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후다닥

 


  아침에 큰아이가 일어날 즈음 밥냄비 물갈이를 한다. 밤냄비에는 어젯밤에 미리 씻어서 불리는 쌀이 있다. 작은아이가 일어날 즈음 밥냄비에 불을 넣는다. 천천히 천천히 끓겠지. 보일러를 돌린다. 곁님 핏기저귀부터 빨래한다. 그제 빨래를 잔뜩 했는데 어제 하루 또 빨래가 잔뜩 나온다. 비빔질을 하며 따순 물이 나올 즈음 큰아이를 부른다. 큰아이 목 둘레에 수건을 두른 뒤에 머리를 감긴다. 머리를 다 감긴 뒤 머리카락 물기를 털고 나서 큰아이더러 보일러를 끄고 마당으로 나가서 놀며 머리를 말리라고 얘기한다.


  고단한 몸이 아직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았기에 핏기저귀와 속옷만 손빨래를 하고, 나머지는 기계한테 맡기기로 한다. 기계한테 맡기더라도 모든 옷가지를 비누로 비빔질을 한다. 소매와 깃과 바짓단은 손으로 조물조물 비비지 않으면 기계한테 맡기더라도 제대로 빨아내지 못한다. 수건도 손으로 척척 잘 비비고 나서야 기계한테 맡긴다.


  밥냄비 불을 줄이고 피아노방을 치운다. 두 아이는 하루만에, 아니 반나절만에 신나게 어지르며 논다. 치우고 돌아서면 다시 어지르고, 또 치우고 돌아서면 새로 어지른다. 먼먼 옛날부터 타고난 버릇일까. 돌이켜보면, 먼먼 옛날에는 아이들이 집안에서 어지를 살림이 없었으리라. 피아노방 바닥에 깔아 놓은 깔개와 이불을 걷는다. 방바닥을 다 치우고 비질을 한다. 깔개와 이불을 마당에서 텅텅 먼지를 털고 해바라기를 시킨다.


  부엌으로 돌아가 밥불을 더 줄이고, 국냄비에 불을 넣는다. 국을 끓이면서 감자와 고구마를 썬다. 오늘은 카레를 해 봐야지. 국이 거의 익을 무렵 카레냄비가 달아오른다. 기름을 휘 두르고는 감자와 고구마를 볶는다. 국이 다 익어 불을 끌 무렵 감자와 고구마를 그만 볶고는 물을 채워 불을 키운다.


  배고픈 아이들은 내가 부르지 않았어도 밥상맡에 앉아서 서로 조잘거리면서 논다. 배고프지? 배가 안 고프면 부르고 불러도 안 오잖아? 구워서 소금을 뿌린 김은 아이들이 바로 먹어치우지만 굽지도 않고 소금도 안 뿌린 김은 아이들이 손을 잘 안 댄다. 그렇지만 모르는 척한다. 배고픈 아이들은 밥상에 딱 하나 놓은 ‘안 굽고 소금 안 친’ 김을 하나씩 날름날름 집어먹는다.


  콩나물무국에 된장을 푼다. 그러고 나서 국그릇에 떠러 두 아이한테 내준다. 국부터 마시렴. 국에 함께 넣은 곤약덩이를 꺼낸다. 통통통 잘게 썬다. 밥상에 올린다. 두 아이는 국과 김과 곤약을 허둥지둥 먹는다. 카레가 다 끓고 익으려면 멀었다.


  빨래기계는 진작 일을 마쳤다. 카레가 끓는 사이 옷가지를 꺼내 마당으로 나간다. 빨랫줄과 빨랫대에 알맞게 넌다. 곁님 핏기저귀는 다 말랐으나 더 햇볕을 쬐도록 그대로 둔다. 기지개를 켜며 부엌으로 돌아가 카레 간을 본다. 양배추와 물고기묵을 썰어서 간장으로 버무린다. 아이들이 너무 배고파 하니 이것부터 내주고, 카레는 간이 덜 맞았지만 얼른 떠서 내준다. 함께 밥을 먹는데, 오늘 카레는 영 간이 안 맞아 밍밍하다. 얘들아 미안하구나. 그래도 배고픈 아이들은 씩씩하게 밥그릇을 비운다. 배고플 적에는 간이고 맛이고 아랑곳하지는 않네. 저녁에는 간을 제대로 맞추어 맛나게 새로 차려 줄게. 4347.2.23.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아버지 육아일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미스 히코리 한림 고학년문고 26
캐롤린 베일리 지음, 김영욱 옮김, 갈현옥 그림 / 한림출판사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린이책 읽는 삶 48

 


꽃이 된 숲인형
― 미스 히코리
 캐롤린 베일리 글
 갈현옥 그림
 김영욱 옮김
 한림출판사 펴냄, 2013.3.12.

