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그림놀이] 노래 (2014.10.2.)



  이웃님한테 보내려고 그림을 그린다. 사진책을 펴내고 사진강의를 하면서 사진길을 걷는 이웃님한테 ‘노래’를 그려서 보내기로 한다. 노래란 무엇일까? 사진이란 무엇일까? 동그라미 하나가 다른 동그라미를 만나고, 동그라미 안쪽에서 온갖 빛깔로 무지개가 드리운다. 물결이 치고, 꽃과 별이 하나둘 돋더니, 어느새 잎이 나는 나무가 자란다. “흐르는 삶이 고스란히 품에 안겨 사진 한 장”이라고 한 마디를 짤막하게 붙인다. 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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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전쟁
사토 신스케 감독, 오카다 준이치 외 출연 / 미디어허브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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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전쟁

圖書館戰爭, Library Wars, 2013



  책과 책방과 도서관을 이야기감으로 삼은 영화 〈도서관 전쟁〉을 보았다. 이 작품(만화와 영화)에 나오는 이야기는 얼마든지 ‘그럴 만하다’ 싶다.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이와 같은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만할 뿐 아니라, 한국에서는 진작 이런 일이 있었다. 책 하나를 놓고 국가보안법 잣대를 들이밀면서 불태우는 짓이 얼마나 잦은가. 게다가 아직 이런 짓이 끝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스스로 ‘우익’이나 ‘보수’라고 밝히는 이들이 ‘책 불사르기’를 서슴지 않고 저지른다. 또한, 한국에서는 스스로 ‘좌익’이나 ‘보수’라고 밝히는 이들마저 ‘책 불사르기’를 아무렇지 않게 일삼는다. 그러니까, 한국에서는 이쪽이든 저쪽이든 책을 아무렇게나 마주한다.


  다시 말하자면, 평화를 지키겠다면서 군대를 만드는 사람은 평화를 지킬 뜻이 하나도 없다고 할 수 있다. 평화를 지키려면 평화가 평화가 되도록 하는 길을 가야 한다. 도서관을 지키려고 군대를 만들 수 있을까? 그러면, 군대가 있는 도서관은 무엇을 지키는가? 책을 지키는가, 책이라고 하는 껍데기를 지키는가, 책이 있는 도서관을 지키는가, 도서관이라고 하는 껍데기를 지키는가?


  책과 도서관은 지키더라도 숲을 지키지 못한다면 책과 도서관은 모두 사라진다. 최첨단 장비와 시설이 있기에 책과 도서관을 지킬 수 있지 않다. 숲이 있어야 책과 도서관을 지킬 수 있다. 지구별에 물과 바람과 햇볕이 없어도 책과 도서관이 남을 수 있을까? 아니지, 없다.


  우익이든 좌익이든 보수이든 진보이든 모두 덧없다. 이들은 모두 숲 앞에서는 한 줌 재일 뿐이다. 어느 누구라도 밥을 먹으며, 물을 마시고, 바람으로 숨을 쉬면서, 볕을 쬐어야 목숨을 잇고 삶을 누린다. 전두환도 밥을 먹고 똥오줌을 눈다. 독재자 박정희와 이승만도 밥을 먹었으며 똥오줌을 누었다.


  영화 〈도서관 전쟁〉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이 영화는 이야기감을 ‘책과 도서관’에서 따오기만 할 뿐, 막상 보여주려고 하는 이야기는 ‘전쟁과 폭력과 총질’이지 싶다. 그러니까, ‘새로운 총질 싸움’을 보여주려고 하는 영화라고 할까.


  책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손에 연필과 호미를 쥐지, 총이나 칼을 들지 않는다. 책을 올바로 읽은 사람이라면, 시골로 가서 숲과 들을 가꾸지, 도시에서 최첨단시설에 온갖 전쟁무기를 갖추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 4347.10.7.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영화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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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갑자 복사빛 민음의 시 126
정끝별 지음 / 민음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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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69



시와 교수님

― 삼천갑자 복사빛

 정끝별 글

 민음사 펴냄, 2005.4.15.



