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숭아꽃 책읽기



  봉숭아꽃은 어디에서나 본다. 도시에서도 시골에서도 아주 쉽게 본다. 도시에서는 흙이 거의 없지만, 봉숭아씨는 조그마한 틈바구니를 찾아서 깃들고는 어른 손가락보다 굵은 줄기를 올려 예쁘게 꽃송이를 피우곤 한다.


  일산 할머니 할아버지 밭자락에서 피어나는 온갖 봉숭아꽃을 바라본다. 울긋불긋 봉숭아꽃이 곱다. 봉숭아잎을 따서 잘 빻은 뒤 아이들 손가락에 얹어도 고운 물이 들고, 그저 물끄러미 봉숭아꽃을 바라보면서 눈망울에 꽃빛을 담아도 고운 숨결이 흐른다.


  마음에 꽃빛을 담는 사람들은 꽃과 같은 넋으로 하루를 일군다. 마음에 잎빛을 담는 사람들은 잎과 같은 얼로 하루를 짓는다. 마음에 나무빛을 담는 사람들은 나무와 같은 마음으로 하루를 가꾼다.


  내 마음에는 어떤 빛이 스며들면 즐거울까. 나는 어떤 빛을 가슴에 담으면서 오늘 하루를 누리려 하는가. 오늘은 비가 멎을까. 오늘은 아이들과 자전거 나들이를 떠날 수 있을까. 4347.7.18.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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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꽃은 옅은 가지빛


  모과꽃을 보면서 모과알을 떠올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가지꽃을 보면 가지알을 떠올리기 쉽다. 오이꽃을 볼 적에도 오이는 쉬 떠오른다. 감꽃을 보면? 감꽃을 보아도 감알을 쉬 떠올릴 수 있다.

  가지꽃을 바라본다. 굵다랗게 맺는 가지알 곁에서 새롭게 피는 가지꽃을 본다. 다른 남새도 이와 비슷한데, 남새꽃은 한꺼번에 피어나지 않는다. 차근차근 피어난다. 한쪽에서 굵게 열매를 맺으면 비로소 꽃망울을 터뜨리기도 하고, 열매를 한참 따고 난 뒤에야 천천히 꽃망울을 터뜨리기도 한다. 남새를 심어서 돌보는 사람들 사랑을 받으면서 차근차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나누어 준다. 두고두고 즐겁게 먹으라는 뜻으로 소담스러운 알을 꾸준히 내놓는다.

  가지꽃빛은 옅은 보라빛이라 할 수 있겠지. 그리고, 보라빛을 가리켜 가지빛이라 할 수 있겠지. 어느 쪽이든 즐겁다. 가지를 먹으며 가지내음을 맡고, 가지꽃을 바라보며 가지빛을 누린다. 4347.7.18.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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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꽃 보드라운 잎사귀


  보드랍지 않은 꽃잎이 있을까. 봉오리를 벌린 꽃잎을 만질 적에 보드랍지 않다고 느낀 적은 거의 없지 싶다. 잎과 꽃은 사뭇 다른 결로 태어난다고 느낀다.

  콩은 갈래가 아주 많다. 그리고, 콩꽃도 가짓수가 참 많다. 콩마다 꽃이 다르고, 다 다른 콩마다 다 다른 빛으로 보드라운 잎사귀를 내놓는다. 콩을 심는 까닭은 콩꽃을 보려는 뜻이 아니라, 콩알을 얻으려는 뜻이다. 그렇지만, 콩알을 얻기 앞서 만나는 콩꽃은 여름날 무더위를 식힐 만큼 싱그러우면서 맑다. 예부터 콩을 심어 알을 얻던 사람들은 콩꽃을 누리고 콩잎을 함께 먹으면서 여름철에 싱그러우면서 맑은 숨결을 함께 받아들였겠다고 느낀다.

  손수 심어서 기르는 곡식과 열매란 얼마나 아름다울까. 사람들 누구나 스스로 씨앗을 심어서 곡식과 열매를 얻을 수 있으면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어른도 아이도 종이책을 손에 쥐기보다는 씨앗을 손에 쥐면 참으로 듬직하리라 느낀다. 어른도 아이도 학교에 다니기보다는 씨앗이 싹을 틔워 올리는 줄기를 바라보고 잎사귀를 쓰다듬다가 한 잎 톡 따서 냠냠 씹으면 더없이 튼튼한 몸과 마음이 되리라 느낀다. 4347.7.18.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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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한 사람이 읽는 책


  날마다 신문이 나옵니다. 신문은 날마다 온갖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신문을 읽는 사람은 날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얻습니다.

  날마다 아침이 밝습니다. 동이 트는 하늘은 갖가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아침저녁으로 노래하는 새와 풀벌레는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를 나누어 줍니다. 하늘과 해와 구름을 보면서, 또 새와 풀벌레와 개구리가 들려주는 노래를 들으면서, 날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얻습니다.

  새로운 이야기는 신문에도 있지만, 나무 한 그루한테도 있습니다. 새로운 이야기는 텔레비전을 켜서 보는 방송에도 있지만, 풀 한 포기한테도 있습니다.

