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나 동화를 쓰는 어른들은 왜 아이들한테 ‘아버지·어머니’라는 한국말을 슬기롭게 안 가르칠까 궁금하다. 가만히 보면, 아이들한테 아무 말이나 읊지 않으면서 어른 스스로 말삶을 새롭게 가꾼다. 아이들한테 아무 밥이나 먹지 않으면서 어른 스스로 밥삶을 새롭게 돌본다. 아이들한테 아무 옷이나 입히지 않으면서 어른 스스로 옷삶을 새롭게 추스른다. 아이들과 아무 마을에서나 살지 않으면서 어른 스스로 집삶을 새롭게 일군다. 아이들하고 읽을 동시와 동화란 무엇일까. 《아빠를 딱 하루만》은 아버지를 일찍 여읜 아이 눈높이에서 아픔과 슬픔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런데, 일찍 죽거나 늦게 죽거나, 몸은 여기에 없어도 마음은 언제나 함께 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아버지와 어머니하고 똑같다. 지구별 수많은 이웃과 동무도 어머니하고 아버지하고 똑같다. 조금 더 마음을 기울여서 썼다면, 놀라우면서 여러모로 아름다운 동시가 되었으리라 느끼지만, 아주 큰 대목을 건드리거나 짚거나 살피지 못한다. 가볍게 살펴도 나쁘지는 않지만, 가볍게 살피면 늘 모두 똑같다. 4347.8.1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한 줄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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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를 딱 하루만
김미혜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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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그림을 그리기



  학교에서는 ‘미술’이라는 수업을 할 적에만 그림을 그릴 수 있다. 학교에서는 ‘체육’이라는 수업을 할 때에만 뛰놀 수 있다. 학교에서는 학교대로 가르치거나 배우는 이야기가 있기에, 이러한 틀에 따라서 움직이도록 시킨다. 학교 얼거리가 좋거나 나쁘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다만, 학교는 시키는 대로 몸을 움직이고 마음을 쓰도록 시킨다.


  집에서는 언제나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낮이고 밤이고 가릴 까닭이 없다. 스스로 그리고 싶을 때에 그림을 그린다. 스스로 마음이 샘솟을 적에 그림을 그린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때에 아름답거나 즐거울까. 남이 하라고 시킬 때에 하면 아름답거나 즐거울까. 스스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하고 찾으면서 길을 열 적에 아름답거나 즐거울까.


  내 그림을 누군가 널리 알아보면서 높은 값을 치러 사들여 주면, 내 그림이 아름답거나 즐거운가? 내 그림을 나 스스로 즐겁게 바라보면서 누릴 수 있으면, 내 그림이 아름답거나 즐거운가?


  남이 읽으라고 하는 책을 읽을 때에 아름답거나 즐거운가? 사람들이 많이 본다는 영화를 나도 따라서 볼 때에 아름답거나 즐거운가? 사람들이 도시에 많이 몰려서 일자리를 찾으니까, 나도 사람들 따라 도시로 가서 일자리를 얻어 돈을 많이 벌도록 마음을 기울여야 아름답거나 즐거운가? 4347.8.1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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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말을 한국말로 번역하기> 원고를

어젯밤에 드디어 끝내고 
출판사로 보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서 읽은 책에
'가족'이라는 한자말이 나온다.

이런, 이 한자말은 이 원고에 안 넣었잖아?
어떻게 할까 한참 망설인다.

망설인 끝에 글을 더 써서 넣기로 한다.
그런데, 아침을 차리려고 부엌을 오가면서
살짝 들춘 책에 또 '가족'이라는 한자말이 나온다.

잇달아 글 몇 꼭지를 부랴부랴 보탠다.
히유 하고 숨을 돌린다.
이제 더 안 나타나겠지?

앞으로 더 나타날 얄궂고 알량한 말은
다음에 내놓을 책에 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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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량한 말 바로잡기

 (1622) 가족 3


우리 가족은 아빠, 엄마, 나 이렇게 세 식구입니다

《나카가와 치히로/홍성민 옮김-천사는 어떻게 키워요?》(동쪽나라,2005) 22쪽


 우리 가족은

→ 우리 집은

→ 우리 집안은

→ 우리는

 …



  보기글은 여러모로 안타깝습니다. 짧은 글월 첫머리에 ‘가족’이라 적은 뒤, 짧은 글월 끝자락에 ‘식구’라 적습니다.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일까요? 앞뒤에 적은 한자말을 바꿔서 “우리 식구는 아빠, 엄마, 나 이렇게 세 가족입니다”라 적을 수도 있으리라 느껴요. 이렇게 적으나 저렇게 적으나 똑같습니다. 둘 모두 똑같이 알량합니다.


