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 없애야 말 된다

 (1551) 조선적 1


조선적인 것을 말살하려고 했던 조선총독부의 통치하에 있으면서 조선인이 할 수 있었던 최대한의 자기주장이라 생각되는 이 논문들에 대해서는 별도로 논하기로 한다

《가토 카즈오,카와타 이코이,토조 후미노리/최석두 옮김-일본의 식민지 도서관》(한울,2009) 208쪽


 조선적인 것을 말살하려고 했던

→ 조선 문화를 없애 버리려고 했던

→ 조선 사회를 무너뜨리려고 했던

→ 조선이라면 모조리 뭉개어 버리려고 했던

→ 조선을 깡그리 박살내려고 했던

 …



  조선하고 얽힌 무엇을 놓고 ‘조선적’이라 한다면, 고구려는 ‘고구려적’이고 가야는 ‘가야적’이며 부여는 ‘부여적’이 됩니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 우리들은 ‘한국적’이니 ‘일본적’이니 ‘미국적’이니 ‘영국적’이니 하는 말투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습니다. 네덜란드 문화를 말하려 했다면 ‘네덜란드 문화’라 하면 될 텐데 ‘네덜란드적’이라고 해 버립니다. 베트남다운 어떤 모습일 때에는 ‘베트남다운’이라 하면 넉넉한데 ‘베트남적’이라고 읊습니다.


 조선 문화를 지우려고 했던

 조선 사회를 허물려고 했던

 조선 문화와 역사를 밟아 버리려고 했던

 조선이라는 나라를 송두리째 없애려 했던


  바르게 가다듬을 말을 살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옳게 추스를 말을 헤아리기를 바랍니다. 알차게 가꿀 말을 돌아보면서, 슬기롭게 북돋울 말을 찾아야지 싶습니다.


  “조선적인 현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이 아닌 “조선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이고, “조선적인 건축”이 아닌 “조선 건축”이거나 “조선다운 건축”입니다. “조선적인 멋”이 아닌 “조선 멋”이나 “조선스러운 멋”을 생각합니다. 4343.1.9.흙/4343.2.4.나무/4347.11.3.달.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조선을 깡그리 박살내려고 했던 조선총독부한테 짓눌리면서 조선사람이 그나마 할 수 있던 이야기로 보이는 이 글들은 따로 다루기로 한다


‘말살(抹殺)하려고’는 ‘없애려고’나 ‘뭉개려고’나 ‘박살내려고’로 다듬고, “조선총독부의 통치하(統治下)에 있으면서”는 “조선총독부한테 짓눌리면서”나 “조선총독부한테 짓밟히면서”로 다듬습니다. “조선인(-人)이 할 수 있었던 최대한(最大限)의 자기주장(自己主張)이라 생각되는”은 “조선사람이 그나마 펼 수 있던 생각이라 보이는”이나 “조선사람이 그나마 쓸 수 있던 글이라 할 만한”으로 손보고, “이 논문(論文)들에 대(對)해서는”은 “이 논문들을 놓고는”이나 “이 글들은”으로 손봅니다. “별도(別途)로 논(論)하기로”는 “따로 다루기로”나 “다시 이야기하기로”나 “나중에 이야기하기로”로 손질해 줍니다.



조선적 : x


..


 '-적' 없애야 말 된다

 (1696) 조선적 2


여씨향약에는 보이지 않으며 조선적 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영우-율곡 이이 평전》(민음사,2013) 211쪽


 조선적 현실을 반영하는

→ 조선 현실을 담는

→ 조선이라는 현실을 담는

→ 조선에 맞게 담는

→ 조선 현실에 맞게 담는

→ 조선사람한테 맞게 담는

 …



  이 글월에서는 “조선 현실”로 적을 수 있습니다. 사이에 ‘-的’을 넣을 까닭이 없습니다. “조선적 문화”가 아닌 “조선 문화”이고, “조선적 사회”가 아닌 “조선 사회”입니다. 사이에 어떤 말을 넣어서 뜻을 북돋우려 한다면, “조선이라는 현실”처럼 적으면 돼요. 4347.11.3.달.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여씨향약에는 보이지 않으며 조선에 맞게 담아냈다고 볼 수 있다


