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1831) -의 계절 3 : 수유의 계절

 

매년 수유의 계절이 되면 열매의 무게로 가지가 휘어질 정도다
《이가라시 다이스케/김희정 옮김-리틀 포레스트 (1)》(세미콜론,2008) 5쪽

 

  ‘매년(每年)’은 ‘해마다’로 다듬고, ‘계절(季節)’은 ‘철’로 다듬어 줍니다. “휘어질 정도(程度)다”는 “휘어지곤 한다”나 “휘어질 만큼 가득하다”나 “휘어지도록 가득하다”로 손봅니다.

 

 수유의 계절이 되면
→ 수유가 익는 철이 되면
→ 수유를 따는 철이 되면
→ 수유철이 되면
 …

 

  감이 익을 무렵이면 “감이 익을 무렵”이면서 “감이 익는 철”이요 “감철”입니다. 능금이 익을 때라면 “능금이 익을 때”이면서 “능금이 익는 철”이요 “능금철”입니다.


  우리는 ‘수박철’과 ‘딸기철’과 ‘참외철’과 ‘호박철’과 ‘살구철’과 ‘대추철’ 들을 이야기하면서 요즈음 날씨가 어떠한지를 헤아리곤 합니다. 우리 입맛에 따라 철을 생각하고, 산과 들에서 무르익는 열매를 떠올리며 철을 생각합니다.

 

 (열매나 푸성귀나 온갖 먹을거리 이름) + 철
→ 수유철 / 능금철 / 배추철 / 감자철 / 바지락철 / 전어철

 

  이제는 웬만한 가게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따로 없이 온갖 열매가 널리고 갖은 푸성귀가 펼쳐집니다. 굳이 철을 살피지 않더라도 언제나 딸기를 먹고 수박을 먹으며 바나나를 먹습니다. 집이나 일터 또한 요즈음 철이나 날씨가 어떠한가를 몰라도 한결같이 따뜻하거나 시원합니다. 자가용으로 움직이든 전철이나 버스로 움직이든, 우리는 바깥 날씨를 느낄 겨를이 없습니다.


  꼭 바깥 날씨를 알뜰히 느끼거나 깨달아야 한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 몸이 바깥 날씨를 잊거나 잃으면서, 우리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잊거나 잃지 않느냐 싶습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이 잊거나 잃는 무엇인가는 우리 삶에서 또다른 무엇을 잊거나 잃도록 줄줄이 이어지지 않느냐 싶습니다.

 

 열매의 무게로
→ 열매 무게로
→ 열매들 무게로
 …

 

  스스로 삶다운 삶을 잊거나 잃으면서 삶을 밝히는 생각을 함께 잊거나 잃지 않느냐 싶습니다. 다른 누가 괴롭히거나 들볶지 않더라도 스스로 우리 터전을 일구는 생각을 잊거나 잃는다면, 우리는 고운 뜻과 넋을 담아낼 말과 글 또한 우리 손으로 내버리거나 내치는 셈이라고 느낍니다. (4342.8.2.해./4345.11.19.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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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수유철이 되면 열매 무게로 가지가 휘어지곤 한다

 

..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051) -의 계절 4 : 가정방문의 계절

 

가정방문의 계절이 다가왔다. 토요일 오후, 일요일, 방과 후, 교사는 늦은 밤이 되면 이 자유로운 시간에 아이들의 가정생활을 조사하기 위해 거리를 돌아다녔다
《이시카와 다쓰조/김욱 옮김-인간의 벽 (3)》(양철북,2011) 406쪽

 

  ‘가정방문(家庭訪問)’은 버릇처럼 쓰는 말투로 여길 만합니다만, “집집이 찾아다니는”처럼 손볼 수 있어요. ‘계절(季節)’은 ‘철’로 다듬고, ‘오후(午後)’는 ‘낮’으로 다듬으며, “방과 후(後)”는 “방과 뒤”로 다듬어 봅니다. “이 자유(自由)로운 시간(時間)에”는 그대로 두어도 되지만, “이 홀가분한 때에”로 손질하면 한결 나아요. “가정생활(家庭生活)”은 “집살림”이나 “집안 모습”으로 손질할 수 있는데, 글흐름을 살펴 “아이들의 가정생활을 조사(調査)하기 위(爲)해”를 “아이들이 집에서 어떻게 지내나 알아보려고”나 “아이들이 집에서 지내는 모습을 살펴보려고”처럼 새롭게 손질하면 한결 매끄럽습니다.