  우리 집에 몇 사람이 있는가 말하려 하면 “우리 집”이라 하면 됩니다. 우리 집안에 어떤 사람이 있는가 밝히려 하면 “우리 집안”이라 하면 됩니다. 우리는 누구인지, 내 곁에 누가 있는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으로 누가 있는지, 이 집에서 함께 지내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주려면 “우리는”이라 하면 됩니다. 4347.8.17.해.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우리 집은 아버지, 어머니, 나 이렇게 셋입니다


‘아빠, 엄마’는 아기가 쓰는 말입니다. 예닐곱 살 즈음 되면, 좀 늦다면 여덟아홉 살 즈음이라면, ‘아버지, 어머니’로 바로잡을 말입니다. 아기처럼 귀여움을 떨면서 가끔 이런 말을 쓸 수 있으나, 여느 때에는 ‘아버지, 어머니’로 알맞게 쓸 노릇입니다.


..



 알량한 말 바로잡기

 (1620) 쾌적


쾌적한 환경을 찾아서

《서한태-쾌적한 환경을 찾아서》(도요새,2014) 책이름


 쾌적한 환경

→ 맑고 좋은 삶터

→ 시원하며 아름다운 터

→ 좋은 터전

→ 아름다운 마을

 …



  한자말 ‘쾌적(快適)하다’는 “상쾌하고 즐겁다”를 뜻한다고 합니다. 한국말사전을 뒤적여 ‘상쾌(爽快)하다’를 찾아보면, “느낌이 시원하고 산뜻하다”를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쾌적하다’는 “시원하고 산뜻하며 즐겁다”를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환경(環境)’은 한자말입니다. 이 낱말은 “(1) 생물에게 직접·간접으로 영향을 주는 자연적 조건이나 사회적 상황 (2) 생활하는 주위의 상태”를 뜻한다고 합니다. “교육 환경”이나 “환경을 보호하다”나 “환경 파괴”나 “환경 미화” 같은 자리에서 씁니다.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시원하고 산뜻하며 즐겁다면, 어떤 느낌일까요? 아마 누구라도 ‘좋다’고 느끼리라 생각합니다. 좋으면서 ‘아름답다’고 느끼리라 생각합니다. “환경을 보호”한다고 할 적에는 무엇을 지킨다는 뜻일까요? 틀림없이 “숲을 지킨다”고 하겠지요. “환경 파괴”란 바로 “숲을 무너뜨린다”는 소리입니다. “환경 미화”일 때에는 무엇을 뜻할까요? 이때에는 “마을을 깨끗하게 한다”거나 “삶터를 깨끗하게 치운다”는 뜻이에요.


 쾌적한 공기

→ 산뜻한 바람

→ 상큼한 바람

→ 시원하고 즐거운 바람

 바닷물은 한 길 깊이까지 들여다보일 정도로 깨끗하고 쾌적하였다

→ 바닷물은 한 길 깊이까지 들여다보일 만큼 깨끗하고 산뜻했다

→ 바닷물은 한 길 깊이까지 들여다보일 만큼 깨끗하고 좋았다


  “쾌적한 환경”이란 “좋은 터전”을 이야기합니다. “아름다운 마을”이나 “푸른 숲”을 가리킵니다. 한자말을 빌어 그냥 “快適한 環境”이라 적을 수 있지만, 마을과 숲과 보금자리만 아름답거나 깨끗하거나 즐겁게 가꿀 뿐 아니라, 삶과 넋과 말을 아름답거나 깨끗하거나 즐겁게 가꾸려 한다면, 이제는 한결 깊고 넓게 살필 수 있기를 바라요. 책이름으로 삼을 말이라면, 《쾌적한 환경을 찾아서》보다는 《아름다운 숲을 찾아서》나 《푸른 마을을 찾아서》처럼 붙일 때에 더없이 즐거우면서 산뜻하게 빛나리라 생각합니다. 4347.8.16.흙.ㅎㄲㅅㄱ



 쾌적(快適)하다 : 기분이 상쾌하고 즐겁다

   - 쾌적한 공기 /

     바닷물은 한 길 깊이까지 들여다보일 정도로 깨끗하고 쾌적하였다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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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량한 말 바로잡기

