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氣 (장국현) 호영 펴냄, 2008.4.30.



  소나무를 찍은 사진을 몇 천만 원이나 몇 억 원으로 사고판다는 이야기를 요즈막에 듣는다. 왜 이렇게 비싸게 사고팔까 궁금하다. 아니, 이런 값이 알맞은지조차 궁금하다. 장국현이라는 사람은 2011∼2013년 사이에 울진에서 금강송을 몰래 베면서 사진을 찍었다는데, 그동안 깊은 두멧자락에서 무엇을 하면서 사진을 찍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얼마 앞서 ‘세 차례 금강송을 벴다’는 일이 드러났을 뿐이다. 그런데, 이분이 죽을 때까지 이러한 일이 바깥으로 알려지지 않았다면, 법원에서 ‘벌금 500만 원’을 선고하지 않았다면, 이 나라 사진단체와 사진가는 무엇을 알거나 보거나 느끼면서 말했을까? 법원에서 내린 벌금도 장국현이라는 사람이 벤 나무값만큼도 안 된다는데, 벌금을 제대로 물렸는지조차 아리송하다. 잘못 한 번 저질렀다고 해서 이녁이 아무 일도 못 하게 막을 수는 없지만, 이제 이녁이 두멧자락에 들어간다고 하면 무슨 짓을 할는지 무섭기만 하다. 이녁이 찍는 사진을 누가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4347.9.2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한 줄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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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송, 고송, 초송, 신송을 찾아서
장국현 지음 / 시사출판사 / 2014년 3월
58,000원 → 52,200원(10%할인) / 마일리지 2,9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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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산山 소나무송松- 명산과 소나무를 찾아 3,000리 방방곡곡을 답사한 사진촬영 일지
장국현 지음 / 호영 / 2008년 4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2014년 09월 26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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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에서 펴내는 잡지에 싣는 글입니다. 지난 여름호에 실은 글인데 이제서야 걸치네요.

..

말넋 34. 새롭게 태어나는 말
― 함께 살리며 아끼는 말


  까치가 지은 둥지는 ‘까치집’이라 합니다. 한국말사전을 보면 ‘까치집’은 올림말입니다. 새가 지은 둥지는 ‘새집’이라 해요. 이 낱말도 한국말사전에 나와요. 제비가 지은 ‘제비집’과 딱새가 지은 ‘딱새집’은 한국말사전에 나오지 않습니다. 한국말사전에 ‘-집’을 뒷가지로 올린다면, ‘제비집’이나 ‘딱새집’이나 ‘할미새집’ 이나 ‘해오라기집’같은 낱말을 따로 올림말로 싣지 않아도 돼요. 그렇지만, 아직 한국말사전은 한국말을 넓고 깊으며 슬기롭게 갈고닦는 밑틀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오늘날 맞춤법으로는 ‘제비 집’이나 ‘참새 집’처럼 띄어서 적어야 하는데, 굳이 이렇게 띄어서 적어야 할까 궁금해요. 이 새가 지은 집은 붙여서 적고, 저 새가 지은 집은 띄어서 적어야 할 까닭은 없어요.

  러시아사람 코르네이 추콥스키 님이 쓰고 한국사람 홍한별 님이 옮긴 《두 살에서 다섯 살까지》(양철북,2006)라는 책을 읽다가 125쪽에서 “준비, 땅!”이라는 말마디를 봅니다. 저도 어릴 적에는 이런 말을 익히 썼습니다. 학교에서 교사들이 이런 말을 으레 썼거든요. 어느 교사는 “요이, 땅!”이라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교사(어른)가 읊는 말투를 받아들여 “요이, 땅!”이라 했어요. “요이, 땅(ようい,どん)!”이 일본말인 줄 알아차린 때는 한참 뒤였어요. 제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1990년대 첫머리까지 이 말마디가 일본말이라고 알려준 어른(교사)이 없었어요.

  그러면 한국말은 무엇일까요. 한국사람이 예부터 즐겁게 쓰던 한국말은 무엇일까요. 학교에서 한국말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우리들은 한국말을 어디에서 제대로 배울 만할까요.

