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아이 22. 저녁빛살과 나란히 (2013.10.4.)

 


  저녁빛살이 드리운다. 가을 저녁빛살은 여름 저녁빛살과 다르다. 봄 저녁빛살하고도 다르다. 큰아이도 작은아이도 이제 풀밭 걷기에 익숙하다. 풀이 껑충 자라 아이들 키를 넘어서도 씩씩하게 걷고, 까르르 웃으며 헤쳐 나간다. 이 풀빛이 바로 너희들을 푸르게 돌보아 준단다. 이 풀내음이 바로 우리 모두를 먹여살린단다. 이 풀바람이 지구별을 곱게 보듬어 준단다. 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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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

 


  한글날 앞두고 어느 라디오 방송국 작가한테서 전화 한 통 온다. 한글날에 나한테 ‘전화 인터뷰’를 하고 싶은가 보다. 방송작가는 이녁이 생각하는 대로 내가 ‘전화 인터뷰’로 말해 주기를 바라는 낌새이다. 그러나, 나는 ‘꼭둑각시’나 ‘허수아비’가 아니다. 내가 무슨 말을 들려주어야 한다면 내 생각을 들려주어야지, 방송작가 생각을 읊을 수 없다. 방송작가 생각을 읊어야 한다면, 방송작가 혼자서 각본 쓰고 스스로 해설하고 방송을 이끌 노릇이다.


  방송작가한테 한글날과 얽힌 이야기에다가, 한글이라는 글자 아닌 한국말이라는 속살을 들여다보아야 참답게 한글날을 기릴 뿐 아니라, 한국사람으로서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말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런데, 이녁 방송작가가 어느 때에 갑자기 전화를 끊는다. 내 이야기가 듣기 싫었나? 그래, 잘 되었다. 나도 이런 방송작가하고 전화로 떠들 겨를이 없다. 아이들 얼굴을 보아야 하고, 집살림 거느려야 하며, 서재도서관 손질하는 한편, 내 삶이야기를 글로 써야 한다.


  책상맡에서 취재를 하고 각본을 쓰는 방송작가는 사람들한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4346.10.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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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읽는 책 61] 씨앗과

 


  봄부터 가을까지 씨앗들 떨어져
  한겨울 추위를 흙과 가랑잎 사이에서
  다 같이 씩씩하게 맞아들이는구나.

 


  시골에서 살며 지켜보니, 모든 풀과 나무는 가을에 꽃을 마지막으로 피우고 씨를 맺어 흙에 떨구고는, 이 씨앗들이 흙 품에서 겨울을 나도록 해서 봄에 새싹이 돋게 하더라고요. 봄에 피어 여름에 지는 유채풀도, 늦겨울 막바지부터 피는 봄까지꽃이랑 코딱지나물꽃이랑 별꽃도, 여름이나 봄에 씨앗을 흙에 떨구고는 겨울 추위를 견디어야 비로소 새로운 봄에 꽃송이 흐드러집니다. 사람들은 봄이 와야 비로소 손으로 씨앗을 심지만, 여느 풀이나 나무는 모두 가을까지 씨앗을 떨구어 겨울나기를 시켜요. 가을이란, 참 아름다운 철이지 싶어요. 겨울이란, 참 멋스러운 철이지 싶어요. 어떤 씨앗이든 가을을 누리고 겨울을 나야 싱그럽게 푸른 잎사귀를 내놓을 수 있어요. 4346.10.9.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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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있는 곳

 


  책이 있는 곳은 책이 없는 곳과 다르다. 어떤 책이 있다 하더라도, 책이 있는 곳은 빛과 무늬와 결이 다르다. 책을 펼쳐서 읽는 사람이 있거나 없거나, 책 하나 있으면서 고즈넉한 빛과 무늬와 결을 들려준다.


  책은 펼쳐서 읽는 사람한테만 이야기를 건네지 않는다. 책은 펼쳐 읽지 않는 사람한테도 이야기를 건넨다. 책을 펼쳐서 읽는 사람은 종이에 얹힌 줄거리에 따라 이야기를 누린다. 책을 펼치지 않는 사람은 책에 감도는 기운을 마음으로 누린다.


  풀이 있는 곳은 풀이 없는 곳과 다르다. 어떤 풀이 자란다 하더라도, 풀이 있는 곳은 빛과 무늬와 결이 다르다. 풀을 느끼는 사람이 있거나 없거나, 풀 한 포기 자라면서 푸르며 싱그러운 빛과 무늬와 결을 베푼다.


  풀은 알아보는 사람한테만 푸른 숨결을 나누어 주지 않는다. 풀은 알아보지 않는 사람한테도 푸른 숨결을 나누어 준다. 풀을 알아보는 사람은 풀포기에 내려앉은 이슬을 누리고, 풀포기 보드라운 결을 손가락으로 느끼는데, 풀을 못 알아보는 사람은 이녁 스스로 모른다 하더라도 언제나 푸른 숨을 마시면서 푸른 넋을 건사할 수 있다.


  나무가 있는 곳은 나무가 없는 곳과 다르다. 그래, 어떤 나무가 자란다 하더라도, 나무가 있는 곳은 빛과 무늬와 결이 다를밖에 없지. 나무를 사람들이 느끼건 안 느끼건, 나무는 짙푸른 그늘을 드리우고 살랑살랑 나뭇잎 춤추는 소리를 속삭인다. 모든 사람이 나무를 알아차리면서 나무그늘 거님길을 지나갈까. 모든 사람이 나무를 헤아리면서 자가용으로 찻길을 달릴까. 모든 사람이 나무를 바라보면서 아파트나 높은 건물에 깃들어 지낼까. 사람들은 나무를 못 느끼거나 못 알아채거나 못 보기 일쑤이지만, 나무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언제나 한결같은 매무새로 푸르디푸른 빛과 무늬와 결을 둘레에 퍼뜨린다.


