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말도 익혀야지

 (1039) 새끼 (새끼 제비·제비 새끼)


제비집에 제비 새끼 다섯 마리 / 엄마가 먹이 찾아 / 나가 있을 때

《고은-차령이 뽀뽀》(바우솔,2011) 12쪽


 제비 새끼 다섯 마리

→ 새끼 제비 다섯 마리

→ 어린 제비 다섯 마리

→ 새끼 다섯 마리

 …



  ‘새끼’는 “낳은 지 얼마 안 되는 어린 짐승”을 가리키는데, “어떤 사람을 깎아내리며 이르는 말”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짐승을 가리키면서 쓰는 ‘새끼’이지만 잘 가려서 쓰지 않으면 “남을 깎아내리는 말”이 됩니다. 예부터 집안 어른이나 마을 어른은 아이가 말을 옳고 바르게 쓰도록 이끌면서 ‘새끼’라는 낱말도 제대로 추스르라고 일렀습니다. 이를테면,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어린이문학 가운데 하나인 ‘미운 오리 새끼’를 꼽을 만한데, 집안 어른이나 마을 어른은 ‘오리 새끼’라 말하지 않습니다. ‘새끼 오리’라 말합니다. 그러니까, ‘미운 새끼 오리’처럼 이름을 붙여서 이야기해야 옳고 바릅니다.


 미운 새끼 오리 (o)

 미운 오리 새끼 (x)


  개가 새끼를 낳으면 ‘새끼 개’라 합니다. 소가 새끼를 낳으면 ‘새끼 소’라 합니다. 염소가 새끼를 낳으면 ‘새끼 염소’라 하고, 토끼가 새끼를 낳으면 ‘새끼 토끼’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지 않고 ‘개 새끼·소 새끼·염소 새끼·토끼 새끼’처럼 말하면, 어린 짐승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라 남을 깎아내리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줄 만한 어른이 잘 안 보입니다. 여느 살림집이든 학교이든, 아이한테 한국말을 제대로 가르칠 만한 어른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글을 쓰는 일을 하는 시인이나 소설가나 동화작가나 기자도 한국말을 올바로 가누지 못합니다. “미운 오리 새끼” 같은 이름이 올바르지 않다고 따지면서 이런 이름을 바로잡으려고 하는 어른이 얼마나 있을까요.


  어린 개는 ‘강아지’라 하든 ‘새끼 개’라 해야 합니다. ‘개 새끼’라 하면 그만 남을 깎아내리는 말이 되고 말아요. ‘새끼’라는 말마디는 짐승이름 앞에 넣어야 합니다. 짐승이름 뒤에 넣으면 안 됩니다.


 새끼 토끼 (o)

 토끼 새끼 (x)


  한국말사전에서 ‘새끼’라는 낱말을 찾아보면 보기글로 “토끼 새끼”를 싣습니다. 한국말사전을 엮는 학자부터 한국말을 잘못 다룬 셈입니다. 한국말사전을 뒤적여서 한국말을 배우려는 사람은 한국말을 엉터리로 배울 수 있습니다.


  뭍짐승뿐 아니라 물고기한테도 이와 같고, 꽃이나 풀이나 나무한테도 이와 같습니다. ‘새끼 물고기’라 말해야 올바릅니다. ‘물고기 새끼’가 아닙니다. ‘새끼 나무’라 하거나 ‘어린나무’라 해야 올바릅니다. ‘나무 새끼’나 ‘나무 어린이’가 아닙니다. ‘어미나무’가 씨앗을 맺어 떨구면, 이 씨앗이 흙에 깃들어 싹이 트면서 조그맣게 나무가 자라요. 이런 나무를 가리켜 ‘어린나무’라 합니다.


  사람을 가리키는 이름을 살펴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어린이·늙은이’는 “어린 사람·늙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사람 어린·사람 늙은”처럼 쓰지 않습니다. 새끼인 개나 새끼인 토끼이기에 ‘새끼 개·새끼 토끼’입니다.


