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치고 손질하고 다시 쓰는



  글은 쓸 적마다 언제나 달라진다. 한 번 쓴 글은 한 번 생각한 마음이다. 한 번 고친 글은 한 번 더 생각한 마음이다. 새로 손질하는 글은 새롭게 더 생각한 마음이다. 거듭 되짚으면서 다시 쓰는 글은 거듭 생각하는 마음이다. 그러니, 글을 한 꼭지 쓸 적에 먼저 한 번 죽 쓰고 나서, 차근차근 고치고, 새롭게 손질할 뿐 아니라, 이래저래 다시 쓰기 마련이다.


  어느 때에는 이렇게 글쓰기를 하느라 몇 분이 안 걸리고, 어느 때에는 이렇게 글쓰기를 하면서 몇 시간이 걸리며, 어느 때에는 이렇게 글쓰기를 하려고 며칠이나 몇 달을 들이기도 한다. 어느 글은 몇 해에 걸쳐서 조금씩 손질하거나 고치거나 다시 쓰기도 한다.


  재미있지 않은가? 어느 글은 몇 분 만에 수없이 고치고 깎고 손질하고 다듬고 다시 쓰는데, 어느 글은 몇 해에 걸쳐서 끝없이 고치고 깎고 손질하고 다듬고 다시 써도 아직 마무리를 짓지 못한다. 4348.5.16.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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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용을 모는 놈들은 말이지



  오늘 하루 곁님이랑 두 아이랑 바다마실을 다녀왔다. 면소재지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시골버스를 기다리는데, 시골버스가 서는 자리 바로 옆에 어떤 분이 자가용을 세웠다. 이곳에 있는 면소재지 마트에 들러서 뭔가를 사려는 사람이다. 그런데 말이지, 이 ‘시골버스 서는 곳’이면서 마트 건너편인 자리에는 주차장이 있다. 예전에 은행이 있던 자리이기도 해서 주차장이 제법 넓다. 주차장에 차를 댈 자리가 비었다. 널널하다. 그런데, ‘마트에 물건을 사려는 사람’은 자동차를 엉성하게 길가에 댄다. 시골버스가 서야 할 자리에 댄다. 3분쯤 뒤에 버스가 들어올 텐데, 이 사람은 ‘제 볼일을 곧 마치고 돌아올 생각’인 듯하다.


  버스를 타는 자리 코앞에다가 자가용을 세우니, 버스가 오나 안 오나 살피는 내 눈길이 막힌다. 자가용을 아무 데에나 세우는 사람은 이런 대목을 알 길이 없겠지. 자가용으로 다니니까 버스가 어디로 다니는지, 버스가 언제 드나드는지,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살피지 못하리라.


  ‘자가용을 모는 놈들이 바라보는 눈길’로 한 번 생각을 해 본다. 버스를 기다리는 김이기도 하고, 이놈은 왜 여기에 자동차를 세웠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다. 아니, 이 자동차는 무슨 일로 내 눈길을 가로막으면서 저 자리에 섰을까 싶기도 했다.


  곰곰이 헤아려 보니, ‘자가용을 모는 놈’이란 여러모로 눈이 좁구나 하고 새삼스레 느낀다. 자동차로 달릴 길을 보느라 다른 것을 살필 틈이 없다. 자동차를 세울 자리를 보느라 둘레에 어떤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 알거나 돌아볼 틈이 없다. 그래서, 이 사람을 탓하거나 나무랄 일이 없이 이 사람은 이러한 삶이로구나 하고 문득 깨닫는다. 보는 대로 보고, 느끼는 대로 느낀다. 보는 대로 살고, 느끼는 대로 생각한다. 그런데 ‘좁은 눈길’이란 또 뭘까? 자동차를 모는 ‘놈’이 좁은 눈길이라면, 얼마나 좁은 셈이고, 삶이나 눈길이나 마음을 놓고 뭐가 좁다고 할 만할까? 이 자동차를 보면서 ‘저놈!’ 하고 여기는 내 마음이나 생각이나 눈길이야말로 좁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왜 그러한가 하면, 나만 이렇게 자동차를 볼 뿐, 곁님이나 아이들은 자동차를 보지 않는다. 세 사람은 길바닥에 나란히 앉아서 과자를 냠냠 맛있게 먹으면서 웃고 논다. 이 자동차를 아랑곳할 까닭이 없다. 곁님이랑 아이들이 과자를 집어먹으면서 놀듯이, 나 스스로 즐기거나 누릴 삶을 스스럼없이 즐기고 멋지게 누리면 된다. 자동차야 저 알아서 여기에 섰다가 저기로 떠나지 않겠는가.


