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마시며 글쓰기



  글을 쓰는 어떤 사람은 담배를 태우거나 술을 마십니다. 담배를 태우거나 술을 마셔야 글이 나온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담배를 태울 줄 모르기에, ‘술을 마시면서 글을 쓰자’고 하면서 쓴 적이 예전에 있습니다. 어떤 느낌이고 어떤 글이 나올는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술을 마시면서 쓴 글’은 나중에 모두 버렸습니다. 술을 마시면서 쓴 글 가운데 나중에 나 스스로 흐뭇하다고 느낀 글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글을 쓰면서 물을 마십니다. 커다란 유리병에 물을 가득 담아서 마십니다. 글을 쓰다가 팔힘이 달리거나 졸음이 오면 물을 들이켭니다. 두어 모금 벌컥벌컥 들이켠 뒤, 한 모금을 입에 머금습니다. 이렇게 물을 마시면 힘이 새로 솟고 눈을 번쩍 뜰 수 있습니다. 마치 자동차에 기름을 넣듯이, 내 몸은 맑은 물과 바람을 맞아들이면서 ‘글을 쓸 새 기운’을 끌어냅니다.


  아마 ‘어떤 글을 쓰느냐’에 따라 달라지리라 느끼는데, 내가 가장 자주 쓰고 가장 많이 쓰는 글은 ‘한국말사전에 들어갈 글’입니다. 낱말을 다루고 말투를 여미는 글이니, 아무래도 ‘술을 마시면서 쓰는 글’이 될 수 없을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나는 책이야기를 쓰든 아이들을 돌보는 이야기를 쓰든 책방마실 이야기를 쓰든 동시를 쓰든 무엇을 쓰든, 물을 마셔야 글힘이 살아납니다. 4347.11.27.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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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도 익혀야지

 (880) 그녀 40 : 그녀 → 간호사


나는 한 간호사에게 반하고 말았다. 지금도 그녀가 입고 있던 하얀 가운이 기억에 선명하다

《유모토 가즈미/양억관 옮김-고마워, 엄마》(푸른숲,2009) 120쪽


 그녀가 입고 있던 하얀 가운

→ 간호사가 입던 하얀 옷

→ 그 사람이 입은 하얀 옷

→ 그분이 입은 하얀 옷

→ 그 님이 입은 하얀 옷

 …



  이 보기글은 어린이문학에 나옵니다. 옮긴이는 아이들이 보는 책을 일본말에서 한국말로 옮기면서 ‘그녀’라는 낱말을 아무렇지 않게 끼워넣습니다.


  창작 시를 쓰거나 창작 동화를 쓰는 어른들은 거의 모두 ‘그녀’라는 말마디가 튀어나오지 않도록 몹시 애를 씁니다. 창작 시와 동화를 펴내는 출판사 편집자도 글쓴이가 보낸 글에 ‘그녀’라는 말마디가 있으면 덜어내려고 눈을 밝힙니다. 그런데 외국 작품을 옮길 적에는 ‘그녀’가 흔히 튀어나옵니다. 게다가 요즈음에는 웬만한 어린이문학에도 ‘그녀’가 손쉽게 드러납니다. 낮은학년 어린이가 보는 어린이문학에는 ‘그녀’가 거의 없으나, 높은학년 어린이가 보는 어린이문학에서는 ‘그녀’를 곧잘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난날 교과서를 엿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만, 초등학교에서는 ‘그녀’라는 말마디를 안 썼고, 요즈음도 웬만해서는 이 말마디를 쓰지 않도록 힘을 쏟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말씀씀이를 잘 헤아리지 못하는 교사나 어른이나 작가가 퍽 많습니다. 생각없이 툭툭 내뱉고 말아요.


  아이들은 저희 어머니나 아버지하고 텔레비전을 함께 보는데, 여느 어버이가 아이들과 함께 보는 연속극이나 다른 방송에서도 어김없이 ‘그녀’라는 말마디가 흘러넘칩니다. 어린이책과 교과서에서 ‘그녀’가 나타나지 않도록 아무리 애쓴들, 교사를 비롯해서 작가와 방송사에서 말씀씀이를 제대로 다스리지 않습니다. 신문을 내거나 책을 펴내는 사람들이 글씀씀이를 옳게 가누지 않습니다.


  이 보기글에서는 ‘어린 가시내’가 ‘어른인 여자 간호사’를 바라보면서 생각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이때에는 “그 언니”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아이들 말투를 헤아린다면 “그 언니가 입던 옷”이라는 말마디가 가장 잘 어울리겠구나 싶습니다.


