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나눠 준 선물 하이타니 겐지로의 시골 이야기 3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김종도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양철북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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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80



계급사회를 부채질하는 학교교육

― 하늘이 나눠 준 선물

 하이타니 겐지로 글

 김종도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양철북 펴냄, 2005.5.9.



  배우고 가르치는 곳을 가리켜 ‘학교’라고 합니다. 그러니, 학교에서는 서로 배우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학교는 배우고 가르치는 구실을 거의 안 합니다. 아이들 앞에 교과서를 놓은 뒤, 이 교과서에 나오는 지식을 시험문제로 바꾸어서 점수따기를 시킵니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는 삶을 배우거나 사랑을 배우거나 꿈을 배우지 않습니다. 오직 교과서에 나오는 지식을 시험문제로 바꾸어서 외웁니다.


  학교 바깥을 보면 학원이 아주 많습니다. 학교에서 교과서로 가르치는 지식을 시험문제로 더 잘 맞힐 수 있도록 이끄는 데가 학원입니다. 이러다 보니, 학교를 다니는 아이는 너나 할 것 없이 고달픕니다. 시험점수가 안 나오는 아이도 고달프고, 시험점수가 잘 나오는 아이도 고단합니다. 한쪽에서는 점수가 더 올라가지 못해서 고달프고, 한쪽에서는 점수가 더 떨어지지 않도록 하려고 고단합니다.


  이 같은 학교 얼거리를 모르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이러한 얼거리를 잘 아는 사람도 참 많은데, 막상 이 얼거리는 달라지거나 바뀌거나 바로잡히지 않습니다. 그저 이 얼거리가 그대로 흐릅니다. 시험점수에 따라 학교를 등급으로 매기고, 이 등급에 따라 사람한테 계급을 매깁니다.



.. “다카유키, 벼포기를 그렇게 쥐면 안 돼. 잘못하면 낫에 손가락을 벨 수도 있어.” 다케조 아줌마가 다급하게 말하며 낫질하는 요령을 가르쳐 주었다. 벼포기를 쥘 때 나는 엄지손가락이 밑을 보게 쥐었는데, 아줌마는 엄지손가락이 위를 보게 쥐라고 했다 … 나는 벼를 베면서 생각했다. 사람들은 밥을 먹을 때 농사를 짓느라 고생한 농부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아. 나는 지금껏 돈은 참 편리한 것라고 생각했어. 뭐든지 살 수 있으니까 ..  (14, 20쪽)



  학교교육은 계급사회를 부채질합니다. 왜냐하면, 학교에서 삶과 사랑과 꿈을 안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 삶과 사랑과 꿈을 가르친다면, 계급사회를 부채질할 수 없습니다. 삶과 사랑과 꿈은 계급이 아니라, 말 그대로 삶이요 사랑이요 꿈입니다. 삶을 가르치는데, 누가 높고 낮겠습니까. 사랑을 가르치니, 서로 어깨동무를 할 테지요. 꿈을 가르치면, 다 함께 즐겁게 놀고 일하는 마을로 나아갑니다.


  오직 교과서를 앞에 놓고 시험점수로 아이들을 등급으로 매기는 학교인 탓에, 이러한 학교를 다니는 아이는 어릴 적부터 신분과 계급과 등급 따위에 길듭니다. 낮은 등급이면 낮은 등급대로 아프고, 높은 등급이어도 높은 등급대로 아파요. 서로 돕거나 아끼는 길보다는, 내 한몸 버티는 일로도 벅찹니다.



