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에 아픈 사람 민음의 시 120
신현림 지음 / 민음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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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94



어머니가 물려주는 노래

― 해질녘에 아픈 사람

 신현림 글

 민음사 펴냄, 2004.7.10.



  말은 어머니가 아이한테 물려줍니다.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무럭무럭 자랄 적에 아기는 어머니가 여느 때에 하는 말을 고스란히 듣습니다. 아기는 어머니 뱃속에서 느긋하게 자라고 나서 이 땅에 태어난 뒤에는 어머니 품에서 젖을 먹으면서 새롭게 자라는데, 이동안 어머니가 아기한테 들려주는 말을 새삼스레 듣습니다.


  아기한테는 어머니 뱃속에서 지낼 무렵과 어머니 젖을 빨며 자라는 동안에 배우는 말이 새롭습니다. 아기는 어머니 뱃속에서 어머니 목소리랑 손길을 나란히 누리면서 말을 노래처럼 듣다가, 이 땅에 태어난 뒤에는 어머니 눈길이랑 몸짓을 나란히 지켜보면서 말을 춤사위처럼 익힙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누구나 어머니한테서 말을 물려받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우리 어머니를 낳은 어머니한테서 말을 물려받았고, 우리 할머니는 우리 할머니를 낳은 어머니한테서 말을 물려받았습니다. 먼먼 옛날부터 어머니가 아이를 낳아 온 사랑으로 말을 물려줍니다. 우리가 오늘 이곳에서 쓰는 말은 아스라히 먼 옛날부터 어머니가 아이를 사랑하면서 물려준 말입니다.



.. 가난에 갇힌 것보다 / 힘없는 나라에 사는 일보다 / 체념에 익숙해지는 것이 더 서러워 / 슬픈 눈을 땅에 떨어뜨리며 ..  (흐느껴라, 노래하라, 타올라라)


.. 무섭게 흐르는 시간은 흐르지 않는 시간 / 달리는 바다는 달리지 않는 바다 / 시간이란 아예 없는 겁니다 최대의 재산인 꿈이 있을 뿐이죠 ..  (우울한 로맨스-휘말려 가다)



  말은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가 찬찬히 물려줍니다. 어머니는 따사로운 사랑노래를 물려주고, 아버지는 슬기로운 삶노래를 물려줍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따사롭게 흐르는 사랑으로 노래와 같은 말을 물려주고, 아버지는 언제나 한결같이 기쁜 삶으로 웃음짓는 말을 물려줍니다.


  아기를 낳으려 한다면, 어버이는 어머니와 아버지로서 이녁 삶을 새롭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아기를 낳으려 하는 어버이는 돈만 많이 벌어서는 안 됩니다. 아기는 돈을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기는 사랑을 바랍니다. 아기가 바라는 사랑을 물려줄 수 있게끔, 돈은 좀 적게 벌더라도 사랑을 한결같이 물려줄 수 있을 만한 너른 가슴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아기 눈망울을 바라보셔요. 아기 눈망울은 오직 어버이 사랑을 바랍니다. 아기가 피자나 케익을 바랄까요? 아기가 떡이나 밥을 바랄까요? 아기는 오직 어머니 젖이랑 물을 조금씩 받아먹으면서 무럭무럭 자랍니다. 젖이랑 물이랑 바람, 이렇게 세 가지만 있으면 아기 몸은 씩씩하게 큽니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있어야지요. 바로 사랑스러운 말입니다. 노래로 불러서 물려주는 사랑스러운 말이 있어야 합니다.



.. 오래된 꿈과 비밀을 간직한 부드러운 사람이고 싶어 / 부드러움은 / 망가진 것을 소생시킬 마지막 에너지라 믿어 ..  (해질녘에 아픈 사람-세월아, 너도 아프냐 나도 아프다 나를 더 아프게 해라)



  갓난쟁이한테 그림책이나 동화를 읽어 주어야 하지 않습니다. 갓난쟁이는 이야기책을 받아먹지 않습니다. 갓난쟁이는 책을 읽어 주는 ‘목소리’만 받아먹습니다. 그러니까, 아기를 옆에 누이고 영어 그림책이나 영어 동화책을 읽어 준다면, 아기는 ‘목소리’를 듣습니다. 어버이는 아기가 일찌감치 영어를 잘 배우기를 바랄는지 모르나, 아기는 이를 아랑곳하지 않아요. 아기는 오직 한 가지 목소리만 듣고 싶습니다. 저를 이 땅으로 부른 어버이가 얼마나 깊고 너른 사랑으로 저를 바라보는가 하는 대목을 알고 싶습니다.