“현실(現實)을 반영(反映)하는 것으로”는 “현실을 담는다고”나 “삶에 맞게 담았다고”로 손질할 수 있습니다.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의' 안 쓰면 우리 말이 깨끗하다

 (71) 소량의 1


그 뒤에는 우엉과 당근과 토란, 그리고 소량의 돼지고기를 넣은 된장 국물을 끓인 다음 그 속에 걸쭉한 쑥 경단을 한 숟가락씩 떼어 넣으며 삶으면 된다

《야마오 산세이/이반 옮김-여기에 사는 즐거움》(도솔,2002) 140쪽


 소량의 돼지고기를 넣은

→ 돼지고기를 조금 넣은

→ 돼지고기를 몇 점 넣은

 …



  일본책을 한국말로 옮기면서 “소량의 돼지고기”라 적습니다. 그러면, “다량의 돼지고기”를 말할 분도 있을까요?


  ‘소량(少量)’은 “적은 분량”을 뜻하고, ‘다량(多量)’은 “많은 분량”을 뜻하며, ‘대량(大量)’은 “아주 많은 분량이나 수량”을 뜻한다고 합니다. 한자말을 쓰자면 이렇게 나눕니다. 그러나, 한국말로 ‘적게’와 ‘많게’와 ‘아주 많게’를 쓰면 아주 쉽고 또렷합니다. “다량의 돼지고기를 넣다”가 아니라 “돼지고기를 많이 넣다”라 말해야 올바릅니다.


 사체에서 소량의 독극물이 검출되었다

→ 주검에서 독극물이 조금 나왔다

 소량의 술은 몸에 약이 된다고 한다

→ 조금 마시는 술은 몸에 약이 된다고 한다

→ 술 한 잔쯤은 몸에 약이 된다고 한다


  부피가 적으니 ‘적다’고 합니다. 부피가 많으니 ‘많다’고 합니다. 조금 넣을 적에는 ‘조금’이라 합니다. 살짝 넣을 적에는 ‘살짝’이라 합니다. 말을 알맞게 쓰지 않으니 자꾸 토씨 ‘-의’가 들러붙습니다. 4337.11.12.쇠/4347.11.3.달.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그런 뒤에는 우엉과 당근과 토란, 그리고 돼지고기를 조금 넣은 된장 국물을 끓인 다음, 여기에 걸쭉한 쑥 경단을 한 숟가락씩 떼어 넣으며 삶으면 된다


“그 뒤에는”은 “그런 뒤에는”이나 “그렇게 한 뒤에는”으로 손질합니다. “그 속에”는 “여기에”로 바로잡습니다.



소량(少量) : 적은 분량

   - 사체에서 소량의 독극물이 검출되었다 / 소량의 술은 몸에 약이 된다고 한다


..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927) 소량의 2


소량의 책이라도 신변에 항상 있고, 좋다고 생각하는 책은 되풀이 읽을 수 있는 거리에 그것이 있어야 한다

《김수근-좋은 길은 좁을수록 좋고 나쁜 길은 넓을수록 좋다》(공간사,1989) 41쪽


 소량의 책이라도

→ 몇 권 안 되는 책이라도

→ 책 몇 권이라도

→ 책 한두 권이라도

 …



  책을 셀 적에 ‘소량’과 ‘다량’ 같은 한자말을 넣어서 셀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글쎄, 이런 말은 없지 싶은데,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네 말투가 워낙 뒤죽박죽이다 보니까, 이러한 말투로 이야기를 할 분이 틀림없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보기글에서도 “소량의 책”이라 나오고요. “소량의 책”을 말한다면 “다량의 책”도 말할까 모릅니다만, “적은 책”이나 “많은 책”이라 하면 되고, “책 몇 권”이나 “책 여러 권”이라 하면 됩니다.


  이 자리에서는 “적은 책”보다는 “몇 권 안 되는 책”이라 하면 한결 낫고, “책 한두 권”이라 해도 됩니다. 권수가 많다면 “가득 쌓인 책”이나 “넘치는 책”, “수백 권에 이르는 책”, “수천 권이나 되는 책”처럼 적습니다. 4340.2.20.불/4347.11.3.달.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책 몇 권이라도 옆에 늘 있고, 좋다고 생각하는 책은 되풀이 읽을 수 있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


‘신변(身邊)’은 ‘가까이’나 ‘옆’으로 다듬고, ‘항상(恒常)’은 ‘늘’로 다듬으며, ‘거리(距離)’는 그대로 둘 수 있으나, 이 글월에서는 ‘자리’로 다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있어야 한다”는 “책이 있어야 한다”로 손질하거나 “있어야 한다”로 손질합니다.


