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말을 죽이는 외마디 한자말

 (1351) 칠하다漆 3


크레파스를 꾹꾹 눌러서 칠하란 말이야

《이정록-미술왕》(한겨레아이들,2014) 15쪽


 꾹꾹 눌러서 칠하란

→ 꾹꾹 눌러서 그리란

→ 꾹꾹 눌러서 바르란

→ 꾹꾹 눌러서 쓰란

 …



  그림을 그립니다. 아이도 어른도 그림을 그립니다. 그림을 그릴 적에는 붓을 쓰기도 하고, 연필을 쓰기도 하며, 물감을 쓰기도 합니다. 그림을 그릴 적에는 종이에 여러 가지 빛깔을 입힙니다. 빨간 크레파스를 쓰면 빨간 빛깔을 입힙니다. 파란 물감을 쓰면 파란 빛깔을 입힙니다. 까만 연필을 쓰면 까만 빛깔을 입힙니다.


  아이는 어른이 쓰는 말을 물려받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아이 곁에서 어른이 “네가 그린 빨강이 참 곱구나” 하고 말하면 아이는 “네가 ‘그린’”이라는 말마디를 들으면서 말을 익힙니다. 둘레에서 어른이 “네가 칠한 풀빛이 이쁘구나” 하고 말하면 아이는 “네가 ‘칠한’”이라는 말마디를 들으면서 말을 배웁니다.


  어느 한 가지 말을 배워야 올바르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한국말은 ‘그리다’입니다. 한국말은 ‘그리다’를 비롯해서 ‘입히다’와 ‘바르다’와 ‘묻히다’입니다. 때에 따라서는 ‘쓰다’라는 낱말을 넣습니다.


  ‘그리다·입히다·바르다·묻히다·쓰다’는 느낌과 뜻이 조금씩 다릅니다. 그림으로 이루는 빛깔과 모양은 그때그때 다르기 마련이니, 어느 낱말을 골라서 넣느냐에 따라 그림을 이루는 모습뿐 아니라 그림을 바라보는 눈길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달리 ‘漆하다’라는 외마디 한자말을 쓰면 이도 저도 아닙니다. 그저 뭉뚱그릴 뿐입니다.


  한국말을 한국말답게 옳게 써야 말빛을 살립니다. 한국말을 제대로 익혀서 써야 말느낌을 살립니다. 한국말을 올바로 살펴서 써야 말넋을 살찌웁니다. 4347.12.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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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파스를 꾹꾹 눌러서 그리란 말이야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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ㅂ 책넋 돌보기

38. 빨리 읽는 책, 오래 읽는 책



  1991년부터 1993년까지 인천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며 ‘책’이 많이 고팠습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문을 연 지 얼마 안 된 곳이었고, 학교도서관은 1992년에 비로소 조그맣게 문을 열었습니다. 열린 도서관은 아니고 닫힌 도서관이라서 쪽글에 ‘빌리고 싶은 책’을 적어서 내밀어야 비로소 며칠 동안 빌릴 수 있었습니다. 이때 이 학교에서는 빈 교실 한 칸을 도서관으로 바꾸었습니다. 책꽂이는 작고 책조차 몇 가지 없었습니다. 이무렵 인천에 있는 다른 고등학교도 도서관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거나 모양만 있기 일쑤였습니다. 시립도서관에도 새로운 책보다 낡은 책이 훨씬 많았고, 이때에는 아직 구립도서관이 없었습니다. 학교마다 학교 앞에 조그마한 책방이 있기는 하지만, 온갖 책을 두루 갖추는 곳이 아니라 수험서와 교재가 훨씬 넓게 자리를 차지하는 곳이면서 문방구 노릇을 했습니다. 나는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책이 읽고 싶을’ 적에는 제법 큰 새책방에 갔습니다. 제법 큰 새책방에는 새로 나오는 책도 있지만, 나온 지 꽤 지난 책을 쏠쏠히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제법 큰 새책방은 ‘많이 팔리지 않더라도 오래도록 읽힐 만한 알찬 책’을 갖추었습니다. 도서관이 제대로 없고, 도서관이 있어도 책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던 지난날에는, 동네에 있는 제법 큰 새책방, 그렇지만 아주 크지는 않은 이곳이 몹시 고마운 책쉼터 구실을 했습니다.