.. 아빠는 도시에는 유혹이 많다고 했다. 후타한테 돈을 주면서 사흘만 이곳에 있으라고 하면, 후타는 너무 많이 먹어서 씨름 선수처럼 뚱뚱해져 버릴 거다 … 마을 사람들은 곧잘 우리더러 이런 쓸쓸한 곳에는 왜 왔냐고 하지만, 정작 쓸쓸해하는 마을 사람은 한 명도 못 봤다 … “늘 하는 말이지만, 먹거리는 모두 생명이야. 그런데 도시 사람들은 인간의 노동과 지혜까지도 죄다 돈으로 사 버린단다. 그러고는 값비싼 음식을 아무렇지 않게 남기지.” ..  (35, 52, 94쪽)



  하이타니 겐지로 님이 쓴 《하늘이 나눠 준 선물》(양철북,2005)을 읽습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어린이문학입니다.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입니다. 등급을 매기는 삶이 아니라, 사랑을 나누는 삶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얼크러지는 이야기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그래, 도시를 떠나자!’ 하고 씩씩하게 외칠 어른이나 아이는 몇이나 될까 궁금합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렇구나, 도시에서 살아도 삶을 제대로 배워서 알아야겠구나!’ 하고 기쁘게 무릎을 칠 어른이나 아이는 얼마나 될까 궁금합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그러게 말이야, 날마다 먹는 밥이 어디에서 어떻게 태어나서 어떻게 나한테 오는지 여태 생각한 적이 없네!’ 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제부터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겠노라 다짐하는 어른이나 아이는 어디에 있을까 궁금합니다.



.. “요즘은 어디나 농약을 쓰기 때문에 우렁이나 미꾸라지를 볼 수 있는 곳은 이런 산 속의 연못밖에 없단다. 아빠 어릴 때는 논바닥이 우렁이나 미꾸라지 천지였는데, 이제는 너무 귀해.” … 나는 선뜻 대답했다. 물고기를 죽이는 건 싫고, 밭에서 채소를 뽑아 오는 건 아무렇지 않은 이유는 뭘까? 아빠 말처럼 모두 다 생명인데 ..  (87, 91쪽)



  아이한테 문제집이나 참고서를 사서 안기는 어버이는 아주 끔찍한 짓을 저지르는 셈이라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문제집이나 참고서는 ‘참된 지식’을 하나도 안 다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길에 즐겁게 익혀서 아름답게 헤아릴 ‘올바른 슬기’는 문제집이나 참고서에 한 줄로도 안 나오기 때문입니다.


  문제집이나 참고서는 시험점수를 더 잘 받으라고 만든 종이꾸러미입니다. 이런 종이꾸러미는 책조차 아닙니다. 학교교육이 더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계급사회로 나아가도록 부채질하는 종이꾸러미가 문제집이나 참고서입니다.


  어버이라 한다면, 문제집이나 참고서를 사 주지 말고, 텃밭을 지어야 합니다. 아이한테 텃밭 한쪽에 나무를 심을 수 있도록 땅뙈기를 마련해야 합니다. 마당이 있는 집을 장만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리 넓지 않아도, 두 발로 흙을 밟고 두 손으로 흙을 만지면서 풀과 꽃과 나무를 아끼는 마음을 아이가 손수 기르도록 이끌 때에 비로소 ‘어버이’가 됩니다.



.. “도시 사람들은 새빨갛게 익은 맛있는 딸기를 돈을 주고 살 뿐이야. 딸기를 모종 때부터 키우면서 딸기와 친하게 지낸 즐거운 기억은 돈으로 살 수 없어.” … “요즘 세상에는 먹을 게 어찌나 많은지, 마당에 감이 열려도 비파가 익어도 요즘 시골 아이들은 거들떠보지 않아요.” ..  (149∼150, 154쪽)



  아이는 아이답게 뛰놀 때에 아이입니다. 어른은 어른답게 일할 때에 어른입니다. 교과서를 앞에 놓고 시험점수를 잘 따는 아이는 아이가 아닙니다. 돈만 잘 벌어서 아이한테 이것저것 사다 줄 수 있는 어른은 어른이 아닙니다. 함께 삶을 짓는 아이와 어른이 되어야 하고, 함께 사랑과 꿈을 가꿀 수 있는 아이와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제대로 철이 들어 슬기롭게 삶을 노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 배우고 왜 가르칠까요? 오롯이 우뚝 서서 이웃과 어깨동무를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도록 이끌려고 배우면서 가르칩니다. 사람이 되는 길로 나아가도록 하는 학교여야 합니다. 졸업장을 낳는 학교가 아니라, 신분과 계급을 만드는 학교가 아니라,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꿈을 노래하면서 이야기하는 학교가 되어야 합니다. 《하늘이 나눠 준 선물》은 참 예쁜 책입니다. 어른은 하늘이 나눠 준 선물이 무엇인지 알아채야 하고, 아이는 하늘이 나눠 준 선물을 받아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4348.1.12.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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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쪽지 2015.1.6.

