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잎과 찔레꽃

 


  찔레잎을 뜯어서 먹으면 찔레맛이 난다. 찔레꽃을 톡 따서 먹으면 찔레빛이 혀끝에 어린다. 푸른 잎사귀도 하얀 꽃잎도 모두 찔레나무 이루는 고운 숨결이다. 잎사귀는 푸른 맛과 숨결을 나누어 준다. 꽃은 하얀 맛과 숨결을 베풀어 준다. 아이들은 맑은 노랫소리와 웃음소리를 나누어 주고, 어버이는 깊은 사랑과 너른 믿음을 베풀어 준다.


  살랑 오월바람 불어 찔레잎 건드린다. 푸른 잎사귀는 한껏 푸르게 자라고, 하얀 꽃잎은 더 하얗게 빛난다. 찔레꽃 하얗게 흐드러지는 둘레에 곧 딸기알 붉게 맺혀 하얗고 붉은 오월빛 펼쳐 보이겠구나. 4346.5.15.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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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5-15 10:52   좋아요 0 | URL
함께살기님의 글과 찔레꽃이 어우러져,
오늘도 찔레꽃들이 하얗고 깨끗하게 피어있군요. ^^
장사익님,의 '찔레꽃'을 꺼내 들어야겠습니다. *^^*

파란놀 2013-05-16 00:11   좋아요 0 | URL
오월에는 푸른 물결 사이에
하얗게 넘실거리는
찔레꽃이
곧 다가올
여름을 알리는구나 싶어요
 


 환경책 (도서관일기 2013.5.12.)
 ―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 ‘서재도서관 함께살기’

 


  2007년 4월에 인천에 처음으로 ‘사진책도서관’을 열면서 가장 깊이 살핀 책 갈래는 사진책보다 환경책이었다. 사진책을 알뜰히 갖추는 도서관으로 꾸리려는 마음이면서도, 사진과 책과 사진책 헤아리는 사람들 마음밭에 ‘환경책 돌아보고 아끼는 숨결’ 깃들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우리 도서관에 들어오는 책손이 맨 먼저 들여다보는 책꽂이에는 환경책을 꽂았고, 사진책을 보여주기 앞서 환경책을 보도록 이끌었다.


  전남 고흥에서 씩씩하게 잇는 도서관에서는 예전처럼 환경책을 맨 먼저 보여주지 못한다. 인천에서는 마흔 평쯤 되는 건물 한 층만 쓸 수 있었고, 고흥에서는 옛 흥양초등학교 교실 넉 칸을 쓰기에, 이제 환경책은 두 번째 교실로 들어오고, 두 번째 교실에는 환경책과 문화책과 예술책과 종교책과 국어사전과 한국말 자료하고 함께 어우러지는 곳에 있다.


  새로 들인 나무책꽂이에 환경책을 옮겨 꽂는다. 환경책과 등을 맞댄 나무책꽂이에는 ‘묵은 책’을 꽂는다. 쉰 해를 묵는다든지 일흔 해를 묵는다든지 하면서 오랜 나날 살아낸 ‘묵은 책’을 등 맞댄 자리에 꽂는다.


  환경책을 한 자리에 널따랗게 꽂고 보니 시원하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볼는지 모르나, 나로서는 시원하다. 갓 나올 적에 장만한 환경책, 판이 끊겨 사라진 녀석을 헌책방에서 어렵사리 찾아낸 환경책, 나라밖에서 나온 환경책, 여러 가지 골고루 섞는다. 나무책꽂이 한쪽은 너비가 좁아, 이곳에는 책을 안 꽂기로 한다. 이것저것 아기자기한 물건을 놓자고 생각한다.


  이라크에 군인 보내지 말자고 외치던 분들이 ‘밥굶기싸움’을 하던 때 나누어 주던 노란 수건을 나무책꽂이 두 칸 빈틈에 박는다. 이 노란 수건을 여러 해 자전거에 매달고 다니기도 했다. 오래도록 비바람 맞으며 애썼으니 도서관 책꽂이 한쪽에서 조용히 쉬렴.


