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남기기

 


  낮잠을 건너뛴 작은아이가 저녁 차린 밥상맡에서 꾸벅꾸벅 존다. 그러게, 낮잠을 잤어야지. 큰아이더러 조용하라고 이른 뒤 물끄러미 작은아이를 지켜본다. “자, 자, 냠냠 씹어야지.” 하고 말하니 입을 다시 오물거린다. “안을까?” 하고 팔을 벌리니 안긴다. 작은아이를 안고 쉬통 앞에 세워 쉬를 누인다. 오줌그릇에 찬 오줌을 밭뙈기에 뿌린다. 작은아이를 안고 잠자리에 앉는다. 등을 토닥이면서 “냠냠 다 씹어서 삼키자.” 하고 말하니 오물오물하면서 꿀꺽 한다. 이제 누여도 되겠구나. 반듯하게 누인 다음 이불을 덮는다. 토닥토닥 가슴을 살짝 두들긴 뒤 옆방으로 나온다.


  아이들과 밥을 먹을 때면 내 밥을 늘 맨 나중에 푼다. 아이들이 먹을 몫이 제대로 있은 뒤에야 내 밥을 먹는다. 아이들이 더 먹겠다 하면 내 밥에서 덜어서 주고, 아이들이 먹고 남기면 이 밥을 다음 새 밥을 지을 때까지 그대로 두다가 내가 먹는다. 아이들한테는 새로 밥을 지어서 준다.


  이렇게 지내는 우리 집에 개 한 마리가 살그마니 들어왔다. 아침저녁으로 개한테 밥 한 그릇씩 챙겨서 주는데, 아침저녁으로 밥이 어설프게 모자라거나 남는다. 오늘 저녁은 어설프게 모자란다. 언제나처럼 아이들 몫을 챙기고 개밥을 챙긴다. 내 몫으로 남을 밥이 없어, 나는 밥을 안 먹는다. 떠돌이처럼 우리 집에 머무는 개라 하지만 굶길 수 없는 노릇 아닌가. 내 몫 밥을 챙기려고 밥을 굳이 새로 짓는 일은 없다.


  작은아이는 저녁을 먹다 잠들었으니 작은아이 밥이 남는다. 큰아이가 “나한테 줘.” 하고 말하기에 큰아이한테 덜어 준다. 잘 먹고 튼튼하게 자라렴. 4347.3.2.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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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읽는 책 115] 멈추지 않는

 


  내 길을 두 다리로 걷는다.
  날마다 꿈을 꾸면서
  늘 한 걸음씩 내딛는다.

 


  마음속에 꿈이 있으면 언제나 이 꿈대로 걸어갈 수 있으리라 느껴요. 아직 멀었지요. 마흔에도 쉰에도 예순에도 일흔에도 꿈은 멈추지 않는구나 싶어요. 즐겁게 걷고 날마다 걷습니다. 오늘도 걷고 모레도 걷습니다. 차근차근 한 걸음씩 내딛습니다. 오래오래 웃으면서 내 길을 걷습니다. 4347.3.2.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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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희 4
강경옥 글.그림 / 팝툰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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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320

 


어디까지 삶이고 꿈인가
― 설희 4
 강경옥 글·그림
 팝툰 펴냄, 2009.8.31.

 


  봄을 맞이하는 들과 숲에는 푸릇푸릇한 기운이 천천히 퍼집니다. 조그마한 잎사귀가 빼꼼 고개를 내밉니다. 가을에 시들어 쓰러진 풀잎은 겨우내 그대로 누렇게 있다가, 새롭게 찾아오는 봄부터 찬찬히 스러집니다. 가을에 시드는 풀잎은 겨울에 사라지지 않아요. 봄부터 비로소 사라집니다.


  여름이 되면 들과 숲에서 누런 빛이 모조리 사라집니다. 어느 누구도 시든 풀일 걷어서 태우거나 파묻지 않았는데, 시든 잎은 어느새 흙 품에 안겨 새로운 흙이 됩니다.


