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창비시선 156
함민복 지음 / 창비 /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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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골목꽃
[시를 말하는 시 34] 함민복,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 책이름 :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 글 : 함민복
- 펴낸곳 : 창작과비평사 (1996.10.10.)
- 책값 : 8000원

 


  골목동네에 골목꽃이 핍니다. 골목동네에서 피기에 골목꽃입니다. 자그마한 집이 촘촘하게 모인 골목동네인데 울타리 틈이나 계단 한쪽에 작은 씨앗 하나 뿌리를 내려 천천히 피어납니다. 누가 씨앗을 뿌리지 않았어도 들풀은 뿌리를 내리고 꽃송이를 피웁니다.


  골목동네에는 햇볕이 골고루 드리웁니다. 아침과 낮과 저녁에 따라 그림자가 다릅니다. 어느 골목집에 볕이 더 많이 깃들지는 않습니다. 옥탑집이라면 하루 내내 볕이 들 테지만, 낮은 자리에 있는 골목집이라 하더라도 빨래를 말리고 기지개를 켜도록 햇살이 곱게 스며듭니다.


  골목동네 사람들은 흙땅 없는 골목동네에 꽃밭이나 텃밭을 조그맣게 마련하려고 흙을 퍼서 나릅니다. 천천히 자리를 다지고, 조금씩 흙을 옮깁니다. 한 평조차 안 될 만한 꽃밭이나 텃밭을 알뜰히 가꿉니다. 푸성귀를 심고 나무를 심습니다. 꽃을 심고 사랑을 심습니다.


.. 나는 어머니 속에 두레박을 빠뜨렸다 / 눈알에 달우물을 파며 / 갈고리를 어머니 깊숙이 넣어 휘저었다 ..  (세월 1)


  나무 한 그루 그늘을 드리우기까지 제법 오래 걸립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크는 만큼 두고두고 지켜보면서 돌볼 때에 나무 한 그루 그늘을 맞이합니다. 나무 한 그루 열매를 맺기까지 퍽 오래 걸립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자라는 만큼 차근차근 바라보면서 보살필 적에 나무 한 그루 열매를 맺습니다.


  공무원이 심지 않았고, 개발업자가 심지 않았으나, 골목동네에 여러 가지 나무가 자랍니다. 대추나무가 자라고, 감나무가 자랍니다. 석류나무가 자라고, 밤나무가 자랍니다. 탱자나무가 자라고, 무화과나무가 자라요.

  골목동네 골목나무는 어느 골목사람이 언제 심어서 돌보았을까요. 이 골목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았을 골목아이는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요. 이녁 어버이가 심어서 우람하게 자란 나무를 어떤 마음이 되어 바라볼까요. 골목동네를 재개발한다고 할 적에 이 나무를 어떻게 하려나요.


.. 어머니 가슴에 못을 박을 수 없다네 // 어머니 가슴에서 못을 뽑을 수도 없다네 ..  (가을 하늘)


  아파트에도 꽃밭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파트에는 텃밭이 없습니다. 아파트에도 나무가 자랍니다. 그러나, 아파트 나무는 관리인이 손질하거나 매만질 뿐,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사람 스스로 씨앗이나 어린나무를 심어 보살피지 못합니다.


  청와대나 국회의사당에는 어떤 나무가 있을까요. 십 층 이십 층 삼십 층에 이르는 건물에서 일하는 사람한테는 어떤 나무가 있을까요. 건물이 크고 주차장이 넓다지만, 정작 나무 한 그루 자랄 땅은 처음부터 안 마련하는 데가 많습니다. 예술작품이니 조형물이니 세우려고 돈을 꽤 많이 쓰지만, 정작 사람들이 흙을 밟고 풀내음을 맡으며 나무그늘 누릴 수 있도록 마음을 기울이는 곳은 아주 드뭅니다.


