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아이 30. 풀숨을 마신다 (2013.10.3.)

 


  도시에서는 풀숨을 마시기 힘들다. 시골이라도 농약바람이 너무 짙어 풀숨 제대로 마시기 벅차지만, 우리 식구가 일구는 서재도서관 둘레에는 아무도 농약을 안 친다. 서재도서관을 시골로 옮긴 보람을 도서관을 오갈 적마다 느낀다. 봄부터 첫을까지는 푸른 물결 누리고, 늦가을부터 새봄까지는 고즈넉한 흙빛을 누린다. 우리는 풀숨 마시고 풀밥 먹는 시골사람이지. 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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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취재 하던 날 (도서관일기 2013.10.10.)
 ―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 ‘서재도서관 함께살기’

 


  아침 열 시 반에 방송국 사람들이 찾아온다. 아직 아이들 아침을 먹이지 못했기에, 부랴부랴 마을 어귀에 나가 손짓으로 부른 뒤, 얼른 부엌으로 돌아가서 국을 마저 끓인다. 밥상에 아이들 밥과 국을 퍼서 올린다. 방송국 사람들은 장비를 내리느라 바쁘다. 오늘 찍을 이야기를 하려고 나를 부른다. “아이들 밥 먹을 때라서요. 아, 밥하는 모습을 찍으셔도 그림이 되겠네요.” 방송취재를 하기로 했지만, 아이들과 살아가는 어버이로서, 아이들 밥 먹이는 일이 먼저다. 방송국 사람들은 내가 작은아이 입에 밥 떠먹이는 모습도 찍는다.


  마당에서 몇 가지를 찍는다. 마당 있는 집이 좋다고 새삼스레 느낀다. 마당에서 찍는 동안 아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논다. 마을 이장님이 와서 무얼 하느냐고 묻는다. 지난번에 항공방제를 한다며 헬리콥터가 우리 집 대문 위로 들어와서 농약을 뿌린 일을 〈고흥뉴스〉에 올린 뒤, 이장님과 몇몇 마을 분들이 우리 집을 보는 눈이 안 곱다. 시골에서 농약 쓰는 일을 방송국 사람을 불러서 떠드는가 싶어 걱정하시는 눈치이다. “저희가 저기 폐교에 도서관을 마련해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찍겠다고 해서 온 분들이에요.” 하고 이야기한다.


  집에서 한참 찍은 뒤, 방송국 사람들이 밥을 먹으러 면소재지로 간다 한다. 같이 차를 타고 가자 하기에, 우리 식구한테는 ‘우리 차’가 있다고 얘기한다. 수레와 샛자전거 붙은 자전거를 꺼낸다. 두 아이를 자전거에 태운다. 면소재지 가는 길에 자전거를 달린다. 이 시골길에는 마주 달리는 자동차도 없으니, 방송국 자동차가 우리 옆에 나란히 서서 자전거 달리는 모습을 찍는다. 아이들과 자전거로 달리는 모습을 내가 스스로 찍을 수 없었는데, 고맙게 재미난 모습을 얻을 수 있겠네.


  면소재지에 닿아 중국집으로 간다. 아이들은 매운 밥을 먹을 수 없어, 아이들 입에 맞춘다. 아이들한테 짜장면과 볶음밥을 먹인 뒤 도서관으로 간다. 날이 꾸무룩하기에 도서관에서 찍기 수월하지 않다. 폐교에 마련한 도서관이고, 이 폐교를 우리가 빌리지 못한 탓에 전기를 못 쓴다. 이 폐교를 빌린 분들은 전기도 물도 하나도 해 놓지 않는다. 폐교 빌린 사람한테서 다시 빌린 얼거리라, 우리는 건물에 손을 대지도 못한다.