  새책방에 찾아가서 가만히 서서 책을 읽자면 눈치를 봅니다. 새책이란 ‘팔 물건’입니다. 손때를 타면 다른 사람이 사들이기에 나쁩니다. 새책방에 갈 적에는 옷차림부터 깨끗이 하고 손도 깨끗이 씻습니다. 책방에 닿을 때까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어갑니다. 책방에 닿고서 책을 살필 적에는 눈으로만 살핀 뒤, ‘아, 읽고 싶어라’ 하는 마음이 드는 책이 있을 적에 비로소 손바닥을 비벼서 한 번 더 깨끗이 한 뒤 집습니다. 손때가 탈세라 살며시 쥐고 살며시 넘깁니다. 그리고 아주 빠르게 읽습니다. 책 하나를 든 채 너무 오래 가만히 서면 ‘책은 안 사고 그냥 읽고 가는’ 줄 알아챌 테니까요. 책방은 도서관이 아니라 ‘책을 팔아서 장사를 해야 하는 곳’이니 ‘책읽기’만 즐길 수 없습니다. 어느 만큼 책읽기를 즐겨도 되지만, 다른 사람이 사서 볼 책을 너무 오래 만지면 안 되지요.


  그래서, 새책방으로 ‘책을 읽으러 갈’ 적에는 ‘돈을 치러서 장만할 책’을 먼저 고릅니다. ‘돈을 치러 장만할 책’은 어깻죽지에 꽂습니다. ‘나, 이 책 살 생각이에요’ 하고 알리는 모습이라고 할까요. 한두 권을 사면서 적어도 서너 권은 읽으려는 마음이니 책을 아주 빨리 눈치껏 읽을밖에 없습니다. ‘빨리읽기(속독)’를 그리 좋아하지 않으나, 눈치를 보면서 읽다 보니 줄거리를 잽싸게 헤아려서 알아내려고 여러모로 용을 씁니다.


  그런데, 이렇게 ‘새책방에 서서 눈치 보며 읽기’를 하다 보면, 마음이 더 무겁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어느 책 하나를 빨리 훑어서 줄거리를 헤아리더라도 ‘다 읽은 책을 장만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이렇게 아름답고 멋진 책도 장만하고 싶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고등학생 적에 새책방에서 ‘몰래 빨래 읽기’를 하면서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돈을 넉넉히 벌어서 ‘내 마음을 아름답게 움직인 모든 책을 기쁘게 장만하자’고 생각했습니다.


  루이제 린저 님이 쓴 《분수의 비밀》(한빛문화사 펴냄,1979)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누리는 삶과 어른들이 아이를 다루거나 마주하는 삶이 어떠한가를 찬찬히 밝히는 사랑스러운 어린이문학입니다. 1979년에 처음 나온 책이지만 오랫동안 판이 끊어졌기에 헌책방에서만 만날 수 있었는데, 2010년에 새옷을 입고 다시 태어났습니다. 1979년에 나온 낡은 책으로 읽으면, 27쪽에 “나는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었고, ‘수지, 너는 잘 못 보았어.’ 하긴 그때 사람들이 흘깃 보았을 때 볼 수 있는 것 이상은 보지 못했거든요.” 같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이 대목은 어떤 이야기일까요. 내가 나한테 하는 말이란 무엇일까요. 잘 보는 눈과 잘 못 보는 눈이란 무엇일까요. 남이 흘깃 보는 만큼 보는 눈과 내가 깊이 들여다보는 눈이란 무엇일까요.


  내가 나한테 하는 말은 내가 오늘 어떻게 사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잘 보는 눈이란 꾸미지 않고 고스란히 보는 눈입니다. 잘 못 보는 눈이란 참모습 앞에서는 눈을 감거나 가린 채 내 길을 제대로 못 걷는 모습입니다. 남이 흘깃 보는 만큼 보는 눈이란 사랑이 없이 지나치는 눈입니다. 내가 깊이 들여다보는 눈이란 내 손길에 사랑을 담아서 삶을 가꾸려는 몸짓입니다.


