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람들이 '싸이'를 많이 알아도 '김연경'은 잘 모르리라.

 

'싸이'는 요즈막에 미국 빌보드에서 인기차트 2위에 잇달아 오르며 널리 알려졌지만,

 

(이에 앞서도 대중가수로 한국에는 이름이 퍽 알려졌다만,

 

외국에서는 싸이라는 사람을 거의 몰랐다는 소리이다.)

 

'김연경'은 진작부터 세계 곳곳에 '가장 뛰어난 배구선수'로 두루 알려졌다.

 

김연경 배구팬은 김연경이 한국에서 경기를 뛰면

 

경기장에도 가고 텔레비전으로도 볼 수 있을 테지만,

 

그야말로 '세계 첫손가락' 선수이기에 '세계 밑바닥 수준 한국'에서 뛰기보다

 

스스로 날갯짓할 만한 데에서 훨훨 날 수 있기를 더 바란다고 느낀다.

 

아닐까?

 

곧 김연경 선수 이야기를 쓸 생각이다.

 

10월 19일에 공식인터뷰를 하며 김연경 선수 스스로 어떤 길을 걸어가려 하느냐를

 

밝힌다 하니,

 

그즈음 나도 김연경 선수 이야기를 마무리지을 수 있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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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면서 읽는 책


  하루 내내 놀기만 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루 내내 책만 읽으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루 내내 놀기만 하며 지낸 어린 날을 떠올리면, 참말 놀기만 하면서 지낼 수 있다. 하루 내내 책만 읽던 때가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그예 책만 읽고는 지내지 못한다고 느낀다.


  하루 내내 집일만 붙잡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 하루 내내 빨래만 하거나 밥만 짓거나 비질과 걸레질만 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런저런 집일로 하루를 보내는 때가 꽤 있지만, 이렇게 보낼 수 있다 하더라도 이렇게만 보낼 때에 내 삶은 어떤 그림이 될는지 잘 모르겠다.


  실컷 놀던 어린 날을 떠올린다. 그저 놀기만 하면 곧잘 지친다. 몸을 쉬어야 한다. 풀밭이든 모래밭이든 벌렁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본다. 낮잠을 자든 딴짓을 하든 ‘놀이틈’을 만든다. 그러고 보면 신나게 놀기에 홀가분한 몸이 되어 책을 읽거나 어떤 공부를 할 수 있구나 싶다. 마음껏 뛰놀며 가벼운 몸이 되기에 집일이든 흙일이든 기쁘게 거들거나 물려받을 수 있구나 싶다.


  놀이하는 힘이란 스스로 살아내게 하는 힘이리라 생각한다. 천천히 놀고 잽싸게 놀며 바지런히 놀고 느긋하게 논다. 천천히 살고 잽싸게 살며 바지런히 살다가는 느긋하게 산다.


  놀면서 읽는 책이리라. 살면서 읽는 책이리라. 놀면서 가까이하는 책이리라. 살면서 가까이하는 책이리라. 책만 섣불리 손에 쥘 수 없다. 책만 딥다 파고들 수 없다. 노는 마음에 책이 깃들고, 놀며 즐거운 넋에 책이 스며든다. (4345.10.18.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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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름이(청소년)를 생각하는 글쓰기

 


  고흥읍에 있는 고등학교 아이들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눈다. 이 아이들이 대학입시만 바라보고 달려야 한다지만, 교과서나 문제집을 쳐다보지 않을 적에는 누구나 해맑고 아름다운 눈빛이로구나 하고 깨닫는다. 똑같은 옷을 입히고 똑같은 머리모양과 머리길이로 틀에 맞추면, 여기에다 똑같은 지식과 정보를 머리에 집어넣으려 하면, 누구라도 죽은 눈빛과 서글픈 눈매가 되는구나 싶다.


  조촐하게 이야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해 본다. 내가 이들 푸름이 나이였을 적, 내 둘레 어른한테서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었을까. 내가 푸름이 삶을 보낼 적에 어떤 이야기가 내 마음그릇으로 스며들어 마음밥이 되었을까.


  이 아이들은 집에서 저희 어버이하고 집살림이나 집일을 얼마나 나누어 맡으며 하루를 보낼까. 이 아이들은 시험공부에 붙들리는 학교를 벗어나면 얼마나 푸른 넋을 뽐내며 하루를 빛낼까. 무엇이 이 아이들 생각을 살찌우고, 어떤 길이 이 아이들 앞에 놓일까.


