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와 책읽기



  모든 먹을거리가 모든 사람한테 똑같이 맞을 수 없다. 눈으로 보기에 내키지 않아서 안 먹는다기보다, 몸에서 안 받아들이기에 안 먹는 것이 있다. 밀가루가 안 받는 사람이 있고, 달걀이 안 받는 사람이 있으며, 쌀이 안 받는 사람이 있고, 소젖이 안 받는 사람이 있으며, 절이거나 삭인 것이 안 받는 사람이 있다. 일본 한자말인 ‘국민’을 빌어 ‘국민 음식’이라고 내세울 먹을거리는 처음부터 없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다 다른데, 어느 먹을거리가 몸에 안 받는 사람이 있으면, 이녁은 ‘한국사람이 아니다’ 하고 말할 수 있을까?


  한국사람 가운데에도 쌀밥이 몸에 안 받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한국사람 가운데 김치가 몸에 안 받는 사람이 꽤 있다. 오늘날처럼 ‘빨간 김치’ 모양으로 사람들이 김치를 먹은 햇수는 기껏 백 해쯤 된다. 더 찬찬히 살피면 백 해조차 안 된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한쪽으로 쏠리거나 미치면서 ‘빨간 김치’가 마치 ‘한겨레 옛 먹을거리’라도 되는 양 떠들지만, 터무니없는 소리이다.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이 시골을 떠나 도시에서 살기에 이런 바보스러운 말을 함부로 하는데, 시골에서 사람들이 북적북적 모여서 지낼 적에는 ‘고추밭’을 넓게 두기 어려웠다. 한국에서 고추밭이 넓어진 지도 얼마 안 되었다. 한겨레가 두루 고추를 쓴 햇수부터 참으로 짧다.


  지난날 시골에는 아이도 많고 소나 돼지나 염소도 치기 마련인데, 사람이 먹을 곡식과 풀과 열매뿐 아니라 짐승이 먹을 곡식과 풀과 열매도 드물다. 이런 지난날 시골에서 ‘고추’를 얼마나 심었을까? ‘사람 많’고 ‘지을 땅은 좁’은데 고추를 얼마나 심어서 ‘빨간 김치’를 먹으려 했을까?


  배추가 중국에서 들어온 햇수도 참으로 짧다. 배추에 앞서 유채가 먼저 들어왔고. 유채에 앞서 갓이 차츰 퍼지듯이 들어왔다. 어쩌면 갓은 저절로 자랐을 수 있고, 중국을 떠난 배를 거쳐서 남녘(전라남도·경상남도)에 있는 섬으로 퍼져서 자랐을 수 있다.


  김치를 담갔다 하더라도 모든 옛사람이 김치를 먹었을까?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지난날에도 김치를 못 먹는 사람은 틀림없이 있다. 먹을 수 있는 사람은 먹되, 못 먹는 사람은 못 먹는다. 어떤 사람은 풀밥만 먹고 살았을 테고, 어떤 사람은 무밥만 먹고 살았을 테지. 나중에 감자와 고구마를 받아들이기도 했으니, 어떤 사람은 감자밥이나 고구마밥만 먹고 살았을 수 있다. 콩밥은 참으로 오랫동안 먹었을 테고.


  아이한테 김치를 먹이고 싶다면, 이는 오직 ‘어버이 생각’이다. 아이가 김치를 받아들일 수 있고, 못 받아들일 수 있다. 아이가 받아들인다면 먹여도 되고, 아이가 못 받아들인다면 억지로 먹이지 말아야 한다. 어른으로서 이녁 몸을 생각해 보라. 어른인 이녁이 ‘못 먹는 밥’이 있을 적에 누군가 옆에서 억지로 숟가락으로 떠먹인다면 어떠한가? 어른은 이녁은 ‘못 먹는 밥’이 하나도 없더라도, 이녁이 낳은 아이는 이녁과 다르다.


