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 없애야 말 된다

 (978) 경제적 10


물놀이를 즐기는 그 자체보다도, 이른바 경제적 여유를 과시하는 심리적 충족을

《박연구-어항 속의 도시》(문예출판사,1976) 70쪽


 경제적 여유를 과시하는

→ 돈이 많다고 뽐내는

→ 돈이 넉넉하다고 자랑하는

→ 돈 많은 살림을 드러내려는

→ 돈 많은 사람이라고 우쭐거리는

→ 돈 자랑을 하고 싶은

 …



  돈이 많다고 거들먹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이 많기에 우쭐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 자랑을 하려는 사람이 있고, 돈이 많다며 뽐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이 많다고 자랑하듯이, 지식이 많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을 테지요. 쉽고 수수하게 쓰면 넉넉할 테지만, 온갖 바깥말을 끼워넣어 글 자랑을 하려는 사람이 있을 테고요.


  물놀이를 즐기며 기쁨을 누려야 기쁩니다. 돈이 많다고 뽐내려 하면 기쁨이 찾아들지 않습니다. 물놀이를 즐기며 아름답게 웃을 때에 삶이 아름답습니다. 돈이 많다고 자랑하려 하면 아름다운 웃음이 피어나지 않습니다. 돈도 힘도 이름도 나눕니다. 말도 생각도 삶도 나눕니다. 4340.9.28.쇠/4342.3.24.불/4348.5.1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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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놀이를 즐기려 한다기보다도, 이른바 돈 자랑을 하려는 마음을


“물놀이를 즐기는 그 자체(自體)보다도”는 “물놀이를 즐기려 한다기보다도”나 “물놀이를 즐기기보다도”로 손봅니다. ‘과시(誇示)하는’은 ‘뽐내는’이나 ‘자랑하는’이나 ‘우쭐대는’이나 ‘거들먹거리는’이나 ‘잘난 척하는’으로 다듬으며, “심리적(心理的) 충족(充足)”은 ‘마음’이나 ‘마음 채우기’나 ‘알량한 마음’으로 다듬어 줍니다.


..



 '-적' 없애야 말 된다

 (986) 경제적 11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또 경제적 지원이 있은 것도 아니다

《곤충을 벗삼아 한 평생》(신유항교수 정년퇴임 기념 문집 간행위원회,1996) 109쪽


 경제적 지원이 있은 것도 아니다

→ 돈이 많지도 않았다

→ 돈이 넉넉하지도 않았다

→ 돈으로 한 일도 아니다

→ 돈을 받은 적도 없다

→ 돈을 대는 사람도 없다

→ 돈을 보태는 사람도 없다

 …



  즐겁게 하는 일이라면 즐겁습니다. 돈이 넉넉하기에 어떤 일을 하지 않습니다. 돈을 대는 사람이 있어야 어떤 일을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즐겁게 일을 하고, 스스로 기쁘게 웃으면서 일을 합니다.


  돈을 대는 사람이 있으면 고맙습니다. 돈을 보태는 사람이 없으면 씩씩하게 힘을 냅니다. 뒷배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갑습니다. 벗바리가 없으면 홀로 기운차게 나아갑니다. 마음이 넉넉하다면 어떤 일이든 훌륭히 할 수 있습니다. 4340.10.17.물/4342.3.24.불/4348.5.1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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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또 돈을 대는 사람도 없다


“시킨 것도 아니고”는 “시킨 일도 아니고”나 “시키지도 않았고”로 다듬고, “지원(支援)이 있은 것도 아니다”는 “도움도 있지 않았다”나 “도와준 적도 없었다”로 다듬을 수 있는데, ‘경제적’하고 함께 다듬어서 “돈을 대는 사람도 없다”나 “돈으로 한 일도 아니다”로 고쳐쓸 수 있습니다.


..



 '-적' 없애야 말 된다

 (1125) 경제적 12


처음 갖는 해외여행인지라 들뜨는 것도 잠깐 경제적 궁핍이 나를 죄었다

《김유미-내 안의 야생공원》(신구문화사,1999) 89쪽


 경제적 궁핍이

→ 가난이

→ 돈이 떨어져서

→ 돈이 쪼들려서

→ 가벼운 주머니가

 …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하거나 돈이 없을 적에 ‘가난’하다고 합니다. 한자말 ‘궁핍’을 한국말사전에서 찾아보면 ‘가난’으로 고쳐쓰라고 나옵니다. 그러니, 이 보기글에 나오는 “경제적 궁핍”은 “경제적 가난”이라는 소리입니다. “경제적 가난”이라니, 아무래도 얄궂고 어설픈 말마디입니다.


