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곯아떨어지기


  엊저녁에 할 일이 있었는데 아이들을 재우면서 나까지 곯아떨어진다. 밤새 여러 가지 꿈이 찾아온다. 이 꿈 저 꿈 곰곰이 헤아리는데, 어느 꿈에서고 나는 길을 몰라 뚜벅뚜벅 헤맨다. 마지막 꿈에서는 함께 길을 걷던 사람을 등에 업고 짐은 두 손에 든 채 한참 길을 헤맨다. 나는 왜 스스로 고단하게 지낼까. 나는 왜 스스로 힘겹게 짐을 짊어질까. 기쁘게 짓는 웃음으로 춤을 추는 삶으로는 왜 나아가지 않을까. 꿈에서 깨지도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다가 문득 생각한다. 등떼기를 바닥에 붙이려고 하니 등떼기를 바닥에서 뗄 수 없구나. 일어나면서 웃으려고 생각해야지 일어날 수 있구나. 이제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두 아이 이불깃을 여미고 방바닥에 불을 넣는다. 물을 한 모금 마신다. 몸은 멀쩡하다. 잘 쉬고 잘 잤다. 새벽 세 시가 조금 넘는다. 4348.3.26.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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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56. 한자말은 영어처럼 외국말

― 한국말, 우리말, 토박이말, 시골말, 숲말



  ‘한자’로 지은 말을 제대로 살필 줄 아는 학자가 무척 드뭅니다. ‘알파벳’으로 지은 말은 으레 ‘외국말’인 줄 알면서, 막상 ‘한자’로 지은 말이 ‘외국말’인 줄 제대로 느끼거나 바라보는 지식인이 아주 드뭅니다.


  오늘날 한국을 보면, 한자로 지은 말이 퍽 널리 퍼졌습니다. 그러나, 막상 한국사람이 여느 때에 늘 쓰는 말 가운데 ‘한자로 지은 말’은 얼마 안 됩니다.


  한국말사전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일본사람이 지은 일본말사전을 베낀 탓에, 일본에서나 쓰던 한자말이 한국말사전에 아직 꽤 많이 나돕니다. 한국사람이 쓴 일도 쓸 일도 없는 한자말이 한국말사전에 뜬금없이 실리기 일쑤입니다. 게다가 조선 무렵에 정치권력자가 쓰던 ‘궁중 한자말’이 한국말사전에 지나치게 많이 실렸습니다.


  우리는 슬기롭게 생각해야 합니다. 조선 무렵에 정치권력을 거머쥔 사람은 ‘인구 통계로 치면 몇 퍼센트’가 될까요? 1퍼센트는커녕 0.1퍼센트도 안 됩니다. 조선 무렵에 ‘중국글로 쓴 책’을 익히면서 지식인 노릇을 한 사람도 ‘인구 통계로 치면 0.1퍼센트는커녕 0.01퍼센트’조차 안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말사전을 보면 ‘중국글로 쓴 책’에 적힌 한자말이 그대로 나오고, ‘궁중 한자말’도 고스란히 나와요. 이와 달리, 조선 무렵에 이 땅에서 99.9퍼센트나 99.99퍼센트에 이르던 여느 사람이 쓰던 말은 모두 실리지 않습니다. 고장마다 다르게 쓰던 고장말을 한국말사전에 제대로 담지 않아요. 시골마다 다르게 살려서 쓰던 시골말을 한국말사전에 알차게 싣지 못합니다.


  ‘한국말’은 한국사람이 쓰는 말입니다. ‘토박이말’은 한국사람이 예부터 손수 지어서 쓰는 말입니다. ‘우리말’은 ‘토박이말’이나 ‘한국말’을 가리키기도 하고, 둘을 아우르기도 하는 이름입니다. ‘표준말’은 현대 사회나 정치나 문화를 펴면서 나라에서 한 가지 틀로 세운 말입니다. ‘시골말’은 손수 흙을 가꾸면서 삶을 스스로 짓는 사람이 쓰는 말입니다.