 

 가정방문의 계절이 다가왔다
→ 가정방문 철이 다가왔다
→ 가정방문을 하는 철이 다가왔다
→ 집집이 찾아다니는 철이 다가왔다
→ 아이들 집을 찾아다니는 철이 다가왔다
 …

 

  보기글을 살피면, “가정방문이 다가왔다”처럼 적어도 어울립니다. 아이들 살림집을 하나씩 찾아다니는 일을 가리키는 ‘가정방문’일 텐데, 이 낱말은 교사가 해야 하는 일 ‘이름’이기도 하기에 ‘-의 계절’처럼 붙는 말마디를 모두 덜어도 뜻을 짚을 수 있습니다. 말뜻 그대로 “집집이 찾아다니는”처럼 풀어서 쓸 수 있고, 느낌을 살려 “아이들 집을 찾아다니는”처럼 적을 수 있어요. “아이들 어버이를 만나러 다니는”이라 적어 보거나, “아이들 사는 마을을 돌아다니는”이라 적어도 어울려요. 어떤 굴레에 매이지 않으면서 말빛을 살피면 됩니다. (4345.11.19.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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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집을 찾아다니는 철이 다가왔다. 토요일 낮, 일요일, 방과 뒤, 교사는 늦은 밤이 되면 이 홀가분한 때에 아이들이 집에서 어떻게 지내나 살펴보려고 거리를 돌아다녔다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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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아이가 똥 눈 바지를 벗길 때

 


  낮잠을 재우느라 기저귀를 채우고는 두툼한 바지를 입힌다. 작은아이가 낮잠을 달게 자고 일어난다. 저녁을 먹이는데 끙끙 소리를 내더니 솔솔 똥내음을 풍긴다. 바지 뒤쪽을 살짝 연다. 용하게 기저귀 안쪽에만 똥이 묻었다. 부디 두툼한 바지는 안 버리기를 빌며 씻는방으로 간다. 두툼한 바지는 아기 바지라 하더라도 빨래하는 품이 제법 들고, 무엇보다 말리는 데에 오래 걸린다. 여름철에는 두툼한 옷이 일찍 마르지만 여름철에 두툼한 옷을 입을 일 없다. 이래저래 보면 겨울빨래는 힘이 더 들고 말리기도 만만하지 않다.


  바지 한 벌 버리는 일이 대수롭지 않으리라. 아이 밑과 다리를 슥슥 씻기며 토닥토닥 재우는 일이 대수로우리라. 그러나, 자꾸 ‘빨래감 줄이기’를 생각하고 만다. 스스로 집일이 너무 빠듯하면서 바쁘다고 여기기 때문일까. 스스로 집일에 치인다고 느끼기 때문일까. ‘어머나, 똥 예쁘게 누었구나. 예쁘게 씻고 예쁘게 자자.’ 하는 생각을 선뜻 못 품는 까닭은 무엇일까.


  잠들다가 깨고 만 아이는 한 시간 남짓 놀며 밥을 조금 더 먹으며 지내다가 다시 잠든다. 깊이 잠든다. 그러나, 팔베개 하던 손을 새벽에 슬그머니 빼고는 조용히 내 일을 하려고 옆방으로 건너오니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 앙 소리내고 울며 달라붙는다. 품에 안아 재우고는 허벅지가 아플 때까지 있다가 자리에 눕히니 새근새근 잘 자는가 싶더니 또 10분쯤 지나서 앙 소리내고 울며 달라붙는다.


  나도 내 어머니한테 이처럼 달라붙으면서 잠을 못 자게 했을까. 나도 내 어머니한테 이렇게 엉겨붙으면서 볼일도 못 보게 했을까. (4345.11.19.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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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산책자 - 두 책벌레 건축가가 함께 걷고 기록한, 책의 집 이야기
강예린.이치훈 지음 / 반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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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관은 싱그러운 책 읽는 곳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55] 강예린·이치훈, 《도서관 산책자》(반비,2012)

 


- 책이름 : 도서관 산책자
- 글 : 강예린·이치훈
- 펴낸곳 : 반비 (2012.10.25.)
- 책값 : 16000원

 


  도서관은 싱그러운 책을 읽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싱그러운 책이 아니라면 굳이 도서관까지 찾아가서 읽을 까닭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싱그러운 책이 아닐 때에는 대여점에서 빌린다든지 여느 책방에서 사다 읽어도 될 테지요. 그러나, 싱그러운 책이 아니라 한다면, 굳이 내 아름다운 겨를을 내어 읽어야 할까 궁금해요.


  싱그러운 책이기에 도서관에서 빌려 읽습니다. 싱그러운 책이기에 새책방에서 주머니를 털어 장만해서 읽습니다. 싱그러운 책이기에 새책방 책꽂이에서 사라진 책을 오랜 품과 겨를을 들여 헌책방을 찾아다니면서 즐겁게 사들여서 읽습니다.