  아이들은 둘레 어른들을 바라보며 자란다. 어른들은 누구나 ‘어릴 적부터 둘레 어른들을 바라보며 배우고 자랐’다. 오늘 아이인 숨결은 머잖아 어른이 되고, 머잖아 어른이 된 오늘 아이들은, 나중에 태어나 아이로 살아가는 숨결 앞에서 ‘삶을 배울 어른으로 보여지’겠지. 좋고 나쁘다 하는 대목은 없기에, 좋다 하든 나쁘다 하든 고스란히 배운다. 나는 내 어릴 적에 내 둘레 어른한테서 모든 모습을 바라보며 좋다 나쁘다 할 것 없이 물려받으며 배웠다. 오늘 아이들은 나를 비롯한 어른들한테서 좋다 나쁘다 할 것 없이 물려받으며 배운다.


  어른인 내가 하는 말은 대수롭지 않다. 어른인 나 스스로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대수롭다. 입으로 하는 말이야 누구나 할 수 있다. 몸으로 누리는 삶은 스스로 가장 사랑하는 결대로 맺고 푼다. 어른으로서 스스로 사랑하는 길을 찾고, 어른답게 스스로 가꾸는 꿈을 보듬어야지 싶다.


  문득, 내가 앞으로 쓸 글은 어떤 빛깔일까 하고 깨닫는다. 이 아이들한테 들려줄 말이란 바로 나한테 하는 말이면서 우리 집 아이들한테 하는 말이 된다. 내 옆지기와 우리 아이들한테 들려줄 말을 오늘날 푸름이로 살아가는 이웃 숨결한테 함께 들려주자 생각하며 새롭게 글감 하나를 생각한다. (4345.10.18.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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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과 문화생활 (시골과 도시)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놀이공원에 가거나 찻집에 들르거나 옷집에서 구경하는 일이 ‘문화생활’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이러저러한 ‘돈 쓰는 일’이 문화생활이라고 합니다. 참 마땅한 노릇이리라 느낍니다. 돈을 쓰기에 ‘문화생활’입니다. 그래서,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문화생활을 누리려고 애씁니다.


  흙을 만지거나 숲바람을 느끼거나 냇물을 마시거나 풀을 뜯거나 나무한테서 열매를 얻는 일은 ‘삶’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이러저러한 ‘하루를 일구는 이야기’는 먼먼 옛날부터 누구한테나 삶이었습니다. 더없이 마땅하다고 느낍니다. 하루를 일구며 온갖 이야기를 길어올리기에 삶입니다. 시골에서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삶을 누립니다.


  시골 살던 사람이 도시로 나아가는 까닭은 삶보다 문화생활을 가까이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 푸름이로 지내며 중·고등학생 때에 도시를 그리다가, 고등학교를 마치거나 대학교로 가면서 도시로 가는 까닭은 삶과 견주어 문화생활이 재미있거나 즐거우리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부터 삶을 누리지 못했거나 삶하고는 동떨어진 채 도시 아이들과 똑같이 시험공부만 했기 때문이에요. 틈틈이 삶을 누리며 하루를 빚지 못하면서, 꾸준히 문화생활을 즐기려고 도시로 나들이를 다녔기 때문이에요.


  거꾸로, 도시 살던 사람이 시골로 나아가는 까닭은 문화생활보다 삶을 누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는 동안 문화생활이 이녁 넋이나 얼을 살찌우거나 북돋운다고는 느끼지 못하고, 바로 삶을 누려야 이녁 넋이나 얼을 살찌우거나 북돋우는구나 하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시험공부만 하는 중·고등학교 나날이 고단합니다. 삶을 등진 채 시멘트 건물에서 새벽부터 밤까지 교과서와 문제집만 파고들어야 하잖아요. 풀 한 포기 자라는 아주 작은 틈에서 빛을 느끼고, 꽃 한 송이 피어나는 풀섶에서 빛을 깨달으며, 나무 한 그루 서는 흙땅에서 빛을 찾아요. 돈을 벌어 돈을 쓰는 굴레 아니라, 삶을 일구며 삶을 짓는 꿈을 마음껏 누리고 싶어 도시를 떠나 시골로 들어서요.


