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말도 익혀야지

 (564) 위 2 : 윤리적 가정 위에서


두 사람은 모두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적절한 윤리적 가정 위에서, 외면상으로는 매우 합리적인 태도로 행동하고 또 반응한 듯하다

《시몬 비젠탈/박중서 옮김-해바라기》(뜨인돌,2005) 159쪽


 적절한 윤리적 가정 위에서

→ 윤리로 알맞게 어림을 하고

→ 윤리로 알맞게 헤아리면서

→ 윤리를 알맞게 생각하면서

 …



  보기글에 나온 “가정 위에서”는 잘못 쓰는 말투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으레 “가정 下에서”나 “가정 아래”처럼 쓰는 분도 있는데, ‘下’를 넣든 ‘아래’를 넣든 ‘위’를 넣든, 또 ‘上’을 넣든 모두 잘못 쓰는 말투입니다.


  한자말 ‘가정’을 그대로 쓰고 싶다면, “가정에서”라고만 적어야 합니다. 앞말도 한자말을 그대로 살리고 싶다면, “적절한 윤리를 바탕으로 가정하면서”처럼 적어야 할 테고요. 왜냐하면, 한국말은 한국 말법으로 적어야지, 서양 말법이나 번역 말투로 적을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요즈음은 “생각 위에서”나 “마음 위에서”나 “사랑 위에서”나 “믿음 위에서”처럼 말하는 사람도 볼 수 있습니다. 엉뚱하게 붙이는 ‘위’인 줄 못 깨닫는 사람이 제법 많고, 이런 말투가 자꾸 퍼지기만 합니다. 이런 말투를 바로잡는 사람이라든지, 이런 말투가 잘못인 줄 알려주는 사람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지난날과 달리 외국책을 한국말로 옮기는 일이 잦습니다. 앞으로도 외국책은 한국말로 많이 나오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외국책을 한국말로 옮기면서 한국말로 알맞게 옮기지 않으면 어찌 될까 근심스럽습니다. 번역을 하는 분들은 창작을 하는 분들 못지않게 한국말을 더 꼼꼼히 살피고 배우면서 슬기롭게 가다듬어야지 싶습니다. 창작을 하는 분들은 한국말 학자나 한국말사전 편찬자 못지않게 한국말을 더 찬찬히 헤아리고 익히면서 아름답게 가꾸어야지 싶습니다.


  삶을 살리면서 말을 살리고, 말을 살리면서 삶을 살리는 줄 모두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기를 빌어요. 삶과 말은 늘 한동아리인 만큼, 말을 새롭게 배우고 꾸준히 갈고닦는 삶이란, 스스로 아름답게 거듭나는 길이 되리라 봅니다. 4339.6.8.나무/4347.10.6.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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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모두 사람이 하느님 모습을 따라 지었다는 윤리를 알맞게 생각하면서, 겉보기로는 매우 올바르게 움직이고, 또 받아들인 듯하다


“두 사람은 모두 인간(人間)이”에서 같은 말이 잇달아 나오니, “둘은 모두 사람이”로 다듬고, “하느님의 형상(形象)을 따라 창조(創造)되었다는”은 “하느님 모습을 따라 지었다는”으로 다듬습니다. 그런데, “적절(適切)한 윤리적(倫理的) 가정(假定)”이란 무엇일까요? 알맞은 윤리를 바탕으로 삼아 임시로 하는 생각이라는 뜻이 될 텐데, 무엇을 가리키는 셈일까요? ‘외면상(外面上)으로는’은 ‘겉보기로는’이나 ‘겉보기에는’이나 ‘겉으로 보면’이나 ‘겉으로 보기에는’으로 손봅니다. “합리적(合理的)인 태도(態度)로 행동(行動)하고 반응(反應)한”은 “올바르게 움직이고 또 받아들인 듯하다”나 “올바르게 받아들이고 또 움직인 듯하다”로 손질합니다.


..


 우리 말도 익혀야지

 (996) 위 10


미모사 부인은 멍한 얼굴로 집으로 돌아와 의자 위에 그만 털썩 주저앉았어요 … “홍당무 부인 머리 위에서!”

《미셸 코르넥 위튀지/류재화-모자 대소동》(베틀북,2001) 11, 55쪽


 의자 위에 털썩 주저앉았어요

→ 걸상에 털썩 주저앉았어요

 부인 머리 위에서

→ 아주머니 머리에서



  파리나 모기가 날다가 어디에 앉습니다. 그렇지요. ‘어디에’ 앉습니다. ‘어디 위에’ 앉지 않습니다. ‘콧등’에 파리가 앉고, ‘팔뚝’에 모기가 앉습니다. ‘콧등 위’나 ‘팔뚝 위’에 앉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걸상에 앉습니다. ‘걸상’에 앉을 뿐입니다. 집에 침대가 있으면 ‘침대’에 눕습니다. 그뿐입니다.