  조금 더 생각한다면, 싱그러운 이야기라고 느낄 때에 출판사에서 책을 만들어야지 싶습니다. 한 번 더 생각한다면, 싱그러운 이야기를 다룬 책이라고 여길 때에 책방에서 책을 갖추어 꽂아야지 싶습니다. 많이 팔릴 만하거나 널리 읽힐 만하기에 책을 만들 수 있을 테지만, 많이 팔린다거나 널리 읽힌대서 ‘싱그러운’ 이야기가 되지는 않아요. 신문 1쪽에 나오거나 방송 맨 처음에 나오는 이야기이기에 ‘싱그러운’ 삶이나 사랑이나 꿈을 들려주지는 않아요.


  찬찬히 생각할 노릇이라고 느껴요. 신문 1쪽에 큼지막하게 나오는 이야기 가운데 몇 가지나 하루 뒤나 한 달 뒤나 한 해 뒤에도 기쁘게 떠올리거나 되새길 이야기가 되나요. 방송에서 흐르는 이야기 가운데 몇 가지나 하루 뒤나 한 달 뒤나 한 해 뒤에서 즐거이 돌아보거나 아로새길 이야기가 되나요.


.. 형무소 옆 도서관에는 책이 수감되어 있는가? 지식이 지혜로 교정될 때까지 책은 세상에서 격리되는가? ‘경성감옥’ 옆에 서 있는 도서관을 보노라니, 자연스레 도서관 역시 감옥처럼 근대적인 ‘훈육’의 공간이라는 것이 떠오른다 … 훌륭한 도서관을 짓고자 하는 건축가라면 그 안에서 사람이 교류하는 구체적인 모습뿐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도서관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  (27, 48쪽)


  어느 모로 본다면, 도서관에서는 ‘싱그럽’지 않은 책도 건사할 만합니다. 싱그럽지 않은 책도 알뜰히 갖추면서 ‘책으로 삶을 읽’도록 돕는 구실을 할 수 있어요. 날마다 나오는 신문을 하나하나 모아서 ‘신문으로 사회를 읽’도록 이끄는 몫을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다른 눈길로 본다면, 도서관에서 구태여 싱그럽지 않은 책을 건사해야 할까 알쏭달쏭해요. 싱그러운 책만 즐겁게 찾아서 읽는 데에도 온삶을 다 바쳐도 다 못 읽는다 할 만큼 많은데, 꼭 ‘안 싱그러운’ 책을 도서관이 갖추어야 할까요. 지나치게 많은 ‘안 싱그러운’ 책이 가득 꽂히는 바람에, 사람들은 막상 ‘싱그러운’ 책을 못 찾거나 못 보거나 못 느끼지 않나요. 싱그러운 책은 싱그럽지 못한 책 사이에 낑기거나 눌리면서 햇볕을 못 보다가는 ‘대출실적 0’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폐휴지로 버려지지는 않나요.


  굳이 모든 책을 건사해야 한다면, 모든 책을 건사하는 도서관은 딱 한 군데만 있으면 되리라 생각합니다. 딱 한 군데 도서관을 빼고는 ‘싱그러운’ 책만 건사해야지 싶습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려는 사람이 “이 책 갖추어 주셔요” 하고 바란다 할지라도, 도서관을 지키는 일꾼이 “갖추기를 바라는 책”을 하나하나 훑으면서 ‘싱그러운’ 책만 추려서 갖추어야 할 노릇이라고 느껴요.


  이러고 나서, 도서관 지키는 일꾼이 할 일이 생깁니다. 무엇이냐 하면, 도서관에서 꾸준히 사들여 갖춘 ‘싱그러운’ 책을 누구보다 도서관 일꾼이 먼저 즐겁게 읽은 뒤에 ‘싱그러운 책을 읽은 느낌’을 글로 써서 ‘도서관신문’이나 ‘도서관잡지’를 만들어야지요.


  ‘새로 들어온 책 목록’만 띄운다면, 도서관으로서 제구실을 못 한다고 느껴요. 출판사에서 쓴 ‘보도자료’만 붙인다면, 도서관 일꾼으로서 제몫을 못 한다고 느껴요.


  도서관 일꾼이란, 도서관에 들여오는 책을 맨 먼저 읽고 ‘줄거리에 깃든 넋’을 받아들인 다음, 이 아름다운 넋을 ‘도서관에 찾아오는 이웃’한테 차근차근 들려주면서, 사람들 스스로 ‘아름다운 넋’을 읽고 되새기면서 새롭게 태어나도록 돕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 도서관 3층으로 올라가면 어른들의 열람실이 나온다. 도서관을 지을 때 공부하는 방을 만들자는 의견도 일부 있었으나, 건축주는 ‘책 읽는 도서관’이어야 한다는 의지가 확고했다고 한다. 전과와 문제집처럼 남이 추려 놓은 지식을 보는 것이 아니라, 추려지지 않은 지식과 이야기를 스스로 탐구하는 것이 갖는 힘과 의미를 알리고 싶었겠지 싶어 … 집에서 가져온 책으로 공부하는 열람실, 독서실은 우리 도서관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공간이다. 일제 시절부터 내려온, 근대적인 훈육식 교육 경험을 도서관이 물려받은 결과라고 한다 ..  (32∼34, 45쪽)


  도서관은 싱그러운 책을 읽으면서 내 삶을 싱그럽게 가꾸는 기운을 얻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싱그러운 책을 읽는 까닭은 나 스스로 싱그러운 넋으로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싱그러운 눈길로 내 모습을 들여다봅니다. 싱그러운 눈길로 이웃이랑 동무를 사랑합니다. 싱그러운 눈길로 나무와 풀과 꽃을 아낍니다. 싱그러운 눈길로 파랗게 빛나는 하늘을 껴안고, 기름진 들판과 푸른 숲을 어루만집니다.


