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실 이야기 - 귄터 그라스 자전 소설
귄터 그라스 지음,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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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86



어떤 삶을 글로 남기고 싶은가

― 암실 이야기

 귄터 그라스

 장희창 옮김

 민음사 펴냄, 2015.5.1.



  귄터 그라스 님은 2015년 4월 13일에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2006년에 이녁 자서전인 《양파 껍질을 벗기며》를 내놓을 적에 ‘히틀러 나치 친위대’에서 일한 적이 있다는 대목을 처음으로 밝혔다고 합니다. 《암실 이야기》는 《양파 껍질을 벗기며》를 선보인 뒤에 내놓은 ‘자전 소설’로, 귄터 그라스 님이 아이들하고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놓았다고 합니다.



.. 그리고 라라, 너는 말이야, 정말이지 강아지 한 마리를 가지고 싶어 했지. 그리고 자기가 제발 막내딸이었으면 하고 바랐어 … 아버지가 《양철북》으로 단단히 한몫 잡은 덕분에 우리와 많은 손님들을 위해 심지어 양의 허벅지 살을 사 줄 수도 있었지 … 어쨌든 우리는 몰랐어. 왜 그렇게 다들 갑자기 우왕좌왕하는지, 그리고 왜 우리 어머니가 트렁크를 재빨리 꾸려, 라라, 너와 함께 그래 어머니의 고향인 스위스로 달아나려 했는지 ..  (11, 39, 51쪽)



  그나저나 ‘나치 친위대’란 무엇일까요? 인터넷 백과사전을 살펴보니, ‘나치 친위대’는 ‘일반SS’와 ‘무장SS’가 있다고 합니다. “일반SS는 경찰과 인종 업무를 맡았”고, 무장SS는 “전투능력이 탁월할 뿐 아니라 나치스 단체 가운데 극단적이고 폭력적이며 광신적인 활동으로 악명 높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SS 대원들은 다른 인종을 증오하고 인간의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교육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정치범, 집시, 유대인, 폴란드 지도자, 공산당 간부, 게릴라 저항군, 소련 전쟁포로들을 대량 학살했다. 독일이 패배한 후 1946년 뉘른베르크 연합국재판소에서 범죄단체로 선언했다”고 합니다. (인터넷 두산백과에서 살펴봄)


  귄터 그라스 님은 폴란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니까, 폴란드에서 태어난 귄터 그라스 님은 바로 ‘폴란드 지도자’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을 끔찍하게 죽이거나 괴롭히는 짓을 일삼은 ‘나치 친위대’로 지내면서 1940년대를 가로지른 셈입니다.


  2006년에 귄터 그라스 님이 이녁 발자국을 밝힐 때까지 다른 사람들은 이 대목을 몰랐을까요? 아니면, 귄터 그라스 님이 숨을 거둔 뒤에 이 대목이 알려질 수 있었을까요? 어느 모로 본다면, 아무도 귄터 그라스 님더러 이녁 발자국을 밝히라고 하지 않았을 텐데, 굳이 예순 해 남짓 지난 예전 일을 왜 털어놓으려고 했을까요? 죽음을 앞두고 도무지 이녁 발자국을 꽁꽁 감춘 채 떠날 수 없다고 느꼈을까요?



.. 나중에는 프리데나우의 주말 시장에서 생선도 찍었지. 그리고 반으로 가른 양배추의 알속도. 하지만 이미 카를스바트 시절부터 마리헨은 아빠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뭐든지 찍었어 … 마리헨은 제대로 정리해서 보여줄 수 있는 것보다, 아이들이 입에 올릴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찍었던 거야 … 열일곱 살 먹은 너희들이 병사처럼, 장화를 신고 머리에 철모를 쓰고 어쩌면 기관총까지 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겠지. 전쟁 기간에 그 자신이 그런 모습을 해야 했던 적이 있으니까 ..  (20, 58, 72∼73쪽)



  《암실 이야기》라는 책에는 귄터 그라스 님이 낳은 여덟 아이 이야기가 찬찬히 흐릅니다. 여덟 아이와 함께 여러 ‘아이 어머니’ 이야기가 흐르고, 귄터 그라스 님 둘레에서 ‘온갖 사진을 찍어 주면서 함께 지낸 여성’ 이야기가 어우러집니다. 그리고, 책이름처럼 ‘암실’과 얽힌, 그러니까 ‘사진을 찍는 삶’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가로지릅니다.



