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그마니

 


살그마니 밤에
아이들 이불깃 여미고
조용히 일어나서
마당으로 내려와
별빛 한가득 마신다.

 

살그마니 새벽에
쌀 씻어 불리고
아직 아이들 일어나지 않았을 때
밥과 국을 지어 놓는다.

 

아침해 살짜기 찾아든다.
아침바람 살포시 분다.
아침노래 살살 흐른다.

 

날마다 살며시 웃음짓는 이야기
도란도란 주고받는다.

 


4346.10.29.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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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태어나는 곳

 


  책은 가슴에서 태어납니다. 스스로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 가슴에서 책이 태어납니다. 이름난 작가 손에서 책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뛰어난 사람들 손으로 책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이름이 안 났거나 뛰어나지 않아도 됩니다. 조용히 시골에서 살아가든, 말없이 비질을 하거나 밥을 끓이건, 공장 기계를 돌리거나 분필을 쥐든, 스스로 삶을 사랑하면서 가슴속으로 꿈을 키우는 사람들이 시나브로 책을 낳습니다.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일굽니다. 텔레비전에서 본 이야기 아닌, 책에서 본 이야기 아닌, 누구한테서 들은 이야기 아닌, 바로 스스로 살아냈고 스스로 살아오며 스스로 살아갈 이야기가 책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책으로 태어나는 이야기란 내 이야기입니다. 책에 담는 이야기는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책으로 엮어 나누는 이야기란 내가 삶을 사랑한 이야기입니다.


  서울과 진주, 진주와 서울, 이렇게 오랜 나날 오가며 차곡차곡 모은 버스표를 고무줄로 묶습니다. 오랜 나날 아로새긴 버스표꾸러미는 고스란히 이야기샘입니다.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해도, 가만히 쓰다듬기만 해도, 이 버스표꾸러미에서 이야기꽃이 피어납니다. 다른 사람들 여행책을 읽지 않아도 돼요. 내가 다니는 길을 곰곰이 돌아볼 수 있으면 돼요. 버스를 타거나 전철을 타며 집과 일터를 오갔어도, 스스로 삶을 사랑하는 마음이라면, 버스표와 전철표 하나가 바로 이야기밭 됩니다. 버스도 전철도 아닌 두 다리로 걸어다녔으면, 종아리에 붙은 힘살과 발바닥에 박힌 굳은살이 바로 이야기나무 됩니다. 자전거로 찬찬히 달리며 일터나 학교를 다닌다면, 천천히 낡고 닳는 자전거가 바로 이야기숲 됩니다.


  삶에서 이야기 자랍니다. 이야기 자라 책이 태어납니다. 책이 태어나 책방이 생깁니다. 책방이 생겨 책빛 찾는 책마실꾼 하나둘 나타납니다. 아주 조그마한 곳에 따사로운 볕 깃들면서 싹이 트고 줄기가 오르며 꽃이 피어요. 아주 조그마한 꽃이 맺는 씨앗이 새로운 꽃을 낱아 이윽고 꽃밭이 되어요.


  눈을 크게 뜨지 않아도 돼요. 눈을 살가이 떠요. 눈을 사랑스레 떠요. 눈을 따사롭게 떠요. 그러면, 바로 내 삶자리에서 작은 책 하나 태어납니다. 4346.11.16.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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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마한 간판

 


  지난날 참 많은 헌책방들은 간판이 없이 가게를 열었다. 간판도 책방이름도 없이 책만 가게에 두었는데, 사람들이 하나둘 찾아와서 책을 살펴서 사 갔다. 마음속으로 고운 책빛을 품는 사람들은 간판도 책방이름도 없는 조그마한 헌책방 옆을 스쳐서 지나갈 일이 어김없이 생긴다. 헌책방지기도 책손도 바로 이곳에 어느 날부터 헌책방이 문을 열 줄 생각조차 못했겠지. 그러나 두 사람 책빛이 마음과 마음으로 만나 이 길을 걸어갈 일이 생기고, 이 길을 걸어가다가 살며시 만난다.


  서른 해 마흔 해 쉰 해 헌책 만지며 살림 일구는 할배 헌책방지기와 할매 헌책방지기는 말한다. “좋은 책 두면 되지. 간판이 뭐가 대수로워.” 헌책방은 ‘이 좋은 책이 나온 곳’이라는 이름을 사람들한테 알리지 않는다. 헌책방은 그저 ‘이곳에 오면 책이 있다’는 이야기만 사람들한테 알린다.


  과일장수가 길가에 능금 몇 알 놓으면 이곳이 과일 파는 집인 줄 알려준다. 헌책장수는 길가에 헌책 몇 권 놓으면 이곳이 헌책 파는 집인 줄 알려준다.


  ‘이 책을 꼭 읽으시오’ 하고 말하는 헌책방은 없다. ‘이 책을 반드시 사시오’ 하고 끌어당기는 헌책방지기는 없다. 모두 책손 몫이다. 조그마한 동네새책방이건 동네헌책방이건, 책빛이 숨쉬는 책터를 알아보는 몫은 오로지 책손한테 있다. 책방지기는 이녁 책방에 ‘아름다운 빛 물씬 흐르는 책’을 꾸준히 알뜰살뜰 건사한다.