 : 찬바람, 초등학교



- 1월 6일 아침에 면소재지 초등학교에서 예비소집이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 예비소집에 가야 하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 아이가 학교에 가지 않는다는 뜻을 알리러 간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놀 수 없고 배울 수 없다고 느끼기에 학교에 아이를 넣을 마음이 없다. 나라에서는 의무교육을 내세워 모든 아이가 반드시 학교에 다녀야 하도록 내몰지만, 학교에 다니는 아이는 저절로 입시지옥에 휩쓸려야 하고, 입시지옥에서 빠져나올 즈음에는 직업훈련을 받는다. 학교에서는 아이한테 아무것도 가르치지 못한다. 아이를 그냥 안 보낼 수 있으면 가장 나을 테지만, 나라에서도 학교에서도 서류를 받아야 한다. 이 서류를 쓸 적에 부드럽게 빨리 단출하게 쓸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모저모 미리 알아보면서 며칠 동안 몸살을 앓았다. 마음이 많이 쓰였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면소재지 초등학교에 가야 하기에 큰아이를 일찌감치 깨워서 옷을 입히는데 바람이 대단히 드세다. 바람이 드세건 말건 자전거는 그냥 달리면 되지만, 아침부터 찬바람을 잔뜩 먹어야 하는구나.


- 옷을 단단히 챙겨 입히고 길을 나선다. 큰아이하고만 조용히 길을 나서려 했는데, 작은아이가 잠에서 깬다. 작은아이는 왜 아버지와 누나 둘만 따로 자전거를 타고 어디에 가는지 알지 못하니 서운하게 여긴다. 그러게. 그러니 너는 더 자야지.


- 바람을 가르며 자전거를 달려 면소재지 초등학교에 닿는다. 삼십 분 남짓 멍하니 기다린다. 큰아이가 볼 책을 한 권 챙겨야 했을까. 이렇게 오래 기다려야 할 줄 몰랐다. 큰아이는 삼십 분 남짓 기다리면서 매우 따분해 한다. 뛸 수도 없고 달릴 수도 없고 노래할 수도 없는 이곳에서 참으로 고단하겠구나 싶다. 곰곰이 돌아본다. 어느 아이라 하더라도 뛰고 달리고 노래하고 춤추면서 놀고 싶다. 그러면 이 아이들은 학교에서 무엇을 할 만할까. 하루 수업 가운데 몇 분쯤 마음껏 떠들고 내달리면서 놀 수 있을까. 놀고 싶은 아이들한테 학교는 어떤 지식을 가르치려 하는가.


- A4 종이로 한 장짜리 서류를 쓰고, ‘학부모 소견서’까지 쓰는 데에 한 시간 이십 분 즈음 걸린다. 참 오래 있었다. 앞으로 한 번 더 학교에 와야 할는지 모르지만, 아무것 아닌 서류 때문에 흘려야 하는 겨를이 나로서도 아이로서도 몹시 아깝다. 그래도, 서류 쓰기를 마치고 홀가분하게 돌아나오는 길에, 이 초등학교 꽃밭에 핀 하얀 동백꽃하고 나무쑥갓꽃을 보면서 마음을 달랜다. 오늘 이곳에 와서 한겨울꽃을 두 가지 보았구나. 나무쑥갓꽃이 무리를 지어 핀 자리에 코딱지나물꽃도 몇 송이 살그마니 피었다. 나무쑥갓꽃이 아닌 쑥갓꽃이라면 한결 고울 텐데 하고 혼자 생각한다. ‘구경하려는 꽃’이 아니라 ‘나물로 먹는 풀’을 심어서 꽃도 보고 씨도 받는다면 참으로 멋질 텐데 하고 조용히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곳은 시골마을에 있는 학교이니까.


