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들은 월드컵을 보지 않는다


  우리 집 아이들은 세계축구대회라 하는 ‘월드컵’을 보지 않습니다. 지난겨울에 겨울올림픽을 보지 않았으며, 올해에 한국에서 연다는 아시안경기도 보지 않습니다. 이런 운동경기를 보아야 할 까닭이 없고, 이런 운동경기에 마음을 쓸 까닭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뛰놀면서 즐겁습니다. 아이들은 서로 복닥이면서 재미있습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몸을 움직여 놀 때에 즐겁습니다. 굳이 다른 사람 놀이를 구경하면서 ‘숫자(기록)’를 따지거나 ‘이기고 지는 흐름’을 알아야 하지 않습니다.

  2014년에 브라질에서 세계축구대회를 연다고 합니다. 유월부터 경기를 치른다 하고, 아마 이주나 다음주에 첫 경기를 할 테지요. 오늘 몇몇 기사를 찾아서 읽으니, 브라질은 2007년부터 축구경기장을 새로 짓고 주차장과 새 찻길을 닦으려고 20만이 넘는 사람들을 길바닥으로 내쫓는 재개발을 했다고 합니다. 이동안 브라질 정부는 경찰과 군대를 끌어들여 사람들을 두들겨패거나 죽였다고 합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지난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 돌아봅니다. 1984년과 1988년을 앞두고 어떤 철거와 재개발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아프게 하거나 죽였는지 돌아봅니다. 1984년에 앞서는 전국체전을 벌인다면서 전국 곳곳에서 끔찍한 철거와 재개발을 해마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국내 대회’이든 ‘세계 대회’이든 지구별 모든 나라는 경기장을 짓고 주차장과 찻길과 숙소를 마련한다는 핑계를 내세워서 나라살림을 거덜내는 한편, 부동산투기와 토목건설만 일삼습니다.

  요즈음 브라질에서 집회와 시위를 막고 재개발을 밀어붙이는 데에 들이는 군부대와 경찰 숫자가 20만이라고 합니다. 브라질에서 지난 여덟 해에 걸쳐 20만에 이르는 사람들을 이녁 보금자리에서 내쫓았다고 합니다. 어쩜 군부대와 경찰 숫자하고 ‘삶터에서 쫓겨난 사람’ 숫자가 같을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하자면, 군부대와 경찰을 거느리느라 드는 돈을 고스란히 ‘사람들 삶터를 가꾸고 지키는 데에 쓴다’면 나라가 살고 문화가 살며 복지가 꽃피운다는 뜻입니다. 경기장을 짓고 싶으면 경기장을 짓되, 사람들을 함부로 쫓아내거나 괴롭히지 않아도, 얼마든지 돈이 있을 뿐 아니라, 다 함께 즐겁게 살아갈 길이 있다는 뜻입니다.

  군부대와 경찰 20만을 여덟 해 동안 거느리는 돈으로 시골에 땅을 마련해서 ‘삶터에서 쫓겨난 20만’이 새 보금자리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그렇지만 브라질 정부는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한국 정부도 예나 이제나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운동경기에 드리우는 그림자가 이와 같은데, 이런 운동경기를 왜 보아야 할까요. 운동경기를 치른다면서 이웃과 동무를 죽이거나 괴롭히는데, 그저 경기장만 쳐다보거나 방송 화면만 바라보면 될까요. 유월에 논개구리가 노래하는 소리를 들으며 아이들을 재우고 곰곰이 생각에 잠깁니다. 4347.6.1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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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닷 Photo닷 2014.6 - Vol.7
포토닷(월간지) 편집부 엮음 / 포토닷(월간지) / 2014년 5월
평점 :
품절






찾아 읽는 사진책 175


사진은 누구 곁에 있는가
― 사진잡지 《포토닷》 7호
 포토닷 펴냄, 2014.6.1.