  다시 헤아리자면, 자동자(자가용)를 모는 사람은 놈도 님도 아니다. 자동차를 문득 본 사람은 님도 놈도 아니다. 나는 버스가 들어올 때를 놓치지 않으려고 살펴보다가 자동차가 내 눈길을 가렸기에 ‘저 녀석 뭔데 내 눈앞을 가리지?’ 하고 느꼈을 뿐이고, 이 자동차는 버스가 들어오기 앞서 아주 말끔히 사라져 주었다.


  재미있다. 재미있네. 이리하여, 나는 곁님이랑 두 아이랑 노래하는 마음으로 버스에 올랐다. 기쁘게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몸이 아주 지쳐서 저녁도 안 차리고 만두를 구워서 저녁으로 삼아 신나게 먹는다. 영화를 함께 보고 나란히 곯아떨어졌다. 4348.5.16.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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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서 책을 읽다



  시골버스를 타려고 아이들과 35분을 걸어서 큰길로 나갔고, 시골버스를 탔으며, 버스에서 내려 다시 40분을 아이들과 걸어서 바닷가로 갔다. 바닷가에서 아이들이랑 놀다가 아이들이 스스로 놀도록 한 뒤 책을 읽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바닷가 모래밭을 밟고 바닷물에 발을 적시면서 논다. 이러고 나서 아까 걸은 길을 거슬러 40분을 걸어서 시골버스 타는 곳으로 왔고, 시골버스를 탔으며, 면소재지에서 버스를 내리고는 우리 마을 앞으로 지나가는 버스를 새로 갈아타서 들어온다.


  버스를 탄 이야기와 걸은 이야기만 적은 듯한데, 바닷가에서 바닷바람을 듬뿍 쐬면서 책을 읽었다. 바닷바람을 쐬면서 책을 읽자니, 두 손과 책에 짠내가 배더라. 문득 한 가지를 깨달았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는 바닷가에서 책을 읽지 말아야겠다. 소금기 물씬 나는 바람을 맞다가 책을 다 버리겠더라. 4348.5.16.흙.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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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다면 석양이 이토록 아름다울 리 없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이영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11



찔레꽃내음을 바람과 함께 마신다

― 그렇지 않다면 석양이 이토록 아름다울 리 없다

 마루야마 겐지 글

 이영희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 2015.5.8.



  나는 오늘 시골에서 살지만, 서른 언저리까지 도시에서 살았습니다. 나는 오늘 시골에서 두 아이를 건사하면서 삶을 짓지만, 우리 어버이는 나를 도시에서 낳으셨습니다. 나는 서른 언저리까지 도시에서 내 땅이라고 할 만한 보금자리를 조금도 못 누리는 채 살았고, 우리 아이들은 비록 얼마 안 되는 우리 땅이라고 하더라도 스스럼없이 뛰고 달리고 파고 뒹굴고 뒤집고 밟을 수 있는 보금자리를 누리면서 삽니다.