  총을 쏘는 소리를 두고, 한국사람은 ‘탕’으로 적습니다. 일본사람은 총을 쏘는 소리를 ‘땅(どん)’으로 적어요. 그러면 ‘요이(ようい用意)’는 무엇일까요. 이 일본말은 ‘준비(準備)’를 뜻한다 하고, 이 말뜻을 좇아 “요이, 땅!”을 “준비, 탕!”으로 고쳐서 쓰자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이쯤까지는 요즈음 들어 이럭저럭 둘레에서 들을 수 있고 밝히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쯤에서 더 나아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일본말을 한국말로 고쳐서 바르게 적는 길’만 헤아리느라, 막상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을 식민지로 삼기 앞서, 한겨레가 수천 수만 해에 걸쳐 어떤 말을 썼는지 돌아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겨레는 남달리 ‘셋’이라는 숫자를 좋아합니다. 왜 좋아할까요? 아무래도 오랜 숨결과 이야기가 깃들었을 테고,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움직이면서 좋아하겠지요. 수많은 사람들 손과 입을 거쳐 ‘셋’이라는 숫자를 마음으로 깊이 받아들이거나 삶으로 넉넉히 맞아들였겠지요.

  어떤 일을 여럿이 함께 하면서 겨루는 자리에서 “하나, 둘, 셋!” 하고 외치는 분이 있습니다. 아무리 “요이, 땅!”이라는 일본말이 뻗치더라도 “하나, 둘, 셋!” 하고 말하던 분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하나, 둘, 셋!”을 외쳤을까요? 지식으로? 학문으로? ‘국어순화’를 하려고? 아마 모두 아니지 싶어요. 그저 먼먼 옛날부터 몸에 익고 마음에 익숙한 대로 “하나, 둘, 셋!”을 입으로 터뜨렸으리라 느껴요. 한국말로 바르게 쓰자면 “하나, 둘, 셋!”입니다.

  소설을 쓰던 이문구 님이 2003년에 숨을 거두기 앞서 동시를 그러모아 《산에는 산새 물에는 물새》(창비,2003)라는 책을 선보였습니다. 이문구 님은 이녁 딸아들한테 읽히려고 1988년에 처음 동시집을 냈고, 이녁 딸아들이 자라 새롭게 아이를 낳으니 손자한테 읽히려고 다시 동시를 썼어요. 이문구 님이 어린 나날 충청도 시골에서 늘 보고 겪으며 마주했던 이야기를 손자한테 들려주는 동시로 엮었습니다.

  〈맷돌〉이라는 동시를 읽으면 “이가 닳아서 덜 먹으면 / 매죄료 장수가 정으로 쪼아서 / 언제나 살갑게 돌아갔는데” 하고 이야기가 흐릅니다. 이 동시에는 ‘매죄료장수’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매죄료장수는 매통이나 맷돌이 이가 닳으면 정으로 쪼아서 날카롭게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해요. 요즈음은 매통도 맷돌도 보기 어려우니 매죄료장수는 더더욱 볼 수 없어요.

  〈굴뚝새는 굴뚝새〉라는 동시를 읽으면 “김장을 담그고 / 고사떡을 도르고 / 동지 팥죽을 쑤니까 / 낮에도 어둑한 굴뚝에 / 굴뚝새가 왔네요” 하고 이야기가 흐릅니다. 이 동시에는 ‘도르다’라는 낱말이 나와요. ‘도르다’라는 낱말에는 다섯 가지 말뜻이 있는데, 다섯째 뜻이 “몫을 갈라서 따로따로 나누다”입니다. 그리고, ‘도르리’라는 낱말은 “(1) 여러 사람이 먹을거리를 차례로 돌려 가며 내어 함께 먹음 (2) 똑같이 나누어 주거나 골고루 돌라 줌”을 뜻해요. 시골에서 두레와 품앗이와 울력이 사라지면서 ‘도르리(도르다)’라는 낱말도 시나브로 사라졌는데, 1980년대 끝무렵이었는지 1990년대 첫무렵이었는지 ‘도르리’라는 이름이 붙은 과자가 나온 적 있어요. 그무렵 방송광고에서 ‘도르리’라는 과자를 알리면서 말뜻을 곁달아서 얘기했어요.