 간호사가 입던 하얀 옷

 간호사 언니가 입던 하얀 덧옷

 그 언니가 입던 하얀 웃옷

 우리 간호사 언니가 입던 하얀 치마


  어린이문학과 어린이책이나 동화라면 말 한 마디까지 더 꼼꼼히 살펴야 하는데, 책이나 문학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이들 말씀씀이를 슬기롭게 살피고 아이들 눈높이를 살가이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아이들이 어른들 때문에 잘못 물들거나 찌드는 말투가 있는지 없는지 헤아릴 노릇입니다. 아이들이 즐겁게 쓸 말투를 튼튼히 세워서, 아이들이 맑고 밝으며 아름다운 말을 우리 어른들한테서 물려받도록 애쓰기를 바랍니다. 4343.2.13.흙/4347.11.27.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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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간호사 언니한테 반하고 말았다. 아직도 그 언니가 입은 하얀 옷이 환하게 떠오른다


“한 간호사에게”는 “간호사한테”로 손보거나 “어느 간호사한테”로 손봅니다. ‘지금(只今)도’는 ‘아직도’로 손질하고, “입고 있던”은 “입던”이나 “입은”으로 손질합니다. “하얀 가운(gown)” 같은 말은 그대로 두어야 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얀 옷”이라고만 해도 넉넉하고, “하얀 덧옷”이나 “하얀 웃옷”이나 “하얀 치마”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간호사옷’이라 하든 ‘의사옷’이라 하든 괜찮습니다. 사람들이 맡은 일에 따라 입는 옷이 다르다면 어떠한 일을 맡으면서 어떤 옷을 입는가를 그대로 나타내면 됩니다. “기억(記憶)에 선명(記憶)하다” 또한 그대로 두어도 됩니다. 그렇지만 “머리에 남는다”나 “환하게 떠오른다”나 “또렷이 생각난다”처럼 다듬을 수 있습니다.


..



 우리 말도 익혀야지

 (867) 그녀 38 : 그녀 → 암탉


그래서 난 열다섯 마리의 암탉들을 모아 놓고, 그들에게 날 도와 달라고 애원했지. 밤낮으로 그녀들을 다스리는 일에 진저리가 났다고 설명했지만

《리지아 누네스/길우경 옮김-노랑 가방》(민음사,1991) 45쪽


 그녀들을 다스리는 일에

→ 암탉을 다스리는 일에

 그들에게 날 도와 달라고

→ 암탉한테 날 도와 달라고



  이 보기글에서는 ‘열다섯 마리의’처럼 적으며 토씨 ‘-의’가 들러붙지만, 앞쪽에서는 ‘암탉’이라고 알맞게 적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그들’이라고 적더니, 이내 ‘그녀들’이라고 얄궂게 적고 맙니다. 우리는 암탉한테도 ‘그녀’라는 대이름씨를 붙여 주어야 하는가 봅니다. 암캐한테도 ‘그녀’라 하고, 암코양이한테도 ‘그녀’라 해야 하는가 봅니다.


  범이든 여우이든 늑대이든 오소리이든 멧돼지이든, 암컷은 암컷입니다. 수컷은 또 수컷입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모두 매한가지입니다. 푸나무 또한 이와 같습니다. 물에 사는 고기도 똑같으며 하늘을 나는 새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암이기에 암이고, 수이기에 수입니다.


  먼 옛날 유리임금이 불렀다는 꾀꼬리 노래에 “암수 서로 살갑구나” 하고 나옵니다. ‘암꾀꼬리’가 ‘암꾀꼬리’ 아닌 ‘그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집에서 기르는 집고양이도 암코양이요, 길에서 살아가는 길고양이 또한 암코양이입니다. 암컷이면 그예 암컷이지 ‘그녀’가 되지는 않습니다. 4342.4.12.해/4343.6.15.불/4347.11.27.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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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난 암탉 열다섯 마리를 모아 놓고 날 도와 달라고 빌었지. 밤낮으로 암탉을 다스리는 일에 진저리가 났다고 말했지만


“열다섯 마리의 암탉”은 “암탉 열다섯 마리”나 “열다섯 마리나 되는 암탉”으로 다듬습니다. ‘애원(哀願)했지’는 ‘빌었지’로 손보고, ‘설명(說明)했지만’은 ‘말했지만’이나 ‘이야기했지만’으로 손봅니다.


..



 우리 말도 익혀야지

 (869) 그녀 39 : 그녀 → 시앵 / 아기 엄마


나는 시앵의 어머니와 아이와 함께 갔어 … 테오, 나는 그곳에서 그녀를 보고 정말 행복했어. 그녀는 햇빛과 녹색으로 가득한 정원이 보이는 창 옆에 누워서, 너무나 지쳐 졸고 있었어

《빈센트 반 고흐/박홍규 옮김-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아트북스,2009) 227쪽


 그곳에서 그녀를 보고

→ 그곳에서 시앵을 보고

→ 그곳에서 아기 엄마를 보고

 …



  서양에서 나온 책을 한국말로 옮기는 분들은 으레 ‘정원’을 이야기합니다. 이 보기글에서도 ‘정원’이 나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정원’이 아니라 ‘마당’이나 ‘꽃밭’이나 ‘뜰’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일본사람은 ‘庭園’을 가꾼다고 이야기합니다. 일본은 ‘庭園’ 문화가 발돋움했습니다. 제법 넓게 마련한 집 안쪽에 ‘숲을 옮겨다 놓은 듯하’게 꾸미는 문화가 널리 퍼졌습니다.


