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말 ‘존재’가 어지럽히는 말과 삶

 (122) 존재 122 : 존재이유 1


그러나 그런 금기들은 존재이유가 없어요

《마르크 캉탱/신성림 옮김-왜 하지 말라는 거야?》(개마고원,2009) 144쪽


 존재이유가 없어요

→ 있어야 할 까닭이 없어요

→ 있을 까닭이 없어요

→ 있어야 하지 않아요

 …


  이 보기글에서는 ‘하지 말라’나 ‘꺼리는 무엇’이 “존재이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짧은 글월이지만 곰곰이 되씹어 봅니다. ‘금기’라는 낱말이니까 ‘존재이유’하고 잘 어울리는구나 싶습니다. ‘금기’가 아닌 ‘하지 말라’였으면 “그런 하지 말라는 말은 할 까닭이 없어요”쯤 되지 않았으랴 싶고, ‘터부’가 아닌 ‘꺼리다’였으면 “그렇게 꺼려야 할 까닭이 없어요”쯤 적바림했으리라 싶습니다.


  한 가지 말마디를 알맞게 추스르며 잘 다독일 때에는 다른 말마디 또한 알맞게 추스르면서 잘 다독입니다. 한 가지 말마디를 얄궂게 내버리거나 아무렇게나 내팽개칠 때에는 다른 말마디 또한 얄궂게 내버리거나 아무렇게나 내팽개칠 뿐입니다.


  어떤 말은 쓰고 어떤 말은 안 써야 한다는 틀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과 삶을 슬기롭게 나타낼 말을 찾을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이런 말은 쓰고 저런 말은 꺼려야 한다는 짜임새가 아니라, 스스로 넋과 얼을 아름다이 드러낼 글을 찾아나설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없어야 해요

 없애야 해요

 …


  좋다고 느낄 말틀을 찾아야 합니다. 나쁘다고 느끼는 말틀은 손사래쳐야 합니다. 반갑다고 느낄 말투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케케묵거나 짓궂다고 느끼는 말투는 고개를 돌려야 합니다.


  우리 삶터 깊숙이 파고들었다 할지라도, 올바르지 못하다 하는 말투라 하면 기꺼이 없앨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밭과 손길에 배어든 말버릇이요 글버릇이라 하더라도, 알차거나 알뜰하지 못하다 하는 글투라 하면 기꺼이 물리치거나 털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삶을 사랑하니까요. 우리는 삶을 아끼니까요. 우리는 삶을 좋아하니까요.


  우리는 스스로 사랑할 만한 말을 써야 합니다. 우리는 다 같이 아낄 만한 말을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좋아하는 말을 이웃하고 스스럼없이 주고받아야 합니다.


  엉뚱한 말을 쓸 까닭이 있겠습니까. 지저분한 말을 끝까지 붙잡을 까닭이 있겠습니까. 얄딱구리한 말로 생각을 어지럽힐 까닭이 있겠습니까.


  나를 살리고 이웃을 살리는 말을 써야 즐겁습니다. 몸과 마음을 아름다이 가꾸면서, 동무들 삶자락에 살포시 다가가며 따숩게 손길 내미는 말을 써야 흐뭇합니다.


 왜 있어야 할까요

 무엇 때문에 있을까요

 누구한테 도움이 될까요

 …


  한 마디 말이 한 가지 씨앗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 줄 글이 싱그러운 물 한 방울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밭에 씨앗 하나 뿌리고, 마음줄기에 물방울 하나로 스며드는 참답고 빛나며 고운 말씨앗와 글방울이 되면서 스스로 삶을 사랑하는 매무새로 나아간다면 기쁘겠습니다.


