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노래



사름벼리 자는 집은 어여쁜 꽃집

몽실몽실 꿈을 꾸며 노래하지요.

사랑스레 피어나는 해 닮은 웃음

별들하고 같이 놀고, 밤새하고 춤을 추지.


산들보라 자는 집은 짙푸른 숲집

모과나무 앵두나무 무화과나무

사이좋게 손을 잡고 어깨동무

나비하고 함께 날고, 제비하고 속닥속닥.



2015.4.24.쇠.ㅎㄲㅅㄱ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하양물감 2015-04-29 22:27   좋아요 0 | URL
예뻐요^^

파란놀 2015-04-30 00:22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서울 염소, 사진으로 쓴 남편 이야기 (오인숙) 효형출판 펴냄, 2015.5.1.


  사진책 《서울 염소》를 바라본다. 한집에서 서로 아끼는 곁님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가까이에서 어루만지면서 누린 사랑을 사진과 글로 조촐하게 엮은 이야기꾸러미이다. 사진책 《서울 염소》는 ‘사진으로 쓴 남편 이야기’라는 작은이름이 함께 붙는데, 책머리에는 아이들 모습이 살짝살짝 함께 나온다. 한날 한때에 함게 태어난 두 아이가 천천히 자라면서 동그란 밥상에 둘러앉고, 함께 자며, 같이 아버지한테 안기는 포근한 이야기가 고요히 흐른다. 두 사람이 빚는 삶에서 사랑이 태어나고, 이 사랑이 꽃씨가 되어 아이들이 자란다. 아이들이 있고, 곁님이 있으며, 내가 있다. 저마다 서는 자리는 다르지만, 함께 걷는 길이다. 언제나 손을 맞잡고 씩씩하게 걷는 이 길에서 사진과 글로 꿈 한 가지를 풀어낸다. 사진이 없어도 사랑은 언제나 흐르고, 글이 없어도 삶은 늘 맑다. 사진이 있어서 사랑을 새롭게 돌아보고, 글이 있어서 삶을 새삼스레 되새긴다. 4348.4.29.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한 줄 책읽기)





1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서울 염소
오인숙 지음 / 효형출판 / 2015년 5월
13,000원 → 11,700원(1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2015년 04월 29일에 저장
절판



1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책시렁과 신문종이



  헌책방지기는 으레 신문종이를 모은다. 신문종이를 버리는 헌책방지기는 없다. 신문종이는 그대로 두어 묵히기만 해도 먼 뒷날 재미난 읽을거리가 되기 일쑤이기도 하지만, 바로 오늘 이곳에서는 책을 묶거나 꾸릴 적에 ‘책이 안 다치도록 감싸는’ 보드라운 종이가 되기도 한다.


  신문종이는 매우 얇다. 그런데 이 얇은 종이를 한 겹 댈 적과 한 댈 적은 사뭇 다르다. 얇은 신문종이를 대기에 책이 덜 다치거나 안 다친다. 책시렁에는 얇은 신문종이를 한 겹 깔면서 좀이 안 슬거나 벌레가 안 꼬인다. 책도 먼지를 덜 탄다.


  책시렁 바닥에 놓여 열 해나 스무 해쯤 ‘바닥종이’ 구실을 한 신문종이는, 열 해나 스무 해쯤 뒤에는 재미나면서 새로운 이야기로 다시 드러난다. 마치 옷장 서랍 바닥에 깐 신문종이와 같다고 할까. 옷장 서랍 바닥에 깐 신문종이가 오래되면 그냥 버릴 수 있지만, 부들부들해진 신문종이를 햇볕에 곱게 말린 뒤 찬찬히 넘기면, 열 해나 스무 해, 때로는 서른 해나 마흔 해마저 묵은 옛이야기를 아스라이 떠올릴 수 있다. 4348.4.29.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헌책방 언저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동이 트는 새벽에



  요즈막에 우리 집 작은아이가 새벽 다섯 시부터 잠에서 깹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서 노는 아이라서 이처럼 시골스럽게 새벽 일찍 일어나는가 하고 헤아려 봅니다. 겨울에는 새벽 여섯 시나 아침 일곱 시에도 일어났고, 때로는 아침 여덟 시 즈음에 일어나기도 한 다섯 살 작은아이인데, 나날이 동이 일찍 트니, 이러한 결에 맞추어 아주 일찍 잠을 깨는구나 싶습니다.