  싱그러운 책을 읽는 나는 싱그러운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책을 읽기에 거듭나지는 않아요. 책을 읽는 동안 내 마음속에서 ‘싱그러운 씨앗’ 하나가 움을 터요. 천천히 뿌리를 내리고 찬찬히 줄기를 올리지요. 싱그러운 책을 읽고 싱그러운 말을 나누며 싱그러운 일을 하면서, 시나브로 내 마음속 싱그러운 씨앗이 씩씩하게 자랍니다.


  책에는 길이 없으나, 책을 읽으며 스스로 길을 찾는 기운을 얻습니다. 책에는 길이 없으니, 책을 읽으며 길을 찾다가는 헤매기만 할 뿐이에요. 책을 읽으며 길을 헤매면, 이 책도 읽고 저 책도 읽으며 온갖 책지식을 잔뜩 쌓을 수 있어요. 그렇지만, 책지식으로 무엇을 할까요. 책지식으로는 사랑을 하지 못해요. 책지식으로는 꿈을 꾸지 못해요. 책지식으로는 풀씨를 받지 못해요. 책지식으로는 나뭇가지에 새로 돋는 잎사귀를 느끼지 못해요.


.. 동서양 모두 자연에서 소요하며 책을 읽는 것은 조금 더 높은 경지에 닿고자 하는 마음과 통한다. 자연에서 머리를 맑게 헹구고 책을 읽는 것은 마음을 닦는 일에 가깝다 … 사진책도서관은 최종규 관장님 말씀처럼 ‘육지에서 섬 빼고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인 전남 고흥에 자리잡고 있다. 이 먼 곳까지 작정하고 오는 동안 독자는 사진책을 읽을 마음의 폭을 마련한다. 사진책은 대개 텍스트가 아니라 이미지를 읽는 것이다. 느릿한 읽기를 통해서만 이미지를 찬찬히 감상할 수 있다. 고속도로와 고속철도 시대에도 고흥은 변함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에 이곳에 자리잡았다는 관장님의 말씀은 ‘순간을 영원으로’ 간직하고 있는 사진책과 분위기가 맞춤하다 ..  (83, 160∼161쪽)


  책을 읽듯 사람을 읽습니다. 사람을 읽듯 책을 읽습니다. 책을 읽듯 꽃을 읽습니다. 꽃을 읽듯 책을 읽습니다.


  가을을 느껴 보셔요. 겨울을 느껴 보셔요. 봄과 여름을 느껴 보셔요. 다 다른 철에 다 다른 날씨를 느껴 보셔요.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선물인지 느껴 보셔요.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고을에서 다 다른 꿈으로 살아내며 쓴 책을 천천히 읽어 보셔요. 책을 읽을 때에는 숲으로 가서 나무 밑에 앉아 읽어 보셔요. 열 쪽이나 백 쪽쯤 읽었다면 책을 살짝 덮고는 파랗게 빛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셔요. 구름이 어떻게 흐르는가를 바라보고, 들새가 몇 마리쯤 날아가며 노래하는가 들어 보셔요.


  겨울이 코앞이라 풀벌레가 모두 고이 잠들었나 싶다가도, 빈 들판을 걷다 보면 곳곳에서 가느다란 노랫소리가 울려퍼져요. 아마 이른겨울까지 적잖은 풀벌레가 시골마을 들판에서 어여삐 노래를 부르겠구나 싶어요. 들새와 멧새는 한겨울에도 먹이를 찾으며 노래를 부르겠지요. 우리 집 어린 아이들도 마당에서 볼이 빨개지도록 뛰놀며 노래를 부를 테고요.


  책을 읽으며 삶을 읽습니다. 삶을 읽으며 책을 읽습니다. 서로서로 사랑하며 살아갈 삶을 읽으려고 책을 손에 쥡니다. 다 함께 어깨동무하는 아름다운 꿈을 그리면서 책을 손에 듭니다.


