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석 님 책 느낌글

 


  김광석 님 책을 읽는다. 김광석 님이 남긴 글조각을 묶었다고 한다. 글조각은 얼마 안 되는데 빈자리를 무척 많이 두었다. 양장을 퍽 두껍게 했다. 떠난 이를 기리는 뜻이라 이렇게 했으리라 싶으면서도, 작고 도톰하게, 살가우면서 앙증맞게 엮을 수 있었으리라 느낀다. 짤막하게 쓴 글이 많은 만큼, 빈자리를 넓게 두기보다는 훨씬 자그마한 판과 가벼운 책으로 꾸며 늘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애틋하게 되새길 수 있도록 하면 얼마나 좋았으랴.


  글이 짧아 퍽 빨리 읽고 덮는다. 다 읽은 책을 덮고 나서 무언가 허전하다. 무엇이 허전했을까.


  시골집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러 가기 앞서, 여관에서 기차때를 기다리며 김광석 님 책 느낌글을 쓴다. 느낌글을 쓰다가 비로소 가슴에 쨍 하고 울리는 소리를 듣는다. 그래, 김광석 님이 한창 노래잔치를 열다가 어느새 이슬이 된 그무렵, 나는 신문배달을 하던 ‘대학교 자퇴를 하려고 생각하던’ 젊은이였고, ‘대학교 엉성한 교육에 진절머리를 내면서 군대에 들어가 뒹굴던’ 숨결이었다. 아버지가 커다랗게 틀어놓은 텔레비전에 자막으로 김광석 님 마지막 이야기가 흘렀는데, 그때는 내가 군대에 들어가 훈련소에서 받은 연대장 표창장에 딸린 휴가증을 갖고 며칠 집으로 돌아온 날이었다. 스치듯이 텔레비전 자막으로 짧은 이야기를 읽었고, 이튿날 다시 군대로 돌아가서 지오피에 여섯 달 처박혔다. 김대중 님이 대통령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군대 간부들이 반란 일으키지 않을까 두려움에 떨면서 1997년 12월 31일에 전역을 했고, 국제통화기금 찬서리가 내린 서울에서 다시 신문배달을 하며 이태를 살았다. 이동안 김광석 님 노래테이프를 늘어지도록 들었고, 새벽에 신문을 돌리면서 목이 터져라 부르곤 했다.


  느낌글을 쓰다가 그무렵 그 이야기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그렇구나. 그런 이야기가 나한테 있었구나. 입시지옥에서 벗어나 대학교라는 데에 왔지만, 막상 이 대학교에서 선배라는 이들이 후배를 때리고 얼차려 주고 머리박기 시키고 허구헌날 술만 퍼먹이고, 교수나 강사라는 이들은 시간때우기만 하고, 도서관에는 소설책과 토익책만 가득하고, 대학교 앞 책방은 장사가 안 되어 하나둘 문을 닫고, 동무들은 선배를 깎듯이 모시기만 하면서 밤새도록 술을 퍼마시다가 곳곳에 웩웩 게우고, 이런 틈바구니에서 괴로워 대학교란 데를 때려치우자고 생각하던 마음에 김광석 님 노래가 조그맣게 빛줄기가 되었지. 〈이등병의 편지〉가 담긴 테이프를 몰래 군대로 가지고 와서, 군대에서 나를 살가이 아끼던 고참과 후배한테 빌려주며 모포를 뒤집어쓰고 눈물 적시며 들었지.


  빛이 있기에 빛이 퍼지고, 빛이 있어 빛을 포근하게 안는구나. 4347.1.4.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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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4-01-04 13:40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이 나왔을 때 관심이 있었는데 너무 고급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물론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객의 책이니 허접하게 만드는 것도 예의는 아니겠죠.
하지만 너무 비싸게 만드는 것도 상술이란 점을 배제할 수 없으니
적당한 상한선은 있었어야 하리라 생각됩니다.
즉 사람과 독자를 연결 시켜준다는 좀 더 고상한 목표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래도 김광석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 책을 샀을 것이고, 앞으로도 사겠죠?

