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글, 소리나는 글

 


  누구나 종이에 글을 쓰던 지난날에는 ‘조용한 글’이었다. 이제 거의 모두 셈틀 켜서 글을 쓰는 이즈음에는 ‘소리나는 글’이 된다. 자판을 두들기는 소리가 흐르고, 셈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깊은 밤에는 종이에 연필이나 펜으로 글을 쓰더라도 사각사각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이 사각사각 소리는 개구리나 풀벌레 노랫소리와 함께 아이들 새근새근 재우는 소리일 테지.


  예전에 등불이나 촛불 조그맣게 밝혀 조용히 글을 쓰려던 이들은 이녁 아이들 깨우지 않으려고 얼마나 살금살금 차근차근 글힘을 북돋았을까. 나 또한 두 아이가 깊은 밤에 즐거운 밤노래 한껏 들으면서 꿈나라 누릴 수 있기를 빈다. 4346.8.4.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글쓰기 삶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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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큰아이가 아버지한테

 


  어느 날 큰아이가 아버지한테 말한다. “아버지, 그림책 꽂을 자리 없으니 이제 내 책 사지 마요.” 그래 우리 조그마한 집에 방이며 마루이며 네 그림책 넘쳐서 바닥에서 뒹구는데 네 그림책을 자꾸 사기만 하는구나. 이제 네가 안 읽는 그림책은 도서관으로 옮겨야 할 텐데 말야. 아니면, 네 그림책 장만해서 우리 서재도서관에 놓은 다음, 우리 집에 쌓인 책을 서재도서관으로 옮기면서 새로운 그림책을 집으로 가져오든지. 집부터 정갈하게 치우고서 책을 읽든 사든 해야겠구나. 4346.8.4.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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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가 되고 싶으면

 


바보가 되고 싶으면 따져라!
나이를!
학벌과 학력을!
가진 돈과 집과 땅을!
얼굴과 몸매와 키를!
옷차림과 매무새를!
말투를!

 


4339.10.21.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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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에 쓴 글을 문득 떠올려 다시 읽고는, 참 재미난 글 쓴 적 있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그러고 보니 '등짐'이라는 이름으로 꼭 글 하나 써서, 사람들한테 이야기하고 싶었군요. '책'과 얽힌 일을 하는 사람들이 퍽 많아요. 등짐을 지며 책일 하는 사람 이야기는 아직 거의 어느 누구도 쓴 적이 없으리라 느낍니다. 등짐을 지면, 혼자서 네 시간쯤 들여 책 2만 권을 나를 수 있어요.

 

 

등짐

 


  지난 2006년 10월 어느 화요일, 내 어버이 이삿짐을 나르느라 오랜만에 등짐을 집니다. 책상자 하나를 밑에 깔고, 위에도 책이 잔뜩 담긴 바구니를 얹습니다. 책바구니를 혼자서 앞으로 안으며 들자면 허리가 너무 아프고 힘듭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등짐으로 들면 책상자 하나 더 나를 수 있고 허리도 덜 아픕니다. 함께 짐을 나르는 다른 분은 등짐을 안 집니다. 아마 힘들어서일 수 있고, 등짐을 져 보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도 예전에, 그러니까 어린 날과 젊은 날 무척 힘들게 살아오신 줄 압니다. 그렇지만 교감을 거쳐 교장이 된 이제는 딱히 힘들 일이 없다고 느낍니다. 몸으로는 말이지요. 그리하여 제 느낌으로는 일을 하실 줄 잊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더욱이 이삿짐 나르기는 거의 안 해 보셨겠지요. 문득, 2000년이었나, 언젠가 아버지가 제 살림집 이사할 때 도와주신 일이 떠오릅니다. 그때 제 방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책더미를 보며 “아유, 뭔 책이 이렇게 많아? 아유…” 하면서 진저지를 치셨습니다. 저는 이때 책꾸러미를 넷씩 날랐습니다. 왼겨드랑이와 오른겨드랑이에 책꾸러미를 하나씩 낀 뒤 왼손과 오른손으로 하나씩 들면서.