.. 이렇게 서고에서 길을 잃는 것은 책을 읽는 재미 중의 하나가 아닐까? 책을 읽다가 흥미로운 주석이나 인용에 이끌려 다른 책으로 계속 손을 옮기며 책이 열어 주는 여러 갈래의 길로 들어서다 보면 어느새 독자는 수십, 수백 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말을 걸어 오는 저자들을 한꺼번에 만나게 된다 … 개인이 구매하기 어려운 책을 도서관이 대신 구비해 주는 것이 옳지만, 도서관으로서는 예산이 한정되어 있다 보니 아무래도 소설이나 에세이처럼 찾는 사람이 많은 책을 더 구입하는 쪽으로 기운다. 그래서 사진책은 어지간한 규모의 도서관이 아니면 만나기 힘들다 ..  (136, 158쪽)


  강예린 이치훈 두 분이 쓰고 엮은 《도서관 산책자》(반비,2012)라는 인문책을 읽습니다. 도서관으로 나들이를 가는 두 분은 건축일을 한다고 합니다. 창녕에서는 도서관을 짓도록 함께 슬기를 모았다고도 해요.


  《도서관 산책자》를 읽으며 생각해 봅니다. 한국에서 ‘도서관 나들이’를 할 만할 수 있을까? 한국에 있는 도서관은 ‘서울에 있는 도서관’이랑 ‘부산에 있는 도서관’이랑 ‘순천에 있는 도서관’이 다를까?


  나는 ‘전국 헌책방 나들이’를 즐깁니다. 서울에 있는 헌책방이랑 부산에 있는 헌책방이랑 순천에 있는 헌책방은 책시렁이 저마다 달라요. 남원에 있는 헌책방이랑 진주에 있는 헌책방이랑 춘천에 있는 헌책방은 책꽂이가 사뭇 달라요.


  대전에 있는 헌책방에서는 대전사람들 삶을 헤아리는 책을 만납니다. 전주에 있는 헌책방에서는 전주사람들 삶을 톺아보는 책을 만납니다. 인천에 있는 헌책방에서는 인천사람들 삶을 그리는 책을 만나요.


  도서관은 어떠할까 궁금해요. 인천에 있는 도서관에서는 ‘인천사람 인천 이야기’를 다루는 책이나 자료가 얼마나 있을까요. 의정부에 있는 도서관에는 ‘의정부사람 의정부 이야기’를 다루는 책이나 자료가 얼마나 있을까요. 제주에 있는 도서관에는 ‘제주도 사람 제주도 이야기’를 다루는 책이나 자료가 얼마나 있을까요.


  인문책 《도서관 산책자》에서는 한국에서 도서관은 도서관 아닌 ‘독서실’ 노릇을 한다는데, 이 말은 썩 알맞지 않아요. 왜냐하면 ‘독서실’은 “책을 읽는 방”이거든요. 또 한국사람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려고 해서 말썽이라고 말하지만, 이 말 또한 알맞지 않아요. 왜냐하면 ‘공부’는 “시험점수 더 잘 따려고 문제집이랑 참고서를 외우는 짓”하고 동떨어지거든요.


  무슨 말인가 하면, 한국사람은 ‘도서관’도 ‘독서실’도 ‘공부’도 제대로 몰라요. 도서관이 어떤 책을 건사하며 사람들하고 나누어야 아름다운 책터가 되는가를 깨닫지 않아요. 독서실이라 할 때에는 어떤 곳에 어떻게 마련할 때에 ‘책읽기’ 즐기도록 돕는가를 살피지 않아요. 공부가 무엇이며 공부를 하는 삶은 어떠한 사랑으로 피어나는가를 생각하지 않아요.


  한 마디로 간추리면, 한국에 있는 도서관은 도서관이라기보다는 ‘시험지옥 공장’이랄 수 있습니다. 칸막이로 좁게 나누어 조용히 문제집 풀기를 하느라 고개를 처박아야 하는 데는 도서관도 독서실도 아니에요. 이런 곳은 그야말로 불지옥이에요. 가시방석 입시지옥일 뿐이에요.


  강예린 이치훈 두 분은 ‘입시지옥’으로 나뒹구는 데가 아닌, 참말 ‘책읽기’가 싱그러이 숨쉬는 곳을 찾아 “도서관 나들이”를 합니다. 이러면서 “도서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 여태껏 “도서관 나들이”를 하면서 “도서관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해요. 어쩌면 아예 없는지 몰라요.