  못된 말은 못된 법과 함께 쫓아낼 줄 알고, 어리석은 말은 어리석은 제도와 함께 몰아낼 줄 알며, 우리를 못살게 구는 말은 우리를 못살게 구는 몹쓸 편견과 함께 말끔히 씻어낼 줄 알면 더없이 고맙겠습니다. 4342.9.14.달.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그러나 그런 금기는 있을 까닭이 없어요


‘금기(禁忌)’가 있고 ‘터부(taboo)’가 있습니다. 두 가지는 우리가 무엇을 꺼린다고 하는 자리에 으레 쓰는 말입니다. 가까이하지 않을 때, 또는 멀리할 때, 때로는 반기지 않을 때, 그리고 달갑잖이 여길 때 쓰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하지 말라’나 ‘하지 말자’고 하는 무엇인가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 ‘터부’를 말하고 ‘금기’를 말했을까요. 이런 말마디는 누가 언제부터 썼을까요. 우리한테는 ‘터부’나 ‘금기’ 아니고는 우리 느낌이나 생각이나 삶을 담아낼 말마디가 없을까요. 우리는 있는 그대로 “그런 하지 말라는 말은”이나 “그렇게 꺼리는 여러 가지는”처럼 나타내거나 이야기를 하면 안 될 노릇인가 궁금합니다.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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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말 ‘존재’가 어지럽히는 말과 삶

 (121) 존재 121 : 사진가 없는 평론가는 존재할 수 없는


평론가 없이 사진가는 있을 수 있지만, 사진가 없는 평론가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전민조 엮음-사진 이야기》(눈빛,2007) 78쪽


 평론가 없이 사진가는 있을 수 있지만 (o)

 사진가 없는 평론가는 존재할 수 없는 (x)


  보기글 첫머리는 “있을 수 있지만”으로 잘 적습니다. 그러나 보기글 끝자락을 “존재할 수 없는”으로 얄궂게 적습니다. 조금 더 마음을 쏟았다면 좋았으련만. 한 번 더 마음을 기울였다면 나았으련만.


 평론가의 존재 없이도 사진가의 존재는 있지만 (x)

 사진가의 존재 없이는 평론가의 존재는 없는 (x)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이 보기글을 쓴 분은 비록 글 끝에 “존재할 수 없는”으로 적지만, 이 앞 세 군데에서는 ‘-의 존재’ 꼴을 넣지 않았습니다. 앞 세 군데는 참으로 잘 적었습니다. 아쉽게 마지막 글월에서 어긋났을 뿐입니다.


 사진가 없는 평론가는 있을 수 없다

 사진가 없는 평론가는 나올 수 없다

 사진가 없는 평론가는 생길 수 없다

 사진가 없는 평론가는 이루어질 수 없다

 사진가 없는 평론가는 나타날 수 없다

 …


  퍽 많은 사람들이 덕지덕지 누더기가 되는 얄딱구리한 글을 쓰는 모습을 돌아봅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얼기설기 엉성한 글을 아무렇지 않게 쓰는 오늘날을 곱씹어 봅니다. 느끼지 못하는 삶입니다. 느끼려 하지 않는 삶입니다.


  문득, 사람들이 느끼지 않기로는 말과 글뿐 아니라 이웃사람 삶도 못 느끼지 않나 싶습니다. 이웃사람 눈물과 웃음을 느끼려 하지 않습니다. 자가용을 싱싱 내몰면서 두 다리와 자전거로 이 땅을 디디는 여린 사람들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습니다. 돈없는 사람이 많으나 돈있는 사람도 넘쳐, 서로서로 금이 그인 자리에서 갈갈이 쪼개어진 채 어깨동무를 못합니다. 동무요 이웃이요 식구가 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예 남남이 되어 악다구니처럼 치대거나 내치기만 할 뿐입니다.


  메마른 삶이 되면 메마른 말이 되고, 맑고 밝은 삶이 되면 맑고 밝은 말이 되는데, 이 흐름을 고이 받아들이며 아끼려는 사람이 아직 퍽 드뭅니다. 착한 마음일 때 착한 생각으로 이어지면서 착한 생각과 착한 삶과 착한 말로 뿌리내리는데, 이러한 줄기를 맞아들이며 사랑하려는 사람이 아직 너무 적습니다.


