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11 뭇느낌



  한국사람이 쓰는 말은 한국이라는 터에서 아주 오랫동안 이어온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떤 삶을 어떤 넋으로 마주하면서 어떤 말로 갈무리햇는지 읽을 수 있습니다.


  토박이말을 살려서 써야 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한국말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적에, 말과 넋과 삶이 얽힌 실타래를 스스로 풀면서, 생각을 마음에 씨앗으로 심는 얼거리를 손수 깨닫는다는 뜻입니다.


  정치권력은 으레 종교와 군대 두 가지를 일으킵니다. 종교는 예배당이라는 모습으로도 나타나지만 ‘학교(의무교육)’라는 모습으로도 나타납니다. 오늘날 현대문명에서는 종교가 ‘예배당’보다는 ‘학교’라는 모습으로 불거지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쓰는 교과서는 성경과 같고, 학교에서 일하는 교사는 성직자(목사, 신부, 스님)와 같기 일쑤입니다. ‘예배당·성경·성직자’는 ‘학교·교과서·교사’라는 모습으로 살짝 겉만 꾸몄을 뿐입니다.


  정치권력은 군대로 전쟁을 부추깁니다. 정치권력이 종교(학교)와 함께 군대를 두는 까닭은, 사람들을 바보로 만든 뒤 허수아비로 쓸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종교(학교)’는 마음을 가두는 쇠사슬입니다. 군대는 몸을 가두는 쇠사슬입니다. 마음이 갇힌 종(노예)이 되고 만 사람들은 몸도 갇히기 마련이니, 나라가 시키는 대로 ‘충성 맹세’를 하면서 목숨을 싸움터에서 버립니다. 이를 마치 ‘희생’이나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덧씌우지만, 우리 목숨은 싸움터에서 사라지라고 있지 않습니다.


  정치권력이 종교와 군대로 이웃나라를 잡아먹은 뒤에 무엇을 하는지 생각해 보셔요. 맨 먼저 하는 일이 ‘말’ 바꾸기입니다. 정치권력이 거느린 ‘말’로 이웃나라 사람들이 ‘말’을 바꾸어서 하도록 억누릅니다. 지구별 모든 정치권력은 이웃나라를 식민지(종)로 억누르면서 무엇보다 ‘말’부터 빼앗습니다.


  한국사람은 아주 오랫동안 시골(숲)에서 삶을 손수 지으면서 가꾼 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많이 다쳤고, 개화기와 식민지를 지나면서 와르르 무너졌고, 해방과 군사독재를 가로지르는 사이 그만 목숨을 거의 잃었다고 할 만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사람 가운데 ‘한국말’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러다 보니 ‘뭇’이라는 낱말은 아주 잊혀진 말이 됩니다. 우리 모두 ‘잊혀진 하느님’이듯이 ‘뭇’이라는 낱말은 ‘잊혀진 말’입니다.



 뭇짐승 . 뭇매 . 뭇발길 . 뭇별 . 뭇사람 . 뭇눈길(뭇시선)



  한국말사전을 뒤적이면 이럭저럭 몇 가지 ‘뭇’이 겨우 살아남은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참말 겨우 살아남았지요. 오늘날 한국사람이 스스로 한국말을 잊었듯이, 한국말은 간당간당 가까스로 목숨줄만 잇습니다.


  ‘뭇’은 “매우 많은”이나 “모든”을 가리킵니다. 한자에서 ‘萬’이라는 낱말이 “숫자 10000”을 가리키면서 “매우 많은”이나 “모든”을 가리키는 얼거리하고 같습니다. 한국말 ‘뭇’은 “매우 많은”과 “모든”을 함께 가리킵니다.


  그러면, ‘뭇느낌’이란 무엇일까요? 오늘날 쓰는 한자말로 다시 옮긴다면, “모든 감정”입니다. “소중한 경험”이라 할 만한 “모든 감정과 가치판단”이 바로 한국말로 ‘뭇느낌’입니다.