- 작은아이한테 주려고 면소재지 가게에서 젤리를 한 봉지 산다. 맞바람이 대단히 드세서 자전거로 더 달릴 수 없기에 마을 어귀부터는 자전거에서 내려 큰아이와 함께 걷는다. 등판으로는 땀이 흐른다. 이 바람을 맞으면서도 유채꽃 몇 송이가 논둑에 피었다.


(최종규 . 2015 - 시골에서 자전거와 함께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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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 굿 (황루시·김수남) 대원사 펴냄, 1989.5.15.



  ‘대원사’에서 펴낸 ‘빛깔있는 책들’ 가운데 8번이 《팔도 굿》이다. 자그마치 여덟째 책이 《팔도 굿》이다. 나는 이 책을 참 예전에 읽었으면서도 ‘빛깔있는 책들 8번’이라는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 스물 몇 해가 지난 오늘 다시 들춰서 읽다가 문득 깨닫는다. 굿이란 무엇인가. 굿은 왜 하는가. 굿은 누가 하는가. 굿을 하는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려 하는가. 나는 어릴 적에 굿잔치에 간 일이 없지만, 내 둘레에서 굿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들었다. 나는 바닷마을인 인천(서울 옆에 붙은 공업도시가 아닌 바닷마을 인천)에서 자라면서 둘레에서 ‘굿’을 자주 들었다. 눈으로 보지 못했으나 귀로 흔히 들었다. 그리고 인천뿐 아니라 어느 곳을 가도 예배당이 참 많았다. 이곳저곳에서 예배당 나오라고 하는 어른들을 아주 쉽게 보았다. 굿을 하라는 어른은 드물고, 내 마음속에서 하느님을 찾으라고 하는 어른은 더욱 드물었는데, 언제나 예배당에서 손을 비비는 어른만 많았다. 그러니까, 굿은 무엇이고 삶과 종교는 무엇인가. 온 나라에 참으로 오랫동안 굿이 있던 까닭은 무엇이며, 이 굿이 하루아침에 사라져야 한 까닭은 무엇인가. 조그마한 《팔도 굿》이 모든 실마리를 풀어 주기는 어렵다. 그러나 조그마한 실마리를 푼다. 이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가슴에 담으면서 하루하루 누린 삶을 나즈막하게 보여준다. 4348.1.11.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한 줄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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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 굿
황루시 지음 / 대원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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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씨 (최명란) 창비 펴냄, 2008.4.30.



  동시집 《수박씨》를 읽으면서 생각한다. 이 동시집은 글쓴이 말대로 아이들 목소리를 담으려고 애썼구나 싶고, 글쓴이 스스로 무척 재미있게 썼구나 싶다. 그런데, 나는 이 동시집을 읽으면서 어쩐지 허전하다. 우리 집 아이가 스스로 이 책을 우리 집 책꽂이에서 찾아내어 읽는다면 말리지 않겠으나, 내가 먼저 이 동시집을 우리 집 아이한테 줄 일은 없겠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어린 눈높이’로 ‘재미있게’ 바라보려는 마음과 눈썰미는 있지만, 왜 어린 눈높이로 가려 하는가 하는 마음결을 찾기 어렵고, 재미를 어디에서 누구와 누리려 하는가 하는 실마리를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는 현대 도시 문명이다. 시골에는 아이들이 몇 없고, 도시에서는 아이들이 신나게 뛰놀 곳이 없다. 흙을 만지면서 자라는 아이가 도시이든 시골이든 아주 드물며, 나무와 동무가 되는 아이는 그야말로 찾아볼 수 없다. 이 동시집을 펴낸 분이 흙을 좀 만져 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본다. 흙을 만져 보아도 달라질 일이 없을는지 모르나, 참말 흙을 만지면서 아이와 놀다가 옷과 몸이 온통 흙투성이가 되는 하루를 한 해 내내 누리고 나서 동시를 쓰면 어떤 이야기가 태어날까 궁금하다. 4348.1.11.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한 줄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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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씨- 최명란 동시집
최명란 지음, 김동수 그림 / 창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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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에서 두 달에 한 차례 내는 문화잡지 2015년 1~2월호에 싣는 글입니다.