  몸에서 안 받아들이는 김치를 어버이가 억지로 먹이면 어떻게 될까? 아이는 배앓이를 하면서 억지로 삼킨다. 먹지 않고 ‘삼킨’다. 나는 내가 떠올리지 못하는 아주 어릴 적부터 중·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김치를 억지로 ‘삼키’면서 살았다. 국민학생 적에는 뛰놀면서 괴로움을 잊었지만, 중·고등학생 적에는 입시지옥에 시달리면서 그야말로 죽는 줄 알았다. 아이가 받는 짜증과 괴로움을 어떻게 하려고, 어버이는 아이한테 ‘김치 먹이기 억지’를 부리려 할까?


  아이한테 김치를 억지로 먹이려 하면서 ‘한국 전통 음식’이라는 따위를 들먹거리는 짓은 더 나쁘다. 전통 음식이면 다 먹어야 하나? 아니다. 먹을 수 있는 밥을 먹어야지 ‘전통 음식’이거나 ‘한국 음식’이기 때문에 먹어야 하지 않다. 추천도서나 명작도서이기에 다 읽히나? 아니다. 읽을 만하거나 읽힐 만한 책을 읽거나 읽힐 뿐이다.


  한국은 ‘김치’를 외칠 까닭도 없고, ‘김치’를 자랑할 구석도 없다. 발자국이 짧기에 자랑할 구석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밥은, 삶을 즐겁게 누리려고 먹을 뿐이지, 무엇을 대표하거나 바깥으로 뽐내거나 문화나 전통이나 역사를 만들려고 먹지 않는다. 게다가 ‘한국 전통 음식’이라는 이름은 얼마나 우악스러운가. ‘한국 전통 음식’이 몸에 안 받는 사람을 조금이라도 생각한 적이 있는가? 서울 한복판부터 전남 고흥 시골마을까지 다 다른 사람이 사는데, 다 다른 사람이 ‘모두 똑같은 밥’을 먹어야 할 까닭이 없다. 4347.12.17.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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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자는 두 사람, 함께 사는 두 사람 3
히구라시 키노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433



서로 아끼면서 사는 길

― 먹고 자는 두 사람 함께 사는 두 사람 3

 히구라시 키노코 글·그림

 최미정 옮김

 대원씨아이 펴냄,2014.11.30.



  서로 아낄 적에 언제나 느긋하고 너그럽습니다. 서로 아끼는 동무나 이웃하고 잠자리에 들면 아주 포근하게 꿈나라로 갑니다. 이와 달리, 서로 툭탁거리거나 해코지를 하거나 괴롭히거나 들볶는 사람과 잠자리에 들면 몹시 거북할 뿐 아니라, 잠자리에서마저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리라 봅니다.


  평화롭게 삶을 가꾸면 늘 평화롭습니다. 평화로울 적에는 잠자리에 총이나 칼이나 몽둥이를 놓아야 하지 않습니다. 보안장치를 할 까닭도 없고, 불침번을 세울 일도 없습니다. 이와 달리, 안 평화로운 삶이 되면, 잠자리에 총이나 칼이나 몽둥이를 놓아도 두렵습니다. 잠을 제대로 들지 못합니다. 보안장치를 해도 걱정이요, 불침번을 세워도 잠을 못 이룹니다.




- ‘집에서 빈둥빈둥 술 마시는 슈이치는, 일요일의 아버지 같은 느낌이다 … 그런데, 옛날의 나는 어땠지? 옛날에 우리는?’ (11, 14쪽)

- “뭐 어때. 가끔은 택시도 타는 거지.” (21쪽)

- ‘아무 날도 아닌데 술 마시러 가거나, 가까운 거리를 택시로 가거나, 이런 건 분명히 쓸데없는 일이 아니야.’ (22쪽)



  지구별 어느 나라에서도 똑같은데, 군대는 평화를 지키지 않습니다. 군대는 언제나 평화를 무너뜨립니다. 군대는 언제나 평화를 짓밟거나 깔아뭉갭니다. 군대가 있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두 발 뻗고 잠들지 못합니다. 군대가 있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잔뜩 뿔난 모습이기 마련이요, 작은 일에도 툭탁거리면서 ‘이웃사랑’이 아닌 ‘다툼(경쟁)’만 불꽃이 튑니다.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평화가 무엇이고 전쟁은 어떠한지를 놓고 찬찬히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평화를 찾는 길과 전쟁을 몰아낼 길을 곰곰이 생각해서 이를 우리 삶으로 녹일 수 있어야 합니다.