파란놀 2014-01-04 18:02   좋아요 0 | URL
'고급'으로 만들었다기보다
'품위 아닌 품위'를 갖추려 하다 보니
껍데기가 부풀려졌구나 싶어요.

예쁘게 꾸미는 일과
고급으로 하는 일은
좀 다르잖아요.

왜 더 김광석 님 노래와 삶과 이야기를
헤아리지 못했나 싶어요.

생각해 보면,
김광석 님 음반을
적어도 1000번쯤이라도 들었으면
책을 이렇게 만들지 않았으리라 생각해요.
 
미처 다 하지 못한 - 김광석 에세이
김광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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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50

 


이 땅에 없는 노래를 부르다
― 미처 다 하지 못한
 김광석 글
 예담 펴냄, 2013.12.20.

 


  버스를 타고 달리면 버스 엔진과 차바퀴 소리에 묻혀, 버스가 지나가는 길에서 퍼지는 소리를 하나도 못 듣습니다. 버스가 멧자락을 가로지르든 바닷가를 달리든, 버스에서는 엔진과 차바퀴 소리만 가득해요. 게다가, 요즘 시외버스나 고속버스는 창문을 열 수 없습니다. 바깥소리와 바깥바람 어느 것도 맞이하지 못합니다. 멀거니 유리창으로 쳐다보는 모습일 뿐입니다.


  기차를 타고 달리면 쇠바퀴 소리에 묻혀, 기차가 지나가는 길에서 울리는 소리를 하나도 못 듭습니다. 기차가 깊은 두멧자락 구멍으로 가르지르듯, 예쁜 시골마을 곁을 달리든, 기차에서는 쇠바퀴 소리만 가득합니다. 더욱이, 오늘날 기차는 창문이 몽땅 통유리예요. 예전에는 기차에서도 창문을 열 수 있었지만, 이제 창문 여는 기차는 한국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 난 뭘까? 음식을 돈 주고 사먹으며 온갖 병명을 기억해야 하는 나는 뭘까 …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 그렇게 말하는데 나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 서연이와 아내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처가에서 저녁을 먹고 좀더 시간을 보냈다. 아내의 과거를 듣고 질투하며 약이 오른 내 모습, 좀 어처구니없는 내 모습. 오늘은 갔다 … 기형도 산문집을 읽다. 짧은 여행의 기록. ‘짜쉭’ 스물아홉에 신춘문예 당선이라니. 그럴 만도 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관심사에 목매다는 것인까. 다른 이들보다 좀 나은 것은 그는 그렇게 자신의 삶으로 시를 완성했다는 사실이다. 스물아홉 살, 어느 삼류 극장에 앉아 조용히 숨을 거둔, 그 짧은 여행의 마지막 눈빛은 어떠했을까 ..  (21, 32, 38, 40쪽)


  사람들은 여행을 다닙니다. 여행이 아닌 출장이든 무엇이든, 기차나 버스나 자가용을 타고 어디론가 돌아다닙니다. 옛날처럼 두 다리로 걸어서 다니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가까운 곳도 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타요. 가까운 곳이라 하더라도 자가용을 몰지요.


  1킬로미터쯤 떨어진 곳까지 걸어서 다니는 이는 얼마나 될까요. 5킬로미터쯤, 또는 10킬로미터쯤 걸어서 다니려는 이는 얼마나 될까요. 두 시간이나 세 시간쯤 걸어서 마을과 마을을 지나 이웃이나 동무한테 찾아가는 이는 몇이나 될까요.


  걷지 않고 자동차를 타거나 기차를 타면서 모든 소리를 잊습니다. 걸음과 등을 지고 자동차나 기차에 익숙하면서 봄내음과 여름바람과 가을빛과 겨울소리 모두를 잊습니다. 아니, 잃는다고 해야 할까요.