  일하면서 부르는 모든 노래는 삶노래이면서 자장노래이고, 일노래이면서 놀이노래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여느 때에 흔히 부르는 일노래를 귀여겨들은 뒤 저희끼리 놀면서 이 일노래를 놀이노래로 삼아서 부릅니다. 나중에는 일노래를 조금씩 바꾸어요. 노랫가락과 노랫말을 아이 나름대로 바꾸어 새로운 놀이노래를 짓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 곁이나 둘레에서 아무 말이나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은 모든 말을 다 받아먹으니까요. 아이들이 기쁜 눈망울로 아름답게 받아먹을 만한 가장 사랑스럽고 착하면서 참다운 말을 하는 어른이어야 합니다. 어른 스스로 가장 사랑스러운 숨결이 되어야 하고, 어버이라면 누구나 가장 착하고 참다우면서 고운 넋이어야 합니다.



.. 나는 나를 깨워 이렇게 말하겠죠 / “내가 나를 가질 수 없는데 / 내 것이 아닌 것을 가져서 뭐 하냐”고요 ..  (가질 수 없는 건 상처랬죠?)


.. 사랑 안에 들어가 살고 싶어 / 사랑으로 이승을 건너고 싶어 .. (사랑)



  신현림 님 시집 《해질녘에 아픈 사람》(민음사,2004)을 읽습니다. 사랑을 바라고, 사랑을 찾으며, 사랑을 노래하고 싶은 신현림 님이 젊은 날에 쓴 시를 그러모은 책입니다(그렇다고 신현림 님이 이제는 ‘안 젊은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해질녘에 아픈 사람은, 해뜰녘에는 어떠할까 궁금합니다. 해질녘에만 아프고, 해뜰녘에는 안 아플까요. 해질녘뿐 아니라 해뜰녘에도 아플까요.



.. 전쟁이나 대구 참사처럼 사람이 만든 재앙은 / 어미가 막을 순 없지만 / 네가 그린 코끼리를 하늘로 띄울 수 있고 / 어미의 눈물로 한 사발 밥을 만들 수 있고 / 어미의 배터리가 다 될 때까지 / 희망의 폭동을 일으킬 수 있지 / 고향 저수지를 보면 나는 멋진 쏘가리가 되고 / 너를 보면 섬이 된단다 / 너라는 근사한 바다를 헤엄치는 섬 ..  (싱글 맘-엄마는 너를 업고 자전거 탄단다)



  시집 《해질녘에 아픈 사람》을 읽으면 ‘싱글 맘’ 이야기가 흐릅니다. 신현림 님은 가시내를 낳아 씩씩하게 이 아이와 살아간다고 합니다. 아이가 받아먹을 삶노래를 언제나 싱그러이 부르고, 아이와 함께 어른도 함께 누릴 사랑노래를 늘 해맑게 부릅니다.


  때로는 아픔이 사무쳐서 슬픈 노래를 부르지만, 아이 얼굴을 바라보면서 새삼스레 빙그레 웃음짓고는 씩씩하게 기쁜 노래로 고쳐서 부릅니다. 이 지구별에서 살아갈 기쁜 숨결로 거듭나려고 스스로 애씁니다. 이 땅에서 꿈꾸며 노래하는 예쁜 사람이 되려고 스스로 온힘을 기울입니다.



.. 만화는 단추만한 구멍을 뚫어 여유로운 바람을 불어넣는군. ‘내가 좋아하는 건 너뿐’이란 말에 사랑 받는 기분에 휩싸여 오전 열한 시에 쏟아지는 햇살같이 따뜻하고, 창밖 행인들이 아름다워 뵈는군. 시냇물엔 하얀 벚꽃잎이 쌓여 흐르고 봄바람에 보들보들 길이 미끄러지는군 ..  (순정 만화에 중독되겠네)


.. 벨벳처럼 부드러운 어둠 속에 내가 있고 / 여자의 몸보다 사람의 몸이길 바라는 내가 있소 ..  (우울한 육체의 시-생각이 많은 몸)



  어머니랑 아버지가 들려주는 노래를 물려받은 아이는 새로운 어른으로 자랍니다. 새로운 어른이 된 아이들은 이 땅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지어서 다시금 새로운 노래를 부르면서 새로운 아이를 낳습니다.