  책은 빨리 읽어도 됩니다. 책은 천천히 읽어도 됩니다. 책은 많이 읽어도 됩니다. 책은 적게 읽어도 됩니다. 책은 백만 권을 읽어도 됩니다. 책은 하나도 안 읽어도 됩니다. 삶을 살찌울 수 있으면, 책을 빨리 읽든 천천히 읽든 대수롭지 않고 모두 똑같습니다. 내 오늘을 스스로 사랑할 수 있으면, 책을 많이 읽어도 즐겁고 적게 읽어도 즐겁습니다. 이웃과 어깨동무를 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으면, 책을 몇 권 읽더라도 생각을 슬기롭게 빛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학교에서 전교 1등을 한 아이와 전교 꼴등을 한 아이가 있다면, 전교 1등을 한 아이가 마음까지 착할까요? 전교 꼴등을 한 아이가 마음까지 나쁠까요? 아니지요. 전교 1등은 그저 전교 1등일 뿐입니다. 전교 꼴등은 그예 전교 꼴등일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전교 1등이 되거나 전교 꼴등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책을 빨리 읽거나 많이 읽어야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책을 느리게 읽거나 안 읽어야 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내 삶을 가꿀 수 있는 결이 무엇인지 스스로 똑바로 살펴서 기쁘게 책을 마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착한 아이는 그저 착합니다. 착한 아이는 학교에서 시험성적이 몇 등이건 따지지 않으면서 착합니다. 착한 아이는 그 아이네 어버이가 부자이건 가난뱅이이건 따지지 않으면서 착합니다. 착한 아이는 얼굴이 이쁘건 못생기건 언제나 착합니다.


  어느 책을 읽든, 내가 손에 쥔 책에서 흐르는 이야기를 찬찬히 살필 수 있으면 됩니다. 빨리 읽더라도 이야기를 못 살핀다면 읽으나 마나입니다. 천천히 읽더라도 이야기를 못 깨닫는다면 읽으나 마나입니다. 생각해 보셔요. 42킬로미터를 두 시간 만에 달리는 사람과 열 시간이 걸려도 못 달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삶결이 다른 두 사람더러 똑같은 길을 똑같이 달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은 42킬로미터를 두 시간 만에 달리면서 이녁대로 이녁 삶을 일구면서 새롭게 누립니다. 한 사람은 42킬로미터를 달릴 엄두를 안 내면서 이녁대로 다른 삶을 스스로 재미나게 일구면서 새롭게 누립니다.


  책 한 권을 ‘빨리’ 읽는다고 여길 수 없습니다. 사람마다 읽는 빠르기가 다릅니다. 사람마다 몸이 달라, 누구는 밥을 많이 먹으면서 살이 안 찌고 누구는 밥을 적게 먹어도 살이 찝니다.


  다만, 한 가지를 덧붙일 수 있어요. 책을 빨리 읽는 사람은 그만큼 책읽기에 온마음을 쏟습니다. 다른 것은 안 쳐다보고 오로지 책만 쳐다보기에 책을 빨리 읽을 수 있습니다. 세포 하나까지, 머리카락 하나까지, 핏줄 하나까지, 그야말로 온몸과 온마음을 쏟아서 책으로 빠져들면 누구나 책을 무척 빨리 읽을 수 있습니다. 마음을 오롯이 기울이면서 쏟을 적에는 어떤 일이든 아주 빠르게 할 수 있습니다. 4347.12.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청소년 책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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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는 눈빛 102. 밝은 눈빛