  공을 던진다면 “걸상 위로 넘기도록 공을 던진다”고 하겠지요. 공놀이를 하다가 “공을 담 위로 넘긴다”고 합니다. ‘위’를 넣으면 어느 곳을 훌쩍 넘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걸상 위에서 붕붕 나는 벌”이라든지 “머리 위에서 팔랑팔랑 나는 나비”처럼 적어야 올바릅니다. 4347.10.6.달.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미모사 아주머니는 멍한 얼굴로 집으로 돌아와 걸상에 그만 털썩 주저앉았어요 … “홍당무 아주머니 머리에서!”


‘부인(夫人)’은 ‘아주머니’나 ‘댁’으로 다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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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 - 비폭력 교육혁명가 비노바 바베의 배움과 삶, 교육 이야기
비노바 바베, 김성오 옮김 / 착한책가게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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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배움책 26



새롭게 가꾸어야 할 시골

― 아이들은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

 비노바 바베 글

 김성오 옮김

 행복한책가게 펴냄, 2014.9.20.



  2013년 정부 통계를 보니, 한국에서 도시에 사는 사람이 92퍼센트라 하고, 한국에서 직업으로 농업을 적는 사람이 6퍼센트라 합니다. 앞으로 92퍼센트는 더 늘어날 테고, 6퍼센트는 더 줄어들리라 느낍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젊은이는 그대로 도시에 눌러앉을 테며, 시골에서 나고 자란 젊은이까지 도시로 들어갈 테지요.


  오늘날 한국에서 아이를 학교에 넣으면, 도시에서는 도시살이만 가르치고 시골에서는 도시살이를 가르칩니다. 도시에서도 시골에서도 모두 도시 이야기만 가르칩니다. 도시에서 시험을 치러서 잘 붙도록 하는 재주만 가르치는 학교입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아이를 학교에 보낸다고 한다면, 이 아이들이 ‘시험 잘 보는 재주’를 익혀서 ‘회사원이나 공무원 되어 돈 잘 벌도록’ 하려는 뜻이라고 할 만합니다.


  시골 초·중·고등학교에서조차 모내기나 풀베기나 나물뜯기 같은 일을 가르치지도 않고 보여주지도 못하며 알려주지도 않습니다. 도시에 있는 초·중·고등학교는 이런 일을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해마다 가을이면 온 나라가 ‘입시지옥’ 잔치판이 됩니다. 신문이고 방송이고 온통 입시지옥 이야기입니다. 막상 가을에 가을걷이 일손을 거든다든지, 가을철 바쁜 시골마을을 돌아보려는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신문기자나 방송피디는 죄다 도시에서 살아요. 시골살림을 모릅니다. 시골살림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도시이고 모든 것이 도시일 뿐입니다.



.. 37년 전, 나는 대학을 떠나 지혜를 찾아 나섰습니다. 학교는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쳤지만, 그중에 지혜는 없었습니다 … 오늘날 괴상한 교수법이 삶의 조화로운 일체성을 토막 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교육을 받는답시고 인생의 첫 십오 년 혹은 이십 년을 통째로 쓰면서도, 살아가면서 일상적으로 해야 할 일들은 회피합니다 … 인간은 이 무한한 세계에 있는 모든 것들에서 끊임없이 배웁니다. 시냇물은 막임없이 흘러갑니다. ‘돌 하나하나마다 교훈이 서려 있고, 흘러가는 실개천도 지식의 원천’입니다 … 아버지는 아이의 머릿속에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쑤셔넣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학교에서도 그와 똑같이 대합니다 … 신은 언제나 정말 경이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까닭에, 어느 한 구석에 잠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  (10, 39, 50, 54, 340쪽)



  요즈막에 ‘글쓰기’ 이야기가 많이 도드라집니다. 예전에는 ‘논술’이었는데, 이름만 살짝 바꾸어 ‘글쓰기’를 들먹입니다.


  글쓰기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글쓰기는 뜻있고 값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글쓰기를 왜 해야 하는가부터 살펴야지 싶습니다. 글쓰기를 하는 즐거움과 보람과 뜻부터 살펴야 한다고 느낍니다.