  어버이로서 아이와 누릴 삶이란 바로 ‘우리 숲’이고 ‘우리 마당’이며 ‘우리 나무’요 ‘우리 꽃’이자 ‘우리 풀’이라고 느낍니다. 아이와 나란히 씨앗을 심을 만한 땅을 보살필 노릇이고, 아이와 어버이가 함께 웃고 노래할 수 있는 보금자리를 넉넉히 일굴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손수 가꾼 정원이란, 특별히 사계절 내내 꽃이 가득 찬 공간이 아니다. 하늘에 들어찬 별처럼 찬란한 만개의 순간을 일 년에 며칠 정도만 엿볼 수 있게 해 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디까지나 사적인 소우주에 다름 아닌 것이다 … 인생에서 겨울은 좌절의 기간이다. 식물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것도 새로운 비약을 위한 중요한 조건이다 … 취미란 게 대체로 그런 것 아닌가.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행동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  (9, 24, 50쪽)



  예부터 지구별 모든 사람은 스스로 삶을 지었습니다. 왜 스스로 삶을 지어야 하는가 하면, 예부터 지구별 모든 사람은 밥과 옷과 집을 스스로 얻어야 했으니, 스스로 삶을 지어야 했습니다. 아기가 아니라면 누구나 스스로 밥과 옷과 집을 지어야 합니다. 몸이 아파서 드러눕지 않는다면 마땅히 스스로 밥과 옷과 집을 건사해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지구별 거의 모든 사람이 돈을 벌기만 할 뿐, 스스로 삶을 짓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는 지구별 거의 모든 사람이 ‘전문 일자리’에 얽매일 뿐, 스스로 삶을 가꾸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기자나 의사나 교사나 운전사나 국회의원이나 시장이나 법관이나 경찰이나 회사원이나 공무원이나 공장 일꾼과 같은 ‘한 가지 일만 하는 전문가’로 있을 뿐, 밥이나 옷이나 집을 손수 지어서 가꾸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오늘날에는 참말 거의 모든 사람이 돈을 벌기만 해서 돈을 쓰기만 하는 하루를 보냅니다. 흙을 만질 겨를이 없고, 흙을 헤아릴 틈이 없으며, 흙을 밟거나 흙내음을 맡거나 흙숨을 쉴 자리가 없습니다.



.. 산길에서 만나면 “아, 꿩이 있구나.”로 끝나겠지만, 우리 집 안이라는 너무나 친근한 장소에서 꿩을 목격하자 감동과 흥분이 뒤따랐고, 깊게 교류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진심으로 일었다 … 여름 정원을 운치가 없는 지루한 공간이라 규정한 것은 너무 조급했다. 무의미한 단색으로 유린된 가련한 공간으로 보는 것은 더 큰 잘못이다 … 평화를 넘어 타락의 소굴로 변한 이 나라는 정신은커녕 영혼까지 통째로 뺏길 위험에 처해 있고, 어느새 따라야 할 모범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완전히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려 있고, 자신을 계속 압박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자기기만의 재능이 뛰어난 자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  (34∼35, 81, 92쪽)



  마루야마 겐지 님이 쓴 《그렇지 않다면 석양이 이토록 아름다울 리 없다》(바다출판사,2015)라는 책을 읽습니다. 이 책은 마루야마 겐지 님이 누리는 시골살이 가운데 한 토막을 넌지시 보여줍니다. 도시가 아닌 시골에 곁님이랑 둘이 조용히 깃들어서 살며 누리는 이야기를 곰곰이 들려줍니다. 다만, 곁님 이야기를 이 책에 적지 않습니다. 오직 마루야마 겐지 한 사람이 누리고 바라보며 생각하는 이야기를 차근차근 적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않다면 석양이 이토록 아름다울 리 없다》라는 책은 어떤 이야기를 적은 책일까요? 마루야마 겐지 님은 ‘정원 일’을 적었다고 밝힙니다. 그러면 ‘정원’은 어떤 곳일까요? 일본사람은 ‘庭園’이라는 한자말을 쓰는데, 한국말로 옮기면 ‘뜰’이나 ‘꽃밭’입니다. 그러니까, 마루야마 겐지라고 하는 일본사람이 350평짜리 ‘뜰’이나 ‘꽃밭’을 가꾼 열두 달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 정원 가꾸기는 언어, 그림 도구나 악보, 암석이나 점토, 금속이나 유리처럼 경험을 통해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식물을 상대로 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그렇게 쉽고 순조롭게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갈 수가 없다 … 안타깝게도 아주 일부 작품을 제외하고는 예술은 아직 예술을 흉내내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그 피상적인 미의 세계는 금세 바닥을 드러내고, 비슷하게 흉내내고 다시 찍어내는 행위가 횡행한다 … 바람 없는 맑은 날 오후였다. 단풍이 절정에 이른 정원에 한 걸음 내디딘 순간, 처음으로 땅에 적응해 길들여진 인간이 된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  (97, 102, 106쪽)