 


  사진으로 아무리 멋들어지게 꽃을 찍어도, 그저 멋들어진 사진이 될 뿐, 꽃을 꽃답게 보여줄 수 없습니다. 그림으로 아무리 아름답게 꽃을 그려도, 그저 아름다운 그림이 될 뿐, 꽃을 꽃처럼 보여주지 못합니다.


  꽃은 꽃 그대로 있을 적에 꽃입니다. 흙에 뿌리를 내리고 돋은 줄기에서 꽃대가 나오고 꽃망울이 맺히면서 꽃잎을 활짝 벌릴 적에 꽃입니다. 꽃을 찍은 사진이란 ‘꽃을 바라보는 사람 느낌과 생각’입니다. 꽃을 그린 그림이란 ‘꽃을 마주하는 사람 느낌과 생각’입니다.


  꽃을 꽃대로 바라보지 않고 일부러 못생기게 찍는다든지 볼품없이 그린다고 해서, 꽃한테서 꽃다움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누군가 꽃한테 매우 미운 이름을 붙이며 놀린다 하더라도 꽃한테서 꽃내음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꽃은 언제나 꽃일 뿐입니다.


.. 히코리는 목장 돌길을 따라 자신이 살고 있는 라일락 숲길로 쿵쿵 다가오는 묵직한 발소리를 들었다. 히코리는 작지만 날카롭고 새카만 눈동자를 굴려 곁눈질했다 … 집이 있는 라일락 숲 아래쪽은 꽃이 피면 자줏빛 꽃 그림자가 향긋한 향기와 더불어 어룽거린다. 긴 여름 동안에는 짙은 녹음과 새들의 노랫소리로 생기가 넘친다. 누구든 도시에 나가 살 처지라고 말하면, 히코리는 늘 라일락 숲속 집을 고르라고 충고해 준다 ..  (9, 11쪽)


  매화나무는 매화나무이지 벚나무가 아닙니다. 감나무는 감나무이고 고욤나무는 고욤나무입니다. 뽕나무는 뽕나무이며 대나무는 대나무입니다. 다 다른 나무는 다 다른 빛으로 자랍니다. 다 다른 나무는 다 다른 숨을 내놓아 사람과 뭇짐승을 살찌웁니다.


  나무가 없는 지구별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나무가 자라지 않는 지구별에서는 어떤 목숨도 살아남지 못합니다. 나무가 있어 우리 삶이 있고, 나무와 함께 우리 삶이 빛납니다.


  그렇지만 도시에서는 나무를 괴롭힙니다. 도시에서 나무가 설 자리는 없습니다. 겨우 스무 해나 서른 해쯤 나무가 자랐어도, 도시에서는 재개발을 하느니 무얼 하느니 나무를 뎅겅 벱니다. 돈을 들여 다시 땅에 박으면 된다고 여깁니다.


  시골에서도 나무를 들볶습니다. 사람이 굳이 솎아내기를 하지 않아도 나무끼리 스스로 솎아내기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굳이 솎아내기를 한다느니 새 길을 닦는다느니 무슨무슨 공사를 한다느니 하면서 숲을 어지럽힙니다. 숲을 어지럽히니 숲에서는 몇 가지 벌레가 갑자기 날뛰면서 온갖 나무병이 퍼집니다. 헬리콥터로 농약을 뿌린들, 망가진 숲에 퍼지는 나무병을 잡을 수 없습니다.