  제가 중학교에 들어가 처음 영어를 배우던 때를 떠올립니다. 그무렵, 영어 ‘garden’은 반드시 ‘정원’으로 풀어서 이야기하도록 배웠습니다. 다른 동무는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정원’은 우리가 쓰던 낱말이 아니었고, 우리한테는 낯선 곳이었기에 제 입에는 잘 달라붙지 않았습니다. 다만, 영어 교과서에서 다루는 ‘가든 = 정원’은 서양집 앞에 꾸며 놓은 작은 풀숲이나 잔디밭 같은 데를 가리켰다고 느꼈습니다. 영어를 배우며 만나는 ‘가든’이라면 아무 생각 없이 ‘정원’으로 풀이했고, 이리하여 ‘서양집에서 꾸미듯 마련한 풀숲이나 잔디밭’이라면 ‘정원’이라고 해야 하는 줄 알았으며, 일본사람 집 안쪽에 꾸민 모습도 ‘정원’이라고 해야 맞는 줄 알았습니다.


 그녀는 창 옆에 누워서

→ 시앵은 창 옆에 누워서

→ 사랑스런 시앵은 창 옆에 누워서

→ 아기 엄마는 창 옆에 누워서

→ 애 엄마는 창 옆에 누워서


  요즈음 중학교에서 쓰는 영어 교재를 슬쩍 살펴봅니다. ‘beach’는 ‘해변’으로 풀고, ‘shore’는 ‘바닷가’로 풀어 놓습니다. 그러니까, 중학교를 다니며 영어를 익히는 요즈음 아이들은 이렇게 적힌 대로 외우는 셈인데, ‘해변’이 무엇이고 ‘바닷가’가 무엇인지를 얼마나 잘 따질까 궁금합니다. ‘해변(海邊)’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바닷가’를 한자로 옮긴 낱말일 뿐입니다. ‘바다 海 + 가장자리 邊’입니다. 한국말은 ‘바닷가’이고, 한자말은 ‘해변’입니다. 아니, 한국사람 낱말은 ‘바닷가’이고, 중국사람이나 일본사람 낱말은 ‘해변’입니다.


  영어사전을 뒤적이면, ‘beach’이든 ‘shore’이든 ‘해변, 해안, 바닷가, ……’처럼 풀이합니다. 그나마 한 자리에 죽 모아 놓기는 합니다만, 이런 말풀이가 이 나라 아이들한테 말을 말답게 가르치는 슬기로운 낱말책 구실을 할 수 있는지 알쏭달쏭합니다. ‘my = 나의’라고만 뜻풀이를 달아 놓듯, ‘she = 그녀’라고만 뜻풀이를 달아 놓는 영어사전과 영어 교과서만 있는데, 이 나라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그녀’라는 말투에 길들고 눈이 익으며 버릇이 들고 말아요.


  서양말에서는 대이름씨를 꼼꼼히 나누어서 씁니다. 한국말에서는 대이름씨를 꼼꼼히 나누어 쓰지 않습니다. 일본사람은 ‘被女’라는 낱말을 빚어서 쓰는데, 한국사람이 ‘피녀’를 ‘그녀’로 옮겨서 받아들일 만한지 궁금합니다. ‘그녀’라는 일본말을 자꾸 쓰기 때문에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사랑스럽거나 살갑게 가꾸는 흐름이 시나브로 무너집니다. 4324.6.9.불/4347.11.27.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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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앵네 어머니와 아이와 함께 갔어 … 테오, 나는 그곳에서 시앵을 보고 참말 즐거웠어. 시앵은 햇빛과 풀빛으로 가득한 뜰이 보이는 창 옆에 누워서, 너무나 지쳐 졸았어


“시앵의 어머니”는 “시앵 어머니”나 “시앵네 어머니”로 다듬고, “정말(正-) 행복(幸福)했어”는 “참으로 즐거웠어”나 “더없이 좋았어”나 “아주 기뻤어”로 다듬습니다. ‘녹색(綠色)’은 ‘풀빛’이나 ‘푸름’으로 손보고, ‘정원(庭園)’은 ‘앞뜰’이나 ‘뜰’이나 ‘꽃밭’으로 손봅니다. ‘뜨락’이라는 낱말도 있고 ‘텃밭’이나 ‘예쁜 뜰’이나 ‘앙증맞은 꽃밭’이라 해 볼 수 있습니다. “졸고 있었어”는 “졸았어”로 손질합니다.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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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도 익혀야지