  평화는 입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평화는 전쟁무기로 부르지 않습니다. 평화는 이론이나 지식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평화는 오직 평화로 부릅니다. 나 스스로 평화로운 마음이 되어 평화로운 넋으로 평화로운 생각을 빛낼 때에, 비로소 평화로운 삶입니다.


  전쟁이 왜 자꾸 터질까요? 전쟁무기를 만드니까 전쟁이 터집니다. 교통사고가 왜 생길까요? 자동차를 늘리기만 하고, 찻길을 넓히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자동차를 줄이고 찻길도 줄이면서, 사람들이 어디에서나 느긋하게 걸어다니거나 자전거를 즐길 수 있도록 하면 교통사고는 저절로 사라집니다.






- ‘‘지금부터’ 새롭게 시작될 우리 두 사람의 시간을 즐기자.’ (43쪽)

- ‘패셔니스타에 쇼핑을 좋아하는 리츠코도 사랑하니까, 오히려 내가 등 떠밀 때도 있잖아. 그런 면이 어쩌면 내가 ‘반했던 부분’일지 모르는데.’ (77쪽)

- ‘돈 쓰는 방법은 서로 다를지 몰라도, 가치관은 비슷하다. 그래서 분명히 10년을 사귈 수 있었나 보다.’( 72∼73쪽)



  히구라시 키노코 님이 빚은 만화책 《먹고 자는 두 사람 함께 사는 두 사람》(대원씨아이,2014) 셋째 권을 재미있게 읽습니다. 첫째 권이나 둘째 권과는 사뭇 다르게 재미있고, 첫째 권과 둘째 권에 이어 생각을 찬찬히 곰삭이는구나 싶어 새삼스레 재미있습니다.


  만화책에 붙은 이름을 보면, 처음에 ‘먹고 자는’ 두 사람이라 하지만, 뒤에는 ‘함께 사는’이라 합니다. 겉보기로는 ‘먹고 자는’ 두 사람이되, 속으로 살피면 ‘함께 사는’ 두 사람이에요.


  잘 헤아려 보셔요. 오늘날 학교를 보면, 급식실에서 단체급식을 합니다.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똑같은 밥을 먹’습니다.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똑같은 밥’에 ‘똑같은 교과서’에 ‘똑같은 수업’을 받을 뿐 아니라 ‘똑같은 성적’을 받도록 들볶여요. 다 다른 아이들이 함께 배우거나 함께 사랑하거나 함께 꿈을 키우는 이야기나 숨결은 하나도 없습니다.





-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너무 달라붙지도 떨어지지도 않으며 만나 온 니나를, 겨우 2∼3개월 만난 남자가 전부 빼앗아 가는 것 같아. 그리고 니나도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모른다.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섭섭하거나 추월당해 분한 기분은 아니다. 그저 나만이 느끼는 미묘한 감정.’ (104쪽)

- “어린애 같은 소리 그만하고, 미나 기분도 생각해 봐요.” “뭐?” “그 아이, 갈아입을 드레스 한참 고르더니, 결국 마지막엔, ‘아빠가 이 드레스 좋아하니까 이걸로 할게요!’ 그 아이는 당신이 기뻐하길 바라고 있어요.” (159쪽)



  만화책에 나오는 두 사람은 ‘집안 꾸미기’나 ‘밥 차려서 먹기’나 ‘옷 갖춰 입기’ 같은 데에는 그리 마음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어우르면서 누릴 삶’을 어떻게 사랑스럽게 다스리는가 하는 대목에 마음을 기울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기쁨을 노래할 뜻입니다. ‘함께 사’는 즐거움을 웃음꽃으로 피울 뜻입니다.