  큰아이는 바퀴칠판에 그린 그림을 지웠다가 새로 그린다. 작은아이는 누나 꽁무니 졸졸 좇으며 논다. 큰아이가 동생한테 그림책 읽어 주기도 한다. 아버지 눈치 슬슬 보면서 무언가 개구진 장난을 치기도 한다. 다 좋은데 마실 물은 엎지르지 말자. 아직 우리 도서관에서는 전기도 물도 못 쓰잖니. 물 엎으면 다시 길어와야 해. 게다가 너희들 도서관에서 물놀이 하다가 물잔 하나 깨뜨렸어. (ㅎㄲㅅㄱ)

 


* 사진책도서관(서재도서관)을 씩씩하게 잇도록 사랑스러운 손길 보태 주셔요 *
* 도서관 지킴이 되기 : 우체국 012625-02-025891 최종규 *
* 도서관 지킴이 되어 주는 분들은 쪽글로 주소를 알려주셔요 (011.341.7125.) *
* 도서관 나들이 오시려면 먼저 전화하고 찾아와 주셔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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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5-15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이, 오늘따라 더욱 환하고 시원합니다.~
벼리와 보라는, 오늘도 여전히 즐겁고 기쁘게 놀고 있군요.~^^
정말 행복한 아이들이에요. ^^ 모든 아이들이 이렇게 행복하게 살아야되는데요..
ㅎㅎ 산들보라는 오늘 누나의 머리띠를 했네요~? 하얀 고무신도 이쁜 궁둥이도 너무 귀여워요. ㅋㅋ

파란놀 2013-05-16 00:10   좋아요 0 | URL
모든 아이들도,
모든 어른들도
즐겁고 가벼운 마음 되어
하루 누릴 수 있다면
참 아름다우리라 생각해요
 
명랑하라 팜 파탈 문학과지성 시인선 340
김이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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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살갗
[시를 말하는 시 20] 김이듬, 《명랑하라 팜 파탈》

 


- 책이름 : 명랑하라 팜 파탈
- 글 : 김이듬
-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2007.11.30.)
- 책값 : 8000원

 


  삼월에 서울로 마실을 가니 아직 나뭇잎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사월에 서울로 마실을 가니 찬비와 찬바람 불며 나뭇잎 새로 돋기 벅차 보였습니다. 오월에 서울로 마실을 가니 비로소 앙증맞게 푸른 잎사귀 조물조물 돋으려 하는구나 싶었습니다.


  전남 고흥에서는 삼월 막 지나가면서 현호색 파란 꽃망울 맑게 노래했고, 사월 접어들며 현호색 꽃송이는 모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서울 도봉구 어느 뒷동산 한켠에서는 사월이 저물려 하는 때에 ‘현호색 새 잎사귀’ 돋으려고 애를 쓰더군요. 여느 도시사람은 저 풀잎이 현호색 새 잎사귀인지 그냥 ‘잡풀’인지 못 알아보겠구나 싶었어요.


  서울부터 전남 고흥 사이는 오백 킬로미터가 넘을 테니, 한 달 반 남짓 철이 벌어질 만하리라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스산하고 차가우며 쓸쓸하다 느꼈어요. 오월이 다 되는데 들풀이나 들꽃을 흐드러지게 만날 수 없다면, 서울은 얼마나 사람이 살 만한 곳인지 궁금했어요.


.. 너와 나 오래 입 맞추게 ..  (세이렌의 노래)


  손가락으로 살며시 들꽃송이 쓰다듬습니다. 손가락으로 살포시 들풀 한 줄기 꺾습니다. 들꽃송이 달린 들풀을 물에 헹구어 날로 먹습니다. 짙은보라빛 환한 꽃망울 달린 갈퀴나물을 먹습니다. 옷자락에 척척 들러붙는 갈퀴덩굴을 먹습니다. 가만히 바라보면 풀이요 꽃이고, 살짝살짝 뜯어서 입에 넣으면 반가운 밥이자 목숨입니다.


  매화나무 언저리에서 얼쩡거리면서 푸르게 돋은 잎사귀 사이사이 매화 열매 얼마나 달렸는가 살핍니다. 아직 푸르딩딩한 매화 열매는 여물려면 한참 멀었습니다. 참 많은 사람들은 푸르딩딩한 매화 열매를 너무 일찍 따서 효소를 담근다느니 무얼 한다느니 하는데, 매화도 살구와 마찬가지로 누렇게 익은 뒤에 먹는 열매입니다. 우리 식구는 푸르딩딩하고 단단한 매화 열매가 노르스름 익으면서 말랑말랑할 때를 기다립니다.


