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찍는 눈빛 58. 남길 수 있는 사진



  사진은 남깁니다. 찰칵 하고 찍으면서 남깁니다. 사진은 무엇이든 남깁니다. 무엇이든 사진기를 들어 찰칵 하고 찍으면 필름이나 디지털필름에 남깁니다. 사랑하는 짝꿍이나 동무를 사진으로 남깁니다. 아름다운 모습을 지나칠 수 없어 살며시 걸음을 멈추고 사진으로 남깁니다. 눈에 띄는 무엇인가 보고는 오래오래 건사하면서 두고두고 돌아보려는 마음이 되어 사진으로 남깁니다.


  사진기를 써서 예술을 할 수 있습니다. 사진기를 놀리면서 문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돈을 모아 값진 사진장비를 갖출 수 있고, 이럭저럭 쓸 만한 사진장비를 갖출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진으로 담을 적에는, 천만 원짜리 사진기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백만 원짜리 사진기이기에 더 사랑스럽게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십만 원짜리 사진기이거나 1회용 사진기이기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스럽게 못 찍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셔요. 사진으로 찍어서 남길 수 없다면, 값진 사진장비이든 값싼 사진장비이든 나오지 않습니다. 값이 다를 뿐, 사진으로 찍어서 우리 이야기를 남길 수 있는 사진기입니다.


  나무를 찍다가 도끼를 못에 빠뜨린 나무꾼은 금도끼도 은도끼도 바라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셔요. 금이나 은으로 만든 도끼로 나무를 찍을 수 있을까요? 못 찍지요. 돈값은 제법 할 테지만, 나무꾼은 나무를 찍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러니 제 손에 익은 쇠도끼를 바라요.


  아마 누군가는 달리 생각하겠지요. 금도끼나 은도끼를 받으면 쇠도끼를 잔뜩 장만할 수도 있고, 앞으로 나무꾼 노릇을 더 안 해도 되지 않겠느냐 하고요.


  그러면, 참말 생각해 보셔요. 나무꾼이 나무를 더 하지 않으면 삶이 즐거울까요? 탱자탱자 아무것도 안 하면서 노닥거리면 삶이 즐거울까요? 나무꾼은 아침마다 밥 한 그릇 비운 뒤 깊은 숲속으로 도끼 한 자루 메고 걸어서 올라온 뒤, 나무마다 인사를 하고는 한 그루 골라서 즐겁게 쩍쩍 찍으면서 ‘살아가는 기쁨’을 누리리라 봅니다. 그러니, 나무꾼은 날마다 알맞게 일하고 알맞게 쉬며 알맞게 노래하는 이 삶을 놓치거나 버리지 않으려고 ‘쇠도끼’를 고릅니다. 나무꾼이 너무 고단한 삶이었다면, 나무꾼이 굶주리거나 종과 같은 삶이었다면, 아마 금도끼나 은도끼를 바랐을 수 있어요. 나무꾼이 쇠도끼를 고른 까닭은 스스로 앞으로도 즐겁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진장비를 손에 쥐든 사진을 찍어서 남길 수 있습니다. 자, 어떤 사진기를 손에 쥐겠습니까? 무엇을 찍겠습니까? 어떤 마음이 되어 찍겠습니까? 4347.10.4.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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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 군내버스 017. 가을하늘 안고서



  가을에는 가을하늘 안고서 달린다. 겨울에는 겨울하늘 안고서 달리겠지. 시골 군내버스라고 해서 찬찬히 달리기만 하지는 않는다. 무엇이 그리 바쁜지 싱싱 달리는 군내버스가 꽤 많다. 그러나 푸근하고 높은 가을하늘처럼 천천히 이 마을 저 마을 구비구비 돌면서 노래를 부르는 군내버스가 있다. 바쁘게 달리지 않아도 된다. 알맞게 달리면 되고, 달리다가 살며시 멈추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지개를 켜도 된다. 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고흥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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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도 익혀야지