 (660) 가족 1


예전엔 옆집 굴뚝에 연기가 안 오르면 숟가락을 들지 못하고 보리 한 됫박이나마 나누어 먹던 게 사람답게 살던 우리의 모습이었다. 오른 방세를 마련 못해 일가족이 함께 세상을 등지는 마당에 ‘수출이 안 된다, 경제 위기다’ 하며 노동자가 목쉬게 부르짖는 최소한의 정당한 요구를 묵살하고 골프장이나 넓힐 궁리를 한다면 그건 사람이 할 짓이 못 된다

《또 하나의 입덧》(따님,1990) 80쪽


 일가족이 함께 세상을 등지는 마당에

→ 한집이 함께 이 땅을 등지는 마당에

→ 한집안이 함께 이 땅을 등지는 마당에

→ 온 집이 함께 이 땅을 등지는 마당에

→ 온 식구가 함께 이 땅을 등지는 마당에

 …



  한국말사전에서 ‘일가족(一家族)’이라는 한자말을 찾아보니, “한집안의 가족”을 뜻한다고 나옵니다. 한국말 ‘한집안’을 찾아봅니다. “한집에서 사는 가족”이라고 풀이합니다. 다시 한자말 ‘가족(家族)’을 찾아보니,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이라 풀이합니다. 여러모로 궁금합니다. ‘한집안’이라는 한국말이 ‘가족’을 뜻한다고 하는데, ‘일가족’은 “한집안의 가족”이라 풀이하면 어떻게 될까요? “가족의 가족”이 한자말 ‘일가족’인 꼴입니다.


 일가족 여섯이 한자리에 모이다

→ 한집 여섯이 한자리에 모이다

→ 한집안 여섯이 한자리에 모이다

 일가족을 이끌고 피난을 가다

→ 한집안을 이끌고 싸움통을 벗어나다

→ 한집을 이끌고 싸움통을 떠나다


  한국말사전을 더 살펴봅니다. 설마 ‘한가족(한 + 家族)’ 같은 낱말도 실었을까 궁금합니다. 이 낱말은 안 실립니다. 이제 곰곰이 생각을 기울입니다. 예부터 한국말은 ‘한집안’입니다. ‘가족’은 한국말이 아닙니다. 예부터 한겨레는 ‘식구’라는 말을 곧잘 썼습니다. ‘食口’도 한자로 지은 낱말인데, 이 낱말을 한자로 적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말밑은 한자이지만, 한자말로 여기지 않고 한국말에 녹아든 낱말이라고 할 만합니다. ‘한식구’라는 말을 예부터 참 흔히 써요. 그런데, 한국말사전에는 ‘한식구’도 안 실립니다.


 가족을 부양하다

→ 식구를 먹여살리다

→ 한집을 먹여살리다

 열흘 만에 가족 품으로 돌아왔다

→ 열흘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 열흘 만에 한집 품으로 돌아왔다

 모처럼 식구가 한자리에 모인 가족적 분위기

→ 모처럼 식구가 한자리에 모인 따스한 느낌

→ 모처럼 한집이 한자리에 모인 도란도란 즐거움

→ 모처럼 한집안이 한자리에 모인 사랑스러움

 이러한 작은 일은 가족적으로 해결해도 된다

→ 이러한 작은 일은 식구끼리 풀어도 된다

→ 이러한 작은 일은 우리끼리 풀어도 된다


  시골에서 할매와 할배가 으리 ‘지비(집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녁’을 가리킬 적에 곧잘 이런 말을 씁니다. ‘집’이라는 낱말로 ‘사람’을 가리킵니다. ‘식구’는 어느새 한국말로 녹아든 낱말이지만, 훨씬 먼 옛날부터 한겨레가 쓰던 낱말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한집’입니다.


  ‘집’이라는 낱말을 한국말사전에서 찾아보아도, ‘집’은 “사람이 지내는 곳”을 가리킬 뿐 아니라, “집안”을 가리키고, “사람”을 가리킵니다. 오늘날 한국말사전은 “‘사람’을 가리키는 ‘집’”이 가시내(여자, 어머니, 아내)이기만 한 줄 잘못 풀이하지만, 예부터 ‘집’은 한집안 사람 누구나 다 가리켰습니다. 생각해 보셔요. 오늘날 문명사회에서나 ‘사내가 바깥에서 일자리를 얻어 돈을 벌’지, 예전 시골살이에서는 가시내도 사내도 ‘마을에 머물고 집에서 살면서 일을 함께 했’습니다. 그러니, ‘집사람’이든 ‘집’이든 사내와 가시내를 따로 가르는 낱말이 아닙니다. 집에 있는 사람이기에 모두 ‘집사람’이요, 짤막하게 ‘집’이라 했으며, 시골에서는 아직까지도 ‘지비(집이)’라는 대이름씨를 씁니다.