  서울에서 여수까지 기차를 타고 가더라도, 점과 점 사이를 가로지를 뿐입니다. 서울과 여수 사이에 어떤 시골과 숲과 마을이 있는가를 헤아리지 못합니다. 눈으로는 예쁜 들과 숲을 바라보더라도, 이 들과 숲에서 흐르는 바람과 소리를 하나도 맞이할 수 없어요.


  고속도로는 어떨까요. 고속도로가 아름다운 시골마을 가로지르더라도 사람들은 아름다운 시골빛에 마음을 쓰지 못해요. 아주 빠르게 달리는 자동차 물결 사이에서 자동차끼리 부딪히지 않도록, 이러면서 남보다 더 빨리 달리도록 하는 데에 온마음 기울입니다.


.. 정말 힘들다. 바쁘고 열심히 사는 것이 돈을 버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 1985년 초에 나는 군에 입대했어요. 결혼을 이십 일 앞두고 군대에서 돌아가신 큰형님 덕택(?)에 6개월만 복무했어요. 방위보다 짧은 6개월. 남들보다 짧게 다녀온 셈이지요. 제대할 때까지 앞일에 대한 아무런 확신도 없었습니다. 복학하니 친구들은 취업한답시고 풀숲에 머리 처박은 꿩처럼 도서관 책상ㄷ에 머리 숙이고 공부만 했고, 나 역시 앞일이 걱정이었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비로소 절박해진 나는 고민을 거듭하다 문득 한 가지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노래 부르며 사는 것도 괜찮지 않겠어?” ..  (45, 77쪽)


  지게를 짊어지고 걸어서 숲에 깃들어 나무를 하고 장작을 모으던 사람은 두 다리로 흙과 나무와 풀을 느낄 뿐 아니라, 눈과 귀와 코와 살갗으로 숲과 바람과 하늘과 햇볕을 골고루 누립니다. 맨발로 고샅과 마당에서 뛰노는 아이들은 온몸으로 햇살과 바람과 나무와 풀과 꽃을 고루고루 즐깁니다.


  꽃은 꽃집에 있지 않습니다. 꽃은 흙이 있는 들과 숲에 있습니다. 바람은 공기청정기에 있지 않습니다. 바람은 지구별 어디나 찬찬히 흐르면서 숲에서 싱그럽게 태어납니다. 물은 정수기나 물꼭지나 댐에 있지 않습니다. 물은 구름과 바다와 시내와 샘과 가람에 있습니다. 나무는 돈을 들여 척척 박을 때에 나무가 아닙니다. 나무는 어미나무가 내놓은 씨앗이 흙땅에 떨어져 찬찬히 싹이 트고 줄기를 올려서 나무입니다.


  아이들은 어떤 숨결일까요. 아이들은 유치원과 학교와 학원을 잘 다니면 될까요. 아이들은 우리 어른들한테서 사랑을 받아 사랑을 고이 품고는 사랑을 예쁘게 빛내어 펼칠 때에 아름다운 숨결이지 않나요.


  우리 어른은 어떤 목숨인가요. 오늘 바라보기로는 어른이지만, 우리도 아기로 태어나 갓난쟁이 나날을 거치고 어린이로 자라면서 이 땅에 섭니다. 우리들은 누구나 아기요 아이이면서 어른입니다. 우리들은 저마다 똑같은 사람이고 푸른 숨겨이면서, 아름다운 사랑을 물려받았듯이 고운 사랑을 물려줄 빛입니다.