  뜰이나 꽃밭은 ‘텃밭’이 아닙니다. 풀꽃과 꽃나무를 심어서 돌보는 곳이 뜰이거나 꽃밭입니다. 그러니까, 마루야마 겐지 님도 이녁이 손수 먹을 밥을 돌보려고 하는 밭자락이 아닌, 마음을 차분히 다스리면서 생각을 곱게 북돋울 마음으로 가꾸는 뜰이요 꽃밭인 셈입니다.


  그런데, 마루야마 겐지 님은 뜰이거나 꽃밭인 땅을 가꾸고 손질하면서 찬찬히 깨닫습니다. 이를테면 “위대한 철학자들이 만약 정원 꾸미기에 정신을 쏟을 수 있었다면, 그들은 진정 기뻐하며 위대한 범인으로써 생애를 장식할 수 있지 않았을까(126쪽).” 같은 깨달음입니다. 이 말은 다른 ‘철학자’와 ‘지식인’한테 외치는 말이면서, 바로 마루야마 겐지 님 스스로한테 외치는 말입니다. 마루야마 겐지 님 스스로 뜰이요 꽃밭을 가꾸면서 ‘나 스스로 가장 수수한 삶을 사랑하면서 즐긴다’고 하는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마루야마 겐지 님을 비롯해 수많은 ‘전문가’와 ‘작가’가 저마다 제 텃밭을 누리거나 논을 일굴 수 있다면, 훨씬 더 수수하면서 투박한 삶이 될 테고, 저마다 스스로 가장 고우면서 참다운 숨결로 거듭나서 사랑과 꿈을 지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 정원은 가능한 색채를 모두 동원해, 조금 지쳐 있던, 아니, 어쩌면 아사 직전에 빠져 있었을지도 모를 영혼을 금세 치유하고, 기쁨으로 부풀어 오르게 했다 … 단풍이 선사한 도취의 하루를 경험할 수 있다면 그로써 훌륭한 생애는 아닐까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 무엇이든 겉만 봐서는 본질에 가까워질 수 없다. 직접 손으로 만짐으로써 실태를 파악할 수 있다 … 읽는 것은 머리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쓰는 것은 정원 일처럼 육체적 노동이 동반된다 … 읽는 것은 감상이고, 쓰는 것은 연주이다. 연주를 하려면 당연히 거듭 연습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체험과 경험이 밑받침되지 않는 지식과 정보에 매달려 살아가려는 사람은, 경솔하게 산 사람보다도 더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  (108, 110, 120, 121쪽)



  삶은 누구나 스스로 짓습니다. 삶짓기입니다. 밥을 지어서 밥짓기이고, 옷을 지어서 옷짓기이며, 집을 지어서 집짓기입니다. 삶을 짓는 까닭은 밥과 옷과 집을 짓기 때문에 삶짓기인데, 흙을 지어야 밥과 옷과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흙을 지어서 풀열매가 나옵니다. 흙을 지어서 풀줄기에서 실을 얻습니다. 흙을 지어서 나무가 우람하게 자란 뒤에 집을 짓습니다.


  사람이 가꾸는 나무는 ‘내가 누리지 않’습니다. 사람이 가꾸는 나무는 ‘내가 낳은 아이가 누립’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오늘 이곳에서 누리는 나무는 옛사람이 나를 헤아리면서 심어서 가꾸었습니다. 그러니, 내가 오늘 이곳에서 나무를 심어서 가꾸지 않으면, 내 뒤를 이어서 자라거나 살아갈 사람이 누릴 나무가 없습니다.