  어떤 힘이 지구별을 감돌기에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흐르도록 할까요. 어떤 기운이 온누리 골골샅샅 흐르기에 풀은 새로 돋고 지면서 푸른 숨결과 빨간 열매를 우리한테 베풀까요.


  봄날 들길이나 숲길을 걷다 보면 마치 꿈인 듯합니다. 겨울과 사뭇 다르면서 날마다 새롭게 돋는 풀이 늘어나는 들길과 숲길은 꿈길과 같지 않느냐 싶습니다. 사람들이 그토록 농약을 뿌려대도 풀은 새로 돋습니다. 사람들이 시멘트나 아스팔트를 덮고 수십 해를 내리누르던 땅에서조차 풀은 새로 돋습니다. 아파트를 새로 짓는다며 때려부순 자리에서까지 풀은 새로 돋아요.


- ‘좋아한다는 감정도 관계에 따라 이렇게 치졸해지기도 하는구나. 여러 매체에서 떠드는 순수한 사랑이란 건 대체 뭐야.’ (23쪽)
- “총을 맞고도 살아나는 게 드문 능력이긴 해도 가사체험한 사람들이 없는 것도 아니고, 나도 뭐 때문에 너한테 이렇게 신경써야 하는지 모르겠어. 눈앞에 존재하는 것보다 전생이다 뭐다 말도 안 되는 것들에 매달려 있는 것도 내가 보기엔 한심해 보여.” (54쪽)

 


  나뭇가지가 부러집니다. 나뭇줄기가 뎅겅 잘립니다. 가지가 잘린 나무는 아픕니다. 아픈 나무는 새로운 가지를 뻗습니다. 줄기가 잘려 죽을 듯한 나무는 조그마한 줄기를 새로 올립니다. 팔다리가 잘린다고 할 만한 나무는 어떻게 새 가지를 내놓을 수 있을까요. 몸통이 잘린다고 할 만한 나무는 어떻게 새 줄기를 다시금 올릴 수 있을까요.


  사람도 새 살이 돋아요. 팔이나 다리가 잘린 사람한테서 새 팔이나 다리가 나오지는 않지만, 살점이 떨어진 자리에는 언제나 새 살점이 납니다. 죽 찢어지거나 째진 자리는 어느새 아물며 붙습니다. 잘려서 떨어지면 다시 나지 않더라도, 새로운 살점과 피가 자랍니다. 새 머리카락이 돋고 새 기운을 뽐냅니다.


  어쩌면, 사람도 새 팔다리가 나올 수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스스로 새 팔다리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니 새 팔다리가 안 나올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사람은 천 해나 만 해를 살아갈 수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스스로 천 해는커녕 백 해조차 살기 어렵다고 생각하기에 백 해조차 튼튼하게 못 살고 숨을 거둘는지 몰라요.


  무슨무슨 약을 먹어야 오래오래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막상 이런 약 저런 약을 먹어도 오래 살지 못합니다. 외려 아무런 약을 먹지 않으면서 느긋하면서 아름답고 따사로운 마음으로 착하게 사랑을 꽃피우는 사람들은 즐겁게 오래 살곤 합니다.


  삶을 갉아먹는 미움이라고 느낍니다. 삶을 깎아먹는 전쟁이라고 느낍니다. 삶을 무너뜨리는 꿍꿍이나 주먹다짐이라고 느낍니다. 남을 해코지하면서 오래도록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남을 밟고 올라선 이들은 죽음을 늘 두려워하다가 죽음 문턱에 이르면 덜덜 떨곤 합니다. 이제껏 하늘 높은 줄 모르다가 하늘이 얼마나 높은가 하고 알아채기 때문입니다. 이웃과 어깨동무하며 살아온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죽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살아가는 즐거움을 헤아리는 하루인데, 왜 죽음이 끼어들겠어요.