..


말넋 45. ‘눈결’에 깃든 이야기를 읽는다

― 함께 놀며 지은 말을 물려준다



  시를 쓰던 김남주 님이 있습니다. 1994년에 숨을 거두었는데, 시골에서 흙을 일구면서 살고 싶다는 꿈을 키우다가 몸이 너무 나빠서 쉰 살이 안 되어 죽었습니다. 이녁 동생은 시인이 나고 자란 전남 해남에서 조용히 흙을 일구면서 산다 하고, 《식량 주권 빼앗겨도 좋은가?》(철수와영희,2014)라는 조그마한 책에 이녁 동생 목소리가 전남 해남 고장말로 찬찬히 흐릅니다. 25쪽을 보니 “우리 논 옆으로 조그마한 똘(실개천)이 항시 흘러요.” 같은 말마디가 나옵니다.


  책에서는 묶음표를 치고 ‘실개천’이라 덧붙입니다. ‘실개천’과 같은 뜻이라는 소리일 테지요. 한국말사전을 보면 ‘개천(-川)’은 “개골창 물이 흘러 나가도록 길게 판 내”라 하고, ‘개골창’은 “수챗물이 흐르는 작은 도랑”이라 해요. 그러니, ‘개천’은 “수챗물이 흐르는 도랑이 이어지도록 판 물줄기” 를 가리켜요. 요즈음은 도시가 커지면서 개천이나 개골창을 보기는 몹시 어렵습니다. 이밖에 다른 물줄기를 구경하기도 퍽 어려워요. 이를테면, 시내와 내와 도랑과 개울과 가람과 개를 보기란 아주 어렵지요.


  ‘시내’는 “조그마한 내”를 가리킵니다. ‘내’는 “‘시내’보다 크지만 ‘가람(강)’보다는 작은 물줄기”를 가리킵니다. ‘가람(강)’은 “넓고 크게 흐르는 물줄기”를 가리키고, ‘개’는 “가람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을 가리켜요. ‘도랑’은 “매우 작고 좁은 개울”을 가리키고, ‘개울’은 “골짜기나 들에 흐르는 작은 물줄기”를 가리키지요.


  도랑은 시내가 되고, 시내는 내가 되며, 내는 가람이 됩니다. 가람은 개를 거쳐 바다로 갑니다. 물줄기는 흐릅니다. 골골샅샅 다른 물줄기가 흐릅니다. 예부터 물을 아주 알뜰히 여기고 고이 건사했기에 물줄기를 가리키는 이름이 여러 가지입니다. 조그마한 개울은 ‘실개울’이고, 논에는 ‘논도랑’이 있습니다.


  겨울에는 냇물이 꽁꽁 얼어요. 실개울도 개울도 도랑도 얼어붙습니다. 겨울논에 물을 대면 논에는 얼음판이 널찍하게 생깁니다. 추운 고장에서는 겨울볕에도 ‘논얼음판’이 꺼지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얼음이 언 곳을 찾아서 발을 지치느라 부산합니다. 신발 바닥에 쇳날을 박지 않아도 얼음을 슬슬 지치면서 즐겁습니다. 솜씨 좋은 언니나 오빠가 있으면 나무를 만져서 썰매를 만듭니다. 썰매에는 한 사람이 탈 수 있고 둘이 탈 수 있습니다. 서로 갈마들면서 놀 수 있습니다.


