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와 두 아이



  한 아이로 지낼 적과 두 아이로 지내는 날을 돌아본다. 한 아이만 있을 적에는 모든 눈길을 한 아이한테 쏟기 마련이다. 아니, 눈길이 한 아이한테 간다. 두 아이가 있는 날에는 눈길이 두 아이한테 고루 간다. 한 아이한테 쏠리지 않는다. 그런데, 두 아이한테 눈길을 나누어 보내면, 두 아이는 서로서로 눈길을 보내니, 내가 한 아이한테 쏟는 눈길하고 똑같은 숨결이 된다. 나는 늘 ‘우리 아이’한테 눈길을 쏟으면서 살 뿐이다.


  한 사람이 짓는 삶과 두 사람이 짓는 삶을 생각한다. 한 사람은 혼자서 삶을 지을 테고, 두 사람은 둘이서 삶을 지을 텐데, 하나이든 둘이든 사람으로서 짓는 삶은 같다. 우리는 늘 이 땅에서 삶을 짓는 사람으로서 아름다움과 사랑과 꿈을 슬기롭게 생각한다. 4348.3.7.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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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름벼리는 온몸으로 그림순이



  사름벼리가 온몸으로 그림을 그리며 노는 모습을 바라본다. 그렇다. 우리는 늘 온몸으로 놀고, 온마음으로 일한다. 온몸을 써서 그림을 그리고, 온힘을 기울여 글 한 줄을 쓴다. 온넋으로 삶을 바라보면서, 온사랑으로 서로 아끼는 하루를 연다. 예쁘다. 4348.3.7.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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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50. 낯선 말, 어려운 말, 새로운 말

― ‘바른 말’이 아닌, ‘마음을 살리는 말’



  노래하는 한대수 님이 1970년대에 선보인 〈바람과 나〉라는 노래를 살피면, “아, 나의 님 바람, 뭇느낌 없이 진행하는 시간 따라”와 같은 노랫말이 흐릅니다. 이 노래에서 흐르는 ‘뭇느낌’이란 “온갖 느낌”이나 “수많은 느낌”을 가리킵니다. ‘뭇짐승’이나 ‘뭇별’이나 ‘뭇사람’ 같은 자리에서도 쓰는 ‘뭇’은 “매우 많은”이나 “모든”을 가리킵니다. 한자에서는 ‘萬’이라는 낱말을 붙여서 ‘숫자 10000’을 가리키는 한편, “매우 많은”이나 “모든”을 가리키기도 해요. 한국말에서는 ‘뭇’이 이 같은 구실을 하고, ‘온’이라는 낱말도 이러한 구실을 합니다.


  ‘뭇느낌’이라 하면, 사람이 살고 죽으면서 겪는 온갖 느낌입니다. 기쁘고 슬프고 아프고 좋고 싫고 서럽고 안타깝고 가엾고 벅차고 반가운 여러 느낌이 바로 ‘뭇느낌’이라 할 만해요. ‘뭇’을 붙여서 ‘뭇책(뭇 책)’이나 ‘뭇그림(뭇 그림)’이나 ‘뭇편지(뭇 편지)’나 ‘뭇말(뭇 말)’처럼 쓸 수 있습니다. 비슷한 뜻과 얼거리로 ‘온책(온 책)’이나 ‘온그림(온 그림)’이나 ‘온편지(온 편지)’나 ‘온말(온 말)’처럼 쓸 만합니다. 뜻은 같다(“모든”이나 “매우 많은”)고 하더라도, 이러한 말을 쓰는 사람이 담으려고 하는 느낌은 다릅니다. 새로운 느낌이 깃들 수 있고,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감돌 수 있어요. ‘뭇책’과 ‘온책’과 ‘온갖 책’과 ‘모든 책’과 ‘많은 책’은 말꼴로도 다르지만, 말느낌으로도 다를 테니까요.


  요즈음은 ‘뭇’이나 ‘온’ 같은 한국말을 알맞게 살려서 쓰는 사람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온갖’이나 ‘갖은’ 같은 한국말을 알뜰히 살펴서 쓰는 사람을 보기도 만만하지 않습니다. 교과서에서는 이러한 낱말을 골고루 헤아려서 두루 쓰지 못하고,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서도 이러한 낱말을 찬찬히 쓰지 못합니다. 어린이문학이나 인터넷이나 방송에서도 이러한 낱말을 넓게 보듬으며 쓰지 못하지요.