..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188) 소량의 3


우리 집 카레에는 소량의 돼지고기가 들어 있었고, 매운 것을 먹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밀가루를 넣어 맛을 순하게 했다

《사노 요코/윤성원 옮김-나의 엄마 시즈코상》(이레,2010) 87쪽


 소량의 돼지고기가 들어 있었고

→ 돼지고기가 조금 들었고

→ 돼지고기가 몇 점 있었고

 …



  ‘소량’은 한국말이 아닌 한자말입니다. 한자말이기에 쓰지 말아야 할 낱말이 아니라 그저 한자말입니다. 한자말 가운데 한국에서 받아들여서 쓸 만한 낱말이 있는 한편, 한자말 가운데 한국에서 굳이 안 받아들여도 될 낱말이 있습니다.


  ‘스몰’은 한국말이 아닌 영어입니다. 영어이기에 쓰지 말아야 할 낱말이 아니라 그저 영어입니다. ‘스몰’이든 ‘small’이든 쓰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쓸 수 있는데, 한국말에는 ‘작다’와 ‘적다’가 있어요. 한국말로 쓸 수 없다 싶은 자리가 있으면 ‘소량’이든 ‘스몰’이든 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참말 우리는 ‘작다·적다’로는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거나 일을 못할까요? 한자말 ‘소량’과 영어 ‘스몰’을 꼭 받아들여야 할까요? 일본책을 한국말로 옮기는 자리에서 자꾸 나타나는 ‘소량 + 의’입니다. 4347.11.3.달.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우리 집 카레에는 돼지고기가 조금 들었고, 매운 것을 먹지 못하는 사람을 헤아려 밀가루를 넣어 맛을 부드럽게 했다


“먹지 못하는 사람을 위(爲)해서는”은 “먹지 못하는 사람을 헤아려”로 손보고, ‘순(順)하게’는 ‘부드럽게’로 손봅니다.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글짓기와 글쓰기



  오늘날에는 누구나 ‘글쓰기’를 말한다. 지난날에는 으레 ‘글짓기’를 말했고, 일제강점기와 해방 언저리에는 ‘作文’을 말했다. ‘作文’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교육제도와 함께 들어온 ‘일본 한자말’ 가운데 하나이다. 해방 뒤에는 이 낱말을 한글로만 바꾸어 ‘작문’이라는 이름을 썼는데, 초등학교 어린이한테는 ‘글짓기’로 다시 말풀이를 해서 가르쳤다.


  그러면, ‘짓기’와 ‘쓰기’란 무엇인가? ‘짓다’는 “새롭게 나타나도록 하는 일”을 뜻한다. 이 뜻을 바탕으로 “이름을 처음으로 붙이다”와 “집·옷·밥을 마련하다”와 “흙을 가꾸어 먹을거리를 얻다” 같은 쓰임새가 나타났다. ‘글’이 태어나서 퍼진 지 얼마 안 된 터라, ‘글을 짓다’ 같은 쓰임새는 한참 뒤에야 나타났다. ‘짓다’는 요즈막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이야기·글·노래를 새로 내놓다”를 뜻하는 쓰임새가 나타난다.


  ‘쓰다’는 “금을 긋거나 줄을 이어서 어떤 모양이 나타나도록 하다”를 뜻한다. 이 뜻을 바탕으로 “더 잘 보이도록, 또는 잊혀지지 않도록 옮기거나 남기다”와 “떠오르는 생각이나 느끼는 마음이나 곰곰이 헤아린 이야기를 글로 나타내다” 같은 쓰임새가 나타났다.


