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룬다



함께 느끼며

걷고

생각하는


이웃이 있기에

이웃걷기를 하면서


서로를 가로지르며

다시 만나며

빛을 이루네



4347.6.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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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귀 책읽기



  ‘사마귀’라 하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숲과 풀에서 살아가는 목숨인 사마귀가 있어요. 둘째, 사람 몸에 돋는 사마귀가 있어요. 나는 어릴 적부터 나도 잘 모르게 사마귀를 늘 떠올렸고 마음에 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나는 모릅니다. 다만, 느낌과 마음으로 늘 사마귀가 함께였어요.


  내 동무들은 개미를 쳐다보며 몇 시간이고 쪼그려앉아서 노는데, 그러니까 서너 살 적이든 예닐곱 살이든 아홉 살이나 열 살이든 이러했는데, 나는 사마귀를 볼 적에 몇 시간이고 하염없이 보냅니다. 사마귀를 찍은 사진이나 그림을 보면 발길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나한테 사마귀가 아주 대단하게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스물다섯 살 즈음이지 싶은데, 내 오른손등에 ‘사마귀’가 찾아왔습니다. 처음에는 하나였는데, 왜 내 손등에 사마귀가 생겼나 하고 자주 들여다보니 어느새 둘이 되었어요. 그러다가 셋이 되었고, 한 해쯤 지날 무렵 일곱이 되고, 서른이 되며, 삼백이 되었어요.


  내 오른손등에 돋은 사마귀는 자꾸 번집니다. 내가 자꾸 들여다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들여다보다가 간지럽다고 여겨 긁어서 떼어내려 하니, 이튿날 곱배기로 늘어나고, 어느 날에는 아침에 긁어낸 사마귀가 두 시간쯤 뒤에 짠 하고 다시 태어납니다.


  나는 이태 반을 오른손등과 왼손등에 달고 살았습니다. 게다가, 이 사마귀는 왼어깨와 오른어깨로도 퍼졌고, 왼발등과 오른발등으로까지 뻗었어요. 이러다가 얼굴까지 사마귀가 번질까 하고 걱정하니, 참말 얼굴에도 사마귀가 하나 돋았어요.


  이때에 나는 어떤 마음이 되어야 할까요?


  사마귀로 이태 반을 애먹던 어느 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내내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러고는 옷을 모두 벗었습니다. 팔을 벌리고 고개를 들었습니다. 온몸에 퍼지는 가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숫자를 세었어요. 하나 둘 셋 넷, 처음에는 1초만, 다음에는 10초만, 그런 뒤에 60초만, 이렇게 숫자를 세었어요.


  벌거벗은 몸으로 한 시간쯤 사마귀 간지러움을 참으니, 어느새 사마귀가 더 퍼지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발등에 돋은 사마귀가 사라졌어요. 그 다음 날에는 어깨에 돋은 사마귀가 사라졌어요. 이레째 되니 왼손등 사마귀가 감쪽같이 사라졌어요. 오른손등을 가득 채우고 손톱 밑까지 퍼졌던 사마귀까지 눈에 띄게 사라졌고, 아침과 낮과 저녁 사이에도 줄어드는 모습을 보았어요. 다시 말하자면, ‘사마귀가 줄어든다’고 느끼고 보고 받아들이는 동안 사마귀는 아주 빠르게 사라져서, 꼭 이레를 지나 여드레를 맞이한 때에 오른손등에는 사마귀가 일곱 남았고, 다음날 셋이 되었어요.


