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이와 함께 촛불보기



  오늘부터 두 아이와 함께 촛불보기를 한다. 며칠 앞서부터 큰아이하고는 먼저 촛불보기를 했다. 지난주까지는 혼자 촛불보기를 했는데 아이들하고도 함께 해야겠다고 느껴서 마땅한 때를 헤아리다가, 낮에 한 차례 저녁에 다시 한 차례 하기로 한다. 낮에는 작은아이가 낮잠을 잘 무렵을 골라서 한다. 작은아이는 자전거마실을 하면 수레에서 잠드는데, 수레에서 잠들면 꼭 집에 닿을 무렵 다시 깨니까 낮잠이 모자라다. 저녁에 촛불보기를 다시 하면, 이때에는 큰아이가 사르르 잠이 든다. 오늘 낮에 촛불보기를 하니, 큰아이는 끝까지 야무지게 잘 하고, 작은아이는 살몃살몃 잠들 듯하다가 몸을 나한테 맡기고 깊이 잠든다. 잠자리에서 자장노래를 부르는 하루는 이제 끝이 나는구나. 이제는 잠자리에 앞서 촛불을 보면서 생각을 물로 녹이도록 하고, 잠자리에 누워서는 하늘에 있는 별을 몸으로 받아들이도록 그림을 그리자. 고요하면서 차분하게 아이들과 누리는 하루는 얼마든지 즐겁게 지을 수 있다. 4348.2.25.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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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노래 60. 숲동무



꽃 풀 나무가 숲에서 오고

벌레 새 짐승도 숲에서 오면

다들 숲동무네.

사람도 숲에서 왔을까.

숲은 어디에서 왔을까.

누가 알까 누가 알려줄까.

내 마음에서 자란 숨결이

숲을 지었을까.

바람이 일렁이는 숲

한복판에 누워 저 먼

하늘빛을 나뭇잎 사이로

올려다보면서 생각한다.



2015.1.7.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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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도 익혀야지

 (384) -께


예전에 제가 한국에 오기 전, 엄마 혼자 한국에 와서 일을 하고 계실 때 엄마께 편지를 보냈던 일이 생각나요

《박채란-국경 없는 마을》(서해문집,2004) 127쪽


 엄마께 편지를 보냈던

→ 어머니한테 편지를 보냈던

→ 엄마한테 편지를 보냈던

→ 어머니께 편지를 보냈던

 …



  아이가 어른을 높이면서 ‘-한테/-에게’가 아닌 ‘-께’를 붙일 수 있습니다. 어른과 어른 사이에서도 맞은편 어른을 높이려고 ‘-께’를 붙일 수 있어요. 그런데, ‘엄마께’ 같은 말마디는 올바르지 않습니다. 한집 사람일 때에는 어머니는 그냥 ‘어머니’이고, 아버지도 그냥 ‘아버지’입니다. 한집 사람한테는 따로 ‘님’을 붙이지 않아요. 내 동무네 어머니라면, 이러할 때에는 ‘어머님’이나 ‘아버님’처럼 씁니다. 그래서, ‘내 어머니’한테 편지를 쓸 적에 “어머니께 편지를 보냈던”처럼 써도 말법으로는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말삶으로 헤아리면 알맞지 않아요. 어머니와 아버지가 받도록 보내는 편지라면 “어머니한테 편지를 보냈던”처럼 적을 때에 가장 똑바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나이가 스물이나 서른이 되어도 ‘엄마’라는 낱말을 내려놓지 못해요. 나이가 마흔이나 쉰이 되어도 마치 아기처럼 굴면서 ‘엄마·아빠’라는 말을 어수룩하게 씁니다. 이런 말을 듣는 어버이가 이녁 아이한테 ‘너는 이제 아기가 아니니 말을 제대로 써야 한다’ 하고 알려주어야 할 텐데, 오늘날 어버이가 아이한테 말을 제대로 가르치거나 물려주지 못하다 보니 “엄마한테 편지를 보냈던”처럼 말하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가만히 보면, 학교에서는 흔히 “선생님께 드려라”라든지 “부모님께 갖다 드려라”처럼 말합니다. 높이려는 뜻에서 ‘-께’를 붙일 만합니다. 틀린 말씨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학교에서도 ‘-한테/-에게’를 써야 알맞습니다. ‘-께’는 여느 때에 좀처럼 가까이하기 어려운 사람을 높이려고 할 때에 붙입니다. 여느 때에 늘 가까이 어울리거나 함께 있는 사람이라면 웃어른이라 하더라도 예부터 흔히 ‘-한테’만 붙입니다. 여느 때에 늘 가까이 어울리거나 함께 있는 사람이지만, 쉽게 꺼내기 어려운 말을 꺼내려 할 적에 비로소 ‘-께’를 붙이곤 합니다. 4338.1.4.불/4348.2.25.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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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제가 한국에 오기 앞서, 어머니 혼자 한국에 와서 일을 하실 때 어머니한테 편지를 보냈던 일이 생각나요


“오기 전(前)에”는 “오기 앞서”로 손보고, “일을 하고 계실”은 “일을 하실”이나 “일하실”로 손봅니다. ‘엄마’는 ‘어머니’로 바로잡습니다. ‘엄마’는 사람이 아기일 적에만 쓰는 낱말입니다. 편지를 쓸 만한 나이라면 ‘어머니’로 써야 올바릅니다.


..