  글쓰기란 글을 쓰는 일입니다. 글을 쓰려면 말이 있어야 합니다. 글은 말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말이 없으면 글을 쓰지 못해요.


  말이란 이야기입니다. 이야기가 있기에 말을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주고받을 이야기가 있어 말을 꺼내는 삶이기에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없으면 글을 쓸 수 없어요.


  생각해 봅니다. 오늘날 학교나 사회에 이야기가 있을까요? 오직 시험공부만 시키는 학교에서 이야기가 있을까요? 교과서와 문제집만 들여다보도록 시키는 어른 사회에 무슨 이야기가 있을까요?


  이야기가 없는 학교요 교육이며 사회인데, 아이들더러 글쓰기를 하라고 시킵니다. 자, 그러면 아이들은 뭘 쓰나요? 아이들은 뭘 써야 할까요? 아이들은 아무런 이야기가 없는데 아이들더러 글쓰기를 하라고 시키고, 글쓰기 책을 펴내며, 글쓰기 강의를 하고, 글쓰기 학원이 문을 엽니다.



.. 놀이를 하는 동안 그 아이에게 바깥세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놀고 있는 아이들은 오직 놀이에만 몰입합니다 … ‘교육은 의무’라는 식의 틀에 박힌 생각 대신에, ‘교육은 즐거움’이라는 아주 자연스럽고 고무적인 생각을 키워 나가야 합니다 … 자연 상태에서 인간이 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류 전체에 대한 모욕일 뿐만 아니라 절망을 가르치는 것이기도 합니다. 만약 인간이 그 근본부터 악하다면 교육에는 희망이 없게 됩니다 … 진짜 ‘나’는 결코 망가지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나의 몸이 망가지고 때가 끼었을 때 그것을 고치고 씻어내는 존재가 나입니다 … 작은 무기로 자신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군인은 더 큰 무기를 집어듭니다. 그리고 그것들조차 충분치 않다고 판단되면 한층 더 파괴적인 무기에 의존합니다 … 우리는 아이들에게 자기를 때리는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복종하지 말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아이들은 맞는 것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일상적인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  (55, 56, 57, 66, 337, 353쪽)



  아이나 어른 모두 글쓰기를 할 만합니다. 글쓰기를 하면서 삶을 새롭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글쓰기에 앞서 먼저 삶이 있어야 합니다. 삶이란 이야기이지요. 이야기란 삶이지요. 다시 말해서, 삶이 없고 이야기가 없는 사람들이 글솜씨나 글재주를 키운다고 하면 어떤 일이 생길는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글솜씨나 글재주를 부려서 쓰는 글이 우리한테 얼마나 즐겁거나 반갑거나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울 만한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알맹이 없는 입시지옥이 되면, 아이들은 무엇을 배울까요? 교육이 아니라 입시지옥만 있는 우리 사회에서,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무엇을 배울까요?


  배울 것 없는 학교에서 ‘시험 잘 치는 솜씨’와 ‘글 만지는 재주’만 키운다면, 이런 아이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시험공부와 글재주만 키운 아이들이 사랑을 속삭일 수 있을까요? 시험공부와 글재주만 있는 아이들이 아이를 낳아 돌볼 수 있을까요? 시험공부와 글재주로만 살아온 아이들이 밥·옷·집을 어떻게 마련할까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제도권 학교교육은 모든 아이들을 기계 부속품이 되도록 내몹니다. 모든 아이들이 밥·옷·집을 돈으로 사서 쓰고 버리도록 길들이려는 제도권 학교교육입니다.


  어느 교과서에도 밥을 짓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어느 교사도 옷을 짓는 이야기를 가르치지 못합니다. 어느 학교도 집을 짓는 이야기를 보여줄 수 없습니다.


  밥도 옷도 집도 없는데, 지식만 있습니다. 밥과 옷과 집은 없으면서, 온갖 정보와 책은 넘칩니다. 인터넷과 신문과 방송도 넘치지요.



