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차리는 밥



  한국 사회에는 평등이 없다. 평화도 민주도 없다. 그래서 집집마다 살림살이를 살피면 예나 이제나 ‘부엌데기 가시내’가 넘실거린다. 살림을 함께 맡거나 도맡으려는 사내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아이를 낳고 나서도 아이키우기를 가시내한테 떠넘기는 사내만 많을 뿐, 아이와 함께 누리는 삶을 생각하거나 그리는 사내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언제부터 사내는 바보가 되었을까. 언제부터 사내는 밥도 못 짓고 옷도 못 짓고 돈만 버는 바보가 되었을까. 언제부터 사내는 가시내가 차리는 밥만 얻어 먹고, 가시내가 빨래하는 옷을 얻어 입으며, 가시내가 마련한 잠자리에 드러눕는가.


  아이와 함께 그림책이나 동화책을 읽을 줄 아는 사내가 매우 드물다. 인문책은 읽을 줄 알아도 어린이책은 읽을 줄 모르는 사내만 득시글거린다. 이런 사내가 벼슬아치가 되어 복지나 문화나 교육 행정을 맡는다면 어떤 정책을 선보일 수 있을까.


  한국 사회에는 평등도 평화도 민주도 없기에, 집일을 하는 거룩한 사람은 ‘부엌데기’가 되고 ‘부엌일’을 몹시 힘들거나 싫어하기 마련이다. 가장 맛있는 밥은 언제나 손수 지어서 먹는 밥이건만, 날마다 밥을 차리는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 밥짓기는 어느새 고단한 ‘일거리’가 되고 만다.


  사다가 먹는 밥이 맛있을까? 전화를 걸어서 시켜 먹는 밥이 맛있을까? 자가용을 몰아 호텔이나 고급식당에 가면 밥이 맛있을까? 지구별 어떤 밥도, 손수 지어서 먹지 않는다면 맛있을 수 없다. 손수 씨앗을 심어서 거둔 뒤 지어서 먹는 밥처럼 맛있는 밥이란 없다.


  가시내도 사내도 제 밥은 제 손으로 차려서 먹을 수 있어야 한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제 밥은 제 손으로 차려서 먹을 줄 알아야 하고, 아이들한테도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란히 밥을 차려서 줄 수 있어야 한다. 손맛 깃든 집밥을 언제나 맛있게 먹을 수 있으려면, 우리 사회에 평등과 평화와 민주가 뿌리를 내려야겠지. 이 나라 수많은 ‘어머니’와 ‘여자’가 “남이 차리는 밥이 맛있다”고 말한다면, 참으로 까마득하다. ‘아버지’와 ‘남자’는 무언가 깨달아야 한다.


(최종규 . 2014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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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4-10-17 01:22   좋아요 0 | URL
갑자기 아~하는 한숨이 나옵니다. 전 아니지만 제 딸은 제발 하는 맘이네요

파란놀 2014-10-17 06:09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 님이 오늘 즐겁게 삶을 지으시면 다 되어요.
미래는 언제나 현재이기에
오늘 이곳에서 즐겁게 누리면서
아이와 이야기꽃을 피우면
아이는 모두 잘 받아먹어요~
 
맛의 거리 문학동네 동시집 3
곽해룡 지음, 이량덕 그림 / 문학동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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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37



꿈과 사랑이 흐르는 삶

― 맛의 거리

 곽해룡 글

 이량덕 그림

 문학동네 펴냄, 2008.11.24.



