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들보라 짝맞추기 놀이



  산들보라는 누나 곁에서 논다. 누나가 조금만 다른 데로 가도 우는 소리를 내면서 누나 곁에 붙는다. 산들보라한테 누나가 없었으면 어머니나 아버지한테 찰싹 달라붙었을 테지. 큰아이 사름벼리가 지난날에 으레 어머니나 아버지한테 찰싹 달라붙으면서 놀던 모습이 얼핏설핏 떠오른다. 산들보라는 누나가 함께 놀지 않아도 그저 누나가 곁에 있으면 된다. 솜사탕을 먹을 때에 쓰던 작대기를 둘 서로 맞대면서 논다. 4347.10.9.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가을길 책읽기



  가을에 걷는 길은 가을길이다. 봄에는 봄길이고, 여름에는 여름길이며, 겨울에는 겨울길이다. 철마다 길이 다르다. 철마다 길빛이 다르고, 길에서 흐르는 냄새가 다르다. 아이와 함께 걷는 길이라면, 가을에는 가을길이 되고 봄에는 봄길이 되는 길일 때에 서로 즐거우면서 사랑스러우리라 느낀다. 겨울인데 겨울길인 줄 느낄 수 없거나 여름인데 여름길인 줄 헤아릴 수 없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어떻게 삶을 꾸리는 셈일까.


  시골에서이든 도시에서이든 누구나 가을이면 가을길을 저벅저벅 또박또박 씩씩하게 걸을 수 있기를 빈다. 가을길에는 가을빛을 보고 가을내음을 맡을 수 있기를 빈다. 가을에 흐르는 멧새와 풀벌레 노랫소리를 듣고, 아직 겨울잠에 들지 않은 개구리가 마지막으로 베푸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길을 걸을 수 있기를 빈다. 자동차로 싱싱 달리는 길이 아니라, 아이들은 달리고 어른들은 걸을 수 있는 길을 모든 사람이 누리기를 빈다. 4347.10.9.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설희 11
강경옥 글.그림 / 팝툰 / 201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화책 즐겨읽기 393



삶과 죽음 사이

― 설희 11

 강경옥 글

 팝툰 펴냄, 2014.9.29.



  사람들은 살아갑니다. 죽지 않았으니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죽습니다. 살지 않으니 죽습니다. 그런데, 산 목숨으로 오늘을 맞이하지만, 산 목숨답게 하루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제 막 숨을 거두었으나 모든 것을 홀가분하게 내려놓고 즐겁게 새로운 곳으로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리저리 휘둘리면서 산 목숨일 때에 얼마나 즐거운 산 목숨일까 궁금합니다. 휘둘릴 것도 붙잡을 것도 없이 홀가분하게 새로운 곳으로 넋이 날아갈 수 있다면, 이때에는 어떤 이야기가 될는지 궁금합니다.


  강경옥 님 만화책 《설희》(팝툰,2014) 열첫째 권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어느 연속극과 벌여야 한 실랑이 탓인지 모르나, 만화책 《설희》를 이루는 뼈대는 일찌감치 드러나야 했습니다. 이제 만화책 《설희》에 나오는 여러 사람들은 ‘설희가 어떤 삶’인지 거의 알아챕니다. 오백 살 가까이 죽지 않고 살아온 나날을 어렴풋하게 읽습니다.





- ‘말이 힘을 가진다는 느낌. 정말로 죽을 수 있다는 순간 내가 정말 죽고 싶은 것인지 의심이 갈 정도였지.’ (10쪽)

- “너에겐 과거만 중요한 거 같아. 마치 과거만이 해결해야 할 문제인 것처럼. 그래서 그 과거가 다 밝혀지고 해결되면?” (18쪽)



  스스로 오백 살 즈음 살지 않고서야 오백 해 동안 살아온 사람이 어떤 마음일는지 알기는 어려우리라 느낍니다. 그리고, 스스로 쉰 해나 백 해쯤 살다가 죽지 않고서야 쉰 해나 백 해 만에 숨을 거두어 사라지는 사람이 어떤 마음일는지 알기 어렵겠지요.


