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꽃마리가 피었습니다



  좀꽃마리가 핀다. 좀꽃마리를 보자면 좀꽃마리 키가 되어야 하고, 좀꽃마리 눈이 되어야 한다. 장미꽃을 보려면 장미꽃 키가 되어야 하며, 장미꽃 눈이 되어야 한다. 크고 소담스러운 꽃을 보려면 크고 소담스러운 빛깔과 숨결을 알아볼 수 있는 몸이어야 하고, 작고 앙증맞은 꽃을 보려면 작고 앙증맞은 빛깔과 숨소리를 알아차릴 수 있는 몸이어야 한다.


  좀꽃마리가 핀다. 작디작아 아이들조차 깜빡 놓치고 지나치기 일쑤인 꽃이 핀다. 좀꽃마리에 핀 사랑스러운 꽃을 알아보려면, 좀꽃마리가 멋지고 맛난 나물인 줄 먼저 알아야 한다. 새봄에 한 차례 훑어서 누릴 수 있는 반가운 좀꽃마리 나물을 늘 생각하면서 마음에 두어야, 비로소 이 꽃이 하나둘 옹기종기 피어날 적에 빙그레 웃으면서 ‘너 참 반갑네, 고맙네.’ 하고 고개를 까딱 숙이면서 큼큼 꽃내음을 맡는다. 4348.5.16.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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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달째 만나는 흰민들레꽃



  올들어 삼월부터 흰민들레꽃을 보았고, 오월 한복판으로 접어든 요즈음에도 흰민들레꽃을 본다. 앞으로 언제까지 이 꽃을 볼 수 있을까 하고 헤아려 본다. 오월이 저물고 유월이 되어도 볼 수 있을까? 어쩌면 삼월에 저문 꽃에서 날린 꽃씨가 살살 퍼져서 여름이나 가을에도 새롭게 필 수 있겠지. 그리고, 지난해에 떨어진 꽃씨가 이제서야 싹이 트고 꽃대가 오를 수 있으리라. 봄부터 겨울 문턱까지 한 해 내내 이곳저곳에서 꽃을 볼 수도 있겠지.


  수많은 씨앗이 곳곳에 퍼져서, 이곳도 저곳도 꽃밭이 된다. 온갖 씨앗이 두루 드리우면서, 여기와 저기에 꽃내음이 흐른다. 나도 꽃이고 너도 꽃이다. 나도 씨앗을 새로 맺고 너도 씨앗을 새삼스레 맺는다. 4348.5.16.흙.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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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저녁 찔레꽃



  집 뒤꼍에 찔레꽃이 활짝 핀다. 마을 풀숲과 길가에도 찔레꽃이 가득 핀다. 시골마을은 온통 찔레꽃이다. 들길을 거닐면서도 찔레꽃내음을 맡고, 집에만 있어도 찔레꽃내음을 맡는다. 아침저녁으로 찔레꽃내음에 사로잡히며, 맑고 달콤한 꽃내음에 물씬 젖어들면서 마음을 차분히 다스린다. 찔레꽃내음이 이렇게 놀랍도록 짙고 고운 숨결이었나? 올들어 찔레꽃내음이 무척 새삼스럽다. 4348.5.16.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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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량한 말 바로잡기

 (1688) 소원


만약 그때 내가 옛 숙모를 정화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소원해져 버린 관계였다면

《타이라 아이린/김남미 옮김-들어 봐요 호오포노포노》(판미동,2015) 125쪽


 소원해져 버린

→ 멀어져 버린

→ 서먹서먹해져 버린

→ 남남이 되어 버린

 …



  한국말사전에서 ‘소원’이라는 낱말을 찾아보면 열 가지가 나오며, 모두 한자말입니다. 이 가운데 ‘小圓’은 “작은 동그라미”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아마 “큰 동그라미”는 ‘大圓’이라고 하겠지요. ‘동그라미’는 네 글자이고 ‘원’은 한 글자이니, 글잣수가 적은 ‘원’을 써야 하지 않습니다. 한국말로도 ‘작은동그라미·큰동그라미’처럼 쓸 수 있어야 합니다.