  아이들을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이 아이들이 돈을 잘 벌어서 돈을 잘 쓰는 어른이 되기보다는, 삶을 즐겁게 가꾸면서 사랑을 기쁘게 나눌 숨결로 자랄 때에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언제나 가슴에 사랑이라는 씨앗을 심어 사랑이라는 열매를 가꾸고, 다시 사랑이라는 씨앗을 거두어 새롭게 심을 줄 알 때에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 아이들이 / 바닷물을 끌어당긴다 ..  (밀물)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됩니다. 어른은 모두 아기로 태어나 아이로 자랐습니다.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는 동안 삶을 익히고 삶을 가꾸며 삶을 사랑합니다. 어른은 모두 아기로 태어나 사랑을 받았고 꿈을 키웠으며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 시골 할머니 집에서 / 받아 온 꽃씨 / 우리 집 담장 밑에서 / 나팔꽃으로 피었습니다 ..  (나팔꽃)



  씨앗이 뿌리를 내립니다. 씨앗에서 줄기가 오릅니다. 처음 오르는 줄기는 아주 가냘픕니다. 아기가 손가락으로 톡 건드려도 끊어질 만합니다. 나무씨이든 풀씨이든 첫 줄기는 아주 가녀립니다.


  가녀린 줄기에서 가녀린 잎이 돋습니다. 이 첫 잎을 ‘싹’이라고 합니다. 새싹이 돋은 씨앗은 햇볕과 빗물과 바람을 먹으면서 흙 품에서 무럭무럭 자랍니다. 이윽고 줄기가 단단하게 굵고 잎은 넓어집니다. 줄기와 잎과 뿌리가 알맞게 자라면서 어느 만큼 따사로운 기운을 머금을 무렵 가만히 꽃송이를 터뜨립니다. 꽃송이는 벌과 나비와 개미를 부릅니다. 게다가 사람까지 부르지요. 벌과 나비와 개미는 먹이를 찾아 꽃송이한테 다가갑니다. 사람은 아름다운 숨결을 받고 싶어서 꽃송이한테 다가섭니다.



.. 사람들이 모를 심듯 / 새들은 나무를 심는다 ..  (똥 누러 가는 새)



  아름다운 꽃송이는 여러 날 바람에 한들거리면서 즐겁게 한삶을 누리다가 사르르 집니다. 꽃송이가 지면서 씨방이 굵습니다. 씨방은 차츰 여물고, 어느새 새로운 목숨을 안은 씨앗이 태어납니다.


  씨앗이 씨앗을 낳습니다. 씨앗은 씨앗으로 이어집니다. 사랑을 베푸는 씨앗은 새로운 사랑을 베풀 씨앗으로 이어집니다. 사랑을 노래하는 씨앗은 앞으로 새롭게 사랑을 노래할 씨앗으로 숨결을 잇습니다.


  꽃이 진 모습을 바라보던 사람은 살짝 서운하지만, 씨앗이 맺은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부풉니다. 그래, 올해가 지나고 새로운 해가 찾아오면 다시 꽃잔치를 누릴 수 있어. 이 씨앗을 보면서 다시금 기운을 차려야지.



.. 꽃길 걷다 보면 / 나도 모르게 / 찐―짠 찐짠 찐짠 / 노래가 나온다 ..  (꽃길)



  곽해룡 님이 빚은 동시를 그러모은 《맛의 거리》(문학동네,2008)를 읽습니다. 아이한테 들려주려고 쓴 동시가 이 작은 책에 깃듭니다. 곽해룡 님이 어린 날부터 어른이 된 오늘까지 스스로 사랑하며 살던 이야기가 작은 동시에 조촐히 깃듭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사랑이란 사랑입니다. 꿈이란 무엇일까요. 꿈이란 꿈입니다. 사랑은 돈이 아닙니다. 꿈은 대학교가 아닙니다. 사랑은 아파트가 아닙니다. 꿈은 서울살이가 아닙니다.


  아이들은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어른들은 꿈을 가르쳐야 합니다. 아이들은 사랑을 물려받아야 합니다. 어른들은 꿈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 “학교 다녀왔습니다!” / “그래.” / 연속극에 붙들린 엄마 / 방에서 나와 보지도 않고 대답한다 ..  (엄마를 구하다)



  동시집 《맛의 거리》는 애틋하면서 살갑습니다. 다만, 조금 더 헤아려서 ‘사랑과 꿈을 노래하는 숨결’이 될 수 있으면 한결 즐거우리라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놓은 사회 얼거리를 보여주는 동시도 나쁘지 않고, 어른들이 만든 슬픈 울타리를 건드리는 동시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동시로는 노래를 부르기 어려워요.


