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하게 참 철없이 - 2009 제11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창비시선 283
안도현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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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64



시와 늦여름

― 간절하게 참 철없이

 안도현 글

 창비 펴냄, 2008.1.21.



  여름이 저뭅니다. 늦여름 바람이 제법 시원합니다. 해는 늦게 뜨고 일찍 집니다. 아직 낮에는 햇볕이 뜨거워 이불이나 빨래를 말리기에는 좋습니다. 일찍 찾아오는 저녁에 부는 바람에는 가을내음이 물씬 흐릅니다. 논이 펼쳐진 들길 사이를 걷거나 자전거를 달리면 제법 익은 나락마다 고소한 냄새를 퍼뜨립니다.


  풀벌레 노랫소리가 짙을 만한 철입니다. 멧새는 겨울을 앞두고 부산을 떨어야 할 철이고, 멧짐승도 슬슬 바지런히 추위를 헤아려야 할 철입니다. 그런데 풀벌레 노랫소리가 그리 짙지 않습니다.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시골에는 으레 농약바람이 불기 때문입니다.  



.. 가끔 나는 숙박계에 이 세상에 없는 자의 주민등록번호를 쓰고 벽에 구름의 바지를 걸어놓고 잠든 적 있다 ..  (세상의 모든 여인숙)



  흙이 있는 땅이면 으레 풀이 돋기 마련입니다. 풀은 어디에서나 돋습니다. 사람이 심은 남새 씨앗도 돋지만, 풀이 스스로 퍼뜨린 씨앗도 돋습니다. 풀은 사람이 뜯어서 먹기도 하지만, 들짐승이나 숲짐승이 뜯어서 먹기도 합니다. 지난날에는 마을마다 소를 많이 키웠기에 소한테 풀을 먹이려 했지, 풀에 함부로 약을 뿌리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모든 풀은 저마다 쓰임새가 있어서 함부로 뜯거나 죽이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풀을 여러 가지로 씁니다. 첫째, 즐겁게 먹습니다. 둘째, 옷을 짓는 실을 얻습니다. 셋째, 바구니나 자리나 신을 삼을 적에 씁니다. 넷째, 지붕에 얹거나 울타리를 두를 때에 씁니다. 다섯째, 몸이 아플 때에 알맞게 씁니다. 여섯째, 잎사귀를 덖거나 말려 우려서 마십니다. 일곱째, 짐승한테 먹이려고 씁니다. 여덟째, 풀이 돋아 흙을 붙잡으면 큰비가 내려도 흙이 쓸리지 않습니다. 아홉째, 풀밭에서 푸른 기운이 흘러 언제나 싱그러우면서 맑은 바람을 마실 수 있습니다.



.. 그해 봄 우리집 마당가에 핀 명자꽃은 별스럽게도 붉었습니다 / 옆집에 살던 명자 누나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하였습니다 ..  (명자꽃)



  풀을 모르는 사람은 시골사람이 아닙니다. 아니, 풀을 모르고서는 삶을 가꿀 수 없습니다. 풀을 죽이거나 짓밟는 사람은 시골내기가 되지 못합니다. 아니, 풀을 죽이거나 짓밟으니 시골마을을 돌볼 수 없습니다.


  풀이 죽은 데에서는 나무가 죽습니다. 풀이 죽어 나무가 죽으면 사람이 죽습니다. 풀이 죽어 나무가 죽으면 숲이 사라집니다. 숲이 없는 곳은 비가 오지 않아요. 메마를 뿐입니다. 풀과 나무가 없으면 냇물이 흐를 수 없어요. 풀과 나무가 없으면 논이고 밭이고 일굴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억지로 농약과 비료와 항생제로 ‘풀 없이 먹을거리를 뽑아내는 짓’을 함부로 합니다. 흙을 온통 죽이거나 말리면서도 농약과 비료와 항생제로 껍데기만 그럴듯하게 만드는 공산품 같은 먹을거리를 거둡니다.


  우리는 무엇을 바라는 셈일까요. 우리는 무엇을 하고 싶은 셈일까요. 우리는 무엇을 하려고 땅을 망가뜨릴까요. 우리는 무엇을 바라면서 이 땅에 푸른 물결이 아닌 잿빛 도시와 아파트와 공장과 발전소와 송전탑 따위만 들이부을까요.



.. 뒷집 조성오 할아버지가 겨울에 돌아가셨다 / 감나무 두 그루 딸린 빈집만 남겨두고 돌아가셨다 ..  (조문弔文)



  안도현 님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창비,2008)를 읽습니다. 애타면서 철이 없는 모습을 가만히 떠올립니다. 어떤 사람이 애타는 몸짓이면서 철없다고 할 만할는지 헤아립니다.


  너일까요. 나일까요. 우리 모두일까요.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모두 철없는 노릇이 아닐까요. 스스로 어떤 숨결인지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참말 철없는 삶이 아닐까요.