  사람이 이룬 삶을 헤아리면, 사람은 누구나 ‘말’로 삶을 나타냈다. ‘말’로 모든 이름을 붙였다. 아주 오랫동안 말로 삶을 지었다. ‘이름짓기’라고 하듯이, 하늘이나 땅이나 풀이나 짐승이나 살림살이와 얽힌 이름을 모두 말로 지었다. 이름짓기란 말짓기요, 말짓기란 삶짓기인 셈이다. 그래서, ‘글짓기’란 이름이나 말이나 삶을 짓듯이, 생각을 지어서 이야기를 새롭게 내놓는 일을 가리킨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학교 글짓기 수업’은 ‘거짓 웅변 교육’과 ‘위문편지 쓰기’와 ‘새마을 운동 찬양’과 ‘충효 독후감 쓰기’만 일삼았다. 이런 나날이 무척 길었다. 해방 뒤부터 1990년대 언저리까지 이런 끔찍한 교육이 이루어졌다. 이리하여, 이런 바보스러운 학교교육을 떨쳐내려고 ‘글쓰기’라는 낱말을 새로 ‘짓’는다. 참말 ‘글쓰기’라는 낱말은 새로 ‘지어’서 태어났다(이오덕 님이 지은 낱말이다).


  자, 그러면 생각할 노릇이다. ‘글짓기 교육’이 ‘글쓰기 교육’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학교와 사회와 학원에서 ‘글쓰기’를 슬기롭거나 아름답거나 사랑스럽게 하는가? 예나 이제나 똑같이 틀에 박힌 채 아이들을 짓누르거나 짓밟는 입시지옥만 되풀이하지 않는가? 이름은 ‘글쓰기’로 바꾸었으나, ‘글을 쓰는 일’이 무엇인지 또렷이 느끼거나 생각하지 못하면서 어영부영 흐르지는 않는가.


 ‘글쓰기’는 “우리 마음이나 생각을 수수하게 글로 밝히는 일”이다. ‘글짓기’는 “우리 마음이나 생각을 글로 새롭게 드러내는 일”이다. 글쓰기를 하든 글짓기를 하든 ‘마음·생각·뜻’을 ‘글’로 밝히거나 드러내야 즐겁다. 우리는 스스로 즐거운 마음이 되고 아름다운 생각이 되어 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 ‘글짓기’라는 낱말이 어떤 뜻이요, 권력자와 학교 사회가 이 낱말을 어떻게 뒤틀어 놓았는가를 살피지 못한다면, 글을 쓸 수 없다. ‘글쓰기’라는 낱말이 어떤 뜻이며, 이 낱말을 왜 새로 지었는지 헤아리지 못한다면, 글을 읽을 수 없다. 짓고 쓰며 누리는 삶을 돌아보지 못한다면, 글을 알 수 없다. 4347.11.3.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글쓰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무가 아기를 낳는다. 나무가 낳은 아기는 바람을 타고 멀리 멀리 나들이를 다닌다. 나무가 낳은 아기는 어머니한테서 떨어져도 씩씩하다. 때로는 어머니 곁에 찰싹 달라붙고 싶어서 바로 옆에 드리우기도 하지만, 어머니처럼 우람하게 자라고 싶은 아기들은 참으로 먼 데까지 날아가서 살포시 땅에 뿌리를 내린다. 사람이 낳은 아기는 어디에서 씩씩하게 뿌리를 내리면서 자랄까. 사람이 낳아 돌보는 아기는 저마다 어떤 숨결이 되어 아름답게 자랄까. 이세 히데코 님이 빚은 《나무의 아기들》은 꿈과 사랑을 가슴에 품으면서 새근새근 잔다. 쉰 해도 자고 백 해도 잔다. 때로는 이백 해나 삼백 해를 잘 수 있다. 깨어나야 할 때 눈을 번쩍 뜨고는 쑥쑥 줄기를 올린다. 우리들 사람도 깨어나야 할 때를 슬기롭게 알아채면서 아름답게 피어나리라 믿는다. 누군가는 씨앗이 맺은 뒤 곧바로 깨어날 테고, 누군가는 씨앗 모습대로 오래오래 흐르다가 조용히 깨어날 테지. 모두 다른 삶이면서 모두 같은 사랑인 아름다운 아기요 씨앗이다. 4347.11.3.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한 줄 책읽기)


1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나무의 아기들- 2016 전국 국공립 어린이집 독서지도 연구회 선정, 2015 어린이도서연구회, 아침독서신문 선정
이세 히데코 글.그림, 김소연 옮김 / 천개의바람 / 2014년 4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14년 11월 03일에 저장



1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래도 괜찮아 푸른도서관 40
안오일 지음 / 푸른책들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사랑하는 시 41



아이들은 사랑으로 태어나서 자란다

― 그래도 괜찮아

 안오일 글

 푸른책들 펴냄, 2010.11.25.



