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서 살아가며 '즐겁다' 하고 말하는 <도시일기>는 거의 나올 일이 없으리라 느낀다. 그러나, 이렇게 시골에서 살아가며 '즐겁다' 하고 말하는 <시골일기>는 꾸준히 나온다. 참 놀라운 노릇이지만, 사람들 누구나 몸과 마음으로는 다 아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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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자와 두 냥이의 귀촌일기- 돈 없이도 행복한 유기농 만화
권경희 지음, 임동순 그림 / 미디어일다 / 2011년 10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2012년 09월 26일에 저장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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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046) 별리의 1 : 별리의 장소

 

전주는 내게 아픈 기억을 송별하는 별리(離別)의 장소이면서 8월의 햇볕을 만나는 새로운 시작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신영복-변방을 찾아서》(돌베개,2012) 16쪽

 

  “아픈 기억(記憶)을”은 “아픈 일을”이나 “아픈 지난날을”이나 “아픈 생각을”로 손볼 수 있습니다. ‘송별(送別)’은 “떠나는 사람을 이별하여 보냄”을 뜻하는 한자말입니다. “송별하는 별리의 장소”처럼 쓴 보기글은 겹말입니다. ‘송별’이나 ‘별리’ 가운데 하나를 덜어야 올바릅니다. ‘장소(場所)’는 ‘곳’으로 다듬고, “8월의 햇볕을”은 “8월 햇볕을”로 다듬으며, “새로운 시작(始作)의 장소이기도”는 “새로운 곳이기도”나 “새롭게 길을 나서는 곳이기도”로 다듬습니다. 이 대목에서 ‘시작’은 어떤 일을 처음 마음으로 한다는 뜻이니 ‘새롭다’와 같은 뜻이에요. ‘시작’을 덜어 “새로운 곳”처럼 적으면 단출해요.


  보기글을 보면 ‘별리’라는 낱말에 묶음표를 치고 한자를 넣습니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흔히 쓰는 낱말이 아니기에 한글로만 적으면 못 알아볼 사람이 많겠지요. 그런데, 묶음표에 한자를 넣는들 잘 알아볼 만할까요. 한글로 적어도 알아보기 어렵다면, 한자를 밝히거나 알려도 알아보기 어려워요.


  국어사전에서 ‘별리’를 찾아보면 “= 이별(離別)”이라고 풀이합니다. 곧, 앞뒤만 바뀐 같은 낱말이에요. ‘이별(離別)’은 “서로 갈리어 떨어짐”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한국말로 적자면 ‘헤어지다’인 셈입니다.

 

 아픈 기억을 송별하는 별리(離別)의 장소이면서
→ 아픈 생각을 떠나 보내는 곳이면서
→ 아픈 일을 훌훌 털어 보내는 곳이면서
→ 아픈 지난날과 헤어지는 곳이면서
 …

 

  “이별의 인사”가 아닌 “헤어지는 인사”입니다. “이별의 눈물”이 아닌 “헤어지는 눈물”입니다. 굳이 한자말을 쓰고 싶다면 “이별하는 인사”나 “이별하는 눈물”처럼 ‘-하는’을 붙여야 올발라요. 그러나, 한국말 ‘헤어지다’가 있는데, 왜 ‘이별’이나 ‘별리’ 같은 바깥말을 들여와서 써야 하나 궁금해요. ‘헤어지다’와 ‘떨어지다’와 ‘멀어지다’와 ‘갈리다’를 때와 곳에 따라 알맞게 쓸 수 있는 마음이 되기를 빌어요. (4345.9.26.물.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전주는 내게 아픈 생각과 헤어지는 곳이면서, 8월 햇볕을 만나며 새롭게 길을 걷는 곳이기도 하였다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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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강운구 지음 / 열화당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내 동무 삶에 사진을
 [찾아 읽는 사진책 113] 강운구, 《저녁에》(열화당,2008)

 


  어른들이 아이들을 생각하며 글을 쓰고 노래를 짓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보여주려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가르칠 교과서나 책을 엮습니다. 그리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먹일 밥을 짓고, 옷을 지으며, 집을 짓습니다.