.. 저는 집에서 용돈 받아서 친구들이랑 소주 먹고 책값 받아서 술 먹고 엠티비 받아서 그 다음 날 밤새 술 먹고 그러면서 주변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생활하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근데 이 노래를 만든 사람은 이런 데도 관심을 가지고 가사를 쓰는구나, 뜻이 좋은 것 같아 관심을 가졌습니다. 몇 장을 더 넘기면서 보는데 제목이 아주 재미있는 게 또 있었습니다. 〈못 생긴 얼굴〉. 괜스레 동질감이 느껴지는 제목이었습니다 … 노래 가사 중에 욕 나오는 것도 처음 봤습니다. 오죽하면 욕을 했겠습니까마는, 그 다음 줄 가사는 더 놀라웠습니다. “아버지를 따라서 일터 나갔지 / 처음 잡은 삽자루가 손이 아파서 / 땀 흘리는 아버지를 바라보니까 / 나도 몰래 눈에서 눈물이 난다 / 하늘의 태양아 잘난 척 마라 / 자랑스런 우리 아버지” 갑자기 저희 아버님 생각이 나더군요. 그렇게 그 노래책에 빠져들었습니다. “서방님의 손가락은 셔섯 개래요…… 한 개에 오만 원씩 이십만 원을 술 퍼먹고 돌아서니 빈털터리래.” 그 노랫말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어요. 한편으론 기뻤습니다. 뭔가 새로운 것을 알았다는 그런 기분이었죠. 사실 그 당시만 해도 라디오에서 나오거나 레코드판으로 들을 수 있는 노래들이 전부 다이겠거니 했죠. 세상에 이런 노래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  (78∼81쪽)


  김광석 님이 남긴 글조각을 그러모은 《미처 다 하지 못한》(예담,2013)을 읽습니다. 바깥일을 하러 서울로 가는 시외버스에서 읽습니다. 새해를 맞이해 일곱 살이 된 큰아이는 문간에서 아버지한테 묻습니다. “아버지, 아니 아빠, 어디 가요?” 얘야, 너 왜 갑자기 아버지 아닌 아빠라 하니? 부러 곰살궂게 부르고 싶니? “서울에 가.” “서울? 나도 가고 싶은데.” “그래, 너도 가고 싶지? 앞으로 같이 갈 수 있어. 오늘은 아버지가 해야 하는 일 때문에 가니까, 우리 집에서 동생하고 사이좋게 놀고 어머니하고 밥 맛있게 먹으면서 잘 놀아.” “칫. 응, 알았어.”


  서울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면서 생각합니다. 바깥일 때문에 드나드는 곳이 여럿 있는데, ‘서울’이라는 이름을 아이한테 자꾸 이야기하면, 아이도 앞으로 ‘서울’을 자꾸 생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서울에서 바깥일을 겨우 끝마치고 시골집으로 전화를 할 적에 아이가 다시 “아버지 어디 있어요?” 하고 물을 적에, “응, 한글문화연대에 있어.” 하고 말합니다. 아이는 처음 듣는 이름이라 “응? 응.” 하고만 말합니다. 이제부터는 아버지가 움직이는 곳과 만나는 사람 이름만 알려주어야겠다고 느낍니다.


.. 녹음은 거의 끝날 무렵이었는데 심의를 못 받으니까 음반 발표를 못하게 되는 겁니다. 게다가 그때만 해도 〈아침이슬〉 〈늙은 그대 노래〉 등 금지곡은 심의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접수를 해야 되는데 심의위원회에서는 접수조차 하지 받지 않았던 거지요. 얼마 전 정태춘 씨가 ‘음반 파업’의 맥락으로 심의를 받지 않고 불법 음반을 만든 것도 다 그 맥락입니다. 개인의 사상물이나 머릿속에서 나온 결과물에 대해서는 규제를 하지 말라는 의미죠 … 하지만 음반 심의가 끝이 아닙니다. 방송 심의가 또 있습니다 … 어느 모임에 갔을 때였습니다. 모임에 참가하신 칠순 할머니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비오는 어느 날 우산도 없이 장을 보고 오는 길이었는데 거리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비도 잊은 채 한참을 서 있으셨답니다. 그 노래가 〈사랑했지만〉이었답니다 … 나는 할머니의 말씀을 듣고 반성을 했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이 노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시도하지도 않고 그저 멀리서 바라만 보는 수동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할머니의 잊었던 감정을 되살려준 노래이기에 조금 더 열심히 부르고 좋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  (88, 99쪽)