  사진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사진은 우리 곁에 없은 적이 없습니다. 사진은 예나 이제나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찍기 때문입니다. 사진은 우리가 살아가는 곳에서 찍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찍든 정물을 찍든, 또는 사진기라는 기계나 필름과 인화지라는 종이만으로 그림을 앉히든, 나 스스로 이곳에서 살기 때문에 ‘사진을 얻’습니다. 오늘 이곳에 없다면 ‘사진을 얻지 못’합니다. 실험실이나 사진관이나 현상실에서 종이와 그림을 만지작거린다 하더라도, 이 모든 곳은 지구별에 있습니다.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엮어서 ‘사진을 만들’더라도 우리 스스로 이곳에서 숨을 쉬고 살아야 합니다.

  사진잡지 《포토닷》 7호를 봅니다. 만드는 사진을 하는 오혜리 님은 “너무나 익숙하고 사소한 일상의 부분들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에서 진정한 삶의 본질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서 시작한 작업이에요. 더 이상 관심 갖지 않는 사물들을 재조립하고 변형시켜 시각적인 충격을 줌으로써 삶의 본질에 대해 끊임없이 물음을 가지게 하는 것이죠(오혜리/31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찍는’ 사진도 ‘만드는’ 사진도 언제나 삶에서 비롯합니다. 삶에서 느끼는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습니다. 삶에서 느끼는 이야기를 ‘찍’거나 ‘만들’거나 사진으로 담습니다.

  삶에서 느끼지 않으면 사진으로 담을 수 없습니다. 삶에서 느끼지 않으면 노래로 부를 수 없어요. 삶에서 느끼지 않는데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사진뿐 아니라 글이나 그림도, 노래나 춤도, 늘 삶으로 느끼기에 나타냅니다.






  사진학과 교수인 이경홍 님은 “사진 전공에서 예술로서의 사진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유럽의 나라들은 유명한 전통 건축물을 사진가들에게 많이 찍어 두게 한다. 그것이 그 나라의 문화와 이미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다큐멘터리는 삶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알고 가는 것과 모르고 가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 사진에서도 원칙을 지키면 디테일이 살아나고, 그 디테일이 창조의 토대가 된다 … 작품보다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예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삶이고, 사진은 삶으로부터 와야 한다(이경홍/87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이경홍 님이 말하는 그대로, ‘어떤 사진’을 찍는다 하더라도 먼저 ‘삶’을 보는 눈을 익혀야 합니다. 내 삶을 보고 네 삶을 봅니다. 우리 삶을 봅니다. 사람이 누리는 삶을 보고, 풀과 나무가 누리는 삶을 봅니다. 짐승과 새와 벌레가 누리는 삶을 봅니다. 지구별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봅니다.

  삶을 보면서 사람과 사랑을 봅니다. 사람과 사랑을 보면서 이야기를 봅니다. 이야기를 보면서 빛을 보고, 빛을 보면서 사진을 봅니다.

  “윤상혁은 처음에 지인의 집을 빌리거나 배우를 섭외해 작업을 진행했지만 장소와 인물 사이의 간격만을 확인했을 뿐이다. 그러다 실제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살아가는 또는 일하는 공간으로 무대를 옮기면서 점차 그 간격은 메워졌다(박정현/42쪽).”와 같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사진은 무엇을 찍을까요. 사진은 무엇을 찍을 때에 빛날까요. 사진은 무엇을 찍어 보여주면서 ‘사진’이라는 이름을 얻을까요.





  그저 찍기에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모델을 얻기에 더 낫다 싶은 모습을 담지 않습니다. 무엇인가 찍으려면 ‘어떤 이야기를 담느냐’ 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사진을 찍을 적에 모델이 있어야 하기보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숨결’이 있어야 합니다.

  삶이 없이 그럴듯한 모습을 찍을 때에는 사진이 되지 않아요. 사람이 없고 숨결이 없이 그럴듯한 빛을 잘 맞춘다 하더라도 사진이 되지 않아요.

