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 25. 올바르게 쓰는 말
― 한국말 살찌우는 세 가지 길

 


  너무 많은 분들이 헷갈리거나 잘못 아는데, 한국말을 올바르게 쓰려면 책을 읽어서는 안 됩니다. 대학교에서 어느 학문을 익힌다든지 한국말사전을 외운다든지 하더라도 한국말을 올바르게 쓰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한국말을 올바르게 쓰는 길은 책에도 사전에도 학문에도 안 나오기 때문입니다.


  맞춤법이나 표준말이나 띄어쓰기가 생긴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더욱이, 오늘날 우리가 배우거나 살피는 맞춤법과 표준말과 띄어쓰기는 모두 서양 문법 틀에 맞추어 세웠습니다. 우리 겨레가 먼먼 옛날부터 입에서 입으로 물려주거나 가르치던 틀하고는 사뭇 다릅니다. 먼먼 옛날부터 어느 누구도 책으로 말을 물려주지 않았어요. 먼먼 옛날부터 누구나 어버이한테서 말을 배웠습니다. 이 땅 모든 어버이가 말을 가르쳤고, 이 땅 모든 아이들이 집에서 말을 배웠어요.


  훈민정음이 태어났어도 한국말 문법이 따로 없었습니다. 훈민정음으로 적은 책이 나왔어도 한국말 문법은 따로 없었습니다. 고려나 조선 때에 나온 책은 임금님과 학자가 중국말을 바탕으로 쓰던 책일 뿐입니다.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누는 말로 나온 책은 없습니다.


  서양 문명과 학문이 들어오면서 한국말도 문법이라는 틀을 세워야 한다고 깨달은 분이 나타났지만, 정작 한국사람이 예부터 쓰던 한국말 틀을 찬찬히 살피지 못했습니다. 한국말에는 없는 때매김(시제)을 억지로 나누는 바람에 ‘-었었-’을 넣는 글말이 생겼습니다. 한국말에 없는 현재진행형을 억지로 만들었습니다. 한국말에 없는 대이름씨인 ‘그女’를 일본책을 옮기면서 잘못 받아들였습니다. 한국말에 없는 ‘나의·너의’를 일본말을 옮기면서 함부로 들였습니다. 사람들은 책(글)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닌 입(삶)으로 말하는 사람이었으나, 학자들은 입(삶)이 아닌 책(글)으로 한국말을 다루려 하면서 크게 엇나가거나 뒤틀렸어요. 이 때문에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 배우기가 어렵다는 소리가 불거집니다. 중·고등학교에서 ‘한국말 문법’ 가르치기란 너무 어려울 뿐 아니라, 아이들이 학교에서 한국말 문법을 배우면서 머리가 터집니다. 입(삶)으로는 누구나 한국말을 거리낌없이 하지만, 머리(마음)로는 한국말을 어떻게 이처럼 잘 쓰는가를 깨닫지 못해요. 입(삶)으로 늘 쓰는 한국말 얼거리가 어떠한가를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할 뿐 아니라, 어른과 아이 모두 한국말 뼈대와 밑바탕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합니다.


  김서영 님이 쓴 《아이 스스로 즐기는 책벌레 만들기》(국민출판,2011)라는 책을 읽다가 “한 가지 종류의 책을 읽으려고 하는 아이들”이라는 대목을 보았습니다. 한국사람은 누구나 이처럼 겹말을 쓰면서 못 깨닫습니다. 제대로 썼는지 잘못 썼는지 느끼지 못해요. ‘가지’와 ‘종류(種類)’가 같은 낱말인 줄 못 느낍니다. “한 가지 책”이라고 적든지 “한 갈래 책”이라고 적어야 가장 알맞으며, 한자말을 쓰고 싶다면 “한 종류 책”이라고 적어야 하는데, 글을 쓰는 사람도 글을 읽는 사람도 못 느끼고 말아요. 어릴 적부터 한국말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어른이 되고 나면 한국말을 제대로 알려주거나 들려주는 이웃이나 동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한국말을 올바로 가르치지 않고 참답게 배우지 않습니다. ‘very’와 ‘bery’가 다르듯이 ‘아’ 다르고 ‘어’ 다른 말이지만,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나라에서도 한국말은 늘 푸대접입니다. 학자들이 세운 한국말 문법이 한국말 삶과 어긋난 줄 헤아리지 않습니다. 교과서로 곧이곧대로 외우라 할 뿐이요, 시험문제로 낼 뿐입니다. 어긋난 틀에 맞춘 한국말을 삶이 아닌 학문으로만 다가서기에, 한국말을 다루는 논문과 책조차 한국말이 아닌 서양말이나 일본 한자말로 풀이합니다.