  책이 있는 곳은 책이 없는 곳과 다르다. 사람들이 책을 알아보아도 즐겁고, 사람들이 책을 못 알아보아도 기쁘다. 사람들이 책방마실 한껏 누려도 반갑고, 사람들이 책방마실 아직 못 누려도 달갑다. 책과 책방은 늘 우리 곁에서 맑은 빛과 무늬와 결을 나누어 준다. 사람들이 느끼건 안 느끼건, 사람들이 알아채건 안 알아채건, 사람들이 헤아리건 안 헤아리건, 아름다운 책은 꾸준하게 새로 태어난다. 사랑스러운 책은 새롭게 책방 책시렁에 꽂히며 책손을 기다린다. 즐거운 발걸음으로 책방마실 누리는 사람은 새책방에서나 헌책방에서나 책빛을 가슴 가득 받아안을 수 있다. 책방마실이란 책빛마실인 셈이다. 4346.10.9.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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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앞

 


  책방 앞을 지나갈 적마다 책내음을 맡는다. 커다란 책방이건 작은 책방이건, 새책 다루는 책방이건 헌책 다루는 책방이건, 책방 앞에서는 책내음을 맡는다. 빵집 앞에서 빵내음을 맡고, 떡집 앞에서 떡내음을 맡듯이, 책방 앞에서는 나를 부르는 책내음을 맡는다.

 

  책방 앞을 지나갈 적마다 발걸음을 멈춘다. 아무리 바삐 어디론가 볼일을 보러 가는 길이라 하더라도 책방 앞에서 한 번쯤 발걸음을 멈춘 뒤 때를 살핀다. 볼일을 보러 바삐 가야 하기는 하지만 1분이라도 쪼갤 수 있을까, 10분을 쪼개면 어떨까, 20분까지 쪼개면 너무 늦을까,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한다.


  책방 앞을 지나갈 적마다 빙그레 웃는다. 책방 문 열고 들어서면 나를 기다리던 책들이 즐겁게 웃을 테고, 책방 문 열고 들어설 틈이 없어 그대로 지나쳐야 한다면 누군가 다른 책손이 이녁 마음 기쁘게 채울 책들 떠올리며 방긋방긋 웃을 테지. 사람들은 배가 부를 적에도 웃고, 마음이 부를 적에도 웃는다.


  책방 앞을 지나갈 적마다 생각에 젖는다. 이 책방은 언제부터 이곳을 지켰을까, 이 책방은 앞으로 언제까지 이곳을 지킬까, 이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책내음 흐르는 줄 느낄까, 이 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녁 마을에 고운 책방 하나 있는 줄 얼마나 헤아릴까, 이 생각에 젖고 저 생각에 빠지다가, 아차 내 갈 길은 까맣게 잊었네 하고 깨닫는다. 다시 길을 걷는다. 4346.10.9.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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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10-09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방 앞,이란 제목과 정다운 글과 함께
책방 앞을 자전거를 타고 가는 흑백사진이 잘 어울립니다.^^
사진을 볼 줄 모르는 제게도 넓고 시원한 구도로, 책과 사람과 책방의
아름다운 조화가. ..어린날의 마냥 천진하고 행복했던 그 시절들처럼
즐거운 꿈과 이야기 되어 흐르는 좋은 밤입니다~ 감사드립니다. *^^*

파란놀 2013-10-09 01:05   좋아요 0 | URL
누구라도 사진을 보면 다 '사진을 보는 사람'인걸요.
사진이든 책이든 시이든 문학이든 영화이든 춤이든...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을 뿐,
머리에 담긴 이론이나 논리나 지식이나 형식으로는
도무지 읽거나 느끼거나 바라보거나 살필 수 없어요.

서울 창천동 린나이세거리 옆에 있는 헌책방인데,
김대중도서관 큰길 건너에 있는 곳이지요,
이 앞 거님길이 많이 깎였어요.
버스전용차선 만든다며 다른 데는 찻길을 깎는데,
여기는 거님길을 깎아 버렸지요.

이 사진을 볼 때면,
저 널찍하던 거님길이 1/3로 토막난 쓸쓸한 일이
떠오릅니다...

transient-guest 2013-10-09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사진이에요. 마치 예전의, 제 기억속에만 남아있는 고향의 모습같아서 더욱 가슴에 와 닿네요.

파란놀 2013-10-09 07:37   좋아요 0 | URL
디지털사진기 없이 필름사진만 목걸이처럼 하고 다닐 적에 찍은 사진입니다. 나무와 하늘과 헌책방과 거님길과 자전거 모두 좋아서 ... 막상 이 사진은 나무 옆에 세운 제 자전거만 찍을 생각이었는데, 초점과 조리개값 맞추며 들여다보다가 단추를 누를 즈음 저 내리막길에서 다른 자전거 한 대 씽하니 내려와서 곱게 담겨 주었어요. 저도 저분도 모르는 새 서로 찍고 찍혔어요 ^^;;;

그 자전거가 일으켜 준 바람이 transient-guest 님한테도 어떤 기억과 아름다움과 고향을 떠올려 주도록 이끌어 주었으리라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