 


- ‘내가 하루만에 사랑에 빠진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국제전화 요금에 연연하고 교통비와 학비와 알바에 연연하며, 외로움을 느끼면 연애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어딘가에서 나에게 그건 사치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세이를 포기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마음이었는지 모르지. 그리고 그럴 수 있을 만큼 이성이 앞선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경계선을 허물어버릴 만큼이나 반한다는 게.’ (68∼69쪽)
- ‘난 또 내 감정으로부터 도망치려 하고 있다. 나도 그걸 알아차렸지만 그건 마치 나의 본능 같았다.’ (76쪽)


  하루살이는 하루를 살아서 하루살이입니다. 한해살이꽃은 한 해를 살아서 한해살이꽃입니다. 사람이 백 해를 산다면, 한해살이꽃은 1/100만 살아가는 셈입니다. 한해살이꽃이 한 해를 산다면, 하루살이는 1/365만 살아가는 셈입니다. 한해살이꽃은 사람과 견주면 아주 짧은 목숨일 테지만, 하루살이와 견주면 아주 긴 목숨입니다. 하루살이는 고작 하루라 하더라도, 하루살이 몸을 이루는 수많은 세포는 하루를 못 살겠지요. 사람 몸을 이루는 수많은 세포 또한 사람 목숨과 똑같이 못 살듯 말이에요. 그러면, 하루살이 몸을 이루는 세포와 견주면 하루살이 목숨은 얼마나 긴 셈일까요.


  내 손바닥에 얹은 돌은 나보다 훨씬 작습니다. 그런데, 나는 손바닥에 돌을 얹더라도 지구별에 두 발을 디딥니다. 지구별은 둥그렇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아도 지구가 둥그렇게 생겼다고 느끼기 어렵습니다. 사람 하나는 지구별에 대면 더없이 조그맣습니다. 지구별을 태양계와 대면, 또 태양계를 우주하고 대면, 더없이 작디작아요. 가는 모래알 하나만큼도 안 됩니다.


  백 해를 살아가는 사람은 사백 해를 살아가는 사람보다 짧게 산다 할 만합니다. 그러면, 사백 해란 얼마나 긴 나날일까요. 나무 한 그루는 천 해를 살기도 하고 이천 해를 살기도 하는데, 사백 해란 긴 나날이라 할 수 있을까요. 하루살이보다 오래 산다는 사람이지만 나무 한 그루만큼 살아가지 못해요. 사람 목숨은 길다면 얼마나 긴 셈일까요.

 


- ‘30대면어 놀다니. 설희가 돈 많은 거 알고서 노리는 걸까? 세상 물정 모르니까. 진짜면 한심한 거네, 라고 생각하면서도 안쓰러운 마음도 뭉게뭉게. 음악하다 잘 안 풀린 걸까. 잘되는 사람 빼고는 음악도 배고픈 직업이니까.’ (82∼83쪽)
- ‘응, 부럽지. 난 아직 못해 본 일들이니까. 내가 못해 본 일들은 얼마나 되는 걸까. 난 그걸 미래에는 다 할 수 있는 걸까.’ (94쪽)


  강경옥 님 만화책 《설희》(팝툰,2009) 넷째 권을 읽습니다. 《설희》 넷째 권에 새롭게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때 이름난 음악가인 사람이 나오고, 한때 일이 없이 놀기만 하는 사람이 나오며, 한때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같은 한 사람일 수 있고 다 다른 사람일 수 있습니다.


  삶과 죽음을 헤아려 볼 노릇이에요. 죽는다면 어떻게 해야 죽음일까요. 산다면 어떻게 할 때에 삶일까요. 마지못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죽지 못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데, 마지못하는 삶은 얼마나 삶답고 죽지 못하는 삶은 얼마나 삶답다 할 만할까요.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홀가분할까요.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어디로 갈까요.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비로소 모든 것을 내려놓고 느긋하게 쉴 수 있을까요. 살아가며 내려놓지 못한 짐을 죽을 때에 참말 내려놓을 수 있는가요.