  사람들이 착한 말을 쓰고 맑은 말을 쓰며 아름다운 말을 쓸 수 있기를 꿈꿉니다. 사람들이 착한 삶에서 비롯하는 착한 말을 쓰고, 맑은 삶에서 비롯하는 맑은 말을 쓰며, 아름다운 삶에서 비롯하는 아름다운 말을 쓸 수 있기를 빌어 봅니다. 4342.8.17.달.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평론가 없이 사진가는 있을 수 있지만, 사진가 없는 평론가는 있을 수 없다


“없는 것이다”는 “없다”나 “없다 하겠다”로 다듬어 줍니다.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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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뛰놀도록 하는 마음



  아이들이 뛰놀도록 하려면 걸림돌이 없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뛰놀 곳에는 자동차가 없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뛰놀 자리에는 지뢰밭도 철조망도 군부대도 없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뛰놀 터에는 경찰도 공무원도 교사도 없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뛰놀 들에는 풀과 나무가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뛰놀 숲에는 싱그러운 바람이 불고 따사롭게 햇볕이 내리쬐어야 합니다.


  커다란 공장이나 발전소가 있더라도 아이들은 뛰놉니다. 아이들 마음이 그렇습니다. 아이들은 어디에서나 뛰놀고 싶습니다. 폭탄이 퍼붓는 곳에서도 아이들은 뛰놉니다. 아이들 마음이 그렇습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뛰놀고 싶습니다.


  학교에서 시험으로 다그쳐도 아이들은 뛰놉니다. 아이다움을 잊고 애어른이 되고 마는 아이들은 시험으로 다그치면 그만 놀지 못해요. 주눅이 들어요. 그러나, 아이다움을 곱게 건사하는 아이들은 시험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뛰놀 생각을 합니다.


  빈터에 선 자동차는 몹시 그악스럽습니다. 아이들은 가만히 선 자동차 때문에 놀이터를 빼앗깁니다. 풀이 돋고 나무가 자랄 빈터를 주차장으로 삼으려는 어른은 몹시 끔찍합니다. 아이들은 빈터를 빼앗는 어른 때문에 숨을 못 쉽니다.


  아이들은 공원이나 놀이터만 가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집과 마을에서 놀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층집에서 살더라도 방방 뛰고 구를 수 있어야 합니다. 방방 뛰거나 구를 수 없도록 만드는 층집이라면, 이런 층집이 몇 억을 하든 참말 값어치가 없습니다. 아이들이 놀 수 없도록 만드는 층집에서 왜 어른들은 살림을 꾸리려 할까요? 어른들은 왜 자꾸 ‘아이들이 놀 수 없는 집’을 부동산으로 장만하려 할까요?


  어른이 일터로 가는 길이 멀지 않아야 할까요. 어른은 얼마든지 이리저리 일터를 찾아갈 수 있어요. 어른에 앞서 아이를 헤아려, 아이가 즐겁고 기쁘며 스스럼없이 뛰놀 수 있는 보금자리를 장만할 노릇입니다. 아이가 맑은 바람을 마시고, 아이가 싱그러운 물을 마시며, 아이가 포근한 햇볕을 누릴 데로 보금자리를 마련할 노릇입니다.


  아이들이 즐겁게 뛰노는 곳이 바로 우리가 즐겁게 살아갈 곳입니다. 아이들이 기쁘게 노래하는 곳이 곧 우리가 기쁘게 살림을 가꾸는 곳입니다. 아이들이 스스럼없이 뒹굴거나 구르는 곳이 곧바로 우리가 스스럼없이 꿈꾸고 사랑을 속삭이는 곳입니다. 몇몇 곳에 공원을 따로 짓는 도시에서 벗어나기를 빌어요. 모든 집과 마을이 공원처럼 푸르고 싱그러우며 조용하기를 빌어요. 시골에서는 농약물결이 사라져서 아이들이 아무 풀밭에서나 드러눕거나 뒹굴 수 있기를 빌어요. 모든 시골과 들과 숲이 아름답게 빛날 수 있기를 빌어요. 4347.5.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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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책도서관 함께살기> 이야기책 14호를 내놓는다.