  어제만 바라본다면 슬픔만 가득할 수 있습니다. 오늘만 바라본다면 까마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제와 오늘에 이어 찬찬히 찾아올 모레를 바라본다면, 이 앞날을 눈물이나 슬픔으로만 채울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한 발 새롭게 내딛을 모레에는 기쁜 웃음이 넘치도록 맑은 노래를 불러야지요.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활짝 웃음꽃을 피우는 노래를 불러야지요.


  사람이 되는 노래를 부릅니다. 사랑이 되는 노래를 부릅니다. 삶이 되는 노래를 부릅니다. 말 한 마디는 사람노래이면서 사랑노래이고 삶노래입니다. 너와 나 사이를 가르는 쇠가시울타리가 아니라, 너와 나 사이에 아름답게 흐르는 무지개가 되도록 노래를 부릅니다.



.. 나무마저 없다면 이곳은 딱딱한 피자 한 덩이요 / 삭막하오 요즘 사람들은 폭탄 같소 성이 나 있소 ..  (한잔의 서울을 들이마시오)


..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고 / 나무를 보면 나무를 닮고 / 모두 자신이 바라보는 걸 닮아간다 ..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스스로 노래가 됩니다. 꽃씨를 심는 사람은 스스로 꽃이 됩니다. 바람을 마시면서 파란 숨결로 웃는 사람은 스스로 바람이 됩니다.


  무엇이 되든 저마다 아름답습니다. 무엇이 되든 저마다 이루는 꿈입니다. 이리하여, 아이를 낳고 아이와 함께 삶을 짓는 어버이나 어른이라면, 가슴에 고운 꿈씨를 심기 마련입니다. 너와 내가 한넋이 되어 따사로이 손을 맞잡는 삶을 이루고 싶은 꿈씨를 심습니다. 우리가 함께 큰 사랑이 되어 넉넉하게 웃음짓는 하루를 짓고 싶은 노랫말을 씨앗으로 심습니다.


  어머니가 물려준 사랑스러운 말을 물려받은 나는 어느새 새로운 어머니가 됩니다. 아버지가 물려준 아름다운 말을 이어받은 나는 어느덧 새로운 아버지가 됩니다. 너와 나는 이곳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면서 활짝 웃음짓습니다. 4348.5.10.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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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삶에 숨결을 베푸는 말 한 마디



  봄에는 봄노래를 듣습니다. 봄노래란 무엇인가 하면 봄에 듣는 노래로, 봄에 찾아오는 제비가 들려주는 노래라든지, 새봄에 새로 깨어난 개구리가 우렁차게 부르는 노래입니다. 봄에 부는 바람도 봄노래를 들려줍니다. 겨울과 다른 바람결이기에 느낌과 결과 무늬가 모두 다른 봄바람입니다. 봄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소리도 봄노래입니다. 새봄에 깨어나는 겨울눈과 봄꽃을 봄바람이 살랑살랑 간질이는 소리도 봄노래예요.


  철마다 새로운 노래를 듣습니다. 철마다 새로운 목숨이 깨어나니, 언제나 새로우면서 맑은 노래를 들을 수 있습니다. 다만, 도시에서는 새로운 철에 새로운 노래를 듣기에 만만하지 않다고 할 만합니다. 언제나 똑같이 흐르는 자동차 소리라든지, 텔레비전이나 손전화 소리라든지, 온갖 기계가 내는 소리에 휩싸이다 보면, 철 따라 다른 ‘철소리’나 ‘철노래’하고 멀어질 만합니다.