.. 얼마나 많이 배웠든 간에 세상은 여전히 모르는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사실을 제대로 깨달은 사람일수록 더 겸손할 것입니다 …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참된 지혜는 어떤 무기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드는 수단입니다. 교육은 비폭력의 힘만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하고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실천하지 않고는 결코 진정으로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 정녕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만약 그 아이들이 날마다 두세 시간씩 책만 들여다보면서 보낸다면 다른 것들을 배울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 아이들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납니다. 그리고 모국어도 엄마한테서 배웁니다. 정부는 단돈 1원도 안 들입니다. 이것이 제가 무상교육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  (67, 76, 83, 85, 119쪽)



  신문사와 방송국은 모조리 사라져도 됩니다. 대학교 또한 몽땅 문을 닫아도 됩니다. 초등학교뿐 아니라 중학교와 고등학교까지 죄다 없애도 됩니다. 이렇게 한다 한들 나라가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골 논밭을 모조리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덮어 보셔요. 어떻게 될까요? 다 죽습니다.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사람을 몽땅 도시로 끌어들여서 공장 노동자로 바꾸거나 회사원이나 공무원으로 바꿔 보셔요. 어떻게 될까요? 다 죽습니다.


  4대강사업이 끔찍한 까닭은 막공사를 밀어붙인 독재정권 때문이 아닙니다. 4대강사업은 시골을 무너뜨리고 숲과 들과 냇물을 짓밟았기 때문에 끔찍합니다. 새만금이나 시화호가 왜 무시무시했겠습니까? 밀양 송전탑이나 제주 강정마을이나 평택 대추리가 왜 슬펐겠습니까? 이는 모두 시골을 짓이기거나 죽음으로 내몰기 때문에 무시무시하고 슬픕니다.


  아이들은 손수 흙을 만지는 길을 배워야 합니다. 아이들은 쌀이 어떻게 나오고, 밥을 어떻게 지으며, 볍씨는 어떻게 심어서 돌봐야 하는가를 배워야 합니다. 아이들은 오이심기 가지심기 호박심기 당근심기뿐 아니라, 나무 한 그루를 돌보는 일도 찬찬히 배워야 합니다. 아이들은 흙을 살리는 길을 배워야 합니다. 아이들은 나물과 풀을 샅샅이 배워야 합니다.


  아이들은 농약이나 비료나 항생제나 농기계를 배우지 말고, 시골과 들과 숲을 배워야 합니다. 먼먼 옛날부터 쉰 해 앞서까지 이 나라 골골샅샅에서 이루어진 ‘숲살이’와 ‘들살이’와 ‘바다살이’를 깨달아야 합니다.



.. 도시가 농사와 유리되어 있다는 사실은 엄청난 불행입니다. 인간의 삶에서 이보다 더 큰 손실은 없기 때문입니다 … 풀과 나무와 돌과 흙, 햇살과 바람이 있는 탁 트인 자연 속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즐거움이며 얼마나 가슴 벅찬 축복인지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즐거움을 모릅니다. 그러니 그 가련한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 인간이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살게 되면 충분한 만족과 넘치는 기쁨을 누리게 되어서, 더는 다른 인공적인 쾌락을 추구하지 않게 됩니다 … 어떤 사람은 늘 약을 먹는데도 병세가 계속 악화되기만 합니다. 병과 약이 함께 넘쳐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 현대의 노동자들은 하루에 여덟 시간을 공장 안에 갇혀서 일합니다. 그곳에는 맑은 공기도 기쁨도 없습니다. 그들의 노동은 지식과 유리되어 있으며, 즐거움마저도 영화 등을 통해서 ‘제공받아야’ 합니다. 그들의 노동에는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  (89, 92, 98, 115쪽)



  삶이 서야 이야기가 흐릅니다. 삶이 서면서 이야기가 흘러야 사랑이 싹틉니다. 삶이 서면서 이야기가 흘러 사랑이 싹틀 때에, 비로소 가르치고 배우는 노래가 샘솟아요.


  예부터 한겨레뿐 아니라 지구별 모든 겨레는 어른이 아이한테 노래를 들려주면서 삶을 가르쳤습니다. 예부터 어느 겨레 어느 나라에서든, 아이들은 어른한테서 노래를 들으면서 삶을 배우고 물려받았습니다.


  민요나 노동요가 아닌 ‘노래’입니다. 전래동화나 구전설화가 아닌 ‘이야기’입니다. 구비문학이나 민중문화가 아닌 ‘삶’입니다. 노래는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는 삶이 됩니다. 삶은 노래로 거듭나고 노래는 이야기로 태어납니다.


  아이들이 배울 것은 노래와 이야기와 삶입니다. 아이들이 물려받을 것은 노래와 이야기와 삶입니다. 어른이 가르칠 것은 노래와 이야기와 삶입니다. 어른들이 물려줄 것은 노래와 이야기와 삶입니다. 그리고, 어른은 사랑스러운 몸짓과 눈길과 손길로 노래와 이야기와 삶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즐겁게 노래와 이야기와 삶을 귀여겨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지구별 어느 곳에서도 학교란 없었어요. 우리 집이 학교이고 우리 마을이 학교였습니다. 우리 숲과 들과 바다가 학교였어요. 우리 어버이가 교사요, 우리 아재와 아지매와 할배와 할매가 교사였습니다.