.. 난 이따금 이런 생각이 들어. 아마도 우리 엄마는 성격상 싸움을 나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고. 반면에 아빠는 어떤 싸움도 견디지 못했어 … 꼬마 나나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감쪽같이 몰랐어. 우리 아빠가 더 이상 비밀을 혼자만 간직할 수 없어 레나에게 이렇게 말할 때까지는 말이야. “그런데 너한테 여동생이 있단다. 정말 귀엽지.” 아니면 비슷한 말이었겠지. 아빠가 속을 털어놓을 때까지 꽤나 시간이 걸렸던 거야 … 쌍둥이 형이 질문을 던진다. 형제자매 중 유명한 아버지 때문에 가장 힘들어했던 사람이 누구냐고 ..  (120, 171, 223쪽)



  사진이란 무엇일까요? 사진은 무엇을 적바림할까요? 사진을 찍으면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요? 사진을 찍는 사람을 무엇을 바라보았을까요? 사진을 읽는 사람은 사진 한 장에서 어떤 이야기를 길어올릴까요? 사진을 찍는 사람과 사진에 찍히는 사람은 저마다 어떤 눈길과 마음일까요?


  그러면, 글이란 또 무엇일까요? 글은 무엇을 적바림할까요? 글을 쓰면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요? 글을 쓰는 사람은 무엇을 바라보았을까요? 글을 읽는 사람은 글 한 줄이나 책 한 권에서 어떤 이야기를 길어올릴까요? 글을 쓰는 사람과 글에 깃드는 사람은 저마다 어떤 눈길과 마음일까요?


  귄터 그라스 님은 ‘글 쓰는 사람’이라는 길을 걷습니다. 무엇이 귄터 그라스 님을 사로잡아서 ‘글 쓰는 삶’으로 나아가도록 했을까 하고 돌아봅니다. 《암실 이야기》에도 언뜻선뜻 드러나는데, 귄터 그라스 님은 ‘글을 쓰느라 바쁘고 힘들’어서 아이를 여덟을 낳기는 했지만 정작 아이하고 스스럼없이 뛰놀거나 호젓하게 하루를 누리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소설책 《암실 이야기》는 실마리를 알려주거나 실타래를 풀지 않습니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수수께끼만 보여줍니다. 바람처럼 찾아와서 사진을 찍은 ‘마리헨’이라는 사람이 마지막에도 바람처럼 하늘로 날아올라 사라졌다고 하면서, 모든 삶과 꿈과 사랑이 바람과 같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 마리헨은 떠나기 전에 이렇게 말했거든. “제방에서, 바람을 좀 찍어 보고 싶어. 바깥엔 폭풍우가 멋지게 불고 있잖아. 같이 갈래, 파울헨?” … 이제 아이들은 서로를 본래 이름으로 부른다. 아버지는 어느새 오그라들면서 슬쩍 사라지려 한다. 아이들 사이에서 중얼거리는 목소리로 의심이 쏟아진다. 그가, 오직 그만이 마리헨의 유산을 물려받았어. 그리고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박스도 자기가 숨겨 놓았어 ..  (239, 244쪽)



  바람이 불어 싱그럽고 시원한 여름입니다. 바람이 흘러서 누구나 숨을 쉬면서 목숨을 잇습니다. 햇볕과 함께 빗물과 바람이 있으니 풀과 나무가 푸르게 자랍니다. 바람이 부는 하늘은 파랗고, 하늘을 닮아 바다가 파랗게 빛납니다.


  귄터 그라스 님은 이녁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사랑으로 살면서 아이를 낳았고 글을 썼습니다. 귄터 그라스 님이 낳은 아이들은 저마다 어머니와 아버지한테서 사랑을 물려받으면서 새롭게 삶을 지어 새삼스레 아이를 낳습니다.