  시골에서는 밤하늘 별빛을 철마다 새롭게 누릴 수 있습니다. 낮하늘 구름결도 철마다 새롭구나 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골에서 살더라도 밤하늘이나 낮하늘을 느긋하게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흙을 쪼면서 들일을 하지 않고, 비닐이나 농약을 만지면서 일을 해야 하면 하늘을 볼 겨를이 없습니다. 기계를 부려서 흙을 갈거나 엎거나 닦자면, 하늘뿐 아니라 밭둑에 돋는 풀꽃을 볼 틈이 없습니다.


  아무리 배기가스나 매연으로 매캐한 도시라 하더라도, 내 마음이 곱게 눈을 뜰 수 있다면, 손바닥만 한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별빛과 구름빛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바람은 시골에만 불거나 도시에는 안 불지 않습니다. 바람은 지구별을 골고루 어루만집니다. 그러니, 먼 데에서 울리는 봄바람 노랫소리를 도시 한복판에서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비록 제비가 서울 시내로 찾아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서울 한복판에서 개구리 노랫소리나 풀벌레 노랫소리를 듣기 어렵다 하더라도, 서울을 둘러싼 숲과 들과 바다와 냇물에서 퍼지는 곱고 보드라운 봄노래에 귀를 기울인다면, 마음 가득 넉넉하고 짙푸를 수 있습니다.


  미우치 스즈에 님이 빚은 만화책 《유리가면》(학산문화사,2010) 가운데 열둘째 권을 읽으면, ‘헬렌 켈러’를 다룬 연극 무대에서 배우가 외치는 말이 있습니다. 연극이기에 무대에 설 때마다 말(대사)이 조금씩 바뀌기도 하는데, 설리번 님이 헬렌 켈러한테 ‘말’을 가르치려고 하면서 외치는 이야기가 있어요.


  만화책에 나오는 연극 무대에서 한 번은 “난 너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거야! 이 땅의 모든 것을! 언어란 빛에 비추면 오천 년이나 옛날의 것도 볼 수 있단다! 우리들이 느끼고, 생각하고, 알고 있는, 그것을 전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이 언어 속에 있는 거란다! 단 한 마디의 말로써 넌 그 손으로 세계를 움켜잡을 수 있게 되는 거야(126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이 대목을 보다가 한참 멎었습니다. 다음 쪽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이 이야기를 오래도록 되읽었습니다. ‘말이라고 하는 빛(말빛)’으로 비추면 어제와 오늘이 하나라고 이야기하는 대목을 곰곰이 헤아립니다. 우리가 알 뿐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을 ‘말 한 마디’로 갈무리해서 지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찬찬히 돌아봅니다. 말 한 마디를 터뜨릴 때에 온누리(세계)를 두 손으로 움켜쥘 수 있다는 이야기를 가만히 되씹습니다.


  만화책을 조금 더 읽으면, “우리들이 느끼고 생각하고 알고 있는 것, 그것을 주고받을 수 있는 방법이 언어 속에 있는 거야. 언어만 있으면 인간은 암흑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어. 무덤 속에 남아 있지 않아도 되는 거란다. 단 한 마디의 언어로, 넌 그 손에 세상을 움켜잡게 되는 거야(152쪽).” 같은 이야기도 흐릅니다. 설리번 님이 헬렌 켈러한테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하는데, 앞 대목하고 몇 군데가 다르지만 줄거리는 같다고 할 만합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는 ‘느낌과 생각과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길을 여는 실마리’가 ‘말 한 마디’에 있다고 밝힙니다. 이러면서, ‘말을 손에 쥔’ 사람은 ‘무덤에 갇히지 않는다’고 덧붙입니다. 다시 이야기하자면, ‘말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싱그럽게 삶을 누린다’는 뜻이 됩니다. 말을 하기에 살고, 말을 못 하기에 죽는다고 하겠습니다.


  바람이 불어서 바람을 마십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람을 마십니다. 들짐승과 바닷짐승도 바람을 마십니다. 깊은 바닷속에서도 바람을 마십니다. 바닷물에 녹아든 바람을 마시지요. 바람이 없으면 뭍짐승뿐 아니라 물짐승 모두 죽습니다. 더욱이 풀과 꽃과 나무도 바람을 마셔야 삽니다. 바람이 없으면 풀과 꽃과 나무도 몽땅 죽습니다.