 우리 말도 익혀야지

 (386) -에로


겨울은 가랑잎만 날리는 것인가! 결핵으로 지친 인간과 더불어 어디라도 좋으니 아주 먼 먼 나라에로 날려 주구려

《권정생-코쟁이네 세퍼트와 판돌이네 똥개》(물레,1987) 33쪽


 먼 나라에로 날려 주구려

→ 먼 나라에 날려 주구려

→ 먼 나라로 날려 주구려

→ 먼 나라까지 날려 주구려

 …



  ‘-에로’라는 토씨는 한국말에 없습니다. 그러나 일본말에는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에 + -로’ 꼴로 쓰는 ‘-에로’는 일본 말투인 셈입니다.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은 ‘-에로’를 올림말로 다루면서 “격을 나타내는 대상과 관련된 말에 붙는 조사. 격 조사 ‘에’가 위치를 나타낼 때 거기에 방향성을 주기 위하여 부사격 조사 ‘로’와 결합한 것이다”처럼 풀이하지만, 이렇게 올림말로 다루어 풀이할 까닭이 없습니다. 한국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국말 토씨 ‘-에’나 ‘-로’는 저마다 “위치 + 방향성”을 함께 나타낼 수 있습니다. 두 가지 토씨는 하나만 따로 쓰더라도 “위치 + 방향성”을 얼마든지 나타내요. 이는 한국말사전에서 ‘-에’나 ‘-로’를 풀이한 이야기를 살펴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보기글에서 “먼 나라에 날려”나 “먼 나라로 날려”처럼 적어 보아도 알 수 있어요.


  토씨 ‘-에’와 ‘-로’를 외따로 쓸 적에 뜻이나 느낌이 넓지 않았다면, 한국사람은 먼 옛날부터 두 가지 토씨를 붙여서 썼을 테지요. 그러나, 한국사람은 아스라이 먼 옛날부터 두 토씨를 따로 썼습니다. 일본말에 길들거나 젖어들어 엉뚱한 토씨를 쓰는 일은 이제 말끔히 털어야겠습니다. 4338.1.15.흙/4348.2.25.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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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가랑잎만 날리는가! 결핵으로 지친 사람과 더불어 어디라도 좋으니 아주 먼 먼 나라로 날려 주구려


“날리는 것인가”는 “날리는가”로 다듬고, ‘인간(人間)’은 ‘사람’으로 다듬습니다.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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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아이 127. 네발걷기 (14.12.8.)



  시골돌이가 두 손에 신을 끼고는 뒤꼍으로 간다. 뒤꼍으로 가서 네발걷기를 한다. 살짝 비알진 길을 척척 오르듯이 걷다가, 이 비알진 길을 다시 척척 내려온다. 두 손을 발로 삼아 네 발로 걸으니 어떤 느낌이니? 네 발이 되어 이 땅을 밟으니 어떤 마음이 되니? 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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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는 눈빛 130. 내가 나를 볼 적에



  사진을 찍다 보면,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은 사진에 나오지 않고, 사진기 앞에 선 사람만 사진에 나옵니다. 여러 사람이 어느 곳에 나들이를 가서 사진을 찍는다고 하면, ‘찍는 사람’은 늘 찍고, ‘찍히는 사람’은 늘 찍힙니다. 이리하여, 여러 사람 가운데 ‘찍새(사진가)’ 한 사람만 사진에 없기도 합니다. 이때에 누군가 한 사람이 ‘너도 함께 찍어야지. 너는 한 장도 안 나왔잖아.’ 하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런 일이 흔할 텐데, 이런 말을 듣는 ‘찍새(찍는 사람)’는 ‘난 괜찮아. 너희들 많이 찍어.’ 하고 말하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이 둘레를 지나가는 사람을 살펴서, 누군가 마땅해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사진기를 맡겨서 다 함께 찍도록 하기도 합니다.


  자, 그러면 생각해 봅니다. ‘찍는 사람’은 사진에 한 번도 안 찍혔을까요? ‘찍히는 사람’만 늘 사진에 찍혔을까요?


  사진을 보면 ‘사진을 찍는(찍은) 사람’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진에는 ‘사진을 찍는(찍은) 사람’ 마음이 드러납니다. 사진 한 장은 ‘사진을 찍는(찍은) 사람 얼굴이요 모습이자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진 한 장에 ‘사진을 찍는(찍은) 사람 겉모습과 차림새’가 담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진에는 이 사진을 찍는(찍은) 사람이 어떤 숨결이고 생각이며 마음인가 하는 대목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이리하여, 어디 나들이를 가서 여럿이 사진을 찍을 적에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은 이녁이 사진에 함께 찍히지 않는다고 해서 서운하거나 쓸쓸하지 않습니다.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은 모든 사진에 이녁 숨결과 손길과 마음이 깃들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이녁이 찍은 사진에 드러나는 모습을 보면서 ‘이때에는 무엇을 했고, 어디에 있었으며, 언제였는가를 모두 압니다. 사진에 나오지 않은 다른 사람들 모습과 몸짓과 이야기까지 떠올립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진 한 장을 찍으면서 ‘사진 한 장’에 갈무리하는 모습뿐 아니라 둘레 모습과 이야기와 삶을 함께 마음으로 담습니다.


  내가 나를 볼 적에 사진을 찍습니다. 내가 어떤 마음인가 하고 가만히 바라볼 수 있을 때에 사진을 찍습니다. 여럿이 함께 나들이를 가서 기쁘고 설렌다면, 기쁨과 설렘이 사진에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혼자서 어느 마을을 찾아가서 천천히 걷거나 자전거를 달리면서 둘러보면서 아름다움과 멋스러움을 느낀다면, 혼자 다니며 찍은 모든 사진에 아름다운 빛과 멋스러운 꿈이 드러납니다.


  내가 나를 보지 않는다면 사진기를 손에 못 쥡니다. 내가 나를 보지 않으면서 사진기 단추를 누르면, 아무 이야기가 없이 밍밍하거나 따분한 사진이 태어납니다. 내가 나를 스스로 바라보는 눈길에 따라 사진이 달라집니다. 4348.2.25.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사진 찍는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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