  “정우성은 사진을 찍는 중간중간 내 카메라 렌즈를 향해 씩 웃는다. 나는 그 순간에 셔터를 누르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 웃음 속엔 사진가 친구를 향한 신뢰와 애정이 들어 있다(조선희/113쪽).”와 같은 이야기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누가 누구를 찍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이 서로 믿을 수 있으면 넉넉합니다.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 사이에 이야기가 흐를 때에 빛이 흐릅니다.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이 서로 웃고 어깨동무를 할 수 있는 마음일 때에 사진이 태어납니다.

  “모델들은 자신들이 항상 사진 찍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 준비된 자세를 유지하며 쇼를 준비한다. 그래서 점차 나는 무대 뒤보다 패션 하우스 앞에서 일어나는 상황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디나 리토브스키/69쪽).”와 같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모델은 ‘찍히는’ 사람입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찍히는 사람이니 늘 ‘찍히려는 몸가짐’으로 삽니다. 찍혀야 하는 일이고, 찍혀야 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사진 모델’한테는 삶이 무엇일까요. 사진 모델로 살아가는 사람한테서는 어떤 몸가짐이 ‘자연스러운 하루’일까요. ‘준비된 자세’란, 그러니까 ‘빈틈없이 차린 모습’은 안 자연스럽다고 해야 하고, 빈틈이 사라져서 느슨한 모습일 때에만 자연스럽다고 해야 할까요.

  일본에서 사진을 찍는 권철 님은 우토로 사진을 찍기도 했고, 가부키초 사진을 찍기도 햇습니다. 그리고 한센병 환자인 ‘텟짱’을 찍기도 했어요. 권철 님은 “텟짱의 사진을 찍으며 다큐 사진가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하면서 삶에 대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나 자신이 텟짱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던 만큼 이를 기록하고 싶었다(권철/83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아주 마땅한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언제나 삶을 찍기에,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면서 ‘다른 사람 삶’을 느끼고, 다른 사람 삶을 느낄 때마다 새로운 빛을 배워요.

  그러면 사진에 찍히는 사람은 어떠할까요. 사진에 찍히는 사람도 ‘다른 사람 삶’을 바라보겠지요. 사진을 찍는 사람이 어떠한 눈빛과 마음결과 넋으로 다가오려는지를 살피겠지요. 사진을 찍는 사람도 사진에 찍히는 사람한테 ‘삶을 새롭게 느끼거나 배우도록 이끄는 빛’을 보여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기념사진을 찍으려고 손녀를 깔끔하게 차려 입히고 나오셨습니다. 자신은 옷이 지저분하다며 옆으로 비켜서시며 손녀를 크게 찍어 달라고 하시네요(황성찬/127쪽).”와 같은 이야기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손녀를 크게 찍고 싶은 할아버지 마음은 무엇일까요. 사진을 찍는 사람은 ‘할아버지 마음’을 느낍니다. 그러면, 사진에 찍히는 사람은 ‘사진을 찍는 사람 마음’을 어떻게 느낄까요. 어린 손녀가 앞으로 자라고 나서 이 사진을 들여다볼 적에는 ‘사진을 찍어서 준 사람 마음’을 어떻게 헤아리거나 느낄까요.




  하동군 공무원인 조문환 님이 펴낸 사진책 《네 모습 속에서 나를 본다》를 놓고 “빛 하나를 잘 다스려서 ‘빛나는’ 사진을 빚는 일도 즐겁거나 아름답거나 훌륭하다고 느낍니다. 그렇지만 어딘가 아쉽습니다. 사진에 빛만 잘 들어오면 될까 궁금합니다. 사진은 빛으로만 찍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풀도 나무도 꽃도 빛으로는 살아가지 못합니다. 사람도 들짐승도 새도 물고기도 빛으로만 살아가지 않습니다. 빛과 볕과 살을 골고루 누릴 적에 목숨이 싱그럽습니다. 빛과 볕과 살을 함께 먹고 마실 적에 숨결이 푸릅니다. 사진도 빛뿐 아니라 볕을 찬찬히 담아서 포근하거나 따스하거나 살가운 숨결을 건사할 때에 한결 아름답지 않을까요. 사진도 빛과 볕에다가 살을 알뜰살뜰 실어서 즐겁게 노래하고 기쁘게 사랑하는 넋을 나눌 때에 더욱 눈부시지 않을까요(최종규/147∼148쪽).”와 같이 이야기하는 느낌글을 되새깁니다. 사진은 누구 곁에 있을까요? 네 곁에 있을까요, 내 곁에 있을까요. 아니면 우리 곁에 있을까요. 사진은 어떤 빛을 담을까요? 내 눈빛을 담을까요, 네 눈빛을 담을까요. 아니면 우리 눈빛을 담을까요.