  바람이 있기에 지구별이 푸르다고 할 만합니다. 바람이 있으니 하늘과 바다가 파랗다고 할 만합니다. 바람은 이 지구별에 푸르면서 파란 숨결로 흐릅니다. 사람을 비롯한 뭇목숨은 바람을 맞아들이면서 온몸을 푸르면서 파란 넋으로 가꿉니다.


  몸을 살리는 숨결이 바람이라고 한다면, 마음을 살리는 숨결은 말이라고 할 수 있다고 느낍니다. 바람을 마시면서 몸이 새롭게 거듭난다면, 말을 먹고 나누면서 마음이 새롭게 거듭난다고 느낍니다.


  말이 있기에 생각을 짓습니다. 말이 있어서 생각을 마음에 심습니다. 말이 있으니 생각을 마음에 심어서 삶을 이룹니다. 말이 있기 때문에 생각을 마음에 심어 삶을 이룬 사람이 사랑을 꽃피워 아름답게 하루를 누립니다.


  만화책 《유리가면》은 연극을 하는 삶길을 걷는 두 아이가 나오는 줄거리를 보여줍니다. 두 아이 가운데 한 아이(마야)는 ‘보랏빛 장미로 찾아오는 사람’을 마음으로 깊이 사랑하고, ‘보랏빛 장미로 찾아오는 사람’도 마야라고 하는 수수한 아이를 마음으로 넓게 사랑합니다. 연극을 이루는 바탕은 ‘말’과 ‘말로 지은 몸짓’입니다. 사랑을 잇는 끈은 ‘마음’과 ‘마음을 담은 말’입니다.


  우리가 읽는 책은 ‘글을 종이에 얹어서 빚’습니다. 글이란 ‘말을 옮긴 그릇’입니다. 그러니, 책을 읽는다고 할 적에는 ‘말을 읽는다’는 셈이요, 말을 읽는다고 할 적에는 ‘삶을 갈무리하고 아우른 이야기’를 ‘말빛’으로 비추어서 스스로 받아먹는 셈입니다. 책읽기는 글읽기이면서 말읽기요, 말읽기는 삶읽기입니다. 삶읽기는 생각읽기나 마음읽기나 사랑읽기입니다.


  바람이 있기에 모든 목숨이 숨을 쉬면서 새롭게 하루를 맞이합니다. 말이 있기에 모든 사람이 눈을 뜨면서 귀를 열고 머리를 가꿉니다. 말 한 마디로 생각을 지어서 온누리에 아름다운 삶이 드리우도록 북돋웁니다. 바람 한 줄기가 흐르는 봄날에, 말 한 마디를 새삼스레 읊습니다. 4348.5.10.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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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물감 2015-05-10 06:22   좋아요 0 | URL
유리가면 참 재미있게 본 기억이 있어요. 일본드라마로 보았는데 배우들도 멋졌구요. 곱씹을만한 대사들이 많은것같아요

파란놀 2015-05-10 06:29   좋아요 1 | URL
요새 천천히 첫 권부터 다시 읽으면서
그동안 미뤄둔
`1권부터 모든 낱권책에 느낌글 쓰기`를 해 봅니다 ^^;;

낱권마다 하나씩 느낌글을 붙일 만한
멋진 작품이라고 느껴요~
 

보일러 기름 10리터



  엊그제 드디어 보일러 기름을 새로 넣는다. 인천에 사는 형한테서 살림돈을 얻었기에 넣을 수 있던 기름이다. 면소재지에 갈 적에 기름집을 들른다고 하다가 이레 남짓 자꾸 잊었다. 우체국 볼일을 마치고 자전거를 집으로 몰 즈음, ‘아, 기름집에 들른다고 하다가 또 잊었네’ 하고 떠올렸다. 게다가 면소재지 기름집은 수협 기름집이라, 주말에는 문을 안 열고, 여느 날에는 여섯 시가 넘으면 문을 닫는다. 비가 오는 날에는 자전거를 타고 찾아가지도 못한다.