  흙이 들려주는 소리를 듣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풀이 베푸는 내음을 맡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무가 나누어 주는 이야기를 마주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을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냈습니다 ..  (눈물은 왜 짠가)


  사람이 먹는 밥은 흙에서 비롯합니다. 사람이 입는 옷이나 사람이 지내는 집은 흙에서 비롯합니다. 흙이 있을 때에 밥과 옷과 집이 태어납니다. 흙이 있을 뿐 아니라, 흙이 튼튼하고 싱그러울 적에 사람살이가 즐겁고 아름답습니다.


  흙이 튼튼하지 못하면 밥도 옷도 집도 후줄근합니다. 흙이 싱그럽지 못하면 밥도 옷도 집도 빛을 잃고 슬어 버립니다. 흙을 아끼면서 웃음이 피어나는 삶입니다. 흙을 보살피면서 노래가 샘솟는 삶입니다.


  누군가는 골목꽃이 볼썽사납다며 밟거나 꺾습니다. 누군가는 골목꽃을 알뜰히 아끼면서 빙그레 웃는 낯으로 바라봅니다. 누군가는 골목꽃이 피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골목꽃 곁에 나란히 앉아 해바라기를 합니다.


  사람이 따로 물이나 거름을 안 주어도 골목꽃이 핍니다. 햇볕과 빗물과 바람을 먹는 골목꽃은 씩씩하고 예쁘게 자랍니다. 조그마한 틈에서 돋아나 조그마한 씨를 다시 조그마한 틈에 내려놓습니다. 이듬해에 새로운 싹이 돋고 새로운 잎이 나며 새로운 꽃이 핍니다. 달개비도 봉숭아도 고들빼기도 골목길 한쪽 조그마한 틈에서 돋습니다. 민들레도 씀바귀도 냉이도 골목길 한켠 작디작은 틈에서 깨어납니다.


.. 살구골 저수지에 살구꽃 피지 않는다 / 물 흐려져 초등학생들 봄소풍 나오지 않고 / 낚시꾼들 휘두르는 카본대 끝에서 야광찌만 반딧불로 날아 // 살구골 사람들 // 살구골 저수지가 더 빨리 오염되길 바란다 / 살구골 저수지 오염되어 농업용수로 쓸 수 없어야 / 절대농지 풀리고 땅 팔려 / 도회지로 떠날 수 있을 텐데, 하는 마음만 붉다 ..  (살구골 저수지의 봄)


  골목동네 빈터에 자동차 아닌 아이들이 있던 지난날, 골목꽃은 아이들과 함께 놀았습니다. 조그마한 동네 조그마한 빈터라 하더라도, 아이들은 풀내음과 꽃내음 먹고 자랐어요. 작은 집 모인 작은 동네였다 하지만, 아이들은 풀꽃하고 사귀면서 컸어요.


  아이들도 때때로 ‘우리 집이 가난한갑다’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내 이런 생각을 잊습니다. 놀기에 바쁩니다. 놀면서 웃습니다. 놀면서 신이 나고, 노는 동안 까르르 웃음노래 웃음꽃 웃음잔치 벌어집니다.


  어른들은 으레 ‘우리 집이 가난하구만’ 하고 생각합니다. 참말, 어른들은 이런 생각을 늘 품습니다. 그래도, 곧 이런 생각을 내려놓습니다. 즐겁게 밥을 짓습니다. 즐겁게 빨래를 합니다. 흐뭇한 눈길로 아이들을 바라봅니다. 오순도순 이야기꽃 피웁니다.


  골목 한쪽에서는 골목꽃이 피고, 골목집 한켠에서는 이야기꽃이 핍니다. 골목아이 얼굴에 웃음꽃이 피고, 골목동네 골골샅샅 사랑꽃이 핍니다.