  제비가 낳은 알에서 깨어나는 새끼는 ‘새끼 제비’입니다. 동시이든 동화이든 여느 자리에서 으레 하는 말이든, 어른이라면 아이한테 한국말을 옳고 바르게 알려주어야 합니다. 여느 살림집뿐 아니라 학교와 마을과 사회에서도 ‘새끼’를 일컫는 이름을 올바르게 추슬러야 합니다. 4347.12.7.해.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제비집에 새끼 제비 다섯 마리 / 어미가 먹이 찾아 / 나갔을 때


‘엄마’는 ‘어미’로 바로잡습니다. 짐승을 사람한테 빗대어 ‘엄마 아빠’처럼 쓸 수도 있다 할 테지만, ‘엄마 아빠’는 아기말입니다. 아이가 자라면 ‘어머니 아버지’로 고쳐서 써야 올바릅니다. 짐승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는 ‘어미’라는 낱말을 씁니다. “나가 있을”은 “나갔을”로 손질합니다.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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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물감 2014-12-07 12:49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저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이 글과는 다른 이야기지만. 얼마전 인터파크에 올린 글이 금칙어에 걸려 비공개처리되었어요. 그때 무슨 단어가 금칙어인지를 알려주지않아 혼자서 이 글자 저 글자 삭제해봤어요. 새끼 라는 낱말도 삭제했지요. 그래도 금칙어가 풀리지않아서 문의를 하니 `바다이야기`가 금칙어였답니다 ㅠㅠ

파란놀 2014-12-07 12:51   좋아요 0 | URL
네, 그래요. `바다 이야기`란
바다를 널리 헤아리는 이야기일 뿐인데,
참으로 이상스러운 어른들 때문에
`들 이야기`나 `숲 이야기`와 같은 `바다 이야기`를
제대로 못 나누고 말아요...
 

맨발놀이 4 - 나는 마당을 휘젓지



  맨발돌이가 마당을 휘젓는다. 온 마당을 제 놀이터로 삼아 헉헉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달린다. 여기에서 외치고 저기에서 노래한다. 맨발로 마당을 통통 뛰는 소리가 온 집안을 울린다. 아주 사랑스럽게 한낮 햇볕을 받아먹는다. 4347.12.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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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철이의 꽝복권 낮은산 작은숲 6
김정호 지음, 김병하 그림 / 낮은산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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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어린이책



절름발이, 이웃, 사랑

― 현철이의 꽝복권

 김정호 글

 김병하 그림

 낮은산 펴냄, 2005.6.10.



  다친 이웃이 있어도, 아픈 벗이 있어도, 굶주리는 들짐승이 있어도, 집이 없이 한뎃잠을 자는 사람이 있어도 모르는 척 지나치는 삶이 되고 마는 요즈음 모습이지 싶습니다. 어쩌다 눈길을 닿기는 해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내 삶으로 맞아들이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오늘 내가 선 자리가 너무 바쁘거나 고단하거나 어렵다고 생각하면서 으레 슬그머니 지나칩니다.


  이웃을 바라보지 못하기에 내 삶도 바라보지 못합니다. 이웃이 아픈 줄 모르기에 내 삶이 어디가 어떻게 아픈 줄 모릅니다. 거꾸로 생각하자면, 내가 어떤 삶인지 모르니 내 이웃이 어떤 삶인지 모릅니다. 내 몸 어느 곳이 튼튼하거나 아픈지 제대로 알아차리지 않기에 내 이웃이나 동무가 얼마나 즐겁거나 아픈지 하나도 모릅니다.