  ‘한자말’은 한자로 지은 말입니다. 그러면, 한자말은 어디에 들어갈 만할까요? 한자말은 어디에도 들어갈 만하지 않습니다. 한자말은 한국말도 토박이말도 우리말도 표준말도 시골말도 아닙니다. 한자말은 그저 ‘한자말’입니다. 알파벳으로 지은 ‘영어’는 어떠할까요? 영어도 한국말이 아니고 토박이말이 아니며 우리말이나 표준말이나 시골말이 아닙니다. 영어도 그저 ‘영어’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한자말과 영어는 모두 ‘외국말’입니다.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외국)’에서 쓰는 말이 바로 한자말과 영어입니다.


  조선 무렵 궁중에서 한자말을 썼습니다. 그러면, 궁중에서는 왜 한자말을 썼을까요? 중국 정치를 섬기려는 뜻에서 한자말을 썼고, 조선 무렵 궁중에서는 ‘중국 한자말’을 썼습니다. 궁중에서 쓰던 ‘중국 한자말’을 한국 지식인도 받아들여서 썼습니다. 이들은 ‘중국 한자말’로 정치를 하고 사회를 지키며 문화를 폈습니다. 이들은 손수 흙을 가꾸면서 삶을 짓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느 사람(백성, 시골사람)이 시골에서 삶을 지으면서 ‘풀’이나 ‘나무’나 ‘숲’을 가꿀 적에, 궁중 권력자나 지식인은 ‘草’라든지 ‘木’이라든지 ‘林’ 같은 한자를 썼습니다.


  조선 사회가 일본 제국주의 힘에 무너지면서 일제강점기가 되니, 이때부터 ‘중국 한자말’이 차츰 밀려나면서 ‘일본 한자말’이 이 나라에 들어오고, ‘일본말’까지 뒤따라 들어옵니다. 조선 사회는 마흔 해 가까이 식민지가 되어 짓눌려야 했는데, 식민지에서 풀려난 뒤에 ‘일본 제국주의 부역자’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일본 한자말’과 ‘일본말’을 익히면서 공무원이 되거나 지식인 노릇을 하던 이들은 예전과 똑같이 ‘일본 한자말·일본말’로 글을 쓰거나 신문을 내거나 책을 묶었습니다. 이리하여 ‘조선’에서 ‘한국’으로 이름을 바꾼 이 사회에는 ‘중국 한자말’에다가 ‘일본 한자말’이 두루 퍼집니다. 정치권력자와 지식인은 ‘여느 시골사람이 쓰는 말’은 조금도 안 쓰면서 ‘권력자가 쓰는 한자’로 생각을 펴고 학교를 세웠습니다.


  조선 무렵뿐 아니라 고려 무렵도 똑같습니다만, 궁중 사회와 지식 사회는 ‘우리말’이라고 할 ‘한국말’을 살피거나 가꾸거나 배우거나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궁중 사회와 지식 사회는 언제나 ‘다른 나라 말(외국말)’인 한자말을 썼고, 이 한자말은 ‘중국 한자말·일본 한자말’ 두 갈래로 나누어집니다. 오늘날 한국말사전을 보면, ‘뜻이 같으나, 다르게 쓰는 한자말’이 몹시 많습니다. 왜 그러할까요? 궁중 사회와 지식 사회는 이웃 두 나라 정치권력을 섬기던 버릇으로 ‘다른 나라 말(외국말)’로 정치·경제·학문·문화·문학 따위를 펼쳤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는 해방 뒤에 미군정을 거쳤고, 미국 사회와 문화 물결이 다시금 스며듭니다. 이리하여, 한국사람이 쓰는 ‘한국말’은 그만 ‘중국 한자말 + 일본 한자말 + 미국말(영어)’이 되고 맙니다. 여기에다가 한국에서 정치와 지식을 거머쥔 이들이 ‘한국 한자말’을 새로 지어서 씁니다. 한국말이 아닌 외국말인 ‘한자말’인데, 한국에서 쓰는 한자말은 ‘중국 한자말·일본 한자말·한국 한자말’ 이렇게 세 가지로 더 가지를 칩니다.