.. 물을 길어 먹던 겸허한 세월은 가고 / 물을 끌어다가 먹는 시절이 와 / 저 강물에 빠지면 익사하기 전에 / 오염되어 죽을지도 모를 세월이지만 ..  (한강 2)


  함민복 님 시집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창작과비평사,1996)를 읽습니다. 함민복 님은 이 시집에서 ‘가난’을 노래했다고 합니다. 아프거나 슬프면서도, 싱긋 웃는 가난을 노래했다고 합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이 땅에 태어난 시 가운데 가난을 안 노래한 시가 있었나 궁금합니다. 이 땅에 태어난 시 가운데 ‘가난하지 않은 삶’, 곧 ‘돈이 넉넉한 삶’을 노래한 시가 있나 궁금합니다.


  돈이 이렇게 있어 즐겁게 이웃한테 나누어 주었다네, 하고 노래하는 시가 있었을까요. 돈이 이렇게 많아 신나게 동무하고 나누며 살았다네, 하고 노래하는 시가 있었을까요. 돈이 자꾸자꾸 생겨 언제나 이리 나누고 저리 나누면서 아름답고 착하게 살았다네, 하고 노래하는 시가 있었을까요.


.. 저 작고 소꿉장난 같은 부엌이 / 나의 어머니다 / 따뜻한 눈물이다 ..  (어떤 부엌)


  ‘가난’한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살림돈이 얼마쯤 되어야 가난하다 할 만할까요. ‘내가 가난하다’고 하면, 나보다 살림돈 더 있는 사람은 ‘안 가난한’ 사람이 될까요. 나보다 살림돈 더 없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안 가난하네’ 하고 말할 만할까요.


.. 숨찬 산중턱에 살고 있는 나보다 / 더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 많아 / 아직 잠 못 이룬 사람들 많아 / 하수도 물소리 / 골목길 따라 흘러내린다 ..  (달의 눈물)


  이 땅에 태어난 아름다운 시를 돌아보면, 어느 시나 ‘아름다움’을 노래합니다. 이 땅에 샘솟는 사랑스러운 시를 살펴보면, 어느 시나 ‘사랑스러움’을 노래합니다.


  참 그렇습니다. 푸른 물결 넘치는 시는, 그야말로 푸릅니다. 파랗고 깊으며 넓은 하늘이나 바다와 같은 시는, 그야말로 파랗습니다.


  함민복 님은 ‘가난’을 노래했을까요? ‘웃음’을 노래했을까요? ‘삶’을 노래했을까요? ‘사랑’을 노래했을까요?


.. 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 /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  (긍정적인 밥)


  도시에서는 골목꽃입니다. 시골에서는 시골꽃입니다. 두멧자락이나 숲에서는 숲꽃입니다. 바다에서는 바다꽃이요, 너른 들에서는 들꽃입니다. 우리들 마음속에는 마음꽃이 있습니다. 우리들 생각이 환하게 빛나면 생각꽃입니다. 시 한 자락은 시꽃일 테고, 글 한 줄은 글꽃입니다. 잔잔하게 흐르며 따사로이 감도는 노래 한 가락은 노래꽃입니다. 애틋하며 고운 춤사위는 춤꽃입니다. 밥 한 그릇은 밥꽃입니다. 웃음꽃과 함께 눈물꽃입니다.


  저마다 꽃입니다. 저마다 아름답습니다. 저마다 사랑스럽습니다.


  시 한 줄로 쌀 몇 말 얻을 수 있다면 즐겁습니다. 씨앗 몇 톨 심어 쌀 몇 줌 얻을 수 있다면 즐겁습니다. 씨앗을 심어 아끼는 흙일꾼처럼 낱말 하나를 차곡차곡 마음에 심어 꿈을 지피고 사랑을 일구는 시인입니다. 도시에서 시를 노래하는 님들은 골목꽃입니다. 시골에서 시와 춤추는 님들은 시골꽃입니다. 4346.8.27.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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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8-27 09:18   좋아요 0 | URL
함께살기님의 아름다운 사진집, <골목빛_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을 다시
펼쳐보는 시간입니다~
골목동네에 개나리 진달래 수국 도라지꽃 나팔꽃 천사의 나팔 채송화 해바라기
코스모스 국화..골목에 흙을 퍼다가 살뜰히 가꾸는 골목꽃들이 조용한 삶들을 환하고
예쁘게 동무해주네요~*^^*
저도 오늘 제 마음꽃 하나 잘 피워야겠습니다.