  아이들은 한글을 깨치기는 하지만 한국말을 깨치지는 못합니다. 한글을 깨친 뒤 올바른 한국말을 배우지 못하니, 어린 나이부터 제 넋을 슬기롭게 가꾸거나 다스리는 길하고 멀어집니다. 아이와 가장 가까운 어버이부터 스스로 한국말을 슬기롭게 배우지 않은 채 아이를 낳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유치원 교사와 초·중·고등학교 교사 또한 한국말을 참답게 배우지 않으면서 교과서 수업만 합니다. 대학교에서도 한국말로 학문을 바로세우지 못합니다. 회사와 공장에서도 한국말을 아름답게 갈고닦지 않습니다. 관행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영어와 일본 한자말로 이야기를 나누고 서류를 씁니다.


  말을 올바르게 쓰자면 세 가지를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 즐겁게 말하기입니다. 둘째, 곱게 말하기입니다. 셋째, 착하게 말하기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즐거움으로 말을 하면 얄궂거나 뒤틀리거나 잘못된 말이 나오기 어렵습니다. 마음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운 사랑으로 말을 하면 얄궂거나 뒤틀리거나 잘못된 말을 찬찬히 거를 수 있습니다. 마음에서 샘솟는 착한 넋으로 말을 하면 시나브로 밝게 빛나는 이야기가 흐를 수 있습니다. 맞춤법이나 표준말이나 띄어쓰기가 아닌, 즐거움과 아름다움과 착함 세 가지를 살필 노릇입니다.


  언제나 이와 같거든요. 다른 나라와 겨레에서도 이와 같아요. 어버이가 아이한테 말을 가르치면서 물려주는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셔요. 모든 어버이는 아이한테 즐겁게 말합니다. 아름답게 말합니다. 착하게 말합니다. 아이들은 어버이 곁에서 어버이가 들려주는 즐겁고 아름다우며 착한 말에 젖어드는 삶을 누립니다. 입에서 입으로만 말을 가르치고 물려주면서도 수천 수만 수십만 해를 이을 수 있는 까닭은, 바로 이 세 가지를 바탕으로 삼았기 때문이에요. 문법으로 말을 가르치거나 물려주지 않습니다. 학습이나 교육효과를 헤아리며 말을 가르치거나 물려주지 않습니다. 아이가 가장 즐겁게 밥을 먹고 아름답게 웃으면서 착하게 뛰놀기를 바라는 어버이 마음이 고스란히 말삶으로 이어집니다. 아이가 먹을 밥 한 끼니를 가장 즐겁고 아름다우며 착하게 일구어 마련하듯이, 아이가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며 마음으로 삭힐 말이 참삶으로 자랄 수 있도록 애쓰지요.


  어려운 말투나 번역 말투나 잘못된 말투가 나타나는 까닭을 헤아려 봅니다. 즐거움이 없고 아름다움이 없으며 착함이 없을 때 말이 뒤틀려요. 지식(책·글)이 아닌 삶인 말입니다. 학문이나 문법이 아닌 삶인 말입니다. 4347.3.4.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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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0 14: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놀 2014-04-20 21:53   좋아요 0 | URL
잘못 쓰신 말이라기보다는 오랫동안 사회가 길들인 말이라고 해야 옳지 싶어요.
교과서도 신문도 방송도 책도 모두
제대로 된 말이 아닌 우리 모습입니다.

그러니, 누가 잘 쓰고 못 쓰고를 따질 수 없어요.
어떤 말을 쓰든 스스로 가장 아름다운 넋을 담느냐를
살필 뿐입니다.

아무쪼록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나누는 길을 씩씩하게 걸어가 주셔요 ^^
 

사진과 함께 40. 어둠을 밝히는 빛에

 


  빛이 있어 어둠을 밝힙니다. 빛이 사라지며 어둠이 짙습니다. 빛이 있는 자리에는 어둠이 없습니다. 빛이 있으면 그늘이 지거나 그림자가 생기곤 하지만, 그늘과 그림자는 어둠이 아닙니다. 두 가지 모습이요, 두 가지 빛입니다.