  지난해 즐겁게 먹던 들딸기밭을 요즈음 거의 날마다 들여다봅니다. 하얀 꽃망울 거의 다 떨어졌으니 언제쯤 새빨간 알맹이 흐드러질까 하고 바랍니다. 여섯 살 큰아이는 “어제 딸기 먹었어.” 하고 말합니다. 여섯 살 아이한테는 지난해도 어제와 같을까요. 어제도 지난해와 같을까요.


.. 엄마는 떡을 썰고 나는 글씨를 쓴다 / 불을 끄고, 엄마는 떡을 썰고 나는 글씨를 쓰고 / 홈을 판다 등판에 쓰는 일이 가장 원만하다 / 나도 잘 모른다 뭐라고 써야 하는지 / 얼빠지게 재빨리 쓰는 게 중요하다 ..  (인도차이나)


  바야흐로 미나리풀이 좀 억세다 싶은 오월 한복판입니다. 새롭게 돋는 모시풀은 뜯어서 곧바로 먹지 않으면 푸석푸석 이내 시듭니다. 환삼덩굴도 이와 같은데, 웬만한 들풀은 그 자리에서 뜯어 그 자리에서 먹어야 제맛이 돕니다. 흙에 뿌리내리고 햇살을 바라며 빗물 마시는 들풀은 언제나 그때그때 뜯어서 먹으며 몸을 살찌웁니다.


  비닐집에서 키운 푸성귀는 비닐 씌우고 마트에 여러 날 두어도 푸른 빛깔 바래지 않습니다. 비닐집에서 키운 푸성귀는 차로 실어나르거나 택배 상자로 부쳐도, 또 여느 살림집 냉장고에서 다시 여러 날 묵어도 이럭저럭 먹을 만합니다. 비닐집에서 키울 때부터 더 오래 가도록 손을 썼겠지요.


  개구리는 그날그날 먹이를 찾아서 먹습니다. 제비와 까치와 직박구리와 참새와 까마귀와 누렁조롱이와 소쩍새와 꾀꼬리 들은 모두 그날그날 먹이를 찾아서 즐깁니다. 지렁이도 파리도 그날그날 먹이를 찾아서 누립니다. 사람을 뺀 모든 목숨붙이는 언제나 그때그때 그날그날 밥을 찾아서 나눕니다. 사람들은 하루에 두어 끼니 먹으면서도 으레 ‘묵은 밥’을 먹습니다.


.. 누가 봤을까요 나도 날 못 봤는데 / 그러나 나는 아름다워요 ..  (푸른 수염의 마지막 여자)


  조용한 시골집은 기계를 안 쓸 때에 조용합니다. 시골마을이라 하더라도 경운기를 몰거나 트랙터를 돌리거나 짐차를 부르릉 달릴 때면 시끄럽습니다.


  시끄러운 도시는 자동차가 달리지 않으면 조용합니다. 깊은 밤이나 새벽, 찻길에 자동차 하나 다니지 않는 길에 서 봐요. 얼마나 고요하며 얼마나 애틋한지 느껴 봐요.


  나는 스무 살 갓 넘긴 앳된 젊은이였을 적, 새벽 두 시 즈음 일어나 새벽 배달부와 청소부 빼고는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고요하고 호젓한 골목길을 자전거를 달려 신문을 돌리며 보낸 서울살이가 참 즐거웠습니다. 아니, 서울에서 살며 즐거웠던 일은 첫째, 헌책방마실, 둘째, 신문돌리기, 이렇게 두 가지였어요. 서울에 골목마다 무척 많던 헌책방으로 찾아가면 아름다운 책 하나 만나면서 모든 소리와 사물이 가라앉았어요. 아주 깊은 새벽나절 자전거 구르는 소리 하나만 골목을 가로지르며 던지는 신문 한 장은 내 마음을 차분하게 다스려 주었어요. 새벽 두 시 반을 지나면 술에 전 사람 모조리 사라지고, 새벽 세 시 반 즈음이면 다른 배달부 하나둘 일어날 무렵이라, 꼭 이맘때, 두 시 반부터 세 시 반 사이 골목길은 새벽빛과 새벽별과 새벽소리를 고즈넉하게 누리는 한복판이었어요.