 

  바구니에 담긴 책은 끈으로 묶었으면 얼추 세 묶음. 이만한 책을 바구니에 담으면 하나만 따로 들기도 벅찹니다. 척 보아도 이삿짐을 안 날라 본 티가 납니다. 그동안 포장이사만 하셨으니, 이삿짐 꾸리는 법도 잊으셨겠네요.

 

  등짐을 나르는 동안 이마에 맺힌 땀이 방울이 져서 뚝뚝 떨어집니다. 아귀힘은 조금씩 풀리고 팔뚝이며 어깨가 뻐근합니다. 그래도 마지막 등짐까지 다 나릅니다. 지난날 출판사 영업부에서 일할 때 저한테 등짐을 가르쳐 준 배본회사 아저씨가 생각나네요. 도매상에서 전집상자를 전문으로 나르던 아저씨들도 생각나고요. 배본회사 아저씨는 젊은 나이에 그만 허리가 삐끗하고 말았는데, 힘으로 날라서 삐끗한 게 아니라, 꽤나 많은 책을 나르는 동안, 그 출판사 사람 가운데 어느 누구도 고개 한 번 내밀지 않고 안 도와주느라, 혼자서 낑낑대며 일을 하다가 계단에서 미끄러지며 삐끗했다고 들었습니다. 도매상 전집상자 짐꾼 아저씨는 쉰 줄이 넘은 듯했는데도 손수 만든 등지게에 상자 넷을 싣고 척척 거뜬히 날랐습니다. 이분들이 등짐을 나를 때 보면, 어느 누구도 서두르지 않고, 더 많이도 더 적게도 나르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같은 빠르기로 같은 무게 짐을 나를 뿐입니다. 자칫 힘으로 짐을 날랐다가는 얼마 나르지 못하고 몸이 다치거나 지쳐 버리니까요.

 

  자전거를 타고 충주에서 서울로, 또 서울에서 충주로 오가면서 생각해 봅니다. 처음에는 죽어라 달렸어요. 이렇게 죽어라 달리며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쉼없이 달렸어요. 그래, 이렇게 달려서 목적지에 닿으면 거의 뻗습니다. 그리곤 몸이 되살아나기까지 한 시간 남짓을 해롱해롱 한숨만 들이켜면서 쉬지요. 요새는 죽어라 달리지 않습니다. 때때로 발판을 힘껏 밟기도 하지만, 몸에 어느 만큼 땀이 나야 달리기도 덜 고단하고 꾸준하게 달릴 수 있기 때문이에요. 머지않아 겨울이 다가오는데, 겨울철에는 땀이 식지 않도록 알맞게 달려야 합니다. 땀이 식으면 추워서 못 달려요. 백오십 킬로미터쯤 되는 길을 한나절 동안 달리자면 그야말로 처음과 끝이 똑같을 만큼 꾸준하게 달려야 합니다.

 

  예전에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쓸 때면, 서너 시간이고 대여섯 시간이고 거의 꼼짝도 않고 기계처럼 글을 써댔습니다. 참 엄청나게 많이 썼어요. 요새는 한두 시간 앉아서 쓰면 참 오래 쓰는 셈인데, 어느 만큼 쓴 뒤 자리에서 일어나 바람도 쐬고 설거지나 청소나 책 갈무리를 합니다. 살짝 드러누워 허리를 펴기도 하고, 책도 읽습니다. 가끔 자전거 타고 이웃마을에 나들이를 가기도 합니다. 돌이켜보면, 글쓰기를 할 때 한 자리에서 꿈쩍 않고 밀어붙이듯 글을 쓰면 훨씬 많이 쓸 수는 있지만, 나중에 다시 보면 썩 내키지 않는 글이 꽤 보입니다. 이와 달리, 쓰는 틈틈이 쉬고 한숨을 돌린 뒤 다시 글을 되짚으면서 차근차근 쓰노라면, 시간이 제법 지난 다음 다시 보아도 그럭저럭 마음에 들곤 해요.