  일곱 살 아이가 마을 어귀에 있는 빨래터에 다녀온다고 하더니 ‘소리쟁이’라는 풀을 한 잎 뜯어서 가지고 옵니다. 아이는 이 풀은 이름이 무엇이냐고 합니다. “‘소리쟁이’야.” 하고 알려줍니다. 아이는 “‘소리쟁이’? 아, 소리쟁이로구나.” 하고 말합니다. 아이는 한 번 듣고 나서 풀이름을 곧바로 머리와 몸과 손과 눈에 담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풀이름을 까맣게 잊은 뒤 나중에 다시 물을 수 있습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나도 풀이름이나 나무이름을 곧잘 까먹었습니다. 언제나 어머니한테 여쭈었어요. 어머니는 나한테 도감이요 사전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지치지 않고 풀이름과 나무이름을 알려주었습니다. 때때로 어머니도 “나도 몰라. 그냥 풀이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소리쟁이’라는 풀은 무척 맛있습니다. 풀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도시내기도 소리쟁이라는 풀은 무척 달고 맛나게 즐길 수 있습니다. 상추나 배춧잎이나 깻잎 말고는 거의 풀을 구경해 보지 못한 도시내기라 하더라도, 눈을 살며시 감고 소리쟁이 잎사귀 하나를 잎에 넣고 잘근잘근 씹으면 ‘풀이 이렇게 맛나네?’ 하고 놀랄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소리쟁이는 아주 흔한 풀입니다. 다만, 흔한 풀이되 아무 데에서나 아무렇게나 자라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풀을 뜯어서 먹을 적에도 아무 데에서나 아무렇게나 자라는 풀을 다 뜯어서 먹지는 않습니다. 망가진 땅이나 더러워진 땅에서 나는 풀은 굳이 먹지 않습니다. 왜 안 먹을까요? 망가진 땅이나 더러워진 땅에서 나는 풀은 망가지거나 더러워진 흙을 되살리는 일을 해요. 그러니, 이 풀이 씩씩하게 흙을 되살리기를 바라면서 가만히 지켜봅니다. 두 해 네 해 여섯 해 가만히 지켜보면, 풀은 씩씩하고 기운차게 올라옵니다.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나면서 돋고 시들고 죽고 다시 돋고 시들고 죽고를 되풀이하면서 흙을 살립니다.


  봄이든 늦가을이든, 소리쟁이잎을 보면 갓 돋을 적에는 멀끔하지만 조금 자란다 싶으면 어느새 진딧물이나 풀벌레가 잔뜩 달라붙어서 갉아먹습니다. 더없이 맛난 풀인 줄 진딧물과 풀벌레가 재빠르게 알아챕니다.


  벌레 먹는 풀과 벌레 안 먹는 풀을 헤아릴 수 있을까요? 벌레가 먹는 풀이란 그만큼 싱그럽고 맛난 풀이라는 뜻입니다. 벌레가 안 먹는 풀이란 ‘벌레가 싫어하는 풀’일 수도 있으나, 요즈음은 농약과 비료 때문에 벌레조차 가까이하지 못하는 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풀을 먹을 적에 우리 몸이 살아날까요? 어떤 풀을 알고 사귀면서 가까이할 적에 우리 눈빛을 밝힐 수 있을까요?


  소리쟁이라는 풀이름을 아는 사람은 가만히 바라봅니다. 이러다가 한 잎을 톡 끊어서 입에 넣지요. 소리쟁이라는 풀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옆에 이 풀이 우거져도 알아채지 못할 뿐 아니라 쳐다보지 않습니다.


  사진을 찍는 우리는 무엇을 사진으로 찍는지 돌아볼 노릇입니다. 사진을 찍는 우리 눈에는 무엇이 보이는지 헤아릴 노릇입니다. 사진을 찍는 우리는 누구를 이웃이나 동무로 삼고, 어느 마을에서 어떤 삶을 가꾸는지 살필 노릇입니다. 4347.12.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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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회사에는 우리 우유를 팔지 않겠습니다 모퉁이책방 (곰곰어린이) 33
알레산드로 가티 지음, 줄리아 사그라몰라 그림, 김현주 옮김 / 책속물고기 / 201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린이책 읽는 삶 72


 

‘돈벌기’인가 ‘삶짓기’인가

― 나쁜 회사에는 우리 우유를 팔지 않겠습니다

 알레산드로 가티 글

 줄리아 사그라몰라 그림

 김현주 옮김

 책속물고기 펴냄, 2014.10.10.



