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량한 말 바로잡기

 (801) 매일같이(매일처럼) 1


“어떤 경우에도 비굴하면 안 된다” 그 말을 매일같이 들을 무렵엔 그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김규항-비급 좌파》(야간비행,2001) 67쪽


 그 말을 매일같이 들을 무렵엔

→ 그 말을 날마다 들을 무렵엔

→ 그 말을 늘 들을 무렵엔

→ 그 말을 으레 들을 무렵엔

→ 그 말을 하루가 멀다 하고 들을 무렵엔

→ 그 말을 수없이 들을 무렵엔

→ 그 말을 듣고 또 들을 무렵엔

 …



  한자말 ‘매일(每日)’은 한국말로 ‘날마다’나 ‘하루마다’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날마다’나 ‘하루마다’로 적으면 됩니다. ‘매일같이’라든지 ‘매일처럼’처럼 쓸 일이 없습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됩니다. ‘날마다처럼’이나 ‘하루마다같이’와 같은 꼴로 말을 하는 일은 없습니다. “백 년을 하루같이”라든지 “즈믄 해를 하루처럼”과 같은 꼴로 말을 할 뿐입니다.


  날마다 듣기에 ‘날마다’로 적습니다.날마다 듣지는 않고 자주 듣는다면 ‘자주’로 적습니다. 자주 듣되 거의 날마다 듣는다면 ‘거의 날마다’로 적습니다. 어떤 모습을 나타내려고 하는지 찬찬히 헤아리면서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337.6.29.불/4348.1.13.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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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때에도 굽히면 안 된다” 그 말을 날마다 들을 무렵엔 그 말을 제대로 헤아릴 수 없었다


‘경우(境遇)’는 ‘때’나 ‘자리’로 손질하고, ‘비굴(卑屈)하면’은 ‘굽히면’이나 ‘굽실거리면’으로 손질합니다. ‘온전(穩全)히’는 ‘제대로’나 ‘오롯이’로 손보고, ‘이해(理解)할’은 ‘알아들을’이나 ‘알’이나 ‘알아차릴’이나 ‘헤아릴’로 손봅니다.



매일(每日)

1. 각각의 개별적인 나날

   - 황진이에 대한 집념으로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2. 하루하루마다

   - 그는 매일 밤잠을 설쳤다


..



 우리 말도 익혀야지

 (456) 매일같이(매일처럼) 2


새들이 먹이를 찾으면서 내는 소리와 밤새 안녕한지를 묻는 소리가 매일처럼 나를 맞이한다

《남효창-나는 매일 숲으로 출근한다》(청림출판,2004) 머리말


 매일처럼 나를 맞이한다

→ 날마다 나를 맞이한다

→ 언제나 나를 맞이한다

→ 늘 나를 맞이한다

 …



  ‘매일’이라는 낱말을 쓰고 싶다면 쓸 노릇입니다. 그런데, 이 낱말을 쓰면서 한국말은 힘을 잃습니다. 왜 힘을 잃느냐 하면, 때와 곳과 흐름에 따라 다 다르게 쓰던 수많은 말마디가 설 자리를 잃기 때문입니다.


  ‘늘·노상·언제나’는 뜻과 느낌이 조금씩 다릅니다. ‘날마다·나날이’는 같은 뜻이지만 느낌을 살짝 달리하면서 쓸 수 있습니다. ‘한결같이·꾸준히·자꾸’ 같은 낱말을 얼마든지 쓸 만하지만, 이런 낱말도 쓰임새를 잃습니다.