 (303) -에 대한 -의 1


소수자에 대한 다수자의 복종이라는, 이 거의 모든 사회조직의 근본은 깊이 생각하는

《시몬느 베이유/곽선숙 옮김-억압과 자유》(일월서각,1978) 215쪽


 소수자에 대한 다수자의 복종이라는

→ 소수자한테 다수자가 복종하는

→ 다수자가 소수자한테 다스리는

→ 몇몇 사람이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 수많은 사람이 몇몇 사람을 따르는

 …



  한국말에 ‘-에 對하다’나 ‘-에 對한’은 없습니다. 이 말투는 외국말을 한국말로 옮기면서 갑자기 생겼습니다. 아주 걷잡을 수 없이 퍼졌고, 처음 영어를 배우는 어린이조차 이러한 말투에 길들거나 물듭니다.


  이를테면, “숲에 대하여 알아보자”나 “마을에 대하여 알아보자”처럼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어른들이 많은데, “숲을 알아보자”나 “마을을 알아보자”처럼 고쳐써야 올바릅니다. “너에 대한 이야기”라든지 “나에 대한 이야기”도 잘못 쓰는 말투예요. “네 이야기”나 “내 이야기”로 바로잡아야 올발라요.


  잘못 쓰는 말투와 새로 쓰는 말투는 다릅니다. 잘못 쓰는 말투가 아무리 널리 퍼졌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말투는 ‘새로운 말투’가 아닙니다. ‘잘못된 말투’일 뿐입니다. 슬기롭게 빚어서 아름답게 쓰는 말투일 때에만 ‘새로운 말투’입니다. 슬기롭지 않고 아름답지 않으며 잘못 받아들여 쓰니 앞으로도 언제나 ‘잘못된 말투’예요. 앞으로 쉰 해가 흐르든 백 해가 흐르든 ‘-에 대하다’와 ‘-에 대한’은 꼭 털거나 씻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아직 한국사람은 이러한 말투를 제대로 못 느껴요. 그래서 ‘-에 대한 + -의’ 같은 말투까지 생깁니다.


 소수자가 다수자를 다스리는

 많은 사람이 몇몇 사람한테 휘어잡히는


  보기글을 살피면 ‘-에 대한’과 ‘-의’를 함께 쓸 뿐 아니라, 입음꼴로 씁니다. 여러모로 설익은 번역 말투입니다. 이렇게 설익은 번역 말투를 ‘새로운 말투’로 볼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설익은 말투요 번역 말투이며 잘못된 말투입니다. 4337.7.27.불/4347.10.4.흙.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몇몇 사람이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이 거의 모든 사회를 이루는 바탕은 깊이 생각하는


‘소수자(少數者)’와 ‘다수자(多數者)’는 그대로 두어야 할까요, 아니면 “몇몇 사람”과 “많은 사람”이라든지 “적은 사람”과 “수많은 사람”으로 손질해야 할까요? ‘복종(服從)’은 ‘따르는’이나 ‘좇는’으로 다듬을 수 있고, ‘다스리는’이나 ‘거느리는’으로 다듬을 수 있습니다. “사회조직(-組織)의 근본(根本)”은 “사회를 이루는 바탕”이나 “사회 얼거리 바탕”이나 “사회 얼거리”로 손봅니다.


..



 '-의' 안 쓰면 우리 말이 깨끗하다

 (108) -에 대한 -의 2


불교와 샤머니즘에서는 고통과 시련에 정면으로 맞설 때 지혜가 발현된다고 한다. 나약함은 강인함이 되고 타자에 대한 자비의 원천이 된다

《조안 엘리자베스 록/조응주 옮김-세상에 나쁜 벌레는 없다》(민들레,2004) 68쪽


 타자에 대한 자비의 원천

→ 남한테 사랑을 베푸는 바탕

→ 이웃한테 사랑을 베푸는 샘물

→ 이웃을 사랑하는 바탕

→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밑바탕

 …



  어떤 생각을 어떤 말마디에 담아서 이웃한테 들려주려 하는지 살펴봅니다. 생각은 아름다우나 말마디는 아름답지 않다면, 우리 이웃은 어떻게 맞아들일는지 헤아립니다.


