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아이 149. 대문 따는 머스마 (15.5.24.)



  시골돌이는 이제 작대기를 갖고 노는 손놀림이 제법 익숙하다. 대나무 작대기를 쥐고 대문 윗걸쇠를 척 꽂아서 넘기려 한다. 그러나, 안 될 때도 있어서 영차영차 끙끙거린다. 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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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순이 70. 저녁놀 자전거 (2015.5.24.)



  저녁놀이 진다. 무지개빛으로 온누리를 감싸던 해님이 저만치 넘어가면서 노란 빛물결이 번진다. 이윽고 바알간 빛살이 퍼지겠지. 살랑이는 바람을 안고 천천히 논둑길을 달린다. 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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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안녕, 소르시에 1~2 - 전2권
호즈미 지음, 조은하 옮김 / 애니북스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528



모든 삶을 아름답게 담은 고흐 그림

― 안녕, 소르시에 1∼2

 호즈미 글·그림

 조은하 옮김

 애니북스 펴냄, 2014.11.7.



  호즈미 님이 빚은 만화책 《안녕, 소르시에》(애니북스,2014)는 ‘고흐 형제’를 다룹니다. 화가로 살던 무렵에는 그림이 널리 사랑받지 못했지만, 죽어서 이 땅을 떠난 뒤에는 그림이 아주 널리 사랑받은 고흐입니다. 《안녕, 소르시에》를 그린 호즈미 님은 ‘왜 죽고 난 뒤에야 이렇게 널리 사랑받는 화가가 되었을까?’ 하는 실마리를 풀어 보려고 이모저모 생각을 기울입니다. 참말 어떻게 죽고 난 뒤에야 그림이 널리 알려질 수 있을까요?


  그런데, 그림을 그린 고흐 님이 아니더라도, 퍽 많은 이들이 죽고 난 뒤에 비로소 사랑을 받습니다. 한창 씩씩하게 한길을 걸을 적에는 가난하고 힘겨운 삶이었다면, 죽고 난 뒤에는 그림값이 치솟아서 ‘배 곯을 일’이 없습니다. 죽었으니 배 곯을 일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만, 배를 곯던 때에 그림 한 장이 제대로 사랑받아서 팔릴 수 있었으면, 문화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창작하는 사람은 가난한 삶을 누려야 마음이 안 바뀌면서 곧게 한길을 걷는가요? 창작하는 사람은 돈을 많이 벌거나 이름값을 크게 얻으면 창작하는 마음을 잃고 바보스럽게 되는가요?



“우리 화가들은 자신의 눈에 비친 세상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사람들은 그걸 보고 감동하는 거잖아?” “그렇지.” “애걔? 그럼 네 형의 그림은 어떻게 봐야 해? 기쁨과 환희뿐만 아니라 슬픔이나 고독까지도 이토록 생생하게 그렸는데, 이런 그림을 보고 누가 감동을 느낄 수 있단 거지?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매춘부 그림만 해도 솔직히 보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워.” “인생이란 기쁨이 있으면 슬픔도 있는 게 당연하지 않나?” (7∼8쪽)




  고흐라는 화가뿐 아니라, 밀레라는 화가도 살림돈을 얻는 일이 몹시 벅찼습니다. 고흐도 밀레도 이녁이 죽은 뒤에 이녁 그림을 바라보는 눈길이 아주 크게 달라졌습니다. 왜 사람들 눈길은 이 화가들이 손에 붓을 쥐어 종이에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을 적에는 알아차리지 못했을까요. 왜 사람들 눈길은 이 화가들이 더는 손에 붓을 쥘 수 없을 때라야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여길까요.


  널리 알려지기도 했는데, 고흐는 밀레 그림을 즐겁게 ‘베껴 그리기(모사)’를 했습니다. 흙빛을 사랑으로 빚는 아름다운 숨결이 밀레 그림마다 흐른다고 여기면서, 밀레 그림을 다시 그리고 또 그리고 새롭게 그려서, 고흐 스스로 손끝에 담을 ‘흙빛을 사랑으로 빚는 아름다운 숨결’을 갈고닦으려고 했습니다.