.. 어두워지면 개구리와 새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  (커다란 눈동자)


  동이 트면서 새 하루 열립니다. 달이 뜨면서 새 하루 저뭅니다. 해님이 머리 위에서 따사롭게 내리쬐는 동안 꽃망울 벌어지고 잎사귀 푸르게 빛납니다. 해님이 머리 위에서 포근하게 드리우는 동안 들도 숲도 바다도 냇물도 해맑은 소리로 노래를 부릅니다.


  조그마한 나무 한 그루라 하더라도, 나무그늘은 시원합니다. 널따란 건물이 드리우는 그림자라 하더라도, 건물 그림자는 조금도 시원하지 않고 쌀쌀맞습니다. 푸른 숨결 일렁이는 나무는 그늘 한켠에도 고운 숨결 나누어 줍니다. 메마른 시멘트로 지은 높은 건물은 그림자 한 뼘에도 차가운 기운 내뿜습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어떤 학교를 다니는가 헤아려 봅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나무 한 그루 못 누리는 시멘트 교실에 갇힌 채 시험공부 닦달에만 시달리지 않나 궁금합니다. 나무로 지은 집을 누리지 못하는 아이들이고, 운동장 한쪽에 선 나무를 쓰다듬을 수 없는 아이들이며, 집이나 마을 어디에서도 싱그러운 나무하고 놀거나 인사할 수 없는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에 앞서 어른들부터 나무하고 등졌어요. 어른들은 자가용을 모느라 나무 몽땅 베었어요. 어른들은 아파트 짓고 공원 세우며 공장과 발전소와 고속도로 닦느라 나무 자랄 숲 모조리 밀었어요.


.. 이것 좀 봐 놀라워 창문을 열어젖히고 노을을 바라봤다 ..  (일주일)


  살갗으로 느껴요. 살갗으로 바람을 느껴요. 살갗으로 만나요. 살갗으로 냇물과 도랑물과 바닷물을 만나요. 살갗으로 사랑해요. 살갗으로 풀과 나무와 숲을 사랑해요.


  책 한 권도 나무예요. 책을 이루는 종이는 나무한테서 왔어요. 책시렁도 나무예요. 책을 꽂는 책시렁도 나무로 짜요. 책을 쓴 사람들은 나무로 만든 연필로 글을 썼어요. 책을 읽는 사람은 나무를 읽는 사람이고, 책을 쓰는 사람은 나무를 쓰는 사람이에요.


  시를 쓰는 사람도, 시를 읽는 사람도, ‘시’라는 이름을 빌린 나무를 쓰거나 읽어요. 시를 누리는 사람도, 시를 나누는 사람도, ‘시’라는 옷을 입은 숲을 누리거나 나누는 삶이에요.


.. 과일을 사라며 고래고래 고함지르는 행상인이 지나가고 / 얼떨결에 심드렁한 개처럼 남자는 내 치마 아래로 기어들어간다 ..  (여드름투성이 안장)


  김이듬 님이 빚은 싯노래 그러모은 《명랑하라 팜 파탈》(문학과지성사,2007)을 읽습니다. 김이듬 님은 김이듬 님이 삶을 누리는 터전에서 이녁 사랑을 노래하고 춤추겠지요. 다른 사람들 모습을 구경하면서 읊는 싯노래 아닌, 바로 김이듬 님 삶을 노래하고 들려주는 싯말이요 싯자락일 테지요.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살갗으로 만지며 느낄까요. 시인은 어디에서 무엇을 살갗으로 스치며 느낄까요. 눈을 살포시 감습니다. 눈을 감고 살갗으로만 바라봅니다. 내 살갗에 닿는 풀잎은 장미잎인지 동백잎인지 후박잎인지 부추잎인지 유채잎인지 갓잎인지 미나리잎인지 덩굴잎인지 찬찬히 가누어 봅니다. 내 살갗으로 스치는 나뭇줄기는 모과나무인지 매화나무인지 뽕나무인지 감나무인지 소나무인지 잣나무인지 탱자나무인지 화살나무인지 가만히 곱씹어 봅니다.