 (892) 그녀 42 : 그녀 → 할머니


세월의 풍파가 그녀의 이마에 깊은 골이 패인 주름을 가져다주었어도 그녀의 눈에서 총기를 빼앗진 못했다

《조선희-조선희의 힐링 포토》(황금가지,2005) 104쪽


 그녀의 이마에

→ 할머니 이마에

 그녀의 눈에서

→ 할머니 눈에서


  할머니는 할머니입니다. 할머니를 ‘할머니’ 아닌 ‘그녀’로 적는다면 글멋이나 글맛이 달라진달 수 있을 테지만, 할머니는 언제나 할머니입니다. 보기글에서는 할머니를 이야기하는데, 글쓴이는 자꾸 할머니를 가리켜 ‘그녀’라고 말합니다.


  서양사람이라면 할머니이든 언니이든 누이이든 ‘she’로 적을 테지만, 한국사람이라면 할머니한테는 ‘할머니’라 하고 언니한테는 ‘언니’라 하며 누이한테는 ‘누이’라 해요. 살갑게 부르든 그냥 그렇게 부르든, 서로를 꾸밈없이 바라보며 마주하는 이름이 있어요. 4346.6.10.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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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나날이 할머니 이마에 깊은 골이 패인 주름을 가져다주었어도 할머니 눈에서 맑은 빛을 빼앗진 못했다


“세월(歲月)의 풍파(風波)가”에서 ‘풍파’는 “세상살이의 어려움이나 고통”을 뜻해요. ‘세월’은 “지나온 나날”을 뜻하기도 하지만 “살아가는 세상”을 뜻하기도 합니다. 곧, 이 글월은 겹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세월이”나 “풍파가”라고만 적어야 올바르다 할 테고, “기나긴 세월이”나 “거친 풍파가”처럼 적을 수 있으며, “기나긴 삶이”나 “거친 삶이”나 “힘든 나날이”로 손볼 수 있어요. ‘총기(聰氣)’는 “총명(聰明)한 기운”을 뜻한다 합니다. ‘총명’은 “(1) 보거나 들은 것을 오래 기억하는 힘이 있음 (2) 썩 영리하고 재주가 있음”을 뜻한다 해요. ‘영리(怜悧)’는 “눈치가 빠르고 똑똑하다”를 뜻한다고 합니다. 이 글월에서는 ‘똑똑함’이나 ‘해맑음’이나 ‘맑은 빛’으로 손질해 줍니다.


..


 우리 말도 익혀야지

 (887) 그녀 41


‘요네하라 마리 컬렉션’에 한 권을 더 추가하게 됐다. ‘프라하 생활’이나 ‘통역사 생활’에 더하여 이번에는 이 재치 넘치고 다정다감한 문필가가 자신의 ‘식생활’을 다루었다 … 하지만 그녀가 튼튼한 위를 지닌 ‘냠냠공주’이기도 했다는 건 이번에 알았다

《요네하라 마리/이현진 옮김-미식견문록》(마음산책,2009) 책 뒷겉장, 추천글


 그녀가 튼튼한 위를 지닌 냠냠공주이기도

→ 요네하라 마리가 위가 튼튼한 냠냠공주이기도

→ 이이가 위가 튼튼한 냠냠공주이기도

→ 이녁이 위가 튼튼한 냠냠공주이기도

→ 그대가 위가 튼튼한 냠냠공주이기도

 …



  ‘요네하라 마리’라고 하는 ‘문필가’는 온갖 밥을 알뜰히 즐긴다고 합니다. 이 보기글을 쓰신 분은 ‘요네하라 마리’라는 사람을 놓고 ‘문필가’라고 일컫다가 ‘그녀’라고 다시 일컫습니다. 아무래도 같은 말을 되풀이하지 않고자 여러 가지로 썼구나 싶은데, 처음부터 끝까지 ‘요네하라 마리’로 적는다고 해서 잘못될 일이란 없습니다. 따로 ‘문필가(文筆家)’라고 밝히지 않더라도 이 보기글에서 ‘요네하라 마리라는 사람은 글을 써서 책을 내는 사람’인 줄 알 수 있습니다. 아니, 이 보기글이 적힌 책을 읽는 사람은 ‘요네하라 마리 = 글 쓰는 사람 = 책을 쓴 사람’인 줄 알아요.


  그런데 ‘문필가’란 무엇일까요. 아니, ‘문필가’라고 하는 이름이란 무엇일까요.


  한자말 ‘필자(筆者)’는 한국사람이 쓸 만한 낱말이 아니기에 ‘글쓴이’나 ‘지은이’로 고쳐써야 한다고들 이야기합니다. ‘문필가’라는 한자말에도 이와 똑같습니다. 한국사람이 쓸 낱말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글(文)을 쓰는(筆) 사람(家)”인걸요.