  한국말은 ‘집·집안·한집·한집안·온 집(온집)·온 집안(온집안)’입니다. 한자말은 ‘식구·가족’입니다. 한자말 가운데 ‘식구’는 한국 한자말이요, ‘가족’은 일본 한자말입니다. 말뿌리는 이렇습니다. 4336.5.10.흙/4347.8.17.해.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예전엔 옆집 굴뚝에 연기가 안 오르면 숟가락을 들지 못하고 보리 한 됫박이나마 나누어 먹으며 사람답게 살던 우리 모습이었다. 오른 집삯을 마련 못해 한집이 함께 이 땅을 등지는 마당에 ‘수출이 안 된다, 경제 위기다’ 하며 노동자가 목 쉬게 부르짖는 아주 마땅한 외침을 못 들은 척하고 골프장이나 넓힐 생각을 한다면 이는 사람이 할 짓이 못 된다


“나누어 먹던 게”는 “나누어 먹던”으로 다듬고, “우리의 모습”은 “우리 모습”으로 다듬으며, ‘방세(房貰)’는 ‘방삯’이나 ‘집삯’으로 다듬습니다. “세상(世上)을 등지는”은 “이 땅을 등지는”이나 “스스로 숨을 끊는”으로 손보고, “최소한(最小限)의 정당(正當)한 요구(要求)를 묵살(默殺)하고”는 “아주 마땅한 외침을 못 들은 척하고”나 “아주 마땅한 소리에 귀를 닫고”나 “아주 마땅한 얘기에 등을 돌리고”로 손봅니다. ‘궁리(窮理)’는 ‘생각’으로 손질하고, ‘그건’은 ‘이는’으로 손질합니다.



 일가족(一家族) : 한집안의 가족. 또는 온 가족

   - 일가족 여섯이 한자리에 모이다 / 일가족을 이끌고 피난을 가다

 가족(家族) : 주로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

   - 가족을 부양하다 / 잃어버렸던 아이가 열흘 만에 가족 품으로 돌아왔다 /

     모처럼 식구가 한자리에 모인 가족적 분위기 /

     이러한 작은 일은 가족적으로 해결해도 된다

 한집안

  (1) 한집에서 사는 가족

  (2) 일가 친척

 한집

  (1) 같은 집

  (2) = 한집안


..



 알량한 말 바로잡기

 (1621) 가족 2


내일은 가족 신문 만드는 날 / 어떤 사진 가져갈까 / 사진첩 들춰 봅니다

《김미혜-아빠를 딱 하루만》(창비,2008) 40쪽


 가족 신문

→ 우리 집 신문



  ‘가족’은 한국말이 아닐 뿐더러, 한국 한자말이 아닙니다만, 학교에서나 사회에서나 이 낱말을 무척 자주 씁니다.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어느 회사에서는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이름을 널리 앞세우기도 합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말마디에서는 ‘-의’를 붙인 ‘하나의’도 얄궂습니다. 한국 말투가 아닙니다. “또 다른 식구”나 “또 다른 이웃”이나 “또 다른 한집”이나 “또 다른 한집안”처럼 고쳐써야 올발라요.


  학교에서는 “한집안 이야기를 담은 신문”을 만들도록 하는구나 싶습니다.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생각에 젖습니다. 학교에서 이런 신문에 붙이는 이름이 ‘가족 신문’이라면,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한국말하고 영 동떨어집니다. 곧, 한국말을 집이나 학교에서 제대로 못 배운 아이들이 회사에 들어가거나 사회에서 일자리를 얻으면서, “또 하나의 가족” 과 같은 엉성한 말을 다시금 퍼뜨리는 노릇을 합니다.


  집에서는 “우리 집 신문”을 만듭니다. 마을에서는 “우리 마을 신문”을 만듭니다. 학교에서는 “우리 학교 신문”을 만듭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신문”을 만듭니다. 4347.8.17.해.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이튿날은 우리 집 신문 만드는 날 / 어떤 사진 가져갈까 / 사진첩 들춰 봅니다


‘내일(來日)’은 그대로 둘 만하지만, 이 자리에서는 ‘이튿날’로 손보면 한결 낫습니다.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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