  오늘날 도시 문명 사회에서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면서 즐거운 배움터인 보금자리를 와장창 무너뜨리거나 깨부숩니다. 이러면서 시멘트 건물을 뚝딱뚝딱 올려 ‘학교’라는 이름을 붙이고 ‘교육’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씌웁니다.



.. 최근 30년간 저는 하루하루를 물 긷기, 곡식 찧고 빻기, 쓰레기 치우기, 실잣기, 천짜기, 면화 고르기, 목공일 등을 하면서 보냈습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이런 일을 함으로써 저의 지적 능력이 감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엄청나게 나아졌다는 것입니다 … 교사가 어린이가 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어린이가 성장하지 않으면 그 아이는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 진정한 앎은 100퍼센트를 기억해야 합니다. 제대로 된 차파티를 30퍼센트만 만들 수 있는 요리사를 누가 고용하겠습니까? 어중간하게 알아서는 안 됩니다. 완전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 머리와 손발이 하나가 되어서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은 잘해 내지만 그 일의 전 과정을 말로 잘 설명해 내지 못하는 사람은 그 기능을 완전히 꿰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  (109, 155, 171, 186쪽)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부가 무슨 구실을 하는지 꿰뚫어보아야 합니다. 도시 문명 사회는 오직 돈으로 굴러갑니다. 학교도 늘 돈으로 굴러갑니다. 대학교 배움삯이 얼마나 비싼지 보셔요. 돈이 아니면 대학교가 없습니다. 대학교 졸업장은 돈으로 사고파는 ‘면죄부’와 같습니다. 성적표를 얻으려고 오늘날 거의 모든 어버이가 아이들을 입시지옥으로 몰아세웁니다. 여느 어른들도 가녀린 아이들을 사랑으로 보듬기보다는 성적표를 들이밀면서 다그칠 뿐입니다.


  교육 없는 한국이고, 사랑 없는 한국입니다. 제도권과 입시와 졸업장만 있는 한국입니다. 돈만 판치는 한국입니다. 꿈이나 노래가 흐르지 않는 한국입니다. 상업주의와 경제개발만 춤추는 한국입니다.


  우악스럽고 어리석은 한국이라 할 텐데, 이런 한국에도 한 줌짜리 조그마한 빛줄기가 흘러 반짝반짝 어여쁜 책이 한 권 나옵니다. 비노바 바베 님이 쓴 《아이들은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행복한책가게,2014)입니다.



.. 진정으로 삶에 유익하다면 그것은 삶에 흥미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선사할 것입니다. 또한 그것들을 배울 때에는 즐거운 방법으로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 역사는 권력을 가진 자의 입장에 따라서 기술됩니다. 그들은 과거의 사건들을 사람들의 정신을 호도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합니다 … 역사라는 미명 하에 모든 사람들의 사고가 강제로 특정 형태를 취하게 되었고, 그 결과 온 국민이 선입견으로 가득 차게 되어서 … 새로운 역사를 만들겠습니까, 아니면 그저 낡은 역사책이나 읽겠습니까 … 우리의 삶에서 그토록 귀중한 사실인 어머니의 사랑은 결코 역사에 나오지 않습니다 … 인간은 자기 자신의 인간성에 대한 역사는 결코 쓰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의 인간성에 위배되는 역사만을 씁니다 ..  (209, 221, 222, 225쪽)



  인도사람 비노바 바베 님은 ‘학교 없는 마을’을 이야기합니다. 이녁은 ‘돈을 들이지 않는 배움’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여, ‘시골에서 꽃피울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마땅합니다. 아주 마땅합니다. 마을에는 학교가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마을은 마을 그대로 배움터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마을에서 흙짓기와 흙살림을 배웁니다. 아이들은 마을에서 아이낳기와 동생보기를 배웁니다. 아이들은 마을에서 밥짓기와 옷짓기와 집짓기를 배웁니다. 아이들은 마을에서 이웃사랑과 들놀이를 배웁니다. 아이들은 마을에서 모든 삶을 고스란히 배웁니다. 마을은 통째로 배움터입니다.