  솎아내기를 해야 한다면, 도시 사회와 물질문명을 솎아내야 합니다. 찻길을 줄여야 합니다. 찻길을 없애야 합니다. 너무 많이 놓은 찻길을 줄이고, 온갖 곳에 덮은 시멘트와 아스팔트를 치워야 합니다. 도시에서도 곳곳에 텃밭과 숲을 마련해야지요. 시골에서도 길가와 마을에 나무가 아름드리로 자라도록 해야지요. 이러면서 나무한테 농약이 아닌 사랑을 줄 노릇입니다.


.. 히코리가 옛날에 나무의 한 부분이었다는 사실을 크로우는 알고 있었다 … 숲속에 들어오면 언제나 생기가 도는 것을 새삼 느꼈다 … 숲은 히코리가 바느질해서 입을 만한 예쁜 옷감들로 가득했다.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은 장밋빛, 황금빛, 주홍빛, 적갈색의 보드라운 잎들이 많았다. 뽀송뽀송한 이끼도 땅에 붙어 자라는 복슬복슬한 것부터 깃털처럼 털이 솟아 길게 나부끼는 것까지 여러 종류가 있었다 ..  (14, 35, 46쪽)


  천 해를 살고 이천 해를 살며, 때로는 오천 해를 살기도 한다는 나무는 아주 천천히 자랍니다. 백 해를 살기에도 빠듯하다는 사람으로서는 천 해나 이천 해를 어림하기도 어렵겠지요. 나무가 자라는 백 해를 제대로 들여다보는 사람은 있기나 할까 궁금합니다.


  가만히 보면, 사람이 낳는 아기도 퍽 천천히 자랍니다. 소나 사슴이 낳는 새끼를 보면, 태어나자마자 섭니다. 이와 달리, 사람이 낳는 아기는 처음 서기까지 한두 해가 걸리고, 선 다음 걷기까지 또 제법 걸려요. 서고 걷는다 해서 다 자라지 않습니다. 아이가 스스로 밥과 집과 옷을 건사하려면 퍽 기나긴 해를 보내야 합니다.


  나무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까지 제법 긴 나날을 보냅니다. 나무씨 한 톨을 심어 보셔요. 씨앗에서 싹이 트면서 꽃이 피기까지 몇 해쯤 걸리는지 지켜보셔요.


  오래도록 지켜보아야 합니다. 오래오래 아끼고 보살피며 사랑해야 합니다. 갓난쟁이한테 사랑을 쏟듯 나무한테 사랑을 쏟습니다. 나무한테 사랑을 바치듯 갓난쟁이한테 사랑을 바칩니다. 천천히 자라면서 우람하게 가지를 벌리는 나무요, 천천히 자라면서 아름답게 우뚝 서는 사람입니다. 천천히 자라면서 짙은 그늘과 푸른 숨을 나누어 주는 나무요, 천천히 자라면서 고운 꿈과 맑은 사랑을 나누는 사람입니다.


.. 언제나 놀라는 일이지만, 차가운 날씨에도 낙엽 밑에 숨은 땅속은 얼마나 따듯한지 모른다 … “히코리, 넌 변화가 절실해. 넌 두 해 동안 식료품 가게, 자동차, 난로, 폭풍우를 막을 창문 따위가 필요한 사람들과 살아왔어. 넌 너무 곱게만 자랐어.” … 벌써 11월이다. 히코리는 매일같이 나무 아래로 내려가 단풍 낙엽을 밟으며 즐겁게 돌아다녔다 … 히코리는 불타는 듯한 단풍 빛깔에서 떡갈나무의 장미 빛깔로 하루가 다르게 새로워지는 산 빛깔을 보았다 ..  (23, 33, 54, 56쪽)


  캐롤린 베일리 님이 빚은 이야기책 《미스 히코리》(한림출판사,2013)가 있습니다. 1947년에 미국에서 뉴베리상을 받았다고 하는 작품이니 퍽 오래된 책입니다. 한국말로는 1979년에 처음 나왔습니다. 다만, 1979년은 아직 때일렀지 싶어요. 한국에서 사랑스러운 독자를 만나기에는 1979년은 퍽 어려웠지 싶습니다. 1947년 작품을 1979년에조차 제대로 읽기 어려웠던 한국입니다.


  그러면, 1979년에서 서른네 해 지나 2013년에 한글판이 다시 나온 《미스 히코리》는 바야흐로 제대로 읽힐 만한 책일까요. 이제 한국에서는 이 책에 서린 빛과 꿈과 사랑을 알뜰살뜰 받아먹을 만할까요.