  그런데, 도시를 떠나 시골로 와서 살아가고 보니, 책도 영화도 한껏 느긋하게 즐깁니다. 외려 도시에서 살 적에는 책도 영화도 그닥 느긋하게 못 즐겼구나 싶습니다. 도시에서는 집삯을 벌고 무슨무슨 돈을 버느라 한결 빡빡하고 바쁘며 얽매여요. 보드라운 바람소리나 상긋한 풀벌레 노래나 해맑은 들새 노래를 듣지 못하는 도시예요. 자동차 오가는 소리로 시끄러운 데에서는 책도 영화도 살살 녹아들기 힘들어요. 시골에서 흙을 더 자주 더 오래 만지지 못한다 하더라도 늘 흙 곁에서 흙내음을 맡아요. 흙내음 풍기는 햇볕을 실컷 느끼며 책을 읽고, 종이책을 안 읽어도 나무와 풀과 꽃과 멧자락과 들과 냇물에서 ‘삶을 이야기하는 숨결 같은 책’을 읽어요. 극장에서 보는 영화는 다르다지만, 창호종이문 바깥으로 흐르는 바람을 느끼며 컴퓨터로 영화를 볼 수 있어요. 밤하늘 별무리를 등에 지고 영화 보는 맛은 극장에서 뻑뻑한 숨을 참으며 영화 보는 맛하고 새삼스레 달라요.


  놀이공원이란 무엇일까요. 기계에 몸을 맡기어 움직여야 놀이가 될까 궁금해요. 내 몸을 내가 써서 움직이고, 내 팔다리를 나 스스로 움직이는 하루하루가 일이면서 삶이고 놀이가 되리라 느껴요. 바다가 놀이터예요. 골짜기가 놀이터예요. 들판과 논둑과 밭둑이 놀이터예요. 마당이 놀이터예요. 마루와 부엌이 놀이터예요. 어느 곳이나 놀이터이면서 일터예요. 그리고, 삶터예요. (4345.10.18.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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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을 부르는 아이 풀빛 그림 아이 25
디터 콘제크 글 그림, 김경연 옮김 / 풀빛 / 2002년 1월
평점 :
절판


 


 사랑을 불러 서로 누리는 삶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200] 디터 콘제크, 《색깔을 부르는 아이》(풀빛,2002)

 


  새벽에 살짝 빗방울 듣던 하늘인데, 낮을 지나며 구름이 살그마니 걷히며 해가 듭니다. 하루에도 날씨는 수없이 바뀌는구나 싶으면서, 한가을로 접어든 뒤 빗방울 한 차례 안 들으니 새삼스레 고맙습니다. 우리 식구한테는 아직 땅이 없이 논일도 밭일도 따로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식구 깃든 시골마을에서는 모두 논일이랑 밭일로 부산해요. 나락을 베어 말리고, 나락을 벤 빈논에 거름을 내어 마늘 심을 채비를 합니다. 하루쯤 말린대서 다 마르는 나락이 아니에요. 콩을 털어 말릴 때에도 하루이틀만 말리지 않아요. 퍽 여러 날 바싹바싹 말려요. 나락을 말릴 때에는 길 한켠에 길게 펼치고는 틈틈이 섞습니다. 아래에 있는 나락과 위에 있는 나락에 골고루 말라야 할 테니까요. 부지깽이도 가을일 거든다는 말이 떠오르는 시골마을이에요. 그런데 이런 가을 시골에서 들일을 하는 사람은 거의 모두 할머니와 할아버지뿐입니다.


  빗방울이 들지 않기에 나락을 말리기에 알맞습니다. 바람은 우수수 소리를 내며 풀잎과 나뭇가지와 볏포기 흔들리는 노래를 들려줍니다. 바람결 따라 이웃마을 논배미 무르익는 내음이 찾아듭니다. 또한, 우리 마을 논배미 무르익는 내음이 바람에 실려 이웃마을로 찾아가요.


  구름이 걷히다가 퍽 엷게 드리웁니다. 구름이 엷다 보니 가을햇살은 온 들판과 마을을 하얗게 비춥니다. 언뜻선뜻 노란 기운이 서린 햇볕이 아닌 마알간 흰빛으로 눈부십니다.


  가을이기에 이 같은 하늘빛과 햇빛을 누릴 수 있을까. 내가 도시에서 내처 살았을 때에도 이 같은 하늘빛과 햇빛을 느낄 수 있을까. 옆지기와 내가 아이들 어버이로서 시골로 삶터를 옮겨 살아가니, 어버이부터 이 빛을 느끼고, 우리 아이들도 이 빛을 느끼도록 하는 셈 아닐까.


  이래저래 생각하며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저 하늘 저 구름한테는 어떤 이름을 붙이면 어울릴까 헤아립니다. 이 고운 빛살은 우리 시골마을에만 내리쬘는지, 이웃 시골마을에도 내리쬘는지, 또 이웃 도시나 이 나라 커다란 도시에도 내리쬘는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저 구름은 우리 마을 머리 위로만 지나가며 흩뿌리는 빛살이 될 수 있겠지요. 다른 마을이나 도시에서는 다른 구름이 드리우면서 다른 빛쌀을 흩뿌릴 수 있겠지요.