  내가 곁에 두고 사귀는 ‘교수님’이 있는지 곰곰이 돌아봅니다. 아직 나한테는 ‘대학 교수’ 벗이 없습니다. 앞으로 있을는지 모르지만, 나는 대학 교수라는 사람을 벗으로 사귀지는 않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소설가였다가 교수가 된 사람이라든지, 어린이문학 비평을 조금 쓰다가 교수가 된 사람이라든지, 동화를 쓰다가 교수가 된 사람이라든지, 이것저것 하다가 교수가 된 사람을 둘레에서 곧잘 보는데, 나는 둘레에서 교수가 된 사람은 웬만해서는 다시 안 만나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웃마을에 교수님 한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고흥에서 순천까지 강의를 하러 오갑니다.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교수님이라고 할까요. 강수돌 교수도 시골에서 살며 흙을 만지는 ‘몇 안 되는’ 교수님일 텐데, 이 같은 분이라면 반가우면서 즐거운 벗님이 되리라 느낍니다. 왜냐하면 손에서 흙내음이 나거든요.



.. 앉았다 일어섰을 뿐인데 // 두근거리며 몸을 섞던 꽃들 / 맘껏 벌어져 사태 지고 ..  (늦도록 꽃)



  흙내음이나 땀내음이 몸에 밴 사람일 때에 비로소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흙내음이나 땀내음이 몸에 배지 않고서는 대학교뿐 아니라 초·중·고등학교에서 아이들하고 만날 만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섣부른 소리일는지 모르지요. 어설픈 생각일는지 모르지요. 다만, 내 생각은 뚜렷합니다. 어느 과목을 맡든 어떤 학문을 하든, 어른으로서 아이와 만나는 이라면, 풀과 나무와 꽃과 숲을 언제 어디에서라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느껴요.



.. 파나마 A형 독감에 걸려 먹는 밥이 쓰다 / 변해 가는 애인을 생각하며 먹는 밥이 쓰고 / 늘어나는 빚 걱정을 하며 먹는 밥이 쓰다 / 밥이 쓰다 / 달아도 시원찮을 이 나이에 벌써 / 밥이 쓰다 ..  (밥이 쓰다)



  기저귀를 갈 줄 모르는 사내라면 아버지가 될 수 없다고 느낍니다. 미역국이나 된장국이나 김치찌개뿐 아니라, 한집 살붙이한테 밥을 차려 주며 함께 누리지 못하는 사내라면 아버지뿐 아니라 어버이가 될 수 없다고 느낍니다. 다만, 가시내도 이와 같아요. 가시내이든 사내이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함께 삶을 짓고 함께 삶을 노래하며 함께 삶을 가꿀 때에 비로소 어버이요 아버지나 어머니라고 느껴요.


  그러니까, 누군가한테 무엇을 가르치려는 사람이라면, 먼저 스스로 삶을 짓고 노래하며 가꾸어야 하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날마다 스스로 새롭게 하루를 맞이할 줄 아는 사람일 때에, 비로소 다른 사람과 만나서 이야기를 꽃피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라는 아이들은 삶을 배울 노릇이고 삶을 사랑하면서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식을 보여주거나 들려주거나 알려준다면, 교사도 교수도 아니라고 느껴요. 이런 이들은, 지식만 다루는 이들은, 그저 지식배달부이지 싶어요. 지식배달부는 지식노동자이고, 지식노동자는 지식 한 줌에서 맴도는 사람들이지 싶어요.



.. 세상 흰빛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 // 사라지는 누구의 어깨일까 ..  (먼 눈)



  정끝별 님 시집 《삼천갑자 복사빛》(민음사,2005)을 읽습니다. 언뜻선뜻 비치는 고운 빛줄기를 느끼다가도, 자꾸자꾸 드러나는 지식 어린 푸념을 느낍니다. 수수하면서 보드랍게 흐르는 노래를 듣다가도 왱왱거리는 지식 어린 평론을 느낍니다.


  이 느낌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다가 어느새 마지막 시를 읽고 책을 덮습니다. 시란 무엇일까요. 시는 언제 쓸까요. 시는 누가 읽을까요. 시는 누가 누구하고 나누는 노래일까요.