  안도현 님이 사는 마을에서 뒷집 할배가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안도현 님은 뒷집 할배가 ‘길’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무렴요. 모든 사람은 저마다 길입니다. 더 밝은 길이나 더 어두운 길은 따로 없이 우리는 모두 길입니다. 다만, 우리는 스스로 길인 줄 모르기 일쑤이고, 어떤 길인지 안 느낄 뿐입니다.


  그러면, 안도현 님은 어떤 길일까요. 안도현 님은 스스로 어떻게 빛나는 길일까요. 안도현 님은 스스로 어떤 철이 든 사람으로서 시 한 줄을 읊을까요.



.. 식구들이 모두 달라붙어 키운 염소를 / 겨울에 잡았다 ..  (염소 한 마리)



  늦여름이 저물면서 가을이 코앞입니다. 달력에 있는 숫자로 헤아리는 가을이 아니라 살갗으로 느끼는 가을이요, 달력 숫자가 아닌 바람결과 햇살로 느끼는 가을입니다. 가을이 지나고 찾아오는 겨울도 살갗으로 느끼고 온몸으로 마주하는 철이 되겠지요.


  바람을 느끼듯이 여름을 듬뿍 느끼다가 가을내음을 맡습니다. 햇살을 느끼듯이 여름을 한가득 누리다가 가을빛을 바라봅니다.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따사롭게 춤을 춥니다.


  우리 마음에 봄이 싹틀 때에 들에도 봄빛이 피어납니다. 우리 마음에 가을열매가 무르익을 때에 들에도 가을열매가 무르익습니다. 우리 마음에 봄이 싹트지 않는다면 들에도 봄바람이 불지 않아요. 우리 마음에 가을이 무르익지 않는다면 들에도 가을내음이 퍼지지 않습니다.



.. 시골 서점 책꽂이에 아주 오랜 시간 꽂혀 있는 시집이 있다 / 출간된 지 몇해째 아무도 펼쳐보지 않은 시집이다 ..  (오래된 발자국)



  자전거를 타고 들길을 달리는데 풀벌레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 마을뿐 아니라 이웃 여러 마을에서도 풀벌레 노랫소리를 듣기 어렵습니다. 농약바람은 맡을 수 있지만 짙은 풀바람을 쐬기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풀벌레와 새와 개구리가 노래잔치를 이루는 모습은 차츰 사라지면서,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기곗소리와 자동차 소리가 넘칩니다.


  소리가 사라진 곳에 노래가 사라지고, 노래가 사라진 곳에서는 시를 읽지 않습니다. 라디오를 켜거나 텔레비전은 켤 테지만, 시집을 펼쳐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조용히 자취를 감춥니다. 시골에 아이들이 없어서 조용하지 않습니다. 시골에 노래가 없기에 조용합니다. 시골은 풀이 죽고 노래가 멀어지면서 고요할 뿐입니다. 4347.8.27.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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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랑 놀자 61] 고운소금



  나는 왜 언제부터 ‘가는소금’이라고 말했는지 잘 모릅니다. 다만 퍽 어릴 적이었지 싶은데, 불쑥 ‘굵은소금·가는소금’을 말하다가 동무가 퉁을 놓았지 싶어요. “얘, ‘가는소금’이 어디 있니? ‘고운소금’이지!” 이러구러 몇 해 지나 어느 날 또 ‘가는소금’이라고 말했는데, 어머니가 ‘고운소금’으로 바로잡아 줍니다. 얼마 뒤 또 ‘가는소금’을 말하고, 이웃 아주머니가 ‘고운소금’으로 바로잡아 줍니다. 한참 여러 해가 흐르고 흐른 요즈음, 우리 집 곁님이 ‘고운소금’ 이야기를 꺼냅니다. 곰곰이 돌이키니, 나는 어릴 적부터 참 끈질기게 ‘가는소금’이라 말했구나 싶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곱다’라는 낱말을 ‘아름답다’라는 뜻으로만 써야 한다고 잘못 알기 때문일까요. 어쩌다 입에 한 번 붙은 말씨가 안 떨어지기 때문일까요. 소금도 밀가루도 잘게 빻을 때에는 ‘곱다’라고 가리킵니다. ‘가늘다’라 가리키지 않습니다. 한국말사전을 살피면 ‘굵은소금·가는소금’이 올림말로 나오고, ‘고운소금’은 올림말로 없습니다. 그러나, 내 어릴 적 동무와 이웃을 비롯해 우리 곁님과 곁님 어머니 모두 ‘고운소금’만 말합니다. 고개를 갸우뚱갸우뚱해 보지만 실마리를 알 길은 없습니다. 4347.8.27.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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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부터 어느 겨레나 ‘풀’을 먹고, ‘풀’로 옷을 짓고, ‘풀’로 신을 삼고, ‘풀’로 그릇과 바구니를 짜며, ‘풀’로 집을 짓기까지 하면서, 모두 ‘풀’로 온 삶을 이루었다. 요즈음은 따로 ‘약초’라는 말을 쓰지만, 약초라는 이름은 부질없다. 모든 풀이 다 약이 되고 밥이 되기 때문에 ‘풀’을 쓰면 될 뿐이다. 풀마다 어느 자리에 어떻게 쓰이는가를 스스로 느끼고 헤아려서 다룰 수 있으면 된다. 오늘날 사람들이 왜 아플까? 풀을 다룰 줄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왜 고달플까? 풀을 가까이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시나 시골이나 풀을 짓밟아 없애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어린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야기책 《누구나 할 수 있는 멋진 바법》은 ‘마법의 정원 이야기’ 가운데 하나인데, 다섯째 이야기에 나오는 아이는 ‘풀(허브)’을 다루어 이웃과 동무를 돕는다. 이웃과 동무뿐 아니라 숲 요정까지 돕는다. 풀에 어떤 기운과 숨결이 있는가 찬찬히 헤아리면서 씩씩하게 삶을 짓는다. 이야기책에서는 아주 가볍게 ‘차를 끓이’고 ‘약을 짓는’ 모습으로만 나오지만, 이 아이가 하는 일은 스스로 숲에 깃들어 풀내음을 먹으면서 풀숨을 마시고 풀빛을 가꾸는 삶노래이다. 4347.8.27.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한 줄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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묶음표 한자말 195 : 산(山)