  어느 어른이라 하더라도 아이들 누구나 좋은 글을 읽고 좋은 노래를 들으며 좋은 그림과 사진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어른이라 하더라도 아이들이 나쁜 밥이나 옷이나 집을 누려서는 안 된다고 여깁니다. 어른들 누구나 아이들한테 좋은 밥과 옷과 집을 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좋은’ 글이나 밥이나 집이란 무엇일까요. ‘좋은’ 책이나 옷이나 노래란 무엇일까요. 어느 때에 좋다고 할 만할까요. 어떤 모습이기에 좋다고 여겨 아이들한테 물려주거나 이어줄 만할까요.


  어른들이 써서 다른 어른들한테 읽히는 글을 떠올립니다. 어른들은 ‘19금’이라든지 ‘아직 어린 사람은 못 읽는다’ 하는 틀을 스스로 세우곤 합니다. 그런데, 아직 열아홉 살 밑이라 하더라도 이내 열아홉을 넘어요. 아직 ‘어리기에 못 읽을’ 글이라 하지만, 머잖아 아이들은 ‘이런저런 글을 읽을 나이’에 이릅니다. 어른들이 쓰는 모든 글은 ‘둘레 어른만 읽’는 글이 아니라 ‘둘레 아이들 누구’나 앞으로 읽을 글이 돼요. 무슨 말인가 하면, 아직 아이들이 읽을 만한 글이 아니라 하더라도 곧 아이들이 읽을 나이가 되는 만큼, 어떤 글을 쓰더라도 ‘아이들이 읽을 글’이 되고, 어른들은 무슨 글을 쓰든 아이들 눈높이와 눈길을 헤아려야 한다는 뜻이에요. 어른들끼리 문학이니 역사이니 철학이니 예술이니 과학이니 종교이니 할 이야기란 없어요. 다 함께 생각하며 나눌 문학과 역사와 철학과 예술과 과학과 종교가 있을 뿐이에요.

 

 


  사진책을 읽으면서 곰곰이 헤아립니다. 우리 어른들은 무슨무슨 예술이니 기록이니 문화라느니 작품이라느니 하고 말하는데, 이러한 ‘새 이름’을 얻는 사진이 아이들한테 얼마나 사진답게 깃들 수 있을까 가만히 헤아립니다. 어른들이 골목동네를 찍은 사진은 골목동네 사람들 삶에 어떻게 얼마나 스며들 만할까요. 어른들이 공장 노동자를 찍은 사진은 공장 노동자인 사람들한테 어떻게 얼마나 깃들 만할까요. 어른들이 시골 농사꾼을 찍은 사진은 시골 농사꾼과 이웃들한테 어떻게 얼마나 파고들 만할까요.


  새로운 사진이 되든 현대예술과 같은 사진이 되든 그닥 대수롭지 않다고 느껴요. ‘오늘 여기 있는 어른’한테는 이런 이름과 저런 값이 있을는지 모르나, ‘모레 여기 있을 아이’한테는 이런 이름도 저런 값도 덧없을 테니까요. 사진이든 그림이든 글이든, 며칠이나 몇 달이나 몇 해 읽히고 사라져도 좋을 만한 삶자락이라고는 느끼지 않아요. 두고두고 즐기며 오래오래 사랑할 사진이요 그림이며 글이라고 느껴요.