  “타자에 대한 자비”란 무엇일까요? “타자에 대한 자비의 원천”은 무엇일까요? “나약함은 강인함이 되고 타자에 대한 자비의 원천이 된다”는 무엇일까요? 어떤 생각을 들려주려고 이와 같이 글을 썼을까요?


  한국말은 ‘남’입니다. 한자말은 ‘他者’입니다. 두 낱말을 나란히 놓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떤 낱말을 골라서 우리 생각을 나타낼 때에 즐겁거나 아름다울까요? 우리는 우리 이웃하고 어떤 낱말을 주고받을 때에 즐겁거나 아름다울까요?


  한국말을 바르게 쓰는 일을 생각합니다. 일제강점기 찌꺼기라든지 번역 말투를 털어내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한국말 바르게 쓰기’는 아닙니다. 쉽게 쓰기도 해야겠지요. 그러나, 쉽게 쓴대서 끝나지 않으며, ‘쉽게 쓰기’란 누구한테 쉽게 쓰겠다는 뜻이 될는지 짚어 보아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이 보기글을 입으로 말해 보셔요. 시골에서 흙을 일구는 할매와 할배한테 이 보기글을 종이에 적어 읽혀 보셔요. 자, 이 보기글은 누가 읽으라고 쓴 글인가요? 이 보기글은 도시에서 대학교나 대학원까지 마치고 인문책을 제법 읽은 지식인더러 읽으라고 썼는가요? 그러면, 이런 사람들, 그러니까 인문책 지식이 제법 있는 사람을 빼고는 이런 글은 안 읽어도 되는가요?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는 교수라면 대학생만 생각하리라 봅니다.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사라면 중·고등학생만 생각하리라 봅니다. 이리하여, 우리 사회에서 흐르는 낱말과 말투는 ‘대학생 말투’와 ‘중·고등학생 말투’가 따로 있다고 할 만합니다. 여느 사람들하고 등을 지는 말투가 자꾸자꾸 퍼지거나 넘칠 수밖에 없는 우리 사회 얼거리입니다. 4337.12.27.달/4347.10.4.흙.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불교와 마을믿음에서는 괴로움과 힘겨움을 똑바로 맞설 때에 슬기가 샘솟는다고 한다. 여린 마음은 굳세지고 이웃을 사랑하는 바탕이 된다


‘샤머니즘(shamanism)’은 그대로 두어도 될 테지만 ‘토속신앙’이나 ‘마을믿음’으로 손볼 수 있습니다. “고통(苦痛)과 시련(試鍊)”은 “괴로움과 힘겨움”으로 다듬고, ‘정면(正面)에서’는 ‘맞바로’나 ‘똑바로’로 다듬고, ‘지혜(智慧)’는 ‘슬기’로 다듬으며, ‘발현(發現)된다’는 ‘샘솟는다’나 ‘드러난다’나 ‘나타난다’로 다듬습니다. ‘나약(懦弱)함’은 ‘여림’으로 손질하고, ‘강인(强靭)함’은 ‘억셈’으로 손질하며, ‘자비(慈悲)’는 ‘사랑’으로 손질합니다. ‘타자(他者)’는 ‘남’이나 ‘다른 사람’이나 ‘이웃’으로 고쳐쓰고, ‘원천(源泉)’은 ‘뿌리’나 ‘샘물’이나 ‘바탕’으로 고쳐씁니다.


..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170) -에 대한 -의 3


스스로에 대한 앎의 요구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우리 나라에서 울려 퍼져 왔습니다. 과거의 현인은 자신에 대한 올바른 앎이 없이는 진리에 대한 신념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비노바 바베/김성오 옮김-아이들은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착한책가게,2014) 353쪽


 스스로에 대한 앎의 요구는

→ 스스로를 알고자 하는 마음은

→ 스스로를 알려는 목소리는

→ 스스로를 알려는 외침은

 …



  보기글을 찬찬히 뜯습니다. “앎의 요구”란 “알고 싶은 바람”이나 “알고 싶은 마음”을 가리킵니다. “스스로에 대한 앎의 요구”란 “나 스스로를 알고 싶은 바람”이나 “나 스스로를 알고 싶은 마음”을 가리킵니다. 이 말마디를 넣은 글월은 끝자락을 “울려 퍼져 왔습니다”로 맺습니다. 그러니, 이 말마디는 “스스로를 알려는 목소리”나 “스스로를 알고자 하는 외침”으로 손보면 한결 잘 어울립니다.