  이 보기글을 실은 책에 붙은 이름은 “나는 매일 숲으로 출근한다”입니다. 이처럼 글을 쓸 수도 있지만, 숲으로 일하러 가는 분이라면 으레 아침에 갈 테지요. 그러니, “나는 아침마다 숲으로 간다”라든지 “나는 아침에 숲으로 간다”처럼 쓸 만해요. 말넋을 한 번 더 헤아릴 수 있기를 빕니다. 4338.11.9.물/4348.1.13.불.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새들이 먹이를 찾으면서 내는 소리와 밤새 잘 잤는지를 묻는 소리가 날마다 나를 맞이한다


‘안녕(安寧)한지를’은 ‘잘 잤는지를’이나 ‘잘 있었는지를’로 다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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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을 죽이는 외마디 한자말

 (1359) 분粉 1


항아리에 / 쌀이 담겨 있으면 / 쌀분이 배어 나오고 / 소금이 담겨 있으면 / 소금분이 배어 나와요 / 내 마음 항아리엔 / 어떤 분이 배어 나올까요

《최명란-수박씨》(창비,2008) 77쪽


 쌀분 → 쌀가루

 소금분 → 소금가루

 어떤 분이 → 어떤 가루가



  화장품을 가리키는 ‘분’이라면 그대로 써야 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얼굴에 바른다고 하는 화장품을 ‘분’이라 가리킨 까닭은 ‘가루’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한테는 그저 ‘가루’일 뿐인데, 화장품을 만든 사람과 이를 퍼뜨린 사람은 한국말 ‘가루’가 아닌 한자 ‘粉’을 빌어서 쓴 셈입니다.


 분을 바르다

→ 가루를 바르다

→ 화장가루를 바르다

→ 얼굴가루를 바르다


  화장품을 가리키는 가루라 한다면 ‘화장가루’처럼 새 낱말을 빚을 수 있습니다. 화장가루는 얼굴에 바르니 ‘얼굴가루’처럼 적을 만합니다. 그냥 ‘가루’로 써도 됩니다. 얼굴에 무엇을 바를 적에 가루를 ‘가루’라 말하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粉’이라는 외마디 한자말은 곳곳에 또아리를 틀리라 느낍니다.


  이 보기글은 동시입니다. 동시를 쓴 이가 ‘쌀분’이나 ‘소금분’처럼 글을 쓰는데, 이런 말마디를 어린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을까요? 어른은 ‘고추분’이라는 말마디를 쓰기도 합니다. ‘쌀분·소금분’뿐 아니라 ‘고추분’도 아주 뜬금없는 낱말입니다. 왜냐하면, 한국말은 ‘쌀가루·소금가루·고춧가루’이니까요.


  밀을 빻으면 ‘밀가루’이고, 콩을 빻으면 ‘콩가루’입니다. 누구나 알아듣도록 쓰지 않는다면 한국말이 아닌데, ‘밀분·콩분’처럼 쓰면, 이런 말을 알아들을 사람도 매우 드물 테지요. 4348.1.13.불.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항아리에 / 쌀이 담기면 / 쌀가루가 배어 나오고 / 소금이 담기면 / 소금가루가 배어 나와요 / 내 마음 항아리엔 / 어떤 가루가 배어 나올까요


“담겨 있으면”은 “담기면”으로 바로잡습니다. 이처럼 쓰는 현재진행형 꼴은 한국말이 아닙니다.



분(粉)

1. 얼굴빛을 곱게 하기 위하여 얼굴에 바르는 화장품의 하나

   - 분을 바르다 /엷은 분 냄새가 풍겼다

2. = 가루


(최종규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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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1-13 16:49   좋아요 0 | URL
들어 알지만 저는 번역체의 오류인 일본어체..랄까요..현재진행형을 옮겨놓은 그 행태가 썩 밉게 여겨지진 않아요.
어떻게 해서든 가 닿으려는 ..몸부림이..우리말은 익고 설고 차이일수있지만 그 들에겐 도˝의 깨달음에 같았을 ..순간이잖아요..느끼고 스스로 알라..가 아닌 주먹으로 옆구릴 주지름에 다가오는 선!...마저도 옮기려 애쓰니까요.어여삐 여길 건 여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주제넘지만..^^

파란놀 2015-01-13 19:17   좋아요 0 | URL
그 말투를 쓰든 말든
쓰는 사람 자유이지만,
잘못된 말투는 잘못된 말투일 뿐입니다.

작가가 잘못된 말투를 쓰든
공무원이 잘못된 정책을 펼치든
모두 그 사람들 자유이기 때문에 무어라 할 수 없으나,
다만 한 가지,
잘못은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지요.