  여느 사람도 쓸 만한 한자말이 있습니다. 여느 사람도 쓸 만한 영어가 있으니, 외국말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받아들여서 쓸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느 사람이 쉽게 쓰는 수수한 한자말은 ‘외국말’에서 ‘들온말(외래어)’로 자리를 바꾸면서 ‘한국말’ 품으로 녹아듭니다. 외국말이기에 모두 손사래를 쳐야 하지 않습니다. ‘버스’나 ‘컴퓨터’나 ‘인터넷’ 같은 외국말을 받아들여서 쓰듯이 ‘학교’나 ‘교과서’나 ‘사회’ 같은 외국말(한자말)도 받아들여서 쓸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외국사람’이 아닌 ‘한국사람’이기에, 한국사람으로서 스스로 우리가 쓸 말을 손수 짓는 넋을 가꿀 줄 알아야 합니다. 외국말을 무턱대고 받아들여서 아무렇게나 쓰는 삶이 아니라, 손수 한국말(우리말)을 새롭게 짓는 슬기로운 마음이 될 수 있어야지요. 오늘 우리가 한국말(우리말)을 새롭게 짓는다면, 이 말은 ‘숲말’입니다. 푸른 바람을 나누어 주면서 스스로 우거지는 숲처럼, 우리 삶과 사회에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어 주는 바탕이 되는 말이라는 뜻에서 ‘숲말’입니다. 4348.3.25.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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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옹글게 쓰는 우리 말

 (1598) 책동냥


날을 갈아 보라 하면, 이것은 눈동냥으로 안 되는데, 그래서는 연장을 쓸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니시오카 쓰네카즈/최성현 옮김-나무에게 배운다》(상추쌈,2013) 69쪽


  “곁에서 얻어 보는 일”을 가리켜 ‘눈동냥’이라 합니다. “남이 하는 말을 얻어들어서 앎”을 가리켜 ‘귀동냥’이라 합니다. 곁에서 얻어 보기에 ‘눈동냥’이라 한다면, 이는 ‘곁동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말을 얻어들어서 알기에 ‘귀동냥’이라 한다면, 이는 ‘말동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눈동냥 = 곁동냥

 귀동냥 = 말동냥


  무언가 얻으려고 하기에 ‘동냥’을 합니다. 동냥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좋은 일도 아닙니다. 동냥은 그저 동냥입니다. 없기에 얻으려 하는 몸짓이 ‘동냥’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내가 너한테 동냥을 할 수 있고, 모레에는 네가 나한테 동냥을 할 수 있어요. 서로 동냥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삶을 나눕니다. 배가 고프면 ‘밥동냥’을 합니다. 목이 마르면 ‘물동냥’을 하지요.


 책동냥 : 책을 읽어 아는 일

 노래동냥 : 노래를 들어 아는 일

 춤동냥 : 춤을 보고 아는 일


  우리는 여러 가지 ‘동냥’을 할 수 있습니다. 학교는 다니지 못했어도 책을 읽어서 스스로 익히거나 알면 ‘책동냥’을 하는 셈입니다. 어떤 사람한테서 따로 배우지 않았으나 둘레에 흐르는 노래를 듣고 노래를 익힌 사람은 ‘노래동냥’을 한 셈입니다. 이와 비슷한 얼거리로 ‘춤동냥’을 합니다.


  한편, ‘일동냥’이나 ‘놀이동냥’도 할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을 지켜보면서 일을 익혔으면 ‘일동냥’입니다. 다른 아이가 새로운 놀이를 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혼자 해 볼 수 있으면 ‘놀이동냥’입니다. 4348.3.25.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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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친구야 웅진 우리그림책 21
강풀 글.그림 / 웅진주니어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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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496



내 마음동무야 반갑구나

― 안녕, 친구야

 강풀 글·그림

 웅진주니어 펴냄, 2013.1.14.



  씨앗 한 톨한테 말을 걸 수 있습니다. 얘야 얘야 예쁜 씨앗아 너는 아름다운 나무로 자라렴, 하고 말을 걸 수 있습니다. 풀 한 포기한테 말을 걸 수 있습니다. 얘야 얘야 싱그러운 풀포기야 너는 아름다운 밥이 되어 나와 한몸이 되어 주렴, 하고 말을 걸 수 있습니다. 나무 한 그루한테 말을 걸 수 있습니다. 얘야 얘야 우람한 나무야 너는 나한테 오래된 이야기를 들려주렴, 하고 말을 걸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누구하고도 말을 나눌 수 있습니다. 돌멩이하고 말을 걸면 돌멩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참새한테 말을 걸면 참새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다만, 요새는 씨앗한테 말을 거는 시골지기가 드물고, 참새한테 말을 거는 아이가 드뭅니다. 요새는 어른이나 아이 모두 너무 바쁩니다. 요즈음은 어른이나 아이 모두 놀거리와 볼거리가 아주 많습니다.