  생각을 차근차근 기울이면 처음부터 알맞고 바르면서 쉽고 즐겁게 글을 쓸 만합니다. 조금 더 생각하셔요. 차근차근 돌아보셔요. 4347.10.4.흙.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아주 오랜 옛날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스스로를 알려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예전에 슬기로운 사람은 스스로를 올바로 모르면 참을 믿을 수 없는 줄 알았습니다


“과거(過去)의 현인(賢人)은”은 “지난날 슬기로운 사람은”이나 “예전에 슬기로운 사람은”으로 다듬고, “자신(自身)에 대(對)한 올바른 앎이 없이는”은 “스스로를 올바로 알지 못하면”이나 “스스로를 올바로 모르면”이나 “스스로를 올바로 볼 줄 모르면”으로 다듬으며, “진리(眞理)에 대(對)한 신념(信念)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은 “참을 믿을 수 없는 줄”이나 “참삶을 믿을 수 없는 줄”이나 “참길을 믿을 수 없는 줄”로 다듬습니다. “알고 있었습니다”는 “알았습니다”로 손봅니다.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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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도 익혀야지

 (228) 결과를 낳다


예를 들어 목재와 광물자원에 대한 소비계층의 만족을 모르는 수요는 가난한 원주민들의 삶터인 열대우림의 파괴를 부추기고 있고, 삼림벌채와 소각을 통해 수많은 생물종을 멸종케 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앨런 타인 더닝/구자건 옮김-소비사회의 극복》(따님,1997) 49쪽


 멸종케 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 멸종시킨다

→ 없애고 만다

→ 없애 버린다

→ 사라진다

→ 사라지고 만다

 …



  한자말 ‘결과(結果)’는 ‘열매’를 뜻합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한국말은 ‘열매’인데, 일제강점기 언저리부터 일본을 거쳐 한자말이 수없이 들어왔다는 뜻이요, 한국사람이 예부터 누구나 흔히 쓰던 ‘열매’라는 낱말이 ‘결과’라는 한자말한테 밀리거나 밟힌다는 뜻입니다.


  보기글을 생각합니다. “열매를 낳고 있다”인 셈인데, 이런 말을 누가 어디에서 왜 언제 쓰는지 궁금합니다. 먼저, “-고 있다”처럼 적은 현재진행형 말투가 잘못입니다. “열매를 낳다”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러면, “열매를 낳다”라는 말을 시골에서 쓸까요? “감나무가 열매를 낳았어”나 “대추나무가 열매를 낳았구나”처럼 말할까요?


  어쩌면, 쓸는지 모르고, 아무래도, 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도 어른도 “감나무가 열매를 맺었어”나 “대추나무에 열매가 열렸구나”처럼 말하지 싶습니다.


 수많은 생물을 죽여 없앤다

 수많은 생물이 죽어서 사라진다

 수많은 생물이 목숨을 잃는다

 수많은 생물이 목숨을 빼앗긴다


  이 자리에서는 “어떻게 된다”는 뜻에서 한자말 ‘결과’를 씁니다. “수많은 생물을 죽여 없애는 결과를 낳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적고 보면 어딘가 어설픕니다. 모양새는 한국말이지만 영 한국말답지 않습니다.


  보기글을 통째로 손질해서 “열대숲을 자꾸 무너뜨린다. 이리하여, 숲을 베거나 불태우는 사이 수많은 생물이 목숨을 빼앗긴다.”처럼 다시 써 봅니다. 이 보기글에서는 “결과를 낳는다”를 글 끝에 넣지 말고, “이리하여”나 “그래서”를 글 앞에 넣어야지 싶습니다. 이음말을 글월과 글월 사이에 넣어야 하는데, 외국말을 한국말로 옮기면서 뒤죽박죽으로 글을 썼구나 싶습니다. 4337.5.25.불/4347.10.4.흙.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이를테면 나무와 광물을 엄청나게 써대는 사람들은 끝없이 쓰고 또 쓰면서 가난한 원주민 삶터인 열대숲을 자꾸 무너뜨리고, 숲을 베거나 불태우는 사이 수많은 생물을 죽음으로 내몰기까지 한다