- ‘자살이니 유명한 락 뮤지션이니,  전생이니 사랑이니, 이 비일상적이고 비현실적인 것 같은 이야기들. 그리고 나와는 관계 없는 이야기들. 나는 자살이 무섭다든가 그런 것보다, 저 사람하고든 설희하고든, 어떠한 접점에도 내가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무 관계도 없다는 듯이. 내 인생 중 가장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초라하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182∼183쪽)


  봄이 되어 푸릇푸릇 돋는 풀은 풀잔치를 이룹니다. 시골 할배는 불을 놓아 풀씨가 타죽기를 바랍니다. 때로는 농약을 잔뜩 뿌려 더는 풀싹이 돋지 않기를 바랍니다. 마늘밭에도 농약을 실컷 뿌려 다른 풀이 못 자라기를 바랍니다. 군청과 도청에서는 시골길을 시멘트로 새로 깔아 풀밭을 뒤덮습니다. 풀밭은 아뭇소리 못하고 시멘트를 뒤집어씁니다. 풀은 산 목숨인 채 죽습니다. 풀밭에서 살던 풀벌레와 개구리도 산 목숨인 채 파묻힙니다. 새 길을 낸다면서 멧자락을 파헤치면서 나무들은 갑작스레 줄기를 잘리고 뿌리가 끊어집니다.


  우거진 숲이 며칠 사이에 민둥산이 되다가 몇 주나 몇 달 뒤에 새까만 찻길로 바뀌는 모습을 보고는 마음이 아파 그쪽 길로는 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내가 오늘 두 아이를 태우고 자전거로 나들이를 하는 이 길도 열 몇 해나 서른 몇 해 앞서 들과 숲을 밀어내면서 닦은 길일 테지요.


  온갖 목숨을 죽인 자리에 길이 놓입니다. 온갖 목숨이 죽어서 땅속에서 삭은 뒤에 석유가 되고 가스가 됩니다. 온갖 목숨은 농약과 비료와 항생제를 받아들이면서 자랍니다. 사람들이 먹는 밥은 다른 목숨이 아닌 영양소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이웃 목숨을 아끼지 않으면서 제 목숨조차 제대로 아끼지 않습니다. 이웃 목숨을 고맙게 받아들이는 줄 깨달을 적에 제 목숨도 고맙게 여기며 아낄 테지만, 이웃 목숨이 아닌 영양소를 돈을 치러 사다 먹기만 하기에, 제 목숨도 이웃 목숨도 오롯이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삶이 있는 자리에는 사랑이 있고, 삶이 없는 자리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삶이 있는 자리에는 이야기가 있고, 삶이 없는 자리에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사랑은 돈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이야기는 돈으로 사고팔지 못합니다. 사랑은 따사로운 마음으로 날마다 차근차근 빚습니다. 이야기는 너그러운 손길로 날마다 알뜰살뜰 엮습니다. 만화책 《설희》를 읽는 이웃들 가슴에서 새로운 사랑빛이 자랄 수 있기를 빕니다. 4347.3.2.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 아버지 만화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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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독자·비평가, 여기에 사람 (《설희》 표절과 아울러)

 


  강경옥 님 만화책 《설희》를 표절했다고 하는 연속극이 막을 내렸다. 이 연속극이 막을 내릴 즈음 여러 가지 이야기가 하나둘 불거진다. 연속극 작가와 함께 일했던 사람이 밝히는 이야기가 나오고, 이 연속극에서 나오는 여러 상황과 설정이 만화책 《설희》뿐 아니라 다른 영화와 연속극하고 크게 닮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한편, 강경옥 님 다른 만화책 《별빛속에》하고도 닮았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나는 어느 쪽이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하고 따질 마음이 없다. 네 가지로 생각해 보고 싶을 뿐이다. 작가, 독자, 비평가, 사람, 이렇게 돌아보련다.

 


  ㄱ. 작가


  사람들한테 말밥에 오를 만한 작품이라면 ‘창작’으로 내놓을 수 없는 노릇이다. 지구별에 ‘창작이라 할 수 있는 창작은 없다’는 말을 퍽 많은 사람이 내놓는데, 말이 될 수 없다. 맨 처음 창작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목민심서》는 창작인가 아닌가. 《구운몽》은 창작인가 아닌가. 《홍길동전》은 창작인가 아닌가. 《황조가》는 창작인가 아닌가. 시골마을마다 다 다르게 부르던 〈시집살이 노래〉라든지 〈방아타령〉이라든지 〈모심기 노래〉는 창작인가 아닌가.