  돈을 버는 일은 돈을 버는 일일 뿐입니다. ‘돈벌기’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돈벌기는 그예 돈벌기일 뿐입니다. 그런데, 돈벌기를 하는 어떤 사람은 ‘나쁘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돈을 벌기 때문에 나쁠까요? 아닙니다. 돈을 벌기 때문에 나쁘지 않고 ‘나쁘다고 할 만한 짓’을 하기 때문에 나쁩니다.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럽게 돈을 버는 사람을 두고 ‘나쁘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름답게 돈을 버는 사람이 있으면, 이 사람을 두고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사랑스럽게 돈을 버는 사람이 있으면, 이 사람을 놓고 ‘사랑스럽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누구나 아름답게 돈을 벌 노릇이요, 사랑스럽게 돈을 벌 노릇입니다. 착하게 돈을 벌 노릇이고, 사이좋게 돈을 벌 노릇입니다. 이웃을 아끼면서 돈을 벌 노릇이요, 지구별을 가꾸면서 돈을 벌 노릇입니다. 숲을 푸르게 돌보면서 돈을 벌 노릇이고, 아이들을 살뜰히 보살피면서 돈을 벌 노릇입니다.


  아름다운 삶일 때에 아름다운 사랑이 자라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아름답게 나눌 돈이 태어납니다. 사랑스러운 삶일 적에 사랑스러운 노래가 흐르고, 사랑스러운 노래로 사랑스레 나눌 돈을 얻습니다.



.. 드디어 꼬마 페그의 머릿속이 완벽하게 정리됐다. 원래부터 민트 할아버지를 찾으러 도시에 가는 게 목표였는데 바보 같은 버스들이 여름 동안 내내 운행을 안 한다고 해서 정말 실망이 컸다. 하지만 믿음직스러운 투덜이가 있으니 어쩌면 어마어마할지도 모르는 대모험을 시작할 준비가 된 것이다 … “아클레토르페 씨요? 그 사람이 누구죠” “네, 저랑 함께 도시에 가고 있어요. 지금 저기 앉아 있잖아요.” 꼬마 페그가 아클레토르페 씨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건 그냥 곰인형이잖아요!” 단추 눈 경찰이 흘끔 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  (33, 55쪽)



  ‘더 많은 돈을 남기기’가 아니라 ‘즐겁게 살기’가 꿈이고 삶이라면 무엇이든 다 잘 할 수 있으리라 느낍니다. 커다란 회사를 꾸릴 적이든, 마을에 조그마한 가게를 꾸릴 적이든, 언제나 같습니다. 더 많은 돈을 남기면 더 많은 돈은 어디에 쓸까요? 다시 더 많은 돈을 남기는 데에 쓸까요? 더 많은 돈을 더 많이 모으면, 이렇게 더 많이 모은 돈은 더욱더 많은 돈을 남기는 데에 쓰면 될까요?


  돈을 가지려 한다면, 1억이든 100억이든 1조이든 100조이든 가질 수 있습니다. 가지려 하기 때문에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100억이나 100조를 가져서 무엇을 할 만할까 생각해 보셔요. 이렇게 돈을 모으고 나서야 꿈을 키울 수 있는지, 아니면 오늘부터 내 꿈을 지어서 누리려 하는지 가만히 생각해 보셔요.


  그리고, 돈을 버는 동안에도 누릴 수 있는 꿈을 생각해 보셔요. 그저 돈만 모으거나 버는 나날이 아니라, ‘돈을 버는 일’도 언제나 ‘스스로 누리거나 즐기는 꿈’이 되도록 삶을 지어 보셔요.


  바로 오늘 이곳에서 꿈을 키워서 날마다 누리는 사람이 나중에 돈을 모은 뒤에도 꿈을 펼치거나 이룹니다. 바로 오늘 이곳에서 꿈을 키우지 않는 사람은 나중에 돈을 모으고 나서도 무엇을 해야 할는지 모르는 채 다시 돈만 더 키우거나 불리고 맙니다.



.. 고속도로 갓길에서 보는 풍경은 시원하게 쭉 뻗은 고속도로와는 달리 아주 처량했다. 도로를 따라 흐르는 도랑 옆에 무심하게 자란 기다란 풀들은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쓸쓸한 모습이었다. 진흙이 잔뜩 묻고 먼지까지 뒤집어써서 누렇게 된 데다가 주위에는 버려진 잡지, 빈병 등 갖가지 쓰레기들이 함께 나뒹굴었다 … 그랬다. 사실은 먹구름이 낀 게 아니라 이 도시 전체가 거대한 지붕에 덮여 있었던 것이다! 꼬마 페그는 자세히 보려고 창밖으로 고개를 더 내밀었다. 정확히 말하면 지붕에 덮인 건 아니었다. 도시를 덮고 있는 것은 거대한 고가도로와 철길이었다 ..  (47, 79쪽)