  아이들이 부르고 어른들도 함께 즐길 노래는 우리가 다 함께 나아갈 사랑과 꿈이 어우러진 이야기여야지 싶습니다. 이를테면 〈엄마를 구하다〉 같은 작품은 재미있고 어떤 상징을 보여준다고 할 만하지만, 이 동시를 노래로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살며시 나무라는 재미난 이야기인데, 여기에서 끝이에요.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내 동생〉 같은 작품도 아름답다 할 만하지만, 여기에서 끝이에요. 더 뻗지 못해요. 아이와 어른이 함께 지을 꿈과 사랑이 흐르지 못합니다.



.. 어제는 벽에 / 달을 그려 / 엄마한테 혼나고 // 오늘은 풍선을 그려 / 혼나고 / 울다 잠든 / 내 동생 ..  (내 동생)



  함께 지을 사랑을 노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씨앗을 심는 삶을 노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함께 누릴 꿈을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씨앗이 꽃이 되고 다시 씨앗이 되는 이야기를 어깨동무하면서 주고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삶을 짓듯이 동시를 짓기를 바랍니다. 재미난 몇 가지 이야기를 조각조각 맞추기보다, 꿈꾸는 삶과 사랑하는 삶을 따사롭게 노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347.10.16.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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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책 《히로시마, 되풀이해선 안 될 비극》은 일본에서 1995년에 처음 나왔고, 한국에서는 2004년에 처음 옮겼다. 나는 이 그림책을 2004년에 처음 구경하면서 쓴웃음이 나왔다. 왜냐하면, 이 그림책은 ‘왜 되풀이해서는 안 될 끔찍한 일’인가를 제대로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림책 《히로시마》는 ‘핵무기’를 오직 ‘과학’으로만 바라본다. 그래서, 이러한 무기를 누가 만들었고 이러한 무기에 누가 죽었는지를 제대로 건드리지 않는다. 이 책은 한국말로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과학기술부 인증 우수과학도서”로 뽑혀서 이러한 딱지를 아예 책겉에 인쇄를 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 그림책 ‘과학책’이다. 다만, 과학책이기는 한데 역사도 사회도 문화도 삶도 잊은 과학책이다. 핵무기를 그렸으나 사람을 그리지 않고, 핵무기 때문에 죽은 히로시마 사람들을 그렸으나 죽음과 생채기와 아픔이 어떠한가를 그리지 않았다. 이 그림책에 나오는 히로시마는 오로지 ‘숫자’와 ‘통계’와 ‘해적이(연보)’이다. 무엇보다, 일본이 왜 전쟁을 일으켰고, 일본은 왜 핵무기를 맞았는지, 또 일본은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같은 이야기를 한 마디로도 안 밝힌다. 히로시마는 참말 평화로운 작은 항구도시였을까? 아니다. 히로시마에 징용을 온 조선사람이 얼마나 많았는가. 나가사키도 이와 같다. 그러나 이 그림책에는 이런 이야기조차 한 줄로도 안 나온다. 그저 평화로운 마을에 갑자기 핵무기가 떨어졌다고만 나온다. 그러고는 죽음 같은 잿더미와 불길에 휩싸였다고 한다. ‘일본 군인’이 아닌 ‘일본 민간인’이 ‘식민지 백성’을 얼마나 짓밟고 괴롭혔는가 하는 이야기는 터럭만큼도 안 나온다. 그렇다고, 모든 일본사람이 전쟁부역자는 아니며, 모든 일본사람이 전쟁미치광이는 아니다. 그런데 참으로 많은 일본사람은 전쟁부역을 했으며, 전쟁찬성 편에 섰으며, 조선사람 같은 식민지 백성을 짓밟거나 괴롭히는 짓을 일삼았다. 이러한 짓은 아직도 안 그친다. 일본 정부뿐 아니라 일본 여느 사람들 가운데 아주 많은 이들이 군국주의에 표를 준다(이에 못지않게 전쟁반대에 표를 주는 사람도 많지만 둘은 엇비슷하다). 그렇다면, 과학지식으로 핵무기를 다룬다는 그림책은 무엇을 말해야 할까? 이처럼 끔찍한 짓이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그런데, 이 그림책에서 얄궂은 또 한 가지는 ‘되풀이해선 안 될’이라는 이름을 쓰지만 ‘누가’ 되풀이해서는 안 될 일인가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일본이 제국주의나 군국주의로 나아가지 않았어도 핵무기를 맞았을까? 일본사람 스스로 군국주의 정부를 반대하거나 뒤엎었다면 이웃나라를 식민지로 삼았을까? 이웃나라를 식민지로 삼은 데에서 그치지 않고 성노예를 부리거나 중국과 조선과 대만과 아시아에서 끔찍한 학살을 일삼았고, 미국으로도 전쟁을 뻗으면서 비로소 핵무기를 두 방 맞았다. 가해자이기에 피해자가 되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스스로 불러들인 아픔이라는 뜻이다. 