  ‘小園’은 “작은 정원이나 밭”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이런 낱말을 쓸 사람이 있을까요? 작은 뜰이나 밭이라면 ‘작은뜰·작은밭’처럼 쓰면 됩니다. 한 낱말로 삼아도 되고, 띄어서 ‘작은 뜰·작은 밭’으로 써도 됩니다. 연구소나 출장소 같은 곳에서 일하는 사람을 ‘所員’이라고 한다는데, 그렇구나 싶으면서도 ‘소원’이라는 말을 굳이 쓰기보다 ‘일꾼’이라고 하면 됩니다. “연구소 일꾼”이나 “출장소 일꾼”이라고 하면 됩니다.


 소원 성취

→ 꿈 이루기

→ 바라던 대로 이루기

 소원대로 해 주다

→ 바란 대로 해 주다

→ 꿈대로 해 주다

 소원을 들어주다

→ 바람을 들어주다

→ 꿈을 들어주다

 통일을 소원하다

→ 통일을 바라다

→ 통일을 빌다


  ‘所願’은 “바라고 원함”을 뜻한다고 합니다. 이 한자말은 널리 씁니다. 아이도 쓰고 어른도 씁니다. 다만, ‘소원’이라고만 말하지, 어떤 한자를 쓰는지 아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그런데, “바라고 원함”을 뜻한다고 적은 풀이말을 더 헤아립니다. ‘원(願)하다’를 찾아보면 “소원하다”를 뜻한다고 나와요. 그러니까, 한국말사전에서 ‘소원’을 다룬 풀이말 “바라고 원함”은 “바라고 소원함” 꼴이 되고, “바라고 바라고 원함”이 되며, 다시 “바라고 바라고 소원함” 꼴이 되어, 끝없는 겹말인 셈입니다.


  오늘날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소원하다’와 ‘원하다’ 같은 말을 쓰지만, 정작 이 낱말은 똑같은 뜻인 셈이며, 깊이 헤아리자면 한국말 ‘바라다’를 한자를 입혀서 쓰는 얼거리입니다.


  ‘訴寃’이라는 낱말은 “관에 하소연함”을 뜻한다고 하고, ‘訴願’은 “하소연하여 바로잡아 주기를 바람”을 뜻한다고 합니다. 한자만 다른 낱말인데, 뜻을 곰곰이 살피면 ‘하소연’인 셈입니다. 관청에서 쓰는 말이든 법률에서 쓰는 말이든, 왜 한국말 ‘하소연’을 쓸 생각을 못 할까요?


  ‘溯源’이라는 낱말은 쓸 일이 없습니다. 거슬러서 올라가는 일이라면 ‘거슬러 올라가다’라고 해야 옳고, 뿌리를 찾아 밝히는 일이라면 ‘뿌리를 찾아 밝히다’라 해야 옳습니다.


 피할 수 없는 하나의 두터운 소원이 일어나고야 마는

→ 벗어날 수 없이 크게 멀어지고야 마는

→ 어찌할 수 없이 아주 멀어지고야 마는

 다른 것에는 소원하게 되었다

→ 다른 것에는 멀어졌다

→ 다른 것에는 멀찍이 떨어졌다

 한동안 그녀에게 소원했던 것 같다

→ 한동안 그이한테 멀어졌던 듯하다

→ 한동안 그 사람한테 서먹서먹했던 듯하다


  이제 ‘疏遠’이라는 낱말을 생각합니다. 이 한자말은 “서먹서먹”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한국말로는 ‘서먹서먹’을 쓰면 될 노릇입니다. 서먹서먹한 사이라면 ‘멀어진’ 사이입니다. ‘떨어져’ 지내는 사이라고도 할 만합니다. 두 사람이 서먹서먹한 사이가 되었다면, 이때에 두 사람은 남남이 되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4348.5.16.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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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칫 그때 내가 옛 작은어머니를 씻지 않고 그냥 그렇게 멀어져 버린 사이였다면


‘만약(萬若)’은 ‘자칫’으로 손보고, ‘숙모(叔母)’는 ‘작은어머니’로 손봅니다. ‘정화(淨化)하지’는 ‘씻고’나 ‘마음으로 씻고’로 손질하고, ‘관계(關係)’는 ‘사이’로 손질합니다.