.. 여름철에는 산머루들이 둑을 따라 넝쿨로 자라났다. 가을에 열매가 익으면 숲속 동물들이 따먹을 수 있도록, 어린 나무들과 키 큰 고사리, 옻 덩굴들이 짙은 보라색 포도송이 뒤에 숨어 자랐다 … 히코리는 스케이트를 타고 상쾌한 겨울 세상을 설렁설렁 돌아다녔다. 나무껍질과 장미 꽃잎을 질겅질겅 씹기도 하고 … 달력을 보지 못하면서 잊었던 계절 감각을 되살리면서 신나게 돌아다녔다 ..  (91, 96, 97쪽)


  《미스 히코리》를 읽으면 시월 언저리에 ‘산딸기를 따먹는(23쪽)’ 이야기가 나옵니다. 멧딸기가 시월에 익는다구? 좀 안 맞지 않나? 미국에서는 시월에도 멧딸기가 익나? 여러모로 생각해 보는데, 이 책에 나오는 딸기는 멧딸기가 아닌 산딸나무에서 맺는 열매가 아니랴 싶습니다. 멧딸기는 여름 문턱에 익는 열매요, 산딸나무는 가을 언저리에 익는 열매입니다. 풀처럼 우거져서 맺는 딸기와 나무로 자라며 맺는 딸기는 갈래가 다릅니다. 《미스 히코리》를 한국말로 옮긴 분은 시골에서 살지 않기도 하고, 시골살이를 잘 모른다고 옮긴이 말에서 밝힙니다. 그러면, 이런 대목에서는 출판사에서 찬찬히 짚고 살펴서 가다듬어 주어야지 싶어요. 왜냐하면, 《미스 히코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숲에서 살아가고 어우러지는 이야기를 들려주거든요. 숲내음과 숲빛과 숲살이를 제대로 밝히거나 보여주지 못하면, 이 작품을 한글판으로 옮기는 뜻이나 보람이 없습니다.


.. (다람쥐) 스코랄은 히코리 열매 머리를 먹은 걸 후회했다. 그 뒤로 스코랄은 착실해졌다. 해마다 충분한 열매들을 모은 뒤에 겨울을 나고, 하루 세 끼 식사 이외에 간식을 먹지 않았다 … 히코리는 스스로 이렇게까지 높이 올랐다는 데 놀랐다. 그러나 이 늙은 사과나무는 가지가 구부러진 곳도 비틀린 곳도 두루두루 잘 자랐다. 히코리와 더불어 오래 살았던 큰 가지와 잔가지 모두 고향처럼 느껴졌다 ..  (160, 162쪽)


  우리는 누구나 나무하고 함께 살아갑니다. 아파트마을 한복판에서 살더라도 늘 나무 기운을 얻어 살아갑니다. 나무가 베푸는 숨을 마시고, 나무한테서 얻은 종이로 만든 책을 읽으며, 나무로 짠 책걸상을 씁니다. 시멘트로 집을 짓더라도 나무판을 대어 시멘트를 붓습니다. 나무가 없이는 어느 나라에서도 삶을 이루지 못합니다.


  나무를 깎아 연필을 쓰다가 볼펜이 나왔습니다. 나무로 불을 때며 겨울을 났습니다. 나무로 집을 지어 오래오래 살았으며, 나무가 베푸는 온갖 열매를 맛나게 먹으면서 목숨을 건사했어요.


  능금도 배도 복숭아도 귤도 포도도 모두 나무가 베푸는 선물입니다. 열매만 따로 있지 않아요. 열매가 맺도록 나무가 우뚝 섭니다. 능금을 먹을 적에 능금알만 먹지 않아요. 나무가 능금알한테 베푼 고운 사랑을 먹습니다. 배 한 조각을 먹을 적에도 배알한테 나무가 베푼 너른 사랑을 먹습니다.