  때와 곳과 흐름을 살펴서 ‘글쟁이’라 가리켜도 되고, ‘글꾼’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잘 어울립니다. 사진을 찍으면 사진쟁이요, 그림을 그려 그림쟁이가 되고, 일을 하기에 일꾼이며, 살림을 하기에 살림꾼입니다. 한국사람은 한국말로 ‘-쟁이’와 ‘-꾼’을 붙여서 저마다 어떤 일을 하는지 나타냅니다. ‘-쟁이’와 ‘-꾼’은 사람을 낮잡거나 깎아내리는 말투가 아닙니다. 서로 꾸밈없이 마주하거나 바라보면서 쓰는 한국말인 ‘-쟁이’이며 ‘-꾼’입니다.


  이웃을 아끼고 동무를 사랑하는 말을 즐겁고 아름답게 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겉치레 말이 아닌 속차림 말이 되도록 마음을 쏟기를 바랍니다. 겉치레 삶이 아닌 속차림 삶이 되도록 마음을 기울이기를 바랍니다. 4343.6.15.불/4347.11.27.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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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네하라 마리 책’에 한 권을 더 넣는다. ‘프라하 이야기’나 ‘통역사 이야기’에 더하여 이번에는 이 솜씨 좋고 따스한 글쓴이가 ‘밥 이야기’를 다루었다 … 그러나 요네하라 마리가 위가 튼튼한 ‘냠냠공주’이기도 한 줄 이번에 알았다


이 자리에 쓰인 ‘컬렉션(collection)’은 ‘목록(目錄)’으로 고쳐써야 올바릅니다. 그런데, “요네하라 마리 목록”이란 바로 “요네하라 마리 책”이거나 “요네하라 마리 책들”이에요. 말 그대로 ‘책’이나 ‘책들’로 적으면 됩니다. ‘추가(追加)하게’는 ‘넣게’나 ‘얹게’나 ‘들이게’나 ‘들여놓게’나 ‘꽂게’나 ‘보태게’로 손보고, “재치(才致) 넘치고”는 “솜씨 좋고”나 “재주 넘치고”로 손봅니다. ‘생활(生活)’은 ‘삶’으로 손볼 낱말인데, 이 자리에서는 ‘이야기’로 손보아도 어울립니다. ‘다정다감(多情多感)한’은 ‘따스한’이나 ‘살가운’이나 ‘따스하고 푸진’이나 ‘따스하며 촉촉한’으로 손질하고, ‘문필가(文筆家)’는 ‘글쓴이’나 ‘글쟁이’로 손질하며, “자신(自身)의 식생활(食生活)을”은 “무엇을 먹으며 살아가는지를”이나 “어떤 먹을거리를 즐기며 사는지를”이나 “어떤 밥거리를 좋아하는지를”로 손질합니다. 글흐름을 살피면 ‘식생활’은 ‘밥 이야기’로 손질해도 잘 어울립니다. ‘하지만’은 ‘그렇지만’이나 ‘그러나’로 고치고, “튼튼한 위를 지닌”은 “위가 튼튼한”이나 “밥통이 튼튼한”으로 고쳐 봅니다. “-이기도 했다는 건”은 “-이기도 했음은”으로 다듬어 줍니다.


..



 우리 말도 익혀야지

 (953) 그녀 47 : 그녀 → 동생


언니이자 엄마 같은 내 동생. 좋은 일을 해도 남들 앞에 내세우지 않고, 그럴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 늘 주위 사람과 세상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그녀. 그녀를 들여다보는 일만으르도

《신현림-서른, 나는 나에게로 돌아간다》(예담,2013) 131쪽


 세상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그녀

→ 온누리 아픔을 어루만지는 동생

→ 온누리 아픔을 어루만지는 아이

 그녀를 들여다보는

→ 동생을 들여다보는

→ 내 동생을 들여다보는

→ 우리 동생을 들여다보는

→ 이 아이를 들여다보는

 …



  이 글에서 ‘그녀’로 가리키는 사람은 “내 동생”입니다. 글쓴이는 첫머리에 “내 동생”이라 적은 뒤, 잇달아 ‘그녀’를 씁니다. 굳이 이렇게 해야 했을까 싶습니다. “내 동생”이라고 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내 동생”이니까요.