파란놀 2013-08-27 16:30   좋아요 0 | URL
골목에서는 골목꽃을 피우고
시골에서는 시골꽃을 피우며
우리 마음에는 마음꽃을 저마다
곱게 피우면 참으로 즐거우리라 생각해요..
 

부채질

 


후끈후끈 무더운 여름날
아침 낮 저녁
밤 새벽
하루 내내
아이들 땀 식히려고
부채질을 한다.

 

아이가
여섯 살
세 살
둘이니
한손에 부채 하나씩 쥐고
두 아이한테 부채질 한다.

 

아이가 셋이면 어쩌지?
생각한 적 있는데,
그때에는
큰아이가 씩씩하게 자라
혼자서 부채질을 할 테지.

 

큰아이한테 여섯 해째,
작은아이한테 세 해째,
여름마다 부채질 하며 사는데,
올여름에
작은아이 큰아이 모두
장난이자 놀이 삼아
아버지한테 부채질
되돌려준다.

 

아이들은 1분이 채 안 될 만큼
부채질 해 주고
깔깔 웃으며
어느새 저쪽으로 달려가서 노는데,
나는
아이들한테서 1분 부채질 받으면
1시간만큼 돌려준다.

 


4346.8.9.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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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8-26 21:08   좋아요 0 | URL
벼리와 보라가 아버지한테 1분이 채 안되더라도
부채질 해주는 모습이 떠올라 아주 이쁘고 귀여워요~! ㅎㅎ

파란놀 2013-08-27 07:10   좋아요 0 | URL
이제는 부채질을 안 해도 되는 날씨가 되어
몸이 좀 쉴 수 있습니다~
 

제비떼

 


  제비떼를 본다. 너른들 펼쳐진 곳에서 늦여름 제비떼를 본다. 문득 깨닫는다. 이 제비떼는 곧 한국을 떠나 태평양 가로질러 중국 강남으로 가려는구나. 이렇게 모여서 다 함께 움직이는 나들이길을 살피려는구나.


  요즈음 사람들은 제비떼는커녕 제비 구경조차 못 한다. 아니, 안 한다. 요즈음 하나같이 먹고살기 바쁘거나 힘들다 하면서 ‘제비 보러’ 다니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먼 옛날 놀부는 동생 흥부 흉내를 내면서 제비를 붙잡아 다리를 똑 부러뜨리려 했는데, 요사이는 흥부 같은 사람도 놀부 같은 사람도 없다. 제비가 사람과 얼마나 오랫동안 사귀며 함께 살아왔는지 하나도 헤아리지 않는다.


  제비가 도시에서 사라진 줄 안 느끼는 사람이 아주 많다. 제비가 시골에서조차 사라지려는 줄 안 깨닫는 사람이 매우 많다. 고속철도를 놓거나 4대강사업을 꾀할 적에 ‘제비 걱정’을 한 공무원이나 개발업자나 교수님이나 지식인이나 기자가 있었을까? 유기농업이나 친환경농업이나 자연농업을 한다고 밝히면서 정작 ‘제비 생각’을 하는 흙일꾼이나 농협 일꾼이 있을까?


  아예 없지는 않으리라 본다. 아름답게 생각하고 슬기롭게 헤아리는 이웃은 틀림없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부디, 몇몇 이웃만 아름답거나 슬기롭지 않기를 빈다. 모든 이웃이 저마다 아름답고 슬기롭기를 빈다. 제비가 찾아오는 도시가 될 때에 비로소 살아갈 만한 아름다운 터전이 된다. 제비가 날아드는 들판이 될 적에 누구도 맛나거나 즐겁게 먹을 수 있는 곡식이 알차게 맺는 마을이 된다.