  생각해 보면, 요즈음은 두레라든지 도르리를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이제는 없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지난날 ‘두레’나 ‘도르리’하고는 사뭇 다르지만, 새로운 삶에 걸맞게 ‘새로운 두레’와 ‘새로운 도르리’를 해요.

  도시에서 곧잘 나타나는 생활협동조합은 ‘새로운 두레’입니다. 뜻 맞는 이들이 여럿 모여 밥집에서 즐겁게 밥을 먹으면서 밥값을 나누어 내는 일은 ‘새로운 도르리’라 할 만합니다.

  삶을 새롭게 가꾸면서 말을 새롭게 가꿉니다. 삶을 알뜰히 일구면서 말을 알뜰히 일구어요. 한국말사전에서 예쁜 토박이말을 캐내는 일은 나쁘지 않으나, 우리가 오늘 이곳에서 예쁘게 쓸 새말을 생각하면서 나누는 일은 무척 좋습니다. 아이들한테 어떤 말을 물려주고 싶은지 헤아려 보셔요. 아이들한테 물려주기 앞서, 어른인 우리 스스로 서로서로 어떤 말을 주고받을 적에 사랑스럽거나 아름다울는지 곱씹어 보셔요. 삶을 사랑할 때에 말이 사랑스럽습니다. 4347.6.1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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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사전 한 질’ 더 장만하기



  크고 무거운 국어사전은 서재도서관에 두다 보니, 집에서 일을 할 적에 여러모로 번거롭다. 크고 무거운 국어사전을 들추려면 서재도서관에 다녀와야 하기 때문이다. 두 질씩 갖춘 크고 무거운 국어사전 가운데 한 질씩 집으로 옮겨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아직 한 질만 있는 크고 무거운 국어사전은 새로 한 질씩 장만하기로 한다.


  아마 요즈음은 ‘종이책 국어사전’을 거의 안 읽으려 할 테지. 국문학과 교수나 학생도 종이책으로 된 국어사전은 그리 안 읽을 듯하다.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쓰는 이들도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을 쓰리라 본다. 그런데, 요즈음 떠도는 국어사전과 1950년대 국어사전은, 올림말과 말풀이와 보기글이 다르다. 1940년대 국어사전이라든지 1960년대 국어사전도 올림말·말풀이·보기글이 다르다.


  모름지기 문학을 하려 한다면, 그러니까 ‘어느 시대를 보여주는 문학’을 하려 한다면, 요즈음 나온 국어사전이 아닌 ‘예전 어느 시대’에 흐르던 말을 담은 국어사전을 읽으면서 새롭게 말을 익혀야 한다. 말이 걸어온 흐름을 하나하나 살필 수 있다면, 국어사전이라는 종이책이 없던 때, 이를테면 1800년대나 1500년대나 300년대 무렵에 사람들이 어떤 말을 썼는지 가만히 그릴 수 있다.


  묵은 1950년대 국어사전을 한 질 주문한다. 1950년대 국어사전을 아직 건사하는 헌책방이 있어 무척 고맙다. 예순 해를 묵은 국어사전을 건사해 주는 헌책방은 이 책을 언젠가 값있게 쓸 사람이 있다고 믿었겠지. 4347.9.2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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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마을 보살피기



  마을이 있기 앞서 조그마한 집이 있습니다. 조그마한 집에는 조그마한 사람이 하나 있고 둘이 있습니다. 하나에서 둘이 된 집안은 셋 넷 다섯으로 차츰 늘어납니다. 한솥밥 먹는 사람이 늘어나지요. 조그마한 집은 보금자리입니다. 이러한 보금자리에 한솥지기가 늘고 또 늘면서 제금을 나는 새로운 집이 태어납니다. 새로운 집이 태어나고 또 태어나면서 어느새 마을을 이룹니다. 모든 마을은 처음에는 조그마한 집 하나에서 비롯합니다.


  조그마한 집 하나 있을 적에는 따로 길이 없습니다. 집 둘레가 온통 숲입니다. 냇물이 흐르고 나무가 우거지며 온갖 풀이랑 꽃이 짙푸릅니다. 집과 집이 모여 마을을 이루면, 숲 사이로 알맞게 길을 냅니다. 밭을 조금씩 일구어 들을 넓힙니다. 둠벙을 파기도 하고, 마을이 커지면 울력을 해서 못을 파기도 합니다.


