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피는 찔레꽃 (사진책도서관 2015.5.15.)

 ―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 ‘사진책도서관 함께살기’



  도서관 건물 둘레는 삽차로 파헤쳐진다. 그동안 도서관 둘레에 우거졌던 나무와 풀은 몽땅 사라졌다. 해마다 봄에 하야말간 꽃을 보고 여름부터 동그스름한 열매를 보던 탱자나무도 없다. 오월이면 딸기알이 새빨갛게 익고 찔레꽃이 새하얗게 눈부셨는데, 이런 모습도 도서관 둘레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딸기넝쿨이 모조리 사라져서 딸기알을 못 보지만, 아이들이 아침저녁으로 들딸기를 잔뜩 훑어서 배부른 하루를 누리지 못하지만, 모조리 파헤쳐진 땅뙈기 한쪽에서 찔레덩굴이 올라와서 찔레꽃이 살짝 고개를 내민다.


  놀랍도록 아름다운 목숨이로구나 하고 느낀다. 어쩜 이렇게 씩씩하게 다시 줄기를 올리고 꽃송이를 틔울 수 있을까 하고 헤아려 본다. 나도 아이들도 찔레꽃처럼 노래하면서 웃는 숨결로 거듭나야 할 노릇이겠지. 찔레꽃처럼 까르르 노래하고, 찔레꽃마냥 호호호 웃는 예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야 할 노릇일 테지.


  꽃아, 고맙다. 시골순이와 시골돌이는 풀빛이 사라진 메마른 땅에서도 신나게 달리면서 힘차게 노는구나. 너희도 모두 멋있고 아름답다. ㅅㄴㄹ



* 도서관 나들이 오시려면 먼저 전화하고 찾아와 주셔요 *

* 사진책도서관(서재도서관)을 씩씩하게 잇도록 사랑스러운 손길을 보태 주셔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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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 굿 빛깔있는책들 - 민속 8
황루시 지음 / 대원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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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99



함께 웃고 노는 마을잔치가 되려면

― 팔도 굿

 황루시 글

 김수남 사진

 대원사 펴냄, 1989.5.15.



  어릴 적부터 ‘굿잔치’라는 말을 곧잘 들었으나, 막상 굿도 굿잔치도 잔치굿도 본 일은 없다고 떠오릅니다. 우리 겨레가 무척 먼 옛날부터 굿을 했다고 하지만, 정작 굿을 구경하거나 볼 수 있는 자리도 때도 없었다고 느낍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제국주의 군홧발을 앞세워서 한겨레 삶(문화)을 와장창 깨부수거나 짓밟았다고 합니다. 한겨레가 한겨레답게 살지 못하도록 짓누르면서, 일본사람 삶(문화)을 받아들이도록 억지로 내몰았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사람은 한국말조차 쓸 수 없었습니다. 한글이 아닌 한자와 가나(일본 글)를 써야 했습니다. 한겨레 옷을 버려야 했고, 한겨레 집도 버려야 했으며, 한겨레 밥도 버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해방이 되고 나서 한겨레는 한겨레다운 옷과 집과 밥을 되찾지 않습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짓밟으며 깨부순 삶자리에 미국사람 삶을 끌어들였습니다.





.. 생각해 보면 이상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다. 산기도, 물기도, 바위 기도같이 심상치 않은 자연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소원을 빌고 정성을 들여 온 것이 우리네 토속 신앙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 무속이 미신으로 규정되고 조직적인 탄압을 받게 된 것은 일제 시대의 일이다. 일본은 이 땅을 식민지로 만들면서 정치·경제적인 측면에서뿐만이 아니라 문화와 민족 정신까지 없애려는 조선혼 말살 정책을 폈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 일본은 식민 통치 초기부터 조신 문화 특히 민속 문화에 관한 폭넓은 연구를 치밀하게 했다 ..  (75, 83쪽)



  황루시 님이 글을 쓰고, 김수남 님이 사진을 찍은 《팔도 굿》(대원사,1989)을 읽습니다. 이제 한국 어디에서나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굿 이야기를 글과 사진으로 만납니다. 두 눈으로 지켜보기 어려운 굿이요, 굿잔치 소리나 노래도 듣기 어렵지만, 아쉬우나마 책으로 엿볼 수 있습니다. 굿잔치에서 어떤 바람이 흐르는지 알려면 굿잔치 자리에 있어야 할 텐데, 글과 사진만으로는 더없이 아쉬운 노릇이지만, 이렇게 굿잔치를 놓고 글을 쓴 분이 있고 사진을 찍은 분이 있기에, 비록 ‘박제’처럼 남았다고 하더라도, 한겨레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습니다.