.. 물만 보면 / 담가보다 어루만져 보다 / 기어이 두 손을 모아 뜨고 싶어지는 손 ..  (물을 뜨는 손)



  시 한 꼭지를 놓고 온갖 비평이나 평론을 붙이는 일이란 덧없다고 느낍니다. 문학비평이나 문학평론은 문학을 죽이는 짓이라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비평이나 평론은 문학을 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평이나 평론은 언제나 문학을 꽁꽁 가두기 때문입니다.


  갖가지 일본 제국주의(강점기 무렵) 한자말이나 미국 제국주의(오늘날 경제 식민지) 영어를 들먹이면서 이론과 논리를 갖춘 문학비평이나 문학평론은 문학을 짓밟기만 한다고 느낍니다.


  왜 문학을 가슴으로 안 읽고 제국주의 이론으로 읽어야 하는지 아리송합니다. 왜 문학을 마음으로 노래하지 않고 제국주의 논리에 맞추어 재거나 따져야 하는지 알쏭달쏭합니다.


  비평가나 평론가가 읊는 글은 노래가 아닙니다. 그래서 비평이나 평론은 전문가 아니면 읽어내지도 못합니다. 아니, 전문가조차 따분하게 여깁니다. 시를 비평하거나 평론한 글을 읽는 시골 흙일꾼은 없습니다. 시를 놓고 이러쿵저러쿵 따지는 글을 읽는 도시 노동자는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시가 문학이라면, 문학이 삶이라면, 삶이 노래라면, 어떤 비평이나 평론도 부질없는 노릇이요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가리 쪼개는 짓이지 싶습니다.



.. 도둑처럼 밤에 들어 세수를 하려는데 / 여섯 살짜리 딸애 칫솔과 내 칫솔이 / 뭉개진 털을 싸 쥐고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다 / 빈 낮 내내 딸애가 부둥켜안고 싶었던 거 ..  (밤의 소독)



  대학 교수도 시를 쓰려면 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대학 교수도 시를 읽으려면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를 쓸 적에는 아무런 이름이 없어야 합니다. 시를 읽을 적에도 아무런 허울이 없어야 합니다.


  마음을 열어 쓰는 시입니다. 마음을 열어 맞아들이는 시입니다. 마음이 움직여 노래가 흐르기에 시가 태어나고, 이러한 시가 마음으로 촉촉히 젖어들면서 가락을 입힌 노래로 거듭납니다.


  시를 하든 동화를 하든 소설을 하든, 즐겁게 문학을 하려는 이들은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라요. 문학은 ‘집’에서 일구는 ‘삶’에서 태어난다고 느껴요. 문학을 하고 싶다면 ‘집’에서 ‘삶’을 노래할 노릇이요, 문학을 더 하고 싶지 않다면, ‘교수’나 ‘교사’가 되어야겠지요. 4347.10.7.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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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그림 읽기

2014.10.2. 큰아이―씨앗 글



  ‘씨앗 그림’을 마무리지은 사름벼리는 살짝 아쉬운 듯하다. 그림을 뒤집더니 뒤쪽에 ‘씨앗 글’을 쓴다. 이제 아무것도 안 보고 스스로 쓸 수 있는 글이다. 입으로 소리를 내는 말을 웬만큼 스스로 쓴다. 씨앗마다 빛깔을 달리하면서 쓴다. 마흔여덟 가지 빛연필이 좋기는 좋다. 그러나 나는 백스물여덟 가지 빛깔이 있는 연필을 장만하고 싶다. 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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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그림 읽기

2014.10.2. 큰아이―씨앗 그림



  아침부터 씨앗에 꽂힌 그림순이는 여러 가지 씨앗을 골고루 그린다. 꽃씨를 그리고 하트씨를 그리다가 사랑씨로 고쳐서 그리고, 수박씨와 포도씨와 해씨와 호박씨와 참외씨와 구름씨까지 그린다. 너야말로 아름다운 이야기씨가 되는구나. 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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