  뒤쪽에서는 첫머리와 달리 적고 싶다면 “동생”이라고만 하거나 “우리 동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나 “이 아이”나 “그 아이”라 할 수 있어요. 또는 “사람”이나 “숨결”이나 “넋” 같은 낱말을 쓸 만합니다. 4347.11.27.나무.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언니이자 엄마 같은 내 동생. 좋은 일을 해도 남들 앞에 내세우지 않고, 그럴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 늘 이웃과 온누리 아픔을 어루만지는 내 동생. 내 동생을 들여다보는 일만으로도


“주위(周圍) 사람”은 “둘레 사람”이나 “이웃”으로 손보고, “세상(世上)의 아픔”은 “온누리 아픔”으로 손봅니다.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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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그리고 1
히가시무라 아키코 지음, 정은서 옮김 / 애니북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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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424



쓰고 또 쓰고

― 그리고, 또 그리고 1

 히가시무라 아키코 글·그림

 정은서 옮김

 애니북스 펴냄, 2014.11.12.



  나는 글을 쓰고 또 씁니다. 날마다 글을 쓰고 또 씁니다. 날마다 삶이 새롭기 때문에 글을 새롭게 씁니다. 날마다 새롭게 배우는 터라 글을 새롭게 씁니다. 삶이 새롭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글을 못 씁니다. 새롭게 배우는 이야기가 없으면 글을 못 씁니다.


  달라지는 날씨를 마주하면서 배웁니다. 차츰차츰 자라는 아이를 마주하면서 배웁니다. 내 몸이 날마다 다르게 움직이는 결을 살피면서 배웁니다. 우리 집 나무와 풀이 날마다 새롭게 자라는 모습을 느끼면서 배웁니다.


  둘레를 살피면 온통 글감입니다. 내가 꿈꾸는 삶이 글감이고, 아이와 누리는 삶이 글감이며, 아이와 마시는 바람이 글감입니다. 아이와 함께 뛰놀고 쉬는 마당이 글감이요, 철마다 다른 옷을 입는 나무가 글감입니다. 자전거로 달리는 들녘이 글감이요, 해마다 찾아오는 제비가 글감입니다.





- ‘날마다 그런 허황된 망상에 빠져서 공부는 내팽개친 채 마을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요요도가와의 둔치에서 고기만두를 입에 물고 만화책이나 보면서 느긋하게 지내고 있었지요 … 그런 미야자키에서 만화만 보면서 자유롭고 행복하게 아무 생각 없이 성장하여.’ (8쪽)

- “선생님은 어느 미대를 나오셨어요?” “난 대학 안 나왔다.” (54쪽)



  글을 써야겠다고 처음 생각한 때는 언제였는지 잘 모릅니다. 다만, 연필을 늘 쥐면서 놀았습니다. 동네와 골목에서는 몸을 움직이면서 놀았고, 학교에서 책상맡에 앉아서 지겨운 수업을 들어야 할 때면 늘 연필을 한손에 쥐었어요. 무엇을 하든 학교에서는 연필(이나 볼펜)을 늘 손에 쥐었습니다.


  공책이나 교과서나 시험종이 한쪽에 뭔가 끄적입니다. 글을 끄적이든 그림을 그리든 연필을 놀립니다. 따분한 수업에 휩쓸리고 싶지 않아서 마음속으로 이야기를 짓습니다. 교사들 이야기는 아예 처음부터 안 들으면서 내 마음속 목소리만 듣습니다. 온갖 시험이 닥칠 무렵에 비로소 교과서를 뒤적이면서 시험공부를 할 뿐입니다.


  그런데, 연필을 손에서 놓을 때가 있어요. 내 귀에는 곱게 들리는 새들이 둘레에서 노래할 때입니다. 구름이 흐를 때입니다. 햇살과 햇발이 골고루 퍼질 때입니다. 무지개가 뜰 때입니다. 비가 내리고 눈발이 날리는 때입니다. 언제나 새로우면서 아름다운 이야기가 다가올 적에는 연필을 놓습니다. 언제나 따분하면서 지겨운 목소리가 찾아올 적에는 연필을 쥡니다.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늘 연필을 손에 쥐었고, 버스나 전철이나 기차를 탈 적에도 늘 연필을 손에 쥡니다.





- “하야시, 너 살 좀 빼라. 뚱뚱하면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없어. 입시까지 5킬로는 빼라.” (66쪽)

- “넌! 이것도 그림이라고 그렸어? 종이가 아깝다! 종이에게 사과해라! ‘더럽혀서 죄송하다’고 사과해!” (103쪽)

- ‘저는 너무나 신기했습니다. 미대도 안 나온 선생님이 왜 이렇게 우리의 미대 진학에 집착하시는 걸까요? 선생님은 미대 출신이 아니어도 엄청난 그림을 그리시는데 말이죠.’ (104쪽)



  히가시무라 아키코 님이 그린 만화책 《그리고, 또 그리고》(애니북스.2014) 첫째 권을 읽습니다. 나와 나이가 같은 ‘일본 만화가 아줌마’는 어릴 적부터 ‘순정만화 그리는 사람’이 되려는 꿈을 품었다고 합니다. ‘화가’가 된다든지 ‘미대’에 간다는 꿈이 아니라 ‘만화를 그리려’는 꿈을 품었다고 해요.