- ‘그렇구나. 합리적이든 짜여진 식순대로든, 피로연은 결혼하는 당사자만이 아니라, 그들과 연결된 모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구나.’ (165쪽)



  어버이는 아이한테 사랑을 보여주거나 가르치면 됩니다.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지켜보고 배우면 됩니다. 가시내와 사내는 서로서로 사랑을 보여주면서 나누면 됩니다. 힘이 닿는 사람이 집일을 맡고, 힘이 모자라는 사람은 쉬면 됩니다. 서로 아끼고 보살피면서, 지친 곁님을 어루만질 수 있으면 됩니다. ‘가시내 = 집일’이 아니고, ‘사내 = 바깥일’이 아닙니다. 예부터 한겨레가 ‘가시버시’라는 낱말을 쓴 까닭을 읽어야 합니다. ‘바깥양반’이나 ‘안사람’ 같은 ‘일본말을 어설피 옮겨서 쓰는 낱말’은 하루 빨리 몰아내면서, 삶이 제자리를 찾도록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집과 마을을 함께 보살피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서로 살림꾼이요 삶지기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둥이요 노래꾼입니다. 우리는 서로 이웃이면서 동무입니다.


  함께 사는 사람은 서로 아낄 줄 아는 넋입니다. 함께 사는 사람은 서로 믿고 기대면서 따숩게 손길을 내미는 사람입니다. 만화책 《먹고 자는 두 사람 함께 사는 두 사람》 넷째 권이 언제 한국말로 나올까 손가락을 꼽으면서 기다립니다. 4347.12.16.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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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안 먹기’와 책읽기



  사람이 밥을 안 먹고 살아도 되면, 밥 때문에 해야 하는 일이 모두 사라진다. 사람이 밥을 안 먹고 살아도 되면, 집에는 부엌을 들이지 않기 마련이다. 이때 시골에서는 힘들게 논밭을 일굴 까닭이 없다. 이때 도시에서는 고단하게 회사를 다닐 까닭이 없다. 밥을 안 먹어도 되는데, 왜 논밭을 일구고, 왜 회사에 가서 돈을 벌어야 하겠는가?


  밥을 안 먹어도 되는 삶이라면, 아이들을 학교에 넣거나 학원에 보낼 까닭도 없다. 왜 그러하겠는가? 밥 때문에 마음이나 생각이나 머리를 쓸 일이 없으니, ‘먹고살(생계)’ 걱정이 아무한테도 없다. 이러한 삶이 되면, 어버이는 아이한테 ‘먹고살려고 흙을 일구는 일’이나 ‘먹고살려고 돈을 버는 일’을 가르치지 않아도 된다. 이때 어버이는 아이한테 꿈과 사랑을 가르치면 된다. 스스로 삶을 짓고, 스스로 삶을 가꾸며, 스스로 삶을 노래하는 길을 몸소 누리면서 보여주면 된다.


  오늘날 지구별 현대 문명과 사회는 모두 ‘밥 먹는 문명’이지 싶다. 그래서, 지구별 모든 나라는 권력과 정치와 군대와 교육과 문화를 내세우지 싶다. 밥을 얻으려고 다투고, 밥을 가로채려고 싸운다. 밥을 더 가지려고 툭탁거리며, 밥으로 이웃을 종처럼 부리려고 윽박지른다.


  우주에서는 지구별처럼 밥을 먹지 않는다. 지구별 중력과 같은 데가 없기도 하고, 우주에 무슨 풀이나 고기가 물이나 불이 있겠는가. 지구별 몸으로 우주에 가면 ‘어쩔 수 없이 배고플’ 테니, 먹을거리를 챙기겠지만, 다른 우주에 있는 목숨이라면 ‘지구별 사람처럼 밥을 먹는 일’은 없으리라 본다. 지구별에서는 ‘밥을 지어서 먹는 삶’을 ‘문화’로 여기는데, 밥이란 문화이면서 쇠사슬(족쇄)이라고 느낀다. 문화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얽어매는 쇠사슬이 바로 밥이라고 느낀다. ‘밥을 먹어야 해’ 하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밥을 먹는 몸으로 바꾸고, ‘밥을 먹으려면 뭣뭣이 있어야 해’ 하고 생각하면서 집안에 부엌을 두고 이 살림 저 살림을 늘린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어차피 먹는 밥이니 더 맛있게 먹어야지’ 하면서 이렇게도 꾸미고 저렇게도 손질한다.