[그장소] 2015-01-13 19:28   좋아요 0 | URL
틀리다.한것이 아니라는건 아시죠? 무조건 좋다..받아들이자..그러는 것도 아니고요.
오해는 마십시오.저도..문제가 많은 사람이라..고칠건 고쳐야한다는걸 압니다.
음..불쾌하게 하려 고 한 의도는 아니었는데..생각해보니..열심히 잘 해놓은 글에 제가 뭘..그런걸..하는걸로 보였을 수도 있었겠어요.아닙니다...
얼른 잘못했다고 말하고 길게 변명 말라는
..신호가..저..마음 바닥에서 올라옵니다.
예..^^ 한번만 너그럽게 넘어가주세요.
다음부턴 쓸데없는 말 안도록하겠습니다...
(정색하고 계실듯해..진땀흘리고 있는 중입니다) 화가 나신게 아니면 좋겠습니다. 부디..요!..

파란놀 2015-01-13 20:21   좋아요 0 | URL
아니에요. 저는 그저 수수하게 적은 댓글입니다 ^^

`잘못을 잘못이라 말한 뒤, 손질해서 쓰고 싶으면 손질하고, 손질하고 싶지 않으면 손질하지 마시되, 잘못이 잘못인 줄은 알기 바란다`고 늘 말하는데, 손질하지 않고 그대로 쓰겠노라 하면서 무엇이 `잘못`인 줄 헤아리지 않는 분이 아주 많아요.

빗대어 한 가지 이야기를 붙였습니다만, 말을 말답게 쓰지 못하면서, 정책을 정책답게 펴지 못하는 사람을 비판하는 일은 무엇일까 하고 늘 궁금하게 여겨요.

사람은 말만 깨끗하게 할 수 없고, 일만 옳게 할 수 없으며, 밥만 정갈하게 먹을 수 없습니다. 모두 똑같이 한동아리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잘못된 말투는 `익숙하게 굳은 버릇`이라면서 안 고치는 한국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이런 논리가 된다면, 악법도 그냥 법이니까, 독재자가 나와서 잘못된 정책을 마구 펼쳐도 `악법도 법`이니 그대로 따라야 하는 셈이 되지요.

말 한 마디는 내 생각과 마음을 짓는 바탕이기 때문에, 아무 말이나 함부로 할 수 없기 마련이에요. 밥 한 그릇은 내 몸에 기운을 불어넣어 내가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바탕이니, 아무 밥이나 마구 먹을 수 없기 마련입니다.

다 똑같은 흐름이고 얼거리인데, 한국에서는 `말` 이야기를 놓고는, 생각이 갇히거나 닫힌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그래서... 그저 그뿐이지요 ^^;;;

생각을 열어, 말을 곱게 다스릴 사람은 곱게 다스리고, 생각을 안 열려고 하면, 그냥 생각을 안 열고 살아야지, 다른 수가 없는 노릇이에요.

2015-01-13 2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1-14 0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장소] 2015-01-13 21:33   좋아요 0 | URL
웹으로 글을 써야겠다..싶어.잠시..비웁니다.!

[그장소] 2015-01-14 15:19   좋아요 0 | URL
중간에 오타를 지워야하나..이러고 있습니다.
어제는 저것이 안보였는데..말입니다.
뭐에 홀린것 같이 정신이 빠져있었지..그럽니다.
넋과 삶.살아있어야..넋이라도 있고 없고..할텐데..숨쉬고 있는데
이리 얼빠져있으니..큰일이구나..싶어지네요.
넋두리입니다.^^

파란놀 2015-01-14 19:31   좋아요 0 | URL
저도 곧잘 오탈자가 나오는데,
고칠 수 있으면 고쳐 놓으려 하지만,
오탈자란... 귀여운 티끌이라고 느껴요.

그리고, 저는 글을 읽을 적에 오탈자나 `잘못 쓴 말`은
그냥 다 지나쳐요.