 가난이 나를 죄었다

 가난한 살림이 나를 죄었다

 쪼들리는 살림이 나를 죄었다


  돈이 없을 때에는 “돈이 없다”고 하면 됩니다. 돈이 모자라면 “돈이 모자라다”고 하면 돼요. 살림이 쪼들리니 “쪼들리는 살림”이고, 넉넉하지 못한 살림이니 “가난한 살림”입니다. 4341.4.24.나무/4348.5.11.달.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첫 외국여행인지라 들뜨기도 살짝, 쪼들리는 주머니가 나를 죄었다

처음으로 나라밖 마실을 하는지라 들뜬 마음도 살짝, 가난이 나를 죄었다


“처음 갖는 해외여행(海外旅行)인지라”는 “첫 외국 여행”이나 “처음으로 나라밖 나들이를 하는지라”로 손봅니다. “들뜨는 것도 잠깐(暫間)”은 “들뜬 마음도 살짝”이나 “들뜨기도 살짝”으로 손질하고, ‘궁핍(窮乏)’은 ‘가난’으로 손질합니다.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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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은 새 두 마리 (사진책도서관 2015.5.8.)

 ―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 ‘사진책도서관 함께살기’



  도서관 이야기책 〈함께살기〉 13호를 찍는다. 다음주부터 신나게 봉투질을 해서 부치려 한다. 서울에 있는 ‘포토넷’ 출판사에서 사진책 세 상자를 도서관으로 보내 주었다. 이 사진책은 이태 남짓 앞서 포토넷 출판사로 보낸 책들이다. 포토넷 출판사에서는 사진비평 《사진책과 함께 살기》를 2010년에 펴내 주었고, 이 책을 이어 사진비평을 새로 한 권 펴내기로 했는데, 출판사 살림이 자꾸 힘들어지면서 그동안 책을 내지 못했고, 사진비평을 새로 펴내면 이 사진책으로 전시와 강연을 하기로 했으나, 아무래도 사진비평책을 못 내겠다는 뜻이리라 느낀다.


  여러 해 도서관을 떠났던 책이 돌아오니 반갑다. 비록 사진비평책은 나오지 못하더라도 머잖아 책으로 묶을 수 있기를 꿈꾸어 본다.


  사진책이 담긴 상자를 수레에 싣고 도서관으로 나른다. 도서관으로 들어서니 딱새 한 마리가 도서관 바닥에 죽은 채 있다. 엊그제만 해도 도서관에서 새를 본 일이 없는데 언제 들어와서 언제 이렇게 몸부림을 치다가 죽었을까. 도서관 둘레에서 다른 사람들이 삽차를 써서 땅을 파헤치느라 창문도 안 열고 지냈는데, 어떻게 어디로 들어왔다가 밖으로 못 나가고 죽었을까.


  새 주검을 치우려고 쓰레받기에 올려놓는다. 사진책 담은 상자를 안쪽으로 옮기는데 참새 주검을 본다. 참새는 또 언제 들어왔을까. 이 작은 새들이 어디에 틈이 있어서 살짝 들어왔다가 다시 빠져나가지 못하고 그만 숨을 거두었을까.


  큰아이가 새 주검을 더 찾아보겠다고 도서관을 이리저리 누빈다. 끝 칸에도 참새 주검이 하나 더 있다. 이 작은 새들이 도서관에 사람이 들어왔으면 날갯짓이라도 해서 저희가 있는 줄 알리면 창문을 열어 주었을 텐데, 그저 조용히 숨죽인 채 있다가 그만 굶어서 죽은 듯하다. 가녀린 새 주검을 셋 치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빈 수레에 두 아이를 태운다. 아이들은 어느새 ‘죽은 새’를 잊은 듯하다. 신나게 노래하면서 집으로 돌아간다. ㅎㄲㅅㄱ