  나는 ‘밥 먹는 문화’가 나쁘다고 여기지 않는다. ‘밥 먹는 일’은 나쁠 수 없다. 다만, ‘밥 먹는 일’을 생각하느라 정작 우리가 할 수 있는 수많은 다른 일을 잊거나 잃지 않는가 돌아볼 수 있어야지 싶다. ‘밥 먹는 일’에 너무 많은 품과 겨를을 바치면서 막상 우리가 나누거나 즐기거나 일굴 아름다운 삶이나 사랑하고는 차츰 동떨어지거나 멀어지지 않는지 헤아릴 수 있어야지 싶다.


  밥을 먹는 까닭을 생각한다. ‘밥을 먹으려’고 밥을 먹지 않는다. 삶을 일구려면 몸을 움직여야 하고, 몸을 움직여야 하니 밥을 먹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할 일은 맨 먼저 ‘삶 일구기(삶짓기)’이다. 삶을 일구려면 몸을 써야 하니까, 몸을 움직일 기운을 얻고자 밥을 먹는다고 할 만하다. 여기에서 하나 더 살펴야 한다. 삶은 몸으로만 짓는가? 마음은 무엇을 할까? 마음은 아무것도 안 할까? 생각으로는 무엇을 하는가?


  몸은 마음이 시키는 대로 따른다. 마음이 시키지 않으면 몸이 움직일 수 없다. 그러니까, 몸을 움직여서 삶을 일군다고 한다면, 마음이 몸한테 일을 시켜야 하는데, 마음이 몸한테 일을 시키려면 ‘어떤 일을 시킬는지 생각해야’ 한다. 마음이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면 몸한테 어떤 일도 못 시킨다.


  그러면, 실마리를 풀기 쉽다. 마음이 몸한테 일을 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음은 ‘어떻게 기운을 얻’는가? 마음도 밥을 먹어야 기운을 얻는가? 아니다. 마음은 밥을 안 먹는다. 마음은 오직 사랑을 먹는다. 마음은 오직 사랑을 먹으면서 꿈을 키운다. 마음은, ‘마음이 지은 꿈’을 몸을 움직여서 이루도록 일을 시킨다.


  차근차근 짚으면서 곰곰이 생각을 기울인다. 내가 할 일은 아주 쉽고 또렷하다. 나는, 마음이 사랑으로 꿈을 짓도록 일을 시키면 된다. 이 같은 일은 일이면서 ‘놀이’라 할 만하다. 내 몸은 마음이 시키는 대로 즐겁게 따르면 되고, 기쁘게 노래하면서 움직이면 된다.


  내 이웃과 동무가 ‘밥 안 먹는 삶(문화)’을 헤아릴 수 있으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싶다. 내 이웃과 동무가 ‘밥 짓고 차리고 치우고 하는 데에 들일 품과 겨를과 돈’ 모두를, 저마다 삶을 곱게 지어서 환하게 나누는 길에 쓰면 얼마나 멋스러울까 싶다. 4347.12.16.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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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안 먹으면서 살기



  사람은 밥을 꼭 먹어야 살 수 있을까. 사람은 밥을 안 먹어도 살 수 있지 않을까. 어릴 적부터 밥 때문에 몹시 힘들었기에 곧잘 이 생각을 했다. 어릴 적부터 ‘먹는 일’은 즐거움이 아니었다. 김치를 몸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니, 오늘날 한국에서는 밥상맡이 늘 거북할 뿐 아니라 고단했다. 아무리 씹어도 넘어가지 않아 억지로 우물거리다가 삼켜야 했는데, 김치를 억지로 씹어서 삼키면 뱃속이 좋을 턱이 없다.


  한국 사회에서 김치를 먹지 않았으면, 나는 어릴 적에 밥을 즐겁게 먹었을까? 어쩌면 그러했을는지 모른다. 그런데, 나는 김치뿐 아니라 찬국수(냉면)도 못 먹는다. 어릴 적에는 크림이 조금이라도 있는 빵이나 케익을 손에 대지도 못했다. 크림빵이나 케익을 먹으면 사나흘 배앓이를 하면서 모질게 물똥을 누었다. 언젠가는 생일상에 올라온 크림케익을 먹다가 그만 왈칵 게우고 나서 넋까지 잃은 적이 있다. 그렇다고 달걀이나 떡도 잘 먹지 않았다. 여느 때에는 그럭저럭 먹지만, 한동안 안 먹다가 모처럼 먹으면 꼭 사나흘 배앓이를 하면서 모질게 물똥을 누었다.