  밤새 아이들 이불깃을 여밉니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으레 이불을 뻥뻥 차면서 뒹구르르 구르는 아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갓난쟁이였을 적에는 기저귀를 가느라 밤잠을 못 이루고, 조금 큰 뒤에는 밤오줌갈이를 하느라 밤잠을 못 이루며, 제법 큰 요즈음은 이불깃 여미느라 밤잠을 못 이룹니다. 작은아이가 열 살은 넘어서야 비로소 밤잠을 느긋하게 누릴 만할까 하고 헤아립니다.


  우리 집에 찾아온 아이들은 모두 사랑입니다. 사랑을 받아 태어났고, 사랑을 받으면서 살며, 사랑을 오롯이 돌려주면서 하루를 누립니다. 마음껏 뛰놀고 어지르면서 즐겁습니다. 신나게 달리거나 구르면서 기쁩니다. 배불리 먹고 목청껏 노래하면서 신납니다.


  할 수 없는 놀이는 없습니다. 할 수 없는 일은 없습니다. 무엇이든 곱게 생각하면서 차근차근 이룹니다. 자전거놀이를 하든 소꿉놀이를 하든 인형놀이를 하든 평상놀이를 하든 흙놀이를 하든 꽃놀이를 하든,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들을 살핍니다. 나무 열매를 함께 따고 들풀을 함께 뜯습니다. 서로 아끼면서 돕는 삶을 날마다 짓습니다.



.. 미술 숙제가 아버지 발 그려오기다 // 술 마시고 곯아떨어진 / 아버지의 발을 그렸다 // 처음으로 아버지의 발을 자세히 봤다 ..  (아버지의 발)



  아이들은 사랑으로 태어나서 자랍니다. 어른이 된 사람도 누구나 사랑으로 태어나서 자랍니다. 어른이 되었기에 더 안 자라도 되지 않습니다. 어른이 되었으니 회사에 나가 돈만 벌어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을 거쳐서 학교에 다녀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려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사랑을 받으려고 태어납니다. 아이들은 사랑을 받으면서 삶을 배우려고 태어납니다.


  아이를 낳은 어버이가 할 일은 ‘아이한테 사랑으로 삶을 가르치기’입니다. 어버이 누구나 할 일이란 ‘아이를 사랑으로 바라보며 삶을 물려주기’입니다.



.. 빈 화분에 / 꽃씨를 심고 물을 주었다 // 아기 손톱 같은 싹이 나왔다 // 예쁘게 웃어 주었다 ..  (꽃씨와 나)



  대학교에 보내려고 아이를 낳지는 않겠지요? 돈만 버는 기계로 키우려고 아이를 낳지는 않겠지요? 손자나 손녀를 보려고 아이를 낳지는 않겠지요?


  아이를 낳는 어버이는 먼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아이를 낳기 앞서, 아이를 왜 낳으려 하는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아이를 낳은 뒤 이 아이와 어떻게 살아갈 마음인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아이를 낳고 나서 이 아이와 함께 ‘어버이 스스로 어떻게 삶을 지어 가꾸겠노라’ 하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학교가 아이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학교에 아이를 도맡길 수 없습니다.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물려받고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아이는 어버이 곁에서 ‘삶을 이루는 모든 것’을 이어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버이는 아이 곁에서 ‘삶을 이루는 모든 것’을 차근차근 보여주면서 알려줄 수 있어야 합니다.



.. 약속 시간이 많이 남아 / 오랜만에 걸었다 / 차로만 다녀서일까 / 늘 지나던 길이었는데도 / 없다가 생긴 것처럼 낯선 것들이 많았다 ..  (걸어야겠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살펴보면,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그저 ‘입시 지옥 구렁텅이’입니다. 어느 어버이라 하든 아이를 사랑으로 낳았을 텐데, 정작 아이들한테 삶을 가르치지 않고 ‘입시 지식’만 쑤셔넣으려 합니다. 아이들이 사랑을 배우도록 북돋우지 않고 ‘시험 공부’만 시키려 합니다.