  가만히 보면, 사람은 살빛이 흙빛을 닮습니다. 시골사람은 동양이든 서양이든 으레 흙빛 손이요 발이며 낯입니다. 흙을 일구고, 흙으로 집을 지으며, 흙에서 난 것을 먹으니, 아무래도 흙빛 살결이 되리라 느낍니다. 너른 숲이나 멧골에 깃들면, 숲흙이나 멧흙은 까무잡잡합니다. 잘 삭은 흙은 새까맣기도 합니다. 그런데, 살결이 하얀 사람이 있습니다. 서양사람이라서 백인이 아니라, 손에 흙을 만질 일이 없이 살던 사람이 살갗이 하얗습니다. 또는 허옇다고 할까요. 흙을 알고 흙하고 살 적에는 까무잡잡한 살빛이라면, 흙을 모르고 흙하고 등질 적에는 허연 살빛입니다.


  이리하여, 그림을 그릴 적에 흙을 흙빛 그대로 마주하면서 그릴 수 있으면, 하늘을 그릴 적에 하늘을 하늘빛 그대로 마주하면서 그릴 수 있습니다. 별을 별빛 그대로 마주하고, 바람을 바람빛 그대로 마주하지요. 꽃송이와 나무에 흐르는 기운을 읽고, 사람마다 마음으로 흐르는 숨결을 읽는다면, 이 모든 기운과 숨결을 그림으로 고이 담습니다. 고흐라는 화가가 담으려고 한 빛이나 빛깔이나 빛결이라면, 바로 이 대목, ‘흙을 비롯한 모든 목숨을 사랑으로 빚는 아름다운 손길’로 짓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빈센트 형에겐, 살아 있는 것 그 자체가 아름다움이야.” (9쪽)

“상상이 돼? 화를 내지 않는 사람 눈엔 이 세상이 어떻게 비쳐질는지.” “아니, 상상이 안 돼.”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지. 분노가 없으니까 반발심이 없어. 편견도 없고, 질투도 없어.” (11쪽)



  만화책 《안녕, 소르시에》를 보면, 이 만화를 그린 호즈미 님은 고흐 형제 가운데 형은 ‘미움이나 부아’가 하나도 없이 착하고 너른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고흐 형제 가운데 동생은 형이 이런 마음이 되어서는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없다’고 여겼으리라 하는 생각을 보여줍니다. 다만, 만화책 《안녕, 소르시에》는 사람들이 흔히 아는 이야기나 역사를 그대로 그리지 않습니다. 만화가로서 생각날개(상상)를 뻗어서 ‘어쩌면 이런 일이 있지 않았을까?’라든지 ‘어쩌면 정작 이런 일이 있었으나, 모든 이야기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뒤바뀌지 않았을까?’ 같은 수수께끼를 내놓습니다.


  사람들이 알 수 있는 참은 몇 가지 안 될 만합니다.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얽혀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이야기는 몇 가지 안 됩니다. 투탕카멘이나 단군을 놓고 몇 가지 이야기나 알 수 있을까요? 고구려에서 땅을 넓혔다고 하는 광개토대왕이지만, 막상 이분이 어떤 마음이요 생각이며 사랑인가 하는 대목뿐 아니라, 어떤 말을 들려주었는가 같은 대목도 우리가 오늘날 알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거의 모든 이야기는 생각날개를 펼쳐서 하나하나 그립니다. 먼 옛날에 흐르던 삶을 오늘 이곳에서 되새길 적에는 저마다 다른 생각날개대로 받아들이기 마련입니다.