  한국뿐 아니라 지구별 어느 나라에서도 고작 쉰 해 앞서까지만 해도 ‘모든 시골’은 ‘스스로 삶을 지어서 가꾸는 터전’이었습니다.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합니다. 고작 쉰 해 앞서까지만 해도 지구별 모든 시골은 ‘완전한 자급자족’을 했습니다. 그런데, 고작 쉰 해 사이에 지구별 거의 모든 시골이 경제 식민지가 되고 문화 식민지가 되며 종교 식민지까지 되고 맙니다. 게다가 시골마다 쓰레기가 넘쳐요. 비닐과 농약 쓰레기뿐 아니라, 도시 관광객이 버린 쓰레기까지 넘칩니다. 이뿐인가요? 도시사람이 쓸 전기를 뽑는다면서 시골에 엄청나게 큰 발전소를 짓고 송전탑을 수없이 때려박습니다. 도시와 도시를 잇는다면서 고속도로와 고속철도를 끝없이 자꾸 때려짓습니다. 도시사람 ‘여가생활’ 때문에 시골에 골프장이나 관광단지나 호텔 따위를 새롭게 때려잡습니다.



.. 모든 종교에서, 순수한 마음을 갖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은 채 어떤 의례적인 형식이나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들을 해야만 덕을 쌓을 수 있다는 믿음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 지성을 가꾸는 것은 영혼입니다. 그리고 지성이 영혼을 버리고 육체의 집에서 노예가 되면 지성은 부정을 행합니다 … 사람들은 시골에서 사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렇지만 도회지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시골 마을의 정감 어린 분위기와 비교해 본다면, 도회지의 생활이 얼마나 쓸쓸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낡은 관습에 젖은 학교들은 감옥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방학이 필요합니다 … 베짜기에서 우리가 얻는 것은 돈이 아니라 옷이며, 농사일에서 생겨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음식이며, 목공일에서 얻는 것은 돈이 아니라 집이라는 점을 잘 알아야 합니다  ..  (248, 263, 268, 269, 272쪽)



  새롭게 가꾸어야 할 시골입니다. 학교나 도시나 문명이나 경제나 교육 따위는 새롭게 가꿀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도 새롭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학교나 도시나 문명이나 경제나 교육 따위는, 여기에 스포츠라든지 영화라든지 소비문화 모두 새로움이 하나도 없을까요?


  철이 없기에 새로움이 없습니다. 봄철과 여름철과 가을철과 겨울철이라고 하는 철이 없으면 새로움이 없습니다.


  시골은 철이 있기에 새롭습니다. 다만, 오늘날 시골은 도시 문명에 너무 길들고 찌들어서 웬만한 시골은 거의 다 철을 잊거나 잃었습니다. 도시를 떠나 망가진 시골로 간다 한들 달라지지 않습니다. 도시만 떠난대서 되지 않습니다.


  도시에서도 새로운 숲을 지어야 합니다. 시골은 오늘날처럼 망가진 시골 모양이 아닌 ‘숲으로 되살아나는 새로운 시골’로 고쳐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모두 잘 알아야 하는데, 비노바 바베 님이 말하듯이 ‘참답게 배우고 가르치는 삶’은 돈이 한푼조차 안 듭니다. 시골을 참답게 가꾸어 돌보고 누리는 삶도 돈이 한푼조차 안 듭니다.


  곡괭이를 들어 시멘트를 걷으면 됩니다. 한쪽에 시멘트 쓰레기를 잘 쌓아 두면 됩니다. 흙이 드러난 땅을 손바닥과 발바닥으로 잘 쓰다듬으면 됩니다. 바람 따라 풀씨가 날아오도록 하면서, 콩씨를 심고 옥수수씨를 심으면 됩니다. 차근차근 흙을 살리고, 능금씨도 심고 살구씨도 심으며 도토리도 심으면 됩니다.


  잘 생각해야 합니다. 시멘트를 걷고 씨앗을 심는 일에는 돈이 들지 않습니다. 씨앗은 돈으로 사지 말아요. 들과 숲에 있는 씨앗을 받아서 쓰거나 이웃한테서 얻어서 쓰셔요. 도시와 시골 모두 숲으로 푸르게 우거진 터전이 되도록 되살릴 수 있어야 비로소 ‘배우고 가르치는 삶’을 이룹니다. 입시지옥이나 졸업장이나 교과서 따위가 아닌 ‘사람과 사랑과 삶’을 배우고 가르치려면, 도시와 시골 모든 곳에 숲이 우거져야 합니다.