  사진을 읽으면서 늘 물음표를 찍습니다. 사진은 무엇인가 하고 스스로 묻는 물음표를 찍고, 사진은 이러한가 저러한가 하고 헤아리면서 물음표를 찍습니다. 오늘은 오늘대로 이곳에서 사진을 한 장 찍고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오늘 누리면서 느낀 사진은 오늘대로 즐겁습니다. 오늘을 보내며 이튿날 새로 맞이하는 하루일 때에는 이튿날대로 새삼스레 즐거우리라 생각합니다.

  날마다 스스로 새로 묻고, 날마다 스스로 새로 말합니다. 언제나 스스로 새로 바라보고, 언제나 스스로 새로 만납니다. 내 곁에 있는 사진을 봅니다. 내 곁에서 숨쉬는 사진을 어루만집니다. 4347.6.1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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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읽는 책 139] 동물원·식물원



  들짐승을 몰아낸 자리에 도시와 동물원.

  들풀을 쫓아낸 곳에 도시와 식물원.

  들과 숲과 보금자리는 어디로?



  동물원이 있어야 할 까닭은 없다고 느낍니다. 들짐승과 숲짐승과 바다짐승을 함부로 잡아들여 돈으로 사고팔면서 쇠창살 우리에 가두는 짓은 멈추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이와 함께 식물원이 있어야 할 까닭도 없다고 느낍니다. 들풀과 숲꽃과 나무를 왜 좁은 곳에 가두어 가지를 휘거나 꺾어야 할까요. 우리가 살아갈 곳은 들과 숲입니다. 사람은 들과 숲에서 모든 짐승과 벌레와 새와 풀과 꽃과 나무와 어우러지면서 함께 사랑을 피울 때에 아름답습니다. 도시를 세우더라도 들과 숲을 밀거나 없애거나 짓밟지 않아야 합니다. 4347.6.1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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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사외보 5-6월호에 실은 글입니다. 어느덧 7월이 되는군요.

마을마다 아름다운 이름과 말이 살아나기를 빌어 마지 않습니다.


..



말넋 28. 마을에서 살아나는 이름

― 모래내, 한가람, 아랫복골, 동백마을



  서울에 ‘모래내’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래내는 서울에만 있지 않습니다. 전북 전주에도 있고, 충북 음성에도 있으며, 인천과 강원 원주에도 있습니다. 아마 전국 곳곳에 크고작은 ‘모래내’가 있으리라 생각해요. 전국 어디에나 냇물이 흐르고, 전국 어디에나 냇가에 모래밭이 있었을 테니까요.


  경남 하동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는 조문환 님은 섬진강을 두루 걸어서 마실한 이야기를 엮어 《네 모습 속에서 나를 본다》(북성재,2013)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 197쪽을 읽다가 “섬진강의 이름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모래가람, 다사강, 사천, 두치강 등으로도 불렀다.”와 같은 대목을 봅니다.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섬진강’은 ‘모래가람’뿐 아니라 ‘모래내’라는 오래된 이름이 있다고 해요. 왜 모래가람이고 모래내냐 하면, 물줄기 흐르는 옆으로 모래가 몹시 곱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가람’은 한자말 ‘강(江)’을 가리키는 옛말입니다. ‘가람’보다 작은 물줄기는 ‘내’입니다. ‘내’보다 작은 물줄기는 ‘시내’예요. 섬진강 물줄기는 넓게 흐르는 데가 있을 테고 좁게 흐르는 데가 있겠지요. 넓게 흐르는 물줄기 둘레에서 살던 이들은 ‘모래가람’이라 가리켰을 테며, 그리 넓지 않다 싶은 물줄기 둘레에서 살던 이들은 ‘모래내’라 가리켰으리라 생각합니다.


