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아이 267. 2015.4.9. 드러누운 책순이



  새벽 일찍 일어나서 놀다가 살짝 하품을 하고는 드러누워서 그림책을 펼친다. 너무 일찍 일어났으니 졸릴 만하고, 살며시 드러누워서 책을 볼 만하지. 그렇게 드러누워서 몸을 쉬어야 다시 뛰놀 기운이 샘솟겠지. 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책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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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봄 찔레싹을 먹다



  새봄을 맞이해서 무엇이든 새롭게 돋는다. 풀도 새롭게 돋고, 나뭇잎도 새롭게 난다. 꽃도 새롭게 피며, 줄기도 새롭게 뻗는다. 다른 봄꽃이 한껏 피고 지면서 사람들이 봄꽃놀이를 다 즐기고 이제 봄마실을 잊을 무렵이라 할 사월 끝자락에 찔레나무도 새 줄기를 보드랗게 내놓는다. 바야흐로 새로운 찔레싹을 먹는 때이다.


  새로 돋는 찔레싹은 가시까지 보드랍다. 찔레나무는 줄기도 잎사귀도 새봄에 매우 보들보들 곱다. 찔레잎과 여린 줄기를 조금씩 끊어서 아이들과 나누어 먹는다. 자, 무슨 맛이니? 네 손과 눈과 혀와 몸은 어떤 맛을 느끼면서, 어떤 냄새와 숨결을 받아들이니? 4348.4.26.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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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53 종교와 ‘믿다·생각하다’



  ‘종교(宗敎)’라는 낱말이 있습니다. 한국말사전에서 뜻풀이를 살피면, “신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 또는 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 체계”라고 나옵니다. ‘宗’이라는 한자는 “마루, 뿌리, 으뜸, 우두머리, 갈래, 높이다, 섬기다”를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종교’라고 하는 낱말은 “가장 으뜸이 되는 무엇을 높이거나 섬기면서 이를 따르려 하는 말씀”인 셈입니다. ‘마루’나 ‘뿌리’나 ‘으뜸’이나 ‘우두머리’가 “내가 아닌 내 바깥에 있다”고 여기도록 이끄는 가르침이 ‘종교’라고 할 만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가장 으뜸’이 될까요? 아무래도 ‘하느님’이 가장 으뜸으로 될 테지요. 그러면 하느님은 어디에 있을까요? 하늘에 있는 님이 하느님이니 하늘에 있을 텐데, ‘하늘’은 어디일까요? 땅에서 1미터를 떨어지면 하늘일까요, 땅에서 1킬로미터를 떨어지면 하늘일까요, 지구별에서 벗어나면 하늘일까요?


  ‘하늘’이란 “때와 곳을 벗어난 파란 바람결”입니다. “땅과 대기권 사이에 있는 공기층”이 하늘일 수 없습니다. 하늘은 손에 잡을 수 없으나 손에 잡히는 것이고, 하늘은 알 수 없으나 알 수 있는 것이며, 하늘은 늘 우리 곁에 있으나 곁에 있는 줄 모르는 것입니다. 파랗게 눈부시면서 아무런 빛깔이 없는 숨결이 바로 ‘하늘’이기도 합니다.


  ‘하늘숨을 쉰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바람을 마신다’는 소리입니다. ‘파란 숨결’을 마시는 셈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늘숨을 쉬기에, 우리는 누구나 바람을 마시지요. 바람을 마시는 사람은, 바람을 마시는 줄 못 느낍니다. 숨을 쉬는 우리는 숨쉬기를 안 느끼면서 숨을 쉽니다. 그러면 언제 숨을 느낄까요? 몸이 아플 때에는 숨쉬기가 어려워서, 숨을 비로소 느낍니다. 바람결이 달라진 곳에서 바람맛이 좋다고 느낍니다. 바람결이 새로운 곳에서 내 온몸이 새로워지는구나 하고 깨달으면서 이때에도 숨을 느낍니다.


  바람을 마시는 사람이 바로 ‘하느님’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하늘에 있고, 하늘에 있는 님인 하느님은 바로 우리들 모두입니다. 우리들이 저마다 하느님이지요. 왜냐하면, 우리들은 저마다 이 땅에서 하늘을 마시고, 하늘에 살며, 하늘과 한몸·한마음이 되어서 하루를 열고 닫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종교’란 무엇일까요? 종교는 바로 ‘우리 스스로 하느님인 줄 잊도록 가르치는 정치권력’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바로 나’인데, 이 ‘참말(참된 진리, 참다운 깨달음)’을 사람들이 잊거나 잃도록 길들이려는 경전이 종교인 셈입니다. 나 스스로 참말을 잊은 채, 거짓말에 매달려서 엉뚱한 데에서 ‘하느님 찾기’와 ‘하느님 섬기기’와 ‘하느님 모시기’와 ‘하느님 높이기’를 하도록 내몰도록 하는 바보짓이 바로 종교라고 할 만합니다.