.. 옆구리를 걷어차인 듯 개가 비명을 질렀다. 이어서 ‘끼이익!’ 하고 자동차가 급히 서는 소리와 함께 더 큰 비명이 들려왔다. 자동차는 피를 흘리며 몸부림을 치는 개를 두고 그대로 가 버렸다. 시장 사람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어머, 불쌍해라. 많이 다쳤나 봐요.” 하지만 누구도 선뜻 앞에 나서질 않았다 .. (34∼35쪽)



  도시에서고 시골에서고 찻길에서 죽는 목숨이 참 많습니다. 오늘날 사회에서는 으레 사람 목숨만 헤아리지만, 사람 아닌 짐승이 길에서 참으로 많이 죽습니다. 길고양이나 멧토끼뿐 아니라, 다람쥐와 노루와 너구리도, 소쩍새와 참새와 제비도, 뱀과 개구리와 족제비도, 수많은 숲동무가 자동차에 받혀 숨을 잃습니다. 날마다 아주 많은 숲동무가 그만 목숨을 빼앗깁니다. 교통사고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지만, 그나마 보금자리를 빼앗겨 고단한 숲동무는 온갖 고속도로와 고속화도로에서 싱싱 달리는 자동차 때문에 제대로 하루를 누리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자동차는 저희가 받은 짐승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백 킬로미터 넘게 달리면서 들이받은 짐승이니, 자동차를 멈출 수도 없을 테고 멈출 까닭도 없을 테지요. 뒤따르는 다른 자동차는 길죽음으로 이 땅을 떠난 숲동무 주검을 다시 밟습니다. 밟고 밟힌 주검은 어느새 오징어떡처럼 납작하게 바뀝니다.



.. “이건 내가 만든 게 아니고 어떤 여자 손님이 신고 왔던 거라오. 어느 병원에서 맞춘 거라는데, 교통사고로 발을 다친 사람이었지요. 이 신발을 처음 신을 때, 그 손님이 모양이 너무 안 예쁘다고 했더니 의사가 그러더래요. 그런 발에 뭘 예쁜 구두까지 찾느냐고…….” ..  (29쪽)



  시골에는 건널목이 없습니다. 시골을 들락거리는 자동차가 적으니 건널목을 놓기도 멋쩍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도시에는 어디에나 건널목이 있습니다. 자동차가 워낙 많기 때문에 도시사람은 건널목이 없으면 찻길을 가로지르지 못합니다. 그나마 건널목이 있더라도 신호를 기다리자면 한참 추위에 떨거나 더위에 땀흘리면서 기다립니다. 애써 기다렸어도 자동차는 푸른불에 곧바로 안 멈춥니다. 사람은 푸른불이 되어도 자동차가 멈추어야 비로소 길을 건넙니다.


  한국 도시에 있는 건널목 푸른불 신호는 매우 짧습니다. 바퀴걸상을 굴린다든지 아기수레를 민다면, 푸른불 신호가 깜빡이다가 넘어갈 때까지 못 건널 수 있습니다. 더구나 어린이는 건널목을 다 건너기에 빠듯합니다.


  교통정책을 세우거나 교통신호를 다스리는 사람한테는 아이가 없을까요? 아프거나 늙은 어버이가 없을까요? 고단하거나 힘든 이웃이나 동무가 없을까요? 왜 건널목 푸른불 신호는 그처럼 짧을까요? 왜 건널목 푸른불 신호가 들어오기까지 사람들은 길에서 한참 기다려야 할까요?



.. 얼마나 잤을까? 눈을 뜨는 순간 창문으로 눈부신 햇살이 들어왔다. 자기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싫어서 현철이는 일부러 눈을 피했다. 신기하게도, 아무리 전철 안이 비좁더라도 사람들은 현철이 옆 자리에는 앉지 않았다 ..  (68쪽)



  김정호 님이 글을 쓰고 김병하 님이 그림을 넣은 《현철이의 꽝복권》(낮은산,2005)을 읽습니다. 이 동화책에 나오는 현철이는 한쪽 다리를 잘 쓰지 못하는 아이입니다. 어머니는 없이 아버지하고 둘이 사는데, 아버지는 어느 날 집을 나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집에서 라면으로 가까스로 끼니를 때우던 현철이는 아버지를 찾아나섰다가 그만 한뎃잠이처럼 전철에서 배를 쪼르르 굶으며 지내고 맙니다. 입성도 좀 허름하지만 한쪽 다리를 성하게 쓰지 못하는 현철이를 보는 둘레 사람들은 아픈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은 없고, ‘지저분한 거지 옆에 있다가 병이 옮지 말자’라든지 ‘괜히 옆에 있다가 엉뚱한 일에 휘말리지 말자’는 마음입니다.