  오른손등에 남은 사마귀 셋은 여러 달 남았습니다. 거의 다 사라졌으나, 마지막 세 톨을 놓고, ‘아쉬움’을 생각했어요. 여러 달 뒤 비로소 ‘아쉬움’을 내려놓았고, 내가 볼 것은 내 손등에 돋음 사마귀가 아니라 내 삶인 줄 깨달았습니다. 나는 내 손등에 사마귀가 돋는 줄 쳐다보면서 삶을 아파하거나 괴롭게 여겨야 할 노릇이 아니라, 내 삶을 바라보면서 내 사랑을 찾아야 하는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놀랄 사람은 놀라겠지만, 안 놀랄 사람은 안 놀라리라 느껴요. 내 오른손등에서 사마귀가 모두 사라진 이튿날에, 두 아이를 함께 낳고 돌보며 살아가는 곁님이 나한테 왔습니다. 그리고, 내 곁님이 나한테 온 뒤, 나는 ‘내 삶’을 살짝 엿보기만 할 뿐, ‘보기’로 좀처럼 가지 못했는데, 이제 차근차근 ‘엿보기’가 아닌 ‘보기’로, 내 삶을 스스로 엿보는 마음이 아닌, 내 삶을 그대로 보는 마음으로 갈 때에 내가 나답구나 하고 느낍니다. 그렇습니다. 그렇지요.


  여드름을 없애는 길은 하나예요. 여드름 약이나 수술이 아니에요. 여드름을 안 보아야 여드름이 사라져요. 여드름을 안 보고 안 생각하며 안 건드려야 여드름이 사라져요. 독재정권이 어떻게 사라질까요? 독재정권을 안 보고 안 생각하고 안 건드리면 독재정권은 스스로 사라져요.


  못 믿겠으면 생각해 보면 돼요. 시골에는 ㅈㅈㄷ이라는 신문이 없어요. 왜 없을까요? 시골사람 어느 누구도 ㅈㅈㄷ을 안 보고 안 생각하고 안 건드리기 때문에 ㅈㅈㄷ은 시골에 없어요. 시골에서는 참말 아무도 ㅈㅈㄷ을 말하지 않아요. 시골에서는 ㅈㅈㄷ을 칭찬하지도 않고 비판하지도 않아요. 시골에서는 ㅈㅈㄷ은 이 지구별에 ‘아예 없는 것’입니다. 시골에서 ㅈㅈㄷ은 쓰레기도 아니고 권력자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ㅈㅈㄷ은 커다란 도시에서만, 그리고 서울이나 부산 같은 곳에서만 크게 힘을 떨쳐요. ㅈㅈㄷ이라는 신문이 전남 고흥 같은 시골에서 힘을 떨칠까요? 웃기지 말라고 하셔요. 참말 웃기지도 않지요. ㅈㅈㄷ 가운데 전남 고흥이나 장흥이나 벌교에서 힘을 떨치는 일이 있겠습니까? 아예 없어요. ㅈㅈㄷ은 시골에서 힘도 없지만, ㅈㅈㄷ 기자가 시골에 온들 어떠한 힘도 못 써요. ㅈㅈㄷ 기자들은 시골에 취재하러 와도 늘 ‘문전박대’가 아닌 ‘안 쳐다보는 무시’를 받으니, ‘없는 사람 대접’을 받으니, 아예 시골에는 갈 생각을 안 해요. ㅈㅈㄷ은 오로지 도시에서만 온갖 불춤을 추려고 하지요.


  더 생각해 보셔요. 삼성이든 에스케이이든 엘지이든, 전기를 안 쓰고 조용히 흙을 일구는 시골사람한테 영향을 끼칠 수 없어요. 어떠한 대재벌이나 권력자나 군인이나 정치가라 하더라도, 전기도 책도 가까이 않는 시골사람을 건드리지 못해요. 전기도 책도 가까이 않는 시골사람은 재벌 우두머리이건 대통령이건 군인이건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시에서도 이와 같은 눈길과 마음으로 모든 것을 ‘보’고 생각하고 마음을 다스리면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어요.


  함께 하면 돼요. 함께 ‘볼 것’을 보면서 살면 모두 돼요. 그러나, 스스로 볼 것을 보려 하지 않으면 늘 뒤틀리기 마련이에요.