  도시에는 논이 없습니다. 도시에는 개울도 실개울도 시냇물도 냇물도 없습니다. 사람이 헤엄치기 어려운 ‘가람(강)’이 흐르기는 하지만, 겨울에 이곳에서 얼음을 지치며 놀기에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도시에서도 아이들이 골목 한쪽을 놀이터로 삼아서 비료 푸대를 타든 맨몸으로든 눈놀이를 했어요. 눈을 뭉쳐 눈싸움을 하고, 눈을 굴려 눈사람을 빚으며, 눈길을 타며 눈썰매 놀이를 즐깁니다. 그런데, 이제는 ‘눈놀이’가 아니에요. 요새는 도시에서 따로 시설을 지은 ‘눈썰매장(-場)’이라든지 ‘스노우파크(snowpark)’를 찾아간다고 합니다. 노는 곳이기에 ‘놀이터’이듯 눈썰매를 탄다면 ‘눈썰매터’여야 할 텐데, 이처럼 이름을 짓지 못합니다. 겨울에 눈놀이를 즐기는 곳이라면 ‘눈놀이터’여야 할 테지만, 이렇게 이름을 짓지 않고 ‘스노우파크’가 되어요. 그러고 보면, 도시에 있는 시골에서는 여름에 ‘여름놀이’나 ‘물놀이’라 하지 않고 ‘워터파크(waterpark)’라 해요.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포이에마,2014)라는 책을 읽으니, 33쪽에 “아이들에게는 긴장을 풀고 숨을 쉴 여유가 필요하다. 놀 시간이 필요하다.” 같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참말 아이들은 놀 틈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른들은 쉴 틈이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마음껏 뛰놀 틈이 있어야 하고, 어른들은 마음껏 쉴 틈이 있어야 합니다. 따로 돈을 내고 들어가야 하는 시설에서가 아니라, 집이나 일터나 학교 둘레에서 넉넉히 뛰놀거나 쉴 틈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 멀지 않은 지난날을 돌아보면, 마을이나 동네마다 있던 커다란 나무그늘이 여름날 놀이터요 쉼터입니다. 시내와 개울과 도랑도 놀이터이면서 쉼터입니다. 어른은 시내와 개울과 도랑에서 물을 긷거나 빨래를 하면서 일하지만, 일하면서도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우고, 아이들은 어버이 곁을 졸랑졸랑 따라다니면서 물놀이를 하고 까르르 웃습니다.


  요즈음에는 어른도 아이도 ‘개울’이라는 낱말이나 ‘눈싸움’이라는 낱말이나 ‘시냇물’이라는 낱말이나 ‘눈사람’이라는 낱말을 입에 굴리기 어렵습니다. 사진이나 영상이나 그림으로는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으나, 막상 맨눈으로는 삶자리 둘레에서 못 보거든요.


  우리가 늘 쓰는 말은 우리가 살아가는 터에서 늘 마주하고 만나며 부대끼는 말입니다. 책으로만 읽은 말은 머리에 안 남습니다. 살면서 몸으로 겪는 말이 머리에 남습니다. 책에서만 본 꽃은 냄새나 빛깔을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들이나 숲이나 밭에서 만나는 꽃을 살그마니 쓰다듬을 적에 꽃내음과 꽃빛을 제대로 압니다. 맨눈으로 보고 맨손으로 만지며 맨몸으로 마주하는 꽃은 오래도록 이름을 떠올려요. 개울을 집 둘레에서 못 보고 사전이나 도감에서만 본다면, 동네에서 골목을 자동차한테 빼앗겨 동무들과 눈싸움을 하지 못하고, 동무들 모두 학원에 다니느라 바빠 어쩌다가 스노우파크에 나들이를 간다면, 겨울과 눈과 썰매와 고드름을 제대로 안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얼굴이나 손바닥으로 받으면 차가운 느낌이 상큼할 뿐 아니라, 눈이 녹아서 물방울이 되기 앞서 어여쁜 무늬(결정)를 볼 수 있습니다. 먼먼 옛날부터 내려온 ‘눈결’이나 ‘눈무늬’라 할 텐데, 지난날에도 오늘날에도 앞날에도 이 눈결이나 눈무늬는 이어가리라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모든 말은 먼 옛날부터 수많은 어버이와 아이가 어우러지면서 지은 낱말입니다. 우리는 옛 어버이와 아이한테서 ‘개울’과 ‘썰매’와 ‘놀이터’라는 낱말을 물려받았는데, 앞으로 어떤 낱말을 뒷사람한테 물려줄 수 있을까요. 4347.12.17.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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