  알레산드로 가티 님이 글을 쓰고, 줄리아 사그라몰라 님이 그림을 넣은 《나쁜 회사에는 우리 우유를 팔지 않겠습니다》(책속물고기,2014)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나쁜 회사’가 나오고 ‘우유를 팔지 않겠다’는 말이 나옵니다. 아무래도 ‘나쁜 회사’에 ‘우유를 파는 일’이란 나쁜 짓이 될 테니 이렇게 안 할 만하다고 느낍니다.


  그러면 ‘나쁜 회사’는 왜 나쁠까요? 무엇이 나쁠까요? 어떻게 나쁠까요?


  《나쁜 회사에는 우리 우유를 팔지 않겠습니다》를 읽으면, 나쁜 회사라고 하는 곳이 무엇이 어떻게 왜 나쁜지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어떤 짓을 하기에 나쁘다고 할 만한지 하나도 밝히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우유 회사’가 저지르는 나쁜 짓은 아이들이 알기 어렵다고 여기기 때문일까요. ‘나쁜 짓’까지는 몰라도 되고, ‘나쁜 회사’에 따지러 간 할아버지를 찾아나서는 ‘모험’만 들려주는 줄거리가 아이들한테 한결 재미나다고 여기기 때문일까요.


  어린이책 《나쁜 회사에는 우리 우유를 팔지 않겠습니다》는 ‘모험 이야기’입니다. 시골마을에서 젖소를 돌보는 씩씩한 가시내가 주인공입니다. 이 아이는 어린이입니다만, 할아버지가 만든 멋진 ‘자동차(그렇지만 몹시 느리게 달리는)’를 몰고 고속도로를 가로질러 도시로 찾아갑니다.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기면서 할아버지를 찾아내어 시골마을로 돌아옵니다. ‘나쁜 회사’가 어떤 나쁜 짓을 하는지 나중에 밝힌다고도 하는데 ‘신문에 나오는 한 줄짜리 글’로 두루뭉술하게 적을 뿐입니다.


  책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이 작품은 ‘씩씩한 가시내’가 움직이는 흐름에 맞추어 모험 이야기를 잘 풀어냅니다. 다만, 이 작품을 큰 틀에서 이끄는 ‘나쁜 회사’가 어떻게 왜 얼마나 나쁜가 하는 대목은 하나도 안 보여줍니다. 이야기를 푸는 눈길을 둘로 나누어서, 다른 한쪽에는 ‘나쁜 회사다운 나쁜 모습’을 찬찬히 밝힐 수 있어야, 시골 가시내가 누리는 모험 이야기가 더욱 빛날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이 대목이 아쉽습니다. 나쁜 회사 때문에 할아버지를 찾으려고 도시로 모험을 떠나는 아이가 나오는데, 정작 어떤 대목에서 무엇을 하느라 ‘도시에 있는 우유 회사’가 나쁜지 드러내지 못한다면, 이 작품을 읽을 아이들도 책을 덮으면서 살짝 김이 샐 만하거든요.



.. “다른 길이 있어. 그런데 옷이 조금 더럽혀질 거야.” “그런 건 걱정 마. 나보고 ‘웅덩이랑 아주 친한 아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어.” … “계단까지 내가 데려다 줄게. 그런데 부탁이 있어, 나도 함께 데려가 줘. 그리고 너희 농장에 나를 숨겨 줘.” 꼬마 페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카일의 제안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  (118∼119, 124쪽)



  한국에서 적잖은 ‘우유 회사’가 나쁜 짓을 일으켰습니다. 오늘날뿐 아니라 지난날에도 적잖은 우유 회사는 나쁜 짓을 저질렀습니다. 지난날 저지른 나쁜 짓 가운데 하나를 꼽자면 ‘방사능 분유’가 있습니다. 소련에서 체르노빌 핵발전소가 터진 뒤, 핵발전소에서 흘러나온 방사능은 동유럽과 서유럽 하늘을 덮었습니다. 이 때문에 동유럽과 서유럽에서는 퍽 오랫동안 ‘유럽에서 나온 우유’를 사고팔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했습니다. 젖소가 짠 젖에서 끔찍하도록 높은 방사능 수치가 나왔거든요. 이때 유럽에서 여러 나라가 ‘방사능 우유’를 ‘방사능 분유’로 가공해서 한국에 매우 싸디싼 값으로 팔았습니다. 이러한 ‘방사능 분유’가 한국에서 아주 많이 팔렸습니다.