  도시 문명 사회가 숲을 없애는 까닭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정치 권력자와 경제 권력자와 문화 권력자와 종교 권력자가 서로 한통속이 되어 우리들을 ‘종(노예, 기계 부속품, 톱니바퀴)’으로 부리려고 하기 때문에 돈을 내세워 숲을 없애고 시골을 무너뜨립니다. 무상교육이나 무상급식을 해 보았자 교육은 하나도 안 나아져요. 잘 알아야 해요. 우리가 할 일은 무상교육이나 무상급식 따위가 아닙니다. ‘숲’입니다. 학교 운동장에 인조잔디를 못 깔게 해야 합니다. 자동차를 학교로 못 들어오게 막고, 학교에는 주차장을 마련해서는 안 됩니다. 교사도 학생도 손님도 모두 학교에는 두 다리로 걸어서 들어와야 합니다. 학교 건물을 둘러싸고 나무가 우거져야 하며, 조경이나 정원 따위로 나무를 망가뜨리거나 다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돈을 들이는 일은 교육이 될는지 모르나, 배움이나 가르침하고는 동떨어집니다. 돈벌이를 알려주는 일은 교육이 될는지 모르나, 삶이나 사랑하고는 멀어집니다. 아무쪼록, 어른과 아이가 모두 푸른 숲에서 삶을 노래하고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는 즐거운 하루를 누릴 수 있기를 빕니다. 4347.10.6.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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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는 눈빛 60. 움직이고 흐른다



  나는 바깥마실을 다니면서 가방에 늘 공책과 연필을 챙깁니다. 언제 어느 곳을 가더라도 공책과 연필이 가방에 꼭 있습니다. 마을 어귀에서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로 저잣마실을 갈 적에도 몇 시 몇 분에 버스를 타고, 버스삯을 얼마를 치렀다는 이야기를 공책에 적습니다. 마을 어귀에서 읍내까지 버스로 20분 동안 달리는 길에도 틈틈이 이 생각 저 느낌을 적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은 아버지가 이렇게 다니는 모습을 늘 지켜봅니다. 그러고는 이런 모습을 흉내냅니다. 일곱 살 큰아이는 어느 날 공책과 연필을 챙겨 저잣마실을 나옵니다. 큰아이는 걸으면서도 공책에 무엇인가 적습니다. 무엇을 적으려나?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껴서 무엇을 적으려나?


  일곱 살 큰아이가 아는 ‘한글’은 아직 많이 짧습니다. 혼자 떠올려서 쓸 수 있는 글은 아주 적습니다. 그러나, 큰아이는 큰아이 나름대로 아는 한글 테두리에서 쓰고 싶은 이야기를 차근차근 적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렇지요. 우리는 누구나 아는 대로 글을 씁니다.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니, 알지 못하면서 글을 쓰는 사람도 있기는 해요. 제대로 알지 못해서 제대로 쓰지 못하는 글이 되기는 하지만, 잘 알지 못하는 채 어수룩하게 글을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제대로 알 때에 비로소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제대로 모르는 사람은 제대로 글을 쓰지 못합니다. 어느 한 가지라도 제대로 모르면 ‘제대로 모르는 티’가 나요. 생각해 보셔요. 밥이나 국이나 반찬을 지을 적에 제대로 할 줄 모르면 제대로 모르는 티가 곧바로 드러납니다. 마지막 하나까지 알뜰히 다스리거나 살필 줄 알아야 제대로 밥이나 국이나 반찬을 짓습니다. 아이를 낳아서 돌보는 삶에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알아서 살펴야 합니다. 기저귀를 갈 줄 모르거나, 기저귀를 빨 줄 모르거나, 기저귀를 말려서 갤 줄 모른다면, 아기를 어떻게 돌보겠습니까.


  사진은 겉모습만 찍지 않습니다. 사진은 이야기를 찍습니다. 그러니, 사진을 찍으려면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속속들이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모르는 채 사진을 찍으려 한다면, 이러한 사진에도 ‘제대로 모르는 티’가 스미기 마련입니다.