* 도서관 나들이 오시려면 먼저 전화하고 찾아와 주셔요 *

* 사진책도서관(서재도서관)을 씩씩하게 잇도록 사랑스러운 손길을 보태 주셔요 *

☞ 어떻게 지킴이가 되는가 : 1평 지킴이나 평생 지킴이 되기

 - 1평 지킴이가 되려면 : 다달이 1만 원씩 돕거나, 해마다 10만 원씩 돕는다

 - 2평 지킴이가 되려면 : 다달이 2만 원씩 돕거나, 해마다 20만 원씩 돕는다

 - 평생 지킴이가 되려면 : 한꺼번에 200만 원을 돕거나, 더 크게 돕는다

* 도서관 지킴이 되기 : 우체국 012625-02-025891 최종규 *

* 도서관 지킴이가 되신 분은 쪽글로 주소를 알려주셔요 (010.5341.7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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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랑 놀자 127] 치움질



  아침에 일어나서 부엌을 치우고 마당을 씁니다. 자질구레한 것을 한창 치우다가 ‘청소(淸掃)’라는 낱말이 문득 떠오릅니다. 어릴 적부터 집이나 마을이나 학교에서 으레 ‘청소’라는 낱말을 들었는데, 마을 어르신은 “청소는 무슨, 그저 치울 뿐이지.” 같은 얘기를 으레 들려주었습니다. 할매나 할배가 비질을 하거나 걸레질을 하거나 집살림을 건사하는 몸짓은 ‘치움질’일 뿐이고 ‘청소’는 아니라고 했어요. 한국말사전을 한번 살펴봅니다. ‘청소’는 “더럽거나 어지러운 것을 쓸고 닦아서 깨끗하게 하다”를 뜻한다고 합니다. ‘치우다’는 “청소하거나 정리하다”를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두 낱말은 똑같은 뜻인 셈입니다. 다시 생각을 해 봅니다. ‘청소’라는 낱말은 일제강점기에 조금씩 퍼졌다고 할 만하고, 새마을운동을 나라에서 부채질하면서 널리 퍼졌다고 할 만합니다. 예나 이제나 나이가 제법 많은 분들은 “자, 집을 치워 보자”라든지 “골짜기에 버려진 쓰레기를 치우자”처럼 말씀합니다. 이제 부엌 치움질과 마당 치움질을 마무리짓습니다. 아이들을 불러 마당에서 놀도록 하고 마당을 마저 치웁니다. 치움질을 마쳤으니 아침을 지으려 합니다. 4348.5.11.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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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58 ‘뛰다’와 ‘달리다’



  한 사람은 뛰고, 다른 한 사람은 달립니다. 한 사람은 높이 솟으려 하고, 다른 한 사람은 멀리 나아가려 합니다.


  한 사람은 뛰면서 높이 솟으려 하는데, 가슴이 함께 뛰고, 뜻과 생각이 나란히 뜁니다. 뛰기 때문에 처음에는 올라가고, 이내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고, 이윽고 내려옵니다.


  다른 한 사람은 달리면서 멀리 나아가려 하는데, 달리면 달릴수록 더욱 빠릅니다. 빠르게 달리면서 바람을 가릅니다. 달리고 달리니, 내가 처음 있던 이곳에서 더 빠르게 멀어지고, 내가 처음 있던 이곳에서 저곳으로 나아가면서, 어느새 저곳에서도 또 새로운 다른 곳으로 나아갑니다.


  한곳에 가만히 있으면서 뜁니다. 한곳에서 노래하며 뜁니다. 한곳에서 웃음을 지으면서 뛰고, 한곳에서 춤을 추어 이야기를 지으며 뜁니다.


  한곳에 가만히 있지 않으면서 달립니다. 한곳에 가만히 있지 않으면서 노래합니다. 한곳에서 다른 새곳으로 나아가면서 웃음을 짓고, 새로운 춤이 잇달아 터지면서 새로운 이야기도 함께 터져나옵니다.


  우리 숨은 늘 쿵쿵 뜁니다. 때로는 콩콩 뜁니다. 내 숨은 늘 내 몸에 고즈넉히 있으면서 뜁니다. 내 숨은 다른 데로 가지 않고 늘 내 몸에 깃듭니다. 내 넋도 언제나 내 몸에 함께 있습니다. 내 넋은 내 몸이 내 숨을 받아들여서 내 목숨을 건사하도록 지켜보면서 이곳에 함께 있습니다. ‘뛰기’란 바로 늘 언제 어디에서나 이곳에 깃들면서 새롭게 거듭나려는 몸짓입니다.