  여러 작품을 뒤섞는 일도 창작이라 한다면 창작일 테고, 이러한 예술 갈래도 있을 텐데, 창작이라 한다면 스스로 지어서 나누는 이야기이다. 이를테면,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는 이녁이 낳은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놀리고 가르치고 하면서 새로운 기쁨을 누린다. 그런데, 모든 아이는 뒤집고 서고 걷고 달리면서 자란다. ‘흐름은 똑같다’ 할 테지. 그렇지만, 아이는 모든 어버이마다 다 다른 아이요, 내 아이는 이웃 아이하고 다르다. 그래서 육아일기를 쓰더라도 ‘똑같은 흐름을 다루’지만 모두 다른 육아일기가 태어난다.


  다만, 모든 아이가 똑같은 흐름으로 자란다 할 수 있으니, 다 다른 사람이 쓴 육아일기가 아주 똑같다 싶도록 이야기가 흐를는지 모르리라. 이때에는 표절이니 도용을 따질 수 없을 텐데, 이와 달리 뻔히 알려진 온갖 작품과 자료를 살펴서 만들었다는 연속극은 어떻게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다른 이 작품을 표절했다는 소리를 듣도록 ‘창작’을 했는지 궁금하다. 다른 무엇보다 작가라는 사람으로서 이만 한 작품을 내놓는 일이 몹시 부끄럽다고 느낀다.

 


  ㄴ. 독자


  내가 아주 좋아하는 어떤 작가가 있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작가가 있으니, 이녁이 쓴 작품이라면 하나도 빼놓지 않고 찾아서 읽으리라.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뜻밖에도 얄궂은 짓을 일삼았다면,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이녁 스스로 창작하지 않고 다른 이 작품을 베끼거나 훔쳤다면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내가 좋아하는 작가이니, ‘작품만 재미있고 좋으면 그만’이라 여겨도 될까.


  작가는 누구보다 스스로한테 가장 똑부러져야 하고 올발라야 하며 아름다울 수 있어야 한다. 독자는 작가 못지않게 작가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무턱대고 작가 편에 서서 감싸는 일을 한대서 독자가 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언제나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착하고 참답게 창작을 하여 ‘작품’으로서 우리 앞에 설 수 있도록 이끌어야 비로소 독자다운 독자라고 느낀다.

 


  ㄷ. 비평가


  비평가는 비평을 하는 사람이다. 비평가는 어느 자리에도 서지 않는 사람이다. 비평가는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 사람이며, 비평가는 참과 거짓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다. 비평가는 스스로 느끼는 대로 말하는 사람이다. 스스로 느끼는 대로 말하되, 어느 자리에 기울어지지 않는 넋으로 말해야 비평가이다. 표절을 했으니 저 사람이 잘못이라고 나무라는 사람은 비평가가 아니다. 누군가를 잘못이라고 가르는 사람이라면 법관이 되겠지. 두 작품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느낌을 꾸미지 않고 밝힐 때에 비평가가 된다.


  그러면 누가 비평가인가? 글을 쓰는 사람은 모두 작가이면서 비평가이다. 글을 읽는 사람이면 작가나 비평가이면서도 독자이다. 매체에 글을 쓰는 기자는 누구나 비평가인 셈이다.


  오늘날 기자는 표절이나 도용 같은 일을 놓고 얼마나 비평가답게 글을 써서 사람들한테 이야기를 들려주는지 궁금하다. 시청율과 돈벌이와 광고에 얽매인 채 거짓스러운 허울을 앞세우는 짓을 일삼는 기자나 비평가가 너무 판치는 우리 사회가 아닌지 궁금하다.

 


  ㄹ. 사람


  우리 집 일곱 살 큰아이와 네 살 작은아이는 성탄절이 지났어도 “산타 할아버니는 알고 계신대. 누가 착한 아이고 나쁜 앤지.” 하는 노래를 부른다.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에도 뻔히 나오지만, ‘하늘은 다 안다’. 하늘에 앞서 사람들은 누구나 스스로 잘 안다.