  우리한테 좋거나 싫거나 밉거나 반갑거나 옳거나 그르거나 맞거나 틀리거나 예쁘거나 지저분하거나 멋지거나 좀스럽거나 이런저런 ‘감정’이나 ‘가치판단’ 같은 느낌이 있다면, 이는 우리 스스로 ‘뭇느낌’에 휩싸인 나날이라는 뜻입니다. 뭇느낌에 휩싸인 나날은 나쁘지도 좋지도 않습니다. 말 그대로 ‘뜻깊은 하루(소중한 경험)’입니다. 뜻깊은 하루를 잘 살피면서, 이를 장작불로 삼을 수 있다면, 우리는 모두 불꽃을 타고 홀가분하게 하늘을 가를 수 있습니다. 뭇느낌을 불태울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홀가분한 마음과 몸이 되어 우리 꿈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4348.2.1.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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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지붕 고드름 책읽기



  함석지붕에 고드름이 맺힌다. 새마을운동 바로 뒤에는 이런 고드름을 아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먹었을 테고, 요즈음도 이런 고드름을 거침없이 먹을 아이들이 많으리라 본다. 아이들은 그냥 재미 삼아서 먹는다. 이제 웬만한 어른들은 함석지붕이 슬레트지붕이요, 슬레트지붕이 석면지붕인 줄 안다.


  새마을운동이랍시고 풀짚지붕을 석면지붕으로 갈아치우도록 내몬 군사독재정권은 저희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안 밝힐 뿐 아니라, 뒤에서 몰래 석면지붕을 나랏돈 들여서 조금씩 없앤다. 한꺼번에 없애려 들면 모든 사람이 다 알아채니까, 한꺼번에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석면지붕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시골사람이 아주 많을 뿐 아니라, 웬만한 지식인이나 인문학자조차 석면지붕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르기 일쑤이다.


  고드름은 어느 지붕에 열려도 참말 수정과 같다. ‘수정 고드름’이라는 이름은 괜한 말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 어떤 ‘수정’을 얻고, 어떤 고드름을 만나는가. 그야말로 해말간 고드름을 만나는가, 아니면 고드름조차 못 만나는가, 아니면 아이들이 만지거나 먹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 고드름만 둘레에 있는가. 4348.2.3.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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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와 크레파스



  종이와 크레파스면 넉넉하다. 종이와 연필이어도 된다. 종이가 없으면 흙바닥에 나뭇가지여도 즐겁다. 우리 마음속에 고운 생각을 그리듯이, 종이에 너른 꿈을 그린다. 짓고 싶은 집을 그리고, 살고 싶은 마을을 그린다. 함께 웃고 노래하는 삶을 그린다. 같이 뛰놀고 어우러지는 하루를 그린다. 기쁜 놀이를 그리고, 파란 하늘을 그린다. 우리가 그림으로 그리고, 이 그림을 가슴에 담으니 삶이 된다. 4348.2.3.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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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량한 말 바로잡기

 (818) 거론할 이유


스크린쿼터는 GATT는 물론 그 후신인 WTO에서도 인정하고 있는 ‘문화적 예외 조항’으로 볼 때, 현재로선 어떤 ‘경제 논리’로도 축소나 폐지를 거론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김규항-비급 좌파》(야간비행,2001) 89쪽


 축소나 폐지를 거론할 이유가 없기 때문

→ 줄이거나 없애자고 말할 까닭이 없기 때문

→ 줄이거나 없애자는 말을 들먹일 까닭이 없기 때문

→ 줄이거나 없애자고 할 까닭이 없기 때문

 …



  한자말 ‘거론(擧論)’은 “어떤 사항을 논제로 삼아 제기하거나 논의함”을 뜻한다고 하는데, ‘논제(論題)’는 ‘이야깃감’을 가리키고, ‘제기(提起)’는 ‘내어놓음’을 가리키며, ‘논의(論議)’는 ‘이야기함’을 가리킵니다. 말풀이를 여러 가지 한자말로 붙인 ‘거론’이지만, 말뜻을 하나하나 따지면, “이야깃감을 내놓아 이야기를 나눔”을 나타낼 뿐입니다.