  덜컹덜컹 흔들리고, 큼지막한 소리로 틀어놓은 텔레비전 소리 때문에 귀가 찢어질 듯하지만, 책을 손에 쥡니다. 모두들 텔레비전을 목을 빼고 쳐다보거나 손전화를 들어 뭔가 들여다보는 시외버스에서, 솜으로 귀를 막고 책을 펼칩니다. 서른 즈음을 살던 김광석 님이 조각조각 남긴 글을 차근차근 읽습니다. 멋모르고 살다가 한돌 님 노래를 처음 만나며 받은 놀라움을 퍽 길게 적바림한 글을 읽습니다. 백창우 님한테서 노래를 받은 이야기를 적은 글을 읽습니다.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동물원〉이라는 모임을 꾸리면서 음반을 하나 냈는데, 함께 노래하던 이들이 뿔뿔이 흩어지듯이 ‘돈을 벌 회사’에 들어가고 혼자 남던 그무렵,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노래를 부르면서도 돈을 벌 수 있어요. 노래를 짓고, 노래를 나누며, 노래로 이야기꽃 피우면서도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글을 쓰면서도 돈을 벌 수 있어요. 시골에서 흙을 파면서도 돈을 벌 수 있어요. 돈을 벌겠다면 어디에서 무엇을 하더라도 돈을 벌 수 있어요. 곁님을 보듬고 아이를 보살피려 하면, 어디에서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어요. 어버이로 살아가는 마음은 ‘내 한몸을 넘어서는 한솥지기’를 그리는 마음이니까요.


  아버지가 뚱딴지 같은 사람한테 고개를 숙여요. 어머니가 우악스러운 사람한테 고개를 숙여요. 회사에서 고개를 숙여요. 저잣거리에서 장사를 하며 고개를 숙여요. 아이들을 먹여살리고 집안을 지키려고 고개를 숙이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떤 마음일까요. 바보스러운 사람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바라보아야 하는 아이들은 어떤 마음일까요. 저딴 사람한테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된다고, 돈은 안 벌어도 된다고 외칠 아이들은 어떤 마음일까요. ‘넌 아직 아버지 어머니 마음을 몰라’ 하면서 빙그레 웃음을 짓는 어버이는 어떤 마음일까요. 조용히 남몰래 울음을 삭히는 하루는 어떤 마음일까요.


.. 내 딸이 태어날 때 처음 본 얼굴은 의사가 아니라 나였다. 내가 딸을 직접 받아냈기 때문이다. 의사는 출근 전이었고 간호사는 무슨 준비하러 간다고 나간 사이에 내가 아이를 받아냈다. 아주 놀라웠다. 아! 사람이 이렇게 태어나는구나. 그 놀라운 광경은 괴기영화보다 더했다. 참 신기했다. 사람이 태어나는 게. 놀라 가지고 멍청하게 있다가 밖에 나갔는데 길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이 하나도 쉽게 안 보였다. 잘생겼건, 못생겼건, 있는 자건, 없는 자건, 다 그렇게들 태어나는구나. 좀 없는 사람이다 싶으면 슬쩍 무시하고 좀 있는 사람이다 싶으면 괜히 쩔쩔매던 나 자신이 부그러워졌다 ..  (126쪽)


  이 땅에 없는 노래를 부릅니다. 이 땅에 사랑이 없기에, 사랑을 노래합니다. 이 땅에 평화가 없기에, 평화를 노래합니다. 이 땅에 꿈이 없기에, 꿈을 노래합니다.