  일찌감치 잠이 깨는 아이를 다시 재우지 못합니다. 다섯 살 아이한테 ‘너무 일찍 일어났구나. 쑥쑥 크고 튼튼하게 자라려면 잠을 더 자야지’ 하고 이야기를 한들, 이 아이는 이 말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아니, 곰곰이 따지면, 시골스러운 아이는 동이 트는 새벽에 일찌감치 일어나서 놀고, 낮에 한두 시간 즈음 실컷 낮잠을 누린 뒤, 저녁밥을 먹고 별빛과 함께 잠들면 될 만하구나 싶습니다. 새벽 일찍 깨는 만큼 저녁 일찍 잠들 테니까요.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님이 쓴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포이에마,2014)라는 책을 읽습니다. 책이름처럼 아이들은 누구나 ‘오늘’을 삽니다. 아이들은 먼 ‘앞날’을 바라보면서 자란다고 말하지만, 아이들이 앞날(모레)로 나아가려면 바로 이곳에서 오늘 즐겁게 뛰놀고 기쁘게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곳에서 오늘 맛난 밥을 먹고 개구지게 뒹굴면서 하하호호 노래잔치와 웃음꽃을 누려야 합니다.


  “1000년에 걸쳐 아이들은 마을 어른들 곁에 앉아 인생을 배웠다. 노인들의 말을 듣다가도 어디론가 뛰어가 흥미로운 걸 찾아 놀곤 했다(43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빙그레 웃음짓습니다. 이 말은 거의 옳지만, 한 군데에서 안 옳습니다. 어느 대목이 안 옳은가 하면, 아이들은 ‘1000년에 걸쳐’ 마을 어른들 곁에서 삶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1000년이 아니라 10만 해나 100만 해, 아니 맨 처음부터 늘 마을 어른들 곁에서 삶을 배웠어요. 고작 1000년이라는 틀로 묶을 수 없습니다. 아이를 낳은 어버이가 아이를 지켜봅니다. ‘아이를 낳은 어버이’한테도 이 사람을 낳은 어버이가 있습니다. 아주 마땅히 둘레에 옹기종기 마을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지구별에서 사람들이 저마다 뿔뿔이 흩어져서 ‘작은 집안(핵가족)’을 이룬 지 얼마 안 됩니다. 지구별 곳곳에서 사람들이 ‘작은 집안’을 이룰 즈음부터 마을이 무너졌다고 할 만합니다. 도시가 커지는 곳마다 ‘작은 집안’이 되면서 ‘마을 이야기’가 사라집니다. ‘작은 집안’이 되면서 예술가와 작가와 전문가와 교사 같은 사람들이 따로 생깁니다. ‘큰 집안’이었고 ‘오순도순 복작거리는 마을’이 있을 적에는 따로 예술가나 작가나 전문가나 교사가 없었어도, 모든 어른이 다 함께 예술가였고 작가였으며 전문가인데다가 교사였습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모든 어버이는 예술가이면서 교사요, 작가이면서 전문가입니다.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더라도 아이들은 언제나 집에서 먹고 자면서 놉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만 배우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어디에서나 늘 배웁니다. 학교에서는 교사라고 하는 어른 곁에서 배우고, 집에서는 어버이라고 하는 어른 곁에서 배우지요. 마을에서는 마을 이웃이라고 하는 어른 둘레에서 배워요.


  교사자격증이 있는 사람도 교사이지만, 여느 어른도 누구나 교사입니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이녁 삶을 아이들한테 보여주면서 낱낱이 가르치는 셈입니다. 그러니,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지 않는 어른들 누구나 아이 앞에서는 ‘아무 말이나 함부로 해서는 안 될’ 노릇이요, ‘아무 짓이나 섣불리 해서는 안 될’ 노릇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하루를 짓고 누리는 착하고 참다운 사람으로 설 노릇이에요.