 

  모처럼 등짐을 져서 그런지, 어제 하루는 거의 누워 지내다시피 했어요. 글을 쓰건 책을 읽건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참 힘들었습니다. 누워 있어도 등허리가 쑤셨고요. 하루 더 지난 오늘은 퍽 나아졌습니다. 하루 더 가면 거의 다 풀리겠지요. 4339.10.19.나무/4346.8.4.손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책과 헌책방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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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를 떠나는 책읽기

 

 

  사람들이 휴가를 얻어서 어디론가 떠납니다. 아니, 도시에서 살아가며 회사나 공장을 다니던 사람들이 이레쯤 쉴 겨를을 얻어, 비로소 식구들과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보내면서 어디론가 먼길을 나섭니다. 물 맑고 바람 시원한 데를 찾아서 떠나는 일이 휴가라기보다, 여느 때에는 눈 마주치며 말 섞기조차 못하던 한식구가 모처럼 스물네 시간을 이레쯤 함께 보내는 겨를이 휴가 아닌가 하고 느낍니다.


  나도 2003년 8월 31일까지는 회사(출판사)에 다녔습니다. 그러니, 이때에는 나도 휴가라는 며칠 쉴 틈을 얻었습니다. 출판사라는 회사는 거의 다 서울에 있으니, 내 삶자리도 서울이었습니다. 나는 나한테 주어진 휴가라 하는 틈에 기차를 타고 부산과 대구에 있는 헌책방을 찾아갔고, 대전이나 청주에 있는 헌책방을 드나들었습니다. 지난날 나한테 휴가라 하면, 가까이에서 쉬 찾아가지 못하는 곳에 있는 헌책방까지 마실을 가서 내 마음눈 트도록 돕는 아름다운 책 만나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휴가철이 되면 책방은 아주 조용합니다. 오늘날 책방은 휴가철 아니어도 참 조용합니다. 아니, 교보문고나 영풍문고처럼 큼지막하게 올려세운 곳 말고, 동네나 마을을 오래도록 지키며 책사랑 나누던 작은 책방은 책손이 뜸해서 더없이 조용합니다. 오늘날 여느 사람들이 찾아보려는 책은 커다란 책방 아닌 자그마한 책방에도 다 있는데, 하나같이 굳이 커다란 책방으로 몰립니다. 커다란 책방 구석구석 조용히 꽂힌 작은 책을 찾으려는 손길이기에 그야말로 커다란 책방으로 찾아갈까요.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쉬려고 물 맑고 바람 시원한 데를 찾아가려 한다면, 여느 때에 늘 물 맑고 바람 시원한 터전을 누릴 때에 가장 즐겁고 아름다우며 신나고 사랑스러운 삶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한 해 가운데 고작 이레쯤 맑은 물이랑 시원한 바람을 누린다면, 이러한 삶이 즐거울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한 해 삼백예순닷새 내내 맑은 물이랑 시원한 바람을 누릴 수 있어야, 비로소 삶이 즐거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책을 읽는다면, 하루만 읽고 덮는 책이라면 안 읽어도 됩니다. 책을 읽으려 한다면, 한 해 내내 읽을 책일 때에 읽으면 즐겁습니다. 아이들한테 물려줄 만한 책을 어른 스스로 기쁘게 찾아서 읽고, 책시렁에 곱다시 얹으면 아주 즐겁습니다.


  아이들한테 물려줄 만하지 않은 책은, 참말 어른들 스스로 읽을 만하지 못한 책입니다. 아이들한테 들려줄 만하지 못한 이야기는, 참말 어른들 스스로 들을 만하지 못한 이야기입니다. 아이들한테 먹이지 못할 만한 밥을 어른들이 굳이 먹어야 할까요. 아이들한테 선물로 주지 못할 만한 것을 어른들이 애써 장만하고 사들여 갖추어야 할까요. 몸과 함께 마음이 사랑스럽도록 책 하나 찾고 싶어, 나는 내 몸과 마음에 가장 걸맞다 싶은 조그마한 책방으로 아이들과 함께 사뿐사뿐 마실을 다닙니다. 4346.8.4.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책과 헌책방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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