  작은 책씨앗 구실을 하는 《도서관 산책자》일 테지요.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이제 겨우 “도서관 나들이”를 할 만큼 되었다고 할 테지요. 앞으로는 “도서관 한살이”라든지 “도서관 사랑짓기”라든지 “도서관 숲살림”을 다루는 이야기책도 태어날 수 있기를 빌어요. 책으로 읽는 삶을 헤아리고, 책을 발판 삼아 저마다 눈부시게 열어젖히는 고운 생각날개가 이야기숲처럼 흐드러지기를 빌어요. (4345.11.18.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인문책은 삶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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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을 죽이는 외마디 한자말
 (298) 관하다關 1 : 모든 것들에 관해

 

숲 생태의 이해를 돕기 위해 숲과 숲에 사는 모든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남효창-나는 매일 숲으로 출근한다》(청림출판,2004) 머리말

 

  “숲 생태(生態)의 이해(理解)를 돕기 위(爲)해”는 “숲 상태를 이해하도록 도우려고”로 손보며 토씨 ‘-의’를 덜 수 있습니다. 조금 더 마음을 기울이면 “숲살이를 잘 알도록 도우려고”로 손볼 수 있고, “숲을 잘 알도록 도우려고”로 손보아도 됩니다. “숲 생태”란 “숲이 어떠한가”라든지 “숲살이”를 가리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란 “잘 알도록 도우려고”를 가리키니, “잘 알도록”이나 “잘 헤아리도록”처럼 단출하게 다듬어도 됩니다.


  ‘관(關)하다’는 “(주로 ‘관하여’, ‘관한’ 꼴로 쓰여) 말하거나 생각하는 대상으로 하다”를 뜻하는 외마디 한자말입니다. 국어사전을 살피면 “실업 대책에 관하여 쓴 글”이나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관하여 토론하도록”이나 “우리는 한글에 관해 과연 얼마만큼 알고 있는가?”나 “그 문제에 관한 한 우리는 한 치도 양보할 수 없습니다” 같은 보기글이 실립니다. ‘대(對)하다’와 거의 비슷하게 쓰는 외마디 한자말이에요. 영어를 가르칠 때에 흔히 ‘목적격’이라 하면서 이 말투를 이야기합니다. 이 말투가 한국 말투인가 아닌가를 따지거나 살피는 이는 매우 드뭅니다. 이러한 말투를 쓸 때에 알맞나 알맞지 않나를 돌아보거나 헤아리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이 말투가 한국 말투로 스며들어 아주 깊이 뿌리내립니다.

 

 숲에 사는 모든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 숲에 사는 모든 목숨들을 이야기하고
→ 숲에 사는 목숨들을 모두 이야기하고
→ 숲에 무엇이 사는지 모두 이야기하고
→ 숲에 누가 사는지 모두 이야기하고
 …

 

  국어사전 보기글을 살펴봅니다. “실업 대책을 글감으로 쓴 글”이나 “실업 대책을 다룬 글”처럼 손질할 만합니다. 아니, 한겨레는 예부터 이처럼 이야기했습니다. “여성이 사회에서 어떤 지위인가를 얘기하도록”이나 “여성이 놓인 사회 지위를 얘기하도록”처럼 고쳐쓸 만합니다. 아니, 한국사람은 예부터 이와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한글을 참말 얼마만큼 아는가”나 “우리는 한글이 어떠한가를 참으로 얼마만큼 아는가”처럼 다듬을 만합니다. 아니, 이 나라 사람은 예부터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그 문제를 놓고 우리는 한 치도 물러설 수 없습니다”나 “그 문제에 우리는 한 치도 물러날 수 없습니다”처럼 손볼 만해요. 아니, 이 땅에서는 예부터 이러한 말투로 이야기했어요.


  알맞고 바르게 나타내는 말투를 생각하기를 빕니다. 슬기롭고 환하게 나타내는 말마디를 다스리기를 바랍니다. (4338.11.4.쇠./4345.11.18.해.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숲살이를 잘 알도록 도우려고 숲과 숲에 사는 모든 목숨들을 이야기하고

 

..

 


 우리 말을 죽이는 외마디 한자말
 (878) 관하다關 7 : 디자인에 관한 나의 이야기

 

디자인에 관한 나의 이야기를 세상에 꺼내놓게 되다니 두려운 마음과 신나는 마음이 반반씩이다
《이나미-나의 디자인 이야기》(마음산책,2005) 책머리에

 

 “나의 이야기”는 “내 이야기”로 고쳐야 알맞습니다. “나의 노래”가 아닌 “내 노래”이고, “나의 물건”이 아닌 “내 물건”입니다. 그렇지만 “내 삶”이나 “내 동무”보다는 “나의 삶(인생)”이나 “나의 친구”라 말하는 이들이 자꾸 늘어나고 말아요. ‘세상(世上)에’는 그대로 두어도 되나, ‘온누리에’나 ‘이렇게’로 손보면 한결 낫습니다. “꺼내놓게 되다니”는 “꺼내놓으니”로 손질하고, ‘반반(半半)씩이다’ 또한 그대로 둘 수 있습니다만, “나란히 엇갈린다”나 “똑같이 든다”나 “엇갈린다”로 손질해 봅니다.