  하느님은 성경에도 없지만 십자가에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바로 우리들 가슴에 있으니, 다른 데에서 찾으면 나타날 수 없습니다. 예부터 “업은 아기 삼 면 찾는다” 같은 말을 했습니다. 아기를 업고 허둥지둥하면서 길을 잃은 사람을 빗대는 옛말인데, 하느님을 놓고도 똑같이 말하지요. 그러니까, “업은 아기 삼 면 찾는다”는, 하느님이 가슴속에 있으나 이를 바라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우리 스스로를 깨우치려고 슬기로운 옛사람이 재미있게 지은 ‘이야기말(속담, 깨우침말)’입니다. 이 이야기말을 생각할 때에 마음이 열리고, 마음이 열릴 때에 눈을 뜹니다. 이 이야기말을 생각하지 못하면 마음이 안 열리고, 마음이 안 열리면 눈을 뜨지 못해요.


  우리는 ‘믿다’가 아닌 ‘생각하다’인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다’라는 낱말은 “스스로 더 생각하거나 따지거나 살피지 않고 고스란히 받아들이다”를 뜻합니다. ‘생각하다’는 어떤 낱말일까요? “스스로 궁금하게 여겨서 이리저리 찾으면서 스스로 수수께끼를 풀고자 스스로 머리로 실마리를 짓다”를 뜻합니다.


  종교는 사람들이 ‘믿도’록 내몹니다. 종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을 짓지 않’고 ‘그저 믿고 또 믿어’야 종교가 됩니다. 종교가 우뚝 서서 종교 지도자(우두머리)가 나오면 어떻게 될까요? 이는 곧바로 권력이 되고, 정치 권력이 스멀스물 불거집니다. 정치와 종교는 언제나 한덩어리가 되어 우리를 억누르는 노예신분 사회로 치닫습니다. 현대문명 사회에서도 정치와 종교는 늘 한덩어리가 되어 우리를 억눌러요. 이 얼거리를 보아야 합니다. ‘믿지’ 말고 ‘생각하’면서 내 삶을 보아야 합니다. ‘믿음’이 아닌 ‘생각’으로 내 삶을 손수 짓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시골에서 흙을 만지던 사람은 어느 누구도 종교가 없이 아름답고 착하며 사랑스레 살았습니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종교를 퍼뜨리려는 정치 권력자는 사람들을 종(노예)으로 부리려고 자꾸 종교를 퍼뜨렸습니다. 종교가 없던 사회에서는 전쟁무기도 군대도 없었으니 언제나 평화로운 삶이었으나, 종교가 있은 뒤부터 권력자가 생겨서, 권력자는 손에 흙을 안 묻히면서 사람들을 종으로 부리거나 짓밟았습니다. 먼먼 옛날, 종교가 없던 때에는 어느 겨레에서도 ‘국가 권력’을 세우지 않았고, ‘국가 권력’이 없으니 모든 겨레가 서로 ‘이웃’이나 ‘동무’로서 사이좋게 지냈어요. 종교가 없던 때에는 전쟁이 마땅히 없었습니다. 종교가 있고부터 전쟁이 터집니다. 오늘날 미국 정치 권력이 끝없이 전쟁을 일삼는 까닭은, 미국이 바로 ‘종교 권력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이슬람도 똑같이 ‘종교 권력 사회’이니 미국하고 서로 싸움질을 하려고 사람들을 내몰아요.


  수수께끼는 종교 지도자나 성경이 풀어 주지 않습니다. 수수께끼는 우리가 저마다 스스로 풉니다. 우리가 섬길 하느님은 ‘바로 나’입니다. 내가 나를 섬기면서, 나는 너를 섬깁니다. 내가 하느님이듯이 너도 하느님이거든요. 이리하여, 우리는 우리 스스로 섬기고 아끼고 보살피고 가꾸면서 삶을 짓습니다. 내가 나를 제대로 바라볼 때에 ‘종교라고 하는 정치권력’이 사라집니다. 내가 나를 제대로 못 바라본다면 ‘종교라는 쇠사슬 정치권력’이 우리를 굴레에 가두어 멍청이가 되도록 길들입니다.


  스스로 바람을 마시듯이, 스스로 생각해야 합니다. 스스로 하늘숨을 먹듯이, 스스로 종교 굴레를 벗어야 합니다. 바람을 느낄 때에 비로소 나를 느낍니다. 바람을 마시는 나를 바라볼 때에, 생각을 짓고 삶을 짓는 내 참모습을 알아봅니다.


  삶을 스스로 짓는 사람은 예배당에 다니지 않습니다. 삶을 스스로 짓지 못하는 사람이 예배당에 다닙니다. 삶은 ‘어떤 전지전능한 님’이 선물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뜨려 주지 않습니다. 삶은 ‘모든 것을 스스로 할 수 있는 님’인 내가 손수 기쁘게 웃고 노래하면서 아름답게 짓습니다.