.. 소년 마법사 빈센트는 마법이 전혀 재미가 없었어요. 어떤 마법도 잘 되지 않는 거예요. 하지만 다른 소년들은 마법을 아주 잘 부렸어요. 마술 지팡이를 들면 쥐가 갑자기 코끼리처럼 커지기도 하고, 물이 돌처럼 딱딱해지기도 했어요. 빈센트는 차라리 호숫가에 앉아, 물고기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헤엄치는 모습을 쳐다보는 것이 더 좋았어요. 빈센트는 딱딱해지지 않은 부드럽고 시원한 물이 좋았고, 코끼리처럼 커져 버린 쥐는 조금 무서웠어요 ..  (6쪽)


  환한 빛살은 마당을 거쳐 집안으로 스밉니다. 칭얼대던 작은아이를 살살 달래 재운 방안으로도 빛살이 환하게 스밉니다. 작은아이는 어릴 적부터 낮잠 자는 버릇을 잘 들였기 때문인지 낮에는 어김없이 낮잠을 잡니다. 큰아이는 어릴 적부터 낮잠을 못 자 버릇했기 때문인지 낮에 낮잠 자는 일이 아주 드뭅니다. 고개 까딱 않고 달게 자는 작은아이를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이 아이가 먹을 밥이란 사랑이 담긴 밥일 때에 맛나고, 이 아이가 누릴 놀이란 사랑이 서린 놀이일 때에 신나겠지요. 어버이인 내가 아이한테 들려주는 이야기는 사랑이 듬뿍 배인 말일 때에 반갑기 마련이에요.


  자장노래를 부르며 마음을 다스립니다. 아이한테만 고운 목소리로 불러 줄 자장노래가 아니라고 느껴요. 부르는 어버이 스스로 참 곱구나 하고 느끼며 즐길 수 있는 노래여야지 싶어요.


  그러니까, 어버이 스스로 좋아하고 즐기면서 자장노래를 부를 때에 아이 또한 좋아하면서 즐길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어버이 스스로 맛나게 먹으며 즐기는 밥일 때에 아이 또한 맛나게 먹으며 즐기는 밥이 되겠지요.


  들길을 걷든, 자전거수레에 아이들 태워 달리든, 언제나 같아요. 즐겁게 걷고 즐겁게 달릴 노릇이에요. 웃으며 걷고, 웃으며 달릴 노릇이에요.


  설거지를 하고 비질을 하며 빨래를 합니다. 낯을 찡그리면서 설거지를 하면 스스로 서운하고 슬프며 고단합니다. 이맛살 찌푸리며 비질을 하거나 빨래를 하면 스스로 골이 나고 아프며 힘겹습니다.
  밥을 먹는 뜻이 있어요. 하루에 두 끼이든 세 끼이든 네 끼이든, 때에 맞추어 밥을 먹는 뜻이 있어요. 잠을 자는 뜻이 있어요. 손발톱을 깎고 머리카락을 빗으며 기지개를 켜는 뜻이 있어요.


  삶을 누리며 즐겁거든요. 삶을 즐기며 빛나거든요. 삶을 빛내며 사랑이 태어나거든요.

 

 


.. 곧, 휘파람을 불어 색깔 마법을 부리는 작은 새와 빈센트의 피리에 대한 소문이 온 나라에 퍼졌어요. 그러자 여기저기서 많은 새들이 노래를 배우러 왔고, 오래지 않아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허공을 가득 채웠어요 ..  (16∼18쪽)


  아침나절, 바깥에서 빗방울이 들을락 말락 할 무렵, 큰아이와 작은아이는 맨발로 마당에 서서 놀았어요. 마음대로 뛰놀던 큰아이는 문득 부엌에 대고 아버지한테 외칩니다. “아버지, 비 와요.” 비가 올 듯 말 듯하기에 부디 빨래가 다 마를 때까지 비가 안 와 주렴, 하고 빌었는데, 아주 살짝 빗방울이 조금 떨어집니다. 거의 다 마른 빨래에 빗방울 묻히기 싫어 서둘러 빨래를 걷습니다. 큰아이가 “내가, 내가 걷을래.” 하면서 부산을 떱니다. 빨래를 다 걷어 집으로 들인 다음 옷걸이에 꿰어 거는 동안, 큰아이는 마당에 세운 빨래대를 걷어서 집으로 들이겠다고 낑낑거립니다. 아이야, 그 빨래대는 그냥 마당에 두어도 돼. 큰아이는 접어서 낑낑 들던 빨래대를 도로 마당으로 가져가서 펼칩니다. 밥 먹자 할 적에는 자꾸 딴짓을 하고 한눈을 파는 아이가 또 이럴 적에는 이런저런 심부름을 스스로 알아서 합니다.