글에 담은 이야기만 보려고 해요.
다만, 책을 읽다가 `너무 안 되겠구나 싶은 대목`은
꼭 눈에 들어와서 이런 대목만 손질하려고 하지요~

2015-01-14 2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 <전라도닷컴> 2015년 1월호에 실은 도서관일기입니다 ..

http://jeonlado.com/v3/

<전라도닷컴>은 이쁘장한 잡지입니다~


..


시골도서관 풀내음

― 시골에서 이웃 되기



  마을에 문을 걸어 잠그는 집은 거의 없거나 아예 없습니다. 시골에서 훔칠 것이라면 쌀이나 고구마나 배추쯤 될 텐데, 집집마다 이런 풀열매나 푸성귀는 다 있으니 굳이 훔칠 일이 없습니다. 마을사람끼리 오간다면 시골마을에서 ‘다른 사람 것을 바보스레 노리는 짓’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가용이나 짐차를 몰고 마을에 들어오는 낯선 사람이라든지, 사진기를 어깨에 건 사람이라든지, 종교를 퍼뜨리려는 사람이 얼씬거린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마을사람 사이에서만 ‘서리’입니다. 마을사람이 아니면 ‘서리’가 아닙니다. 관광객은 시골마을을 이웃으로 여길까요. 여행객은 시골마을을 동무로 삼을까요. 관광을 앞세워 시골숲을 파헤칩니다. 여행 뒤끝에는 쓰레기가 뒹굽니다. 도시에 생활·문화공간을 늘리면서 위해시설은 줄이려 하니, 커다란 발전소나 폐기물 처리장을 시골에 짓고 송전탑을 박습니다.


  한겨레는 예부터 ‘대문’을 두지 않았습니다. ‘大門’이라는 낱말부터 한국말이 아닙니다. 기와를 얹은 집에다가 담을 빙 두른 양반과 권력자와 부자 몇몇 사람 집에만 한자로 지은 낱말 ‘大門’을 두었습니다. 먼 옛날부터 한겨레 여느 마을 수수한 시골집에는 울타리조차 따로 없고 바깥 큰문이란 처음부터 없습니다. 한겨레 살림집에는 ‘미닫이’와 ‘여닫이’만 있습니다. 바람을 가리려고 돌울을 쌓기는 하되, 큰 숲짐승을 가리려고 탱자나무나 찔레나무로 울타리를 두르기는 하되, 이웃과 동무가 거리끼지 않고 드나드는 집이었어요.


  도시에서 집집마다 자물쇠를 단단히 걸어 잠그는 까닭은 ‘이웃’이 없기 때문입니다. 도시에서 집집마다 울타리를 높게 쌓고, 건물마다 문지기를 두는 까닭은 ‘동무’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웃이나 동무가 있더라도 이웃이 아니거나 동무가 아닌 훨씬 많은 사람이 무섭거나 두렵기 때문입니다.


  한겨울에 마을 샘터와 빨래터에 아이들과 함께 가서 물이끼를 막대솔로 걷어냅니다. 두 아이는 빨래터 담벼락에 걸터앉아서 “아버지, 힘내라!” 하고 북돋웁니다. 한겨울이니 옷을 적시면서 물놀이를 하지는 말라 했더니, 큰아이는 연필과 종이를 챙겨 그림놀이를 합니다. 마을 할배가 빨래터 옆을 지나가다가 “이 추운데 뭐 하요?” 하시면서 “이녁 집에 떡 갖다 놨으니 아(아이)들이랑 자쇼.” 하고 덧붙입니다. 한겨울이어도 한낮에는 볕이 포근해서 빨래터에 맨발로 들어가서 물이끼를 걷을 만합니다. 마을 할매는 우리가 빨래터에 있느라 우리 집에서 아뭇소리가 안 나더라도 대청마루에 떡을 놓고 가신 듯합니다. 이웃이니까 스스럼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서로 이웃이면서 마을에서 막내이니, 한겨울 빨래터 치우는 몫을 기쁘게 맡습니다.