  그러나저러나 현철이는 돈도 없이 집에서 나온 터라 쫄쫄 굶으며 전철에 있을 수만 없습니다. 하는 수 없이 전철에서 내려 아무 편의점에나 들어가 컵라면 하나를 사서 먹는데, 편의점 일꾼이 현철이한테 아주 쌀쌀맞게 굽니다. 옷이 지저분하고 다리를 저는 아이가 들어와서 라면을 편의점에서 먹고 가겠다고 하니 그랬을 테지요? 옷을 번듯하게 갖춰 입은 사람이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고 가겠노라 할 적에도 쌀쌀맞게 굴지 않을 테지요?



.. 할아버지, 무더운 날씨에 안녕하세요. 할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구두를 만들어 주셨어요. 이제는 발도 아프지 않고 친구들과 같이 어울려 놀 수도 있어 참 좋아요. 그 중에서도 가장 좋은 게 뭔지 아세요? 가장 좋은 건 비 오는 날, 우산을 쓸 수 있다는 거예요. 목발로 걸을 때는 비를 쫄딱 맞았거든요 ..  (58쪽)



  현철이는 오백 원짜리 두 닢으로 어렵사리 산 라면조차 제대로 못 먹고 편의점에서 쫓겨납니다. 이제는 골목을 떠도는 외로운 아이가 됩니다.


  현철이는 신문을 훔치다가 붙잡혀서 끔찍한 일을 치릅니다. 그런데 왜 신문을 훔쳤는지는 책에 안 나옵니다. 현철이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도둑이나 떠돌이가 된 흐름이나 까닭을 너무 싹둑 잘라서 보여줍니다. 아무튼, 현철이는 신문을 훔치다가 모진 일을 겪는데, 이때에 구둣방 할아버지가 아저씨를 말리며 현철이를 가까스로 풀어 놓아 줍니다.


  현철이를 도와준 구둣방 할아버지는 장애인이 신는 구두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처음부터 장애인 신을 만들지는 않았으나, 이 할아버지는 어느 날 사고로 한쪽 팔을 못 쓴 뒤 무엇을 깨달아서 이녁처럼 몸이 성하지 않은 사람한테 빛이 될 만한 신발을 만들자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 할아버지가 만든 신발을 받은 사람들은 ‘걷는 즐거움’을 되찾는다고 합니다.


  마음 착한 할아버지는 현철이한테 “같이 지내자”고 말합니다. 현철이는 집에 가도 다른 수가 없으니 그러기로 합니다. 할아버지는 교통사고 때문에 한쪽 다리를 저는 개 한 마리도 따뜻하게 보살피며 한식구로 지냅니다. 그런데 이 개는 예전에 현철이네가 기르던 개라고 합니다. 한동안 집을 나갔던 현철이네 아버지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 뒤, 집에 아이가 없는 줄 보고는 아이를 찾으러 다니다가 예전에 기르던 개가 구둣방 할아버지와 함께 다니는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라고, 이 구둣방에 저희 아이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는 더 크게 놀라 아무 말도 못하다가 할아버지한테 편지 한 장을 남깁니다. 나중에 꼭 돈을 벌어서 아이를 되찾으러 오겠다고 하면서 아주 떠납니다.


  구둣방 할아버지는 혀를 차며 편지를 읽다가, 현철이한테 이 편지를 보여줍니다. 현철이는 편지를 다 읽고 울먹이다가 나지막히 혼잣말을 합니다.