  어머니는 이것저것 ‘새로운 먹을거리’를 자꾸 먹이셨다. 내가 태어나서 국민학교를 다니던 1970∼80년대에는 공장에서 찍는 가공식품이 쏟아질 때였고, 유럽에서는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 때문에 우유를 몽땅 내버려야 하던 터라, 우유를 ‘가루’로 만들어서 한국에 아주 값싸게 팔기도 하던 때요, 이러저러해서 ‘새로운 유제품’이 무척 많이 나왔다. 요플레라든지 푸딩 비슷한 것이라든지 요구르트라든지, 그리고 우유라든지 참으로 많이 돌았다. 이런 것 가운데 처음 내 입에 닿는 것은 어김없이 배앓이와 물똥을 불렀고, 아무리 먹어도 입에 맞지 않아서 누가 거저로 주어도 먹고픈 마음이 없었다.


  밥도 힘들고 주전부리도 고단했다. 다른 사람은 단팥빵이니 크림빵이니 무엇이니 저것이니 하는 빵을 즐긴다지만, 내가 가장 즐긴 빵은 ‘아무것도 더하지 않은 식빵’이고, 그나마 ‘식빵 아닌 빵’을 고르라 할 적에는 ‘소보루빵’만 골랐다. 식빵도 기름을 많이 쓴다지만, 식빵보다 기름을 더 쓴 빵은 어김없이 배앓이와 물똥을 낳았다.


  어릴 적에 ‘하루 세 끼니’란 죽음과 같았다. 아침 낮 저녁에 먹어야 하는 밥은 그저 무시무시했다. 동무네 집에 놀러갔는데 동무네 어머님이 ‘밥 먹고 가라’고 하면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김치처럼 삭힌 것을 못 먹는데, 이런 반찬이 있으면 동무네 집에서까지 얼마나 끔찍한가. 게다가 김치를 못 먹는 모습을 바깥에서 들키면 학교나 동네에서 얼마나 놀림을 받는가. 아니, 알 사람은 웬만큼 알아, 동네에서 놀다가도 아주머니들이 “쟤는 김치를 못 먹는 아이라지?” 하고 수다를 떨면 온몸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밥은 왜 먹을까? 밥은 왜 먹어야 할까? 몸에 기운을 불어넣어 즐겁게 일하거나 놀려고 밥을 먹는가? 그러면, 즐겁게 먹어야 하지 않을까? 못 먹는 것을 억지로 먹이지는 말아야 하지 않나?


  모든 사람이 똑같은 부피를 먹을 수 있지 않다. 조금만 먹어도 되는 사람이 있고, 많이 먹어도 모자란 사람이 있다. 조금만 먹어도 되는 사람이 있으면, 더 조금만 먹어도 되는 사람이 있을 테고, 줄이고 줄여서 거의 안 먹다시피 해도 되는 사람이 있을 테며, 그예 아무것도 안 먹어도 되는 사람이 있으리라. 국민학교 산수 수업에서, 나는 혼자 이런 ‘수열’을 생각했다.


  나흘째 아무것도 못 먹고, 닷새째 밥이나 물을 조금도 입에 못 대면서 보낸다. 엿새나 이레가 되면 어떻게 될까 궁금하다. 뭘 조금만 입에 대도 곧바로 물똥이 나온다. 아이들은 밥을 먹어야 하니 밥을 차려서 주지만, 나는 멀거니 구경을 하거나 자리에 드러눕는다. 밥내음은 따로 욕지기가 나지 않는다. 밥을 보아도 입에 넣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배앓이와 물똥 때문에 안 먹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밥을 부르지 않는다.