  배구 경기를 보면 맞은편 선수가 때린 공이 내 손끝에 맞았는지 스쳤는지 서로서로 다 안다. 서로서로 다 알지만 심판이 모여 합의판정을 할 때까지 낯빛을 숨기거나 모르는 척한다. 비디오로 느린그림을 보여주어도 안 맞았다고 발뺌을 하기 일쑤이다. 심판이 손을 들어 ‘네 손에 맞았잖아.’ 하고 가리키는 데에도 안 맞았다고 발뺌을 하는 선수마저 있다. 이러면서, 제가 때린 공이 맞은편 선수 손끝에 안 맞았는데에도 끝까지 맞았다면서 골을 내거나 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이런 운동경기를 보면서 생각해 보곤 한다. 참말 저 선수는 아무것도 모르나? 모르는 척하나?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돌아볼 적에 부끄럽지 않을까? 다른 사람이 못 알아채는 반칙을 해도 괜찮은가? 심판이 안 보는 자리에서 선수들이 팔꿈치로 찍거나 무릎으로 눌러도 괜찮은가?


  표절 말썽을 일으키는 분은 스스로 돌아보기를 바랄 뿐이다. 이녁 가슴에 손을 얹고 하늘바라기를 할 적에 얼마나 떳떳하게 웃고 노래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 * *


  만화책 《설희》를 표절했다는 연속극이 얼마나 대단한지 나는 모른다. 나는 집에 텔레비전을 들이지 않은 지 스무 해가 넘었고, 연속극이 나오건 말건 볼 일이 없다. 그저 한 가지 궁금할 뿐이다. 작가와 독자와 비평가와 사람이라는 테두리에서, 여러 작품을 짜깁기했다는 소리를 온갖 곳 사람들한테서 수없이 듣는 방송작가는 ‘창작하는 즐거움’과 ‘글을 쓰는 기쁨’을 얼마나 아름답게 누리는지 궁금하다. 연속극 판권을 팔거나 광고수입을 많이 얻거나 원고료를 많이 받으면서 ‘닥본사 독자’를 많이 얻으면 이 모든 회오리바람 한복판에서도 새로운 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닥본사 독자’는 어차피 한두 해쯤 지나면, 이번 일쯤 아무것도 아닌 듯 까맣게 잊어버리리라 생각하지는 않나 궁금하다. 4347.3.2.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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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과나무 잎망울

 


  봄이 되면 잎보다 꽃을 먼저 피우는 나무들이 있다. 사람들은 언제나 꽃나무를 일찌감치 알아보면서 꽃놀이를 즐긴다. 잎을 틔우는 나무 곁에서 잎놀이를 즐기는 사람을 보기란 아주 어렵다. 나무에서 잎이 돋는 일이 뭐 대수롭느냐 여기곤 하는구나 싶다. 그렇지만 나무가 나무인 까닭은 바로 나뭇잎 때문이다. 봄에 돋고 가을에 지며 겨우내 겨울눈으로 숨결을 잇는 잎이 있어 나무가 나무답게 살아갈 수 있다.


  풀은 풀잎이 돋아 풀내음이 난다. 사람한테는 어떤 잎이 있을까. 사람은 스스로 어떤 숨결로 푸른 이야기를 이웃과 나누면서 살아갈까. 아주 앙증맞도록 조그마한 잎망울을 맺는 모과나무를 바라본다. 봄날 매화나무라든지 벚나무는 참 많은 사람들 눈길을 타지만, 봄날 모과나무나 뽕나무나 감나무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몹시 드문데, 다 괜찮다 다 좋다. 나는 우리 집 모과나무와 뽕나무와 감나무에 돋는 새봄 잎망울을 날마다 기다리며 찬찬히 들여다보고 쓰다듬으니까. 4347.3.2.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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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슬비 2014-03-02 15:18   좋아요 0 | URL
주말에 집근처 산으로 산책 갔는데, 아직 이곳은 잎망울이 보이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곧 잎망울이 보이겠구나...했는데, 함께살기님 서재에서 봄을 느끼고 갑니다. ^^

파란놀 2014-03-02 16:36   좋아요 0 | URL
나무마다 조금씩 다르니, 곧 잎망울 고운 빛을
보슬비 님 마음에도 살포시 담으시리라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