  도서관 옆 어르신한테 말씀을 여쭈어 전기를 끌어 쓰기로 한다. 불을 밝혀 이것저것 찍는다. 시골에 온 까닭, 도서관을 하는 마음, 책과 사람과 삶과 아이와 교육 이야기 들을 조곤조곤 이야기한다. 도서관이 사람들한테 찾아갈 일이 아니라, 사람들이 도서관으로 찾아올 노릇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도서관은 책다운 책을 알뜰히 갖추어 놓는 곳이요, 사람들은 스스로 아름다운 책을 찾아 도서관으로 갈 일인데, 도서관은 도시 한복판보다는 숲이 있고 조용하며 아름다운 시골에 마련해야, 비로소 책을 제대로 누릴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책은 나무에서 왔고, 책꽂이도 나무에서 온다. 책과 책꽂이 있는 도서관이란, 나무로 된 이야기밭이다. 곧, 도서관이라는 곳은 숲 한쪽에 깃들어, 숲바람과 숲노래 듣는 보드라운 보금자리와 같을 때에 즐거운 이야기터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시골에는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다 하지만, 가만히 보면 시골에는 이것도 저것도, 곧 물질문명이 없기 때문에 살기 좋은 아름다운 삶터라는 이야기를 꺼낸다. 우리 식구부터 이 시골마을에 깃들어 찬찬히 뿌리를 내리면, 우리 식구 둘레에 예쁜 새 이웃이 찾아와서 새로운 삶 이루어질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안타까운 노릇이지만, 오늘날 시골마을에는 할매와 할배만 남고 젊은이와 어린이 모두 도시로 떠났는데, 도시로 떠난 이분들 딸아들이 다시 시골로 올 일이 없다고 느낀다고, 그래서 이제는 아주 시골에서 살려 하는 사람들만 시골로 와서 시골을 예쁘게 가꾸어야 시골이 살아날 수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덧붙인다. 새로운 마음으로 시골로 삶자리 옮기는 사람들이 늘어야, 먼먼 옛날부터 오랫동안 이어온 농약과 비료 안 쓰는 흙일과 시골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방송작가인 분이 아이들 데리고 면소재지 가게에 가서 무언가 사 주셨다. 아이들이 긴 시간에 걸쳐 힘들고 졸릴 텐데, 방송작가 아주머니가 무언가 재미난 것을 사 주셔서 아이들이 새로 기운을 낸다. 나는 여덟 시간 동안 입을 쉬지 않고 말을 해야 하니 힘겹지만, 중국집에서 마신 이과두술 작은 병하고 우리 집 샘물 힘을 빌어 기운을 낸다.


  시골살이, 도서관살림, 아이와 함께 살기, 자전거 타기, 집안일 도맡는 아버지, 글과 책과 삶, 이런저런 이야기를 알뜰히 들려주었을까. 아무쪼록 이 방송이 나간 뒤, 도시를 떠나 시골로, 또 고흥으로, 즐겁게 사뿐사뿐 삶터를 옮길 예쁜 이웃이 한 사람쯤 나올 수 있기를 빈다. (ㅎㄲㅅㄱ)

 


* 사진책도서관(서재도서관)을 씩씩하게 잇도록 사랑스러운 손길 보태 주셔요 *
* 도서관 지킴이 되기 : 우체국 012625-02-025891 최종규 *
* 도서관 지킴이 되어 주는 분들은 쪽글로 주소를 알려주셔요 (011.341.7125.) *
* 도서관 나들이 오시려면 먼저 전화하고 찾아와 주셔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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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11-11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정말 함께살기님의 자전거와 샛자전거와 수레에 탄 벼리와 보라가 바람을 가르며 씽씽~달리는 모습이 참 인상깊고 좋았어요~
이렇게 오랜 시간을 찍고 그렇게 짧은 방송으로 나왔지만, 조촐하면서도 알뜰하고 예쁘게 방송이 잘 나온 듯 해요. 함께살기님의 말씀도 인터뷰어인 명로진님의 말씀도 다 함께살기님 삶의 모습과 사진책도서관의 뜻을 사람들에게 아름답고 즐겁게 잘 보여준 듯 합니다.^^
아이들도 긴 시간 힘들었겠지만,그래도 또 즐거운 추억을 가지게 되었겠지요~
'다시보기'로 또 즐겁게 보아야겠습니다~*^^*

파란놀 2013-11-11 11:05   좋아요 0 | URL
외주업체 아닌 방송국 직원들이 와서 취재를 하다 보니,
카메라도 여섯 대였나... 엄청나게 돌리더라구요 @.@
그리고, 적기는 하지만 출연료도 주더군요 @.@

외주업체에서 취재를 왔으면
출연료도 없었을 테고,
방송취재도 더 힘들었으리라 느껴요.

외주업체를 나쁘게 하려는 말이 아니라,
적은 돈으로 빠듯하게 움직이다 보니,
외주업체에서 방송을 찍는 분들은 기본취재와 사전조사를
거의 못 하는 채 찾아오거든요.

이번 취재를 받아들인 까닭에는,
다른 시골에서 '작게 도서관 만들려는 이웃'이 있어서
그분한테 기운(용기)을 내실 수 있도록 하고픈 마음이 있기도 했어요.