  아이들과 노래를 부르면서 고샅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이들은 제삿떡을 먹고, 나는 ‘영국에 있는 이웃’이 선물로 보낸 책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포이에마,2014)를 읽습니다. 영국 브루더후프 공동체에서 아이와 어른이 함께 삶을 배우는 이야기를 담은 책이라고 합니다. “정부가 요구하는 학업 프로그램 탓에 아이들은 놀며 배울 기회를 점점 더 빼앗기고 교사들은 과도한 서류 작업에 짓눌리고 있다(37쪽).” 같은 글줄을 읽으며 밑줄을 살며시 긋습니다. 참말 아이들은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못 놉니다. 시골에 있는 학교라 하더라도 몇 군데 학교를 빼고는 ‘운동장에서 맨몸으로 뒹굴며 노는 아이’를 만나기는 어렵습니다. 그나마, 운동장에서 맨몸으로 뒹굴며 노는 아이는 손가락으로 꼽을 만합니다. 도시뿐 아니라 시골에서도 아이들은 스마트폰에 눈길과 마음이 빼앗겼습니다. 마을 어귀를 지나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를 다녀오다가 ‘면소재지 초등학생’이나 ‘읍내 중·고등학생’을 만나면, 열이면 아홉은 두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게임을 하거나 ‘쪽글 수다’를 떠느라 부산합니다.


  도시에 있는 아이들은 숲이 없어서 숲을 못 봅니다. 시골에 있는 아이들은 숲이 있어도 ‘보기 싫어’서 숲을 안 봅니다. 도시에 있는 아이들은 책으로 숲을 봅니다. 시골에 있는 아이들은 ‘지겨워’서 숲을 눈으로도 책으로도 안 보려 하면서 고개를 돌립니다. 도시에 있는 대학교나 공장이나 기업에 가지 않고, 시골에 뿌리를 내리면서 숲을 가꾸고 들을 돌보겠노라 하고 씩씩하게 말할 줄 아는 시골아이는 언제 만날 수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이제 시골에서 ‘농고’를 찾기 어려운 만큼, 시골 초·중·고등학교에서조차 시골아이한테 ‘시골일’을 제대로 가르치거나 보여주거나 알리는 일도 못 하겠구나 싶지만, ‘농작물 산업(농업)’이 아닌 ‘시골살이’와 ‘숲살이’를 꿈꿀 줄 아는 어린이와 푸름이는 왜 못 태어날까요.


  “아이들에게 평생 남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부모가 주는 사랑이다(92쪽).” 같은 글줄을 읽다가 밑줄을 천천히 긋고 책을 덮습니다. 학교에서는 아이한테 입시지식이 아닌 춤과 노래를 가르칠 수 있기를 빕니다. 집에서는 아이를 학교나 학원에 보낼 생각은 부디 그치고 웃음과 사랑으로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기를 빕니다.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우리가 물려주거나 물려받을 것은 오직 사랑일 테니까요.


  2015년이 되면 우리 집 큰아이는 여덟 살입니다. 여덟 살이 될 큰아이하고 새해에는 ‘우리 집 학교’를 열자고 생각합니다. 우리 집을 학교로 삼고, 우리가 꾸리는 사진책도서관을 ‘도서관 학교’로 삼으려 합니다. 오직 한 아이를 생각하는 학교입니다. 오직 한 아이를 생각해서 가르치면서 어버이가 함께 배우는 곳입니다. 곁님과 나는 어버이요 교사가 되면서, 곁님과 나는 아이한테서 이야기를 새롭게 배우는 동무요 학생이 됩니다.