  초·중·고등학교 교과서를 들여다보셔요. 아이들이 열두 해 동안 학교를 다니며 들추어야 하는 교과서에는 사랑도 평화도 꿈도 없습니다. 아이들은 열두 해 동안 오직 대학바라기를 해야 합니다. 교사도 학부모도 아이한테 사랑이나 평화나 꿈을 들려주지 않아요.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마을에서 아이한테 사랑이나 평화나 꿈을 들려주려는 어른이 없어요.


  책은? 책은 무언가 이야기를 하나요? 노래는? 노래는 무언가 이야기를 하나요?


  오늘날 교과서를 들여다보면, ‘시골에서 흙을 일구며 살아가는 빛’을 그리는 이야기는 한 토막조차 안 실립니다. 어느 회사 역사 교과서가 역사를 비튼다고 말썽이 되는데, 다른 교과서라도 다를 대목 없다고 느껴요. 이 나라 모든 교과서는 아이들을 입시지옥으로 밀어넣어요. 이 나라 모든 교과서는 아이들한테 지식과 정보만 집어넣어요. 삶을 보여주는 교과서가 없어요. 사랑을 속삭이는 교과서가 없어요. 평화를 바라고 꿈을 찾는 이야기를 담은 교과서가 없어요.


  역사 교과서 가운데 ‘시골에서 착하고 참다우며 곱게 이웃을 아끼며 조용히 흙을 일구던 여느 사람들’ 이야기를 그린 교과서가 있나요? 지난날에는 시골 농사꾼이 99.9%였고, 한양 언저리 임금이나 신하나 지식인이나 권력자는 한 줌조차 안 되었는데, 모든 역사책은 고작 0.1%밖에 안 되는 사람들 이야기만 잔뜩 실어요. 역사를 비트는 교과서는 그 한 가지뿐일까요. 다른 역사 교과서는 역사를 제대로 담거나 보여주는가요.


  이 땅에 없는 노래를 부릅니다. 이 땅에 참다운 사랑이 없기에, 참다운 사랑을 노래로 부릅니다. 이 땅에 맑은 평화가 없기에, 맑은 평화를 노래로 부릅니다. 이 땅에 착한 꿈이 없기에, 착한 꿈을 노래로 부릅니다.


  일흔 할매가 비를 흠뻑 맞으면서 김광석 님 노래를 하염없이 들었다고 하는데, 나는 장대비 쏟아지는 새벽에 비를 오지게 맞으면서 신문을 돌리는 자전거에서 신나게 외치듯 김광석 님 노래를 불렀습니다. 물에 빠진 생쥐처럼 홀딱 젖은 몸으로 신문사지국으로 돌아와 젖은 옷을 벗고 빨래하고 새벽밥 안치고는 그대로 뻗어 방바닥에 드러누워서 김광석 님 노래테이프를 틀어 놓고 곯아떨어지곤 했습니다. 1995년부터 1998년까지. 4347.1.4.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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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모노로그 2014-01-04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고 있습니다. ^^
또 한명의 시인을 만난 기분이라, 자꾸 읽고 또 읽고 하네요.
인생을 수영장이라고 한 부분이 참 마음에서 이상하게 메아리치대요.
바닥까지 가면 다시 차고 올라온다는, 결국 이분은 바닥에서 다시 올라오시지 않았지만요.
참, 가슴 시린 책입니다...
느낌글 잘 읽고 갑니다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함께살기님 ^^

파란놀 2014-01-04 18:00   좋아요 0 | URL
드림모노로그 님 새해도
새로우면서 즐겁고 아름다운 나날 될 테지요.

사랑스레 읽는 책 하나에서
아름다운 빛이 차츰 스며들리라 믿어요.

페크pek0501 2014-01-04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름만 들어도 아픔이 느껴지는 저자의 책을 읽으셨군요.
처음 공개되는 육필 원고엔 아픔과 슬픔이 녹아 있을 듯하네요.