  강운구 님 사진책 《저녁에》(열화당,2008)를 읽습니다. 머리말을 〈발견과 공유〉라는 이름으로 이문재 시인이 씁니다. 19쪽에 “얼마 전, 광화문에 있는 선생의 작업실을 찾아갔을 때, 선생은 ‘시인이 뭐가 그리 바빠?’라고 물으셨다.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지만, 뼈가 들어 있어서 듣는 나는 조금 아팠다. 시인이 바쁜 것은 큰 문제다. 약속과 마감에 시달리는 시인, 그래서 시를 잘 못 쓰는 시인이 어찌 시인이겠는가. 바쁜 시인은 나쁜 시인이다. 강운구 선생은 나쁜 시인을 꾸짖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 선생은 평생 사진가로서 자기 자신을 지켜 왔기 때문이다. ‘한 작가를 지켜 줄 것은 그 작가 외에는 결코 없습니다. 스스로가 지키는 수밖에요.’ 선생이 후배 사진가들에게 들려준 충고이다. ‘나는 무면허 작가예요. 그러나 작가는 스스로 호칭을 붙일 권리가 있어요 … 근본적으로 작가는 외톨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견뎌내지 못하면 작가로서 살 수 없어요. ’”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퍽 길게 붙은 머리말이요, 시인이 쓴 머리말이기에 꽤 남다르다 여기며 읽습니다. 그러면서 어딘가 아리송하다고 느낍니다. 바쁘대서 나쁠 사람이 있을까 싶고, 나쁘대서 시인이 아니라 할 만한가 궁금합니다. 사진 한길을 꼿꼿이 지켰대서 누구를 나무랄 만한지 궁금하고, 누구를 나무란다 한들 아프게 여기라는 뜻에서 나무랄까 궁금해요. 누구나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하느라 바빠요. 아이들 또한 스스로 좋아하는 놀이를 즐기느라 바빠요. 서로 바쁘지만, 바쁜 틈을 쪼개거나 바쁜 일손과 놀잇감을 내려놓고 어깨동무할 수 있어요. 잘 쓰는 시와 잘 못 쓰는 시는 가를 수 없어요. 스스로 좋아서 쓰는 시라면 넉넉해요. 스스로 좋아서 즐기는 놀이일 뿐, 잘 해야 좋은 놀이가 되지 않아요. 곧, 잘 찍어야 좋은 사진이 되지 않아요. 잘 찍으려고 사진 한길을 걷지 않아요. 스스로 삶으로 녹여내며 즐기려고 한길을 씩씩하게 걸어갈 뿐이에요.


  그러니까, 운전면허증이 있대서 자동차를 잘 몰지 않습니다. 운전면허증 있는 사람이 자동차를 아름답게 몰지 않습니다. 면허증은 아무것 아니에요.

 

 

 

 

 


  대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사진을 찍을까요. 사진학과 수강증이 있어야 사진으로 작품을 빚을까요. 나라밖 어디로 유학을 다녀왔든, 이름난 사진쟁이 아무개한테서 무언가 배웠든, 사진길을 걷는 삶하고는 조금도 이어지지 않아요. 사진기를 손에 쥐어 들여다보는 사람도 나요, 사진기 단추를 눌러 사진 한 장 빚는 사람도 나예요. 더 배웠건 덜 배웠건, 나이가 많건 적건, 이름이 있건 없건, 돈이 있건 없건, 사진기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사진기를 쥔 사람 삶 그대로 사진을 빚어요. 사진기를 움켜쥔 사람 생각 그대로 사진이 태어나요. 사진기를 감싸고 보듬는 사람 눈길과 눈높이 그대로 사진이 거듭나요.


  강운구 님은 사진책 《저녁에》를 내놓습니다. 책이름 그대로 ‘저녁에’ 느낀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녁에 동무들을 불러 막걸리 한 잔 돌리며 사진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저녁에 아이들을 무릎에 앉히거나 눕혀 옛이야기 한 자락 들려줄 수 있습니다. 저녁에 일찌감치 잠들며 이듬날 새 하루를 그릴 수 있습니다. 저녁에 맛난 밥 한 그릇 지어 먹고 기쁘게 노래할 수 있습니다. 저녁에 옛 생각에 잠길 수 있습니다. 저녁에 내 한삶을 찬찬히 짚을 수 있습니다. 저녁에 도시 한복판을 거닐 수 있고, 저녁에 시골 들길에 조용히 설 수 있어요.