소원(小圓) : 작은 원

소원(小園) : 작은 정원이나 밭

소원(所員) : 연구소, 강습소, 출장소 따위의 ‘소(所)’라고 이름 붙은 곳에서 일하는 사람

소원(所願) : 바라고 원함

   - 소원 성취 / 소원대로 해 주다 / 소원을 들어주다 / 통일을 소원하다

소원(昭媛) : [역사] 조선 시대에, 후궁에게 내리던 정사품 내명부의 품계

소원(素願) : 평소부터 늘 바라고 원하는 마음

소원(疏遠) : 지내는 사이가 두텁지 아니하고 거리가 있어서 서먹서먹

   - 피할 수 없는 하나의 두터운 소원이 일어나고야 마는 /

     다른 것에는 소원하게 되었다 / 한동안 그녀에게 소원했던 것 같다

소원(訴寃) : 억울한 일을 당하여 관(官)에 하소연함

소원(訴願)

1. 하소연하여 바로잡아 주기를 바람

2. [법률] 행정 관청의 위법 또는 부당한 처분으로 권리와 이익을 침해받을 때에, 그 상급 관청에 대하여 처분의 취소 또는 변경을 청구하는 일

소원(溯源)

1. 물의 근원지를 찾아 상류로 거슬러 올라감

2. 어떤 사물이나 일의 근원을 찾아 밝히고 상고함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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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입맛을 사로잡은 양념 고추 철수와영희 어린이 인문생태그림책 3
노정임 지음, 안경자 그림, 이정모 감수, 바람하늘지기 / 철수와영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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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30



하얀 고추꽃이 빨간 열매가 된다

우리 입맛을 사로잡은 양념, 고추

 바람하늘지기 기획

 노정임 글

 안경자 그림

 철수와영희 펴냄, 2015.5.15.



  찔레꽃이 오월에 눈부시도록 새하얗게 피어납니다. 찔레꽃이 지면 찔레알이 맺는데, 찔레알은 새빨갛습니다. 삼월과 사월에는 딸기꽃과 앵두꽃이 하얗게 핍니다. 눈처럼 새하얀 딸기꽃과 앵두꽃이 찬찬히 지면, 새빨간 딸기알과 앵두알이 맺습니다. 그러고 보면, 능금꽃도 하얗습니다. 하얀 꽃이 지면 빨간 알이 맺습니다. 여기에, 고추꽃도 하얀 꽃송이가 지고 나서 빨간 열매를 맺습니다.


  꽃이 필 무렵에는 꽃내음이 향긋하고, 꽃이 질 무렵에는 풀내음이 짙푸르며, 꽃이 스러져서 열매로 거듭날 무렵에는 달큼한 숨결이 반갑습니다.




.. 우리나라 채소밭에서 가장 많은 땅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고추밭이에요. 무나 마늘 같은 채소는 수천 년 전부터 먹어 왔어요. 이에 견주면 고추를 기른 역사는 아주 짧아요. 400년쯤 전부터 먹었다고 알려져 있어요 ..  (11쪽)



  노정임 님이 글을 쓰고, 안경자 님이 그림을 그린 《우리 입맛을 사로잡은 양념, 고추》(철수와영희,2015)라는 그림책을 읽습니다. ‘철수와영희 어린이 인문생태그림책’ 가운데 셋째 권으로 나온 책으로, 첫째 권은 《우리가 꼭 지켜야 할 벼》(2012)이고, 둘째 권은 《콩 농사짓는 마을에 가 볼래요?》(2013)입니다. 벼와 콩에 이어 고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곰곰이 돌아보니, 한겨레가 가장 가까이하는 ‘먹을거리’라면 아무래도 첫째가 벼요, 둘째가 콩이며, 셋째가 고추입니다. 논을 지어 나락을 거두니, 이 나락으로 쌀을 깎고 밥을 짓습니다. 밭과 논둑에는 콩을 심어서 거둡니다. 콩으로 콩밥을 짓기도 하지만, 콩으로 된장과 간장을 담고, 두부를 쑵니다. 떡을 찔 적에도 콩을 쓰고, 엿을 골 적에도 넣습니다. 벼와 콩은 한겨레가 먼먼 옛날부터 곁에 두면서 아낀 ‘풀알(풀 열매)’입니다.