  그래서 이 아줌마는 이녁이 고등학생이던 때에 ‘만화를 그리려면 무엇을 먼저 익혀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채, 습작이나 데생조차 엉터리인 ‘이녁 모습을 알아채지도 못하’면서 탱자탱자 놀기만 했대요. 《그리고, 또 그리고》를 읽으면 이런 이야기를 낱낱이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그예 놀고 먹으면서 모든 일이 술술 다 풀리리라 여긴 이 아줌마는 고등학교 3학년 나이가 되어서야 ‘그림길로 제대로 이끄는 길잡이’를 만납니다. ‘그림 길잡이’는 이녁이 이제껏 그림을 얼마나 엉터리로 그렸고,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조차 몰랐던 모습을 낱낱이 깨우쳐 주었다고 합니다.





- “전 못 해요!” “못 하긴 뭘 못 해? 무조건 해라! 인물화란 모델의 인간성까지 표현할 수 있어야 하는 법! 네가 성의 없이 포즈를 취하니까 그림도 맥없는 시시한 그림이 되는 거다!” (114쪽)

- ‘라이벌끼리라고는 해도 다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예술 계통 고교생이라 순식간에 친해졌고 첫날밤은 깊어갔습니다.’ (136쪽)



  만화 그리는 아줌마는 그리고 또 그리면서 차츰 발돋움합니다. 글 쓰는 아저씨는 쓰고 또 쓰면서 찬찬히 발돋움합니다. 만화 그리는 아줌마는 그리고 또 그리면서 삶을 새롭게 그립니다. 글 쓰는 아저씨는 쓰고 또 쓰면서 삶을 새롭게 씁니다.


  만화 그리는 아줌마가 이녁 아이와 함께 즐겁게 그림꽃을 피울 수 있기를 빕니다. 가깝고도 먼 이웃나라에서 손뼉을 쳐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나는 나한테 손뼉을 쳐 줍니다. 글 쓰는 아저씨는 오늘 이곳에서 네 식구가 함께 오순도순 사랑으로 글꽃을 피우는 삶을 일굴 수 있기를 빕니다. 우리는 저마다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살고 또 살면서, 사랑하고 또 사랑하면서, 꿈꾸고 또 꿈꾸면서, 노래하고 또 노래하면서, 웃고 또 웃으면서, 참말 아름답게 다시 깨어나는 멋진 꽃입니다. 4347.11.27.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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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값과 배움삯



  2만 원짜리 책이 한 권 있습니다. 2만 원짜리 책을 한 권 사서 읽으면, 나는 2만 원어치를 배웁니다. 아주 마땅한 일입니다. 100만 원이 드는 강의가 있습니다. 100만 원짜리 강의를 챙기려고 찾아가서 들으면, 나는 100만 원어치를 배웁니다. 참으로 마땅한 일입니다.


  2만 원짜리 책을 사서 읽지만 100만 원어치에 이르는 삶을 배울 수도 있습니다. 100만 원짜리 강의를 챙겨 듣지만 2만 원어치에 머무는 삶을 배울 수도 있습니다. 마음을 어떻게 가누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책으로 배우려 한다면, 2만 원짜리를 사든 2천 원짜리를 사든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새책으로는 2만 원이어도 헌책으로는 2천 원일 수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이웃이나 동무가 책을 선물할 수 있어요. 책값은 0원이 들어도 얼마든지 ‘책으로 배울 수 있는 만큼 책으로 배운다’고 할 만합니다.


  이제 이 땅에 없는 시인 가운데 김남주와 고정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내요 하나는 가시내인데, 두 사람은 모두 전남 해남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두 사람 모두 전남 해남에서 깊디깊은 두멧시골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이제 이 땅에 없는 시인 가운데 둘인데, 이녁이 쓴 시를 그러모은 책을 사서 읽으면, 두 사람이 ‘우리한테 들려주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이 전남 해남 고장말로 구수하게 읊는 목소리를 헤아리면서 이야기를 읽을 수는 없습니다.


  책으로 읽는 지식은 ‘책에서 얻을 수 있는 만큼 얻는 지식’일 뿐입니다. 책으로 얻는 지식은 ‘삶으로 얻는 지식’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나무도감을 백 권쯤 사서 읽는다고 쳐 보지요. 나무도감을 백 권쯤 사서 읽는 이 가운데 ‘나무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가 있을까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무를 안다’고 말하려면,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철에 따라 다른 모습뿐 아니라, 열두 달에 따라 다른 모습에다가, 삼백예순닷새에 따라 다른 모습을 비롯해서, 백 해 즈믄 해에 걸쳐 다른 모습까지 알아야 합니다. 이를 알지 못하고서 이름을 익히거나 한살이를 익히거나 꽃이나 열매를 익혔대서 ‘나무를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나무도감도 ‘나무 한 그루’ 이야기를 제대로 다루지 못합니다. 나무 한 그루 이야기만 다루려 하더라도 100만 쪽이 넘는 두툼한 도감으로 엮어도 다 담아내지 못합니다.