스스로 불러들인 아픔을 제대로 뉘우치고 똑바로 바라보면서 올바로 깨닫지 않는다면, 끔찍한 일은 되풀이될밖에 없다. 일본은 오늘날 무엇을 하는가? 일본은 미국과 러시아 못지않게 전쟁무기 만드는 일에 돈을 퍼붓는다. 게다가 일본은 다른 나라에 군대를 보내기도 한다. 그러니, 이런 그림책을 한국말로 옮기는 일도 어느 모로 본다면 ‘전쟁부역’과 ‘군국주의 미화’에 이바지하는 꼴이 된다. 마음도 생각도 사랑도 없이 오직 지식으로 과학을 다루려는 ‘핵무기’ 이야기인 《히로시마》는 일본이나 한국에서 누구한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이 그림책이 한국말로 나온 지 열 해가 되었어도 아직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이다. 4347.10.16.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한 줄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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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되풀이해선 안 될 비극, 그림으로 보는 히로시마 이야기
나스 마사모토 지음, 니시무라 시게오 그림, 이용성 옮김 / 사계절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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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은 놀면서 말을 배운다. 그러니까 아이들한테는 말놀이가 된다. 그러면, 말놀이란 무엇인가. 그저 놀면 말놀이가 될까? 장난처럼 굴면 말놀이가 될까? 말놀이라면 말로 노는 삶이다. 말로 삶을 가꾸면서 놀 때에 비로소 말놀이가 된다. 이와 달리 말로 장난을 부리거나 친다면 말장난이 된다. 아이들은 놀잇감으로 하루를 즐길 수 있는 한편, 장난감을 갖고 하루를 보낼 수 있다. 어느 쪽이 더 낫지 않고, 어느 쪽이 나쁘지 않다. 둘은 저마다 다를 뿐이다. 어른은 아이한테 말을 어떻게 가르칠까. 비슷한 낱말을 엮어서 들려주면 아이들이 말을 배울까. 말이란 지식일까. 최승호 시인이 내놓은 《최승호 시인의 말놀이 동시집》을 들여다본다. ㄱ부터 차근차근 말놀이를 들려준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동시집을 들여다보면서 ‘말놀이’라기보다는 ‘말장난’이 아닌가 하고 느낀다. 왜냐하면, ㄱ부터 여는 ‘동시’는 소리값하고 얽힌 장난스러운 손재주일 뿐, 낱말 하나와 얽힌 삶이 거의 안 보이기 때문이다. 예부터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빚어서 나누고 아이들한테 물려줄 적에는 삶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엮어서 들려주었다. 말장난이 아닌 참말 ‘말놀이’였다. ‘말노래’요 ‘말삶’이다. 다만, 요즈음 사회를 보면, 어른이나 아이 모두 도시에서 산다. 어른은 도시에서 돈만 벌고, 아이는 도시에서 학교만 다니며 책만 읽는다. 요즈음 사회에서는 어른이나 아이 모두 삶을 짓지 않고 삶과 아주 동떨어진 채 지낸다. 이러하니, 놀이와 장난이 어떻게 다른가를 모르는 채 ‘말장난 동시’가 마치 ‘말놀이 동시’라도 되는듯이 잘못 알고 만다. 《최승호 시인의 말놀이 동시집》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말장난으로도 얼마든지 까르르 웃고 즐길 수 있다. 그저 그뿐이라는 뜻이다. 까르르 웃고 즐기면 그만인 말장난인 동시일 뿐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장난’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배운’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나 늘 배우니까. 4347.10.16.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한 줄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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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호 시인의 말놀이 동시집 3- 자음 편
최승호 지음, 윤정주 그림 / 비룡소 / 2007년 8월
11,000원 → 9,900원(10%할인) / 마일리지 5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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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닷컴> 2014년 10월호에 실은 '시골도서관 일기'입니다.