시골에서 살며 조그마한 도서관 꾸리려는 분들 모두
즐겁고 기운차게 책삶 일군다면
우리 나라는 참 아름답게 거듭나리라 생각해요.
 


 도서관살림 어떻게? (도서관일기 2013.11.10.)
 ―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 ‘서재도서관 함께살기’

 


  여수문화방송에서 도서관을 취재해서 내보낸 뒤, 도서관을 찾아오는 손님이 하나둘 는다. 도서관을 찾아오시면서 으레 ‘이 시골에서 어떻게 살림을 꾸리는지’ 걱정스러움 그득 담긴 말을 묻는다. 우리 서재도서관 살림이 걱정스러울까? 이런 말을 들으면 그저 빙그레 웃는다. “제 책을 사 주시면 되고요, 도서관 지킴이가 되어 주시면 되지요.” 하고 이야기한다.


  우리 서재도서관 책은 모두 내가 스스로 읽으려고 장만한 책들이니, 내 서재가 되면서, 나 혼자만 즐기기에는 아깝다 싶어, 이웃들도 스스럼없이 찾아와서 돌아보고 함께 누리기를 바라는 책들이라, 우리 도서관이 된다. 서재이면서 도서관이다. 2007년부터 2013년 올해까지 이모저모 어려운 고비 많았지만, 이럭저럭 잘 꾸리면서 잘 살아온다. 앞으로도 힘든 고비가 찾아올까? 아마, 찾아올 수 있고, 이제는 안 찾아올 수 있다. 어찌 되든 이 시골마을 한복판에 살림집을 마련했고, 도서관을 꾸린다. 곰팡이 피어나는 책꽂이에는 니스를 바르고, 비가 새는 곳도 앞으로 잘 다스릴 수 있으리라 믿는다. 아직 방수페인트 장만할 돈까지는 없지만, 내 새로운 책이 곧 나오고, 이 책이 신나게 팔려서 글삯을 더 벌면, 다가오는 새봄에는 방수페인트 넉넉히 사서, 빗물 새는 자리부터 찬찬히 발라 볼까 싶다.


  아이들이 신나게 뛰놀 수 있고, 누구라도 느긋하게 책을 들여다볼 수 있으면 넉넉하리라 생각한다. 꼭 이 모든 책을 다 살펴서 읽어야 하지는 않다. 마음을 살찌울 책을 한 달에 한 권씩 만나서 가슴에 새길 수 있으면 즐겁다. 겨울에는 도서관이 추워, 도서관에서 책을 보기 어려운데, 그러면 ‘도서관 지킴이’가 되어 책을 빌리면 된다. 누구나 이곳에 찾아와서 어떤 책이든 살필 수 있지만, 빌려가도록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도서관 지킴이 되는 분한테는 빌려준다.


  이렇게 하면 도서관살림은 알뜰살뜰 한결 잘 꾸릴 수 있고, 추운 겨울에도 집에서 한갓지게 책을 즐길 만하다. 우리 도서관은 공공도서관처럼 ‘반납일’ 따로 두지 않으니,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천천히 읽으면 되지.


  도서관 책손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데, 큰아이가 작은 천을 쥐고는 ‘바나나 만들기’를 한다. 안동에 마실 갔을 적에 편해문 아저씨한테서 배운 대로 하는구나. 작은아이가 작은 그림책 담은 상자를 머리에 이고 가져와서 죽 풀어 놓는다. 옆에서 큰아이가 이 작은 그림책을 상자에 담는다. 작은아이가 한 권씩 건네고, 큰아이가 한 권씩 넣는다. 책은 차근차근 넘기며 읽어도 재미있고, 넣고 빼는 놀이를 해도 재미있다. (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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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엣과 물감 상자 미래그림책 48
카를로스 펠리세르 로페스 글.그림, 김상희 옮김 / 미래아이(미래M&B,미래엠앤비)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310

 


아름다운 그림
― 줄리엣과 물감 상자
 카를로스 펠리세르 로페스 글·그림
 김상희 옮김
 미래M&B 펴냄, 2006.9.20.

 


  아이들은 누구나 연필이나 크레파스를 쥐면 그림을 그립니다. 아이들이 글씨를 쓸 적에도, 이 글씨는 꼭 그림을 닮습니다. 아니, 그림이지요. 아이들한테 글을 가르쳐 보셔요. 또박또박 그리는 글씨가 얼마나 고운지 모릅니다. 글을 배우지 못한 늙은 할매한테 글을 가르쳐 보셔요. 할매들 처음 익혀 쓰는 글이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인지 모릅니다.