  내 손등에 돋은 사마귀가 모두 사라지고 나서, 나는 곁님과 두 아이하고 시골에서 살림을 가꾸며, 언제나 풀밭 사마귀를 봅니다. 풀사마귀를 보고, 풀사마귀를 노래하며, 풀사마귀를 그림으로 그리면서 삶을 사랑하려는 길을 꿈으로 품습니다. 4347.6.2.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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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를 믿으시나요?”라 말하는



  오늘 문득 하나를 깨닫는다. 그동안 참 궁금했구나 싶은 이야기인데, 길에서 사람을 붙잡고 “도를 믿으시나요?”라 말하며 붙잡는 사람들은, 지나가는 사람을 아무나 붙잡고 우리가 ‘의식(생각하는 차원)이 무척 높다’고 말한다. 이런 말을 듣고 ‘내 의식이 그렇게 높은가?’ 하고 의심하면서 피식 웃고 지나치는 사람이 있는 한편, ‘그래, 내 의식은 높은지 몰라!’ 하고는 귀를 기울여 이야기를 들으려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무엇이 참일까?


  참은 오직 하나이다. 참이란 무엇인가 하면, 우리는 모두가 ‘의식이 무척 높’다. 그래서, “도를 믿으시나요?”라고 묻는 사람이 길에서 어떤 사람을 붙잡고 묻더라도, 우리는 모든 사람이 의식이 무척 높기 때문에, “도를 믿으시나요?”라 묻는 사람이 하는 말은 다 옳다. 게다가, 이렇게 묻는 ‘기계나 노예나 부속품처럼 종교집단 똘마니’ 노릇을 하는 사람들까지 의식이 무척 높다. 생각해 보라. 의식이 무척 높은 어떤 사람이 더 높은 의식이 되도록 스스로 수행이나 훈련을 하려고 그렇게 길에서 “도를 믿으시나요?”라 물으면서 땀을 흘리기도 한다.


  우리는 하나만 제대로 알고 볼 수 있으면 된다. 우리는 누구나 생각하는 틀이 무척 높다. 우리는 누구나 무척 슬기롭다. 똑똑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뇌 기능 가운데 10%도 안 쓴다’고 하는데, 이 말을 잘 알아들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아직 이녁 뇌 기능 가운데 10%조차 안 쓰면서 모든 일을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100%로 뇌 기능을 다 쓰면 어떤 빛이 될까. 우리가 100%로 힘과 기운과 슬기를 쓰면서 살면, 우리 지구별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평화로울까. 지구에 아직 전쟁이 판치고 경쟁과 제도권과 극우주의와 독재와 자본주의와 막개발과 차별 따위가 넘치는 까닭은 참말 오직 하나이다. 우리들 모두 스스로 뇌 기능을 10%조차 안 쓰면서 쳇바퀴 구르기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어야 한다. 우리는 “도를 믿어”야 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믿으면서 “우리 길을 보고 가야” 한다. 종교집단에 바치는 제물이 아닌, 나를 사랑하는 길로 씩씩하게 슬기로우며 튼튼하게 나아가야 한다. 4347.6.2.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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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랑 놀자 34] 고양이밥



  고양이를 키우는 분들은 고양이한테 고양이밥을 줍니다. 예부터 집집마다 소와 함께 살았기에 ‘소밥’인 ‘소먹이’를 마련했습니다. 돼지는 돼지밥을 먹고, 닭은 닭밥인 닭모이를 먹지요. 바다에서 사는 고래라면 고래밥을 먹어요. 고래처럼 커다란 몸이 아닌 작은 새우라면 새우밥을 먹어요. 풀을 뜯는 염소는 염소밥을 먹고, 노루는 노루밥을 먹어요. 개가 먹는 밥은 개밥이고, 사람이 먹는 밥은 사람밥입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 시골에서 멀어지고 도시로 떠나, 밥을 손수 심거나 길러서 먹지 않다 보니, 시골에서는 일할 사람이 없기도 하고 짐승을 공장과 같은 곳에 잔뜩 가두어서 길러요. 풀 먹는 소한테 풀을 주지 못합니다. 좁은 곳에 수백 수천 마리를 가두어서 기르니, 이 소가 먹을 풀을 마련할 수 없어요. 이제 소는 사료를 먹습니다. 풀이 아닌 사료를 먹어요. 돼지도 닭도 사료만 먹어요. 다시 말하자면 사료를 먹어 온몸이 사료덩이가 된 소와 돼지와 닭을 사람들이 먹는 셈이고, 사료덩이인 소와 돼지와 닭을 먹기에, 사람은 스스로 ‘사료를 만들어 사료를 먹는’ 삶을 누립니다. 4347.6.2.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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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보탑을 줍다 창비시선 240
유안진 지음 / 창비 / 2004년 10월
평점 :
품절