  “아이들이 보이는 문제 행동을 일종의 질병으로 간주하고 잠재적으로 위험성이 있는 약을 주는 것은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일한 길을 선택하는 것에 불과하다(140쪽).” 같은 이야기처럼, 오늘날 사회와 학교에서는 ‘주의력 결핍’이라든지 ‘선천성 장애’ 같은 이름을 아이들한테 함부로 붙입니다. 아이들이 왜 떠돌거나 아프거나 힘겨운가를 살펴서, 아이들이 웃음을 되찾고 기쁘게 놀 수 있는 터전으로 사회와 학교를 바로세우기보다는 자꾸 땜질 같은 처방만 합니다.


  제도나 정책이 없어서 아이들이 아프지 않습니다. 지원금이나 복지기금이 모자라서 아이들이 힘들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아프거나 힘들다면, 사랑을 못 받기 때문입니다. 나라에서는 마땅히 보육정책을 세워야 하겠습니다만, 아이들을 참답게 사랑하려는 슬기로운 숨결이 없이 정책만 바라본다면, 아이들은 외롭습니다.


  어떤 아이도 제 어버이가 저한테 값비싼 옷이나 밥이나 집을 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어떤 아이도 제 어버이가 저한테 값진 장난감이나 놀잇감을 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모든 아이는 저마다 제 어버이한테 오직 하나, ‘사랑’을 바랍니다. 모든 아이는 언제나 ‘사랑’을 받아서 ‘꿈’을 스스로 키워서 가꾸고 싶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효과적인 육아법을 안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교육적인 통찰이나 이론, 사상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이들에게 주는 사랑이다(193쪽).” 같은 이야기를 곰곰이 돌아봅니다. 육아법을 잘 안대서 아이를 잘 돌보지 않습니다. 교수법을 잘 안대서 아이를 잘 가르치지 않습니다. 사랑이어야 아이를 돌봅니다. 사랑이어야 아이를 가르칩니다. 사랑이어야 밥을 맛있게 짓습니다. 사랑이어야 글을 아름답게 씁니다. 사랑이어야 장사를 기쁘게 합니다. 사랑이어야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마을살림을 멋지게 가꿉니다.


  천천히 날이 밝아 아침입니다. 밤새 벼락을 이끌고 퍼붓던 비가 그칩니다. 비와 바람과 벼락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쿵쿵 울릴 때마다 우리 집도 쩌렁쩌렁 흔들렸습니다. 마을 가까이 어딘가에 벼락이 떨어졌구나 싶습니다. 땅에 벼락이 떨어지면 가까운 곳도 땅이 흔들흔들 울리는구나 하고 새롭게 느낍니다. 마당에는 밤새 떨어진 나뭇잎이 수북합니다. 네 철 언제나 푸른 후박나무는 봄마다 가랑잎을 떨구면서 새 잎이 돋습니다. 날마다 쓸고 또 쓸어도 여름이 될 때까지 다시 쓸고 거듭 쓸어야 합니다. 사랑스럽게 자라는 아이들도 날마다 사랑을 받고 거듭 받으면서 이튿날에 또 새롭게 사랑을 기다리리라 느낍니다. 어버이는 날마다 사랑을 길어올리는 사람이요, 아이는 날마다 사랑을 찾는 사람이라고 할 만합니다.


  밝은 햇살이 차츰 퍼집니다. 따사로운 햇볕이 천천히 드리웁니다. 처마 밑에서 제비가 노래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아침을 짓습니다. 아침을 함께 먹고 오늘 하루도 새로운 웃음으로 신나게 놀자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어제 놀이’를 잊고 ‘오늘 놀이’를 야무지게 누립니다. 4348.4.29.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 말을 죽이는 외마디 한자말

 (1353) 중中 38


그들은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렸어. 그러던 중 표범은 나뭇가지 사이로 가느다랗게 비치는 별빛 속에서 무언가가 코를 훌쩍거리는 소리를 듣게 되었단다

《러디어드 키플링/박성준·문정환·김봉준·김재은 옮김-아빠가 읽어 주는 신기한 이야기》(레디셋고,2014) 52쪽


 그러던 중

→ 그러는 사이

→ 그러는 동안

→ 그러다가

 …



  때를 가리키는 자리에서는 ‘사이’나 ‘동안’ 같은 낱말을 씁니다. “네가 밥 먹는 사이에 다녀왔지”라든지 “네가 잠든 동안에 일을 마쳤어”처럼 말해요. 이런 자리에 ‘中’이라는 한자를 넣지 않습니다. 이 보기글에서는 ‘그러다가’로 손보아도 잘 어울립니다. ‘이러다가’로 손볼 수도 있습니다.