“예(例)를 들어”는 “보기를 들어”나 “이를테면”으로 다듬고, ‘목재(木材)’는 ‘나무’로 다듬으며, “소비(消費)계층(階層)의 만족(滿足)을 모르는 수요(需要)는”는 “소비계층이 쓰고 또 쓰면서”나 “소비계층이 끝없이 쓰기만 하면서”로 다듬습니다. “원주민(原住民)들의 삶터”는 “원주민 삶터”나 “토박이들이 사는 터”로 손보고, “열대우림(-雨林)의 파괴(破壞)를 부추기고 있고”는 “열대숲을 자꾸 무너뜨리고”나 “열대숲을 더 망가뜨리고”로 손보며, “삼림(森林)벌채(伐採)와 소각(燒却)을 통(通)해”는 “숲을 베거나 불태우는 사이”로 손봅니다. “멸종(滅種)케 하는”은 “멸종시키는”이나 “없애고 마는”이나 “죽여 없애는”이나 “없애 버리는”으로 손질하고, “낳고 있다”는 “낳는다”로 손질합니다.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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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파람을 불어요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123
에즈라 잭 키츠 지음, 김희순 옮김 / 시공주니어 / 199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439



노는 아이와 어른

― 휘파람을 불어요

 에즈러 잭 키츠 글·그림

 김희군 옮김

 시공주니어 펴냄, 1999.5.20.



  어제 낮 우리 집 네 사람은 면소재지까지 씩씩하게 걸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군내버스를 탔지요. 네 살 작은아이가 처음으로 면소재지까지 혼잣힘으로 걸었습니다. 다만 면소재지 들어서는 어귀에서 작은아이가 힘들다며 칭얼거려서 아버지가 안고 걸었습니다.


  네 살 작은아이가 다른 사람 도움을 받지 않고 2킬로미터를 걸은 일은 처음입니다. 그러나, 길을 걷기만 할 적에는 이만 하지만, 집에서 누나와 뛰노는 삶을 돌아본다면, 2킬로미터뿐 아니라 10킬로미터도 달리지 싶어요. 그야말로 쉬잖고 뛰고 달립니다. 하루 내내 이리 달리고 저리 뜁니다.



.. 오, 피터는 얼마나 휘파람을 불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  (7쪽)





  군내버스를 타고 마을 어귀에서 내립니다.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 즈음 걸어간 길을 군내버스는 2∼3분 만에 데려다 줍니다. 마을 어귀에서 내린 작은아이는 졸음이 오고 힘들어 울음을 터뜨리려 합니다. 이때, 마을 어귀에서 쉬던 마을 할매 두 분이 우리를 부릅니다. 할머님네 ‘다 큰 아이들’이 어릴 적에 놀던 장난감이 있는데 가져가지 않겠느냐고 물으십니다. 할머님네 손자한테 갖고 놀라고 보여주어도 요새는 컴퓨터이니 로봇이니 다른 것만 쳐다보고 ‘짜맞추는 조각놀이’는 안 쳐다본다고 해요.


  마을 할매 한 분이 깨끗하게 씻어서 말렸다고 하는 조각놀이 장난감은 얼마나 오래되었을까요. 스무 해는 훨씬 넘었을 테고, 서른 해는 넉넉히 되었을 테지요. 서른 해를 웃도는 장난감일 텐데, 이 장난감을 이 깊은 시골마을에서 장만하기까지 얼마나 애쓰셨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값이 꽤 들었을 테고, 장만하려고 읍내에 다녀오셨거나, 아니면 순천이나 광주나 서울에 다녀오셨을는지 모릅니다. 예전에는 이 시골마을에서 ‘짜맞추는 조각놀이’는 이웃 동무한테 엄청나게 눈길을 받고 사랑을 모았으리라 생각합니다.