  나중에 다시 밥을 먹을 수 있는 몸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때에는 그때대로 즐겁게 먹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한 가지를 또렷하게 깨닫는다. ‘단식’이나 ‘금식’이 아니어도 ‘밥 없는 삶’이 될 수 있고, 밥에다가 물조차 없는 삶으로 여러 날 보내면서 몸이 허전하거나 힘들지 않다.


  어릴 적에 한 가지 더 생각한 적이 있다. 하도 밥먹기가 힘들다 보니 ‘밥 안 먹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했는데, 풀이나 나무를 보면 뿌리가 땅속에서 양분을 빨아들인다지만, 따로 ‘밥을 먹는 얼거리’는 아니다. 해와 바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여기에 비가 있으면 무럭무럭 자란다. 아니, 모든 풀씨와 나무씨는 해와 바람 두 가지만 있으면 언제까지나 살 수 있다. 풀씨와 나무씨는 해와 바람 두 가지 기운으로 즈믄 해를 살 수도 있다.


  사람은 어떠할까? 사람도 해와 바람 두 가지 기운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 해와 바람 두 가지 기운으로 사람이 살 수 있으면, 입으로 넣는 것이 없으니, 밑으로 나올 것도 없다. 입으로도 밑으로도 들어가거나 나오는 것이 없으니 몸은 늘 그대로 흐를 테며, 몸에서 ‘태워 삭이고 없애고 다시 넣어서 태워 삭이고 없애고’ 하는 흐름이 사라진다면, 몸이 아프거나 늙을 일도 없으리라 느낀다. 4347.12.16.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람타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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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안 먹으면서 글쓰기



  닷새째 ‘밥을 안 먹으면’서 글을 쓴다. 오늘 아침까지 몸살 기운을 털지 못해 몹시 고단했지만, 낮을 지나고 저녁이 되니 몸살 기운은 슬슬 사라진다. 나흘째 밥을 먹지 못하다가 닷새째에는 조금 먹어도 될까 싶어 한술 떴더니 웬걸, 밥 한술에다가 모과차 한 잔까지 알뜰히 물똥으로 나온다.


  내 몸을 차분히 지켜보기로 한다. 밥을 안 먹으면서 얼마나 더 지낼 만한지 바라보기로 한다. 오늘 저녁을 보내고 이튿날부터 다시 밥을 먹을는지 모르지만, 며칠 더 밥을 안 먹을는지 모른다. 알 수 없다. 다만, 나는 밥을 더 바라지 않으며, 딱히 밥을 기다리지 않는다. 날마다 아이들한테 밥을 차려서 주지만, 나도 함께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억지로 밥을 떠넣고 싶지 않다.


  밥을 안 먹다 보니, ‘밥 안 먹는 삶’을 머릿속으로 갈무리하면서 글을 쓴다. 어느 모로 보면 ‘밥을 못 먹다’ 보니, 밥을 안 받아들이는 몸을 곰곰이 되새기면서 글을 쓴다.


  글은 어떻게 쓰는가? 스스로 살아가는 대로 쓴다. 밥을 먹으면서 산다면, ‘밥 먹는 삶’을 글로 풀어낸다. 밥을 안 먹으면서 산다면, ‘밥을 안 먹는 삶’을 글로 풀어낸다. 시골에서 흙을 짓는 사람은 시골살이나 흙짓기를 글로 쓰고, 아이를 돌보는 사람은 아이키우기를 글로 쓴다. 날마다 인문책만 읽는 사람은 ‘인문책 이야기’를 글로 쓴다. 날마다 신문이나 방송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신문이나 방송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글로 쓴다. 4347.12.16.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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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물감 2014-12-16 21:47   좋아요 0 | URL
음. 밥을 못드신다니 걱정이 앞서네요.
일부러 하는 단식이 아닌 이상..

파란놀 2014-12-16 21:54   좋아요 0 | URL
걱정할 일이란 없습니다.
몸은 외려 훨씬 튼튼하고
생각과 머릿속은 아주 또렷하거든요 ^^

`밥 안 먹기`와 얽혀 쓴
다른 두 가지 글을 읽어 주셔요.
그러면, 어느 한 가지 길이
슬기롭게 열릴 만하리라 느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