.. “아빠! 내가 아빠의 새 복권이 되어 줄게요. 절대로 꽝이 없는 복권요.” 그러고는 손나팔을 만들어 입에 대고 크게 외쳤다. “아빠! 배짱 있게 살자…….” ..  (102쪽)



  돈을 많이 벌어야 삶을 즐겁게 누리지 않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 커다란 집에 깃들어야 식구들이 즐겁지 않습니다. 오늘 이곳에서 즐겁게 웃고 노래해야 즐겁습니다. 함께 웃고 노래하는 삶을 누리면서 돈을 즐겁게 벌 때에 비로소 환한 사랑이 피어납니다. 아이는 아버지와 어머니한테서 두루 사랑을 받고 싶은데, 아버지나 어머니가 돈만 벌겠다면서 집에서 나오면 아이는 어떻게 지내야 할까요. 아이가 잃은 나날은 누가 무엇으로 찾아 줄까요.


  동화책 《현철이의 꽝복권》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이 동화책은 ‘현철이’ 이야기를 다룹니다. 그런데 정작 ‘현철이’ 이야기는 얼마 없습니다. 학교에서 현철이가 부대끼는 일은 고작 ‘꽝이 나온 복권’을 뒤지는 이야기 한 토막뿐입니다. 이야기 흐름으로 본다면, 도시락 한번 제대로 싸지 못했을 아이고, 급식비조차 못 냈을 아이인데 밥은 어떻게 먹는지, 동무들은 이 아이를 어떻게 마주하는지(살가이 지내면서 돕는지, 괴롭히는지 따위), 학교 교사는 어떻게 바라보고, 이웃집 사람들은 어떻게 마주하는지 따위가 하나도 없습니다. 고작 현철이가 집을 나왔을 때 편의점 여자 점원이라고 하는 사람이 “아유, 저 병신!” 하고 매몰차게 구는 대목 빼고는 현철이가 이 사회와 어떻게 부딪히는지 다루지 않습니다. 이러면서, 구둣방 할아버지 이야기가 《현철이의 꽝복권》에서 절반을 넘게 차지합니다. 아니 거의 모두 구둣방 할아버지라고 해야 옳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차라리 ‘구둣방 할아버지와 현철이’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


  《현철이의 꽝복권》은 이야기 얼거리를 ‘장애인이 신는 짝짝이 구두’에 맞춥니니다. ‘꽝복권’ 이야기는 아주 조그맣게 한두 번 나오기는 하지만, 이야기 줄거리나 얼거리와 제대로 맞닿거나 이어지지 못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아픈 구석을 건드리는 작품이라 할 테고, 우리 사회에서 아픈 이웃을 드러내는 작품이라 할 테며, 우리 사회가 짓밟거나 따돌리는 대목을 살피는 작품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어린이와 청소년한테 들려주는 이야기로서 짜임새가 좀 엉성합니다. ‘현실 보여주기’는 좋으나 ‘현실 보여주기’를 넘어서는 ‘문학다운 이야기’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이 이야기에 나오는 현철이는 ‘꿈’을 꾼 적이 없을는지 모르고 ‘사랑’을 받은 적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 끝자락까지 현철이가 제 나름대로 꿈을 키우거나 사랑을 북돋우는 모습을 미처 못 그렸을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아쉽습니다. 아이가 아이인 까닭은 꿈과 사랑이 가슴에 있기 때문이니까요. 꿈과 사랑을 키우고 살려서 이 땅에서 씩씩하게 살고 ‘배짱’을 노래할 수 있는 아이일 테니까요.


  아무쪼록, 글을 쓴 김정호 님이 다음에 내놓을 작품에서는 이 책에 드러나는 여러 아쉬움을 슬기롭게 풀어내고 알뜰히 채우고 보듬어서, 이 땅 아이와 어른 모두한테 즐겁고 뿌듯하게 마음 깊숙하게 다가서는 이야기 하나를 베풀기를 바랍니다. 4338.7.7.나무/4347.12.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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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닷 Photo닷 2014.12 - Vol.13
포토닷(월간지) 편집부 엮음 / 포토닷(월간지) / 2014년 11월
평점 :
품절






찾아 읽는 사진책 197



내가 지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진

― 사진잡지 《포토닷》 13호

 포토닷 펴냄, 2014.12.1.