시를 말하는 시 56



시와 숟가락

― 다보탑을 줍다

 유안진 글

 창비 펴냄, 2004.10.15.



  숟가락 하나만 있으면 밥을 먹습니다. 네 식구가 숟가락 하나로도 밥을 넉넉히 먹습니다. 숟가락 하나로 네 사람 입이 즐겁습니다. 서둘러 먹지 않는다면, 넷이서도 숟가락 하나로 얼마든지 기쁩니다.


  숟가락 하나로 밥을 풉니다. 숟가락 하나로 국을 뜹니다. 숟가락 하나로 반찬을 집습니다. 아이들은 숟가락질을 기다립니다. 어른도 숟가락질을 기다립니다. 몸을 살찌우고 새로운 기운을 북돋우는 밥 숟가락을 서로 나눕니다.



.. 나는 늘 사람이 아팠다 / 나는 늘 세상이 아팠다 / 아프고 아파서 ..  (내가 가장 아프단다)



  마실을 다니면서 수저를 챙깁니다. 어른 몫 수저는 따로 안 챙깁니다. 두 아이 수저를 챙깁니다. 집에서 쓰던 수저를 잘 건사해서 가방에 넣습니다. 이웃집으로 찾아갈 적에 이웃집에 아이가 있으면 ‘아이가 쓸 만한 작은 수저’가 있습니다. 그러나, 웬만한 밥집에는 아이가 쓸 만한 작은 수저가 없습니다. 아이를 돌보는 어른이 있거나 눈썰미가 밝은 어른이 있거나 아이를 아끼거나 사랑하는 어른이 있는 바깥밥집이 아니라면, 아이가 쓸 만한 작은 수저를 두지 않습니다.


  더 헤아려 보면, 아이가 쓸 만한 작은 수저를 두는 바깥밥집은 아이가 먹을 만한 덜 짜고 안 매우며 덜 달며 안 시큼한 밥이나 국이나 반찬을 마련합니다. 아이가 쓸 만한 작은 수저를 안 두는 바깥밥집은 어른이 먹을 만한 밥만 차리기 마련인데, 어른 가운데 맵거나 짜거나 달거나 시큼한 것을 못 먹는 사람을 못 헤아리기 일쑤입니다.



.. 벌건 대낮에 도깨비를 기다린다 ..  (도깨비를 기다리며)



  요즈음 아이들은 풀을 잘 못 먹습니다. 왜냐하면 어릴 적부터 풀을 먹어 본 일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젖먹이 아기라면, 어머니가 풀밥을 즐겨먹어야 풀맛을 압니다. 왜냐하면, 풀밥 먹는 어머니한테서는 풀내음이 감도는 젖이 나오거든요. 풀밥을 먹던 어버이는 젖떼기밥을 마련할 적에 풀죽을 쑬 수 있습니다. 풀죽을 쑤는 어버이는 풀물을 갈아서 아이한테 먹입니다. 풀물을 갈아서 먹이는 어버이는 아이와 함께 풀물을 마시고, 날풀을 뜯어서 먹습니다. 아이가 혼자서 수저를 쥐고 밥을 먹을 즈음, 아이는 어버이와 함께 즐거이 풀밥을 먹습니다.


  아이들이 먹는 밥이란 늘 어버이와 먹는 밥입니다. 아이들이 먹는 밥이란 집과 마을과 학교에서 늘 어른들과 먹는 밥입니다. 아이들이라서 밥가리기를 하지 않아요. 모두 어른들이 시킵니다. 아이들이라서 소시지나 과자만 즐기지 않아요. 아이 곁에서 어른들이 소시지나 과자를 즐기니까 아이들 입맛이 달라져요.