이주와 다음주에 도서관 지킴이한테 부친다.


도서관 지킴이가 아닌 분도 볼 수 있도록

pdf파일을 붙인다.


즐겁게 누리시기를 빈다.


그런데, 알라딘서재에서는 파일올리기가 안 되니,

파일을 내려받을 수 있는 주소를 붙인다.


http://cafe.naver.com/hbooks/12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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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닷 Photo닷 2014.5 - Vol.6
포토닷(월간지) 편집부 엮음 / 포토닷(월간지) / 2014년 4월
평점 :
품절






찾아 읽는 사진책 164



사진이 찾아와서 빛이 될 때

― 사진잡지 《포토닷》 6호

 포토닷 펴냄, 2014.5.1.



  밥을 먹다가 사진을 찍습니다. 함께 밥을 먹는 아이들 손빛이 곱구나 하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마실을 다니면서 사진기를 목에 겁니다. 내 손은 둘이니 왼손에 큰아이를 잡고 오른손에 작은아이를 잡습니다. 사진기를 목에 걸지 않으면 사진기를 갖고 다닐 수 없으며, 사진기를 목에 걸어야 아이들과 마실을 다니면서 아이들이 까르르 웃고 뛰노는 모습을 그때그때 찍을 수 있습니다.


  자전거를 탈 적에도 사진기를 목에 겁니다. 두 아이를 뒤에 태운 자전거를 달리자면 허벅지가 터질 듯합니다. 그렇지만 하루 달리고 한 해 달리며 서너 해 예닐곱 해 꾸준히 달리는 동안 허벅지 힘살이 새로 붙습니다.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우고 마실을 할 수 있도록 기운이 늡니다. 이동안 우리들이 지나가는 아름다운 모습을 틈틈이 건사하고 싶어 한손으로는 자전거 손잡이를 쥐고 다른 한손으로 사진기를 쥐어 찰칵 누릅니다. 자전거를 달리면서 사진을 찍을 때면 늘 지난날이 떠오릅니다. 이 아이들이 우리한테 오기 앞서 나는 신문배달을 하며 살림을 꾸렸어요. 자전거를 몰아 신문을 돌릴 적에 늘 한손으로 자전거 손잡이를 쥐고 다른 한손으로 바구니에서 신문 한 부를 꺼내 허벅지에 대고 탁탁 튕기면서 반으로 접고 또 반으로 접은 뒤 살며시 잡아서 골목집 대문 안쪽으로 휙 던집니다. 어쩌면 나는 ‘사진을 하나도 모르던 지난날’부터 ‘오늘 사진을 즐겁게 잘 찍는’ 훈련을 한 셈인지 모릅니다.




  사진잡지 《포토닷》 6호를 읽습니다. 다달이 나오는 사진잡지가 반갑습니다. 요즈음은 전자책으로 나오는 사진잡지가 여럿 있습니다. 종이책을 받아보는 ‘사진 즐김이’가 퍽 적기에, 돈이 안 된다 하거든요. 이달에도 야무지게 나온 《포토닷》을 펼치니, 첫 이야기는 ‘세월호 사고’를 다룹니다. “현장에서 들은 가장 인상적인 단어는 국가와 ‘기레기(기자 쓰레기)’다 … 기레기라는 말은 여기서 출발한다. 자신들의 사정을 열심히 이야기하고 사진을 찍혀 봐야 언론화 되지도 않고 도리어 정부 방침을 홍보하는 전도된 증거로서 기능한다. 사진에 찍혀 봤다 선동하는 불순 외부세력 또는 종북으로까지 몰리는 상황이다(18∼19쪽/이상엽).” 아, 그 ‘기레기’가 이런 뜻이었군요.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기레기’라는 말을 흔히 쓰기에 ‘기러기’라는 새를 엉뚱하게 부르는 이름인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시골에서 살면서 신문도 방송도 안 보다 보니 이런 말을 영 몰랐습니다.