  우리들은 두 눈으로 무엇을 바라볼까요. 우리들은 살결로 무엇을 느낄까요. 우리들은 귀로 무슨 소리를 듣나요. 우리들은 입으로 무슨 노래를 부르나요. 4346.5.15.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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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석의 유쾌한 일본만화 편력기
이명석 지음 / 홍디자인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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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만화책 즐겨읽기 238

 


만화책을 어떻게 읽는가
― 이명석의 유쾌한 일본 만화 편력기
 이명석 글
 홍디자인 펴냄,1999.2.8./8500원

 


  만화책은 즐겁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한 권 집어들어 즐겁게 한 장 두 장 읽고 보면 어느새 한 권을 덮습니다. 만화를 그리는 이들은 낱권책 하나 그리기까지 퍽 기나긴 나날 보내는데, 만화책 읽는 사람은 그야말로 훌러덩 읽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따지면 글 한 줄 써서 책 한 권 꾸리기까지 퍽 오래 걸리지만, 글책 읽는 사람도 책 한 권 쉽게 훌러덩 읽어요. 제아무리 두툼한 책이라 하더라도 며칠 들이면 다 읽을 수 있으나, 얇은 책이든 두툼한 책이든 한 권 부피 될 글을 쓰자면, 몇 해나 열 몇 해 또는 스물 몇 해를 들이곤 해요.


  만화책은 한 번 읽고 덮지 않습니다. 훌러덩 한 권 읽어내지만, 다시 한 번 읽고 또 한 번 읽습니다. 나는 어릴 적부터 만화책을 한 번 손에 쥐면 적어도 대여섯 번은 그 자리에서 되읽고, 하루 동안 열 차례 남짓 되읽었습니다. 만화책은 되읽으면 되읽을수록 새롭게 읽힙니다. 앞서 읽을 적에는 못 본 그림을 다음에 알아봅니다. 두세 차례 읽으며 못 깨달은 대목을 너덧 차례 읽으며 시나브로 깨닫습니다.


  사진책을 읽을 때에도 이와 같다고 느껴요. 사진은 후루룩 넘기면 한 권 쉽게 읽는다 하겠지요. 그렇지만 제대로 살피거나 훑거나 돌아본다고 할 수 없어요. 사진책도 만화책도 열 번 스무 번 잇달아 읽으면서 찬찬히 곰삭힙니다.


  시를 읽을 때에도 산문을 읽을 때에도 소설을 읽을 때에도 이와 같겠지요. 노래를 부를 때에도 이와 같을 테지요. 한 번 해서 끝맺는 놀이(책읽기)는 없어요. 고무줄놀이가 되든 땅금놀이가 되든 열 번 백 번 천 번 되풀이하면서 새롭게 즐깁니다.

 

 

 

 


.. 《메종일각》은 바로 우리 이웃에 살고 있는 누군가의 이야기 같다. 그곳에는 화려한 그림도, 번쩍이는 환상도 없다. 그저 구질구질한 우리들의 방에서 조금은 별스럽지만 재미있는 사람들이 웃고 떠들고 있을 뿐이다. 사는 것은 힘들지만, 그래도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서기 2천 년을 눈앞에 둔 첨단 국가 일본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들, 오직 과거만이 그릴 수 있는 아름다움이 이 작품 속에 있다. 다카하시 루미코도 이런 작품을 다시 그리지는 못할 것이다 ..  (31쪽)


  이명석 님이 쓴 만화비평 《이명석의 유쾌한 일본 만화 편력기》(홍디자인,1999)를 읽으며 곰곰이 생각합니다. 이명석 님은 만화비평으로 내놓은 책에 붙인 이름부터 ‘즐거움(유쾌)’을 말합니다. 이명석 님 스스로 즐겁게 읽은 만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다른 사람 눈치껏 이런 명작 저런 걸작 소개하는 만화비평 아닌, 이명석 님 스스로 즐겁게 읽은 만화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명석 님으로서는 즐겁게 읽은 만화책 이야기를, 만화비평이라 하는 느낌글을 쓸 적에는 썩 즐겁게 글을 썼다고는 느끼기 어렵습니다. 숱한 문화비평이나 예술비평을 생각한다면 퍽 쉽게 쓴 듯 여길 만하지만, 이명석 님 스스로 ‘즐겁게 읽었다’는 느낌이 살풋 묻어나지는 못하는구나 싶어요.


  즐거움이란 느낌입니다. 즐거움이란 생각이 아닙니다. 만화를 읽는 즐거움이란, 만화책 한 권에서 나한테 감겨드는 즐거운 느낌이자 마음이자 사랑입니다. 이 만화는 이렇고 저 만화는 저렇다 하고 금을 긋거나 가를 때에는 느낌 아닌 생각이 됩니다.