  기계 다루는 솜씨나 재주가 아닌, 사진에 담는 넋과 마음과 이야기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내가 사진으로 담으려고 하는 이웃이나 모델이나 숲이나 풍경이나 사물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시골을 제대로 모른다면 시골에 와서 무엇을 찍을까요? 축구 경기를 취재하려는 신문사 기자가 축구라는 경기와 축구선수를 모른다면 무엇을 취재하거나 찍어서 기사를 쓸까요?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은 우리 둘레에서 흐르거나 움직이는 삶을 늘 읽어야 합니다. 함께 움직이고 나란히 흐르면서 온마음으로 사진을 마주해야 합니다. 4347.10.6.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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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는 눈빛 59. 사진책을 읽는다



  사진책을 읽는 사람이 퍽 드뭅니다. 사진기를 장만하려고 제법 크다 싶은 돈을 들이는 사람은 많아도, 사진책을 한 권씩 꾸준히 장만하려고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은 드뭅니다. 사진책이 비싸다고들 하지만, 사진기만큼 비싸지는 않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면 사진책을 장만하려고 한 달에 십만 원이나 오만 원쯤은 쓸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고 생각합니다. 한 달에 십만 원이나 오만 원을 사진책 장만하는 데에 쓴다면, 한 달에 사진책을 한두 권쯤 장만한다는 뜻입니다.


  소설책이나 시집을 한 번만 읽고 안 읽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즐겁게 읽은 소설이나 시라면 두 번 세 번 거듭 읽기 마련입니다. 스스로 즐겁게 장만한 사진책이라면 한 번 휘 훑은 뒤 안 쳐다보지 않습니다. 처음 장만한 날부터 두고두고 다시 읽고 되새겨 읽습니다.


  우리가 장만할 사진책은 꾸준히 다시 읽고 새롭게 읽을 만한 사진책입니다. 이름난 사진가가 선보였으니 장만할 사진책은 아닙니다. 이름값 있는 출판사에서 펴냈으니 장만할 사진책은 아닙니다. 사진기를 손에 쥐어 사진을 즐기려는 내 삶을 환하게 밝히거나 곱게 보듬어 줄 만한 사진책을 찬찬히 골라서 장만합니다.


  사진책을 읽는 사람이 눈을 넓거나 깊게 뜰 수 있습니다. 내 이웃과 동무가 얼마나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운 눈길로 온누리를 품에 안는가 하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내 사진밭을 한결 알차면서 기쁘게 일굴 수 있습니다. 사진책을 읽는 까닭은, 무엇보다, 즐겁기 때문입니다. 따순 손길로 이웃한테 다가서면서 사진을 찍은 사진벗을 만날 수 있어 즐겁습니다. 따순 눈길로 이웃을 마주하면서 찍은 사진을 그러모은 사진책을 내 가슴에 살포시 안을 수 있어 즐겁습니다.


  적어도 한 해에 열두 권을 장만해 보셔요. 사진책을 한 해에 열두 권씩 장만할 수 있게끔 차근차근 돈을 모아 보셔요. 가장 먼저 장만하고 싶은 사진책을 뽑고, 이 사진책을 한 권 장만했으면, 다음으로 장만하고 싶은 사진책을 하나하나 살펴요. 한 해 열두 권을 장만하고, 두 해와 세 해를 지나고 다섯 해쯤 되면 내 곁에는 사진책이 예순 권 있어요. 다섯 해가 더 흐르면 내 곁에는 사진책이 백스무 권 있어요. 자, 열 해 동안 사진책을 백스무 권 장만했다면, 이 사진책을 가만히 돌아봐요. 나는 열 해에 걸쳐서 ‘백스무 가지 이야기’를 꾸준히 갈무리했습니다. 나한테 아름답거나 반갑구나 싶은 이웃이 빚은 ‘사진 이야기’를 백스무 가지 살피는 동안, 나는 내 나름대로 ‘내가 길어올리는 사진 이야기’를 백스무 가지 찾은 셈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빠듯한 살림에 다달이 사진책 한 권 씩씩하게 장만하며 열 해를 살았으면, 바로 나 스스로 내 사진을 추려서 ‘내 사진책을 빚는 길’을 슬기롭게 알아챌 수 있다는 뜻입니다. 4347.10.6.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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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아이 96. 마당은 노래잔치 (2014.9.11.)



  우리 집은 꽤 작다. 마당은 그리 넓지 않다. 그러나, 이 작은 집에서 두 아이가 마루와 방과 마당을 오가면서 뛰놀 수 있으니 재미있구나 싶다. 아이들이 마루나 방에서 놀면 아이들 웃음소리를 듣고, 아이들이 마당에서 뛰거나 달리면 아이들 노랫소리를 듣는다. 때때로 하모니카를 입에 물고 한참 노랫가락을 흩뿌리면, 나도 나무도 새도 모두 아이가 부는 하모니카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작은 하모니카를 입에 문 작은 아이들이 마당을 노래판으로 바꾼다. 노래잔치가 이루어진다. 바람조차 잔잔하게 가라앉으면서 함께 노래를 귀여겨듣는다. 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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