  마을살이가 달라 이름이 다릅니다. 마을마다 살림살이가 다르기에 이름을 달리 붙입니다. 같은 꽃과 풀이라 하더라도 고장과 고을마다 다른 삶자락에 따라 이름을 다르게 붙여요.


  서울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물줄기 이름은 ‘한가람’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같은 커다란 도시가 아닌, 서울에서도 논밭 일구는 사람이 많던 지난날에는 서울 한복판을 흐르던 물줄기를 가리켜 ‘한가람’이라 했을 테고, 이 물줄기가 그리 넓지 않게 흐르는 데에서는 ‘한내’라 했겠구나 싶어요. 행정에서는 ‘한강’이라고만 쓰지만 ‘한가람’이라는 이름은 학교나 아파트나 회사에서 두루 씁니다. ‘한내’라는 이름도 여러 곳에서 두루 써요.


  인천에서는 ‘인천’ 말고 ‘어진내’라는 이름을 두루 써요. 춘천에서는 ‘춘천’ 말고 ‘봄내’라는 이름을 두루 씁니다. 행정에서 쓰는 이름이 있더라도, 사람들 마음속에는 오랜 나날 수수하게 붙이며 주고받던 넋이 숨쉬어요. 행정에서 붙이는 ‘율목동’ 같은 이름이 있지만, 이 마을에서 오래 살던 분들은 ‘밤나무골’이나 ‘밤골’이나 ‘밤실’이나 ‘밤말’이나 ‘밤마을’ 같은 이름을 잊지 않아요. 시골에는 ‘밤재’와 ‘밤티재’와 ‘밤티마을’도 있습니다.


  아무튼, 오늘날 서울은 아주 큽니다. 사람도 바글바글 매우 많습니다. 옛날을 돌아보아도 서울은 무척 큰 고을이었지 싶어요. 왜냐하면 옛날에 시골은 더 작았을 테니까요. 옛날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걸어서 서울로 찾아갔어요. 작은 시골에서 다른 작은 시골로 천천히 걸어서 찾아갔고, 이렇게 시골과 시골을 거쳐 서울로 갔습니다. 옛날에는 서울에서도 물줄기를 사이에 두고 나룻배를 타고 건넜습니다. 물줄기 위쪽은 ‘강웃마을’이었고, 강 아래쪽은 ‘강아랫마을’이었습니다. 그러면, 옛날 분들은 ‘가람웃마을’이나 ‘가람아랫마을’이라고 말했을까요? 1500년대나 500년대 무렵 옛사람은 어떤 이름을 썼을까 궁금합니다.


  이제는 ‘강북’과 ‘강남’이라고만 쓰고, 행정에서 붙이는 이름도 이런 한자말뿐입니다. 앞으로 우리들은 이대로 쓰기만 할 수 있습니다. 또는, 앞으로는 새로운 우리 이름을 빚을 수 있고, 오랫동안 쓰던 살갑거나 수수한 이름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어떤 마을이름과 땅이름과 길이름을 생각할 때에 아름다울까요.


  이상국 님 시집 《집은 아직 따뜻하다》(창작과비평사,1998)를 읽는데, 〈방앗간카페에 가서〉라는 시에서 “아랫복골 개울말 루핑집 지붕 위에서 검은 연기가 가락지를 만들며”라는 대목을 봅니다. ‘아랫복골’과 ‘개울말’이라는 이름을 찬찬히 곱씹습니다. 아래쪽에 있대서 ‘아랫복골’이었을 테고, 가까이에 개울이 있는 마을이라 해서 ‘개울말’이었으리라 봅니다. ‘웃복골’이나 ‘가운뎃복골’도 있었을까요. 어쩌면 있겠지요.