.. “정말 알 수 없는 노릇이네. 이번 봄에는 접목을 한 적이 없거든. 더군다나 매킨토시의 늙은 나무에다 누가 하겠냐고.” 앤은 큰 가지에 걸터앉아, 꽃이 핀 접목 가지를 살살 만져 보았다. ‘이건 히코리랑 닮았잖아. 목까지는 비슷해. 하지만 히코리한테는 머리가 있었는데…….’ 이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말하지는 않았다. “계속 자라나면 혹시 사과도 열릴까?” 앤이 큰 소리로 물었다. “열리고말고!” ..  (172쪽)


  《미스 히코리》에 나오는 ‘히코리’는 능금나무 가지를 잘라서 히코리 열매를 머리로 삼아 꽂은 인형입니다. 히코리 인형은 시골에서 놀던 아이한테 알뜰한 동무입니다. 그런데, 히코리와 함께 놀던 동무는 어버이 손에 이끌려 도시로 떠나요. 시골은 겨울에 너무 추우니 도시로 갔는지, 아니면 도시에 있는 학교로 보내려고 아이를 도시로 데려갔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숲인형 히코리는 홀로 덩그러니 시골에 남습니다. 히코리는 저랑 놀던 아이가 도시로 간 줄 모릅니다. 까마귀가 히코리한테 이런 이야기를 알려준 뒤 혼자 가슴앓이를 하다가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고 깨닫습니다. 《미스 히코리》는 숲인형 히코리가 홀로서기를 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보여줘요.


  추운 겨울날 히코리는 나뭇잎과 이끼로 손수 바느질을 하며 모자도 짓고 옷도 짓습니다. 숲인형답게 나뭇잎옷을 입습니다. 숲인형인 만큼 숲에서 살아가는 여러 이웃과 사귀고 온갖 동무를 하나둘 만납니다.


  그런데, 애써 겨울나기를 하고 봄을 맞이하던 어느 날, 숲인형 히코리는 머리통을 잃습니다. 살가운 이웃이 되어 지낸 다람쥐가 배고픈 나머지 그만 숲인형 히코리 머리통을 톡 떼어내 와작와작 깨물어 먹습니다.


  숲인형 히코리는 머리통을 잃습니다. 그러나 죽지 않습니다. 그리고, 머리통을 잃은 뒤 새로운 마음이 자랍니다. 숲인형 히코리는 ‘능금나무 가지’와 ‘히코리 열매’가 붙은 숨결이었어요. 사람들은 이렇게 여러모로 ‘예쁘게 보이는 인형’을 만들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숲인형으로서는 서로 다른 숨결인 능금나무와 히코리가 붙으니 ‘균형이 깨진 셈’이라 할 수 있어요.


  머리통을 잃은 숲인형은 비칠걸음으로 어디론가 갑니다. 숲인형 머리통을 깨물어 먹은 다람쥐는 덜덜 떱니다. 아무리 배고프다 하더라도 살가운 동무 머리통을 왜 먹었는지 돌아보면서 뉘우칩니다. 머리통이 사라진 숲인형은 ‘능금나무 가지만 있는’ 몸으로 천천히 걸어 늙은 능금나무 앞에 섭니다. 그러고는 척척 능금나무 우듬지까지 올라갑니다. 우듬지에 닿은 뒤 따사로운 봄볕을 느낍니다. 그동안 미처 못 알아채던 포근함을 깨닫습니다. 무엇일까요. 숲인형 마음속에서 무엇이 터져나오려 할까요.


  숲인형은 머리를 늙은 감나무 한켠에 척 박습니다. 늙은 감나무 우듬지 한켠에 구멍이 있었는데, 이 구멍이 바로 숲인형 ‘능금나무 가지’가 깃들 품이라고 느낍니다.


  겨울이 끝납니다. 도시로 갔던 아이가 돌아옵니다. 아이는 저랑 놀던 인형을 찾지만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다가 늙은 능금나무 꼭대기에 있는 ‘내 인형과 꼭 닮은 나뭇가지’를 봅니다. 무엇보다 이 나뭇가지에 고운 능금꽃이 피었고, 이 나뭇가지에 고운 능금꽃이 피면서, 늙은 능금나무에도 소복소복 푸지게 능금꽃 물결이 일렁입니다. 숲인형은 꽃이 되었습니다. 꽃이 된 숲인형은 말갛게 웃습니다. 4347.2.23.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arah 2014-02-26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만든 편집자입니다. 선생님이 말씀해 주신 부분을 잘 새겨두겠습니다. 그리고 번역해 주신 선생님과 얘기 나눠 다음번에 찍게 되면 꼭 고쳐 넣겠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잘 부탁드립니다. 꾸벅~