  ‘우리 집 학교’ 이름을 셋이서 함께 지을 생각입니다. ‘우리 집 학교’ 이름을 지으면 간판도 셋이서 짤 생각입니다. 작은아이는 옆에서 이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볼 테지요. 밥과 옷과 집을 손수 다루고, 불과 나무와 흙과 풀을 몸소 건사하며, 하늘과 해와 별과 바람과 비를 오롯이 마주할 때에, 즐겁게 놀면서 배울 보금자리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집 학교’를 씩씩하게 가꾸면, 우리 집 네 사람이 시골마을 ‘젊은 이웃’이 되어 새로운 다른 이웃을 부를 수 있을 테지요. 4347.12.15.달.ㅎㄲㅅㄱ



* 도서관 나들이 오시려면 먼저 전화하고 찾아와 주셔요 *

* 사진책도서관(서재도서관)을 씩씩하게 잇도록 사랑스러운 손길을 보태 주셔요 *

☞ 어떻게 지킴이가 되는가 : 1평 지킴이나 평생 지킴이 되기

 - 1평 지킴이가 되려면 : 다달이 1만 원씩 돕거나, 해마다 10만 원씩 돕는다

 - 2평 지킴이가 되려면 : 다달이 2만 원씩 돕거나, 해마다 20만 원씩 돕는다

 - 평생 지킴이가 되려면 : 한꺼번에 200만 원을 돕거나, 더 크게 돕는다

 - 도서관 지킴이 되기 : 우체국 012625-02-025891 최종규

* 도서관 지킴이가 되신 분은 쪽글로 주소를 알려주셔요 (010.5341.7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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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돌리는 때



  국민학교를 다니며 방학을 맞이하면 집에서 하루 내내 보내기도 한다. 동네 동무들과 아침부터 저녁 늦도록 뛰놀기도 하지만, 어느 날은 함께 놀 동무가 아무도 없어서 그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집 바깥으로 한 발자국조차 안 나가기도 한다. 이런 날은 어머니 심부름조차 없기 일쑤이다. 이런 날에는 으레 어머니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엇을 하는지 가만히 지켜본다. 조그마한 집이었으니 어머니가 무엇을 하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지켜볼 수 있었고, 여느 날에도 어머니는 이렇게 하루를 보내겠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언제쯤 허리를 펴면서 비로소 숨을 돌리는가? 새벽 일찍 일어나서 낮 두어 시쯤 되면 비로소 숨을 돌리면서 “아이고, 이제 나도 커피 한 잔 마셔야지!” 하신다. 그러나 이마저도 아주 짧아, 이내 다시 일손을 잡으니, 이른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어머니가 숨을 돌리는 겨를은 거의 없다고 할 만하다. 베틀을 밟고 다듬잇돌을 두들기며 길쌈을 하고 절구를 빻던 지난날을 돌아본다면, 더욱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소한테 죽을 쑤어 주던 지난날을 헤아린다면, 이 땅에서 어머니라는 사람이 등허리를 펴거나 숨을 돌리는 겨를은 없다고 할 만하다.


  그런데, 숨을 돌릴 겨를이 없이 지내도 어머니는 늘 노래를 부른다. 대중노래이건 유행노래이건 노래를 부른다. 이웃 아주머니도 그렇다. 하루 내내 숨을 돌릴 겨를이 없이 지내도 라디오에서 흐르는 노래를 함께 부르면서 일손을 잡는다. 옛사람은 스스로 노래를 지어서 불렀고, 오늘 이곳에서 사는 사람은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 흐르는 노래를 함께 부른다. 아무튼, 노래를 부르기에 일을 할 수 있고, 노래를 부르면서 웃을 수 있다. 4348.1.13.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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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차돌 같은 아이들



  한겨울에도 아이들은 맨발로 놀기를 즐깁니다. 맨발로 얼음장을 밟고 싶습니다. 맨손을 찬물에 담가 놀고 싶습니다. 한겨울에 맨발과 맨손으로 놀다가 어느새 아이들은 손발이 꽁꽁 업니다. 빨갛고 차갑지요. 그런데 이런 손발로도 놀이를 그치지 않습니다.