  제비가 찾아오는 시골은 제비를 아낄 노릇이다. 제비가 안 찾아오는 마을은 제비가 다시 찾아오도록 삶터를 정갈하고 깨끗하며 맑게 고칠 노릇이다. 4346.8.26.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책과 헌책방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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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책으로 보는 눈’을 끝내며

 


  2007년 4월부터 ‘책으로 보는 눈’이라는 이름을 붙여 원고지 다섯 장쯤 되는 글을 썼습니다. 2007년 4월은 제가 고향 인천으로 돌아가던 때입니다. 이때부터 인천 배다리에서 ‘사진책도서관 함께살기’를 열었습니다. 이때까지 충청북도 충주 무너미마을에서 이오덕 님 책과 글을 갈무리하는 일을 했고, 이 일을 끝내고는 고향으로 돌아갔어요.


  돌이켜보면, 나는 1994년에 대학교에 처음 발을 들이면서 고향을 떠났습니다. 모두들 서울바라기만 하는 모습이 못마땅하고 달갑지 않아, 대학교에 가더라도 고향 인천을 떠날 생각이 없었지만, 나도 ‘서울로 가는 흐름’에 함께 휩쓸렸습니다. 군대에 갔다 오고 나서 대학교를 그만둔 1998년 가을에도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어요. 그대로 서울에 남아 일자리와 삶자리를 알아보았어요. 이러다가 2003년 가을에 서울을 벗어나 시골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충청북도 충주 무너미마을에서 ‘돌아가신 이오덕’ 님 발자취를 헤아리면서 삶과 책을 돌아보았습니다.


  한 사람이 읽을 수 있는 책은 얼마나 될까요. 한 사람은 얼마나 되는 책을 읽어야 아름다울까요. 집에 건사한 종이책 숫자가 ‘읽은 책’을 말할까요. 죽을 때까지 써서 남긴 책 숫자가 ‘읽은 책’을 말할까요.


  나는 내 어머니가 책을 읽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 어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 가운데 ‘틀린 말’이 있은 적은 없다고 느낍니다. 두 아이 아버지로 살아오면서 우리 아이들이 어버이인 나한테 들려주는 이야기 가운데 ‘틀린 말’이 있은 적은 없구나 하고 느낍니다.


  봄에 찾아와서 가을에 떠나는 제비가 사람들한테 ‘틀린 말’을 하는 적이 없습니다. 개구리가, 잠자리가, 나비가, 메뚜기가, 들꽃이, 나무가, 숲이, 바다가, 들이, …… 사람들한테 ‘틀린 말’을 하는 적이 없어요. 하늘도 구름도 흙도 바람도 언제나 ‘옳은 말’을 합니다.


  종이책만 책일까 궁금합니다. 전자책도 종이책 언저리에 들어가니까, 종이책이든 전자책이든, 이렇게 ‘사람이 글로 써서 남긴 이야기’만 책일까 궁금합니다.


  예부터 “날씨를 읽는다”고 말했습니다. 뱃사람은 “바람을 읽는다”고 말했고, “물살을 읽는다”고 말했습니다. 시골사람은 누구나 “풀을 읽는다”고 하는 한편 “나무를 읽는다”고 했으며 “흙을 읽는다”고 했습니다. 차근차근 살피면 그래요. 오늘날이건 옛날이건, 시골에서 흙이나 물이나 풀을 만지는 사람은 종이책을 들여다볼 틈이 없기도 하지만, 애써 종이책을 들여다보지 않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읽다’라는 낱말은 우리 한겨레한테 아주 오래된 낱말이에요. 국어사전 뜻풀이를 살피면 글이나 책에 적힌 글씨를 ‘읽는’ 뜻만 나오지만, ‘읽다’라는 낱말은 사람들이 글도 책도 모르던 때부터 썼어요.