..


시골도서관 풀내음

― 사광이풀과 며느리배꼽



  해마다 봄이 되면 시골에서나 도시에서나 아주 일찍 꽃망울을 터뜨리는 조그마한 들꽃이 있습니다. 시골에서는 들꽃이요, 도시에서는 골목꽃이라 할 만한데, 이 작은 꽃송이를 놓고 두 가지 이름이 있어요. 하나는 일본 학자가 붙인 일본 풀이름을 일제강점기에 한국 학자가 받아들여서 쓰는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한겨레가 스스로 붙인 이름입니다. 일본 학자는 일본에서 ‘개불알풀꽃’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꽃송이를 마주합니다. 한겨레는 ‘봄까지꽃’이라는 이름을 나긋나긋 읊으며 꽃송이를 바라봅니다.


  해마다 여름이 지나 가을로 접어들 무렵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들꽃을 놓고도 두 가지 이름이 있습니다. 일본 학자가 붙인 풀이름을 일제강점기부터 한국 학자가 받아들인 이름은 ‘며느리배꼽’과 ‘며느리밑씻개’입니다. 한겨레가 예부터 스스로 붙여서 가리키는 이름은 ‘사광이풀’과 ‘사광이아재비’입니다. 김종원 님이 엮은 《한국 식물 생태 보감》(자연과생태 펴냄,2013) 1권을 보면 ‘사광이아재비’와 ‘며느리밑씻개’라는 이름에 얽힌 이야기가 잘 나옵니다.


  한국사람은 한국에서 살면서 정작 한겨레 꽃이름이나 풀이름을 제대로 모르기 일쑤입니다. 학자가 꽃이나 풀에 이름을 붙이기 앞서, 어느 고장에서든 시골사람 스스로 꽃이름과 풀이름을 지어서 가리켰는데, 고장말을 잊고 마을말을 잃습니다.


  곰곰이 돌아본다면, 학자들이 이 나라 골골샅샅 두루 다니면서 꽃이름과 풀이름뿐 아니라 나무이름과 벌레이름과 짐승이름까지 낱낱이 여쭈어서 적어야 올바릅니다. 일본 학자가 일본말로 붙인 이름을 한국말로 옮기지 말고, 한겨레가 수천 수만 수십만 수백만 해에 걸쳐 스스로 바라보고 가리키면서 주고받던 이름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고장마다 대학교가 있어요. 그러니 경기도 언저리에서는 경기도 언저리 대학교에서 시골마을을 두루 돌면서 이름을 여쭐 노릇입니다. 경상도 대학교는 경상도에서, 전라도 대학교에서는 전라도에서 고장말을 여쭈어야 할 테지요. 고장마다 있는 대학교는 ‘고장말 사전’과 ‘고장말 도감’을 꾸준히 선보일 수 있어야 해요. 이렇게 할 때에 학문이고, 이렇게 책을 엮어서 나눌 수 있어야 사회가 발돋움합니다.