아이가 ‘서울’을 자꾸 생각하게 될까 봐, 서울 대신 다른 이름을 댄다는 님의 말이 인상 깊네요.
이런 세심함이 아이들 키울 땐 꼭 필요한 것 같더라고요. ^^

파란놀 2014-01-04 18:00   좋아요 0 | URL
아픔과 슬픔보다는
즐겁게 살가가고픈 '이야기'가 있어요.

저도 김광석 님 노래를 듣고 부를 적에
아픔과 슬픔 아닌 '다른 이야기'가 있다고
늘 느꼈어요.
 


  큰형이 군대에서 갑작스레 죽은 이야기는 김광석 님 가슴속으로 어떻게 스며들었을까. 죽은 큰아들을 헤아리며 눈물 적시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이야기는 김광석 님 가슴속으로 어떻게 젖어들었을까. 큰형 덕택(?)에 군대에 여섯 달만 있어도 되었던 이야기는 김광석 님 가슴속으로 어떻게 내려앉았을까. 살아가며 부대끼고 겪는 모든 이야기는 노래꾼 가슴속으로 어떻게 사뿐사뿐 찾아들었을까. 의사와 간호사가 자리를 비운 탓(?)에 딸아이를 손수 받으며 누린 빛은 김광석 님 가슴속으로 어떤 숨결이 되어 감돌았을까. 살아갈 수 있는 힘은 늘 스스로 길어올린다. 사랑할 수 있는 웃음은 언제나 스스로 가다듬는다.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조용히, 조금 더 놀면서, 곁님과 아이와 마실을 다니듯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삶을 그려 본다. 4347.1.4.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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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다 하지 못한- 김광석 에세이
김광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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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사람들 책읽기

 


  아픈 사람은 무엇을 바랄까. 아파서 눈물이 줄줄 흐르는데, 돈을 바랄까. 이름값을 바랄까. 드센 힘을 바랄까. 한 가지를 바란다면, 아프지 않는 튼튼한 몸을 바랄 테지. 씩씩하게 하루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고, 느긋하며 넉넉하게 하루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랄 테지.


  아픈 사람은 아픈 몸으로 어떤 책을 손에 쥘 만할까. 아픈 데에도 책이 손에 잡힐까. 아플 적에는 책방마실을 할 수 있을까. 아픈 몸을 붙잡고 글 한 조각 쓸 수 있을까.


  수없이 많은 책이 있다. 새로운 책은 꾸준하게 태어난다. 그런데, 이 많은 책들 가운데 아픈 이웃과 동무를 헤아리는 책은 얼마나 있지? 인문책은 얼마나 아픈 사람 곁에서 태어나지? 어린이책은 아픈 사람 넋을 얼마나 보듬을까? 시집이나 소설책은 아픈 사람들 마음을 얼마나 달래 주려나.


  기차에서 해롱거린다. 여관에 들어와 죽은 듯이 눕는다. 물 한 모금 마시기도 힘들다. 나는 어떤 책을 손에 쥘 만한가. 나는 모든 책을 잊고 자리에 드러누울 수밖에 없지 않나. 마음속으로 ‘아픔이여 찬찬히 사라져 주렴.’ 하고 빌밖에 없지 않나. 4347.1.4.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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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01-04 14:14   좋아요 0 | URL
아픔이 사라지는 새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파란놀 2014-01-04 18:02   좋아요 0 | URL
네, 새해에는 평화와 사랑이 감돌기를 빌어요.
 