  모든 목숨은 힘차게 움직입니다. 힘차게 움직이다가 쉽니다. 눈을 감고 포근하게 잡니다. 쉬거나 자지 않으면서 그저 움직이기만 하는 목숨은 없습니다. 어떤 목숨이든 반드시 쉬거나 자기 마련이요, 쉬거나 잘 적에는 새로운 누리로 갑니다. 이른바 꿈누리예요.


  그늘진 자리에 씨앗이 떨어져도 풀이 돋고 나무가 자랍니다. 그늘진 자리에서 피어나는 꽃은 한결 밝으며 짙습니다. 그늘진 자리에서 꽃이 진 뒤 열매를 맺으면 한결 달콤하며 깊은 맛을 냅니다. 햇빛을 듬뿍 쐬는 자리에서 나는 들딸기도 무척 달지만, 그늘진 곳에서 나는 들딸기는 새빨갛게 빛나면서 매우 달콤해요.


  사진을 찍을 적에는 빛만 살피지 않습니다. 빛을 살피면서 그늘과 그림자를 함께 살핍니다. 빛과 어둠이 함께 있는 사진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사진에 드리우는 어둠이란 어둠이라기보다 ‘그늘’이나 ‘그림자’입니다. 어둠을 사진으로 담는다고 할 적에는, 어둠은 어둠으로 머물지 않고 ‘새로운 빛’으로 환하며 곱습니다.


  흑백으로 찍는 사진이 아닌 무지개빛으로 찍는 사진에도 빛과 그늘이 함께 있습니다. 꽃그림자가 집니다. 골목집 담벼락 따라 곱게 그늘이 집니다. 깜깜한 저녁이나 밤에 등불을 켜면 둘레는 새까맣지만 등불 언저리는 환합니다. 이때에 어떠한 빛이 우리를 맞이하는 셈일까 헤아려 봅니다. 어둠을 밝히는 빛은 우리 가슴에 어떻게 깃들까 생각해 봅니다.


  그늘진 자리에서도 꽃이 피고 나무가 자라는 까닭은, 햇빛이 들지 않더라도 햇볕이 포근하게 감싸기 때문입니다. 건물이나 큰 나무에 가리더라도 볕은 막지 못합니다. 빛은 가로막힐 수 있지만, 빛살은 옆으로 퍼지면서 밝은 기운을 살며시 나누어 줍니다. 빛살조차 꽉 막힌 데에 있더라도 볕은 천천히 스며들어요. 가로막은 벽을 타고 볕이 스며들어요. 볕이 지구별 곳곳을 따사롭게 덥히면서 땅속으로 따스한 볕이 감돌아요.


  사진 한 장 찍을 적에 어떠한 빛을 맞아들이는지 살핍니다. 사진 한 장 찍으면서 어느 곳에 그늘이 지거나 그림자가 생기는지 돌아봅니다. 사진 한 장 읽을 적에 빛살과 함께 볕살을 헤아립니다. 사진 한 장 읽으면서 따사로운 기운과 손길과 숨결이 어떻게 퍼지는가 가만히 그립니다. 4347.4.10.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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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글과 아침밥

 


  오늘까지 마감글을 셋 써야 한다. 글 한 꼭지는 이제 막 마무리를 지었고, 두 꼭지를 더 쓰면 된다. 글을 바란 곳에서는 다음주까지 쓰면 된다고 얘기하지만, 우리 네 식구는 이튿날 아침에 먼 마실을 가야 하니, 오늘까지 글을 끝내고 마실길을 나서야 한다. 마감글을 쓰기에 다른 글을 안 쓰지 않는다. 다음달까지 끝내야 할 글꾸러미가 있어 날마다 이 글꾸러미를 조금씩 쓴다. 이듬해에 내놓을 책에 넣을 글도 틈틈이 쓴다. 도서관일기를 쓰고 아이들과 살아가며 지내는 이야기를 쓴다. 책으로 내주는 곳이 없어도 사진비평을 쓴다. 지난 12월에 새로 태어난 사진잡지에서는 내 사진비평을 고맙게 실어 준다. 잡지사에 보낼 사진비평은 어제 써서 보냈다. 밥을 끓이면서 글을 만진다. 밥불을 끈 뒤 달걀을 삶으며 글을 붙잡는다.