.. 탈춤을 추는 동향 사람이 찾아와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해 보지 않겠느냐고 제의를 해 왔다. 김금화는 두 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굿하는 무당이라고 해서 억울하게 이혼 당하고 지금껏 수모를 받으며 살고 있는데 이것이 예술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다니, 세상이 달리 보였다 … 김금화는 많은 아픔을 딛고 무당이라는 자신의 운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새로운 자신의 위치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하여 이 시대의 큰무당이 된 것이다 … 인간이 신에게 보여준 정성은 결국 신을 감동시키게 된다 … 신이 인간에게 복을 내리면서 춤추고 노래하면 사람들도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굿판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함께 춤을 추고 놀게 된다 ..  (90. 91, 109쪽)



  황루시 님과 김수남 님은 ‘팔도 굿’을 이야기합니다. ‘팔도’란 ‘조선 팔도’를 가리킵니다. 남녘이나 북녘을 똑 뗀 굿이 아니라, 남북녘을 하나로 바라보는 굿입니다. 정치에 따라 갈린 남북녘이 아닌, 삶으로는 언제나 하나였고 한 줄기인 사람들을 바라보는 굿입니다.


  북녘에서는 굿잔치를 벌일까요? 북녘에서는 굿잔치를 벌일 수 있을까요? 아마 북녘에서도 남녘과 똑같이 굿도 굿잔치도 못 벌이거나 자취를 감추었으리라 느낍니다. 남녘은 남녘대로 제 삶길을 잊으면서 굿이랑 굿잔치를 잊는다면, 북녘은 북녘대로 제 삶자리를 잃으면서 굿이랑 굿잔치를 잃겠지요.


  곰곰이 돌아보면, 굿도 굿잔치도 ‘마을’에서 이루어집니다. 굿이나 굿잔치는 임금님이 벌이거나 꾀하지 않습니다. 양반이라든지 벼슬아치가 즐기는 굿이나 굿잔치가 아닙니다. 먼 옛날부터 굿이랑 굿잔치는 시골마을에서 흙을 일구거나 바다를 가로지르던 수수한 시골사람이 즐겼습니다. 들에서는 들굿을 하고, 바다에서는 바다굿을 합니다. 들굿을 하는 들사람은 들노래를 부릅니다. 바다굿을 하는 바다사람은 바다노래를 부릅니다.


  그러고 보니, 궁중에서는 ‘궁중 음악’을 하지요. 궁중 음악은 오늘날에도 ‘중요 무형문화재’ 대접을 받습니다. 굿노래를 부를 줄 아는 분 가운데에도 ‘인간문화재’ 대접을 받은 분이 있지만, 아주 뒤늦게 대접을 받았습니다. 나라에서 바라보는 ‘문화’라는 테두리에서도, 여느 시골마을 수수한 사람들 삶노래는 ‘문화’가 아니었다고 여기는 셈입니다.





 무당은 가장 밑바닥 삶을 살아가는 서민으로서 세속의 풍파를 몸소 겪어내는 사제자이다. 이들은 따돌림을 받으면서도 사람들과 부대끼며 일상적인 삶의 희노애락을 절절히 체험하면서 살아간다. 평소에 사람들은 무당을 경원한다. 그러나 삶에 문제가 생겨서 신의 도움이 필요할 때에는 무당을 찾는다. 무당은 스스로 가장 낮은 자리에서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제자라고도 할 수 있다 … 굿의 구조는 인간이 결코 신의 지배를 받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고를 보여준다 … 신은 인간의 요청이 있어야만 사람을 만나러 올 수 있다 ..  (100, 109, 110, 112쪽)