  오백 살을 살아온 사람은 쉰 해를 살다 죽을 사람이 어떤 마음일는지 읽기 어렵습니다. 쉰 해를 살다 죽을 사람은 오백 살을 살았을 뿐 아니라, 앞으로 오백 살을 더 살 만한 사람이 어떤 마음일는지 읽기 어렵습니다.


  둘은 어떻게 만날까요. 둘은 서로 어떻게 사랑을 속삭일 수 있을까요. 둘은 어떻게 동무나 이웃이 될까요. 둘은 서로 어떻게 꿈을 키울 수 있을까요.





- “어쩌면 너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닐까? 기억하려고는 하고 있어?” (35쪽)

- “세계까지 전쟁으로 들어갔어. 세상은 언제나 변해. 이 전쟁이 끝나도 또 언젠가 전쟁이 나겠지.” (109쪽)

- ‘작은 농담과 일상의 대화. 눈발이 날리는 강원도에서 난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다.’ (161쪽)



  삶과 죽음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알려면, 나 스스로 삶과 죽음 사이에 가야지 싶습니다. 꽃내음을 알려면 나 스스로 꽃내음을 맡아야 하고, 시냇물이 얼마나 싱그럽고 맛난지 알려면 맑게 흐르는 시냇물을 찾아서 두 손으로 떠서 마셔야 합니다.


  아이와 누리는 삶을 알려면 아이를 낳거나 아이를 가까이 두고 돌봐야 합니다. 어느 책을 알거나 말하려면 어느 책을 읽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말을 하는 까닭을 알자면 어떤 사람이 어제와 오늘 어떻게 살았는가를 찬찬히 헤아려야 합니다.


  그저 바라보기만 한대서 알지 않습니다.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면 겉모습은 훑겠으나 속내는 살피지 못해요. 살아야 압니다. 삶도 살아야 알고, 죽음도 살아야 알아요. 그러니까, 만화책 《설희》에 나오는 설희와 다른 아이들은 서로서로 눈앞에 마주하면서도 아주 딴 곳에서 동떨어진 채 사는 듯한 느낌이 될밖에 없습니다. 서로서로 손을 뻗어 살갗을 쓰다듬거나 입을 맞출 수도 있지만, 마음과 넋은 아주 다른 곳에 따로 있습니다.





- ‘누군가를 계속 미워하기에도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걸. 이건 그저 되새김일 뿐.’ (187쪽)

- ‘내가 처음 죽었던 것은 언제였지?’ (194쪽)



  만화책 《설희》는 앞으로 열둘째 권에서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요? 열둘째 권에 이르면 ‘앳된 스물 언저리 젊은이’가 삶과 죽음을 깊이 헤아리거나 돌아볼 수 있을까요?


  별에서 온 어떤 숨결이 설희라는 아이한테 ‘죽지 않는 삶’을 주었습니다. 그러면, 지구별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다른 별 숨결’한테 무엇을 줄 만할까요. 우리 지구별에서는 공해와 매연과 전쟁과 폭력과 입시지옥 따위를 다른 별에 퍼뜨릴 만할까요. 이 지구별에서 우리들은 서로 어떻게 어우러지면서 살아갈는지요. 앞으로 얼마나 더 살고, 앞으로 어떤 일을 얼마나 더 겪어야, 우리는 슬기롭거나 사랑스러운 넋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는지요. 4347.10.9.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말넋 43. 훈민정음과 한글과 한국말

― ‘쉬운 말’과 ‘어려운 말’