  사진을 찍다 보면 누군가 찍은 사진하고 내 사진이 비슷하거나 똑같을 수 있을까요? 어느 멋지거나 아름답거나 놀랍구나 싶은 곳에 찾아가서 사진을 찍는다면, 이 멋지거나 아름답거나 놀랍구나 싶은 곳에 나 아닌 다른 사람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이때에는 서로 엇비슷하구나 싶은 사진을 찍을는지 모릅니다. 일부러 엇비슷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고, 어쩌다 보니 엇비슷한 사진이 나올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찍은 멋지거나 아름답거나 놀랍구나 싶은 사진에서 몇 가지만 바꾸거나 손질해서 ‘다른 사진’이라고 내세울 수도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달력 사진’이라는 말이 나돕니다. 달력에 나옴직한 사진을 가리키는 낱말입니다. 달력에 넣어 한두 달 동안 쳐다보는 사진이라면 ‘여느 사진’은 아니라 할 만합니다. 생각해 보셔요. 한 달이나 두 달 내내 똑같은 사진만 바라보아야 한다면 아무 사진이나 넣을 수 없습니다. 잘 찍은 사진이든 아름답다 싶은 사진이든 놀랍다 싶은 사진을 넣어야 할 테지요.


  그런데 ‘달력 사진’이라고 하면 몇 가지 틀에 얽매입니다. 사진을 찍은 사람 손길이나 숨결이나 마음이 드러나는 사진보다는, 달과 철에 따라 숲이나 시골이나 바다를 보여주는 사진이기 일쑤입니다. 보드랍게(자연스럽게) 흐르는 사진이 아니라 어떤 틀을 억지로 짜서 맞추는 사진이기 마련입니다. 우스갯소리처럼 ‘달력 사진 찍느냐?’ 하고 말하기도 합니다. 내가 찍은 사진이 달력에 넣을 만하다면 여러모로 값있다 할 수 있으나, ‘달력에 넣을 만한 틀에 사로잡힌 사진’이라고 한다면 내 손길도 내 눈길도 내 마음도 제대로 담지 못한 사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진잡지 《포토닷》 13호를 읽습니다. 저마다 다른 삶을 누리면서 저마다 다른 눈길로 사진을 찍는 여러 사람 이야기를 읽습니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서 사진은 거울 속에 있는 나를 바라보는 것보다 자기 내면의, 내 안으로의 잠수를 의미해요. 조금 더 깊이 잠수할수록 더 깊은 골짜기의 감정을 데려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26쪽/김정아).” 같은 이야기는 무엇을 말할까요. 나는 내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나는 내 사진을 가장 잘 찍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브레송을 흉내낸다면 ‘브레송을 흉내낸 사진’이 됩니다. 살가도를 흉내낸다면 ‘살가도를 흉내낸 사진’이 됩니다. 쿠델카를 흉내낸다면 ‘쿠델카를 흉내낸 사진’이 되어요. “이방인이 찍은 이방인, 아저씨(오형근)가 찍은 아줌마와 소녀와 군인은 우리 주위에 늘 있었으나 잘 보이지 않았던 사람이었는데, 오형근에 의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주체가 되었다(50쪽/최연하).” 같은 이야기는 무엇을 말할까요. 이방인이란 누구일까요. 한국말사전 풀이를 살피면 ‘이방인 = 외국사람’입니다. 오형근이라는 분이 찍은 ‘이방인’이라면, 너와 내가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뜻이지 싶습니다.