  ‘中’은 외국말입니다. 영어로 치면 ‘in’처럼 썼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어사전을 보면 ‘in’을 풀이하면서 “-하다가(-하는 중에)”처럼 쓰기도 합니다. 제대로 풀이하자면 “-하다가(-하는 사이에, -하는 동안에)”처럼 고쳐야겠지요. 한국말을 한국말답게 쓸 노릇입니다. 4348.4.29.물.ㅎ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그들은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렸어. 그러다가 무늬범은 나뭇가지 사이로 가느다랗게 비치는 별빛을 받으며 무언가가 코를 훌쩍거리는 소리를 들었단다


‘표범(豹-)’은 그대로 두어도 되고 ‘무늬범’으로 손보아도 됩니다. “별빛 속에서”는 “별빛을 받으며”로 손질하고, “듣게 되었단다”는 “들었단다”로 손질합니다.


..



 우리 말을 죽이는 외마디 한자말

 (1369) 중中 39


방학도 아닌데 한밤중에 찾아와 정원에서 잠이 든 게 세상에 늘 있는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할머니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카롤린 필립스/유혜자 옮김-황허에 떨어진 꽃잎》(뜨인돌,2008) 82쪽


 한밤중에 찾아와

→ 한밤에 찾아와



  한국말은 ‘中’을 붙이지 않는 ‘한밤’입니다. 그런데, 한국말사전을 찾아보면, ‘한밤’을 “= 한밤중”으로 풀이하고, ‘한밤중(-中)’을 “깊은 밤”으로 풀이하는군요. 이 같은 말풀이는 엉터리인데, 이를 엉터리로 깨닫는 사람이 드문 듯합니다. ‘한밤’은 “한 + 밤”이고, ‘한’은 크거나 깊거나 너른 모습을 나타냅니다. ‘한밤’이라고 하면 바로 “깊은 밤”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中’을 붙이면 군더더기이지요. 겹말이라고도 하겠습니다.


 한낮중 (x)

 한낮 (o)


  한국말은 언제나 나란히 있습니다. ‘밤’과 ‘낮’이 나란히 있고 ‘아침’과 ‘저녁’이 나란히 있습니다. ‘너’와 ‘나’가 나란히 있으며, ‘있다’와 ‘없다’가 나란히 있지요. 그래서, ‘한밤’이라는 낱말이 있으면 ‘한낮’이라는 낱말이 있어요. 이 대목을 찬찬히 살펴봅니다. 아무도 ‘한낮중’이라는 낱말을 쓰지 않습니다. ‘한낮’이라고만 씁니다. 가장 큰 낮이라고 해서 ‘한낮’이고, 숫자로 치면 열두 시 언저리를 가리키지요. ‘한밤’도 이와 같습니다. 이러한 얼거리를 헤아리면서 ‘한낮·한밤’을 알맞고 올바로 쓰면 됩니다. 4348.4.29.물.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방학도 아닌데 한밤에 찾아와 앞뜰에서 잠이 드는데 어디에서나 늘 있는 일이라도 되는 듯이 할머니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정원(庭園)’은 ‘마당’이나 ‘앞뜰’로 다듬고, “잠이 든 게”는 “잠이 드는데”나 “잠이 들었는데”나 “잠든 일이”로 다듬으며, ‘세상(世上)에’는 ‘어디에서나’로 다듬습니다. “되는 것처럼”은 “되는 듯이”로 손봅니다.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꼬마요정 2015-04-29 09:25   좋아요 0 | URL
잠이 든 게도 고쳐야하는군요~ 오늘도 배우고 갑니다 ㅎㅎ `중`도 안 쓰도록 해야겠어요 ㅎㅎ

파란놀 2015-04-29 12:26   좋아요 0 | URL
`게(것)`를 아무 곳에나 쓰는 일은 알맞지 않아요. 그런데 이 보기글에서처럼 `게(것)`을 말끝에 붙이는 말투는... 아주 널리 퍼졌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