  ‘밥값’이라는 낱말이 있습니다. 이 낱말은 세 가지 뜻으로 씁니다. 첫째는 “밥을 먹는 데 드는 값”입니다. 둘째는 “끼니가 될 밥을 먹으며 치르는 값”입니다. 셋째는 “밥을 먹은 만큼 하는 일”입니다. 시를 쓰는 정호승 님은 《밥값》이라는 이름을 붙인 시집을 선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공공기관이든 여느 회사이든 학교이든 ‘밥값’이라는 낱말은 거의 안 씁니다. 으레 ‘식대(食代)’라는 한자말을 씁니다. 밥을 밖에서 사다 먹자고 할 적에도 한자말을 빌어 ‘식당(食堂)’이라는 낱말을 써요. 한국말로 ‘밥집’을 쓰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요즈음은 ‘맛집’이라는 낱말이 꽤 퍼졌습니다. 맛있게 하는 밥집을 가리키는 ‘맛집’일 텐데, 이러한 낱말을 쓰는 흐름을 잘 살핀다면, ‘밥집’이라는 낱말도 앞으로 넉넉히 쓸 만하리라 봅니다. 구내식당이나 학생식당 같은 곳이라면 ‘밥터’라는 낱말을 새로 지을 수 있어요. 책을 사고파는 곳을 가리켜 ‘책방’이라고도 하지만 ‘책집’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책이 있는 곳, 이를테면 도서관이나 서재라 한다면 ‘책터’라는 낱말을 새로 지을 수 있습니다.


  돈을 내고 빨래를 맡기는 곳은 ‘빨래방’입니다. 이와 달리, 예부터 마을에서 빨래를 하려고 모이는 곳은 ‘빨래터’예요. ‘터’라는 낱말은 ‘집’이나 ‘방’과 다른 자리에서 써요. 그래서, 돈을 내고 노래를 부르는 작은 방이라면 ‘노래방’이라 할 테지만, 노래를 즐겁게 듣거나 누리는 곳, 이를테면 ‘음악회관’이나 ‘콘서트장’이나 ‘음악감상실’ 같은 곳은 ‘노래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입시교육으로 찌든 ‘학교’가 아닌 참답게 삶을 배우는 곳을 가리켜 ‘배움터’라는 이름을 새롭게 쓰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글날을 맞이하면 이곳저곳에서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한글은 모든 소리를 담을 수 있는 글이요, 지구별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손꼽는 글이라고 일컫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틀리지 않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렇게 한글을 높이 사기만 할 뿐, 정작 한글이라고 하는 그릇에 담는 한국말은 어떠한가를 살피지 않기 일쑤입니다.


  한겨레는 왜 ‘모든 소리를 담을 만한 글’을 쓸까요? 한국말은 모든 소리를 귀여겨듣고 즐겁게 입으로 들려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한글은 왜 뛰어나다고 손꼽을 만한 글일 수 있을까요? 이 글을 쉽고 빠르게 익히면 우리가 입으로 나누는 아름답거나 사랑스럽거나 즐거운 이야기를 오래오래 건사하도록 옮겨적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쉬운 말을 쉬운 글로 담아 삶을 쉽게 지으면, 모든 사람이 날마다 아름답게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길을 엽니다.


  한글날을 맞이해서 모처럼 한글을 생각한다면,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한결 깊거나 넓게 살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글날 하루만 반짝 스치듯이 지나가기보다는 한 해 내내 말과 글이 서로 맺고 얽는 흐름을 톺아볼 수 있기를 바라요.


  우리는 밥을 먹습니다. 우리는 밥그릇을 먹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웃하고 도란도란 밥 한 그릇을 나눕니다. 다만, 밥그릇에 담은 밥을 나누지, 밥을 담는 그릇을 나누지 않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한글날을 기린다고 할 적에는 ‘그릇’이 되는 글(한글)이 아니라 ‘알맹이(밥)’가 되는 말(한국말)을 제대로 기리면서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대로 바라보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릇을 먹지 않고 밥을 먹어요. 우리는 껍데기를 먹지 않고 알맹이를 먹어요. 우리가 옷을 입는 까닭은 옷을 지키려는 뜻이 아니라, 옷이 감싸는 알맹이인 몸을 지키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 몸은 우리 몸에 깃든 마음을 지킵니다. 우리가 저마다 다른 사람이요 숨결이라고 할 적에는, 몸뚱이만 다른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몸뚱이에 깃든 넋이 저마다 다르면서 애틋하고 사랑스러우며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한글날을 기려야 한다면, 그릇인 글 때문이 아니라, 그릇에 담는 말 때문입니다. 지난날 훈민정음을 처음 지었다고 할 적에 중국글과 중국말만 있었다면 훈민정음이 오늘날처럼 빛이 날 까닭이 없었으리라 느낍니다. 게다가 처음 훈민정음이 태어나고 나서 오백 해 가까이 한글이 푸대접을 받은 발자국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훈민정음이 왜 푸대접을 받았을까요? 임금님이 새로운 우리 글자를 짓기는 했으나, 이 새로운 글자를 한겨레 모든 사람이 두루 배워서 쓰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임금님 둘레에 있는 몇몇 지식인과 권력자만 쓰도록 했습니다. 시골에서 흙을 만지거나 바다에서 물을 만지거나 아이를 낳아 돌보는 여느 사람한테 훈민정음을 가르치지 않았어요. 훈민정음은 오직 양반과 사대부와 임금님 둘레 몇몇 사람만 배워서 아주 조금 쓰던 글입니다. 이런 ‘죽은 글’이 오백 해쯤 흐른 개화기 언저리가 되어, 비로소 여느 사람 손으로 넘어와 ‘산 말’로 깨어납니다.