.. 물감 상자를 선물로 받은 날, 줄리엣은 앞으로 어떤 신나는 일이 일어나게 될지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  (5쪽)


  글은 작가만 쓰지 않습니다. 글은 모든 사람이 씁니다. 그림은 작가만 그리지 않습니다. 그림은 모든 사람이 그립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지구별에서는 작가 아니라면 글도 그림도 못 하는 줄 잘못 여깁니다. 학교가, 사회가, 문화가, 제도가, 정치가, 경제가, 글이나 그림을 하는 사람을 따로 ‘작가·예술가’로 몰아넣습니다. 이리하여,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이들이 삶하고 동떨어진 채 ‘글 만들기·그림 만들기’가 되고 말아요.


  그리 오래지 않은 지난날까지, 모든 사람이 저마다 작가이면서 예술가였고 살림꾼이었습니다. 짚 한 오라기로 엮는 예술품이었습니다. 나무토막 하나로 깎는 예술품이었어요. 겨를 벗기려고 하는 절구질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행위예술’인가요. 도리깨를 들고 콩을 터는 어깻짓이란 얼마나 아리따운 ‘행위예술’인지요. 겨를 벗긴 쌀을 키로 까부르며 잔 부스러기를 날립니다. 쌀을 물로 헹구면서 조리로 돌을 입니다. 솥에 쌀을 안치면서 장작을 때어 불을 지핍니다. 밥물을 맞추어 고들고들 보들보들 고소고소한 새 밥을 짓습니다. 밥짓기란 날마다 이루어지는 멋진 ‘창작’이요 ‘창조’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름다운 창작과 창조가 어느 때부터 모조리 사라졌어요. 가게에서 쌀을 사지요. 겨를 벗길 일이 없고, 돌을 일 까닭이 없습니다. 키를 까부르는 사람조차 없지만, 키가 무언지조차 몰라요. 조리가 뭔지 아려나요. 한 해 끝물에 사고파는 복조리는 알아도, 조리가 언제 어떻게 쓰는 살림살이인 줄 깨닫는 사람이 없어요. 더구나, 조리가 되든 복조리가 되든, 누구나 손수 짚으로 엮어서 썼지, 돈을 주고 사다 쓰지 않았어요.

 

 


.. 줄리엣은 물감 상자를 가지고 노는 게 점점 좋아졌어요. 이제 물감 상자만 있으면 도화지 위에서 무엇이든 볼 수 있다고 믿었지요 ..  (13쪽)


  살아가는 하루가 모두 그림입니다. 살아가는 나날이 언제나 글입니다. 프랑스인지 어느 유럽인지, 또 네덜란드인지 어느 유럽인지, 밀레가 고흐가, 들녘 들사람 이야기를 들빛 묻어나도록 들숨 담아 들노래로 그렸습니다. 밀레는 한겨울에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다가 숨을 거두었습니다. 밀레네 식구들도 추위와 배고픔에 떨며 살았습니다. 고흐네 형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 그림값이 얼마나 되었든 말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밀레도 고흐도 어디 먼 나라에서 똑 떨어진 그림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살아가는 사람을 그렸고, 살아서 숨쉬는 싱그러운 시골사람 시골빛을 그림으로 되살렸습니다.


  이제 시골에서 살아가는 화가도 작가도 거의 없다 할 테지만, 그림이나 글은 화가와 작가만 이루지 않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어버이 모습을 그리고 쓰면 됩니다. 밥을 짓고 빨래를 하며 자장노래 부르는 어버이 모습을 그리고 쓰면 됩니다. 자전거를 타든 자가용을 몰든, 여느 삶을 즐거이 누리면서 그리고 쓰면 됩니다.


  언제나 스스로 즐기면서 아름답게 태어나는 삶입니다. 늘 스스로 가꾸면서 환하게 빛나는 하루입니다. 내 아이가 없으면 이웃 아이를 그려요. 모두 우리 아이들입니다. 내 동무가 없으면 이웃 동무를 그려요. 모두 우리 동무요 이웃입니다.


  나무를 그리고 풀을 그리며 꽃을 그려요. 마음속에 곱게 빛나는 숨결 자라도록, 스스로 내 삶을 사랑하고 이웃 삶을 사랑하며 옆지기와 아이들 삶을 사랑하는 넋으로 그림을 그려요.