  아이들은 ‘수험생’이 되려고 태어났나요? 아이들은 해맑은 나날을 오직 ‘시멘트 교실’에 갇혀 해도 바람도 비와 눈도 맞지 못하면서 교과서와 참고서와 문제집만 들여다보도록 태어났나요? 아이들은 왜 대학교에 가야 하고, 아이들은 왜 교과서 지식에 갇혀야 하나요? 우리 어버이들은 왜 아이들을 끔찍한 시험지옥과 입시지옥에 몰아넣을까요?



.. 체육 시간 / 달리기를 하다 넘어졌다 // 깨진 무릎을 감싸는데 / 손 하나가 다가왔다 / 싸우고 이틀 동안 말 안 하던 친구다 ..  (손)



  안오일 님이 쓴 ‘청소년시’를 그러모은 《그래도 괜찮아》(푸른책들,2010)를 읽습니다. 이 시집에 모인 시들은 거의 모두 ‘입시지옥에서 앓는 아이들을 달래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오롯이 선 한 사람’이 아니라 ‘번호표를 받고 시험지옥에서 허덕이는 소모품’이 되어야 하는 아이들을 다룹니다.


  책이름에서도 엿볼 수 있지만, 이 시집은 푸름이를 ‘달래’거나 ‘다독이’려는 뜻으로 태어납니다. 아무래도 한국 사회가 온통 입시지옥이니 이러한 시집이 태어날밖에 없구나 싶습니다.


  그러면, 어른들은 무슨 일을 해야 할까 궁금합니다. 입시지옥을 어찌할 길이 없으니, 입시지옥이 끝날 때까지 더 기운을 내서 버티라고 해야 할까요? 입시지옥에서 아이들을 건져내야 하지 않나요? 입시지옥을 따순 햇볕으로 녹여 없애야 하지 않나요? 학교가 입시지옥이 아닌 ‘사랑스러운 배움터’가 되도록 슬기를 모아야 하지 않나요?



.. 언젠가는 노란 꽃을 피울 것 같다 ..  (순영이)



  동시도 청소년시도 어른시도 모두 ‘학교 밖’으로 나올 수 있기를 빕니다. 어떤 시이든 ‘제도권 울타리’가 아닌 삶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은 참말 아픕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아프게 하는 사람은 바로 ‘우리 여느 어버이 모두’입니다. 대통령이 아이들을 아프게 하지 않습니다. 국회의원이나 시장이나 군수나 판사나 의사나 변호사가 검사나 뭐 이런저런 기자나 지식인이나 학자나 교수나 교사나 이런저런 어른들이 아이들을 아프게 하지 않습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여느 어버이가 아이들을 아프게 합니다. 왜 그럴까요? 여느 어버이 스스로 이 입시지옥에 아이들을 내몰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여느 어버이 스스로 아이들한테 교과서와 참고서와 문제집만 잔뜩 안기기 때문입니다. 여느 어버이 스스로 아이들을 입시지옥에 몰아세운 뒤 ‘삶과 사랑은 아예 안 보여주고 안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시집 《그래도 괜찮아》가 아픈 푸름이를 달래려는 넋은 예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푸름이가 아파서 달래려고만 해서는 시도 문학도 글도 삶도 이야기도 될 수 없습니다. 푸름이가 아픈 뿌리가 무엇인지 읽어서 밝힐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아픈 뿌리를 뽑아서 새로운 씨앗을 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쪼록 다음 시집에서는 ‘현상 건드리기’에서 거듭날 수 있기를 빕니다. 겉만 건드린대서 아픈 생채기를 다스릴 수 있지 않습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모르면서 ‘어머니 손은 약손’이라 말한들, 아픈 곳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아이들을 아프게 하는 뿌리를 알아채고, 아이들을 사랑스럽게 보듬는 삶을 마주하면서, 아이와 어른이 함께 배우고 자라는 기쁜 사랑을 노래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청소년시가 튼튼하게 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4347.11.3.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청소년문학 비평)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