“우와, 조셉 아저씨네는 잘됐는데, 요한은 안됐네.” “그럴까?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이 생기는 거야. 난 전부 멋진 일이라 생각해.” (38쪽)

‘넌 그림을 그리는 게 신이 내게 주신 재능이라 했지만, 정말 그런지 아닌지 솔직히 난 아직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딱 한 가지, 분명히 깨달은 사실이 있어. 신이 내게 주신 진짜 선물은, 바로 너라는 거야.’ (118∼119쪽)



  만화책 《안녕, 소르시에》는 고흐 형제 가운데 동생이 꾀한 일 때문에 형이 널리 알려지고 사랑받았다는 줄거리를 보여줍니다. 틀리지 않는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화가인 형한테는 늘 동생이 따순 마음으로 지켜 주었기에 붓을 손에 쥘 수 있었습니다. 만화책에 나오는 말처럼, 동생은 형한테 ‘하늘이 내린 재주’가 있다고 여길 만한데, 이와 맞물려 만화책에 나오는 다른 말처럼, 형은 동생이라는 사람(넋, 목숨, 숨결)이야말로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고 여기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그리고, 이 지구별에서 태어나고 죽는 모든 사람은 저마다 ‘하늘이 내린 선물’이고 ‘하늘이 베푼 사랑’이라고 여길 수 있다고 느껴요.


  고흐 그림은 모든 삶을 아름답게 담았다고 생각합니다. 고흐 형제가 바라본 온누리는 저마다 ‘하늘이 내린 선물’과 같고 ‘하늘이 베푼 사랑’으로 이루어졌다고 여길 만했으리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나(내 목숨)도 선물이고 너(네 목숨)도 선물입니다. 나도 사랑이고 너도 사랑입니다. 작은 돌멩이도 선물이자 사랑이요, 우람한 나무도 선물이자 사랑입니다.


  서로서로 선물이면서 사랑이라고 느끼는 자리에서는 미움이나 전쟁이 깃들지 않습니다. 서로서로 사랑이면서 선물이라고 여기는 자리에서는 웃음과 평화가 감돕니다. 서로서로 선물이면서 사랑이 될 때에는, 우리 손에 붓이 들리면 아름다운 그림이 태어나고, 우리 손에 악기가 들리면 아름다운 노래가 태어납니다.


  아직 알려지지 않았으나, 머잖아 고흐 형제처럼 사랑받을 화가나 작가나 사진가가 새롭게 깨어나리라 봅니다. 비록 이 땅에 태어나서 사는 동안 책 몇 권 안 팔리는 작가라 하더라도, 스스로 아름다운 사랑과 꿈으로 한길을 걷는다면, 죽은 뒤에 알려진다고 하더라도 온누리에 두루 아름다운 이야기를 퍼뜨릴 수 있으리라 봅니다. 참도 거짓도 언제까지나 고이 남아서 흐릅니다. 4348.6.22.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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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읽는 책 220] 전쟁무기



  풀 한 포기로 풀내음

  꽃 한 송이로 꽃내음

  전쟁무기로 피비린내



  풀과 나무가 푸른 숨결을 내뿜으면서 우리는 모두 푸르게 물든 바람을 싱그러이 마실 수 있습니다. 전쟁무기로는 그저 전쟁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꽃송이가 피어나며 꽃잔치를 이루고, 전쟁무기로는 그저 군부대만 키워서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시샘하고 괴롭히는 짓만 할 뿐입니다. 4348.6.22.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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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말 손질 359 : 가는 도중


가는 도중에 길가에 있는 늪지대에서 처절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리 호이나키/김병순 옮김-산티아고, 거룩한 바보들의 길》(달팽이,2010) 360쪽


도중(途中)

1. 길을 가는 중간

2. 일이 계속되고 있는 과정이나 일의 중간


 가는 도중에

→ 가다가

→ 가는 길에

→ 길을 가다가

→ 길을 가는데

 …



  ‘도중’이라는 한자말은 “길을 가는 중간”을 뜻합니다. “가는 도중에”나 “길을 가는 도중에”처럼 적으면 겹말입니다. 그런데, 한국말사전을 보면 “학교를 가는 도중에”나 “시청으로 가는 도중에” 같은 보기글이 나옵니다.