  더 생각해 봅니다. “책을 읽는다”라고도 하지만 “책을 본다”라고도 합니다. 한겨레는 책을 “읽으”며 책을 “봅”니다. 곧, 종이에 앉힌 글을 살피는 일만 ‘읽기’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오래디오랜 옛날 옛적부터 우리 겨레는 누구나 삶을 읽고 사람을 읽으며 마음을 읽었어요. 사랑을 읽고 숲을 읽으며 하늘을 읽었어요. 뜻을 읽고 꿈을 읽으며 이야기를 읽었지요. 다시 말하자면, 삶을 보고 사람을 보며 마음을 보았어요. 사랑을 보고 숲을 보며 하늘을 보았어요. 뜻을 보고 꿈을 보며 이야기를 보았지요.


  2007년 4월에 인천에서 ‘사진책도서관 함께살기’를 열었습니다. 내가 이제껏 읽은 종이책을 그러모아 서재도서관을 꾸렸습니다. 2010년에 이 도서관을 충북 충주로 옮겼고, 2011년에 이 도서관을 전남 고흥으로 옮겼습니다. ‘책으로 보는 눈’이라는 이름을 붙여 그동안 쓴 글은 내 서재도서관이자 사진책도서관을 꾸리면서 ‘책과 삶’을 나란히 읽은 이야기를 적바림한 사랑 한 마디라고 생각합니다. 책으로 책을 읽으면서, 책으로 삶을 읽습니다. 삶에서 책을 깨닫고, 삶에서 사람과 사랑과 꿈이 이어진 실타래를 느낍니다. 이렇게 깨닫고 느낀 이야기를 2007년 5월에 새롭게 태어난 〈시민사회신문〉에 썼습니다. 〈시민사회신문〉은 처음에는 주마다 나왔지만, 신문사 살림살이가 힘들어 시나브로 달에 한 번 나오더니, 두 달에 한 번 나오기도 했고, 2013년 들어서는 두어 차례 나오고 더는 못 나옵니다. 나는 글을 200꼭지 썼지만, 〈시민사회신문〉은 152호까지 나왔습니다. 내 글 가운데 48꼭지는 아예 신문에 못 실렸습니다. 이 신문이 잘되기를 바라며 주마다 글을 쓰려 했지만, 한 달 두 달 신문이 안 나오고 보니, 나도 주마다 글 한 꼭지씩 쓰려던 몸가짐이 흐트러졌어요. 이 신문이 153호를 낼 수 있는지, 앞으로 꾸준히 나올 수 있는지 하나도 모릅니다. 다시 새힘 얻어 씩씩하게 나온다면 반가울 텐데, 이제 나는 ‘책으로 보는 눈’이라는 이야기는 내려놓으려 해요. 오늘까지 걸어온 200걸음에서 마무리를 짓습니다.


  아름답게 일굴 삶을 생각합니다. 사랑스레 어깨동무할 꿈을 생각합니다. 즐겁게 만날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2007년부터 2013년까지 ‘책으로 보는 눈’이라는 글을 쓰면서 “책은 빛이요, 빛은 책”이라고 깨닫습니다. “삶은 책이요, 책은 삶”이라고 느낍니다. 이 땅에 평화와 민주와 통일이 흐르면서, 누구나 사랑과 꿈과 이야기를 곱게 돌볼 수 있으면 기쁘겠습니다. 4346.8.26.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책으로 보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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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200 : 책으로 보는 빛

 


  빛을 읽는 책입니다. 우리가 이제껏 살아온 빛을 읽고, 저마다 앞으로 살아갈 빛을 읽는 책입니다. 책에는 수많은 빛이 서립니다. 책을 쓴 사람이 누린 빛이 서리고, 책을 엮고 만든 사람 빛이 서리며, 책을 다루는 사람들(책방지기) 빛이 서려요. 여기에, 책을 읽는 사람 빛이 어우러집니다. 책 하나는 책을 쓰거나 만들거나 다루는 사람들 손길과 빛만으로는 환하지 않아요. 이 책을 알아보고 사랑하며 아끼는 책손이 새삼스럽게 따스한 손길로 어루만질 때에 환하게 거듭납니다.