  예부터 사람들은 책이 아닌 입에서 입으로 말을 가르치고 이야기를 대물림했습니다. 모시와 삼에서 실을 얻으면서 노래를 불렀고, 물레를 잣고 베틀을 밟으며 노래를 불렀으며, 바느질을 하면서 노래를 불렀어요. 아기한테 젖을 물리면서 노래를 불렀고, 두레와 품앗이를 할 적에도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먼먼 옛날부터 집집마다 이야기와 노래가 있었고, 마을마다 이야기와 노래가 넘쳤어요.


  오늘날 도시에는 아주 많은 집이 아주 다닥다닥 촘촘히 모입니다. 골목동네뿐 아니라 아파트에도 집이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집은 아주 많으나, 집집마다 따로 이야기나 노래가 흐르지는 않습니다. 텔레비전이 흐를 뿐이고, 학교에서 교과서를 배울 뿐입니다. 오늘날에는 아파트 단지나 골목동네에서 따로 ‘공동체 문화’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러는 동안 작은 보금자리가 흔들립니다. 작은 보금자리에서 노래가 흐르지 않으니 사랑이 싹트기 어렵습니다.


  학교를 다니거나 인문책을 읽는다고 해서 두레살이나 보금자리를 살리지 않습니다. 마음속에 사랑이라는 씨앗을 심으려는 생각을 지을 때에 비로소 두레살이와 보금자리를 살릴 수 있습니다.


  작은 보금자리는 작은 땅뙈기를 일구면서 태어납니다. 넓디넓은 땅이 있어야 배불리 먹지 않습니다. 서로 알맞게 지을 수 있는 땅이 있으면 되고, 나머지 땅은 드넓은 숲이나 들로 곱게 두면 됩니다. 갯벌을 메워야 하지 않습니다. 숲을 밀거나 멧자락을 깎아야 하지 않습니다. 모두 그대로 둬요. 모두 그대로 살려요. 이럴 때에 작은 집과 마을과 고을과 나라가 모두 새롭게 살아납니다. 4347.9.2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골목길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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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밥 먹자 97. 2014.9.24. 밥상놀이



  아이들은 언제 어디에서나 논다. 잠자리에서도 놀고, 시외버스나 기차에서도 놀며, 걷는 동안에도 논다. 자전거를 타면서도 놀고, 놀면서도 새로 논다. 그러니 이 아이들이 밥을 먹을 적에도 놀밖에 없다. 내 어릴 적을 돌아본다. 아버지하고 함께 밥상맡에 앉으면 밥그릇을 다 비울 때까지 꼼짝을 못 한다. 어른과 밥을 먹는데 자리에서 일어나서 어딘가를 가면 괘씸한 짓으로 여긴다. 밥을 먹는 자리가 참으로 힘들었다. 중국에서 엉터리로 들여온 엉터리 권력문화 때문에라도 가시내와 아이는 밥자리가 느긋하지 못하다. 우리 집 아이들이라고 다를 일이 없다. 하루 내내 쉬잖고 뛰노는 놀이순이요 놀이돌이인 터라, 밥을 한 술 뜨고는 뭔가 새로운 놀이가 없을까 하면서 엉덩이를 들썩인다. 밥을 다 먹고 놀라 말해도 아이들은 안 듣는다. 들을 일이 없겠지. 참말 그렇다. 이렇게 하거나 저렇게 한들 달라질 수 없다. 아니, 굳이 달라지게 할 까닭이 없겠구나 싶다. 아이들과 함께 산 지 일곱 해 만에 깨닫는다고 할까. 놀고 싶으면 놀렴. 아주 배가 고플 때까지 밥을 안 차리다가, 그야말로 아이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무렵 밥을 차린다. 그래도 아이들은 몇 술을 떠서 배고픔을 가시면 슬슬 엉덩이를 들썩인다. 큰아이는 일곱 살이 무르익으니 밥그릇을 다 비울 때까지 스스로 ‘놀이를 참는’다. 아주 대견하다. 그러나, 동생이 마루를 가로지르며 뛰놀면 큰아이도 ‘더 참지 않’고 살그마니 엉덩이를 들썩인다. 둘 다 아이이니까. 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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