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한 그루



우람한 나무라서

가만히 서기만 하는 일 없다.

바람 따라 가만가만 춤추고

바람 없으면

새와 나비와 벌레 불러서

노래잔치 연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작은 목숨들

비 그을 자리 내주고

눈이 내리는 날에는

작은 숨결들

포근히 쉬도록

속살을 내준다.



4347.4.1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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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른 책을 넘겨주기



  새책방에서는 책 하나를 두고 다투거나 실랑이를 벌일 까닭이 없다. 새책방에서는 같은 책을 여러 권 장만할 수 있으니까. 헌책방에서는 책 하나를 두고 다투거나 실랑이를 벌일 수 있다. 왜냐하면, 헌책방에 들어오는 헌책은 꼭 하나뿐이기 일쑤이니까.


  《사진으로 보는 소설 70년사》라는 조그마한 사진책이 있다. 나는 사진비평을 하기 때문에 이 책을 헌책방에서 찾으려고 꽤 여러 해 바지런히 다리품을 팔았다. 그러고서 드디어 이 책을 만난다. 아 반갑구나, 이제 비로소 네 이야기를 쓸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한다. 그런데, 함께 헌책방 나들이를 한 분이 자꾸 이 책을 바라본다. 이 책을 보고 싶다고 넌지시 마음을 내보인다.


  딱한 일이다. 책은 하나인데, 이 책을 건사하고 싶은 사람은 둘이로구나.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르는 척해야 할까. ‘나도 이 책으로 사진비평을 써야 한다구요.’ 하고 말해야 하는가.


  빙그레 웃으면서 책벗한테 책을 넘긴다. “저는 전국 여러 헌책방을 두루 돌아다니니, 다음에 다시 만날 일이 있으리라 생각해요.” 책벗이 이 책을 즐겁게 읽고 알뜰히 아낄 수 있기를 빈다. 아무렴, 알뜰살뜰 건사하며 보듬어 줄 테지.


  그나저나 앞으로 몇 해를 더 살펴야 다시 이 책을 만날 수 있을까. 나는 앞으로 몇 해쯤 뒤에나 이 책을 놓고 사진비평을 쓸 수 있을까. 4347.4.19.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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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에 얹은 책



  아이가 무릎에 그림책을 얹는다. 밝은 봄꽃 이야기가 흐르는 그림책을 넘긴다. 일곱 살 아이는 옷이든 다른 무엇이든 꽃 무늬가 들어가면 무척 좋아한다. 하늘을 나는 새를 보면서 “음, 나 저 새, 꽃새라고 할래.” 하고 말하기도 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새는 하늘을 나는 꽃이라고 할 만하구나 싶다.


  무릎에 책을 얹고 이야기를 읽는 아이는 책아이라 할 텐데, 책에서 꽃내음을 맡으니, 책아이는 꽃아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 꽃 같은 말을 속삭이면서 꽃말이 피어나고, 꽃 같은 노래를 부르면서 꽃노래가 퍼지며, 꽃 같은 웃음을 지으면서 꽃웃음이 흐드러진다.


  책을 마주하는 꽃다운 넋이 곱다. 책을 만지는 꽃다운 손길이 예쁘다. 책을 읽는 꽃다운 눈빛이 맑다. 4347.4.19.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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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 군내버스 011. 버스는 이야기터


  하루에 몇 대만 지나가는 군내버스이기에, 볼일을 보는 분들은 다 다른 마을에서 살아도 으레 비슷한 때에 버스를 탄다. 따로 자가용이 없어 서로 오가지 않다가 군내버스에서 만나면 괜히 반갑고, 반가운 나머지 읍내에 닿을 때까지 할매끼리 할배끼리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운다. 수수하고 작은 이야기터이다. 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고흥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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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 군내버스 010. 저 먼 모퉁이에서



  저 먼 모퉁이에서 버스가 들어선다. 군내버스는 여러 마을을 구비구비 돌며 우리 마을까지 달려온다. 고개를 넘고 들길을 거쳐 바닷가를 누비면서 한 사람 두 사람 내려 주고 태워 준다. 자동차 몹시 뜸한 시골길을 차근차근 달리면서 살그마니 바람을 일으킨다. 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고흥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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