.. 피터는 종이상자에서 나와 집으로 향했습니다. 주머니에서 색분필을 꺼내 길고 긴 선을 그리며 갔습니다 ..  (14쪽)



  일곱 살 큰아이가 조각놀이 상자를 영차영차 듭니다. 꽤 묵직한데 혼자 집까지 들고 가겠노라 합니다. 그러고는, 두 아이는 졸음과 고단함 모두 잊고 눈을 말똥말똥 빛내며 저녁까지 해 넘어가는 줄 모르고 놉니다. 온 하루를 조각놀이 장난감으로 보냅니다.


  잠자리에 들 즈음 큰아이는 조각놀이 장난감에서 떨어집니다. 그림책을 읽고, 종이를 펼쳐 그림을 그립니다. 작은아이는 내내 조각놀이 장난감에 달라붙습니다. 잠자리에 들기 앞서까지 만지작거리다가, 자리에 눕혀 이불을 덮고 팔다리를 주무르니 어느새 까무룩 잠듭니다. 이튿날 아침까지 한 차례도 잠을 깨지 않습니다.


  큰아이도 밤새 잠을 한 차례도 깨지 않아요. 둘 모두 지난 하루가 엄청나게 긴 나날이었구나 싶습니다. 신나게 걷고, 마음껏 달리고, 거침없이 노래하고, 즐거이 어울려 복닥복닥 조각맞춤놀이를 했으니, 많이 고단했겠지요. 오늘 아침에 새로 일어나면 다시 조각맞춤놀이로 하루를 열 텐데, 오늘은 또 어떤 다른 놀이를 누리면서 보낼까 궁금합니다.





.. 피터는 어른처럼 보이려고 아빠의 모자를 써 보았습니다. 그리고 거울을 들여다보며 다시 휘파람을 불어 보았습니다. 여전히 휘파람 소리는 나지 않았습니다 ..  (19쪽)



  에즈러 잭 키츠 님이 빚은 그림책 《휘파람을 불어요》(시공주니어,1999)를 읽습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어린이는 휘파람을 불고 싶어 용을 쓰지만 도무지 안 됩니다. 이리 해도 안 되고 저리 해도 안 됩니다. 얼른 어른이 되면 휘파람을 불 수 있을까 싶어서 아버지 모자를 살며시 씁니다. 그러나 안 됩니다.


  아이는 몹시 서운합니다. 그래도 짐짓 아버지인 척하면서 어머니한테 다가가서 ‘아버지 흉내놀이’를 합니다. 아이 어머니는 아이가 아버지 모자를 썼어도 나무라지 않습니다. 아이가 하는 놀이를 고스란히 받아줍니다.


  아이는 바깥으로 나갑니다. 다시 뛰놉니다. 종이상자에도 들어가고 땅바닥에 그린 금을 따라 달리기도 합니다. 한참 놀이에 빠져 땀을 흘리던 어느 때에 갑자기 휘파람이 나옵니다. 어라, 휘파람이?


  그럼요. 휘파람은 누구나 불 수 있어요. 휘파람을 늘 생각하고, 언제나 휘휘 입으로 소리를 내고 혀와 입을 잘 오므리면서 생각하고 다시 생각하면, 드디어 휘파람을 불 수 있어요. 즐겁게 놀고 기쁘게 마음을 쏟으면 휘파람쯤! 거뜬히 해냅니다.


  즐겁게 노는 아이는 마음 가득 즐거운 기운이 넘칩니다. 즐겁게 놀며 어른이 된 사람은 언제나 즐겁게 웃고 노래하면서 일합니다. 이리하여, 즐거운 삶을 가꾸는 새로운 어른은 즐겁게 태어날 새로운 아이를 맞이해요. 즐거운 놀이가 즐거운 놀이를 낳습니다. 즐거운 놀이는 새롭게 이어져서 아름다운 사랑으로 태어납니다.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학원이나 학교에 매이지 말고, 아이들이 어디에서나 기쁘게 뛰놀 수 있기를 바랍니다. 노는 아이가 사랑스럽습니다. 놀 줄 아는 아이가 동무와 이웃을 사랑할 줄 압니다. 4347.10.4.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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