  더 헤아려 보면, 나라에서 꾀하는 커다란 잔치마당이라고 할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자리에서 ‘궁중 음악’을 선보이는 일은 있어도 ‘굿잔치 한마당’을 선보이는 일은 아직 없습니다. 마을 할매와 할배도 다 함께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수수한 ‘놀이마당’을 ‘우리 문화’로 여기는 흐름은 아직 없습니다. 사물놀이를 국립극장 같은 곳에 올리기는 하지만, 정작 시골에서 들놀이를 하지 못합니다. ‘농악’은 ‘시골노래’를 한자로 옮긴 낱말입니다. ‘시골(農) + 노래(樂)’가 ‘농악’입니다. 그러나 시골에는 허리 구부정한 할매와 할배만 남아서 힘들게 농약과 비료를 뿌리면서 겨우 농사를 짓습니다. 북을 치거나 꽹과리를 두들기거나 징을 울릴 만한 젊은 일꾼이 시골에 없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풍물패를 한다고 하더라도 풍물패가 왜 북이나 꽹과리나 징을 거느리면서 춤과 노래를 부르는가 하는 대목을 알거나 느끼지 못해요. 모를 찧고 논을 갈며 나락을 베고 피를 뽑는 들일을 하는 사이에 서로 기운을 새롭게 내어 막걸리 한 사발과 김치 한 조각을 나누어 춤과 노래로 고단함을 푸는 놀이마당과 잔치마당과 춤마당과 이야기마당을 펼치지 못합니다.


  악기는 있고, 악기를 다루는 솜씨는 있지만, 악기에 깃든 넋은 자라나지 못합니다. 들과 바다에서 일을 하면서 웃음꽃을 피우던 얼은 이어지지 못합니다. 밥 한 그릇을 함께 나누는 두레와 품앗이를 밝히던 숨결은 더 뻗지 못합니다.




.. 이 많은 무속의 신 가운데 추상적인 신은 하나도 없다. 곧 행복의 신이라든가 아름다움의 여신이라든가 음악의 신과 같은 것은 없다. 오직 구체적인 삶을 보호해 주는 신만이 있을 따름이다 … 굿에는 수많은 신이 등장하는데 그들 사이에 계급의 등차가 전혀 없다는 것이 무속 종교의 특징이다 … 신의 세계에서 위아래가 없는데 아무려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위아래가 있겠느냐 하는 사고를 낳는 것이다 ..  (114, 115, 116쪽)



  《팔도 굿》을 쓴 황루시 님은 한겨레가 ‘님(신, 하느님)’을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하는 대목을 찬찬히 풀이합니다. 한겨레가 굿이나 굿잔치를 벌이면서 섬긴 ‘님’은 위도 아래도 없다고 합니다. 모든 님은 하나요 한울타리라고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한테도 위와 아래가 없을 테며, 님과 사람 사이에도 위와 아래가 없을 테지요. 모두 같은 님이면서 모두 같은 사람이라는 마음으로 먼먼 옛날부터 한겨레 삶을 이었을 테지요.


  나와 네가 하나이면서 한넋입니다. 이웃하고 동무도 하나이면서 한얼입니다. ‘우리’라고 하는 말마디를 쓰는 까닭도, 너와 나 사이를 가르면서 누가 높거니 낮거니 하고 따지지 않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집단주의나 공동체를 밝히려고 쓰는 ‘우리’가 아니라, 서로 아끼고 보듬으면서 사랑할 사이인 사람이라는 대목을 밝히려고 쓰는 ‘우리’로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 도시의 이웃들은 공간적으로 가까이 산다 해도 각기 직업이 다르고 삶의 체험이나 문화적인 배경이 달라 공유할 수 있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우연이 개재되지 않는 한 그들의 생활은 서로 얽히지 않는다 ..  (126쪽)



  굿과 굿잔치가 생겨서 널리 나누었던 까닭은 들이나 바다에서 마을을 이루어 살던 사람이 ‘모두 같은 일’을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도시에서는 굿도 굿잔치도 없으며, 굿이나 굿잔치가 다시 나타나기 어렵습니다. 도시에 아주 많은 사람이 몰려서 살지만, 모두 다른 일을 하고 다른 곳을 바라보면서 다른 때에 움직입니다. 한자리에 모일 겨를이 없습니다.