  사랑을 스스로 길어올리는 사람은 하느님이 바로 내 가슴속에서 ‘내가 불러서 깨울 때’를 기다리는 줄 압니다. 하느님 마음일 때에 사랑을 나누고, 하느님 마음일 때에 아기를 낳으며, 하느님 마음일 때에 삶이 깨어납니다. 하느님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종교를 믿고야 말며, 하느님 넋이 아니기 때문에 경전과 십자가에 스스로 못이 박히고 맙니다. 우리는 권력자 손바닥에서 벗어나, 내 몸과 마음을 내가 스스로 다스리고 사랑하는 길에 홀가분하게 설 수 있어야 합니다. 4348.3.9.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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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도 익혀야지

 (1074) 에또


수염 한 가닥을 뽑아 비비 꼬면서, “에, 또, 그리고요…….” 하고 중얼거렸고요 … “에, 그리고요…….” 하고 말을 이었습니다

《미야자와 겐지/박경희 옮김-쥐돌이 쳇》(작은책방,2003) 41, 43쪽


 에, 또, 그리고요

→ 에, 그리고요

→ 음, 그리고요

→ 그리고요

 …



  ‘에또’는 일본말입니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에 들어와서 퍼진 말투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말투는 교사나 정치꾼이나 공무원이 흔히 썼고, 지식인도 곧잘 썼습니다. 요즈음에는 이 말투를 쓰는 교사가 거의 사라졌다고 할 만하지만, 한때에는 이 말투를 쓰는 교사가 꽤 많아서, ‘에또 선생’이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찌꺼기 가운데 하나인 ‘애국조회’를 할 적에 교장이나 교감 자리에 서는 어른들은 으레 ‘에또’ 같은 말투로 말길을 열기도 했습니다.


ええと : 말이나 생각이 미처 나지 않아 좀 생각할 때 내는 소리. 저어. 거시기.(=えっと)


  일본말사전 뜻풀이에 나오듯이, 한국말로는 ‘저’나 ‘저어’나 ‘거시기’를 쓰면 됩니다. 이밖에도 ‘음’이나 ‘으음’이나 ‘흠’이나 ‘흠흠’을 쓸 수 있습니다. ‘글쎄’를 써도 되고, ‘그러니까’나 ‘그러니까 말이지요’를 써도 돼요.


  곰곰이 돌아보면, 지난날에 ‘에또’라는 일본말을 입에서 못 떼던 분들은 일제강점기 탓이라고도 할 테지만, ‘에또’라는 말마디에 얽매여서 한국말로 느낌을 밝히지 못했다고 할 만합니다. 말길을 처음 트면서 쓸 만한 말투가 무척 많은데, 이 많은 말마디 가운데 어느 하나도 제대로 살피지 못했구나 싶습니다. 4348.4.26.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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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돌이 쳇 (미야자와 겐지) 작은책방 펴냄, 2003.11.6.



  쥐와 고양이가 나오는 미야자와 겐지 님 동화를 곰곰이 읽는다. 어릴 적에도 읽은 동화로구나 하고 떠오른다. 어릴 적에 이 동화를 읽을 적에는 여러모로 섬뜩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쥐와 고양이 이야기 가운데 쥐는 으레 잡아먹히거나 죽는 얼거리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러면, 죽음이 두려운가? 아니다. 죽음이 두려워서 섬뜩하지 않았다. 쥐라는 짐승으로 빗대어 그리는 삶이 바보스러웠다. 스스로 새롭게 배우려 하지 않으면서 겉치레를 부리는 목숨일 때에는 그야말로 섬뜩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이러면서 이 바보스러운 삶을 되풀이한다. 스스로 새롭게 배우려 하는 숨결이라면 섬뜩한 죽음길로 바보스레 가지 않는다. 스스로 새 삶을 짓는다. 고양이한테 잡혔기에 죽어야 하는 쥐가 아니다. 덫에 갇혔으니 죽어야 하는 쥐가 아니다. 그러나, 고양이한테 잡히거나 덫에 갇힌 뒤 어떻게 하는가? 그저 죽음길로 갈 생각뿐 아닌가? 사람은 열 살에도 배우지만 여든 살에도 배운다. 사람은 스무 살이나 마흔 살에도 배운다. 늘 배운다.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 이를 잊으면 언제나 죽음일 뿐이다. ‘죽음 같은 삶’이 되지 않으려면, ‘바보스러운 삶’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슬기롭게 배워서 사랑스레 하루를 지어야 한다. 4348.4.26.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한 줄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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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돌이 쳇- 미야자와 겐지 동화집 1
미야자와 겐지 지음, 이노 가즈요시 외 그림, 박경희 옮김 / 작은책방(해든아침)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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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4월 26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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