 

 디자인에 관한 나의 이야기
→ 디자인에 얽힌 내 이야기
→ 디자인을 해 온 내 이야기
→ 디자인 일을 한 내 이야기
→ 디자인하며 살아온 내 이야기
→ 디자인을 말하는 내 책
 …

 

  ‘얽히다’라는 낱말이 있습니다. 예부터 한겨레는 “디자인에 얽힌 이야기”처럼 이야기했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글쓴이가 이녁 이야기를 책으로 묶었다고 밝히는 자리인 만큼, “디자인을 말하는 내 책”이라든지 “디자인 일을 해 온 이야기”쯤으로 풀어도 어울립니다. 하고픈 말을 생각하면서 알뜰살뜰 글살림을 여미기를 바랍니다. (4340.5.1.불./4345.11.18.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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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을 하며 살아온 내 이야기를 온누리에 꺼내놓으니, 두려운 마음과 신나는 마음이 똑같이 든다

 

..

 


 우리 말을 죽이는 외마디 한자말
 (1105) 관하다關 8 : 그에 관하여 이야기를

 

그런데 모든 사람들에게 티쭈라고 불리운 어린 소년이 있었으니 ……. 그에 관하여 이야기를 좀 해야겠습니다
《모리스 드리용/배성옥 옮김,최윤경 그림-초록색 엄지소년 티쭈》(민음사,1991) 11쪽

 

  “어린 소년(少年)”은 “어린아이”나 “사내아이”로 고쳐 줍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티쭈라고 불리운”은 틀린 말투는 아니지만, 한겨레 말투로는 입음꼴이 그닥 어울리지 않는 만큼, “모든 사람들이 티쭈라고 부르던”으로 손봅니다.

 

 그에 관하여 이야기를
→ 그 이야기를
→ 그 아이 이야기를
→ 이와 얽힌 이야기를
 …

 

  이 자리에서는 ‘-에 관하여’를 통째로 덜어낼 때가 한결 낫다고 느낍니다. “그 이야기를”이나 “이 이야기를”로 적어 주면 돼요. 살을 살며시 붙이고 싶으면, “그 아이 이야기를”이나 “이 아이 이야기를”로 적어 보고, “이와 얽힌 이야기를”이라든지 “이 아이와 얽힌 이야기를”이라고 적어도 어울립니다. “이 아이가 겪은 이야기를”이나 “이 아이가 살아온 이야기를”이라고 적어도 됩니다. (4341.5.9.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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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티쭈라고 부르던 사내아이가 있었으니 ……. 그 아이 이야기를 좀 해야겠습니다

 

..

 

 우리 말을 죽이는 외마디 한자말
 (1299) 관하다關 9 : 라면에 관한 한

 

라면에 관한 한 우리 엄마가 이 세상에서 최고다
《윤정모-누나의 오월》(산하,2005) 25쪽

 

  “이 세상(世上)에서”는 그대로 두어도 되지만, “이 땅에서”나 “온누리에서”로 손보면 한결 나아요. “최고(最高)다”는 “으뜸이다”나 “가장 훌륭하다”나 “가장 뛰어나다”로 손질합니다. 글흐름을 살피면, 라면 끓이기를 말하니까, “우리 엄마가 온누리에서 가장 잘 끓인다”처럼 손질해 볼 수 있어요.

 

 라면에 관한 한
→ 라면만큼은
→ 라면은 누구보다
→ 라면 끓이기에서는
→ 라면은
 …

 

  “라면에 관한 한(限)”이라 하면 외마디 한자말이 겹으로 달라붙습니다. “라면에 관해서”와 똑같은 뜻으로 쓰는 말투가 될 테고요. 아이들은 책을 읽으며 이러한 말투를 눈으로 배우고, 어버이나 둘레 어른이 이렇게 읊는 말투를 귀로 배웁니다.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지 않고 익숙하게 받아들입니다. 맞느냐 틀리느냐를 살피지 않고 오래오래 받아들여요.


  나는 내가 어릴 적부터 으레 듣던 말투를 떠올려 봅니다. “라면 끓이기라면 말이야”라든지 “라면을 끓인다면”이라든지 “라면에서만큼은”이라든지 “라면에서는”이라든지 “라면을 끓이는 자리에서는”이라든지 “라면이라면” 같은 말투를 하나하나 떠올립니다. 참으로 여러 말투를 들었어요. 둘레 어른들은 저마다 다른 말투로 이녁 생각을 나타냈어요. 그런데, 어느 무렵부터 다 다른 말투가 차츰 사라지면서 ‘-에 관한 한’이라든지 ‘-에 관해서는’ 같은 말투가 부쩍 늘어납니다.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잊어요. (4345.11.18.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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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은 우리 엄마가 온누리에서 가장 맛있게 끓인다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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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문가 멍청이

 


  이 나라에 날이 갈수록 ‘전문가’라 일컬을 만한 사람이 늘어난다. 이를테면, 생물학 박사라든지,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라든지, 주식투자 잘 하는 사람이라든지, 정치를 잘 하는 사람이라든지,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든지, 법원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든지, 세무서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든지, 총을 든 군인이라든지, 몽둥이를 든 경찰이라든지, 양복을 걸친 검사라든지, 수없이 많은 전문가라 일컬을 사람이 생긴다.