  그러고 보면 참 그렇습니다. 신문기자나 방송피디는 왜 꾸밈없이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할까요. 신문 지면이 좁을까요. 방송으로 내보내기에는 너무 길까요. 신문 지면이 좁다면 정치꾼 이야기와 스포츠 소식과 주식시세표를 없애면 되리라 느껴요. 우리들 이야기를 싣도록 해야지요. 경제 정책이나 무역 이야기도 덜고, 자동차 광고와 새 손전화 광고도 던 뒤, 신문에 사람들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아야지요.


  세월호 사고 이야기는 앞으로도 신문과 방송에 넘치도록 나오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앞으로 신문과 방송에 어떤 이야기가 넘치도록 나올까요. 참과 거짓을 밝히는 이야기가 나올까요. 대통령이 국무위원 앞에서만 넌지시 ‘사과 발표’를 한다는 이야기를 다룰까요.





  ㅈㅈㄷ으로 일컫는 신문 가운데 ‘중앙일보’에서 일하는 박종근 기자가 찍은 사진을 다루는 글을 읽습니다. 박종근 님은 취재현장에서 ‘취재를 받는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사진으로 찍히는가’를 재미나게 보여준다고 합니다. “박종근은 이 작업을 통해 먼저 신문에 나온 사진과 실제 촬영현장은 다르다는 것 그리고 현실을 비꼬는 듯 드러낸다(35쪽/김소윤).” 신문에 나오는 사진과 현장 모습은 다르다는군요. 그러면, 신문에 나오는 글과 현장 이야기는 얼마나 같거나 다를까요. 신문으로 사람들한테 알리거나 보여주는 이야기는 얼마나 ‘제대로 꾸밈없이 올바르고 알맞게’ 알리거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가요. 박종근 님이 재미난 사진을 찍는 일은 틀림없이 재미나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여러모로 슬픕니다. 왜 재미난 사진을 찍어야 할까요. 왜 신문에 참모습을 싣지 못할까요. 왜 신문은 참된 이야기를 다루려 하지 않을까요. 왜 사람들은 참모습을 안 싣는 신문을 읽을까요. 왜 사람들은 참된 이야기를 안 다루는 신문에 얽매인 채 살아갈까요.


  사진을 찍는 김미루 님이 김용옥 님 딸인 줄 처음 깨닫습니다. 《포토닷》에서 김미루 님 사진을 다루면서 이런 이야기를 곁들이지 않았으면 앞으로도 모르는 채 지냈으리라 생각합니다. 김미루는 김미루이고 김용옥은 김용옥인데, 굳이 두 사람 사이를 밝혀야 했을까 궁금합니다. “다 다르다. 사막의 모습뿐만 아니라 낙타도 다르고 문화도 많이 다르다. 작업의 깊이를 위해 여러 곳을 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얀 사막도 있고 하얀 낙타도 있다. 그리고 낙타마다 성격이 다 다르다 …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인간의 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71, 73쪽/김미루).”


  곰곰이 생각하면, 김미루는 김미루이지만 김용옥과 살아온 나날이 있는 김미루이기도 합니다. 더 넓게 헤아리면 김미루이든 김용옥이든, 또 대통령 아무개이든 저무개이든, 먼먼 옛날부터 한겨레로 살던 이웃이요 동무이며 살붙이입니다.





  남이란 없습니다. 서로 똑같은 ‘나’이고, 나한테서 너를 읽으며 너한테서 나를 읽습니다. 내가 찍는 사진에서 너를 읽고, 네가 찍는 사진에서 나를 읽습니다.


  오진령 님이 열 해만에 새로운 사진책을 선보입니다. 2004년에 《곡마단 사람들》을 선보였고, 2014년에 《짓》을 선보입니다. “사진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때라 사진을 찍으면서 다큐멘터리나 저널리즘을 의식하지 않고 찍었다. 그리고 다큐멘터리 사진가나 기자들과 결정적으로 달랐던 점은 내가 느끼는 감정이 서커스에 대한 애환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열일곱 나에게 서커스는 판타지였고 소우주였다 … 내가 걸어온 길은 변함없고 작업은 언제나 내 옆에 있어 주기 때문이다 … 하루 넘게 운전해서 찾아간 곳을 되돌아오길 몇 번 되풀이하면서 카메라를 내리고 자연을 바라보게 되었다(96, 101쪽/오진령).” 사진이 우리한테 찾아와서 빛이 됩니다. 사진이 우리 마음에 깃들면서 별빛이 됩니다. 사진이 우리 눈을 간질이면서 햇빛이 됩니다. 사진이 사랑을 북돋우며 꽃빛이 됩니다.