  벼와 콩 다음으로 들 만한 ‘곁지기’라면 아무래도 나물입니다. 여느 풀로 나물을 삼습니다. 여느 풀로 국을 끓입니다. 여느 풀은 짐승을 먹이는 밥이 되기도 합니다. 쑥이든 냉이이든 씀바귀이든 민들레이든 소리쟁이이든 갓이든, 모두 나물로 먹습니다. 그렇지만 고추가 나물을 제칩니다. 이 땅에 들어온 발자국은 짧지만, 다른 어느 나물보다 고추가 널리 사랑받습니다.





.. 후추나 천초와는 달리 고추는 우리나라 온대 기후에서도 잘 자라고 뜰이나 밭에서 길러 먹을 수 있는 작물이라서 널리 퍼질 수 있었던 거예요. 맛도 한몫했어요 … 붉은 고추를 따자마자 바로 강한 햇볕에 널면 노랗게 타 버려요. 그래서 그늘에 2∼3일 두고 한 숨 죽은 다음에 햇볕에 말리지요..  (20, 27쪽)



  한겨레가 고추를 심어서 거둔 지는 얼마 안 됩니다. 처음 들어온 햇수를 따지면 사백 해쯤 된다고 여길 만하지만, 막상 한겨레가 두루 고추를 심어서 거둔 햇수를 치면 백 해쯤 될까 하고 헤아릴 수 있습니다.


  고추는 아주 빠르게 퍼졌고, 밥상에서 빼놓기 어려운 양념이 됩니다. 양념으로 치면 된장이랑 간장이랑 소금이 먼저 손꼽힐 테지만, 여기에 고추장이 빠질 수 없어요.


  고추는 날로도 먹고, 가루로 빻아서도 먹으며, 장으로 담가서도 먹습니다. 고추를 써서 김치를 담고, 떡볶이를 빨갛게 물들이며, 온갖 곳에 살몃살몃 깃들어 맛을 더합니다.


  벼는 논에 심습니다. 논에 심는 벼는 해마다 똑같은 자리에 심습니다. 논힘을 살리려고 한 해쯤 논을 묵히기도 하지만, 땅이 없거나 적은 시골지기라면 논을 묵히지 못하고 그대로 짓습니다. 논이든 밭이든 한 가지 씨앗만 잔뜩 심어서 기르려 하면 땅힘이 줄어듭니다. 그래서 한두 해쯤 땅을 묵혀서 온갖 씨앗이 두루 퍼지고 온갖 풀이 골고루 자라서 땅힘이 돌아오도록 합니다.


  고추를 심은 밭에 이듬해에도 고추를 잇달아 심으면 고추가 곧잘 아픕니다. 고추가 그만큼 땅힘을 많이 가져가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고추를 심은 이듬해에는 감자라든지 배추라든지 다른 남새를 심어서 땅힘을 보듬기도 합니다. 비료와 농약만으로는 땅힘을 살리지 못합니다. 비료와 농약은 오히려 땅힘을 더 줄이거나 빼앗습니다.




.. 학교에 텃밭을 새로 만들어도 집 안의 베란다에 처음 작물을 심어도 밭에는 언제나 다른 동물과 식물들이 생겨나요. 밭도 생태계라는 걸 알 수 있지요 ..  (28쪽)



  그림책 《우리 입맛을 사로잡은 양념, 고추》를 보면, 고추를 어떻게 심어서 돌보는가 하는 이야기부터, 고추로 어떤 먹을거리를 얻는가 하는 이야기에다가, 고추하고 이웃인 여러 가지 남새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한겨레가 고추를 즐겨먹은 흐름을 짚고, 고추와 나란히 즐긴 여러 가지 양념 이야기를 곁들입니다.