  오늘 먹을 풀을 뜯어야지. 얼른 밥상을 닦고 차근차근 차려야지. 아이들이 어지른 부엌과 방과 마루도 치워야지. 작은아이는 마당에서 혼자 쉬하는 놀이를 하다가 바지를 두 벌 버리네. 네 살 작은아이가 이제 혼자서 바지를 벗고 입을 줄 아니 손이 덜 간다. 숨을 돌린다. 쪽파를 다져야겠고, 밥과 국 말고 어떤 반찬을 올릴까 생각에 잠긴다. 이러면서, 남은 마감글 두 가지를 어떻게 엮을까 헤아린다. 4347.4.10.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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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누구나 풀을 먹는다

 


  시골집이 아침부터 시끄럽습니다. 이웃 할배가 아침부터 기계를 들고 풀을 베기 때문입니다. 이웃마을 너머 골짜기에서 찻길을 넓힌다며 숲에 우거진 나무를 잔뜩 베기 때문입니다. 마을 곳곳에서 기계를 써서 풀을 베는 소리가 윙윙 울립니다. 기계로 풀을 베는 동안 이 시끄러운 소리에 새들이 모두 놀라 어디론지 숨습니다. 새가 숨으니 시골에서 새소리가 끊어집니다.


  골짜기에서 나무를 베니, 골짜기에서도 숲짐승과 새가 모두 떠납니다. 숲에서 살던 짐승과 새도 모두 놀라겠지요. 놀랄 뿐 아니라 무섭고 두렵겠지요. 꽤 멀리 떨어진 골짜기에서 나무를 베는 데에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계톱 소리가 우리 마을로 울려퍼집니다.


  그리 멀지 않은 지난날까지, 어느 누구도 기계로 풀을 베지 않았습니다. 지난날에는 누구나 낫으로 풀을 베었습니다. 게다가 지난날에 풀을 벤 까닭은 소한테 먹이려는 뜻입니다. 또는, 나물로 삼으려고 호미로 캐거나 손으로 꺾거나 뜯었어요.


  늙은 할매와 할배만 남은 시골에서는 나물을 먹을 만한 ‘입’이 없습니다. 늙은 어른 두 사람이 나물밥만 먹더라도 도무지 이 많은 풀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늙은 어른 두 사람이 소를 건사하기란 어렵습니다. 소를 써서 논밭을 가는 시골이 거의 없습니다. 허리가 구부정한 몸으로 소를 몰 수도 없습니다. 소를 내다 판다 하더라도 한두 마리 키워서는 돈이 안 맞습니다. 이래저래 오늘날 한국에서는 어디로 가나 시골사람 스스로 풀을 싫어하고 미워합니다. 오늘날 이 나라 시골은 어디에서나 풀을 끔찍하게 여기고 손사래치며 죽이지 못해 안달입니다.


  조지프 코캐너 님이 쓴 《잡초의 재발견》(우물이 있는 집,2013)이라는 책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생물학자가 쓴 이 책은 1950년에 첫 판이 나왔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도 여러 차례 나오기는 했으나, 나올 적마다 거의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2013년에 새 옷을 입었는데, 요즈음은 얼마나 사랑받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조지프 코캐너 님은 “잡초는 빗물에 씻겨 내려가거나 바람에 날아갈지도 모르는 광물질과 영양분을 저장함으로써 다른 식물들이 그것들을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토양의 상태를 유지한다(9쪽).” 하고 말합니다. ‘학자님’이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시골마을 ‘농부님’은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여길까요? 학자님은 “돌려짓기 농법에서 잡초는 토양이 경질층을 부수어 농작물 뿌리가 깊은 곳에서 양분을 흡수할 수 있게 한다. 잡초는 토양을 섬유화시켜서 비옥하게 만들며 그렇게 땅속의 동식물엑 훌륭한 환경을 제공한다(9쪽).” 하고 말합니다. 오랫동안 흙과 풀을 지켜보고 살핀 끝에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한국에서 농학을 가르치거나 살피는 교수와 학자는 어떻게 여길까요? 이런 생각을 하거나 이런 말을 들려주는 전문가나 지식인은 있을까요? 농협 일꾼은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을까요? 농약 회사와 비료 회사 일꾼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요?


