은 마음으로 좋은 하루를 누립니다. 풀은 풀대로 좋은 삶을 누립니다. 나무는 나무대로 좋은 삶을 누립니다. 사람은 사람대로 좋은 삶을 누립니다. ‘맨드레미’라고도 하고 ‘말똥굴레’라고도 한다는 민들레인데, 고장마다 마을마다 사람마다 다 달리 이름을 붙이며 좋은 삶벗으로 삼았으리라 생각합니다.


.. 꽃받침은 열매를 단단히 감싸 지켜 줘요. 열매가 익으면 꽃줄기는 다시 일어서서 높이 뻗어 올라요 ..  (18∼19쪽)

 


  일본에서 1972년에 처음 나왔다는 그림책 《민들레》(시공주니어)는 한국에서 2003년에 옮겨집니다. 서른한 해만입니다. 일본사람 히라야마 가즈코 님은 일본 아이들이 ‘일본 민들레’를 ‘일본 들판’이나 ‘일본 마을’에서 예쁘게 아낄 수 있기를 꿈꾸며 이 그림책을 빚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래된 그림이라 할 테지만, 사랑스러움이 깃듭니다. 묵은 그림책이라 하겠으나, 따스함이 감돕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새 그림결로 새삼스레 그리기 쉬운 민들레라 할 테지만, 제아무리 예쁘장하게 그린다 하더라도 사랑스러움과 따스함을 담지 못한다면, 즐거이 누릴 만한 그림책으로 태어나지는 못합니다. 그러니까, 그림책이라 한다면 무엇보다 사랑스러움과 따스함을 담아야 해요. 아이와 어른이 나란히 즐기는 그림책이 되자면, 바로 좋은 꿈과 이야기를 실어야 해요.


  자연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과학을 살피는 길만 보여줄 때에는 즐겁다 여길 만한 그림책이 아닙니다. 자연은 자연과학이 아닌 자연이거든요. 아이들한테는 과학지식이 아닌 삶이 아름답거든요.


  아이들은 굳이 민들레 한살이를 알아야 하지 않습니다. 한국민들레와 서양민들레를 나누어 살필 수 있대서 민들레를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참말 민들레를 알고 싶다면, 민들레잎을 뜯어서 먹으면 돼요. 민들레 뿌리랑 꽃대랑 열매를 나란히 풀물로 짜서 마시거나 풀죽을 쑤어서 먹거나 풀지짐을 마련해 즐기면 돼요. 녹두지짐과 감자지짐처럼 민들레지짐을 먹지요. 녹두떡이나 감자떡처럼 민들레떡을 먹지요.


  그림책은 삶을 그립니다. 그림책은 사랑을 그립니다. 그림책은 사람들이 예쁘게 일구는 삶을 그립니다. 그림책은 사람들이 즐거이 나누는 사랑을 그립니다. 오늘날 한국땅 여느 어른들이 여느 민들레를 좋은 삶벗으로 삼아 그림책 하나 어여삐 빚는다면, 이 또한 ‘좋은 삶벗으로 어깨동무할’ 이야기꾸러미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4345.6.23.흙.ㅎㄲㅅㄱ)

 


― 민들레 (히라야마 가즈코 글·그림,이선아 옮김,시공주니어 펴냄,2003.6.1./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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