  ‘양파 껍질을 벗기’면 새로운 껍질이 속에 있습니다. 양파 껍질을 벗기고 또 벗기다 보면 그만 속이 모두 사라집니다. 오늘날 디지털사진기는 사진을 찍은 뒤에 암실에 갈 일이 없으나, 지난날 필름사진기는 사진을 찍었으면 반드시 암실에 가야 했습니다. 단추를 눌러 찰칵 소리가 나면 사진을 찍고, 암실에서 새까만 어둠을 오래도록 받아들이면 종이 한 장에 그림이 살며시 드러납니다.


  숱한 일을 치르기만 해서는 글을 쓰지 못합니다. 숱한 일을 치르고 나서 조용히 삭이는 나날을 보내기에 비로소 글을 씁니다. 그러니까, 귄터 그라스 님으로서는 이녁 어린 날을 밝히는 글을 2006년에 이르러 비로소 쓸 수 있던 셈이고, 여덟 아이를 낳고 여러 ‘아이 어머니’를 둔 살림살이는 2008년에 이르러 바야흐로 털어낼 수 있던 셈입니다.


  귄터 그라스 님네 아이들은 서로 “형제자매 중 유명한 아버지 때문에 가장 힘들어했던 사람이 누구냐” 하고 물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누구일까요? 누가 ‘유명한 아버지’ 때문에 가장 힘들었을까요? 아마 바로 ‘아버지’인 귄터 그라스 님이겠지요.


  슬픔도 생채기도 아픔도 모두 글로 씁니다. 꿈도 사랑도 삶도 모두 글로 씁니다. 귄터 그라스 님, 하늘나라에서는 부디 따스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느긋하게 삶을 짓고 사랑을 꽃피우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어떤 이야기이든 너무 오랫동안 혼자 가슴에만 묻어두지 마셔요. 다 괜찮습니다. 아이들은 어버이를 미워할 수 없고, 어버이도 아이들을 미워할 수 없어요. 4348.5.22.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문학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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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순이 65. 노랑꽃 곁에서 (2015.5.15.)



  자전거마실을 하는데, 냇물이 흐르는 논둑길 한쪽에 흐드러진 노랑괴불주머니를 본다. 노란 꽃잔치를 보고 자전거를 멈추었으나, 아이들은 아직 노란 꽃잔치를 못 알아챈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라고 이르니 비로소 꽃잔치를 알아챈다. 너희는 함께 자전거를 타더라도 다른 곳을 보고, 다른 숨결을 느꼈을 테지? 함께 노랑꽃을 즐긴 뒤 다시 달리자. 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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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읽는 책 214] 슬기롭게 철들기



  슬기롭게 생각하니

  곱게 셈이 들어

  착한 넋으로 밝은 철



  삶을 기쁘게 짓는 사람은 눈을 가만히 뜨고 슬기롭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슬기롭게 생각하는 마음으로 아침을 열기에, 언제나 곱게 셈을 살필 수 있는 몸짓이 됩니다. 곱게 셈을 살피면서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하니, 한결같이 착한 넋으로 노래하면서 밝은 철이 듭니다. 이제 철을 느끼고 달과 날을 느끼면서 해를 넉넉하게 누릴 수 있는 사람으로 오롯이 섭니다. 4348.5.22.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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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을 까닭이 없다



  노래를 얼마나 잘 불러야 할까 하고 생각해 보면, 스스로 즐겁다고 여기도록 부르면 되리라 느낍니다. 춤을 얼마나 잘 추어야 할까 하고 생각해 보면, 스스로 기쁘다고 여기도록 추면 되리라 느낍니다. 글씨는 얼마나 잘 써야 할까요? 밥은 얼마나 맛나게 지어야 할까요? 일은 얼마나 잘 해야 할까요? 자전거는 얼마나 잘 타야 할가요?


  무엇이든 더 잘 해야 한다는 삶이 아닌, 무엇이든 늘 즐겁게 누리는 삶이 될 때에, 함께 웃고 노래할 수 있으리라 느낍니다. 나는 웃고 노래하려는 마음으로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나는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우려는 마음으로 이곳에서 새 하루를 짓습니다.