  아이들과 도서관으로 갑니다. 도서관 어귀에 탱자나무가 있습니다. 나는 아이들한테 ‘탱자나무’라는 이름을 알려주지만 아이들은 늘 이 이름을 잊습니다. 가을마다 노란 탱자알을 얻어서 갖고 놀지만,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면 까맣게 이름을 잊어요. 다시 여름이 되고 가을이 찾아와서 아버지가 이름을 알려주어야 “‘탱자’? 탱자가 뭐야?” 하고 묻습니다. 도서관 어귀에 우람하게 자란 ‘아왜나무’는 이름을 말하기 어려운지 이 나무도 이름을 잊습니다. ‘단풍나무’는 ‘빨간나무’로 알아듣고, ‘자작나무’는 ‘하얀나무’로 알아봅니다. 하기는. 그렇겠지요. 아이들은 아이들 나름대로 바라보면서 이름을 떠올립니다. 아마 수천 수만 해 앞서 한겨레가 ‘쑥’이나 ‘마늘’ 같은 이름을 처음 지을 적에도 그때 그곳에서 문득 떠오른 느낌 그대로 가리켰으리라 생각해요. ‘갓’이나 ‘여뀌’나 ‘강아지풀’이라는 풀이름도, 모두 그때 그곳에서 떠오른 느낌이나 이야기에 따라 새 이름이 태어났겠지요.


  우리 집 마당을 차근차근 치워 놀이터로 삼습니다. 놀이기구가 따로 있지 않으나, 모두 다 놀잇감이 됩니다. 나뭇가지와 풀꽃이 놀잇감이 됩니다. 고무대야에 물을 받아 물놀이를 즐깁니다. 물을 갖고 노니까 그대로 ‘물놀이’입니다.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면서 놀면 ‘뜀놀이’나 ‘뜀뛰기놀이’입니다. 마당을 그저 빙글빙글 거닐면서 놀면 ‘걷기놀이’가 돼요.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풀과 노는 아이는 풀놀이를 즐기기에, 이 아이한테는 ‘풀순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꽃을 꺾어 노는 아이는 꽃놀이를 누리기에, 이 아이한테는 ‘꽃순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언제나 즐겁게 노는 아이들이니, ‘놀이순이’요 ‘놀이돌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동생을 옆에 앉히고 책을 읽어 주는 누나한테는 ‘책순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드넓게 열린 파란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파랗디파란 하늘이 곱습니다. 높은 건물이 없으니 하늘이 더 넓습니다. 시골에서는 멧자락이 높아도 하늘을 가린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요. 이와 달리 도시로 나들이를 가면, 조금만 높은 건물이 있어도 하늘을 가리는구나 하고 느껴요. 가을이 무르익는 날, 손을 잡고 걷거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리면서 노는 아이들은 하늘빛을 먹습니다. 이런 날은 ‘하늘아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시골에서 살기에 ‘시골아이’입니다. ‘시골순이’요 ‘시골돌이’입니다. 시골사람한테는 순이나 돌이라는 이름이 잘 어울립니다. 그런데, 도시사람한테 ‘도시아이’라든지 ‘도시순이·도시돌이’ 같은 이름을 붙이려 하면, 어쩐지 안 어울립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도시아이’라기보다 ‘시티 키드’ 같은 이름이 어울리리라 느껴요.


  인터넷이 발돋움한 만큼, 이름이 궁금한 꽃이나 풀이나 나무가 있으면 인터넷을 켜서 여쭈면 1분이 채 지나지 않아 누군가 이름을 알려줍니다. 인터넷은 사전이나 도감 구실을 톡톡히 합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이제는 이름을 짓는 사람이 없어요. 스스로 이름을 지을 줄 아는 사람이 없어요. 시골말은 차츰 사라지거나 잊힙니다. 고장말은 천천히 자취를 감춥니다. 텔레비전과 라디오와 신문과 책뿐 아니라, 학교에서 쓰는 표준 서울말 교과서는 시골아이 말씨와 말투를 모두 빼앗습니다. 처음 마주하는 꽃이나 풀이나 나무를 앞에 두고, 이 꽃과 풀과 나무가 어떤 숨결인가를 찬찬히 헤아리거나 살피거나 짚으면서, 스스로 새롭게 이름을 짓던 사람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4347.9.13.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도서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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