..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누군가 말했습니다. 아이는 깜짝 놀라 울음을 뚝 그쳤습니다. “네가 그렇게 울면 사람들이 우리가 우는 줄 알고 싫어한단 말이야.” ..  (4쪽)




  우리가 사귀는 동무는 언제나 마음동무입니다. 소꿉동무나 책동무나 언제나 마음동무입니다. 왜냐하면, 서로 마음으로 아낄 때에 비로소 동무이니까, 모든 동무는 마음동무일밖에 없어요.


  눈빛을 보면 마음을 압니다. 눈빛으로 생각을 주고받습니다. 눈빛을 밝혀 기쁜 이야기를 속삭입니다. 우리는 서로 마음동무이니까요.


  다시 말하자면, 마음을 나누지 못한다면, 처음부터 동무가 아닙니다.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아니라면 우리는 서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음으로 만나고, 마음으로 얘기하며, 마음으로 노래하면서 기쁘게 어깨동무를 합니다.



.. 생쥐는 깜짝 놀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지금 쥐한테 고양이가 어디 있는지 묻는 거야?” ..  (23쪽)





  강풀 님이 만화로 빚은 그림책 《안녕, 친구야》(웅진주니어,2013)를 읽습니다. 밤에 혼자 잠들다가 문득 무섭다고 여겨 깨어난 뒤 어머니와 아버지한테 가다가 문지방에 발가락을 찧고는 아파서 우는 아이가 나오는 그림책입니다.


  이 아이는 누구일까요. 발가락이 아프다며 우는 아이는 누구일까요. 어린 강풀 님일까요, 아니면 강풀 님이 낳은 아이일까요. 이 아이는 왜 밤에 씩씩하게 잠들면서 꿈나라로 가지 못하고 이렇게 아프다며 울어야 할까요.



..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오늘 내 방이 생겼거든. 혼자서도 잘 수 있을 줄 알았어. 그런데 혼자 자다가 깨니까 너무 무서웠어. 안방을 가려다가 문지방에 엄지발가락이 찧었어.” ..  (34쪽)




  어쩌면 아이는 잠에서 깨어 눈밭나라를 돌아다니지 않고, 꿈나라에서 신나게 돌아다닌다고 할는지 모릅니다. 꿈나라에서 고양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꿈나라에서 개와 쥐하고도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할는지 모릅니다. 문지방에 발가락을 찧고 나서 울다가 어느새 잠이 들고 나서 고양이와 개와 쥐를 만났을는지 모릅니다.


  아무튼 아이는 밤마실을 합니다. 눈송이가 펄펄 날리는 골목을 고양이와 함께 걷습니다. 그러면서 고양이하고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나눕니다. 고양이는 아이 말을 알아듣고, 아이는 고양이 말을 알아듣습니다. 그리고, 개와 사람도, 쥐와 사람도, 서로 말을 섞습니다.


  사람은 고양이하고 말을 섞을 수 있을까요? 그럼요, 그렇지요. 서로 말을 섞으려고 마음을 기울이면 말을 섞을 수 있습니다. 쥐와 고양이는 서로 말을 나눌 수 있을까요? 그럼요, 그렇지요. 서로 잡고 잡히는 사이가 아니라, 서로 아끼고 돕는 사이가 되면 얼마든지 말을 나눌 수 있습니다.



.. 아이는 한참을 걷다가 검은 고양이가 있는 골목까지 왔습니다. 검은 고양이가 아이를 보고 말했습니다. “길을 잃었니? 넌 아까 저쪽에서 왔어.” “고마워.” ..  (47쪽)




  마음을 활짝 열 때에 이야기꽃이 핍니다. 마음을 밝게 열면 이야기잔치가 됩니다. 마음을 따사로이 여는 동안 이야기밥을 먹습니다. 새끼 고양이는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골목길을 걷는 동안 씩씩한 마음으로 거듭납니다. 아이는 새끼 고양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골목길을 걷는 사이 씩씩한 몸짓으로 거듭납니다.