  책은 잘 읽어야 하지 않습니다. 책은 즐겁게 읽으면 됩니다. 글은 잘 써야 하지 않습니다. 글은 기쁘게 쓰면 됩니다. 어느 책을 읽든 즐겁게 읽을 노릇이고, 어떤 글을 쓰든 기쁘게 쓸 일입니다. 4348.5.22.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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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살이 2015-05-22 08:43   좋아요 0 | URL
참 좋습니다. 뭐든 즐겨요. ^^ 잘한다는 생각은 버려요~^^

파란놀 2015-05-22 09:32   좋아요 0 | URL
언제나 즐겁게 무엇이든 즐기면서 하루를 누리셔요~
 
소녀의 마음 - 개정판 카르페디엠 6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양철북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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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102



가시내도 사내도 모두 따뜻한 마음인걸

― 소녀의 마음

 하이타니 겐지로 글

 햇살과나무꾼 옮김

 양철북 펴냄, 2004.1.30.



  사랑받는 아이는 언제나 따사로운 마음이 됩니다.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라면 언제나 주눅드는 마음이 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서 살아간다면, 몸을 얻어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짝을 지은 어버이가 있기 때문이요, 열 달 동안 몸속에 고이 품으며 나를 돌본 어머니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낳은 어버이한테서 제대로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느낀다면, 어버이한테서 제대로 사랑을 받지 못하더라도 다른 수많은 이웃한테서 사랑을 받습니다.


  날마다 먹는 밥과 늘 입는 옷과 기쁘게 잠드는 집을 일군 수많은 이웃이 있습니다. 버스를 모는 일꾼이 있고, 책을 쓴 어른이 있으며, 영화를 빚거나 만화를 그린 누군가가 있습니다. 공장에서 연필을 깎은 일꾼이 있으며, 가게에서 물건을 파는 일꾼이 있어요.


  여기에 숲과 바다와 하늘이 있습니다. 숲에서 수많은 나무가 우리한테 푸른 숨결을 베풉니다. 바다에서 너른 품을 베풉니다. 하늘은 파랗게 물든 바람을 베풉니다. 새와 개구리와 풀벌레가 고운 노래를 베풉니다. 온누리를 가득 채우는 가없는 별이 밤마다 반짝반짝 빛납니다. 이 모두를 찬찬히 느끼든 못 느끼든, 이 모든 숨결과 넋과 바람이 우리를 둘러싸면서 흐릅니다. 그러니, 우리는 늘 모든 이웃한테서 사랑받는 목숨입니다.



.. “자기들이 감당하기 힘든 일이 있으면 그저 사춘기라서 그렇다는 둥 반항기라서 그렇다는 둥 쉽게 말해 버리잖아. 그러면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까 편하겠지.” … “가스리도 그런 선생님을 만난 경험이 있나 보지?” “있고말고요.” 잘난 척하며 가스리가 대답하자, 미네코가 말했다. “그런 말을 자랑스레 떠벌리는 애도 똑같이 둔해.” 순간, 가스리는 발끈해서 곧바로 되받았다. “그런 말로 자기 자식을 탓하는 부모도 둔해.” ..  (10, 21쪽)



  하이타니 겐지로 님이 쓴 청소년문학 《소녀의 마음》(양철북,2004)을 읽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소녀’는 열여섯 살입니다. 열여섯 살 나이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헤어집니다. 어머니는 새로운 사내를 맞아들여서 딸아이와 함께 삽니다. 아버지는 홀로 판화를 새기는 일을 하면서 삽니다. 어머니가 새로 맞아들인 사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집을 떠납니다. 열여섯 살 아이는 이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봅니다. 혼자 사는 아버지한테 생긴 새로운 짝을 한 번 만나는데, 아버지는 다시 혼인을 할 뜻이 없습니다. 아니, 다시 혼인을 하더라도 아이를 더 낳을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새롭게 생긴 짝을 떠나 보내고, 다시금 홀로 조용히 판화를 새기면서 삽니다. 이동안 ‘소녀’는 한 살을 더 먹고, 또 한 살을 더 먹습니다.