  시골에서는 누구나 새벽 일찍 일어나고 밤에 일찍 잠자리에 듭니다. 낮에 햇볕이 뜨거울 적에는 누구나 한숨을 돌리면서 가볍게 눈을 붙이거나 쉽니다. 오늘날에는 가게에서 사다가 쓴다지만, 지난날에는 모든 사람이 손수 밥과 옷과 집을 지어서 건사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을에서 삶을 손수 지은 사람이 서로 어울리면서 굿과 굿잔치를 벌였습니다.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려는 뜻으로 마을잔치를 이루고, 웃음과 노래와 춤을 같이 누리려는 뜻으로 마을놀이를 이룹니다.


  함께 웃고 노는 마을잔치가 되려면 ‘모든 사람이 똑같은 일을 해야’ 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제 일을 찾아서 하되 ‘모든 사람이 기쁘게 삶을 지을 수 있다’면 마을잔치를 아름답게 이룰 만하리라 느낍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살림이 넉넉해야 이루는 마을잔치가 아니라, 손수 삶을 짓고 사랑을 가꿀 때에 스스럼없이 마을잔치가 태어나리라 느낍니다.


  《팔도 굿》에 나오는 이야기가 책에만 아로새겨진 발자국이 아닌, 남북녘 어디에서나 신나게 울려퍼지는 노랫가락이 될 수 있는 날을 꿈꾸어 봅니다. 4348.5.21.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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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가면 7
스즈에 미우치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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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512



마음을 끄는 사랑스러운 몸짓

― 유리가면 7

 미우치 스즈에 글·그림

 해외단행본팀 옮김

 대원씨아이 펴냄, 2010.4.30.



  마음속에 사랑이 있으면 됩니다. 사랑이 있으니 무엇이든 됩니다. 마음속에 사랑이 없으면 안 됩니다. 사랑이 없으니 무엇이든 안 됩니다. 누구나 스스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 마음속에 사랑이 있을 때와 없을 때에, 내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하고, 찬찬히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 “괜찮니? 정말 알 수 없는 애야. 무대 뒤로 들어온 순간 덜덜 떨기 시작이니. 무대 위에선 떨어진 목에 묻은 먼지도 털어낼 정도로 여유 있더니.” (20쪽)

- ‘엄마, 나 연극을 하고 싶어요. 나에겐 이것밖에 없는 것 같은 기분이에요. 난 아무런 장점도 없고, 아무것도 잘하는 것 없는 별 볼일 없는 애지만, 이것만은 해낼 수 있을 것 같은걸요. 무대 위에 서면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태어나서 참 좋구나 하고 느껴지는 걸요. 있잖아요, 엄마. 누가 말려도, 반대해도, 설령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 될지라도, 나, 이 가슴의 불꽃은 꺼지게 할 수 없어요.’ (41쪽)





  미우치 스즈에 님 만화책 《유리가면》(대원씨아이,2010) 일곱째 권을 읽으면, 마야라는 아이가 연극을 하려고 무대에 서면 그만 모든 사람 눈길을 한눈에 사로잡는다고 하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마야는 이 대목을 아직 못 깨닫습니다. 아니, 마야는 나중에도 이 대목을 제대로 못 깨닫습니다. 마야는 그저 연극에 온마음이 이끌릴 뿐이고, 연극을 하면서 온몸이 활활 불타오를 뿐입니다.


  아유미라는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재주를 뽐내면서 스스로 즐겁게 연극을 하지만, 마야는 어버이한테서 아무것도 물려받지 못했다고 여기는 마음이면서도 어쩐지 연극을 하면 온몸이 불타오른다고 느낍니다. 이리하여, 처음에 사람들은 아유미 연극을 보면서 저렇게 예쁜 아가씨가 어디 또 있을까 하고 놀라워 하다가, 이윽고 마야 연극을 보면서 저렇게 수수한 아가씨가 무엇을 보여주겠느냐고 핀잔을 하던 마음이 싹 사라지면서 그만 넋을 잃은 채 마야 무대에 빠져듭니다.