  돈만 생각했기에, 돈에 마음을 빼앗겼기에, 돈이 아닌 삶과 사랑과 꿈을 바라보지 않았기에, ‘나쁜 짓’이 불거집니다. 지난날에는 그런 나쁜 짓을 누가 알아채느냐 했을 테지만, 나쁜 짓은 열 해 뒤이건 스무 해 뒤이건 서른 해 뒤이건, 때로는 이백 해나 삼백 해 뒤이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아름다운 삶과 사랑과 꿈도 나중에 환하게 드러납니다. 오늘 이곳에서 드러나지 않더라도 아름다운 노래와 이야기도 열 해 뒤나 스무 해 뒤나 이백 해 뒤나 삼백 해 뒤에 고스란히 드러나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삶을 지어야지요. 어떤 삶을 지어야 할까요. 아름답고 사랑스레 삶을 지어야지요.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은 무엇일까요. 나와 네가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보금자리와 마을을 가꾸는 길이지요. 4347.12.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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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44. 말은 흐르지만 사회는 갇혀서

― ‘한국말’은 어디에서 있는가



  일본사람 사노 요코 님이 쓴 글을 윤성원 님이 한국말로 옮긴 《나의 엄마 시즈코상》(이레,2010)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106쪽에서 “남동생은 상처받은 마음을 동물을 통해 치유하려 했다. 사랑새를 애지중지하며 정성껏 돌보았다.” 같은 글월을 봅니다. 이 글월에서 ‘사랑새’라는 이름을 보고 살짝 놀랍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잉꼬(いんこ)’라는 일본말을 쓸 뿐, ‘사랑새’라는 한국말을 모르기 일쑤입니다. ‘잉꼬’라 말하면서, 이 이름이 일본말인 줄 알아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일본사람이 가리키는 이름 말고 한국말로 예부터 가리키던 이름이 있는 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한국사람이 예부터 가리키던 한국말을 배우거나 들은 사람은 어느 만큼 될까요?


  그런데, ‘사랑새’라는 이름을 잘 살려서 옮긴 책은 “우리 엄마 시즈코”가 아닌 “나의 엄마 시즈코상”입니다. 일본사람은 일본말로 ‘私の’로 적었을 테지만, 이를 한국말로 제대로 옮기자면 “내 엄마”라 하든 “우리 어머니”라 해야 올바릅니다. 왜냐하면, ‘나의’는 한국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내’와 ‘너·네’가 한국말입니다. ‘나의·너의’는 모두 잘못 쓰는 말입니다. “동물을 통(通)해 치유(治癒)하려 했다”도 한국말이 아닙니다. 겉모양은 한글이지만 알맹이는 일본 말투입니다. 한국말로 제대로 적자면 “동물로 다스리려 했다”나 “짐승을 곁에 두어 달래려 했다”로 고쳐써야 합니다. “애지중지(愛之重之)하며 정성(精誠)껏 돌보았다”는 겹말입니다. ‘애지중지’와 ‘정성껏’은 같은 뜻입니다. 무엇보다 ‘애지중지’이든 ‘정성껏’이든 한국말로 다시 옮기면 ‘살뜰히’나 ‘알뜰히’입니다. 두 가지 말을 함께 쓰고 싶다면, “사랑새를 알뜰살뜰 돌보았다”처럼 한국말로 제대로 적으면 됩니다.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어떻게 배울까요. 학교에서는 한국말을 어떻게 가르칠까요. 집에서는 어버이가 아이한테 말을 어떻게 알려주거나 물려줄까요.