..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애쓰는 건 괜찮지만, 무조건 학교에 보내려고만 하니까 엣짱은 껍데기 속에 웅크린 달팽이가 되어 버렸어.” … “아이를 물질적으로나 금전적으로 고생시킨 적은 없고?” “당연하지.” “아주 상식적인 사람들이겠지?” “물론이야.” “이혼은 절대 하지 않을 사람들?” “아마도.” 가스리와 키쿠코는 얼굴을 마주보고 후후후 웃었다. “보통 사람들은 그걸 행복이라고 말하겠지?” “그렇겠지.” …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을 수 있잖아. 그런데 평소랑 조금 다른 걸 가지고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하고 꼬치꼬치 캐물으면, 엄만 좋겠어?” ..  (38, 39, 64쪽)



  《소녀의 마음》에 나오는 아이는 ‘어머니 집’에서 살지만 틈틈이 ‘아버지 집’으로 나들이를 갑니다. 어머니 집에서 어머니와 늘 툭탁거리면서 마음이 다치면, 아버지 집에서 아버지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다친 마음을 풉’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갈라진 뒤 아이가 이렇게 지낼 수 있는 집은 얼마나 있을까 모르겠지만, 어머니와 아버지가 갈라지더라도 아이가 스스로 씩씩하게 살도록 이끌려는 마음이라면, 아이는 ‘기쁜 사랑’을 생각하고 찾으면서 앞으로 한 걸음씩 내딛을 수 있으리라 느낍니다.


  그러니까, 아이가 기쁜 사랑으로 자라고, 어버이도 기쁜 사랑으로 살림을 꾸리는 길은 ‘이혼은 죽어도 안 해야 하는 집’이 아닙니다. 어버이가 돈을 많이 벌어서 아이들한테 돈 걱정을 안 시킨대서 아이가 기쁘지 않아요. 어버이가 언제나 맛난 밥을 잔치처럼 차려 준대서 아이가 기쁘지 않아요. 아이가 눈부시게 고운 옷을 늘 입고 다닐 수 있대서 아이가 기쁘지 않아요.


  겉모습이나 겉차림 때문에 기쁠 아이는 없습니다. 어른도 이와 같으리라 생각해요. 겉을 아무리 잘 꾸민다고 해서 기쁠까요? 말끔한 옷과 번듯한 자가용을 남 앞에서 뽐내야 삶이 기쁠까요?



.. “오해하지는 마. 엄마, 엄마가 누굴 사귀든 그건 엄마 자유고, 그것 때문에 내 기분이 나쁘다면 그건 내가 이상한 거지. 다만 내가 조금 기분이 나쁜 건, 엄마가 그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거야.” … “뭐 어때서? 고등학생이든 대학생이든, 시집을 가든, 난 아빠랑 손 꼭 잡고 다닐 거야. 그러니까 아빠, 너무 싫어하지 마.” … “난 아빠 닮을래.” “그러지 마.” 사내가 힘주어 말했다. “가스리는 아빠를 닮지도 않았고, 엄마를 닮지도 않았어. 가스리는 가스리야.” ..  (67, 77, 110쪽)



  라면 한 그릇을 끓여서 한두 젓가락씩 나누어 먹더라도 깔깔 하하 호호 웃으면서 노래할 수 있습니다. 참말 놀라운 잔치밥을 차려서 먹더라도 아무 말을 않고 쥐죽은듯이 조용히 밥만 삼킬 수 있습니다. 콩 한 알을 두 쪽으로 갈라서 먹으면서도 배가 부를 수 있습니다. 수박 한 덩이를 혼자 먹으면서도 어쩐지 허전할 수 있습니다.


  아이 마음이란 아이와 같은 눈길로 이곳에 서면 읽을 수 있습니다. 모든 어른은 처음에 아이였으니, 오늘 이곳에서 ‘나는 어른이야’ 하는 생각으로만 선다면, 아이하고는 도무지 말을 섞을 수 없습니다. 모든 어른도 처음에 아이인 줄 슬기롭게 깨달으면서, 오늘 이곳에서 ‘너도 나도 똑같은 아이야’ 하는 마음으로 눈길과 넋을 고요히 맞출 수 있으면, 아이가 오롯이 품은 마음을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 “우에노,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어. 세상 어느 누구도.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살아 있는 한 누구한테든 사랑받고 있어.” … “인간이란 원래 갈팡질팡하는 존재지만, 한 번 결정한 것을 쉽게 번복하는 모습은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에게 안타깝게 비치지 않을까? 그러니까 너는 그 모습을 민감하게 받아들인 거겠지.” … “아무리 남한테 신세를 져도 주눅 들 필요는 없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건 자기 자신이야. 신세도 갚고 인생도 즐기며 살면 천당에 간답니다.” ..  (133, 195, 200쪽)