  수협도 농협처럼 공무원이라 할 만하다. 공무원을 마주하는 일이란 여러모로 만만하지 않다. 이들 얼거리(늦은 아침과 이른 저녁)에 맞추어서 찾아가야 하니까. 아무튼, 2월 23일에 200리터를 넣고 5월 8일에 다시 200리터를 넣었다. 올겨울은 이럭저럭 잘 났다고 느낀다. 그나저나, 2월 23일에 기름을 넣을 적에는 보일러 기름통에 10리터쯤 덜 차게 넣었다고 느꼈는데, 엊그제 기름을 넣을 적에는 우리가 시킨 대로 200리터를 꽉 채워서 넣었다고 느낀다.


  이를 어떻게 아는가? 기름통에는 기름줄이 있다. 기름이 얼마나 들었는가를 보여주는 눈금줄이지. 그러니, 이 눈금줄을 보면 기름을 얼마나 넣었는지 알 수 있다. 눈금줄이 뻔히 있으니 눈속임을 하면 다 알아챌 수 있는데, 시골에서는 눈속임을 하는 기름집이 많다. 수협 기름집에서도 더러 이런 눈속임을 느낀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하면, 눈금줄을 안 속이고 200리터를 꾹꾹 눌러서 넣어 주니 어쩐지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눈금줄을 안 속이고 넣어 주는 기름집 일꾼이 참으로 ‘고맙’다. 4348.5.10.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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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장남자 시코쿠 (황병승) 문학과지성사 펴냄, 2012.11.30.



  두 아이를 데리고 읍내마실을 다녀오는 길에 시집을 두 권 챙긴다. 읍내로 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달리면서 한 권을 살짝 읽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기다리는 한 시간 반 즈음 또 한 권을 살짝 읽는다. 시골서 살며 읍내마실 다녀오는 길에 읽기에 《여장남자 시코쿠》는 안 어울릴까? 시를 읽다가 아이들을 쳐다보다가, 다시 시를 읽다가 아이들과 놀다가, 또 시를 읽다가 이제 책은 가방에 집어넣고 아이들과 군내버스에 오른다. 시라고 하는 글에서 글투나 글결이나 글씨는 대수롭지 않다. 실험시이든 서정시이든 무엇이 대수로울까. 어떤 시이든 삶을 노래하기 마련이다. 어떤 삶이든 시로 노래할 수 있다. 이를 알 수 있다면 누구나 시를 쓸 수 있고, 이를 사랑할 수 있으면 누구나 시를 읽을 수 있다. 오늘 문득 새롭게 하나를 깨달았다. 두멧시골에는 아직 제비가 찾아오는데, 여느 마을은 워낙 농약을 많이 뿌리니 제비가 살아남지 못하는데, 읍내에는 자동차가 시끄럽거나 배기가스로 매캐하더라도 농약이 없으니 제비가 온통 읍내로 몰려들어서 사는구나 싶기도 하다. 마을보다 읍내에 외려 제비가 더 많다. 4348.5.10.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한 줄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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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장남자 시코쿠
황병승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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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기를 기다리는 책들을 생각하며



  책을 읽고 나서 느낌글을 쓴다고 할 때에는, 사랑받기를 기다리는 책한테 새로운 숨결을 나누어 준다고 본다. 내 나름대로 어느 책 하나를 이렇게 읽었노라 하고 밝히려는 느낌글이 아니라고 본다. 책마다 다르게 흐르는 숨결을 받아들이면서 누린 기쁨을 내 나름대로 풀어놓기에 느낌글을 쓸 수 있다고 본다.


  날마다 얼마나 많은 책이 새롭게 나오는가. 이 많은 책은 얼마나 고운 손길을 타면서 태어났을까. 퍽 많은 사람이 기다리거나 바랄 만한 책도 태어나지만, 눈여겨보지 않는다면 알아채기 쉽지 않은 책도 태어난다. 어느 책이든 내 마음을 따스하게 보듬어 줄 책이 될 테고, 나는 어느 책이든 내 마음이 닿을 만한 책을 고맙게 맞이하면서 기쁘게 삭인다.


  느낌글을 쓸 적에는 ‘사랑받기를 기다리는 책’이 앞으로 한결 빛나도록 한손을 거드는 셈이라고 본다. 어느 책 하나가 나한테 다가와서 나누어 준 고운 숨결이 널리 퍼질 수 있도록 살며시 징검돌을 놓는 셈이라고 본다. 4348.5.10.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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