  요즈음 으레 ‘채식’과 ‘육식’을 말합니다만, 오롯한 ‘고기먹기(육식)’란 없습니다. 소이든 돼지이든 풀을 즐겨먹거든요. 닭도 풀과 풀벌레를 즐겨먹어요. 사람들이 즐겨먹는 고기는 거의 다 ‘풀을 먹는 짐승’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풀짐승이 풀을 못 먹습니다. 풀짐승이 풀이 아닌 사료를 먹습니다.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고기 한 점을 장만하거나 밥집에 가서 고기를 시켜서 먹는다 할 적에 ‘풀을 먹고 살던 짐승으로 마련하는 고기밥’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풀 아닌 사료와 항생제만 먹고 살아온 짐승으로 마련하는 고기밥’투성이입니다.


  고기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풀 먹고 자란 짐승에서 얻은 고기’하고 ‘사료 먹고 자란 짐승에서 얻은 고기’가 맛이 다른 줄 알리라 생각합니다. 풀밭에서 풀이랑 풀벌레를 먹고 자란 닭하고 공장에서 잠을 못 자고 항생제와 사료만 먹고 자란 닭하고 맛이 얼마나 다른데요. 시골집에서 흙을 밟고 뛰놀던 닭 한 마리를 잡으면 어른 너덧 사람이 먹어도 푸짐할 만큼 살점이 나오는데, 맥주집에서 먹는 튀김닭 한 마리는 몇 사람이 어느 만큼 먹을 만할까요.


  곰곰이 돌아보면,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풀을 풀답게 가르치거나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시골에서는 ‘농업고등학교’가 거의 모두 사라졌습니다. 흙살림을 가르치는 농업고등학교는 이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할 만합니다. 도시는 도시대로 대학입시에만 매달릴 뿐, 아이들이 스스로 텃밭을 일구도록 도울 생각이 없고, 학교급식도 학교텃밭에서 남새를 얻지 않아요. 도시내기는 도시에서만 살도록 하는 얼개요, 시골내기는 시골 떠나 도시로 가도록 하는 틀입니다.


  “자연은 풍부한 지식을 담고 있는 한 권의 완전한 책이었다(41쪽).”와 같은 이야기를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웃은 어디에 있을까 궁금합니다. 숲에서 책을 읽고, 풀 한 포기와 나무 한 그루에서 삶을 읽으며 꿈을 키우는 이웃은 어디에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새가 들려주는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개구리와 풀벌레가 베푸는 노래잔치를 귀여겨듣는 이웃은 어디에 있나 궁금합니다.


  우리 시골집에서 도시로 마실을 갈 적에 시외버스는 여러 시간 고속도로를 달립니다. 시외버스를 타고 여러 시간 전라남도와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와 충청북도와 경기도를 가로질러 서울로 가노라면, 고속도로 옆으로 펼쳐진 숲이나 멧자락을 보곤 합니다. 이때 어디에서나 ‘시멘트로 만든 물골’을 만납니다. 큰비가 내리면 빗물이 이 물골로 흘러내리도록 놓았구나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물골이 있으면 멧자락이 무너지지 않거나 흙이 쓸려 내려가지 않을까요? 아니지요. 외려 이런 물골 때문에 멧자락이 무너지거나 흙이 쓸려 내려갑니다.


  누구라도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어요. 백두산도 한라산도 지리산도 높이가 낮아지지 않습니다. 비가 퍼붓고 태풍이 지나가더라도 멧봉우리는 낮아지지 않습니다. 가랑잎이 지고 풀줄기가 삭으면서 새로운 흙이 되거든요. 나무뿌리와 풀뿌리가 흙을 단단히 붙잡기 때문에 어떤 빗물에도 좀처럼 흙이 쓸리지 않아요. 풀을 모조리 베고 나무를 함부로 베었다면? 이러면서 시멘트 물골을 낸다면?