  내가 오늘 삶을 지어야 나부터 즐거운 하루가 되고, 내 뒤를 이어 이 지구별에서 보금자리를 일굴 아이들이 즐거운 터전을 가꿉니다. 내가 오늘 삶을 짓는 이곳은 내 앞사람이 슬기로운 마음으로 기쁘게 가꾼 터전입니다.



.. 서재에 틀어박혀 관념에만 매달리고, 나 혼자 인간과 세계 전체를 파악하려 하면 어떤 천재라도 결국은 고뇌로 인한 고뇌라는 악순환에 빠질 수밖에 없다 … 도시가 이상한 세계이고, 생물들이 살 만한 공간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는 걸 진심으로 설득할 사람이 없다면, 그 중요한 역할의 일부를 내가 담당해야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 자연으로부터 나는 책 수만 권을 독파하는 것 이상의 대발견을 계속 하고 있다 … 바람은 장미를 단련시켜 진정한 아름다움을 부여하고, 장미는 바람에 향기를 실어 보낸다 ..  (127, 128, 132쪽)



  열두 달 이야기를 차곡차곡 갈무리한 글을 읽습니다. 마루야마 겐지 님은 처음에는 풀과 나무를 이야기하는듯이 보였으나, 책을 마무리할 즈음에는 ‘도시에서 사는 이웃’한테 들려주고 싶은 노래를 한 자락 읊습니다. “도시가 이상한 세계이고, 생물들이 살 만한 공간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128쪽).” 같은 이야기를 즐겁게 노래하듯이 말합니다. 마루야마 겐지 님이 읽는 ‘책’은 도시에 있는 인문학자가 지식으로 쓴 글꾸러미가 아니라, 시골에서 손수 일구는 풀과 나무가 들려주는 ‘숲책’이라는 이야기를 기쁘게 노래하듯이 말합니다.


  책을 마무리지으면서 적은 “바람은 장미를 단련시켜 진정한 아름다움을 부여하고, 장미는 바람에 향기를 실어 보낸다(132쪽)” 같은 대목에 천천히 밑줄을 긋습니다. 나는 이 마음을 날마다 느낍니다. 나도 시골자락 우리 보금자리에서 바로 이 이야기를 아침저녁으로 아이들과 누립니다.


  장미꽃내음이 얼마나 짙은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길가에 핀 장미꽃이나 놀이공원에 가득한 장미꽃이 아니라 ‘우리 집 꽃밭’에서 핀 장미꽃이 얼마나 깊고 짙으며 너른 냄새를 나누어 주는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오월은 시골자락마다 찔레꽃이 피는 철입니다. 찔레꽃이 피는 철은 들딸기가 빨갛게 익는 철입니다. 하얀 찔레꽃 사이사이 새빨간 들딸기알이 알록달록 어우러집니다. 찔레꽃내음과 들딸기알내음이 어우러지는 바람을 마시면, 손으로 열매를 훑어서 먹지 않아도 온몸이 배부릅니다. 마루야마 겐지 님은 바로 이런 꽃내음과 바람노래를 언제나 누리기에 ‘뜰이나 꽃밭을 가꾸는 삶노래’를 조곤조곤 글로 적어서 멋지게 책으로 엮었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4348.5.16.흙.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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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옷이 한결 즐거운 아이들



  아침에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고 손과 낯을 씻은 뒤 나무한테 인사하자고 이야기하지만, 두 아이 모두 그저 잠옷인 채 놀려고 한다. 굳이 갈아입으려 하지 않고, 마냥 놀려고 한다. 잠옷이든 잠옷이 아니든 대수로울 일은 없다. 그런데 말이지, 너희가 잠옷을 입고 집 안팎을 넘나들면서 놀면, 잠옷에 흙먼지가 고스란히 묻어서 들어올 테고, 온 집에 흙먼지가 날리지. 너희가 입는 옷이란 말야, 하나는 잠잘 적에 입는 잠옷이고, 다른 하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신나게 뛰놀며 입는 놀이옷이란다. 그래서 마실을 갈 적에는 마실옷을 입고, 비가 오는 날에는 비옷을 입지. 4348.5.16.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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