  해마다 오월이면 붓꽃을 누립니다. 우리 집 마당에서도 붓꽃을 보고, 마을 어귀에서도 붓꽃을 봅니다. 노랗게 봉오리를 올리기 앞서 푸른 잎사귀만으로 붓꽃인 줄 알아차리는 사람은 드물지만, 우리 집 마당에서 자라는 붓꽃을 늘 쳐다보니, 다른 데에서도 여린 줄기와 꽃대와 씨방을 볼 적에도 붓꽃인 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장미는 붓꽃이 피고 질 무렵 천천히 봉오리를 벌립니다. 소담스러운 봉오리를 볼 때마다 언제나 놀랍니다. 이 가느다란 줄기에서 어쩜 이렇게 커다란 꽃송이를 내놓을 수 있니.

  장미꽃이나 동백꽃은 꽤 오랫동안 꽃내음을 베풉니다. 그리고, 어느새 톡 떨어집니다. 꽃이 지고 난 장미나무나 동백나무는 썰렁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무는 꽃을 피우려고 자라지 않아요. 줄기를 힘차게 올리고, 잎사귀를 푸르게 벌리면서, 한결같이 푸르면서 싱그러운 바람을 내뿜으면서 자랍니다. 꽃은 꽃대로 볼 만한 나무이면서, 꽃이 없을 적에는 잎사귀와 가지와 줄기를 기쁘게 노래하는 나무라고 느낍니다.

  아마 백만 사람은 나무한테서 꽃을 읽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주 많이 읽히는 책이란, 꽃과 같은 숨결이리라 느낍니다. 꽃이 아닌 잎사귀나 줄기나 가지나 뿌리를 읽는 사람도 있어, 어떤 책은 백 사람이 읽거나 천 사람이 읽곤 합니다. 때로는 열 사람이나 한 사람이 읽는 책이 있어요.

  널리 사랑받는 책이라면 널리 꽃내음을 나누어 준다고 할 만합니다. 깊이 사랑받는 책이라면 깊이 푸른 바람을 나누어 주지 싶습니다.

  사진가 이상엽 님이 선보인 《최후의 언어, 나는 왜 찍는가》(북멘토,2014)라는 책을 읽다가 “구럼비 해군기지 공사장을 따라 이렇게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장벽이 세워져 있다. 팔레스타인 분리 장벽을 세운 이스라엘을 욕하다가 우리 땅에서 이런 풍경을 본다(64쪽).”와 같은 대목을 곰곰이 새깁니다. 그렇지요. ‘분리 장벽’은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있습니다. 아니, 한국에서는 꽤 예전부터 ‘분리 장벽’이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전국체전을 할 적마다 중앙정부와 지역정부에서 ‘골목집 많은 동네’ 앞에 높다랗게 울타리를 세웠습니다. ‘보기 안 좋다’고들 했습니다. 1986년과 1988년을 앞두고는 참으로 많은 골목동네가 깡패와 전투경찰과 공권력 주먹질에다가 군화발에 사라졌습니다. 제주섬에 만든다는 해군기지 때문에 또 ‘높다란 울타리’가 생긴다는데, 나는 내 고향 인천에서도 ‘높다란 울타리’를 여러 해 보았어요. 지난 2006년이었는데, 작은 사람들이 모여 이룬 작은 골목동네 한복판에 인천시청에서 너비 70미터에 이르는 산업도로를 내려고 몰래 토지수용을 했고 몰래 철거까지 마쳤어요. 뒤늦게 산업도로 계획을 알아낸 ‘남은 동네사람’이 이를 반대하려고 했지만 힘이 닿지 않았는데, 산업도로 계획을 반대하는 동네사람이 늘고 또 늘어나니, 인천시청에서 한 일은 높다란 울타리 세우기였습니다.

  사진가 이상엽 님은 “한국 사진가의 위안부 할머니 사진이 정작 한국 사진계에서 외면당하는 현실. 차라리 이것이 자본의 문제라면 사진가들은 사회적 다큐멘터리를 하고 있다는 자신의 의무도 책임도 명예도 내려놓아야 할 지경이다(142∼143쪽).” 하고 덧붙입니다. 한국사람이 찍은 한국 이야기를 정작 한국 사진가들이 등을 돌린다고 해요. 그래요, 그렇지요. 그런데 말이에요, ‘성노예로 고단한 삶을 보내야 했’던 할머니들 이야기는 1980년대가 저물고 1990년대가 찾아올 무렵부터 비로소 불거졌어요. 이때에 이 할머님들을 만나서 사진을 찍고 말씀을 들으며 한국과 지구별에 이 이야기를 알리려고 한 사진가는 매우 드뭅니다. 사진가뿐 아니라 지식인도 퍽 드물었고, 사진가와 지식인뿐 아니라 초·중·고등학교 교사와 대학 교수 또한 이러한 이야기에 그닥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여느 사람들도 이녁 삶이 바쁘다고 하면서 이 이야기를 귀여겨들으려 하지 않았어요.