  “그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잡초밭 안의 나무들이 바깥쪽의 나무들보다 훨씬 잘 자라고 있다는 점이었다. 과수원에서 일어난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무기질비료 세례를 심하게 받았던 과수원의 토양은 완전히 균형을 잃어버린 채로 버려져 있었다(61쪽).” 같은 이야기는 이웃 일본에서 ‘기적의 사과’를 거둔 할배가 보여주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한국사람은 아직 하나도 못 깨달으며 풀을 죄 ‘잡초’로 여기며 때려죽이기만 합니다. 4347.4.10.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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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시골에서 태어난 노래

 


  우리 집 두 아이는 시골 어린이입니다. 시골집에서 마음껏 노래하고 뛰노는 어린이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시골바람을 마시고, 시골물을 마십니다. 가끔 시골버스를 타고 읍내로 저자마실을 다닙니다. 나와 함께 시골자전거를 타고 면소재지 우체국을 다녀옵니다. 2014년에 큰아이는 일곱 살이고 작은아이는 네 살입니다. 큰아이는 올해에 접어들면서 글읽기에 눈을 뜹니다. 따로 한글을 가르치지는 않고 동시를 손수 써서 함께 읽는데, 아이 스스로 글을 깨우치고는 씩씩하게 읽습니다.


  두 아이가 노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 아이들한테 물려주고픈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면서 누리는 즐거움을 깨닫고, 시골에서 일하고 어깨동무하는 기쁨을 헤아리며, 시골에서 꿈꾸는 사랑을 가꿀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철수와영희 펴냄,2014)이라는 책을 내놓았습니다. 이 책에 “꽃을 생각하는 동안 내 마음속에 어여쁜 꽃말이 자랍니다. 꽃을 헤아리면서 내 가슴속에 즐거운 꽃그림이 태어납니다(16쪽).” 하고 적었습니다. 참말 그렇거든요. 풀을 생각하면 마음속에서 풀말이 자라고 풀내음 가득한 이야기가 솟아요. 숲을 생각하면 마음속에서 숲말이 자라고 숲빛 그윽한 이야기가 태어나요. 자전거를 생각하는 사람은 자전거 이야기를 꺼냅니다. 여행을 생각하는 사람은 여행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축구를 생각하는 사람은 축구 이야기로 즐겁고, 정치를 생각하는 사람은 정치 이야기로 바쁩니다.


  평화를 바란다면 마음속에 평화를 담으면 됩니다. 평화를 생각하면서 평화롭게 나아갈 길을 찾아요. 평화를 생각하는 동안 평화로운 빛을 마음속에서 가꿉니다. 평화를 생각하는 사이 어느덧 삶은 평화롭습니다. 그러니까, 걱정을 마음자리에 두면 언제나 걱정이 넘쳐요. 걱정하니까 걱정하는 삶이 됩니다. 즐겁게 웃으려는 생각으로 하루를 열면 즐겁게 웃는 이야기가 흐르기 마련이에요. 사건과 사고로 얼룩진 신문을 읽거나 방송을 들으면, 마음속에 사건과 사고 이야기가 쌓이면서,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온통 사건과 사고하고 얽힌 이야기입니다. 연속극을 즐겨 보는 분은 늘 연속극 이야기를 나누려 하겠지요.


  세 살 버릇이 여든 간다고 하듯이, 어릴 적에 익힌 말이 할매 할배가 되도록 쓰는 말이 됩니다. 가는 말이 고울 적에 오는 말이 곱다고 하듯이, 어른이 아이한테 들려주는 말이 아이들이 쓰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아름답게 말을 하거나 글을 쓰면, 예쁜 벗들도 아름다운 말과 글을 배우겠지요. 어른들이 아름답지 않게 말을 하거나 글을 쓰면, 아름답지 못한 말과 글을 배울 테고요(56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삶이 고스란히 말이 되고, 말이 된 삶은 고스란히 아이한테 이어집니다. 아이가 물려받은 말은 앞으로 어른이 되는 동안 몸에 익숙하기 마련이고, 이런 말을 다시 새로운 아이한테 물려줍니다.