  ‘훈민정음’에서 ‘한글’로 이름을 바꾼 까닭이 있습니다. ‘훈민정음’은 처음 이 글을 지은 분 뜻과 같이,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권력을 누리려고 썼습니다. ‘한글’이라는 새 이름을 지은 분은 이 글을 몇몇 사람만 홀로 차지해서 쓰는 글이 아니라, 온누리 모든 사람이 즐겁게 배워서 아름답게 쓰자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오늘날에도 ‘글 권력(지식·학문·정치)’을 누리는 이들은 한자와 한자말을 즐겨씁니다. 오늘날 새로운 ‘글 권력’을 누리는 이들은 알파벳과 영어를 즐겨씁니다.


  우리는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를 먹는 사람입니다. 옷을 아끼는 사람이 아닌 몸을 아끼는 사람입니다. 몸에 깃든 마음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한글은 한글대로 아끼되, 제대로 아끼고 사랑하며 보듬을 것은 ‘말’입니다. 먼먼 옛날부터 이 땅에서 태어나 살던 한겨레가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즐겁게 나누던 ‘말’을 제대로 바라보고 아끼고 사랑하고 보듬을 노릇입니다. 말을 살릴 때에 넋이 살고, 넋이 살 때에 사랑이 살며, 사랑이 살 때에 사람이 삽니다.


  지난 오백 해 남짓 훈민정음을 쓴 분들은 무엇보다 ‘한국 지식인이 한자 소리를 하나로 모두어서 쓰도록 틀을 세우려는 뜻’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내 삶을 스스로 가꾸면서 아름답게 새로 지어 날마다 즐겁게 사랑을 나누자는 뜻’으로 한글에 한국말을 담아서 쓸 수 있기를 빕니다. ‘쉬운 말’을 ‘쉬운 글’에 담을 때에 삶이 사랑스레 열립니다. ‘어려운 말’을 ‘어려운 글’에 담을 적에 삶이 차갑고 무섭게 닫히거나 갇힙니다. 4347.10.9.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가 바랄 수 있는 한 가지는 오직 하나라고 느낀다. 튼튼하게 자라서 씩씩하게 눈을 뜨고 사랑스레 손길을 뻗어 아름답게 삶을 가꾸기. 그런데, 아기가 걸음마를 떼고 말을 할 즈음, 어버이마다 갑자기 생각이 바뀌는 듯하다. 예전에는 이렇게 바뀐 일이 없었을 텐데, 요즈음은 아이들한테 더 빨리 더 많이 온갖 입시지식을 집어넣어서 더 거칠게 ‘비교 우위 경쟁’을 시키려 하지 싶다. 개구리 올챙이 적을 모른다는 옛말대로, 어른들은 아기를 낳을 적 마음을 모두 잊거나 잃었을까. 아이들이 열 살이건 열다섯 살이건 스무 살이건, 처음 아기가 우리한테 와서 태어날 무렵 마음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안녕, 아가야》 같은 그림책을 곁에 놓고서. 4347.10.9.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한 줄 책읽기)


1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안녕 아가야
알리키 브란덴베르크 글, 그림 | 김명숙 옮김 / 시공주니어 / 1998년 2월
6,000원 → 5,400원(10%할인) / 마일리지 300원(5% 적립)
2014년 10월 09일에 저장
구판절판


1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