  시골에서 살며 해를 보고 바람을 마시며 비를 맞고 달과 별을 누리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인터넷이 널리 뻗어 시골에서도 서울과 부산 이야기를 곧바로 읽을 수 있어요. 거꾸로, 고흥처럼 깊은 시골이나 신안처럼 먼 섬에서 태어나는 이야기를 서울과 부산에서 막바로 살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골에서 살며 종이신문이나 인터넷을 뒤지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서울이나 부산처럼 커다란 도시에서 어떤 일이 터지는지 아랑곳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거꾸로, 커다란 도시에서 사는 이들이 외진 시골이나 먼 섬에서 어떤 이야기가 자라는가를 살피는 일이 드뭅니다. 먼먼 옛날에는 한국이나 조선이나 고려나 고구려나 옛조선 같은 울타리가 아닌 마을살이요 마을노래요 마을빛이었겠구나 싶어요. 흑산도면 흑산도가 나라이면서 마을이요 고장입니다. 강진이면 강진이 나라이면서 마을이요 고장이에요.


  봄이기에 봄맞이 들일을 합니다. 봄이기에 봄맞이 나물을 뜯고 쑥을 캡니다. 봄나물을 먹으면서 봄노래를 부릅니다. 아이들은 봄들을 달리면서 봄놀이를 합니다. 삼월 끝자락과 사월 첫머리에 눈부신 하얀 꽃송이 터뜨리는 들딸기가 있습니다. 매화꽃이 지면서 앵두꽃이 피고, 앵두꽃이 지면서 딸기꽃이 피어요. 딸기꽃이 지면? 찔레꽃이 피면서 딸기알이 빨갛게 익습니다. 사월 끝물부터 바야흐로 딸기철이 되어 들과 숲을 누비면서 손과 입술이 빨갛게 되도록 배를 채워요.


  우리 식구 살아가는 시골은 ‘동백마을’입니다. 왜 동백마을일까 살짝 궁금하지만, 집집마다 동백나무가 으레 있어 새봄에 동백꽃이 환하게 피어나니 동백마을이라 할 만하다고 느낍니다. 다만, 동백나무는 우리 마을에만 있지 않아요. 이웃 여러 마을에도 많고 다른 고장에도 많아요. 동백섬이 있고 동백골이 있습니다.


  어여쁜 이웃 여러 마을을 떠올립니다. 배골, 능금골, 복사골, 진달래골, 박골 …… 냇물 노래와 꽃내음과 숲빛을 담는 마을은 얼마나 고운 이름이 될까 그려 봅니다. 4347.4.10.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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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랑 놀자 37] 바뀐 날씨



  날씨가 바뀝니다. 해마다 꽃이 일찍 피고, 해마다 더위가 일찍 찾아오면서 늦게 끝납니다. 해마다 봄가을이 줄어들면서 여름겨울이 늘어납니다. 해마다 소나기가 사라지는 한편, 막비가 나타나요. 여름과 가을을 흔들던 거센 비바람이 한국에 찾아오는 일이 드물면서, 때 아닌 비바람이 찾아들곤 합니다. 예부터 네 철이 뚜렷하던 날씨였으나, 시나브로 철을 잃거나 잊는 날씨로 바뀝니다. ‘바뀐 날씨’예요. 그런데, 어른들은 바뀐 날씨를 안 느끼거나 못 느낍니다. 어른들은 바뀐 날씨를 바로잡으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바뀐 날씨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아이들은 마당이나 골목이나 들에서 놀지 못하면서 학교나 학원에 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면서 학문과 정치로 ‘기후변화(氣候變化)’를 말하거나 따져요. 몸으로 ‘바뀐 날씨’를 느끼지 못하면서 머리로 ‘바뀐 날씨’를 어떻게 맞아들일까요. ‘제철 날씨’가 사라지는 흐름을 읽지 못하면서 학문과 정치로만 ‘기후변화’를 이야기하면 우리 삶터를 어떻게 바로세울 수 있을까요. 4347.6.1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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