싸리꽃을 애무하는 산(山)벌의 날갯짓소리 일곱 근

《안도현-간절하게 참 철없이》(창비,2008) 10쪽


 산(山)벌

→ 멧벌



  한라산은 ‘한라산’이지 ‘한라山’이 아닙니다. 북한산은 그저 ‘북한산’입니다. 구태여 한자 ‘山’으로 적을 까닭이 없습니다. 산에 사는 토끼는 ‘산토끼’이지 ‘山토끼’가 아니에요.


  보기글을 보면 ‘산벌’이라 안 적고 ‘산(山)벌’로 적습니다. 왜 이렇게 적어야 했을까요? ‘산벌’이라고만 적으면 헷갈릴까 봐 이렇게 했겠지요? 그렇지만, 바로 뒤에 ‘날갯짓소리’라 나오니까, “산벌 날갯짓소리”라 적는들 헷갈릴 까닭이 없습니다. 헷갈릴 만하다 싶으면 “멧벌”로 적으면 됩니다.


  멧토끼, 멧나물, 멧골, 멧골짝, 이렇게 ‘멧’을 넣으면 되지요. 한국말 ‘메’에 사이시옷을 붙이면 어느 낱말하고도 골고루 어울릴 뿐 아니라, 뜻이 아주 또렷합니다. 4347.8.27.물.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싸리꽃을 어루만지는 멧벌 날갯짓소리 일곱 근


‘애무(愛撫)’는 “주로 이성을 사랑하여 어루만짐”을 뜻하는 한자말입니다. 그러니, 쉽게 한국말로 ‘어루만지다’로 손질하면 됩니다. 또는 ‘쓰다듬다’나 ‘보듬다’로 손질할 수 있습니다. “산벌의 날갯짓소리”에서는 토씨 ‘-의’만 덜어도 되고, “산벌이 날갯짓하는 소리”로 다듬어도 됩니다.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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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미리, 미리 쓰는 글



  나는 글을 늘 미리 쓴다. 누군가 글을 써서 달라고 바라면 곧장 글을 써서 보낸다. 내가 앞으로 책으로 엮고 싶다고 꿈꾸는 글도 미리 쓴다. 미리 차근차근 쓴다. 그런데 어제 전화 한 통을 받고는 혀를 내둘렀다. 〈좋은 생각〉이라는 잡지사에서 글 한 꼭지를 써 주십사 하고 전화를 하셨는데, 어제가 8월 25일인 만큼 ‘시월호’로 넣을 글을 써 주십사 하고 이야기하려는구나 하고 여겼는데, 아니었다. ‘십일월호’에 넣을 글을 써 주십사 하고 이야기한다. 잘못 들었나 하고 여겼는데, 곧바로 받은 누리편지를 여니 ‘시월호에 실을 글’이 아닌 ‘십일월호에 실을 글’이 맞다. 그렇다면, 〈좋은 생각〉이라는 잡지사는 벌써 시월호 편집까지 마쳤다는 뜻이리라. 대단하구나. 참으로 빈틈이 없구나. 이렇게 일을 하고 글을 받으니 아주 많은 사람들을 독자로 이끌면서 잡지를 선보일 수 있구나. 내가 하는 일이 한국말사전 만들기인 터라, 한글날이 있는 시월을 헤아려 ‘한국말 이야기’를 써 주십사 하고 물을 줄 알았는데, 이것도 아니고 ‘시골살이 이야기’를 써 주십사 하고 묻는다. 그래서, 재미나게 글을 쓰기로 했다. 미리 미리 미리. 4347.8.27.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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