  우리 마음은 늘 바람을 가릅니다. 우리 몸은 마음을 따라서 어디이든 함께 달립니다. 우리 마음이 바다를 가로지르면, 우리 몸도 바다를 가로지르는 길을 찾아나섭니다. 우리 마음이 너른 숲을 헤치고 달리면, 우리 몸도 너른 숲을 헤치고 달리는 길을 찾아나섭니다. 내 넋은 내 생각을 따라서 어디로든 달립니다. 내 몸은 내 마음을 따라서 어디로든 달립니다. 달리고 다시 달리고 또 달리고 거듭 달려서 새롭게 달리니, 내 몸은 지치지 않습니다. 달리고 달리며 자꾸 달리는 몸과 마음은 늘 새롭게 다시 태어나니, 언제나 ‘기쁨’이면서 젊음입니다. 달리는 몸과 마음에는 ‘늙음’이나 죽음이 없습니다.


  뛰는 숨결은 언제나 즐거움입니다. 제자리에서 뛰지만, 언제나 즐거움이요 싱그러운 삶입니다. 그리고, 뛰는 숨결이 멎으면, 이때에도 곧바로 늙음이면서 죽음입니다.


  뛰지 않거나 달리지 않으면 죽음이자 늙음입니다. 뛰거나 달리면 삶이자 새로움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뛰면서 달립니다. 우리는 저마다 달리면서 뜁니다. 뛰기만 하지 않고, 달리기만 하지 않습니다. 뛰기도 하고 달리기도 합니다. 뜀박질과 달음박질이 서로 맞물리면서 삶이 태어납니다. 뛰고 달리는 몸짓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자랍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으나, 이내 한숨이 몸에 깃들어 새숨이 되고, 한숨이 새숨으로 되는 결을 살펴서 첫걸음이 새걸음으로 나아갑니다. 즐겁게 뛰면 됩니다. 기쁘게 달리면 됩니다. 즐겁게 웃고 노래하면 됩니다. 기쁘게 웃고 노래하면 됩니다. 우리 삶에는 늘 즐거움과 기쁨이 함께 어우러집니다. 마음으로 고이 품는 즐거움이요, 마음 바깥으로 바람에 실려 날리는 기쁨입니다. 웃음과 노래가 즐거움과 기쁨을 만나서 이야기로 태어나니, 이 이야기에서 사랑과 꿈이 가만가만 피어나면서 온누리를 따사롭고 너그럽게 껴안습니다. 4348.3.12.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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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닷 Photo닷 2015.5 - Vol.18
포토닷(월간지) 편집부 엮음 / 포토닷(월간지) / 2015년 4월
평점 :
품절





찾아 읽는 사진책 206



사진이 보는 곳, 사진을 보는 마음

― 사진잡지 《포토닷》 18호

 포토닷 펴냄, 2015.5.1.



  사진잡지 《포토닷》 18호(2015.5.)를 읽습니다. 《포토닷》 첫머리에 실은 “평화박물관이 운영하는 전시공간 스페이스99에서 예정됐던 이재갑 사진전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 전이 참전군인 단체들의 무력시위와 압력행사로 개막식과 환영식 등 행사가 파행을 겪은 일이 발생했다(17쪽).” 같은 이야기를 짤막하게 읽습니다. 왜 참전군인은 무력시위와 압력행사를 벌이면서 사진전시를 못 하게 할 생각이었을까요? 사진 몇 점이 얼마나 대수롭기에 이런 사진을 사람들이 못 보게 할 생각일까요? 이 전시장에 걸린 사진을 사람들이 보아서는 안 될 까닭이 있을까요? ‘한군국 증오비’를 찍은 사진은 참전군인 이름을 깎아내리는 몸짓이라고 여길 만할까요? 왜 베트남에 ‘한국군 증오비’가 섰는가를 차분히 돌아볼 마음은 있을까요?