서울과 전주 사이 6만 원

 


  지난밤에 잠을 잘못 잤는지 아침부터 어질어질하다. 이런 몸으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세 시간 반을 달리니 머리가 뜨겁다. 다리가 풀린다. 안 되겠구나 싶어 아무것도 안 먹으려 했지만, 서울에서 뵌 출판사 사장님하고 낮밥을 함께 먹는다. 그러고는 서울 성산동에 커피집을 새로 연 사진벗님 가게로 가서 차를 한 잔 마신다. 이제 속이 온통 뒤죽박죽이 된다. 사진벗님이 예쁘고 달콤해 보이는 케익 한 조각을 선물로 주시지만, 손을 댈 수 없다. 오미자차도 한 잔 주시지만 뱃속에서 들여보내지 말라고 외친다. 이때부터 자정까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는다. 후끈후끈 달아오르는 이마를 짚고 부글부글 끓는 아랫배를 쓰다듬는다. 결리고 쑤시며 저린 팔과 다리와 무릎과 팔목과 어깨와 옆구리를 차근차근 주무른다. 드러눕고만 싶지만, 한글문화연대에 모인 분들과 서울시 공문서를 손질하며 가다듬는 이야기를 네 시간 남짓 주고받는다. 아, 어떻게 네 시간을 이렇게 견디면서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일을 마치고 나서 몸이 너무 힘들어, 가까운 여관을 알아보고는 곧바로 드러누우러 가고 싶은데, 오늘은 마침 금요일이다. 작은 여관조차 육만 원을 부른다. 어떻게 할까. 그냥 서울에 있는 여관으로 갈까. 손전화 기계로 기차표를 살펴본다. 저녁 아홉 시 십오 분 고속기차 하나 있고 자리도 하나 남았다. 오늘 저녁에 다른 기차는 없고, 내일은 첫 차부터 마지막 차까지 빈자리가 하나도 없다.


  덜덜 떨리는 고속버스에서 시달리며 머리와 배가 아프며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데 기차표가 없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적어도 전주까지는 가자. 서울 여관은 너무 비싸니, 전주 여관은 3만 원에 묵을 데 있겠지. 전주까지 오면, 고속기차 입석으로 가든 시외버스로 두 시간 반을 달리든 순천까지 갈 수 있다.


  용산역까지 택시를 타고 간다. 한 시간 남짓 기다려 기차를 탄다. 고속기차는 무궁화 기차보다 덜 떨리고 조용하다. 괜찮네. 이만 하면 기차로 탈 만하네.


  두 시간 남짓 죽은 듯이 기차를 달려 전주역 닿는다. 히유 한숨을 돌리며 내린다. 가방을 짊어지고 여관골목을 걷는다. 전주역 앞은 술 마시며 노래하는 가게가 무척 많다. 너무 낯부끄럽다 싶은 이름을 붙인 여관이 있다. 아무리 여관이라 하더라도 어쩜. 3만 원을 치르고 여관으로 들어온다. 웃옷과 양말과 머리띠를 빨래한다. 고무신도 빤다.


  따스한 물로 씻고 머리를 감는다. 살짝 살아나는구나 싶다. 물을 한 모금 마신다. 그러나 더 마실 수 없다. 이마를 짚고 쉰다. 자자. 일찍 자고 느긋하게 일어나자. 너무 일찍 일어날 생각은 말고, 몸을 살려서 시골집으로 돌아가자. 4347.1.4.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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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4-01-04 11:39   좋아요 0 | URL
어휴....이젠 좀 어떠신지요..
집에서 몸이 아파도 힘드는데 바깥일 하러 가셨다
내집이 아닌 곳에서 아프시니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요?
용산역에서 전주까지 또 낯선 전주의 어느 여관에서 아픈 몸을
깃들이셨을 생각을 하니...ㅠ.ㅠ

이젠 조금이라도 좋아지셔서, 식구들 기다리는 아늑한 시골집으로
편안히 돌아가시길 빌어요. 오늘 밤은 참으로 평온한 밤이 되시겠지요? *^^*

파란놀 2014-01-04 18:01   좋아요 0 | URL
도시에 있는 동안
늘 힘들어요.

그러나 시골로 돌아오면
다 나아요.

이제 막 시골로 돌아왔으니
즐겁게 보낼 나날만 생각해야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