  책방을 광고하거나 홍보하지 않는다. 책은 광고하거나 홍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책을 엮은 출판사 일꾼도 책을 알리지 못한다. 보도자료는 쓸 수 있어도 책을 알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책을 알아채거나 느끼는 몫은 ‘마음속에 책빛 담은 사람’ 스스로한테 있기 때문이다. 두 손으로 쥐어 두 눈으로 살피며 온마음으로 읽는 책이다.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라 해서 이냥저냥 읽을 수 없다. 백만 사람이 읽는 책이 아니라, 다 다른 사람이 다 다른 가슴으로 읽는 책이다. 백만 사람이 읽었더라도 백만 가지 새 이야기가 흐를 수 있어야 옳다. 천만 사람이 읽었으면 천만 가지 이야기가 새로 태어나야 마땅하다.


  책방마실을 하는 사람은 스스로 책시렁을 살핀다. 책방을 꾸리는 사람은 스스로 책을 캐낸다. 책방마실을 하는 동안 마음속으로 스며드는 책을 헤아린다. 책방살림 일구는 동안 마음속으로 퍼지는 책씨앗을 돌아본다.


  커다랗게 붙여야 알아볼 만한 책방 간판이 아니다. 신문이나 잡지에 소개글이나 광고글 실렸기에 읽어 볼 만한 책이 아니다. 4346.11.16.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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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읽는 책 76] 서로

 


  옳은 말은 힘이 세요.
  아름다운 말은 사랑스러워요.
  즐거운 말은 빛나요.

 


  옳은 말은 힘이 세지요. 아름다운 말은 사랑스럽답니다. 옳은 말만 한다면 힘센 기운에 눌려 둘레 사람들이 아무 말을 못해요. 옳은 말은 옳은 말대로 할 수 있으면서, 언제나 아름답고 즐거운 말을 할 수 있어야 해요.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옳은 말은 밑바탕에 사랑과 즐거움이 있어요. 사랑과 즐거움을 밑바탕에 깔지 않는다면 옳은 말을 할 수 없어요. 얼핏 보면 옳은 말은 딱딱하거나 차갑다 여길 수 있지만, 속에 깃든 사랑과 즐거움을 읽을 수 있다면, 왜 옳은 말이 힘이 세고, 이렇게 힘이 센 말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빛나는가를 알 수 있어요. 그리고, 아름다운 말은 옳으면서 아름답고, 즐거운 말은 옳고 아름다우면서 즐겁습니다. 4346.11.15.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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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3-11-15 22:31   좋아요 0 | URL
아... 참 좋은 시입니다~!!!*^^*

파란놀 2013-11-16 05:5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좋은 마음으로 읽어 주시기에
좋은 시가 될 수 있어요~
 

[시골살이 일기 30] 집으로 집으로
― 눈과 마음과 머리를 트는 길

 


  바깥일을 보러 먼먼 마실을 다녀와야 할 때가 있습니다. 고흥에서는 어디로 가든 먼길입니다. 순천을 다녀오더라도 가깝지 않습니다. 서울과 부산을 다녀오는 길은 무척 멉니다. 고흥에서 다른 시골로 찾아가는 길은 훨씬 더 멉니다. 시골에서 시골로 움직이면, 새로운 시골빛을 누리며 즐겁지만, 시골에서 도시로 다녀와야 할 적에는 몸이 여러모로 고달픕니다.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에 시달려야 하고, 온통 빽빽하게 들어찬 시멘트와 아스팔트와 가게와 전깃줄에 들볶여야 합니다.


  그래도 아름다운 사람들 살아가는 마을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름다운 생각을 북돋울 수 있기에 먼 마실을 다녀요. 아름다운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아름다운 꿈을 주고받다 보면, 다른 시끄럽거나 자질구레한 소리와 모습은 어느새 내 눈앞에서 사라집니다. 다만, 시외버스를 여러 시간 타면 속이 울렁거리고 골이 아파요. 그런데, 시외버스가 여러 고속도로를 거쳐 벌교읍 지나 고흥읍 동강면으로 접어들면 멀미와 울렁거림이 감쪽같이 사라져요. 버스에 탄 몸이라 바깥바람을 쐴 수 없지만, 바깥에서 흐르는 고운 시골바람을 마음으로 느끼기 때문일까요.


  시외버스는 과역면을 지나고 고흥읍에서 섭니다. 고흥읍에서 군내버스를 타고 우리 마을로 돌아옵니다. 이동안 나는 군내버스가 달리는 시골길에서 흐르는 냄새를 맡고, 별빛을 느끼며, 풀노래를 듣습니다.


  삶이란 무엇일까요. 즐겁게 누리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디에서 마음을 살찌우면서 삶을 빛낼 수 있을까요. 내 이웃은 누구이며, 내가 선 이 마을은 어떤 이야기 흐르는 터전일까요.


  읍내에서 20분 달린 끝에 동백마을에 닿습니다. 버스에서 내립니다. 늦가을이라 풀벌레는 더 노래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가을바람 따라 살랑살랑 흔들리는 누런 풀포기가 춤노래를 베풉니다. 버스는 등불을 켜고 어두운 시골길을 달립니다. 나는 어두운 고샅길을 거닐며 밤하늘 별자리를 올려다봅니다. 4346.11.15.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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