  그러니까, “내가 찍는 정물, 인물, 패션 사진 모두 컬러가 어둡고 밝음을 떠나 그 안에는 맑은 ‘나’가 들어가 있다(112쪽/어상선).”와 같은 이야기처럼, 어느 사진에서든 우리들은 또 다른 내 모습을 읽습니다. 꽃을 바라보면서 꽃이 참 곱구나 하고 느끼기도 하고, 이 꽃과 같이 나도 고운 삶으로 사랑을 하면 참 즐겁겠구나 하고 느끼기도 합니다.





  빛이 되는 사진은 나한테도 너한테도 빛이 돼요. 빛이 되는 사진은 우리 삶을 밝히는 숨결이 돼요. 빛이 되는 사진은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길을 활짝 여는 노래가 돼요. “꽃은 그 자체만으로 이미 완성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어 정확하게 묘사만 해도 충분히 예쁜 사진을 얻을 수 있습니다 … 꽃 사진은 살아 있는 생물이 그 대상입니다 … 생명에 대한 애정 없이는 좋은 꽃 사진을 얻을 수 없는 자명한 이유입니다(132쪽/김병권).” 사람도 ‘산 목숨’입니다. 사람을 찍을 적에도 꽃을 찍듯이 ‘살아서 움직이는 목숨’을 찍는 줄 느껴야 합니다. 느끼지 못하면 ‘느낌이 없는’ 사진만 찍어요. 느끼면 ‘느낌이 있는’ 사진을 찍어, 이웃 마음을 건드리겠지요. ‘감동을 빚’겠지요.


  이상엽 님이 진주 팽목항을 다녀오며 쓴 글과 찍은 사진으로 첫머리를 여는 《포토닷》은 조용히 이야기합니다. 기자 아닌 기레기라는 이들은 ‘취재원’을 ‘꽃’처럼 여기지 못했습니다. 꽃과 같은 ‘산 목숨’인 줄 느낄 때에 ‘취재원’이 아닌 ‘이웃’을 만나면서 사진을 찍고 기사를 쓸 수 있어요. 죽은 사람도 아픈 사람도 슬픈 사람도 가까스로 살아난 사람도 모두 우리 이웃이면서 ‘바로 나’인 줄 깨달아야, 비로소 사진기 단추를 눌러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신문사 사진기자가 어느 한 사람을 바라볼 적에 똑같은 눈길이 되지 않습니다. 어느 한 사람을 좋아할 적에 찍는 보도사진하고, 어느 한 사람을 안 좋아할 적에 찍는 보도사진은 어떻게 나올까요? 어느 한 사람을 취재하는 기자가 둘 있을 적에, 어느 한 사람을 잘 아는 쪽하고 잘 모르는 쪽은 서로 어떤 사진을 찍을까요(144쪽/최종규)?” 사랑을 아는 기자와 사랑을 모르는 기자가 똑같이 진주 팽목항에 간다면 저마다 어떤 사진을 찍을까 궁금합니다. 서로를 이웃으로 느끼는 기자와 서로를 이웃으로 안 느끼는 기자가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취재한다면 저마다 어떤 기사를 쓸까 궁금합니다.


  사진은 우리한테 빛으로 스며들 수 있습니다. 사진은 우리한테 어둠으로 드리울 수 있습니다. 사진은 우리한테 빛을 선물할 수 있습니다. 사진은 우리한테 어둠으로 손목을 죄거나 발목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사진은 무엇입니까? 사진으로 무엇을 읽습니까? 사진으로 무엇을 찍습니까? 4347.5.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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