  사진가만 탓할 일은 없다고 느껴요. 사진가를 탓하기 앞서 이 나라 얼거리가 뒤틀렸어요. 뒤틀린 나라에서 학교를 다니고 학문을 하며 이것저것 배운 사람들이 뒤틀린 몸짓으로 뒤틀린 일을 하는 모습은, 어쩌면 매우 마땅한 흐름일 수 있어요. 어릴 적부터 아름다움을 못 보고 자랐으니까요. 어린 날부터 사랑스러움을 못 느끼며 컸으니까요.

  입시지옥인 한국 초·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이웃을 이웃으로 여기지 않는 몸가짐이 배는 아이들입니다. 입시지옥이 끝나고 대학교에 다니더라도 취업지옥이 기다리기에, 다시금 동무를 동무로 삼지 않는 매무새로 젖어드는 아이들입니다. 언제나 점수따기에 숫자싸움만 하던 아이들이 ‘몸뚱이만 어른이 되’어요. 피가 튀기는 싸움터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아’서 기자가 되거나 사진가가 되는 아이들입니다. 이 아이들은 무엇을 볼 수 있을까요. 이 아이들은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요. 이 아이들은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이상엽 님은 “사진기자들은 경쟁하듯 문제 있는 사진을 찍어 전송하고 이는 무분별하게 지면화되고 있다. 이들 대다수 기자의 심리에는 공리주의가 도사리고 있다(242쪽).” 하고 덧붙입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헤아려 봅니다. ‘공리’란 무엇이고 ‘공리주의’란 무엇일까요. 한국말사전을 살피면, ‘공리주의’를 “(1) 모든 일에 개인의 공명(功名)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경향이나 태도 (2) 행위의 목적이나 선악 판단의 기준을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증진시키는 데에 두는 사상”으로 풀이합니다. 사진기자뿐 아니라, 대통령과 시장과 군수와 교장과 교감을 비롯해, 여느 어른과 아이 모두, ‘내 밥그릇’이 아닌 ‘우리 마을’을 헤아리도록 하자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읽을 책은 어떤 책일 때에 아름다울까요. 우리가 쓸 책은 어떤 책일 때에 사랑스러울까요. 백만 사람을 섬기는 일이 한 사람을 망가뜨리려 한다면? 한 사람을 섬기려 하면서 백만 사람을 짓밟는다면?

  나무와 같은 책이 되고, 열매와 씨앗과 같은 책이 되며, 꽃과 잎사귀와 같은 책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4347.7.18.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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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살아온 나이



  쉰 해를 살아온 책이 있고 오백 해를 살아온 책이 있다. 열다섯 해를 살아온 책이 있고 다섯 해를 살아온 책이 있다. 나는 어느 책을 골라서 읽는가? 나는 어느 책에 눈길을 두면서 가만히 바라보는가?


  오백 해를 묵은 책이 있대서 그 책을 바라볼 일은 없다. 오천 해를 묵은 책이 있대서 그 책을 쳐다볼 일은 없다. 나는 내가 바라볼 책을 본다. 내가 바라볼 책은 내 마음을 움직이는 책이다. 내가 쳐다볼 책은 내 마음을 건드려 내가 스스로 생각을 열어젖히도록 이끄는 책이다.


  책이 살아온 나이는 얼마나 대단할까 생각해 본다. 아무래도, 오백 해나 천 해쯤 묵은 책이 있다면 여러모로 값어치가 있으리라. 그런데, 나이값으로 헤아리는 값어치 말고, 무슨 값어치를 헤아리면 즐거울까? 이를테면 《월간조선》이나 《한겨레21》 같은 잡지도 앞으로 오백 해쯤 묵으면 대단한 값어치가 있는 책으로 여겨도 될까? 모든 시집과 소설책을 앞으로 천 해쯤 묵혀 대단한 값어치가 있다고 내세워도 즐거울까?


  어느 책은 오백 해가 아닌 다섯 해가 흘러도 빛이 난다. 어느 책은 다섯 해가 아닌 닷새가 흘러도 빛이 난다. 어느 책은 열다섯 해가 흐르거나 천오백 해가 흐르더라도 빛이 안 난다.


  책은 ‘나무를 베어 얻은 종이’라는 껍데기보다, ‘종이를 묶어서 빚은 이야기꾸러미’라는 속살로 따진다고 느낀다. 이야기를 읽으려고 책을 장만한다. 이야기를 나누려고 책방을 열고 도서관을 꾸린다. 이야기를 물려주려고 책을 읽어 아이들한테 조곤조곤 노래를 부른다.


  읽을 책을 읽으면 된다. 사라질 책은 없다. 종이가 바스라지는 책은 흙으로 돌아간다. 흙으로 돌아간 책은 나무 한 그루가 새롭게 자라도록 돕는 밑거름이 된다. 나무 한 그루가 새롭게 자랐으면 고맙게 베어서 새로운 책을 즐겁게 엮는다. 4347.7.17.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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