  보기글을 돌아봅니다. 어떤 이야깃감을 툭 던지듯이 내놓는다고 한다면, ‘들먹이다’나 ‘들추다’ 같은 낱말을 쓸 수 있습니다. 일본사람이 한자말을 빌어서 쓰는 “거론할 이유” 같은 말투가 아니어도 한국사람은 한국말로 알맞거나 슬기롭게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4337.8.4.물/4348.2.3.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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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쿼터는 GATT를 비롯하여, 나중에 생긴 WTO에서도 받아들이는 ‘문화 예외 조항’으로 볼 때, 아직까지 어떤 ‘경제 논리’로도 줄이거나 없애자고 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는 물론(勿論)”은 “-를 비롯하여”로 손보고, “그 후신(後身)인”은 “나중에 생긴”으로 손봅니다. “인정(認定)하고 있는”는 “받아들이는”으로 손질하고, “문화적(-的) 예외 조항”은 “문화 예외 조항”으로 손질하며, ‘현재(現在)로선’은 ‘아직까지’로 손질합니다. “축소(縮小)나 폐지(廢止)를”은 “줄이거나 없애자고”로 다듬고, ‘이유(理由)’는 ‘까닭’으로 다듬습니다.


..



 알량한 말 바로잡기

 (811) 지속가능하다


하지만 이것이 지속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아룬다티 로이/박혜영 옮김-9월이여 오라》(녹색평론사,2004) 8쪽


 이것이 지속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 이 일이 오래갈 수 없는 줄

→ 이 일이 오래 이어질 수 없는 줄

→ 이 일이 늘 이어지지 않는 줄

→ 이 일이 한결같을 수 없는 줄

 …



  2000년대로 접어든 어느 무렵부터 ‘지속가능한 미래’라든지 ‘지속가능’이라는 말마디가 널리 퍼집니다. 마치 유행말 같습니다. 곳곳에서 이런 말을 씁니다. 마치 지난날에는 ‘오래 이어갈 삶’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듯한 흐름입니다.


  한자말 ‘지속(持續)’은 “어떤 상태가 오래 계속됨. 또는 어떤 상태를 오래 계속함”을 가리키고, ‘가능(可能)’은 “할 수 있거나 될 수 있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지속가능’이란 “오래 할 수 있음”이나 “오래갈 수 있음”을 나타내는 셈입니다.


 지속가능한 미래

→ 오래갈 앞날

→ 오래 이어질 앞날

→ 한결같이 흐를 앞날

→ 한결같은 앞날


  ‘오래가다’는 한 낱말입니다. ‘오래하다’는 아직 한 낱말이 아닙니다. 앞으로 ‘오래하다’도 한 낱말로 삼아서 쓸 만하리라 봅니다.


  한자말을 끌어들이는 말투가 잘못이나 말썽이라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다만, 이 땅에서 아주 오랫동안 살던 옛사람이 오늘 우리한테 물려준 ‘오래가다’라는 낱말이 있다는 대목을 가만히 돌아봅니다. 오래가는 삶을 생각합니다. 오래가는 꿈을 헤아립니다. 오래가는 사랑과 오래가는 숨결을 곱씹습니다. 오래가는 말이란 무엇일까요. 오래가는 글이란 어떤 글일까요. 4337.7.21.물/4348.2.3.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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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일이 오래갈 수 없는 줄 우리는 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일이 한결같을 수 없는 줄 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일이 늘 이어지지 않는 줄 안다


‘하지만’은 ‘그러나’나 ‘그렇지만’이나 ‘그런데’로 바로잡습니다. ‘이것이’는 ‘이 일이’로 손질하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은 “-하지 않는 줄”로 손질하며, “알고 있다”는 “안다”로 손질합니다. ‘우리는’을 글월 뒤쪽에 넣을 수도 있지만, 이음씨 바로 다음 자리에 넣어야 글월이 매끄럽습니다.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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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량한 말 바로잡기