  누가 누구를 찍든 너와 나는 다릅니다. 어버이와 아이도 다릅니다. 이웃과 동무 사이도 다릅니다. 두 사람이 아무리 한마음이라 하더라도 둘은 다른 목숨입니다. 다른 목숨은 서로 다른 눈길로 삶을 바라봅니다. 서로 다른 몸짓으로 삶길을 걷습니다. 어떤 사진가가 누군가를 찍었기에 ‘더 이방인스러운 사진’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누가 누구를 찍더라도 ‘다 다른 사람 숨결과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밤에 하늘을 보면 까맣습니다. 밤에 둘레를 바라보면 새까맣습니다. “처음에는 컬러로 촬영했는데,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진이 전체적으로 어두컴컴했고 그나마 살아 있는 색상은 모두 파란색뿐이었다. 그래서 흑백으로 찍어 보고 싶었다. 흑백으로 바꾸고 나니 콘트라스트를 내 마음대로 바꾸는 것이 가능해졌고, 사람들이 헤엄치고 지나간 자리가 초현실적으로 보였다(71∼72쪽/웨인 레빈).” 같은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밤에 둘레를 살피며 조용하거나 한갓진 길을 걷는다면 ‘까망과 하양으로 어우러진 누리’를 마주합니다. 밤하늘 별빛은 까망과 하양으로 빚은 아름다운 빛물결입니다.






  어느 곳을 바라보든 내가 바라봅니다. 어떤 사람을 바라보든 내가 바라봅니다. 나는 내가 바라본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습니다. 나는 내가 마주한 삶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버마 정부는 이를 묵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잔혹한 학살을 돕고 있다. 버마 정부는 로힝야 족이 거주하는 지역에 저널리스트는 물론 외국인의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한다. 이들의 눈을 피해 촬영을 계속해 왔다. 그러다 몇 번 체포되기도 했는데 그러면 버마에서 추방당한다. 다행히 버마 경찰 안에도 온건파가 있어 무사히 풀려나기도 하지만(81쪽/수텝 크립사나바린).” 같은 이야기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버마 정권’을 바라보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누군가는 ‘미얀마 정권’을 바라보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어느 한쪽에 서야 올바른 모습을 본다고 할 수 없습니다. ‘버마’를 그리면서 사진을 찍을 수 있고, 독재이든 아니든 ‘미얀마’라는 새 이름이 붙은 나라에 녹아들며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정치권력은 다르지만 같은 하늘을 등에 지고 사는 사람은 언제나 그곳에서 수수하게 삶을 잇습니다.




  “일곱 살짜리 아들이 묻는다. 바닷가에서 잡아온 집게는 죽어서 어디로 갔느냐고. 아들의 생애 최초의 형이상학적 질문에 변기에 버렸다고 답한다(97쪽/강홍구).” 같은 이야기를 읽다가 우리 집 아이를 떠올립니다. 아이는 어버이한테 ‘형이상학적 질문’을 했을까요? 이는 오로지 어버이 눈길이자 생각입니다. 아이는 그저 궁금해서 물을 뿐입니다. 어버이는 아이가 궁금해서 물은 말에 제대로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아이가 궁금한 대목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는 그저 ‘궁금할’ 뿐이지만, 어버이는 ‘달리 보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나, 사진을 찍는 눈길로 보자면, 사진은 늘 바라보는(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른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이와 어버이는 서로 다릅니다. 그러니, 아이와 어버이는 똑같은 일을 겪어도 서로 다르게 움직이고 생각합니다. 강홍구라는 분은 강홍구 님 눈길대로 생각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 생각이 고스란히 강홍구 님 사진이 될 테지요.


  “늪에는 생명 탄생의 비밀이 숨어 있어요. 생명체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고, 자연과 동화될 수 있는 터미널 같은 곳이죠. 황폐해진 도시를 벗어나 회색빛에서 녹색빛으로 장면전환을 하듯 죽음과 삶, 전쟁과 평화처럼 서로 상치되는 접경지대 같은 탈출구가 늪인 것 같습니다(106쪽/조성제).” 같은 이야기를 읽으면, 늪을 바라보는 조성제 님 눈길을 엿볼 수 있습니다. 조성제 님은 조성제 님 삶에 따라 늪을 바라보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다른 사람 눈길이 아닌 바로 조성제 님 눈길입니다.