  곰곰이 보면, 고추도 풀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고춧잎을 톡톡 끊어서 먹습니다. 날로도 먹고 무쳐서도 먹습니다. 아기 손톱보다 작은, 그야말로 앙증맞은 고추꽃이 하얗게 필 때면 고추꽃내음을 맡고, 고추꽃빛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고추꽃이 지면서 고추알(고추 열매)이 맺습니다. 고추알은 기름하게 자랍니다.


  밭을 건사하기 어려운 도시에서는 꽃그릇에 고추를 한 포기 심어서 기르면, 아이들이 곁에서 고추 한살이를 지켜볼 수 있습니다. 작은 씨앗 한 톨에서 씩씩하게 퍼지는 숨결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 고추는 어디서나 잘 자라서, 화분에 키우는 사람들도 많아요. 여름이나 가을에 골목길을 걸을 때 한번 눈여겨보세요. 어디선가 자라고 있는 고추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  (39쪽)



  고추나 감자나 고구마나 토마토나 배추는 모두 이웃나라에서 들어왔습니다. 지구별은 커다란 마을과 같아서, 이쪽 마을(나라)에서 자라던 남새가 저쪽 마을(나라)로 살며시 퍼집니다. 천천히 퍼지기도 하고, 배에 실려 어느 날 문득 퍼지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몹시 낯설어 할 만하고, 시나브로 새로운 삶이 되어 뿌리를 내립니다.


  요즈음은 고추밭에 비닐을 씌우는 사람이 많습니다. 비닐을 씌우지 않고서는 고추를 기르기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고추밭에 짚을 까는 사람이 있으나, 애써 짚을 깔려는 사람은 드뭅니다. 고추밭을 거느리면서 농약을 안 쓰는 사람이 드뭅니다. 고추를 처음 들여온 날부터 새마을운동이 퍼지기 앞서까지는 이 땅 어디에도 농약바람이 안 불었으나, 이제는 농약이 없이는 벼도 콩도 고추도 못 기르겠노라 하고 여깁니다.


  아무래도 벌레가 먹으니 농약을 쳐야 한다고 여길 텐데, 풀잎이나 풀알에 벌레가 먹는 까닭은 ‘풀벌레가 갉아먹을 잎이나 알’이 없기 때문입니다. 풀벌레가 갉아먹을 다른 잎이나 알이 있으면 굳이 고추알이든 다른 풀알이든 갉아먹지 않습니다. 밭자락에 몇 가지 씨앗만 심고서 다른 풀은 모조리 뽑거나 베거나 약으로 죽이니, 풀벌레로서는 사람이 키우려는 남새만 갉아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풀벌레는 왜 논밭에서 함께 자라려 할까요? 풀벌레는 풀잎을 먹으면서 꽃송이도 드나들어 꽃가루받이를 해 줍니다. 조그맣게 피는 꽃에는 조그마한 풀벌레가 오락가락하면서 꽃가루받이를 하지요. 벌과 나비만 꽃가루받이를 하지 않아요. 작은 풀벌레와 개미도 꽃가루받이를 합니다. 그리고, 나비가 되자면 애벌레가 풀잎을 오랫동안 갉아먹고 자라야 해요.


  도시에도 논과 밭이 있어서 아이와 어른 누구나 논밭을 마주할 수 있으면, 어디에서나 싱그러운 바람이 불리라 생각합니다. 건물만 쑥쑥 올라가고, 자동차 둘 자리를 넓히는 데에만 마음을 쓰는 도시인데, 조그마한 땅뙈기에 씨앗을 심을 수 있다면, 집안에라도 꽃그릇이나 텃밭상자를 마련해서 기를 수 있다면, 이리하여 도시에서도 콩이나 고추를 손수 기르면서 삶과 숲과 밥과 지구별을 헤아린다면, 이웃을 한결 넓게 사랑하는 마음을 키울 수 있습니다. 잘 익은 고추알을 즐기고 빨간 고추장을 누리면서 생각을 넓힙니다. 이 맛난 먹을거리와 양념이 우리 곁에 오기까지 얼마나 기쁘게 햇볕과 바람과 빗물을 머금으면서 흙숨을 받아들였는가 하고 돌아봅니다. 4348.5.16.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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