  베트남 사내는 한국 군인이 쏜 총에 맞아서 죽어야 했습니다. 베트남 가시내는 한국 군인한테 몸을 짓밟힌 뒤 총에 맞아서 죽어야 했습니다. 버젓이 알려진 이 같은 이야기를 고개 숙여 뉘우치는 참전군인이 있고, 이러한 이야기를 꽁꽁 감추는 참전군인이 있습니다.


  일본사람은 배를 타고 한국으로 건너와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짓밟았습니다. 이 짓을 뉘우치는 일본사람이 있고, 이러한 일은 정벌이라고 여기는 일본사람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인데, 한겨레도 지난날 고구려는 중국 쪽으로 군대를 보내어 땅을 넓혔다고 말합니다. 다만, 고구려가 땅을 넓혔다는 말을 할 뿐, 이때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거나 짓밟았는가 하는 대목은 역사책에 한 줄로도 안 나옵니다. 그저 ‘정벌’이라고 말할 뿐입니다.





  《포토닷》 끝자락에 실은 “정작 천만 명에 육박하는 이들이 생산하는 사진들을 살펴보면, 그것이 그 어마어마한 숫자만큼 다양하지 않다는 건 확실하다. 각종 사진 커뮤니티를 살펴보면 그곳에 올라오는 대다수의 사진은 주로 ‘피사체의 힘’에 의지하는 그림 같은 풍경과 화보 스타일의 인물사진에 편중돼 있다(112쪽/이기원).” 같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몇몇 이름난 사진기를 즐겨쓰는 사람들이 모인 인터넷모임이 퍽 많고, 회원도 대단히 많습니다. 날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사진을 찍어서 인터넷에 올립니다. 한국에서 사진을 즐기는 사람은 그야말로 아주 많습니다.


  따로 ‘전문 사진장비’를 쓰지 않더라도 손전화로 사진을 찍는 사람이 많았고, 요즈음은 스마트폰으로 무척 멋지다 싶은 사진을 찍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터넷 사진모임’ 사진은 《포토닷》에 실은 글에서도 다루듯이 ‘피사체의 힘’이나 ‘그림 같은 풍경’이나 ‘화보 스타일 인물사진’이기 마련입니다. 사진으로 삶을 드러내거나 밝히거나 나누려고 하는 몸짓은 좀처럼 터져나오지 못합니다. 멋져 보이는 사진이 아닌, 삶을 사랑하는 사진으로는 좀처럼 나아가지 못합니다.


  ‘멋져 보이는’ 사진이나 ‘그림 같은’ 사진은 겉모습입니다. 겉모습은 겉치레입니다. 겉모습이나 겉치레는 삶이 아니라 껍데기입니다.





  값비싸거나 값진 장비가 사진을 찍어 주지 않습니다. 사진은 바로 ‘내가 스스로’ 마음을 열어서 찍습니다.


  “작업이라는 게 결국 나를 향한 스스로의 질문이고, 이에 대한 고민이기 때문에, ‘기억’이란 소재는 평생 가져갈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24쪽/이재용).” 같은 이야기를 되새깁니다. 사진을 찍든 글을 쓰든, 늘 내가 나한테 묻습니다. 어떤 사진을 찍으려 하는지, 어떤 글을 쓰려 하는지, 늘 내가 나한테 묻습니다. 사진 한 장을 어디에서 누구와 나누려 하는지, 글 한 줄을 어디에서 누구와 나누려 하는지, 이 같은 이야기도 늘 내가 나한테 묻습니다.


  베트남에서 전쟁이 터졌을 적에, ‘돈(달러)을 벌려고 사람 죽이는 짓’을 시킨 대통령이나, ‘돈을 벌 생각으로 사람 죽이는 짓’을 한 사람이나 서로 같습니다. 사람을 죽이라고 시킨 사람만 나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죽인 사람만 나쁠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손을 맞잡고 서서 그들 스스로 저지른 ‘살인’을 뉘우치고 새 삶으로 거듭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되지 못한다면, 사진을 제대로 찍지도 못하고 제대로 읽지도 못합니다.