  생각을 쓰는 일은 잘못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생각을 쓸 수 있어요. 그런데, 생각을 섣불리 밝힌다면 따분합니다. 만화를 그린 이들마다 이녁 느낌과 마음과 사랑을 즐겁게 담으려고 땀을 흘리는데, 정작 만화를 읽는 사람은 즐거운 느낌이나 마음이나 사랑이 아닌, ‘비평을 하려는 생각’이 되면, 만화책을 꾸밈없이 누리거나 맛보는 쪽하고 멀어져요.


  《도레미하우스》라는 이름으로도 나오고, 다른 이름으로도 해적판이 나온 적 있는 《메종일각》이라는 다카하시 루미코 님 만화책이 ‘오직 과거만이 그릴 수 있는 아름다움’이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게다가 다카하시 루미코 님이 이 같은 작품을 ‘다시 그리지는 못’하리라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즐겁게 읽었으면 즐겁게 느낌글을 써야지요. 섣부른 비평을 쓸 일이 아닙니다. 더욱이, 《메종일각》이든 《도레미하우스》이든 또 다른 해적판이든, 이 만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조금도 ‘삶이 힘들’지 않습니다. 가난하게 살든 말든 스스로 삶을 즐깁니다. 곧, 만화를 그리는 다카하시 루미코 님은 이녁 삶을 이녁 스스로 즐겨요. 만화를 그리는 즐거움 그대로 만화 주인공 삶이 태어납니다. 다카하시 루미코 님 단편만화이든 《란마 1/2》이든, 요즈음 꾸준히 그리는 《경계의 린네》이든, 또 《이누야샤》이든, 모두 즐거움이 밑바탕이라고 느낍니다. 즐겁게 울고, 즐겁게 놀며, 즐겁게 어우러지는 삶을 노래해요.


.. 마루꼬짱이 국내에 제대로 번역되어 나오기 전에, 복고 바람을 탄 몇몇 만화들이 한국에서도 나왔다. 그 중에는 모방 시비를 불러일으킬 만큼 마루꼬짱 스타일과 대단히 흡사한 작품들도 있었다. 그림 스타일과 상황 설정이야 ‘마루꼬짱’ 역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니, 오리지널이니 표절이니 하는 이야기를 중언부언하고 싶지는 않다. 아이디어를 빌려오더라도 한국인들의 정서와 체험의 공감대는 한국 작가가 더 잘 표현할 수도 있으니 그 만화가 훨씬 나으리라고도 생각된다. 그러나 마루꼬짱만큼 공감할 수 있는 만화를 구경하기는 힘들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과거를 그린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시절이 지닌 솔직 담백함을 표현할 수 있는 작가의 꾸밈없는 서정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  (61쪽)

 

 

 

 

 


  《꼬마 마루꼬짱》을 말하는 자리에서도 이명석 님은 “아이디어를 빌려오더라도 한국인들의 정서와 체험의 공감대는 한국 작가가 더 잘 표현할 수도 있으니 그 만화가 훨씬 나으리라고도 생각된다” 하고 말하다가는, 이내 “그러나 마루꼬짱만큼 공감할 수 있는 만화를 구경하기는 힘들다” 하고 덧붙여요. 스스로 생각을 함부로 밝히려 하면서 스스로 어긋납니다. 이런 말은 참 말이 안 되어요.


  빅토르 위고를 생각해 봐요. 빅토르 위고가 프랑스사람이라 우리 가슴을 찡하고 못 울릴까요. 빅토르 위고 작품이 프랑스 삶터를 그리니, 한국 삶터하고 동떨어진 이야기로 여길 만할까요. 한국 작가 누군가 빅토르 위고 작품을 흉내내거나 배워서 새로운 소설을 쓰면, 이렇게 흉내내거나 배워서 쓴 소설이 ‘한국사람 마음에 더 잘 와닿을 작품’이 될까요.


  한국사람 마음을 한국사람이 더 잘 나타낼 수 있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한국사람이면서 정작 한국사람 마음을 하나도 모르는 작가들이 퍽 많아요. 한국에서 살아가는 한국사람이지만 한국말을 슬기롭게 배우지 않고, 한국말을 올바르게 쓰지 않는 사람 매우 많아요. 한국에서 지내는 한국사람이지만, 이웃 한국사람 넋을 따사롭게 보듬지 못하는 사람 무척 많아요.