  학교는 ‘배우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학교는 교과서 지식만 배우는 곳이 되기 일쑤입니다. 교과서에 나오지 않으면 배울 수 없기 일쑤입니다. 더욱이, 교과서는 대학입시에 얽매여 대학입시 지식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니, 학교를 다니면서 배운다고 한다면 ‘대학입시 지식을 배우’는 셈입니다. 삶을 배우거나 사랑을 배우거나 꿈을 배우지 않습니다. 교과서 지식을 배울 뿐이니, 한국말을 제대로 배우거나 슬기롭게 배우지 못합니다.


  얼마 앞서 전남 고흥 도화면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글쓰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 학교 2학년 푸름이가 쓴 글에 “타인을 배려하라” 같은 말마디가 있어서, 이 말마디를 칠판에 적고 다른 푸름이한테 “타인을 배려하라”가 무슨 뜻인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라”를 뜻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다시금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라”가 무슨 뜻인가 하고 물으니, 아무도 아무 말을 못합니다.


  왜 푸름이는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라”가 무슨 뜻인지 아무 말을 못할까요? 아주 마땅합니다만,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라” 같은 말은 이 말을 듣는 자리에서 곧바로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다섯 살 어린이도 알아들을 말이요, 학교 문턱을 못 밟은 사람도 모두 알 수 있는 말입니다. 이와 달리 “타인을 배려하라” 같은 말마디는 ‘한국말로 다시 풀어야’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교장선생님 훈화라든지 지식인이 쓰는 글에 ‘타인’이나 ‘배려’ 같은 말마디가 흔히 튀어나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곧바로 느끼거나 알 만한 말이 아닌 셈입니다. ‘다른 한국말’로 옮기거나 ‘한국말로 제대로’ 거듭 풀어야 하는 말인 셈입니다.


  한자말은 한자말일 뿐, 한국말이 아닙니다. 영어는 영어일 뿐, 한국말이 아닙니다. 일본말은 일본말일 뿐, 한국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한국사람은 한국말이 무엇인지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하고 배우지도 못하면서 지냅니다. 이러면서 한자말과 영어와 일본말이 뒤죽박죽 파고듭니다.


  한국사람이면서 한국말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 얼거리가 퍽 오랫동안 뿌리를 내립니다. 일제강점기가 있었고 해방을 지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거의 백 해 동안 ‘시름시름 앓는 한국말’입니다. 이리하여 이제는 ‘잘못 쓰는 낱말이나 말투’가 아주 많은 사람들 입과 손에 들러붙습니다. 틀림없이 잘못 쓰는 말이지만, ‘잘못인 줄 못 느끼’기도 하고, ‘잘못이라고 알려주는 사람이 있어도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는 매무새가 없’기도 합니다. 잘못 깃든 버릇대로 내처 달립니다. 잘못 물든 버릇을 바로잡아서 슬기롭고 똑똑하며 아름답게 거듭나려는 매무새를 찾아보기 대단히 어렵습니다.


  이오덕 님은 지난날 《우리 글 바로쓰기》 같은 책을 선보였습니다. 이 책은 ‘이대로만 써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못 쓰는 말이 이렇게 많이 있다’고 알려주는 책입니다. 그러니, 하나하나 찬찬히 짚으면서 우리 스스로 한국말을 제대로 바라보아서 제대로 깨닫고 제대로 다스릴 줄 알아야 ‘말과 넋과 삶이 함께 살아난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떤 사람은 이녁 말마디를 하나부터 열까지 하루아침에 모두 뜯어고치거나 바로잡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녁 말마디를 날마다 한 가지씩 가다듬어서 찬찬히 바로잡거나 고칩니다. 어떤 사람은 이녁 말마디를 하나도 안 고치고 하나도 안 다듬습니다.


  말은 흐릅니다. 말은 흐르니 말은 언제나 새롭게 거듭납니다. 고인 말이란 없습니다. 갇힌 말도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한국 사회는 얼마나 잘 흐르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학교와 사회와 정치와 문화는 부드럽게 잘 흐르는가요? 아름답거나 사랑스럽게 흐르는가요? 말은 사회를 고스란히 담습니다. 한국말이 한국말다움을 잃는다면, 한국 사회가 ‘한국 사회다움’을 잃기 때문입니다. 한국말이 ‘한자말과 영어와 일본말이 어지럽게 뒤섞인 채 시름시름 앓는다’면 한국 사회가 제자리를 못 찾고 이러저리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말은 어디에 있을까요? 4347.12.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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