 


.. 줄리엣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물감 상자를 꺼냈어요. 그리고 아침에 들었던 새들의 노랫소리를 상상해 보았어요. 그래, 새들의 노랫소리는 바로 이런 색깔이야 ..  (21쪽)


  카를로스 펠리세르 로페스 님이 빚은 그림책 《줄리엣과 물감 상자》(미래M&B,2006)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줄리엣이라는 아이는 물감 상자를 받고서 언제나 즐겁게 그림을 그립니다. 누가 시켜서 그리는 그림이 아닙니다. 예술품 되라며 그리는 그림이 아닙니다.


  마음을 그립니다. 꿈을 그립니다. 사랑을 그립니다. 생각을 그립니다.


  우리 아이들은 작가나 화가나 사진가 되어야 하지 않아요. 우리 아이들은 회사원이나 공무원 되어야 하지 않아요. 우리 아이들은 가수나 연예인이나 운동선수 되어야 하지 않아요. 우리 아이들은 그예 아이들로 자라서 ‘사람’이 되면 되어요.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며, 아이들과 어깨동무하는 예쁜 ‘어른’이 되면 되어요.


  즐겁게 그릴 그림은 바로 모든 사람들 마음속에서 다 다르면서 다 같은 빛으로 곱게 자랍니다. 4346.11.11.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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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량한 말 바로잡기
 (1521) 역할 3 : 가장의 역할을 하게

 

결혼해서 가장의 역할을 하게 되는 남성과, 육아와 집안일을 맡은 여성의 삶은 평행선을 그린다
《안미선-내 날개 옷은 어디 갔지?》(철수와영희,2009) 156쪽

 

  일본 한자말이기는 해도 워낙 자주 쓰는 ‘결혼(結婚)’입니다. 같은 한자말이라 하여도 우리가 예부터 쓰던 ‘혼인’으로 고치기가 쉽지 않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자꾸 써야 익숙합니다. 얄궂은 역사 때문에 흘러든 일본 한자말도 처음부터 사람들이 익숙하게 쓰지 않았어요. 쓰고 또 쓰면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가장(家長)’은 ‘집안 어른’이나 ‘집안 기둥’으로 손보고, ‘육아(育兒)’는 ‘아이키우기’로 손봅니다. “여성의 삶”은 “여성 삶”이나 “여성이 보내는 삶”이나 “여성이 누리는 삶”으로 손질하고, “평행선(平行線)을 그린다”는 “나란한 금을 그린다”나 “나란히 달린다”나 “다르게 달린다”나 “서로 엇나간다”로 손질해 줍니다.

 

 가장의 역할을 하게 되는 (x)
 집안일을 맡은 (o)

 

  글쓴이 스스로 짧은 글월 하나에 ‘역할’과 ‘맡다’를 나란히 쓰는 줄 깨닫지 못합니다. 어쩌면, 일부러 이렇게 나누어 놓았는지 모르는데, 앞쪽이나 뒤쪽이나 ‘맡다’를 넣어야 올바릅니다. ‘역할’은 일본 한자말이기도 하지만, 이 낱말을 자꾸 쓰면 토씨 ‘-의’가 저절로 들러붙곤 합니다. 이와 달리 한국말 ‘맡다’를 쓸 적에는 토씨 ‘-의’가 달라붙을 구석이 없습니다.

 

 가장의 역할을 하게 되는 남성
→ 가장 구실을 하는 남성
→ 한 집안 기둥이 되는 남성
→ 한 집안 버팀나무가 되는 남성
→ 집안에서 기둥 구실 하는 남성
 …

 

  한자말 ‘가장’을 그대로 둔다면 “가장 노릇”이나 “가장 구실”이나 “가장 몫을 맡는”처럼 적습니다. 있는 그대로 적으면 됩니다. 있는 그대로 적을 때에 옳고 바르며 아름다운 글이 됩니다. 있는 그대로 적지 않으니, 자꾸 얄궂게 뒤틀리고 말아요.


  글이나 말이 싱그럽지 못하거나 살갑지 못한 까닭은, 자꾸 꾸미려 하기 때문입니다. 겉치레를 하면 할수록 글도 말도 엇나갑니다. 삶을 가꾼다는 마음으로 글을 가꾸면 되고, 삶을 사랑한다는 마음으로 말을 사랑하면 됩니다. 4342.8.7.쇠/4346.11.11.달.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혼인해서 한 집안 기둥이 되는 남성과, 아이키우기랑 집안일을 맡은 여성은 삶이 다르게 달린다

 

..