  이제 4대강사업은 엄청난 막개발이요 돈날림 막삽질인 줄 환하게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런 4대강사업을 밀어붙이던 지난날 이 4대강사업에 빌붙어 돈을 벌거나 이름을 얻은 이들이 무척 많습니다. 차윤정 같은 이들은 4대강사업에 한몸을 실으면서 냇물과 숲과 마을이 무너지는 일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들은 지난날 ‘막삽질을 꼭 해야 냇물과 숲과 마을이 산다’는 말을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똑같은 일을 놓고 누구는 왜 이렇게 보고 누구는 왜 저렇게 볼까요? 앞으로 어떻게 되리라 하고 뻔히 알 수 있는 일이라는데, 왜 누구는 앞일을 내다보지 않거나 잘못 내다볼까요?


  삶이 다르기에 눈길이 다릅니다. 삶이 다르기에 ‘삶을 읽고 찍으며 헤아리는 마음’이 다릅니다.


  아주 마땅한 이야기인데, “뻘이 있는 어촌으로 사진 여행을 떠나려면 일출, 일몰 시간과 함께 썰물과 밀물 시간도 미리 알아두어야 합(128쪽/황성찬)”니다. 그리고 더 많은 이야기를 미리 알아야 합니다. 바닷마을로 사진을 찍으려고 나들이를 간다면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무엇을 모르면 사진을 잘 못 찍을까요?




  스스로 생각해서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 생각해서 알아낸 만큼 스스로 사진을 더 즐겁게 찍거나 더 엉성하게 찍습니다. 일본말을 모르는 채 일본에 가서 사진을 찍는 사람과 일본말을 잘 익힌 채 일본에 가서 사진을 찍는 사람은 얼마나 다를까요? 중남미에서 쓰는 말을 모르는 채 중남미에 가는 사람과 중남미에서 쓰는 말을 익힌 채 중남미에 가서 사진을 찍는 사람은 얼마나 다를까요? 시골에 가서 사진을 찍으려 하면서 시골이 어떠한 곳인지 하나도 안 알아본 사람과 찬찬히 알아본 사람은 저마다 어떻게 다른 사진을 찍을까요?


  “누가 찍어도 사진일 때에는 사진입니다. 누가 찍어도 사진이 아닐 때에는 사진이 아닙니다. 이름난 전시장에 작품을 걸거나 작품집을 책으로 묶어야 ‘작가’나 ‘프로’가 아닙니다. 삶을 노래하는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고, 삶을 가꾸면서 이야기를 꽃으로 피울 때에 작가입니다(137쪽/최종규).” 같은 이야기를 되새깁니다. 사진은 그저 사진입니다. 삶은 그저 삶입니다. 사랑은 그저 사랑입니다. 더 나은 사진이나 삶이나 사랑은 없습니다. 덜떨어지는 사진이나 삶이나 사랑은 없습니다.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이 일구는 삶만큼 사진이 태어납니다. 나 스스로 어떤 사랑으로 삶을 일구느냐에 따라 내 사진이 달라집니다. 어떤 사랑으로 하루를 짓는가요? 어떤 사랑을 담아 삶을 지어서 사진을 이루려는 생각입니까? 4347.12.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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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넷



  우리 집 부엌에는 가스불이 셋 있다. 밥을 끓이고 국을 끓이며 반찬을 익히면 불 셋을 다 쓴다. 오늘은 모처럼 고기를 굽기로 하면서 불을 넷 쓴다. 따로 불판을 꺼내어 부엌에서 불 넷을 쓴다. 두 아이가 꽤 자랐구나. 두 아이를 먹이고 두 어른이 먹을 밥을 지으면서 불을 여럿 써야 하는구나. 재미있다. 재미있구나.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 혼자 불을 다룰 수 있을 즈음에는 네 식구가 먹는 밥을 어떻게 지을까. 궁금하면서 웃음이 난다. 4347.12.6.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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