  오늘날 한국사람은 한국말이 오히려 낯섭니다. 한국사람이지만 한국말을 제대로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배울 것이 많고, 볼 것이 많으며, 할 것이 많도록 바쁘다 보니, 정작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찬찬히 헤아리면서 두루 쓰는 길은 등돌리기 일쑤입니다. 이를테면, 아이들부터 한자를 몇 가지 외우거나 영어를 더 빨리 익히는 일에 바쁘니, 한국말을 제대로 배워서 제대로 쓰는 길하고 멀어요. 어른들도 사회살이에 바쁘기에, 사회에서 쓰는 몇 가지 말만 늘 쓸 뿐, 생각을 밝히거나 짓는 ‘새로우면서 즐거운’ 말은 좀처럼 마음에 담지 못해요.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오불관언’이나 ‘창해일속’이나 ‘고진감래’나 ‘엄동설한’ 같은 한자말을 알려주면서 배우라 시키곤 합니다. 이러한 한자말을 알아야 똑똑하다고 여기기까지 합니다. 사회에서 이러한 한자말을 쓰니 배워야 한다고 하는데,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한자말이 쓰인 지는 고작 백 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백 해 앞서 이 나라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시골에서 흙을 일구고 살았으며, 그무렵에는 이 같은 한자말을 쓸 일이 없었으니까요. 그러면, 지난날에는 한국사람이 어떤 한국말을 썼을까요. ‘딴청/못 본 척하다/콧방귀도 안 뀌다’나 ‘하찮다/보잘것없다/작다’나 ‘쓴맛 뒤에 단맛’이나 ‘겨울추위/모진 추위/강추위/눈 오고 추운 밤’ 같은 말을 썼어요. 누구나 아는 말을 쓰던 한겨레이고, 서로 쉽고 수수한 말을 나누던 이웃이며, 함께 즐길 곱고 착한 말을 주고받던 동무입니다.


  아이들한테는 모든 말이 낯설면서 새롭습니다. 아이들은 어른이나 어버이가 들려주거나 가르치는 말이 모두 낯설면서 새롭지요. 억지로 외워야 하는 말이 아니라, 삶을 그리거나 나타내는 말일 적에는 ‘처음에 낯설’다가 ‘이내 새로’워서 기쁘게 맞아들입니다. 아이들은 좋거나 나쁘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어른이 쓰는 모든 말’을 받아들여요. 그래서 아이들은 어른과 똑같이 사투리를 쓰고, 어른과 똑같이 거친 말이나 막말까지 쓸 수 있어요. 어른들이 늘 쓰는 말이 아이들이 늘 쓰는 말이 되니까요.


  말에는 잘잘못이 없습니다. 좋거나 나쁜 말은 없습니다. 틀리게 썼다면 스스럼없이 고치거나 바로잡으면 됩니다. 손질해야 하는 말이면 손질하면 됩니다. 아직 제대로 몰랐으면 이제부터 제대로 배워서 쓰면 됩니다. 말을 나누는 까닭은 서로 생각을 나누면서 삶을 기쁘게 짓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을 슬기롭게 헤아린다면, 아이들한테 ‘지식이나 시사상식을 쌓도록 하는 말’이 아니라 ‘아이 스스로 생각을 짓도록 이끌어 꿈을 가슴에 품도록 하는 말’을 들려주면서, 어른도 아이와 함께 생각을 기쁘게 짓는 말을 늘 쓸 수 있습니다.


  말만 깨끗하게 한대서 삶이 깨끗하지 않습니다. 이때에는 번지르르한 말이나 겉치레 말이 되어요. 밥만 좋게 먹는대서 몸이 좋아지지 않습니다. 밥뿐 아니라 넋과 삶과 일과 놀이와 말을 모두 좋게 다스릴 때에 몸이 좋아집니다. 그러니까, 말과 밥과 넋과 삶과 일과 놀이가 모두 깨끗하게 정갈하다면, 말은 저절로 깨끗하면서 정갈해요. 《우리 글 바로쓰기》 같은 책은 훌륭하지만, 이 훌륭한 책을 읽은 사람이 많아도 사람들이 말을 훌륭하게 쓰지 못하는 까닭은 ‘말 지식’만 쌓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말을 삶으로 맞아들여서 넋을 새롭게 지을 때에 ‘훌륭하구나 싶은 말’이 저절로 흘러요.


  사람은 기계가 아니기에, 날마다 똑같은 밥을 세 끼니 차리더라도, 늘 다르면서 새로운 몸짓으로 기쁘게 노래하면서 지을 때에 모든 끼니가 다르고 새로우면서 맛납니다. 기계처럼 밥과 국과 반찬을 차린다면, 가짓수나 모습은 달라 보이더라도, 하나도 새롭지 않으며 맛도 없기 마련이에요. 사랑을 실어 기쁘게 지은 밥이라면, 반찬이 한 가지뿐이고, 된장국과 보리밥만 먹어도 끼니마다 새로우면서 기쁘지요.