 

 알량한 말 바로잡기
 (1588) 역할 4 : 도망자 역할

 

설령 누가 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우리가 가여운 도망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는 못했을 것이다
《수잔 크렐러/함미라 옮김-코끼리는 보이지 않아》(양철북,2013) 82쪽

 

  ‘설령(設令)’은 ‘아마’로 손볼 수 있으나, 이 글월에서는 덜어도 됩니다. “하고 있다는 걸”은 “하는 줄”로 손질하고, “못했을 것이다”는 “못했으리라”나 “못했으리라 본다”로 손질합니다.

 

 도망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 도망자 노릇을 하는 줄
→ 도망자처럼 노는 줄
→ 도망자가 된 줄
 …

 

  한자말 ‘역할’과 함께 ‘-고 있다’라는 말투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이 모두 아픈 역사 때문에 쓰는 말입니다. 이제는 아픈 역사 앙금이나 생채기가 사라졌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우리들이 늘 쓰는 말 곳곳에 앙금과 생채기가 고스란히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말 속살이 온통 멍들거나 다쳤다고 할 만합니다.


  보기글을 더 살피면 ‘역할’에 ‘-고 있다’뿐 아니라 ‘것’을 함부로 씁니다. 한국말에서 ‘것’은 아무 자리에나 쓰지 않습니다. 어느 것을 가리키는 자리 아니라면 ‘것’을 거의 안 써요. 우리 스스로 우리 말투를 잊거나 잃었기에, 아무 데나 자꾸 ‘것’을 넣습니다.


  낱말 하나부터 찬찬히 다스리면서, 말투를 가만히 추스릅니다. 알맞게 쓸 낱말을 돌아보면서, 즐겁게 빛낼 말투를 헤아립니다. 4346.11.11.달.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누가 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우리가 가여운 도망자가 된 줄 눈치채지는 못했으리라

 

..

 


 알량한 말 바로잡기
 (1589) 역할 5 : 이야기 들어 주는 역할

 

나는 담당 편집자로서 특별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직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역할에 충실했고
《오쓰카 노부카즈/송태욱 옮김-책으로 찾아가는 유토피아》(한길사,2007) 58쪽

 

  “담당(擔當) 편집자로서”는 그대로 둘 만한데, “그 책을 맡은 편집자로서”로 손질할 수 있어요. “특별(特別)한 일은”은 “남다른 일은”이나 “다른 일은”이나 “돋보이는 일은”으로 다듬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는 “그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 주는”이나 “그분 이야기를 들어 주는”으로 손보고, ‘충실(忠實)했고’는 ‘힘썼고’로 손봅니다. 글흐름을 살피면 “역할에 충실했고”에서 ‘충실’은 덜어도 됩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역할에 충실했고
→ 그분 이야기를 들어 주는 일을 했고
→ 그분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 주었고
→ 그분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차분히 들었고
→ 그분이 하는 이야기를 찬찬히 들었고
 …

 

  일본사람은 ‘역할’이라는 한자말을 즐겨씁니다. 일본말에서는 이 한자말이 돋보입니다. 한국사람은 일제강점기부터 이 한자말이 일본사람 입과 손을 거쳐 들어온 뒤 여러모로 즐겨씁니다. 이래저래 고치거나 바로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불거져도 한국사람은 좀처럼 한국말을 찾지 못합니다.


  이 보기글을 들여다보면, 일본사람이 즐겨쓰는 한자말 ‘역할’뿐 아니라, 일본사람이 즐겨쓰는 ‘-의’를 엿볼 수 있습니다. 한국말로는 “그 사람 이야기”나 “그분 이야기”나 “그가 하는 이야기”나 “그분이 들려주는 이야기”이지만, 나날이 이러한 한국말이 사라지거나 잊혀집니다.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잊습니다.


  글을 쓰는 분 못지않게, 외국말을 한국말로 옮기는 일을 하는 분들도 한국말을 슬기롭고 알맞으며 아름답게 쓸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어른들 읽는 책이든 아이들 읽는 책이든, 글을 다루는 분들은 모두 한국말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기를 빕니다. 4346.11.11.달.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나는 그 책을 맡은 편집자로서 딱히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오직 그분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찬찬히 들었고

 

(최종규 . 2013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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