  어떤 배움 한 가지를 놓고, 100만 원을 써야 하는 강의와 2만 원을 들이면 되는 책이 있습니다. 이때에 어떤 길로 가겠습니까? 100만 원을 들여서 강의를 들을까요, 2만 원을 들여서 책을 읽을까요?


  나는 대학교를 다섯 학기 다닌 뒤 그만두었습니다. 왜 그만두었느냐 하면, 오늘날 한국에서 대학교 강의는 ‘비싼 등록금과 견주어 가르치는 알맹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대학교 강의는 ‘굳이 비싼 등록금을 물어서 한 주에 한두 시간 겨우 듣는 이야기’일 뿐인데, ‘대학교재를 한 권 사서 한 시간 동안 읽느’니만 못할 만큼 알맹이가 허술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 강의는 ‘한 해 천만 원’을 들여서 다닐 만하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깊이 배우고 싶다면, ‘백만 원을 들여서 책을 사서 읽’고, 남은 ‘구백만 원으로는 한 해 동안 여행을 다니고 온갖 일을 몸소 겪으면서 배울’ 때에 깊이 배울 수 있다고 느낍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대학 강의는 이와 같습니다만, 삶을 밝히는 길을 여는 슬기로운 강의가 있다면, 이러한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자리에 가려고 100만 원을 모을 만하다고, 아니 모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삶을 밝히는 길을 여는 슬기로운 강의라면, 2만 원짜리 책을 사서 읽을 적하고 사뭇 다르면서 넓고 깊게 이끄는 숨결이 흐를 테니까요. 다시 말하자면, 김남주 시인이나 고정희 시인 목소리를 듣고 얼굴을 보며 숨결을 함께 느낄 만한 ‘시 낭송회’에 가는 데에 드는 돈이 100만 원이라면 기꺼이 100만 원을 치를 만하다는 뜻입니다. 시집을 2만 원어치 사서 ‘시인 목소리와 숨결과 얼굴도 모르는 채 읽기’보다 100만 원을 어떻게든 모아서 시인을 몸소 만나서 두 귀로 들을 때에 가슴 깊이 노래가 흐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배우려는 사람은 움직입니다. 배워서 알려고 하는 사람은 움직입니다.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배우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이들은 하루 내내 쉬지 않으면서 뛰고 구르고 엎어지고 깨지고 부딪히고 웃고 울고 노래하면서 삶과 사랑과 꿈을 배웁니다. 우리 어른들은 무엇을 하면서 배운다고 할까요? 책상맡에 앉아서 책을 몇 쪽 읽고 나서 ‘나 좀 안단 말이야!’ 하고 우쭐거리지 않나요? 흙 한 줌 만지지 않고서 나무나 꽃이나 풀을 안다고, 흙 한 줌 만진 적이 없으면서 ‘채식을 한다’고 밝히지 않나요?


  때와 곳에 따라서는 2만 원짜리 책을 사서 읽어도 얼마든지 깊고 넓고 아름답고 사랑스레 배웁니다. 그런데, 눈앞에 아주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100만 원짜리 강의가 있는데 ‘오늘 내 주머니에 돈이 없어서 못 듣겠어’라든지 ‘무슨 강의가 저렇게 비싸나’ 하고 푸념을 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못 배웁니다.


  예부터 어른들은 아이들이 배운다고 할 적에 땅도 팔고 집까지 팔면서 가르쳤습니다. 오늘 이곳에서 ‘어른인 우리’들은 참말 땅과 집을 팔아서 배우겠다고 하는 마음이 될 때에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른이니까요. 땅과 집을 팔아서 배운 뒤에는 어떻게 될까요? 슬기롭고 아름다우며 사랑스럽게 배운 사람은, 땅과 집을 팔아서 배운 뒤, 한결 너르며 기름진 땅을 장만할 수 있고, 한결 포근하며 아름다운 집을 장만할 수 있습니다.


  배움이란 이와 같고, 삶이란 이와 같습니다. 책값과 배움삯을 아끼려는 사람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합니다. 4347.11.27.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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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2014-11-27 08:21   좋아요 0 | URL
아침에 이 글을 읽고 다시금 저의 독서에 대해 생각하게 됐네요 ^^

파란놀 2014-11-27 08:28   좋아요 0 | URL
우리가 책을 장만하거나 무엇을 배운다고 할 적에는
그야말로 아낌없이 다가서서 배워야 하는구나 싶어요.

`돈`을 따지면 제대로 못 배우는구나 싶어요.
사람아사람아 님 마음에 즐거운 이야기로 스며들었기를 빌어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