파란놀 2014-02-27 05:26   좋아요 0 | URL
이 예쁜 동화책이 언제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하고 오래도록 기다렸기에 아주 즐겁게 읽었어요. 아마 이 책을 읽을 여느 독자들은 모두 도시에서 살아갈 테니, '산딸기'와 '산딸나무'가 어떻게 다른가를 생각하지 않으리라 느껴요. 우리 식구는 시골에서 살아가는데, 시골에서 만나는 이웃 가운데에도 '산딸나무 열매'를 모르는 분이 무척 많아요. 환경운동을 하거나 생태 관련 일을 하거나 농민회 일을 하는 분들조차 산딸나무 열매를 모르시기도 하더라구요.

이 책을 옮겨 주신 분은 여러모로 마음을 많이 쓰시면서 '요즈음 읽은 어느 번역 동화책'보다 말투라든지 이야기가 참 좋았다고 느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삶에서 겪지 못하는 일'은 풀어서 옮겨내기 어려운 대목이 있어요.

옛날 책 그림도 예쁘지만, 지난해 봄에 이 책을 새롭게 내놓아 주시면서, 그림도 새롭게 다시 그려 주셨기에 이 책이 한결 빛나는구나 싶기도 합니다. 둘레에 아이들 돌보며 책 읽히는 이웃들은 으레 '학교생활 이야기 동화책'만 많이 읽히지만, <미스 히코리>와 같은 동화책이 널리 알려지고 읽히면서 사랑받을 수 있기를 빌어요.

느낌글을 쓰면서 '책 줄거리'는 거의 안 쓰곤 했는데, 일부러 이 느낌글에서는 글끝에 '늙은 능금나무를 살리는 인형' 이야기를 길게 적어 보았어요. 다른 독자님들도 이 대목에서 가슴이 뭉클하도록 고운 빛을 누리시면 참 좋으리라 꿈꿉니다.

고맙습니다.

appletreeje 2014-02-27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저도 꼭 읽고 싶네요!^^
감사히 담아갑니다~~*^^*

파란놀 2014-02-27 05:30   좋아요 0 | URL
이 책이 이렇게 새로 나온 줄 오래도록 몰랐기에, 그저 저는 1979년 옛날 판만 만지작거리곤 했어요. 옛날 판을 놓고 '사라진 책' 이야기를 쓸까 했었는데, 마침 '사라진 책' 이야기를 쓰려 할 즈음에 검색해 보다가, 새로 나온 줄 알아채고는 즐겁게 읽어서 이렇게 느낌글을 쓸 수 있었어요~
 


  만화책 《설희》가 어느덧 열 권째 나온다. 《별빛속에》에 이은 긴 작품이 되리라 생각한다. ‘만화를 그리는 하느님’이라는 이름을 얻은 데즈카 오사무 님은 그야말로 엄청나게 만화를 그렸지만, 언제나 책읽기와 영화보기 또한 엄청나게 하면서 새로운 창작을 불태우려고 힘을 쏟았다. 〈밤비〉라는 영화를 본 뒤에 ‘아름다운 충격’을 받아, 일본이라는 사회와 틀에서 일본 어린이한테 보여주고 싶은 ‘아른다운 자연과 사람’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정글 대제(밀림의 왕자 레오)》를 그리기도 했다. 강경옥 님이 열 권째 그리는 《설희》는 우리한테 어떻게 선물하는 ‘아름다운 삶과 사랑’이 될까 헤아려 본다. 어떤 삶이 아름다운가. 그저 오래오래 살 수 있으면 아름다운가? 돈이 넉넉하면 아름다운가? 마음이 맞는 벗이 있으면 아름다운가? 꿈이란 무엇인가. 죽지 않을 수 있으면 좋은 꿈인가? 어마어마하게 돈을 긁어모을 수 있어야 꿈인가? 삶을 가로지르는 사랑이 무엇인지 차근차근 들려주면서 열 권째에 이른 《설희》는 어떤 빛이 될는지 두근두근 설렌다. 4347.2.23.해.ㅎㄲㅅㄱ