  아이들은 숟가락이나 젓가락을 만들지 않습니다. 어른이 숟가락이나 젓가락을 만듭니다. 아이들은 어른이 내민 숟가락이나 젓가락을 받습니다. 어른이 만든 캐릭터 상품을 아이들이 받습니다. 어른이 만든 도시나 시골에서 아이들이 태어나서 자랍니다.



.. 그러나 그는 / 그를 버린 세상 어디서나 핀다 / 태양보다 태양다운 외로움의 이름 / 빈센트 반 고흐 / 는, 해바라기꽃 이름이다 ..  (고흐 꽃)



  어른이 날마다 마시는 바람을 아이도 날마다 마십니다. 어른이 늘 마시는 물을 아이도 날마다 마십니다. 어른이 날마다 보는 바깥모습을 아이도 날마다 봅니다.


  어른이 두 다리로 걷기를 즐기면, 아이도 두 다리로 걷기를 즐깁니다. 어른이 노래와 춤을 즐기면, 아이도 노래와 춤을 즐깁니다. 어른이 맑은 눈망울로 온누리를 따사롭게 바라보는 사랑을 펼치면, 아이도 맑은 눈망울로 온누리를 따사롭게 바라보는 사랑을 물려받습니다.


  아이들은 사랑을 물려받으면서 기쁩니다. 사랑을 물려받으며 기쁜 아이들은 이윽고 새롭게 가꾼 사랑을 이웃한테 돌려줍니다. 꿈을 물려받은 아이들은 꿈을 이웃한테 돌려주고, 웃음을 물려받은 아이들은 웃음을 이웃한테 돌려줍니다.



.. 내 하늘은 이 오두막이야, 우리집이야, 마당 쪽에서 아이들 웃음소리가 까르르 밀려왔지요 ..  (선녀의 선택)



  유안진 님이 빚은 시집 《다보탑을 줍다》(창비,2004)를 읽습니다. 유안진 님은 길에서 다보탑을 줍습니다. 유안진 님은 이녁 아이한테 다보탑을 물려줄 만합니다. 다보탑을 물려받은 아이는 이웃한테 다보탑을 돌려줄 수 있겠지요.


  유안진 님은 이녁 어머니 말씀을 돌이키고, 어릴 적 숟가락을 되새기며, 날마다 늙는 이녁 몸을 곱씹습니다. 이리하여, 이 모든 넋과 숨결이 고스란히 싯말 하나로 태어납니다.


  즐겁게 웃을 적에는 즐겁게 짓는 웃음이 시로 태어납니다. 슬프게 울 적에는 슬프게 짓는 울음이 시로 태어납니다. 삶이 고스란히 시가 되고, 시는 다시 삶이 됩니다. 사랑이 그대로 시가 되며, 시가 다시 사랑이 됩니다.



.. 우물가엔 구기자나 향나무를 심어야, 그윽한 물맛으로 우물과 사람이 함께 편안하다면서, 쓰고 난 물로 토란을 키우셨지 ..  (어머니의 물)



  어떤 삶이 아름다울까요. 아니, 삶을 아름다움으로 나눌 수 있을까요. 이렇게 흐른 삶이라면 아름답고 저렇게 흐른 삶이라면 안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랑이 빛날까요. 아니, 사랑을 빛으로 가를 수 있을까요. 이 사랑이라면 안 빛나고, 저 사랑이라면 빛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유안진 님은 유안진 님대로 웃고 노래하면서 살아온 나날을 시로 그렸으리라 느낍니다. 유안진 님이 바라보고 마주하며 부대낀 대로 찬찬히 노래하고 꿈을 꾸는 하루였으리라 느낍니다. 아무쪼록 마음 가득 평화와 나무 한 그루가 깃들 수 있기를 빕니다. 4347.5.29.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집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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