  아주 먼 옛날부터 아이들은 때와 철을 가리지 않고 놉니다. 마냥 놉니다. 더워도 놀고 추워도 놀아요. 더운 철에는 온몸을 땀으로 적시면서 놉니다. 추운 철에는 온몸이 꽁꽁 얼어도 놉니다. 어른이 된 사람도 어릴 적에는 이렇게 놀았고, 오늘날 아이도 이렇게 놀며, 앞으로 태어날 새로운 아이도 이렇게 놀리라 생각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아이들은 온몸으로 바람과 햇볕과 물과 바람과 흙과 풀을 만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어른이 지식이나 말로 알려주어서 알거나 배우기보다는, 아이가 스스로 몸을 움직여서 찬바람도 쐬고 땡볕도 받으면서 새롭게 배우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이들은 언제나 놀아야 합니다. 추운 날에는 콧물이 얼어붙도록 놀고, 더운 날에는 땀에 젖은 옷을 하루에도 여러 벌 갈아입을 만큼 놀아야 합니다.


  전북 익산에서 조용히 삶을 짓는 문영이 할머님이 쓴 산문책 《내 뜰 가득 숨탄것들》(지식산업사,2014)을 읽습니다. 흰머리 할머니가 되어 지난날을 찬찬히 돌이키면서 쓴 글이 정갈합니다. 할머니는 “신접살이 어느 해였던가 그 집장 맛을 못 잊어 메주 한 덩이로 담그기 쉬운 찌엄장을 소꿉놀이하듯 담가 놓고, 고만고만한 아이들 손 잡고 봄마중 나물 찾으러 들에 나갔다. 옆집 아주머니는 우리 아이들은 고뿔 한 번 앓지 않는데서 ‘차돌’이라 불렀다(80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문득 그리운 낱말 ‘차돌’입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요즈음에는 아이들을 가리켜 ‘차돌’이라 부르는 어른은 매우 드뭅니다. 아이들한테 ‘장군’이나 ‘공주’라고는 말해도, ‘차돌’이라 말하는 어른은 찾아볼 길이 없어요.


  도시이든 시골이든 길바닥에 구르는 돌멩이 하나 보기 어려운 탓일까요. 이제는 흙으로 된 골목이나 고샅이 없어서, 그저 시멘트나 아스팔트만 있기 때문일까요. 아이들이 어디에서나 돌을 주워서 돌치기(비석치기)도 하고, 땅바닥에 돌멩이로 금을 긋도 온갖 놀이를 하던 즐거움이 사라졌기 때문일까요. 이쁘장한 돌은 주머니에 넣고 하루 내내 기쁘게 웃는 아이들이 사라졌기 때문일까요. 바닷가에 가야 비로소 조약돌을 구경할 수 있는 메마른 도시 문명 사회가 되었기 때문일까요.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수수합니다. 할머니는 이런 학문이나 저런 이론을 들먹이지 않습니다. 할머니는 오직 이녁 삶을 헤아리면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나이든 어른이 젊은이와 어린이한테 이녁 슬기를 물려주고 싶은 마음이 글줄마다 알뜰합니다. “어느 해 산기슭에 박 한 붓을 놓고 늦가을에 가 보니 풀한테 잡혀 겨우 박 한 덩이가 열린 채 덩굴까지 말랐다. 그 박을 삶아 보니 예전에 보던 박처럼 결이 곱고 단단했다. ‘아하! 국수나무가 청정지역 지표수이듯, 바가지가 맑은 공기를 좋아하나 보다!’ 그래서 요즘 박은 겉은 고운데 속이 거칠어, 누구를 선뜻 부를 수가 없어 몇 해째 박 농사가 시들해졌다(91쪽).”


  할머니 이야기에 나오는 ‘박 한 붓’을 가만히 떠올립니다. 아주 어릴 적에 이 말마디를 얼핏 들은 듯합니다. 그렇지만 한국말사전에는 ‘붓’을 가리키는 낱말이 없습니다. 글씨를 쓰는 연장을 가리키는 붓은 있으나, 박씨를 땅에 묻는 일을 가리키는 붓은 안 나옵니다. ‘박 한 붓’을 아는 할머니가 흙으로 돌아가면, 앞으로 이런 말을 쓰는 사람도 사라질 테고, 이러한 한국말이 있는지 떠올릴 수 있는 사람도 없겠구나 싶습니다. 무엇보다 박씨를 심어서 바가지를 얻을 수 있는 사람도 사라질 테지요. 바가지를 얻고 싶어서 박씨를 심을 사람도 사라질 테지요. 공장에서 찍는 플라스틱 조각만 바가지인 줄 아는 사람만 있을 테지요.