1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설희 10
강경옥 글.그림 / 팝툰 / 2014년 1월
7,000원 → 6,300원(10%할인) / 마일리지 3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2월 27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14년 02월 23일에 저장



1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평상놀이 3 - 뒹굴면서 종이인형과 자동차와

 


  햇볕이 좋다. 알맞게 따스하고 바람이 없다. 이런 날은 아이들이 마당에서 하루 내내 논다. 이런 날 아이들은 마당에서 놀다가 슬그머니 대문을 열고 마을 한 바퀴를 돈다. 빈논에 들어가기도 하고, 빨래터에서 물놀이도 하며, 여기저기 다 들쑤신다. 한참 놀면서 살짝 지친 아이들은 평상에 드러눕듯 논다. 놀다가 지쳤는데에도 놀이를 그치지 않는다. 큰아이는 스스로 만든 종이인형을 들고, 작은아이는 외삼촌 이웃한테서 물려받은 장난감 자동차를 든다. 마음껏 놀아라. 4347.2.23.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놀이하는 아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사진과 함께 35. 두 아이 눈빛

 


  우리 집 두 아이가 바라보는 눈빛이 다릅니다. 두 아이는 서로 다른 숨결이니, 두 아이로서는 어느 한 가지를 바라볼 적에 저마다 다르기 마련입니다. 우리 형과 나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어머니와 아버지한테서 태어난 두 사람이지만, 우리 형과 내가 바라보는 눈빛이 다릅니다. 그러면, 쌍둥이로 태어난 두 사람은 어떻게 바라볼까요. 둘은 서로 똑같이 바라볼까요, 아니면 둘도 둘 나름대로 다르게 바라볼까요.


  얼굴이 똑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목소리가 똑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새로 나고 죽는 사람 사이에서도 똑같은 사람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모두 다른 숨결입니다. 사람뿐 아니라 개와 고양이도 모두 다른 숨결입니다. 말과 소도 모두 다른 목숨입니다. 잠자리와 메뚜기도, 개구리와 달팽이도 모두 다른 목숨입니다. 똑같다고 할 목숨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 다른 사람이 살아가는 지구별입니다. 다 다른 사람인 만큼 다 다른 눈빛을 밝힙니다. 다 다른 눈빛을 밝히기에 다 다른 사진을 빚습니다. 똑같은 자리에 서며 사진 한 장 찍더라도, 다 다른 삶에 비추어 다 다른 넋이기에, 다 다른 이야기를 담은 사진을 빚어요.


  다만, 표절이나 도용을 할 적에는 ‘거의 똑같다’ 싶도록 베낍니다. 스스로 삶을 헤아려서 찍는 사진이라면 ‘똑같은’ 모습이 태어날 수 없을 뿐 아니라, 표절도 도용도 될 수 없어요. 그러나, 스스로 삶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표절이나 도용으로 흐릅니다. 스승이나 동무한테서 배워 즐겁게 찍을 적에는 찬찬히 거듭나는 사진이지만, 남이 일군 아름다운 빛을 가로채거나 훔치려는 마음일 적에는 ‘거의 똑같다’ 싶은 모습이 드러나면서, 이러한 사진에는 아무런 이야기가 깃들지 못합니다.


  다 다른 눈빛으로 바라본다고 할 적에는 다 다른 이야기가 숨쉰다는 뜻입니다. 다 다른 눈빛이란 다 다른 삶이요 다 다른 사랑입니다. 좋거나 나쁘다는 틀로서 ‘다른 사랑’이 아닙니다. 저마다 아름답게 빛난다는 뜻에서 ‘다른 사랑’입니다.


  개 한 마리를 놓고, 우리 집 일곱 살 큰아이가 마주하는 모습하고 네 살 작은아이가 마주하는 모습이 다릅니다. 두 아이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마음으로 품습니다. 서로 다른 이야기가 서로서로 마음밭에 드리웁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언제나 ‘내 사진’을 찍습니다. 내 사진을 찍는다고 할 적에는 ‘내 삶’을 찍는다는 소리입니다. ‘내 사랑’을 찍고 ‘내 꿈’을 찍으며 ‘내 빛’을 찍어서 ‘내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소리예요. 4347.2.23.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