  《소녀의 마음》에 나오는 아이는 ‘할 말을 숨기는 사람’을 달가이 여기지 않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채 움직이는 사람은 하나도 반갑지 않습니다. 제 어머니라 하더라도 속마음을 숨긴 채 겉으로는 아닌 척하면 영 못마땅합니다. 아이는 사람들이 왜 속마음을 자꾸 꽁꽁 감추려고 하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아직 아이라서 이를 모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아이 눈길로 바라보고,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우뚝 서는 마음길로 바라본다면, 우리가 서로 속내를 숨겨야 할 까닭은 딱히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기쁨을 함께 나누는 사이입니다. 우리는 서로 슬픔을 같이 나누는 사이입니다. 기쁨만 함께 나누어야 하지 않습니다. 슬픔은 꽁꽁 가두어야 하지 않습니다. 생채기나 아픔을 홀로 삭인다고 해서 사라지거나 줄어들거나 아물지 않습니다.


  《소녀의 마음》에 나오는 아이는 바로 이 대목을 바랍니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모두 스스럼없이 털어서 나누기를 바랍니다. 아버지하고 헤어진 어머니가 ‘새 남자친구’를 사귀든 ‘새 애인’을 만나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어머니 삶’이라고 여기니까요. 그런데, 이를 꽁꽁 숨기거나 감추려고 하면 답답합니다.



.. 가스리가 조그맣게 말했다. “부모가 이혼한 것 때문에 아이들이 고통받는 건 싫어.” 사내가 말했다. “그것은 네가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겠지.” … “너희 아버지, 말을 안 하고 있으면 무서워 보이지만, 일단 대화를 나누면 상대방을 편안하게 만들지? 그게 가난한 사람들의 냄새거든.” 가스리의 입가에 살짝 웃음이 번졌다. “가난해서 무척 힘든 시절이었을 텐데도 그 시절 얘기를 할 때면 아빠가 얼마나 즐거워 보이는지 몰라.” ..  (226, 241쪽)



  즐겁게 살려고 할 적에 즐거운 삶입니다. 사랑스레 살려고 할 적에 사랑스러운 삶입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많이 벌면서 살려고 하면 돈을 많이 벌면서 꾸리는 삶입니다. 노래하며 살려고 하면 노래가 흐르는 삶이요, 꿈으로 가득한 하루가 되기를 바라면 언제나 꿈으로 가득한 하루가 흐르는 삶입니다.


  어버이는 아이한테 사랑스러운 삶을 물려주는 넋입니다.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사랑스러운 삶을 물려받는 숨결입니다. 어버이는 아이와 함께 기쁜 살림을 알뜰살뜰 가꾸는 넋입니다. 아이는 어버이와 함께 씩씩하게 자라면서 집일을 돕고 집살림을 거들다가 어느새 홀로서기를 배우는 숨결입니다.


  가시내도 사내도 모두 따뜻한 마음일 때에 사랑입니다. 어버이도 아이도 서로 따뜻한 마음으로 만날 적에 사랑입니다. 청소년문학 《소녀의 마음》은 열여섯 살에서 열여덟 살 나이로 흐르는 아이 목소리를 빌어서 ‘삶을 사랑하는 하루를 짓는 마음’이 어떻게 태어나서 자라고 뿌리를 내리는가 하는 대목을 가만히 짚습니다.


  이 땅에서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라면, 아이가 어느 대학교에 붙을까 하는 근심이나 걱정보다는, 아이가 스스로 씩씩하게 서는 길을 돌아보는 마음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이 땅에 태어나 어버이와 하루를 누리는 아이라면, 어버이하고 마음을 여는 이야기꽃으로 기쁘게 노래할 수 있기를 빕니다. 4348.5.22.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청소년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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