  바람은 불다가 멎습니다. 빗방울은 더 들지 않습니다. 먼지잼조차 아니구나 싶습니다. 거의 다 마른 빨래는 그대로 집안에 두고, 두꺼운 천이라 촉촉한 빨래는 바깥에 내놓습니다.


  구름결 따라 햇살은 반짝이다가 흐리다가 되풀이합니다. 아이는 맨발로 집안에서 놀다가 마당에서 놀다가 되풀이합니다. 따순 가을 날씨에 나무마다 일찌감치 새 잎이 돋습니다. 봄에 돋아야 할 잎일 텐데 늦가을 앞두고 벌써 읻이 돋습니다. 너희는 벌써 잎이 돋는 바람에 한겨울 추위를 견디어야겠구나. 그러나, 너희는 한겨울 추위를 견딜 마음으로 이 가을에 일찌감치 바깥으로 나온 셈일 테지. 너희가 한겨울 추위를 견디면서 아직 자그마한 눈으로 있는 다른 벗들한테 ‘아직 너희는 나오지 말아. 바깥은 모질게 춥구나.’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겠지.


.. 빈센트는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온 밤을 뜬눈으로 새웠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아침 일찍 새들이 지저귀기 시작하자마자, 색깔들이 다시 빛나기 시작하는 거였어요. 빈센트는 그 광경을 맨 처음 보았어요. “색깔들도 쉬어야 하나 봐. 어쩌면 그것도 좋은 일이야. 그렇지 않으면 색깔에 익숙해져, 언젠가는 색깔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할 테니까.” 작은 새가 가장 친한 친구 빈센트에게 말했어요 ..  (26∼27쪽)


  디터 콘제크 님 그림책 《색깔을 부르는 아이》(풀빛,2002)를 읽습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아이 ‘빈센트’는 마법 부리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마법을 즐기지 않고, 마법을 쓸 생각이 없습니다. 아이 빈센트는 숲을 숲 그대로 바라보고 싶어요. 냇물은 냇물 그대로 마주하고 싶어요. 나무와 물고기는 나무대로 물고기대로 이웃하고 싶어요.


  빈센트를 둘러싼 다른 아이들은 다른 어른들과 똑같이 마법을 익히느라 바쁩니다. 더 놀라운 마법을 부리려고 애씁니다. 더 대단한 마법을 부려 이름을 드날리려 합니다.


  아이 빈센트는 갈대 줄기를 피리 삼아서 붑니다. 갈대 줄기로 피리를 부는 소리가 차츰 무르익으면서 노랫소리로 거듭납니다. 아이 빈센트가 갈대피리를 익숙하게 불 수 있을 무렵, 작은 새가 아이 빈센트한테 찾아와서 동무가 됩니다. 둘은 서로 어여쁜 노랫소리를 빛내려 합니다. 서로서로 어여쁜 노랫소리를 빛낼 수 있을 무렵, 둘은 아름다운 노래를 다른 동무한테 스스럼없이 나누어 줍니다. 다만, ‘사람 동무’는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나누어 받지 않아요. 오직 들새와 멧새와 풀벌레만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나누어 받아 더 널리 퍼뜨립니다.


  이리하여 가을날 아름다운 빛깔이 온누리에 퍼지겠지요. 겨울날에도 풀벌레가 마지막 노랫소리를 읊을 테고, 풀벌레가 흙으로 돌아가고 난 뒤에는, 바람이 노랫소리를 이어받아 싱싱 휭휭 읊을 테며, 이윽고 찾아오는 봄에는 새삼스레 온갖 새들과 벌레들이 갖가지 노래를 복닥복닥 읊을 테지요.


  사랑을 부릅니다. 사랑을 서로 누립니다. 사랑을 삶으로 빛냅니다. 하루는 아름답고, 오늘은 즐거이 웃을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4345.10.17.물.ㅎㄲㅅㄱ)

 


― 색깔을 부르는 아이 (디터 콘제크 글·그림,김경연 옮김,풀빛 펴냄,2002.1.10./9500원)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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