  나는 저녁에 풀벌레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한가을이거든요. 한여름에는 개구리 노랫소리를 듣던 저녁이에요. 한봄에는 제비들 처마 밑에서 지저귀다 잠드는 소리를 듣던 저녁이에요. 겨울 저녁에는 어떤 소리가 나한테 찾아올까요. 우리 집 아이들이 한 살 두 살 더 먹으며 저녁에 어떤 소리를 주고받을 만할까요.


  좋은 저녁도 궂은 저녁도 없습니다. 멋진 저녁도 슬픈 저녁도 없습니다. 해는 언제나처럼 천천히 기웁니다. 달은 늘 천천히 떠오릅니다. 어스름은 예나 이제나 똑같이 찾아듭니다. 별빛은 한결같이 온누리를 감쌉니다. 가슴으로 받아들일 사람한테만 다를 수 있는 저녁입니다. 끝없이 문명을 좇고 개발을 일으키는 사람 스스로 다르게 여기는 저녁입니다.

 

 


  돌이켜보면, 오늘날 도시에는 저녁이 없습니다. 오늘날 도시에는 ‘시계 초침 분침 시침’만 있어요. 오늘날 도시에는 저녁도 밤도 새벽도 아침도 낮도 없습니다. 오로지 ‘숫자’만 있어요. 저녁 없는 저녁이 되는 도시예요. 저녁 잃은 저녁을 맞이하는 도시사람이에요. 도시에서 살아가며 저녁을 잃은 사람들은 도시를 벗어나 시골을 돌아다니며 어떤 저녁을 맞이할까요. 도시에서 지내며 저녁을 잊은 사람들은 도시에서 일하고 놀며 어떤 저녁을 생각할까요.


  내 동무 삶에 이야기 하나 있습니다. 내 삶에 꿈 하나 있습니다. 내 동무 삶에 스며들어 빙그레 웃습니다. 내 삶에 씨앗 하나 심어 꿈을 키웁니다.


  스스로 눈을 뜨며 바라보기에 사진을 찍습니다. 스스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기에 사진을 읽습니다.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사진을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잃으면서 사진을 잃습니다. 이야기를 사랑하면서 사진을 사랑합니다. 이야기를 등지면서 사진을 등집니다. 사진책 《저녁에》에 담긴 이야기를 저녁에 곰곰이 읽습니다. 우리 아이들이나, 우리 아이들한테 동무가 될 아이들 누구나, 새로우며 좋고 즐거운 저녁을 누릴 수 있는 지구별을 꿈꿉니다. (4345.9.26.물.ㅎㄲㅅㄱ)

 


― 저녁에 (강운구 사진,열화당 펴냄,2008.9.20./3만 원)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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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아이 오줌그릇

 


  9월 24일, 작은아이가 오줌그릇에 두 차례 쉬를 눈다. 다만, 두 차례로 끝났고, 이듬날에는 오줌그릇에 쉬를 누지 않는다. 그래도 열여섯 달만에 비로소 오줌가리기를 시킬 수 있던 셈이다. 퍽 더디더디 가는 노릇인데, 이제 하루에 한두 차례씩 오줌그릇 쓰기를 익히면, 방바닥이고 마룻바닥이고 부엌이고 오줌바다가 되는 일을 끝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4345.9.26.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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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쪽지 2012.9.22.
 : 바다를 끼고 달리는 마실

 


- 포두면 남성리 이웃마을로 마실을 가기로 한다. 작은아이까지 함께 갈까 싶다가, 작은아이는 낮에 이마가 조금 뜨거웠고, 한참 낮잠을 자느라, 큰아이만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달리기로 한다.