 (821) 자타가 공인하다


수업중에 수다스러운 건 자타가 공인하는 바입니다

《스나가 시게오/외문기획실 옮김-아들아 너는 세상 모든 것을 시로 노래하는 사람이 되어라》(가서원,1988) 79쪽


 자타가 공인하는 바입니다

→ 다 아는 바입니다

→ 모두 아는 바입니다

→ 누구나 아는 바입니다

→ 우리 모두 아는 바입니다

→ 모든 사람이 아는 바입니다

 …



  한자말 ‘자타(自他)’는 “자기와 남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라 합니다. 한국말사전은 이처럼 풀이합니다. 그러나 ‘자타’는 “자기와 남”이 아닙니다. “나와 남”이나 “나와 너”라고 풀이해야 올바릅니다. 한자말 ‘공인(公認)’은 “국가나 공공 단체 또는 사회단체 등이 어느 행위나 물건에 대하여 인정함”을 뜻한다고 합니다. “공공에서 인정함”이 ‘공인’인 셈인데, 한자말 ‘인정(認定)’은 “확실히 그렇다고 여김”을 뜻하고, ‘공공(公共)’은 “국가나 사회의 구성원에게 두루 관계되는 것”을 뜻한다고 해요. 그러니까 ‘공인’은 “여러 사람이 두루 그렇다고 여김”을 가리키는 셈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말버릇처럼 굳은 ‘자타가 공인하다’라 할 텐데, 이 말마디는 “너와 내가 두루 그렇다고 여기다”를 나타낸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그렇다고 여기다”라든지 “모든 사람이 그렇다고 여기다”를 나타낸다고 할 테지요.


  너와 나를 아우르는 ‘우리’요, 너와 나를 두루 헤아리는 ‘모두’요 ‘다’이며 ‘모두 다’이고 ‘우리 모두’입니다. 4337.8.10.불/4348.2.3.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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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할 적에 수다스러운 줄 우리 모두 압니다


‘수업중(-中)에’는 ‘수업할 적에’로 손보고, “수다스러운 건”은 “수다스러운 줄”이나 “수다스러운 모습은”으로 손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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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2) 좋은 질문을 하다


“엄마는 왜 세 발로 걸어 다니게 되었어요?” “그래, 좋은 질문을 했다.” 복실이는 눈을 지그시 감고 눈물겹고 서러웠던 지난날의 슬픈 이야기를 해님이, 달님이, 별님이 세 강아지들에게 들려주었다

《이준연-세발강아지》(창비,1984) 193쪽


 그래, 좋은 질문을 했다

→ 그래, 잘 물어 봤다

→ 그래, 많이 궁금했지

→ 그래, 너희도 궁금하지

→ 그래, 너희가 물을 줄 알았다

→ 그래, 언젠가 물을 줄 알았다

→ 그래, 왜 안 묻나 했다

 …



  궁금하니까 묻습니다. 모르기에 묻습니다. 알고 싶어서 묻습니다. 묻는 말에는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궁금함을 풀면서 새롭게 알고 싶어서 묻습니다.


  할아버지나 할머니한테 여쭐 적에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아이한테 “좋은 질문을 했구나” 하고 대꾸할는지 궁금합니다. ‘질문(質問)’이라는 한자말부터 한국사람이 쓴 지 얼마 안 되었고, 이런 말마디는 학교나 사회나 도시에서나 씁니다. 한국사람은 먼 옛날부터 ‘묻다’와 ‘여쭈다(여쭙다)’ 두 가지 낱말만 썼습니다. 여느 자리에 수수하게 쓰는 말이 ‘묻다’요, 손아랫사람이 손윗사람한테 쓰는 말이 ‘여쭈다(여쭙다)’입니다.


  한자말 ‘질문’은 “알고자 하는 바를 얻기 위해 물음”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한국말은 ‘묻다’일 뿐입니다. 더 헤아린다면, “좋은 물음을 했다”라든지 “좋은 여쭘을 했다”처럼 말하는 한국사람은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한국말 ‘묻다’이든 한자말 ‘질문’이든, 이러한 낱말 앞에 ‘좋다·나쁘다’ 같은 뭇느낌을 붙이지 않습니다. 4334.10.2.불/4348.2.3.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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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왜 세 발로 걸어 다니게 되었어요?” “그래, 잘 물어 봤다.” 복실이는 눈을 지그시 감고 눈물겹고 서러웠던 지난 슬픈 이야기를 해님이, 달님이, 별님이 세 강아지한테 들려주었다


‘엄마’는 ‘어머니’로 바로잡습니다. “지난날의 슬픈 이야기”는 “지난날 슬픈 이야기”나 “지난 슬픈 이야기”로 손봅니다. “세 강아지들에게”는 그대로 두어도 될 테지만 “세 강아지한테”로 손질하면 한결 낫습니다.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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