  “작가는 남도에 터를 잡기 시작한 8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남도의 풍경을 발견해 간다. 그에게 사진은 표현이 아니라 ‘발견’이다. 오래 전부터 쓰여 왔던 역사와 신화의 원형, 혹은 땅의 주인이 작가의 눈앞에 이미 있었고, 널려 있었다(43쪽/최연하).” 같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문화는 따로 있지 않습니다. 문화회관이라는 건물에 문화가 있지 않습니다. 문화단체에서 문화를 세우지 않습니다. 문화예술인이라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우리 둘레에서 수수하게 삶을 짓는 사람들이 언제나 스스로 문화를 이룹니다. 네가 짓는 하루가 바로 문화이고, 내가 가꾸는 하루가 새삼스레 문화입니다.


  오늘 시골에서 흙을 일구는 사람이 ‘흙’과 풀과 숲이라고 하는 문화를 가꿉니다. 오늘 밥을 짓고 빨래를 하는 사람이 ‘살림’과 집과 보금자리라고 하는 문화를 가꿉니다. 오늘 아기한테 젖을 물리거나 아이한테 말을 가르치는 여느 어버이가 ‘말’과 이야기와 노래라고 하는 문화를 가꿉니다.


  베트남전쟁과 얽힌 이야기를 마주하려고 베트남으로 찾아가서 ‘한국군 증오비’를 사진으로 찍은 분이 있다고 합니다. 이분이 ‘한국군 증오비’를 사진으로 찍었든 안 찍었든 베트남에는 어엿하게 ‘한국군 증오비’가 있습니다. ‘한국군 증오비’를 찍은 사진을 한국에서 전시를 할 수 있든 없든(개막식은 제대로 못 치렀다고 하지만, 사진전시는 잘 마쳤다고 합니다), 베트남에는 어엿하게 ‘한국군 증오비’가 쉰 해 가까이 서서 비와 바람과 햇볕을 맞았습니다. 베트남사람 가슴에는 한국군이 뿌린 ‘미움’이라는 씨앗이 자랐습니다.




  “과거 서울의 모습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사진들이 꼭 설명이 필요할 정도로 난해하거나 어려운 작업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도대체 ‘왜?’ 이런 캡션을 달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한미사진미술관 전시를 비롯해 이전 전시에서 그랬던 것처럼, 촬영 장소와 시기처럼 최소한의 정보만 제공했더라도 작품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인데, 마치 답안지를 펼쳐놓고 문제지를 푸는 것처럼 전시를 보는 것이 과연 ‘감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67쪽/이기원)?” 같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얼핏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답답한 일이 곧잘 터지는 한국 사회입니다. 사진 한 장을 한결 너르고 기쁘게 누리는 길이 생각과 달리 잘 안 열리기도 하는 한국 사회입니다.


  “일하면서 여성성을 버려야 하는 슬픈 현실을 자주 직면한다. 나는 사진을 찍는 사람이지, 연애를 하려는 사람이 아니다. ‘보리’는 코미디언처럼 까부는 행동으로 보호막을 쳤고, 나는 문신을 하고 옆머리를 삭발하면서 까칠하게 벽을 쳤다(101쪽/김태은).” 같은 이야기를 읽고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패션사진을 찍는 ‘여자’ 사진가는 사진가라기보다 ‘여자’ 대접(?)을 받아야 했다고 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면 누구나 사진가인데, 왜 사진가 아닌 ‘여자’ 대접을 받아야 했을까 궁금합니다. 어떤 사진가들이 ‘내 이웃’을 이웃으로 여기지 않고 ‘여자’로만 바라보려 했을까요.




  가만히 보면, 지난날 어느 대통령 한 분도 베트남사람을 ‘이웃나라 사람’으로 바라보지 않았고, 베트남으로 날아가서 사람들을 총으로 쏘아 죽이면서 돈을 벌려고 했던 사람들(거의 모두 사내)도 베트남사람을 ‘이웃나라 동무’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소위 예술사진을 생산한다는 작가, 혹은 이러한 사진들에 대해 논하는 사람들은 사진의 이러한 본질적 측면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럴싸한 장면들을 그럴싸하게 프린트해 전시장에 걸어 놓고 예술의 작위를 수여한다고 다 같은 예술사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이런 행위들은 어떤 사진도 예술이 될 가능성이 있음을 남용한 것뿐이다. 사진은 우선 사진으로 존재할 뿐이다(111쪽/장정민).” 같은 이야기를 되새깁니다. 어떤 사진이든 모두 문화가 되고 예술이 됩니다. 이 사진만 문화나 예술이 되지 않습니다. 저 사진만 패션이나 빈티지가 되지 않습니다. 그 사진만 다큐나 리얼리즘이 되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담은 사진이라면, 어떤 사진이든 문화가 되고 예술이 되며, 패션이나 다큐도 됩니다. 이야기를 담지 못한 사진이라면, 아무리 이름난 작가가 빚은 작품이라 하더라도 ‘작품’으로 그칠 뿐, ‘사진’이라는 이름을 얻지 못합니다.