  책은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 이웃과 동무와 아이한테 물려주는 선물입니다. 풀과 나무와 벌레와 새와 짐승과 물고기는 책을 쓰지 않고 책을 읽지 않습니다. 풀과 나무는 씨앗에 온 삶과 이야기를 담습니다. 벌레와 새와 짐승과 물고기는 새끼한테 온몸으로 삶과 이야기를 물려줍니다. 곰곰이 따지면, 사람들도 얼마 앞서까지 책을 쓰지 않고 읽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책을 쓰거나 읽은 발자국을 살펴도 천 해나 이천 해, 또는 삼천 해쯤 헤아린다 하지만, 이무렵에도 책을 안 쓰고 안 읽은 사람이 훨씬 많았어요. 곧, 누구나 어버이가 되면 삶과 이야기를 아이들한테 고스란히 물려주었어요. 눈빛과 말빛과 마음빛과 몸빛으로 먼먼 옛날부터 이어온 슬기와 꿈과 사랑을 물려주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어버이나 어른이 되어도 아이들한테 슬기와 꿈과 사랑을 좀처럼 물려주지 못합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뿐입니다. 아이들한테 책을 읽히고 어떤 강의를 듣게 할 뿐입니다. 어버이나 어른 스스로 이녁 아이를 똑똑히 가르치지 못하고, 어버이나 어른 스스로 나서서 둘레 아이를 슬기롭게 이끌지 못해요.


  디팩 초프라 님이 쓴 《우주 리듬을 타라》(샨티,2013)를 펼쳐 “눈이 거룩해질 때 당신은 치유된다(148쪽).”와 같은 대목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둘레를 바라보는 내 눈이 거룩해진다면, 집일을 건사하는 내 손이 거룩해진다면, 살붙이와 이웃하고 어깨동무하는 내 몸이 거룩해진다면, 참말 내 삶은 아름답겠지요. 아픔이나 미움이나 괴로움이란 하나도 없겠지요. 스스로 아름답게 거듭나면서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갑니다. 스스로 사랑스레 다시 태어나며 스스로 사랑을 누립니다.


  이오덕 님이 남긴 일기를 갈무리한 《이오덕 일기》(양철북,2013) 다섯 권 가운데 셋째 권에서 “그러나 나는, 아무리 기계가 발달해도 인간의 정신을 그 기계가 높여 주지 못할 것이고, 편리한 생활을 한다고 문화의 질이 높아진다고는 볼 수 없다고 했다. 편리한 생활을 한다고 인간이 행복해진다고 할 수 있는가? 오히려 인간 정신이 타락하는 것 아닐까? 농경시대보다 지금은 확실히 편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행복하지는 않다. 정신은 황폐해지고 한층 더 불행해졌다(59쪽/1986년 10월 11일).”와 같은 대목을 읽습니다. 차근차근 생각합니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은 넉넉한 웃음을 보여줄까요? 돈을 못 버는 사람은 홀가분한 웃음을 보여주나요? 돈을 잘 벌거나 못 벌거나 똑같이 어두운 얼굴은 아닐까요?


  책은 빛이라고 생각합니다. 삶도 빛이라고 생각합니다. 밥 한 그릇, 물 한 모금, 바람 한 숨,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모두모두 빛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빛을 먹으며 빛으로 삽니다. 빛을 나누고 빛을 가꾸며 빛을 돌봅니다. 동이 트며 날이 밝을 때에 온누리 눈부시게 무지개빛 되면서 즐겁습니다. 새 하루 깨우고, 새 마음 이끌어, 새 사랑 샘솟도록 하는 빛입니다. 빛이 되는 책을 읽습니다. 4346.8.26.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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