  우리가 쓰는 모든 말은 시골에서 태어났습니다. ‘사람·사랑·사흘’ 같은 낱말도, ‘밥·젓가락·마당’ 같은 낱말도, ‘해·꽃·흙’ 같은 낱말도 시골에서 태어났어요. ‘두레·놀이·배우다’ 같은 낱말도, ‘믿다·보다·가꾸다’ 같은 낱말도 시골에서 태어납니다. 서로 아끼고 보살피는 넋은 시골에서 흙을 살찌우면서 숲을 사랑하는 삶에서 태어나요. 오순도순 일구는 살림에서 오순도순 주고받는 말이 태어나지요. 텔레비전이 없고 전문가수가 없었어도 누구나 마을마다 일노래와 놀이노래를 부르던 우리들이에요. 시골사람한테는 즐거움과 평화와 웃음만 있었어요. 낫과 호미와 쟁기는 전쟁무기가 아닌 살림살이예요. 숟가락과 절구와 바늘은 삶을 빚는 연장이지, 피를 튀기는 첨단산업이 아닙니다. 도시에서 살든 시골에서 지내든, 저마다 시골빛을 가슴으로 품으면서 시골노래를 부를 때에 어느 고장에서든 아름다운 이야기가 태어나리라 생각합니다. 숲내음 나누고 풀바람 먹을 적에 어깨동무를 합니다.


  어떤 말로 어떤 이야기를 속삭일 때에 즐거울까요. 어떤 글로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때에 아름다울까요.


  서로 아끼는 두 사람이 있으면, 둘은 전쟁무기를 만들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있으면, 둘은 군대를 거느리지 않습니다. 서로 아끼지 않으니, 언제라도 쳐들어가려고 전쟁무기를 만들고 말아요. 서로 사랑하지 않으니, 언제라도 때려눕히려고 군대를 거느리고 말아요. 전쟁무기와 군대를 갖추기에, 삶을 가꾸거나 살리는 길하고 멀어집니다. 전쟁무기와 군대에 돈과 품을 쓰는 만큼, 마을을 가꾸거나 살리는 길하고 동떨어집니다.


  밥 한 그릇이 목숨을 살립니다. 밥 한 그릇이 평화를 부릅니다. 깨끗한 물줄기가 숨을 살립니다. 깨끗한 물을 함께 나누어 마실 때에 서로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돈을 더 많이 가져야 이웃과 더 즐겁게 나누지 않습니다. 밥 한 술 나눌 수 있을 때에 이웃과 즐겁습니다. 힘이 더 세어야 커다란 일을 하지 않습니다. 종이 한 장을 맞들 수 있는 매무새이면 됩니다. 이름값이 더 높아야 삶이 더 아름답지 않습니다. 서로 아끼고 돌볼 줄 아는 넋이면 사랑스러워요.


  우리 시골집 마당에 민들레꽃 한 송이 핍니다. 마을 논둑이나 들판에는 보름쯤 앞서부터 노란 민들레꽃이 피었고, 우리 집 마당에는 하얀 민들레꽃이 오늘부터 꽃송이를 벌립니다. 우리 집 하얀 민들레꽃이 한들한들 봄바람 누리면서 씨앗을 맺으면 이 씨앗이 바람 타고 날면서 온 마을에 하얀 꽃잔치 이루도록 퍼지겠지요. 아직 한 송이라지만, 곧 열 송이 되고, 다시 백 송이 되며, 새삼스레 천 송이가 되리라 생각해요.


  시골에서 태어난 노래가 도시로 흐릅니다. 나락 한 알에 시골노래가 감돕니다. 복숭아 한 알에 시골노래가 깃듭니다. 배추 한 포기와 무 한 뿌리에 시골노래가 서립니다. 풀벌레 콕콕 쪼아먹으면서 자란 닭이 낳은 알하고 항생제와 사료만 먹으면서 자란 닭이 낳은 알은 맛이 사뭇 다릅니다. 공장 옆에 있는 논에서 거둔 쌀이라든지 고속도로 옆에 있는 밭에서 거둔 남새는 호젓한 시골마을에서 거둔 쌀과 남새하고 맛과 내음이 모두 다르겠지요. 즐겁게 웃는 사람이 즐겁게 노래하는 사랑으로 아름답습니다. “두레를 하고 울력을 내며 품앗이를 하는 동안, 한 사람 손 하나란 얼마나 아름답고 고마운가 하고 깨닫습니다. 일손 하나로 만나 이웃이 살가이 어울리는 삶을 돌아봅니다. 집일과 마을일을 나란히 하면서 즐겁게 어울리는 삶이 어떠한 웃음꽃 되는가 하고 되돌아봅니다(119쪽).” 4347.4.3.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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