  밤은 무섭지 않습니다. 밤은 그저 밤이라, 모두 새근새근 잠들어 꿈을 꿉니다. 길을 잃을 일이 없습니다. 그저 먼 길을 혼자 나서 보았을 뿐이요, 고양이도 아이도 얼마든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늘이 지켜보면서 길을 다 알려줍니다. 바람이 들여다보고는 길을 살포시 알려주지요. 눈송이가 저마다 조잘조잘 떠들면서 길을 낱낱이 알려주어요. 고양이는 어미 품으로 돌아가고, 아이는 어버이 품으로 돌아갑니다. 4348.3.25.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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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바보짓



  ‘가난’을 높이 섬기는, 이른바 찬양하는 책이 꽤 많다. 가난해야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울 수 있다고 외치는, 이른바 찬미하는 책이 참 많다. 그러나, 나는 이런 책이 하나도 안 옳다고 느꼈다. 이런 책에서 쓰는 ‘가난’이라는 낱말은 알맞지 않다고 느꼈다.


  가난을 외치는 이들 가운데 누가 가난하게 사는가? 아무도 가난하게 안 산다. 가난을 외치는 이들은 무슨 생각일까? 이들은 우리가 참말 가난하기를 바라면서 글을 쓰고 소리 높여 외친다. 그러면, 가난을 높이 섬기거나 노래하는 이들은 어떤 뜻으로 우리한테 가난하라고 외칠까?


  우리가 가난해야 저들이 부자나 권력자가 된다. 우리가 가난만 생각하면서 오직 가난이라는 수렁에 빠져야 저들이 부자와 권력자가 되어 우리를 종(노예)으로 부릴 수 있다.


  가난은 바보짓이다. 왜 그런가 하면, 가난해서는 아무것도 못 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손에 100원을 쥐어도 가난한 사람은, 손에 100억 원을 쥐어도 가난하다. 손에 100원을 쥐어도 넉넉한 사람은, 손에 100억 원을 쥐어도 넉넉하다. 가난하고 자시고는 대수롭지 않다. 우리는 언제나 ‘넉넉한 삶’을 짓고 누려서 나누어야 한다. 왜냐하면, 언제나 넉넉한 삶이면서 넉넉한 넋이 되고 넉넉한 말을 펼칠 수 있으면, 우리 주머니에 100억 원이 있든 100원이 있든 늘 넉넉하다.


  우리가 ‘가난한 삶’이라는 굴레에 빠져들어 허덕인다면, 우리 주머니에 100원이 아닌 100억 원이 있어도 언제나 가난한 나머지, 이웃이나 동무 주머니에 있는 100원뿐 아니라 100억 원을 모두 훔치려 든다. 그런데, 이렇게 훔치고 빼앗아도 언제나 가난하니까 자꾸 빼앗고 또 빼앗으려 한다.


  참말 제대로 생각하면서 보아야 한다. 사랑을 생각하는 사람이 사랑을 찾는다. 꿈을 생각하는 사람이 꿈을 찾는다. 넉넉함을 생각하는 사람이 넉넉함을 찾는다. 우리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길을 생각해야 한다. 아름다움을 찾고 싶다면 아름다움을 생각해야 한다. 왜 가난을 생각하는가? 가난을 생각하니 그저 가난이라는 굴레에 갇힌다. 사랑스러움을 찾고 싶다면 사랑스러움을 생각해야 한다. 왜 자꾸 가난을 생각하거나 찾는가? 가난만 생각하고 외치니까 우리는 늘 가난이라는 수렁에 발목이 잠겨서 빠져나올 수 없다.


  우리가 가난하기를 바라는 이들은 돈과 권력을 모도 거머쥐면서 우리를 바보로 내몰려고 한다. 우리는 가난해야 할 까닭이 없다. 우리는 가난으로 갈 까닭이 없다. 우리는 100원을 쥐든 100억 원을 쥐든 늘 넉넉하면서 아름답고 사랑스레 살아야 한다. 우리는 100원을 쥐었어도 이웃과 100원을 나눌 줄 알며, 100억 원을 쥐었어도 동무와 100억 원을 나눌 줄 아는 착하고 참다운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어야 한다. 가난을 노래하는 책은 모두 거짓부렁이다. 거짓부렁 책은 모두 불살라서 재로 바꾸어 흙에 거름으로 뿌려 주어야 한다. 4348.3.25.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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