  “사진을 사진답게 찍을 때에 비로소 사진답다고 합니다. 그럴듯한 모습을 찍으면 그저 ‘그럴듯할’ 뿐입니다. 멋있어 보이게 찍는다면 그저 ‘멋있어 보일’ 뿐이지요. 이렇게 만지작거리거나 저렇게 꾸민다고 해서 사진이 빛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붙이거나 저렇게 자른다고 해서 사진이 도드라지지 않습니다. 사진 한 장에 담을 이야기를 제대로 바라보아야 비로소 사진이 됩니다. 내가 걷는 길을 나 스스로 제대로 바라보고 느껴서 가슴에 담을 때에 비로소 ‘방랑(떠돌기)’이 되고, 이 방랑길에 사진 한 장 찍어서 이웃과 나누는 삶을 짓습니다(127쪽/최종규).” 같은 이야기처럼, 그럴듯하게 찍는 사진은 그럴듯하게 보일 뿐입니다. 멋들어지게 찍는 사진은 멋들어지게 보일 뿐입니다.


  누군가는 그럴듯하거나 멋들어지게 보이려는 사진을 찍습니다. 이런 사진을 찍는다고 나쁘지 않습니다. 그저 이런 사진을 찍었을 뿐입니다. 이야기를 엮어 사진을 찍는다면, 이야기를 엮어 사진을 찍은 셈입니다. 이런 사진을 찍는다고 좋지 않습니다. 그저, 사진에 이야기를 담았을 뿐입니다.


  멋들어지게 불러도 노래가 될 테고, 멋들어지게 써도 글이 될 테지요. 멋들어지게 지어도 밥이 될 테며, 멋들어지게 빨아도 깨끗한 옷이 되겠지요.


  그런데 말이지요, 삶을 바라보려고 하지 않으면 삶을 사진으로 못 찍습니다. 삶을 바라보려고 하지 않기에 겉모습이나 겉치레에 휘둘립니다. 이른바 ‘멋져 보이는’ 작품이나 ‘그림 같은’ 작품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이웃과 함께 나누려고 하는 사진 이야기가 아니라, 이웃한테 자랑하고 싶은 ‘그럴듯한 솜씨자랑’으로 나아가고 맙니다.


  삶을 바라보려고 할 때에는 이웃과 동무가 지내는 하루를 차분하게 바라보면서 한솥밥을 먹을 수 있습니다. 이웃을 아끼고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이 될 때에 비로소 서로 마음을 열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어야 바야흐로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사진을 찍든 합니다. 이야기를 나누어야 ‘사진으로 담을 삶’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베트남 참전군인은 지난날 삶을 바라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지난날에는 돈(달러)만 바라보았습니다. 오늘날에는 이름값(명예)만 바라보고 맙니다. 예나 이제나 삶과 사랑과 사람을 바라보려 하지 않습니다. 베트남에 조용히 선 ‘한국군 증오비’는 한국사람한테 넌지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한국사람이 베트남에 심은 미움을 제대로 바라보고 제대로 받아들여서 제대로 삭일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일본더러 한국에 고개숙여 뉘우치라고 아무리 외친들 일본 정치권력은 한국에 고개숙여 뉘우치지 않습니다. 마음을 열지 않는 이들은 그저 등을 돌릴 뿐입니다. 베트남 참전군인이 아무리 사진전시장 앞에서 무력시위를 하더라도 ‘역사는 바뀌’지 않습니다. 베트남 참전군인이 군홧발로 짓이긴 발자국은 압력행사를 벌이더라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증오비’가 ‘평화비’로 거듭나려면, 주먹과 총칼을 휘두른 사람이 스스로 주먹도 총칼도 내려놓고 따순 가슴이 되어야 합니다. 사진 한 장은 언제나 따순 가슴인 사람들이 찍고 읽으며 나눕니다. 4348.5.11.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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