  또한, 초·중·고등학교에 교사라 일컫는 전문가가 있다. 학교에는 상담만 맡는 전문가하고, 양호실에 있는 전문가에다가, 영어만 가르친다거나 과학만 가르친다는 전문가가 있다. 버스나 기차나 비행기를 모는 전문가가 있다. 공장에서 기계를 다루는 전문가가 있다. 보일러를 고치거나 전기를 다는 전문가가 있다. 다리미를 든 전문가와 빵을 굽는 전문가가 있으며, 과일을 파는 전문가와 물고기를 파는 전문가가 있다. 머리를 깎는 전문가, 옷을 다루는 전문가, 집이나 땅을 사고파는 전문가가 있다.


  여느 살림집에는 집일을 도맡으며 밥을 차리는 사람이 있다. 이들 또한 뜻하지 않게 어느새 전문가처럼 집일을 한다. 아이들은 어린이집과 유치원과 학교를 거치면서 손전화 기계 다루는 전문가가 되는 한편, 피시방에서는 인터넷게임 전문가가 된다. 대학생쯤 되면 영어를 제법 할 줄 아는 전문가로 거듭나기도 한다.


  자격증 없는 사람이 없다 할 만하고, 새 자격증은 끝없이 생긴다. 그런데 좀처럼 한 가지 전문가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흙을 일구어 먹을거리를 빚는 전문가는 나타나지 않는다. 흙을 살찌우고 숲을 보살피는 전문가는 도무지 태어나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흙을 아끼고 숲을 사랑하는 사람은 ‘전문가’가 아니다. 이들은 그저 ‘사람’이다.


  사람이란 어떤 목숨인가. 말을 할 줄 알면 사람인가? 머리를 써서 일을 하거나 연필을 잡고 글을 쓸 줄 알면 사람인가? 두 다리로 걷고 두 손으로 물건을 쥐면 사람인가?


  나는 어떠한가 생각한다. 나는 ‘사람’이라 이를 만한가. 곧, 흙을 먹고 바람을 마시며 햇볕으로 자라나는 ‘사람’다운 모습을 옹글게 건사하는가 생각해 본다.


  사람이란, 돈을 버는 일꾼이 아니다. 사람이란, 어떤 일 한두 가지를 솜씨있게 할 줄 아는 전문가가 아니다. 사람이란, 물질문명을 북돋우거나 누리는 톱니바퀴가 아니다. 사람이란, 목숨이다. 싱그러이 숨을 쉬는 어여쁜 목숨일 때에 비로소 사람이다.


  지구별에 전기가 사라지는 날을 헤아려 본다. 지구별에 기름이 없어지는 날을 헤아려 본다. 자, 이 지구별에서 ‘어떤 사람’이 살아남을 만한가. 아니, 어떤 사람이 ‘삶을 누릴’ 만할까. 전기가 사라지고 기름이 없어질 때에, 도시에 깃든 사람들은 어떤 삶을 즐길 만할까. 20층 아파트나 40층 아파트에서 이들 도시내기는 어떤 삶을 빛낼 만할까.

 

  전문가라 일컫는 사람은 모두 ‘바보’라고 느낀다. 전문가이기 때문에 ‘멍청이’라고 느낀다. 이름을 얻거나 힘을 거머쥐거나 돈을 쓸 줄 안대서 ‘사람’이 되지 않는다. ‘전문가’는 되리라. 그러면, 물은 어떻게 마시지? 물꼭지를 틀면 되나? 가게에서 페트병에 담긴 먹는샘물 사다 마시면 되나? 햇볕은 어떻게 쬐지? 바람은 어떻게 마시지?


  아이를 낳으면 ‘아이 맡아 돌보는 전문가’ 손에 아이를 넘겨야 할까. 여덟 살이 되면 ‘초등교육 전문가’ 품에 아이를 보내야 할까. 마음이 맞는 짝꿍을 사귈 적에는 ‘연애상담 전문가’가 쓴 책을 읽어야 할까. ‘사진 찍는 전문가’를 불러 식구들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전문가’를 불러 일기를 써야 할까.


  스스로 모든 삶을 누리고 지으며 즐길 줄 알 때에 비로소 ‘사람’이면서 ‘목숨’이 빛난다고 느낀다. 스스로 ‘한두 가지만 잘 할 줄 아는 전문가’ 굴레를 털어내면서 온 삶을 손수 나누고 펼치며 어깨동무할 줄 알아야 바야흐로 ‘사람’으로서 아름다운 꿈과 사랑을 길어올릴 수 있다고 느낀다. (4345.11.18.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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