  말 한 마디는 내 생각과 마음을 짓는 바탕입니다. 밥 한 그릇은 내 몸에 기운을 불어넣어 내가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바탕입니다. 말과 넋과 삶은 따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언제나 한동아리입니다. 이 얼거리를 잘 헤아리면, 누구나 내 몸에 맞고 내 마음을 살찌우는 말과 넋과 삶을 찾으리라 느껴요. ‘바른 말 쓰기’가 아니라, ‘마음을 살리는 말과 넋과 삶’으로 나아가는 길일 때에 즐겁고 기쁩니다. 4348.2.10.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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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노래 64. 장난감



네가 손에 쥔 장난감

나한테 빌려주겠니?

응, 그러면 내 손에 쥔 장난감

너한테 빌려주라고?

그래, 우리 서로 바꾸자

네 것을 내가 쥐고

내 것을 네가 잡으며

여기 이곳에서 함께 놀자

해가 지도록

달이 뜨도록

내내

어깨동무를 하면서

한목소리로 노래를 부르자.



2015.2.12.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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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29 그물



  고기를 낚으려고 그물을 짭니다. 그물을 촘촘히 짜야 고기를 낚습니다. 거미가 거미줄을 촘촘히 짜듯이, 사람은 그물을 촘촘히 짜야 바닷물이나 냇물에 그물을 드리워서 고기를 낚습니다.


  거미는 거미줄을 짤 적에 아무렇게나 짜지 않습니다. 촘촘히 짜는 거미줄인 한편, 아름답게 짭니다. 왜 아름답게 짤까요? 빈틈이 나오지 않도록 짜려면 저절로 아름다운 무늬가 됩니다. 어느 한쪽도 허술하지 않도록 짜면서 튼튼하도록 짜려면 참말 아름다운 결이 되고, 금과 줄과 모습이 됩니다.


  사람이 짠 그물도 몹시 아름답습니다. 아름답지 않은 그물이란 없습니다. 그저 촘촘하거나 그저 튼튼하기만 한 그물은 없습니다. 가장 수수하거나 투박한 무늬나 결이라 하더라도, ‘그물빛’과 ‘그물결’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사랑스럽다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럽지요. 한 땀씩 찬찬히 짠 그물을 바라보셔요. 이 그물을 손으로 가만히 어루만져 보셔요. 냇물고기와 바닷물고기가 이 그물에 걸려서 잡힐 만합니다. 고기가 비늘이나 몸을 다치지 않도록 거뜬히 낚을 만합니다. 고기를 낚으면서 물은 모두 새어나가도록 할 만합니다.


  그물은 오직 고기를 낚습니다. 물을 낚지 않습니다. 그물은 오직 고기를 낚아서 올립니다. 물은 제자리로 돌아가도록 합니다. 거미줄은 오직 먹이를 잡습니다. 바람을 잡지 않습니다. 바람에 살며시 흔들리면서 춤을 추는 거미줄은 바람결을 고스란히 맞아들이면서 파란 빛깔이 되는데, 파란 빛깔로 춤추는 거미줄은 날벌레와 풀벌레가 ‘거미줄’인지 알아채지 못할 만하지요. 냇물이나 바닷물에 드리우는 그물도 거미줄과 같아요. 물과 하나가 되어 물결에 살랑살랑 춤을 추는 그물입니다. 물고기는 그물을 거리끼거나 무서워 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물도 바닷물이나 냇물에 깃든 수많은 돌이나 이끼나 플랑크톤 가운데 하나로 여깁니다. 그물 안팎을 가만히 드나들다가 그만 그물에 낚입니다.


  사람 몸은 그물과 같습니다. 사람 몸은 거미줄과 같습니다. 겉보기로는 한 덩이로 된 살갗이요 뼈요 살점이요 피톨이라고 볼 만하지만, 깊이 파고들어서 살피면, 사람 몸은 아주 촘촘하면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거미줄이나 그물이라고 할 만합니다. 이리하여, ‘신경망(神經網)’ 같은 말을 쓰기도 합니다. ‘신경망’이라는 한자말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바로 ‘마음그물’을 가리킵니다. 우리 마음은 그물처럼 촘촘하면서 튼튼하고 아름답게 짜여서, 누가 보아도 사랑스럽습니다. 우리가 머리로 짓는 모든 생각은 바로 이 ‘마음그물’에 깃듭니다. 우리가 짓는 생각은 마음으로 들어가서 몸을 움직이는 말이 됩니다. 마음이란, 마음그물이란, 생각을 받아들여서 고운 빛으로 바꾸어 주는 보금자리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란, 마음그물이란, 생각을 낚아서 맑은 바람으로 거듭나도록 북돋우는 숨결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물을 이루는 벼리가 튼튼하기에 삶을 짓습니다. 몸과 마음을 이루는 그물은 벼리가 하나하나 모여서 아름답고 사랑스럽습니다. 4348.2.26.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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