  할머니 이야기는 수수하면서 투박합니다. 흔하면서 너른 이야기입니다. 다만, 오늘날에는 더 흔하지 않은 이야기요, 이제는 그리 너르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손수 들이나 숲에 가서 꽃다지를 캐서 나물로 삼는 사람은 손가락에 꼽을 만큼 아주 드물기 때문입니다. “꽃다지가 노래에만 있는 나물이 된 것처럼 이제 엉겅퀴마저 자취를 감추는가 싶어 애답다. 독일은 들에 난 풀 한 포기도 마음대로 손대지 못하도록 법으로 막는다고 한다. 우리 나라도 보호할 나무와 풀을 정하고 지킬 일이라고 생각한다(175쪽).” 독일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는 갯벌도 냇물도 바다도 땅도 숲도 나무도 모두 살뜰히 건사하려고 몹시 애씁니다. 이와 달리 한국에서는 ‘일자리 만들기’와 ‘경제개발’만 된다면 무엇이든 모조리 망가뜨리거나 무너뜨립니다. 4대강사업 한 가지를 들자면, 이런 뻘짓을 하느라 수십 조 원에 이르는 돈을 퍼부었는데, 이를 다시 바로잡자면 또 수십 조 원에 이르는 돈을 퍼부을 테지요. 오직 토목공사에만 이 같은 돈을 퍼붓습니다.


  돈을 바라보니까 오직 돈만 따지는 셈일 텐데, 돈을 바라본대서 돈이 우리한테 오지 않습니다. 삶을 알차게 가꾸면서 곱게 일굴 때에 비로소 삶이 살아나면서 돈은 돈대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공장을 잔뜩 지어서 다른 나라에 수십억 원어치 상품을 내다 팔면 언뜻 보기에는 경제성장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공장을 짓느라 숲과 들을 망가뜨리고, 공장을 돌리느라 매연과 폐수가 쏟아지며, 공장으로 원재료를 실어나르고 공장에서 물건을 옮기느라 찻길을 닦고 비행기를 띄울 테니, 다시금 들과 숲이 망가지면서 매연과 폐수가 쏟아집니다. 수십억 원어치 상품을 파는 동안 우리가 잃거나 잊거나 무너지는 삶터는 돈으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와 달리, 다른 나라에 아무것도 팔지 않으면서 모든 밥과 옷과 집을 손수 지어서 누릴 때를 생각해 봅니다. 이때에는 경제성장은 없으나 수입도 수출도 없을 뿐 아니라, 무역에 기댈 까닭이 없는데다가, 맑은 물과 바람을 늘 마십니다. 몸이 아플 일이 없고, 우리 삶터는 아주 깨끗합니다. 주머니에 들어오는 돈은 없으나 튼튼한 몸과 아름다운 마음이 되어 언제나 즐겁지요. 튼튼한 몸과 아름다운 마음에서는 노래가 절로 샘솟고, 노래가 샘솟는 삶에서는 이야기를 기쁘게 지어요. 이 이야기는 문학이 될 수 있고 춤이나 연극이나 영화가 될 수 있습니다.


  공장을 지어 경제성장을 하고 토목사업으로 일자리를 만든다고 할 적에는 아무런 문학도 문화도 삶도 사랑도 꿈도 없습니다. 그저 돈만 있습니다. 돈만 있는 나라에서는 매캐한 바람과 지저분한 물이 흐릅니다. 아이도 어른도 몸이 망가질 테고 병원에 기대야 할 테며 삶에서 웃음과 노래가 사그라질 테지요.


  삶을 짓는 어른이 차돌 같은 아이를 낳아서 돌봅니다. 삶을 사랑으로 가꾸는 어른이 차돌 같은 아이를 키우면서 웃습니다. 삶을 꿈으로 일구는 어른이 차돌 같은 아이한테 맑고 밝은 이야기를 물려줍니다. 4348.1.13.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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