 학교를 가는 도중에 → 학교를 가는 길에 / 학교를 가다가

 시청으로 가는 도중에 → 시청으로 가는 길에 / 시청으로 가다가


  그런데 ‘도중’이라는 한자말은 으레 “가는 도중에” 꼴로 쓸 수밖에 없습니다. “학교를 도중에”나 “시청으로 도중에”처럼 쓰지 못해요. 이 한자말을 쓰자면 언제나 겹말 꼴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곰곰이 생각할 노릇입니다. ‘도중’이라는 낱말을 꼭 쓰고 싶다면 겹말 꼴이 되더라도 쓸 노릇이기는 한데, 꼭 이 한자말을 써야 하는가를 돌아보아야지 싶습니다. “가는 길에”나 “가다가” 꼴로만 쓰면 넉넉한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4348.6.22.달.ㅅㄴㄹ



* 보기글 새로 쓰기

가다가 길가에 있는 늪에서 애처롭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늪지대(-地帶)’는 ‘늪’이나 ‘늪 둘레’로 손질하고, ‘처절(悽絶)하게’는 ‘애처롭게’나 ‘끔찍하게’로 손질합니다.


..


겹말 손질 360 : 삼세번


교정과 교열을 보는 일도 그렇다. 기본으로 삼세번을 보고도 만족스럽지 못하면 네 번, 다섯 번도 봐야 한다

《김정선-동사의 맛》(유유,2015) 46쪽


삼세번(三-番) : 더도 덜도 없이 꼭 세 번

삼세판(三-) : 더도 덜도 없이 꼭 세 판


삼세번을 보고도

→ 세 번을 보고도

→ 세 번이나 보고도

→ 세 번씩 보고도

→ 세 번씩이나 보고도

 …



  한겨레는 셋이라는 숫자를 몹시 크게 여깁니다. 아주 뜻깊은 숫자요, 매우 사랑하는 숫자입니다. 이러다 보니, ‘삼세번’이나 ‘삼세판’처럼 ‘三’이라는 한자하고 ‘세(셋)’라는 한국말을 나란히 적는 겹말을 널리 쓰지 싶습니다.


  ‘삼세번·삼세판’은 틀림없이 겹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마디를 겹말로 여겨서 손질하거나 걸러내려고 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겹말인 줄 알면서 일부러 겹말로 쓴다고까지 할 만한 말마디입니다.


  힘주어 말하려고 한다면 “꼭 세 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씩”이나 “세 번이나”이나 “세 번만”처럼 쓸 수 있습니다. 한겨레는 어떤 뜻을 힘주어서 밝히려고 할 적에 토씨를 다르게 붙이거나 꾸밈말을 앞에 붙입니다.


 우리 삼세번으로 끝내자 → 우리 꼭 세 번으로 끝내자

 삼세번에 득한다는 옛말 → 꼭 세 번에 얻는다는 옛말

 가위바위보 삼세판으로 → 가위바위보 세 판으로


 ‘삼세번’은 한자가 이 나라에 들어온 뒤에 비로소 생긴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말투는 한자가 여느 사람들 삶터까지 두루 퍼진 뒤에야 쓰였습니다. 한겨레가 ‘셋’을 크게 여기거나 몹시 사랑했으면 ‘셋’이라는 낱말을 썼지, 이를 굳이 다른 말로 나타낼 일은 없습니다. 한자를 쓰던 양반이라면 1500년대나 1800년대에 이런 말투를 썼을는지 모르지만, 시골에서 흙을 만지던 수많은 여느 사람이라면 1800년대뿐 아니라 1900년대 첫무렵에도 이런 말투를 쓸 일이 없었다고 느낍니다.


  아무튼, 이 말마디를 그대로 쓰려 한다면 그대로 쓰되, ‘세 번’을 힘주어 나타내는 말마디를 골고루 헤아릴 수 있기를 빕니다. 4348.6.22.달.ㅅㄴㄹ



* 보기글 새로 쓰기

교정과 교열을 보는 일도 그렇다. 적어도 세 번씩 보고도 마음에 차지 못하면 네 번, 다섯 번도 봐야 한다


‘기본(基本)으로’는 ‘적어도’로 손질하고, ‘만족(滿足)스럽지’는 ‘마음에 차지’로 손질합니다.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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