  《꼬마 마루꼬짱》이 일본사람 마음만 건드린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나는 이 만화책을 ‘일본말 모르면서 일본책으로 헌책방에서 만나서 읽을 적’에도 따스함 느끼면서 눈물이 핑 돌곤 했어요.


  《금색의 갓슈》나 《동물의 왕국》을 그린 라이쿠 마코토 님 만화책도, 《이치고다 씨 이야기》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나 《은빛 숟가락》을 그린 오자와 마리 님 만화책도, 《머나먼 갑자원》이나 《도토리의 집》을 그린 야마모토 오사무 님 만화책도, 《당신의 손이 속삭일 때》나 《푸른 하늘 클리닉》을 그린 카루베 준코 님 만화책도, 《나츠코의 술》이나 《우리 마을 이야기》를 그린 오제 아키라 님 만화책도, 모두 ‘일본에서 일본사람이 그린 일본 이야기’이지만, 한국에서 한국사람으로서 읽어도 가슴을 찡하게 적시면서 아름다운 꿈과 사랑을 헤아리도록 북돋운다고 느낍니다.


  한국사람이니까 한국 작가 만화책이 더 애틋하거나 사랑스러우리라 느끼지 않아요. 아름다운 만화라면 어느 나라 사람이 그렸든 아름답습니다. 《캄펑의 개구쟁이》는 말레이지아사람이 그렸지요. 《아버지와 아들》은 독일사람이 그렸어요. 대수로울 대목 하나 없어요.


  이명석 님은 “일본 만화 편력기”라고 책이름에서 밝히는데, 이명석 님이 즐긴 만화가 일본 만화이든 서양 만화이든 대수롭지 않아요. 이명석 님은 그저 이명석 님 스스로 좋아하거나 사랑하고픈 아름다운 만화를 즐겼을 뿐이에요. 그 만화책들이 모두 일본책이었다 해서 굳이 “일본 만화”라 할 까닭 없고, 이 책들이 모두 만화라서 애써 “만화 편력”이라 할 까닭 없어요. 이명석 님 마음에 따사롭게 스며든 ‘아름다운 책’을 읽은 삶 아니겠어요? 이명석 님 가슴에 포근하게 감기는 ‘아름다운 삶’ 일구는 사람들 만난 이야기 아니겠어요?


  책은 어떻게 읽을까요. 만화책은 어떻게 읽을까요. 네, 책이든 만화책이든 가슴으로 읽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사귈까요. 한솥밥 먹는 살붙이하고 어떻게 살아가나요. 네, 누구하고나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사랑을 나누고 사랑을 읽으며 사랑을 말하는 삶입니다. 4346.5.15.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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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말 ‘존재’가 어지럽히는 말과 삶
 (164) 존재 164 : 특별한 존재 2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와쿠는 나에게 특별한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하시바 마오/이상은 옮김-나의 오늘 (2)》(학산문화사,2013) 75쪽

 

  한자말 ‘특별(特別)한’은 그대로 둘 수 있지만, ‘남다른’으로 손볼 수 있습니다. 보기글 흐름으로 살피면, ‘애틋한’이나 ‘사랑스러운’이라든지 ‘떼어놓을 수 없는’이나 ‘떨어질 수 없는’으로 손보아도 어울립니다.

 

 특별한 존재였는지도
→ 특별한 사람이었는지도
→ 남다른 사람이었는지도
→ 애틋한 사람이었는지도
→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는지도
→ 남이 아니었는지도
→ 떨어질 수 없는 사람이었는지도
 …

 

  애틋한 사람이라면 서로 좋은 ‘짝’이라 할 만합니다. 서로 좋은 ‘짝’은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운 ‘사이’입니다. ‘반쪽’이나 ‘벗’이나 ‘님’ 같은 낱말을 넣을 수 있어요. ‘넋’이라든지 ‘숨결’ 같은 낱말을 넣어도 돼요. 마음이 맞는 두 사람이라면, 서로 넋을 보살필 테고, 마음을 살찌우는 숨결이라 하겠지요.


  빗대는 말마디로, “나한테 남다른 빛이었는지도”라든지 “나한테 애틋한 등불이었는지도”라든지 “나한테 사랑스러운 날개였는지도”라든지 “나한테 아주 뜻깊은 꿈결이었는지도”처럼 적을 수 있습니다. 서로 아끼는 마음을 헤아리면서 찬찬히 옮겨적으면 됩니다. 4346.5.14.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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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와쿠는 나한테 애틋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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