- “그 애는 말이에요, 하라다 씨. 같은 연극을 하는 사람들에겐 위협적인 존재예요. 젊었을 땐 그 재능 때문에 여기저기의 무대에서 따돌림받게 되겠지. 하지만 하라다 씨, 결국 세상이 그 애를 인정해 주게 될 거예요. 대중이 그 아이를 원하게 될 거예요.” (66∼67쪽)

- ‘마야, 잘못이 있다면 그건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네 연기의 매력이야. 그 재능이라구. 그들은 네가 두렵고 질투가 나서, 그래서 너를 내쫓은 거야.’ “마야, 지금부터도 잊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거야. 인생은 길어. 나쁜 일이 있을 때마다 끙끙거리면 인생도 엉망이 된다구.” (81쪽)





  마야 연극은 어떻게 사람들 마음을 휘저을 수 있을까요? 마야는 어떻게 ‘무대광풍’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요?


  마야는 연극을 하면서 온마음을 하나로 모을 줄 압니다. 마야는 연극을 할 적에 ‘어떤 배역’이 되든 ‘그 배역과 하나’가 되어 삶을 새로 지을 줄 압니다. 마야는 ‘오늘 이곳에 있는 가난하고 가엾고 예쁘지도 않고 키도 작고 재주도 없는 몸’을 내려놓고는, ‘배역에 맞는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다시 태어날 줄 압니다. 스스로 새로운 사람이 될 줄 아는 마야이기 때문에, 마야 연극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새롭게 태어나는 숨결’에 사로잡혀서 ‘삶을 사랑하는 이야기’를 마야 몸짓에서 읽으려고 합니다.




- “어떤 일이 있더라도 너에겐 연극이 있어. 네가 버리지 않는 한 연극도 널 버리지 않아. 그렇지, 마야?” (82쪽)

- “영혼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어.” (180쪽)



  마야가 보여주는 연극은 ‘넋(영혼)’으로 들려주고 보여주는 무대입니다. 마야는 딱히 재주도 솜씨도 없습니다. 마야도 재주와 솜씨를 키우려고 꾸준히 애쓰지만, 아직 터무니없이 모자랍니다. 마야는 어떤 배역을 따내어 제 이름값을 알린다거나 돈을 많이 벌겠다고 하는 뜻이 없습니다. 마야는 그저 무대에 서서 ‘새로운 배역’을 맡고 싶습니다. 마야는 그저 무대에서 ‘말 한 마디 없이 선 나무’로 있더라도 연극을 하면서 새로운 숨결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유리가면》에 나오는 마야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온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스스로 이루려고 하는 길로 힘차게 나아가려고 하는 몸짓이 된다면, 새로운 숨결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내가 될 수 있고, 사랑이 가득한 내가 될 수 있습니다. 꿈을 꾸면서 삶을 짓는 내가 될 수 있으며, 고운 노래를 들려주는 푸른 바람이 될 수 있습니다.





- “어설프게 캐서린으로서의 예비지식을 갖고 있는 것보다는, 백지 상태가 차라리 나은 것 아닐까? 서툰 선입관 같은 건 없는 쪽이 나을지도 몰라.” (105쪽)

- “인간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그 자라난 환경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저절로 캐서린을 이해할 수 있게 되지.” (109쪽)



  마음을 끄는 사랑스러운 몸짓은 손재주가 아닙니다. 마음을 끄는 사랑스러운 몸짓은 이쁘장한 얼굴이나 몸매가 아닙니다. 내가 나를 참다이 사랑하면서 맑게 웃을 줄 아는 몸짓일 때에 비로소 마음을 끌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착하게 바라보면서 밝게 노래할 줄 아는 몸짓일 때에 바야흐로 마음을 끌기 마련입니다.


  “어설프게 예비지식을” 생각할 적에는 그저 어설플 뿐입니다. 지식이나 철학이나 종교를 어설프게 들이대려고 하면 언제나 어설프기만 합니다. 삶은 논리도 이론도 아닙니다. 삶은 그예 삶입니다. 몸으로 알고 마음으로 알아야 삶입니다. 몸과 마음으로 함께 배워서 사랑스레 나눌 줄 알아야 삶입니다.


  어떤 것이든 곱게 받아들이는 몸짓이기에 배울 수 있습니다. 아이가 어버이한테서 말을 배울 수 있는 까닭은 ‘아무 예비지식이나 선입관’이 없이 어버이를 사랑스레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믿는다’기보다 ‘사랑한다’는 마음이기 때문에 어버이가 아이한테 말을 가르치고,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말을 배웁니다.