 

- 큰아이랑 둘이서 자전거를 달린다. 퍽 오랜만이라고 느낀다. 작은아이가 태어나기 앞서까지 이렇게 늘 둘이서 자전거를 달렸다. 큰아이는 세 살 무렵부터 자전거수레에 탔는데, 작은아이는 돌 언저리부터 자전거수레에 탔다. 오늘은 작은아이가 없어 한결 가벼운 자전거는 아니다. 이웃마을에 마실을 가느라 실은 책짐 무게가 제법 되어 여느 때처럼 두 아이를 실은 무게인 자전거이다. 발포 바닷가를 지나는 오르내리막을 달린다. 두 아이를 태우며 이만 한 힘으로 이만 한 고개를 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발포를 지나 덕산마을로 넘어서려는데 고갯마루가 퍽 가파르다. 높이는 그리 안 높지만, 바닷물 찰랑이는 모래밭 너머 옆마을인 만큼, 고갯마루가 두 마을을 가른다. 이곳에 이러한 찻길이 없었을 옛날에는 두 마을이 어떻게 오갔을까. 아마 멧골을 타면서 오갔겠지. 꽤 가파른 멧골을 지게를 짊어지며 오갔겠지.

 

- 덕산마을을 지나며 생각한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며 바라보아도 예쁜 마을이구나 싶지만, 자전거를 멈추고 내려서야 비로소 얼마나 예쁜가를 알 만하겠다고 느낀다. 내가 살아가는 마을이든 이웃한 마을이든, 우리 보금자리가 어떤 모습이요 빛깔이며 내음인가를 헤아리자면, 두 다리로 천천히 걷다가 가만히 서서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안아야지 싶다. 하늘을 보고 땅을 본다. 바람을 마시고 햇살을 쬔다. 이러는 동안 천천히 마을과 숲과 삶과 꿈을 읽는다.

 

- 자전거에서 내려 살짝 다리쉼을 한 다음 더 달린다. 익금 나루터 옆을 지난다. 나루터 옆이니 또 바닷물 찰랑이는 모래밭 옆인데, 이곳에서 남성리로 넘어서는 고갯마루를 새삼스레 올라야 한다. 다섯 살 큰아이가 뒤에서 외친다. “아버지 힘내세요!” 그래, 힘낼게. 기운내서 이 고개를 넘을게.

 

- 땀 펑펑 흘리며 고갯마루를 다 넘는다. 논에 물을 대는 못 옆으로 난 논길을 달린다. 누렇게 익은 논 사이를 지나고 구불구불 시골길을 거쳐 이웃집에 닿는다. 이곳은 그러께 즈음 고흥에 자리잡은 이웃집이다. 오늘 이곳에서 모임이 있기에 찾아온다. 나를 뺀 모든 분들은 자가용을 몰고 왔다. 아마 다들 생각하리라. 시골에서 살아가려 한다면 자가용이 있어야 한다고. 그래, 자가용 있으면 가뿐하겠지. 자가용 있기에 제법 먼 데도 다니겠지. 시골에서는 두어 시간에 한 차례 군내버스 지나가는데, 자가용 있으면 언제라도 어디라도 다닐 만하겠지. 그런데, 다들 자가용을 굴리려 하니까 군내버스도 훨씬 적게 다니지 않을까. 모두들 자가용을 몰려고 하니까 자꾸자꾸 새 찻길이 늘고, 숲이 줄며, 우리 삶터가 메마르고 말지 않을까. 저마다 자가용을 한두 대쯤 굴리니까,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 빈터와 흙땅이 사라지는 셈 아닌가.

 

- 모임은 밤이 깊을수록 더 무르익는다. 나는 큰아이를 재워야 하기에 어둑어둑해질 무렵 일찍 빠져나온다. 천천히 까매지는 하늘을 본다. 달이 뜬다. 반달이다. 고운 반달이 조용한 시골마을을 덮는다. 뒷등만 켜고 앞등은 안 켠다. 저 멀리 앞에서 마주 달리는 자동차 보일 때에만 앞등을 켠다. 등불 하나 없는 호젓한 숲속 시골길을 불빛 없이 달리고 싶다. 꾸벅꾸벅 조는 큰아이가 이 호젓한 시골 저녁 기운을 느낄 수 있기를 빈다. 달빛에 기대고 별빛을 바라보며 집에 닿는다. 큰아이는 아주 곯아떨어졌다. 아이를 자리에 눕히고 땀투성이 몸을 씻는다.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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