  연극도 삶도 교육도 모두 매한가지입니다. 사랑스러운 몸짓이 될 때에 모든 것을 이룹니다. 4348.5.21.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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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31 0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놀 2015-05-31 06:49   좋아요 0 | URL
<유리가면>이 처음 연재된 지 어느덧 40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마지막 권이 몇 해 앞서부터 나온다고 하면서도 아직 나오지 못했는데, 다른 만화도 이와 같지만 어떤 만화이든 `삶`을 이야기합니다.

<유리가면>은 `유리`라는 것과 `탈(가면)`이라는 것을 만화 이름으로 붙이면서, 우리 삶이 어떠한가를 넌지시 비추어 보이기도 합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내 삶`을 제대로 찾고 바라보고 즐기고 누리는 나날이 아니라, 마치 `탈`을 쓰고 연극을 하듯이 다른 사람이 시키는 대로 이끌리거나 휘둘리기 일쑤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조차, 매체나 문학이나 사회에서 말하는 `이성 사이 짝짓기를 좋아하는 몸짓`이 사랑이라도 되는 줄 잘못 알기 일쑤이고, 그윽하면서 넉넉하고 따사로운 숨결인 `참사랑`은 모르는 채 하루하루 `삶이 아닌` `그저 연극뿐인` 나날을 보내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면, 이런 글을 쓰는 나는 얼마나 `연극 아닌 삶`을 누리는가 하고 돌아봅니다. 삶을 생각하는 사람은 삶을 찾고, 삶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삶을 찾지 못합니다.

저도 만화영화를 보았는데, 만화영화에서는 `결말`을 맺지 않아서 그냥 그렇더라구요 ^^;;; 아무래도 <유리가면>은 결말이 안 난 작품이면서 워낙 인기를 많이 받은 작품이라서, 만화영화로 그린 감독이 상상력을 쓸 틈이 없었구나 싶어요.

언제나 스스로 삶을 찾으면서 나다운 사랑으로 하루하루 아름답게 누리시기를 빌어요. 고맙습니다~ ^^
 

우리집배움자리 33. 걷는 학교



  우리 집은 ‘걷는 집’이다. 바깥살림을 거느리는 아버지가 ‘자가용 모는 살림’으로 나아가지 않으니, 어디를 가든 두 다리로 걷기 마련인데, 자가용을 몰지 않아서 걷는다기보다, 두 다리로 걸을 적에 온누리를 마음과 몸으로 한결 깊고 넓게 누릴 수 있다고 여겨서 ‘걷는 집’이다. 큰아이도 걸음마를 뗀 뒤부터 참으로 오래 걷고, 작은아이도 걸음마를 익힌 뒤부터 더없이 많이 걷는다. 어버이도 아이도 걸으면서 산다. 우리 걸음걸이로 이 땅을 디딘다. 우리가 걷는 길이 고스란히 삶으로 거듭난다. 발바닥으로 지구별을 느끼고, 손바닥으로 하늘바람을 느낀다. 몸으로 흙을 느끼고, 마음으로 숲을 느낀다. 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걷는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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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뜸으로 달리고 싶은 마음



  다섯 살 산들보라가 달립니다. 이제 산들보라는 어디에서나 저 앞으로 멀리 멀리 달립니다. 뒤도 안 보고 내처 달립니다. 아주 한참 달려서 아주 조그맣게 보이는구나 싶어서 큰소리로 부르면, 그제서야 뒤를 살짝 돌아보면서 “응?” 하고 대꾸합니다. 달리기를 잘하는 누나가 달라붙을까 봐, 또는 누나가 저보다 앞서 달릴까 봐 저만치 앞서 달리는구나 싶습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참말 누나가 산들보라를 아주 조금이라도 앞지르면 꽥꽥 소리를 지르면서 저보다 앞으로 가지 말라고 막거든요.


  몸도 크고 키도 크며 다리힘도 좋은 누나는 이제 저만치 혼자 앞서 달리지 않습니다. 작은아이는 앞으로도 저만치 앞서 달리면서 놀리라 느낍니다. 우리가 굳이 으뜸으로 달리지 않아도 되는 줄 느끼면,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나 모두 으뜸인 삶인 줄 깨달으면, 나란히 걸으면서 함께 노래하는 사랑스러운 이야기꽃을 피우는 재미를 나누겠지요. 4349.5.20.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삶과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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